어제(10/21) 느티나무에서는 [자녀와 부모가 함께 행복해지는 길] 세번째 강의가 있었습니다. 김찬호 선생님이 강의해주신 주제는 '소통의 어려움과 즐거움'이었습니다. 우리가 일상속에서 가족간에 나누는 대화를 돌아보며, 왜 소통이 어려운지, 소통을 가로막는 장애물은 무엇인지, 소통의 기술을 넘어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하는지에 대해서 함께 이야기 나누는 시간이었습니다.
짧은 시간의 강의와 나눔만으로 소통의 문제가 해결될 수는 없지요 김찬호 선생님께서 소통과 관련해서 추천하신 두 권의 책을 아래에 소개합니다. <비폭력 대화>를 우선 추천해 주셨습니다만, <대화의 심리학>의 경우에는 업무나 협상과 관련한 소통에 있어서도 많은 도움이 될 수 있는 책입니다.
6.2지방선거를 통해 복지는 정치적 화두로 떠올랐고, 그 이후 복지국가에 대한 다양한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시점에서 민주주의와 진보, 한국사회의 바람직한 발전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복지국가란 무엇인가라'는 상을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물론 복지국가는 어떤 사회에서 살아가는 것과 결부되는 문제이기 때문에 진보의 것만은 아니고, 보수의 것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복지국가에 대한 논의가 더욱 필요하다. 이러한 취지에서 참여연대 사회복지위원회는 ‘시민, 복지국가를 꿈꾸다’라는 주제로 6주간 복지국가 강좌를 준비했고, 그 첫 번째 시간으로 인하대학교 윤홍식 교수가 '보편주의 복지국가'를 주제로 강연을 진행하였다.
강연의 시작부분에서 복지국가의 역할이 확대되는 과정에 대한 설명이 있었다. 1, 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 이후 초기 복지국가의 모습은 노동시장에서 발생하는 사회적 위험에 대응하는 것에 초점을 두었다면, 1970년대 이후 오일쇼크, 산업구조의 변화를 거치면서 여성의 노동시장 참여가 이루어지고, 여성이 가지고 있던 돌봄의 기능에 대해서도 국가가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즉, 과거에는 자본과 남성의 타협만이 주된 관심이었지만, 70년대 이후는 남성과 여성, 여성과 자본의 관계를 어떻게 타협할지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이를 통해 복지국가의 관점이 확대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이러한 새로운 사회적 위험에 대해서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있다. 서구의 경우와 다르게 우리나라의 경우 두 가지 위험이 동시에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복지국가가 나타나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6.2 지방선거에서 무상급식을 필두로 복지가 쟁점이 된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물론 이것은 보편주의 복지국가를 실현하자는 것이 아니라, 온정주의적 정서가 작용했다고 봐야한다. 여전히 사람들은 보편주의가 무엇인지 잘 모른다. 하지만 무상급식의 문제가 보편주의 복지국가로 가는 하나의 돌파구일 수 있는 것이다. 이 한 가지 사안이 큰 효과를 보여준다면 보편주의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달라질 것이라는 기대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보편주의 복지국가는 무엇일까? 이 강연에서 보편주의에 대한 개념과 쟁점에 대해서 잘 알 수 있었다. 보편주의의 개념에 대해 윤홍식 교수는 상대적으로 광범위한 인구를 포괄하는 정책이고, 고정된 정책이 아니라 포괄하는 대상범위에 따라서 연속선상 어딘가에 위치하는 것이라고 보면 된다고 했다. ‘있다, 없다’의 문제가 아니라 수준의 문제이고, 여과장치를 가지고 있는 선별적인 것인 것이다.
또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보편주의와 선별주의를 대립적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에 대해 선별주의는 보편주의를 보완하는 것이라고 했다. 시민들이 모두 똑같은 욕구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다양성을 인정하고 반영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보편주의가 실제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선별주의가 필요하다고 했다. 오히려 잔여주의(자산조사에 의해서 기반한 선별주의)가 보편주의의 반대되는 개념이며, 잔여주의는 반대할 수 있지만, 선별주의를 반대할 수 없다고 했다. 선별주의를 반대하는 것은 시민들의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설명을 들으면서 보편주의 복지국가라는 막연한 개념에 대해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이상적인 보편주의가 아니라 현실적 상황에 따라 변할 수 있는 상대적 개념이라는 것과 단순히 보편주의만을 주장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보편주의라는 개념에 시민의 다양성과 이해관계를 풀어내는 것이 중요한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강의에서는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도 설명이 이루어졌다. 복지는 진보 혹은 사민주의의 전유물이 아니라, 보수의 것이기도 하고, 심지어 파시즘에서 조차 중요한 정책이었다는 것이다. 오히려 과거에는 사민주의 정당이 지금의 보수에서 주장하는 것과 같은 논리로 보편주의를 반대하기도 했다. 하지만 보편주의 복지를 반대했던 사민주의 정당도 정권장악을 위해서는 결국 다른 계급들의 동의가 필요했고, 이질적인 계급간의 연대가 이루어지면서 보편주의가 가능해진 것이다.
하지만 서구와 한국의 상황은 다르다. 초기 서구의 보편주의는 완전고용을 전제로 하였다. 그러나 지금의 한국은 그것이 불가능한 상황이다. 그렇다면 완전고용이 없는 상황에서 어떤 복지국가를 꿈꿔야 할 것인가를 고민해 보아야한다. 즉, 소득보장을 넘어서서 비정규직, 자영업자, 노동시장 비참여자의 욕구를 모두 담아내기 위해서는 어떠한 연대를 이루어 내야 할 것인지를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연대라는 것은 내가 가진 자유를 내놓는다는 것이 어느정도 수준이 될지도 논의되어야 한다.
보편적인 복지국가를 만드는 것이 쉽지만은 않을 것 같다. 다양한 집단의 이해를 포괄적으로 수용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라는 것은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어떤 모임에 가도 사람들이 각기 이해가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이 보편적의 복지국가로 가기 위해서는 이 문제만 해결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아직 해결해야 할 문제가 너무나 많았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증세의 문제였다.
보편주의 복지국가는 조세제도의 개혁(증세) 없이는 불가능하다. 감세와 복지확대는 같이 갈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한 수강생의 질문에서도 나왔지만 증세에 대해 시민들의 반감이 큰 것이 사실이다. 이에 대해 윤홍식 교수는 중요한 것은 국가에 대한 신뢰라고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 매우 낮은 수준인 국민의 신뢰도를 높이기 위해서 선복지확대 후증세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국민들로 하여금 보편주의 복지국가의 장점을 보여준 다음에 그에 동의하면 증세가 가능할 것이라는 이야기다. 그리고 증세 없이는 복지도 없다는 것은 중요한 원칙이며, 감세와 복지확대를 같이 말하는 것은 믿어서는 안 될 것이라고 했다.
이 밖에도 소득보장 중심에서 벗어나서 상품화, 일자리문제, 돌봄노동 등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 중산층의 욕구를 반영하면서 저소득층을 포괄할 정책은 어떻게 구상할지, 공적부문과 민간부문을 어떻게 조화할지 등 아직까지 보편적인 복지국가로 가기 위해 논의하고 해결해야 할 문제들은 너무나 많았다. 하지만 윤홍식 교수가 말했듯이 보편주의 복지국가는 아직 누구도 걸어가지 않은 길이었기 때문에 실패해도 좌절하지 않고 계속해서 도전해 나가야 한다. 인내심을 가지고 중장기적인 관점하에, 당장의 합의가 아니라 실천적 경험을 통한 '연대'를 해야 한다.
보편주의 복지국가를 하자는 것은 시민들이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모든 사람에게 기회의 평등과 결과의 평등을 주는 것이 보편주의 복지국가의 힘이다. 너무 조급하면 안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조금 더 멀리 희망을 가지고 본다면 보편적인 복지국가가 실현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언젠가는 누구나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세상이 꼭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10월 13일 ‘디자인, 사회를 바꾸다’ 강좌의 마지막 강의(한국 도시디자인과 정체성) 후기는 임재홍 자원활동가가 작성했습니다. - 느티나무
김민수 교수는 도시를 디자인 한다는 것은 문화와 상징 사이의 변증법적 관계를 통찰하고 해석함으로써 삶을 약속하는 일이라고 정의했다. 이어 그는 “우리의 도시이미지는 역사와 문화를 가꿔나가는 의식이 결여되어 끊임없는 건설과 공사판 만들기의 토건국가식 개발정책이 만들어낸 산물이며, 지속가능하게 가꿔나가는 삶보다는 볼거리 위주의 개발과 전시행정, 부동산투기를 위해 끝없이 변경되는 공사판 속의 삶과 욕망이 만든 도시풍경의 미학적 특징을 갖는다”고 설명했다.
이러한 모습으로 불연속적이고 덧없는 희극적 키치도시가 되고 있으며, 급조된 도시이미지는 인스턴트적인 컵라면과 같은 즉각적 만족을 위한 불연속의 미학이라는 것이다. 한국에서 도시정체성의 문제는 다름 아닌 각각의 도시만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특성을 무시한데 있다. 따라서 이러한 도시들마다의 고유한 역사성을 살리는 도시디자인이 절실하다.
새로운 것은 더욱 새롭게, 오래된 것은 오래된 대로 가꿔나갈 때 도시의 새로움이 빛을 발하게 되며, 그것이 구도시와 신도시가 공존하는 길이다. 도시의 ‘시간의 켜’를 느낄 수 있는 살아 숨 쉬는 그런 도시 말이다.
강의 말미에 김민수 교수는 5주차 강의로 그동안 디자인에 대한 잘못된 시선의 재조정, 치유, 재맥락화에 대한 공감이 이루어졌던 시간이었기를 바란다는 말로 강의를 마쳤다.
마지막 강의 이후 뒷풀이
기다림과 즐거움의 시간이 오늘의 마지막 강의로 많은 아쉬움을 남긴 채 끝이 났다. 그렇게 강의는 끝이 났지만 무언가 새로 시작되는 느낌이 드는 것은 아마도 디자인에 대한 관점이 조금은 달라졌기 때문일 것이다. 관심이 없었던, 어쩌면 당연하게 느꼈던 눈앞에 펼쳐진 모든 것들에 미안한 마음을 그리고 호기심 어린 눈을 찾아주신 김민수 교수께 감사드린다.
오는 11월 13일은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치며 자신의 몸에 스스로 불을 붙인 고 전태일 열사의 40주기가 되는 날입니다. 참여연대 노동사회위원회와 아카데미 느티나무는 40년이 흐른 2010년 오늘, 전태일을 다시금 생각해보는 강연과 답사 프로그램을 마련하였습니다.
지난 주 김남근 변호사의 첫 강의에 이어 이번 주 2강은 「부동산 계급사회」의 저자이신 손낙구 강연자를 만나는 자리였다. 강의 주제는 ‘대한민국은 부동산 계급사회다’ 였는데, 한국사회의 부동산으로 인한 경제적 사회적 문제점들을 계급적으로 다루어보고 또한 주요 통계들을 살펴보는 식으로 진행되었다. 대부분의 내용이 내 피부에 와 닿는 얘기들이라 그런지 자연스레 내가 어릴 때 살던 집이 생각났다.
어렸을 때 난 단독주택 반지하 셋방에 살았다. 어리기도 했었고 그때부터 나빴던 기억력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집에서의 기억은 하나밖에 없다. 시끄럽게 집 마당을 뛰어다니는 나 때문에 연신 허리를 숙여가며 사과를 하던 어머니의 모습.
일곱 살이 되던 해에 우리 네 식구는 방 두 칸짜리 아파트를 사서 이사했다. 처음 봐서 너무 신기했던 엘리베이터, 하지만 엘리베이터를 탈 필요가 없는 1층이라는 게 속상하긴 했지만 아무리 뛰어놀아도 뭐라고 할 사람 없는 진짜 우리 집이 생겨서 너무 좋았다. 한동안 밥만 먹으면 동생이랑 집을 나와서 다음 밥 먹을 시간이 될 때까지 엘리베이터를 타고 놀았는데 그것도 금방 질렸다. 역시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집이 최고였다.
난 아직도 그 집에 살고 있다. 7살 때는 운동장 같던 집이 스물아홉이 된 지금은 그렇게 좁을 수가 없다. 이사를 가고 싶지만 주변엔 평수를 늘려서 갈 곳이 없다. 22년이란 시간동안 집값은 10배가 넘게 올랐지만 다른 곳도 마찬가지라 소용이 없다. 7살 때 천만 원만 더 보태면 옮길 수 있던 집이 이제는 3억 이상을 더 줘야 갈 수 있단다. 전에는 꿈이라도 꿀 수 있었지만 지금은 더 이상 꿈 꿀 수 없는 집이 되어버렸다. 자산이라고는 지금 살고 있는 집이 전부인데 집값은 계속 오르니 전세로 옮겼다간 전에 살던 집마저도 가질 수 없게 될까 두려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다.
그래도 아버지는 당신 소유의 집이 있으니 행복한 사람이다. 손낙구 강연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난 지금까지 아버지 덕에 '6계급'에서 '2계급'으로의 승급해서 호화스런 생활을 해왔지만 결혼을 하고 독립을 하게 되면 다시 '6계급'으로 강등되는 도시빈민의 삶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너무 겁이 난다. 행복하기 위해서 결혼 하는 것일 텐데 결혼이 행복을 생각나게 하기 이전에 이리 저리 옮겨 다니며 뿌리 없는 삶을 살고 있는 내 모습, 마치 쓸개에 튜브가 꼽혀 죽을 때까지 쓸개즙을 빼앗기는 곰처럼, 돈을 버는 족족 제대로 써보지도 못하고 고스란히 집을 마련하는 데 올인해야 할 상황들 앞에 놓인 내가 가엾어지기까지 했다.
그래서 더 강연이 기다려졌는지 모르겠다. 당연히 그럴 수 없다는 걸 잘 알지만 마음의 위안이라도 삼게 거짓말로라도 내게 명쾌한 해답을 줄 수 있기를 기대했었다. 내게 부동산 문제는 답이 보이지 않는, 풀 수 없는 문제로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현 가능성 여부를 떠나 손낙구 강연자가 제시하는 대안인 계급별 맞춤형 주택정책이나 점진적 택지국유화를 통한 공공주택 공급 등을 들으니 공감이 가면서 조금은 위안이 된다.
그러나 사실 강연 후에도 여전히 마음은 무겁다. 당신이 살고 있는 집이 재건축 대상이 되어 집값이 오르길 바라면서도 한편으론 세 들어 장사하던 가게 주변이 재개발이 되어 보증금도 못 받고 쫓겨나 이리저리 시위하러 다녔던 우리 어머니처럼, 부동산 문제는 부동산 5적(건설재벌)이 구조화되어 있는 것 뿐만 아니라 일반 국민들의 이해관계 또한 복잡하게 얽혀 있어 더욱 더 해법을 찾기가 쉽지 않다는 점 때문이다.
내가 아버지가 될 때, 22년 전 우리 어머니처럼 집주인에게 연신 허리를 숙이는 모습이 재연 되는 일이 없기를, SH공사 광고 문구처럼 더 이상 집이 사는 것이 아닌 사는 곳이 되기를, 지금까지 내 걱정이 기우이기를 희망해 본다.
1강 부동산 덫에 걸린 한국사회와 시민운동 2009년은 하룻밤새 여섯 생명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용산참사로부터 출발했다. 그러나 그 여섯 죽음은 한국사회가 안고 있는 부동산 문제라는 빙산의 상징적 정점일 뿐이다. 2006년 전국을 강타한 뉴타운․재개발 열풍은 불과 2년도 지나지 않아 문제점을 드러냈고 그 열기마저 식은 지금은 한국사회 전체를 침몰시킬 수도 있는 덫이 될 수도 있다는 공포감마저 퍼지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2010 참여연대 부동산강좌는 늦은 감이 없지 않지만 꼭 필요한 강좌다. 그 첫 강의를 참여연대 민생희망본부장인 김남근 변호사와 함께 했다.
이번 강의는 10개의 부동산 관련 쟁점과 그에 따른 3~4개의 유제로 이어진 질문들을 가지고 토론 및 이야기하는 형식으로 이어졌다. 현재 부동산과 관려된 많은 논쟁들을 집약시켜 놓다보니 워낙 광범위해서 아쉽게도 한정된 시간 안에 모두 내용을 다루기는 어려운 부분이 있었다.
김남근 민생희망본부장
한국의 법․경제 질서에도 부합한 ‘토지정의’
이번 강의를 들으며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토지공개념 도입이 그 자체로 헌법에 위배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토지공개념 3법인 ‘토지초과이득세법’이나 ‘택지소유상한에 관한 법률’이나 ‘개발이익환수에 관한 법률’이 보수언론이 선전하는 대로 대한민국 헌법을 위배하거나 자본주의 경제 근간을 뒤흔들겠다는 불온한 발언이 아니라 세계 어느 나라에서나 대체로 시행되고 있고 세부적인 부분에 조금씩 수정이 필요할지 모르지만 오히려 건강한 경제 질서를 위해 꼭 필요한 개념들이라는 사실이었다.
대한민국 기득권의 대부분이 토지로 인한 불로소득과 특권을 누린 계층이다 보니 토지에 대한 조그만 제한조차 격렬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듯 하다. 지금까지 토지정의를 둘러싼 담론이 왜곡되어, 건전한 토론들이 너무 왜곡되어 온 것은 아닌지 생각도 들었다. 토지재산의 특성과 헌법의 재산권의 사회적 귀속성에 대한 설명과 함께 토지공개념 3법의 역사를 추적하는 것은 좋은 공부가 되었다.
투기 억제의 진짜약과 가짜약
이번 강의에서는 투기를 억제하기 위한 주택공급정책, 세금정책, 금융정책들을 두루 살펴보며 효과 있는 정책과 거의 효과를 보지 못한 정책 등이 소개되었다. DTI와 LTV, 양도소득세와 토지보유세 그리고 논란 많았던 분양가상한제의 효과 여부 등 각종 부동산 정책이 끼친 영향을 굵직굵직하게 검토해 보았다. 흥미로우면서도 또한 우울한 사실은 정부가 투기억제에 효과를 많이 거둔 정책보다는 효과를 보지 못한 정책에 치중하고, 그나마 효과 없는(부족한) 정책마저도 실천할 의지가 희박해 보인다는 사실이다.
특히 최근에 정부가 발표한 8.29 부동산 대책에서는 DTI를 한시적이나마 전면 해제되었다. 미국에서는 ‘약탈적 대출’이라서 엄격히 금지하는 정책이 국내에서는 오히려 정부가 나서서 해제하고 국민들에게 빚을 내서 집을 사도록 부추기는 것은 정말 납득하기 힘들다.
뉴타운․재개발 환상과 거짓에 기초한 사업
뉴타운․재개발에 대한 환상이 깨진 것은 조금 됐지만 이번 시간에는 그중에서 뉴타운․재개발 사업의 근거가 되었던 도시및주거환경정비법, 도시개발법 등에 대한 불법, 편법운용과 관련한 이야기도 나눴다.
김남근 본부장은 재개발 사업의 문제점을 정확하게 짚어 주었다. 재개발의 원래 목적은 열악한 주거환경에 있는 서민들의 주거환경 개선을 위함이다. 하지만 정부와 서울시가 추진하려고 하는 강북을 강남으로 만들겠다는 발상은 결국엔 재개발을 통해 그곳에서 살던 사람이 중산층으로 올라가던가 아니면 원주민들이 쫓겨나면서 그 곳에 사는 사람들이 바뀌어야 하는 두 가지 선택지밖에 없게 된다. 김남근 본부장은 대안적 재개발 방식으로 ▲ 공공의 단계적 지원을 통해 도로, 학교, 공원 등의 기반 정비가 이뤄지고, 주민은 자기 집의 일부를 고치는 식으로 나가야 한다고 했다. ▲ 또한 처음부터 사업 비용 등을 정확히 공개해야 한다고 했다. 이는 너무나 당연한 행정절차인데도 제대로 되지 못했던 부분이다. 많은 주민들이 뉴타운 재개발 바람에 휩쓸려 도대체 수억이 들지도 모를 사업에 함부로 끼어들었던 그 많은 사례들을 생각하면 순간 아찔해진다.
이렇듯 개발의 필요성을 부인할 수는 없지만 현재의 뉴타운․재개발 사업은 모든 면에서 무리한 사업이라는 것을 스스로 편법 운용을 통해 반증하고 있는 듯 했다. 이제 막연한 환상에 근거해 무모하게 사업을 밀어붙이는 식은 지양되어야만 한다.
1강 부동산 덫에 걸린 한국사회와 시민운동
환상을 넘어 진실을 직시해야 한다.
투기의 열풍 뒤에는 진실과 맞대하는 충격을 피할 수 없다. 더 오랫동안 환상을 붙잡고 있을수록 그 충격은 크고 아플 수밖에 없다. 또한 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면 막연한 공포에 휩쓸릴 수밖에 없다. 일본을 20년 불황에 몰아넣은 부동산 버블도, 미국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도 투기의 환상이 그리고 그에 비례해 닥쳐온 공포가 사태해결을 더욱 어렵게 하고 고통을 더욱 크게 만들었다.
인정하기 싫어도 진실을 인정하는 것만이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대안이고 방법이다. 정책입안자도 투기의 당사자도 투기의 피해자도 현재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이 최선인가를 가감없이 바라보고 답을 찾아야 한다. 비록 조금 늦은 것 같지만 언제나 그렇듯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행동하기엔 가장 빠른 때이다.
한편으론 김남근 본부장이 진행한 이번 강의가 첫 강보다는 마무리 강의였으면 더 좋았겠다는 아쉬움도 있다. 전 강의를 듣고 난 후 통합하고 마무리하는 의미에서 자리 했다면 보다 많은 논의가 오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다. 이후에라도 강좌를 같이하는 분들과 뒤풀이 자리 겸 토론회를 갖는다면 흥미로울 시간이 될 것 같다.
끝나지 않은 세계경제위기와 G20 (강사: 홍기빈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소장) 현재 한국은 11월에 있을 G20 정상회의로 소란스럽다. 정부에서는 G20이 국가 올림픽마냥 국격을 높이는 계기라고 홍보하고 있고, 일정에 맞춰 도심 안전 시스템을 재정비하기 바쁘다. 그런데 과연 G20은 무엇일까? 우리는 그 실체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이러한 의문을 가진 시민들을 위해 참여연대에서는 ‘G20 톺아보기’ 시민강좌를 마련했다. 그리고 오늘은 그 첫 번째 마당으로 홍기빈 강사의 ‘끝나지 않은 세계경제위기와 G20'라는 주제로 강의가 진행되었다.
현재 우리 나라의 경우 G20에 대한 태도는 ‘G20 만세’ ‘G20 때려잡자’ ‘관심없다’ 크게 이 세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이번 강의를 통해 이 세가지 태도를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G20 만세’의 경우는 G20의 실효성에 대한 고찰없이 정부의 홍보를 무조건적으로 수용하는 태도다. 그와는 반대로 무조건 ‘G20 때려잡자’는 주장 역시 G20이 형성된지 2년밖에 안되어서 이렇다 할 행적이 없는 G20을 무조건적으로 비난하는 것 역시 적절하지 않다. 아울러, ‘관심없다’는 관점은 현재 한국 사회에 팽배한 ‘무관심=쿨함=멋짐’의 이상한 논리와 맥을 같이하는, 정치적 시민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방기하는 무책임한 태도이다. 그렇다면 ‘G20에 대처하는 우리들의 자세는?’ 여기에 대해서 홍기빈 강사는 ‘개입’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끝까지 개입해 보고 안되면 그 때 그만둬도 됨을, 그러므로 지금의 상황에서는 앞 선 세 가지 태도 모두 지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서두를 통해 G20을 대하는 우리들의 자세를 교정하게 되었다. 뭔가 콩고물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니 올림픽 마냥 좋아할 필요도 없고, 지배계급의 모임이라면서 분노의 반대를 할 필요도 없으며, 나아가 난 그런 거 관심 없다면서 토익 공부만 해서도 안 됨을 알았다. 그런데 뭔가 허전하다. 그래, 그래서 G20이 대체 뭔데?
G20에 대해 알기 위해서는 세계 경제적 흐름에 대해 간략하게나마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1970년대 세계 금융체제와 재정체제는 미국이 환율을 정하는 ‘고정 환율제’를 채택하면서 그 전제로 국가 간에는 자유로운 자본의 이동이 없음을 명시하였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미국이 더 이상 고정 환율을 유지할 수 없게 되면서 기존의 체제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는 결국 스태그플레이션 현상을 유발하였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70년 대 후반에는 사적 은행이 자금을 융통하게 되면서 국가 간 자본에 대한 규제가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980년대 금융체제를 국가적으로 관리할 수가 없게 되면서 자본을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에 맡기기로 한다. 가능한 한 규제를 풀고 수요와 공급에 의한 균형을 토대로 시장의 자율성에 무한한 신뢰를 부여하게 된 것이다. 특히 부자에 대한 감세를 주장하였는데 그 근거로 감세를 통해서 투자를 확대하면 이를 통해 부의 순환이 더 원활함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자본의 자유시장 경제 모델을 맹신한 채 20여 년이 흐른 오늘 날, 역사적으로 유래가 없는 경제 위기가 발생하고 있다. 바로 금융위기와 재정위기가 동시 다발적으로 지구상의 여러 국가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G20 정상회의는 세계 각국의 정상들이 기존의 경제 모델에 대해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새로운 대안적 모델을 제시하기 위한 자리로서 의미가 크다.
그렇지만, 2009년 런던 정상회의를 시작으로 한 G20 정상회의는 2010년 6월에 있었던 토론토 회의에 이르러서는 ‘G20 leaders agree to disagree. 합의하지 않기로 합의하다’라는 맥빠지는 결론을 내렸다. 금융개혁골격을 마련해야 하는 자리에서, 금융위기의 해결은 각 국가가 알아서 하자고 결론을 내리다니.... 이처럼 확고한 해결책 하나 세우지 못한 상황에서 오는 11월 한국에서 G20 정상회의를 개최하게 된 것이다. 더욱이 그리스 경제 위기를 통해 새로운 경제 모델에 대한 대안이 긴요해진 시점에서, 한국 정상회의는 앞으로의 한국 경제 모델에도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 그래서 더욱 주의깊게 관심을 가져야 한다.
이쯤되니 G20이 나와 동떨어진, 관심 갖지 않아도 되는 고위 간부들의 간단한 회담은 아니라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결국 우리가 해야 할 일은, G20 이 지구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 기존의 ‘신자유주의 경제 모델’을 비판적으로 검토할 것을 요청하면서 새로운 대안적 모델을 제시하기를 촉구하는 것이 아닐까. 더 이상 ‘보이지 않는 손’에 의지하지 않고, 우리들의 목소리로 ‘보이는 손’으로 규제를 하라고 요청하고, 부자에 대한 증세를 통해 국가재정을 확보하도록 촉구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더불어 지금껏 전문가의 영역으로 넘겨왔던 금융과 재정의 문제를 시민들 스스로가 더 많은 논의와 연구를 통해 새로운 모델을 제시해보는 것 역시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아직, G20에 대해서 뚜렷한 감은 잡히지 않는다. 그렇지만 5주 간의 강의를 다 듣게 된다면, 하나 둘 더욱 명료하게 G20의 실체를 파악하게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어려운 경제용어가 많아서 머리가 지끈거리기도 했지만, G20에 대해 보다 더 진지하게 고찰해 볼 수 있었던 계기가 된 홍기빈 강사님의 강좌에 기립박수를 보내며-.
두번째 G20강좌 G20: 기대와 우려, 가능성과 한계 한국 지구촌빈곤퇴치 시민네트워크(GCAP-Korea) G20 실무분과 의장이자 참여연대 국제연대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는, 이성훈 한국인권재단 상임이사를 모시고 G20 정상회의를 국제정치적 관점으로 이해하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지난 목요일(9월 2일) 느티나무 가을 강좌가 본격적으로 시작됐습니다. 그 첫 마당은 <삶과 문화가 있는 맥주 이야기> 입니다. 1강에는 <나의 맥주이야기>를 주제로 푸르메 재단 백경학 이사님과 수강생들이 함께 맥주에 관련된 즐거운 수다를 나눴습니다.
즐거운 분위기에서 진행된 맥주 강좌
첫 대화 주제 : "맥주는 나에게 [ ]이다." ' 추억','친구','한 여름밤의 시원한 맛' 등 다양한 대답이 나왔습니다. 한 수강생이 이야기한 의외의 대답이 있습니다. 바로 "바나나" 맥주와 바나나가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바나나맛 맥주일까요? 생각만 해도.. -_-;) "나이가 많지는 않지만.."이라고 운을 띄운 수강생은 "지금은 바나나를 싸고 쉽게 먹을 수 있지만, 어렸을 때 바나나는 비싸서 쉽게 먹을 수 없었다. 처음 술을 접하게 된 대학 입학 때 선배들이 비싸다고 맥주를 안사주고 소주만 사줬다."라고 옛 추억을 떠올리며 바나나와 맥주의 관계를 설명해 주셨습니다.
나의 맥주 이야기 : 푸르메 재단 백경학 상임이사 1부에서 백경학 상임이사님은 본인이 맥주와 관계를 맺게 된 이야기를 짧게 들려주셨습니다. 이사님은 독일에서 아내가 불의의 사고를 당하면서 장애를 갖게 되고, 이때 겪었던 어려움 때문에 장애인을 위한 재활병원을 만들기로 결심하게 됐습니다. 병원을 만들기 위한 재단 설립을 위해 하우스 맥주집으로 지금은 너무나 유명해진 "옥토버 훼스트"를 만들고 이를 기반으로 "푸르메 재단"이 만들어졌습니다. 소외되고 약한자를 위한 선생님의 진솔한 이야기가 마음에 남는 시간이었습니다.
푸르메 재단 백경학 상임이사
거품 : Krone를 아시나요 2부에는 본격적으로 맥주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보통 맥주집에 가면 "거품 빼고 가득주세요"라는 이야기를 쉽게 들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맥주를 잘 모르시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독일에서 맥주 거품은 krone라고 합니다. 영어의 크라운(crown), 즉 왕관입니다. 맥주잔의 70% 정도는 맥주로 채우고 나머지 30%는 거품을 채웁니다. 이사님은 "맥주는 눈으로 색을 즐기고, 코로 향을 맡고, 입으로 맛을 음미하는 것입니다"라고 이야기 해 주셨습니다. 맥주 양이 조금 줄어들기는 하겠지만 다음부터는 꼭 거품과 함께 맥주를 음미해 봐야겠습니다.
이외에도 맥주의 본고장 독일에서 맥주가 가지는 의미, 역사와 제조과정 등을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맥주에 대해 알고나니, 물처럼 벌컥 벌컥 마시거나, 다른 음료(?)와 섞어 마시는 것도 다시 생각해 보게 됐습니다. 앞으로는 '맥주에 대한 예의'를 가지고 눈, 코, 잎으로 즐겨봐야 겠습니다.
맥주 강좌는 9월 9일과 9월 16일 두번의 강좌가 더 남았습니다. 2강에는 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 조관연 교수님이 <유럽문화 속의 맥주>를 3강에는 전 한겨레신문 문화부장으로 <술꾼의 품격>의 저자 임범 선생님과 함께 진행됩니다. 맥주에 대한 여러 이야기와 맥주를 좋아하는 사람들과의 유쾌한 대화를 원하시는 분은 지금이라도 오셔도 됩니다.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과 참여를 기대합니다. 문의 02-723-0580 김민수 간사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했던가. 한국의 냉전적 사고, ‘좌파’낙인 등 현재 한국사회의 부조리를 만날 때마다 들었던 의문은 “우리나라는 대체 언제부터 이랬던 거야?”였다. 숨막히는 경쟁을 해야 하는 지금에는 외환위기라는 과거가 있었고, 부패와 기만의 정치 너머에는 청산되지 못한 역사가 있었다. 천안함 사고로 전작권 환수를 연기해야한다는 극우들의 외침에는 ‘한국전쟁’이 자리하고 있음을 4번째 강의에서 깨달았다.
김동춘 교수
한국전쟁은 남과 북만의 전쟁이 아닌 동아시아 전쟁
4번째 강사로 나선 김동춘 교수는 천안함 사고와 관련한 일본의 후텐마기지 문제 해결이 우연인 듯하지만 국제적으로 보면 같은 문제라고 했다. 후텐마기지는 대만을 보호하면서 중국을 견제하고 동아시아에 미국의 영향력을 유지, 확대할 수 있는 곳이다. 후텐마기지문제가 일본사회에 대두되면서 하토야마 전 총리가 기지이전을 약속했기 때문에 민주당이 정권을 교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전을 반대하는 미국과 협상이 지연되면서 지지율은 곤두박질 쳤고 때마침 천안함 사고가 발생하면서 이전문제가 없던 일로 결론이 났다. 비록 우연의 일치일지라도 천안함 사고가 북한어뢰로 판명나면서 후텐마기지문제까지 해결되어버린 것은 국제적인 외교문제로 볼 때 ‘미국의 영향력’면에서 같은 문제라는 것이다.
김 교수는 “한국전쟁 역시 국제적으로 보면 남과 북만의 내전이 아닌 미국, 소련, 중국 등이 가세한 동아시아 전쟁”이라고 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전쟁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이다. 오늘날까지 우리 삶에 영향을 미치는 한국전쟁을 어떻게 살아있는 역사로 기억하는가”이다. 그것만이 오늘과 같은 천안함의 현실을 냉정하게 바라보고 같은 비극을 반복하지 않는 방법일 것이다.
먼저 김교수는 한국전쟁에 참여한 국가들이 전쟁 후 어떤 것을 잃고 얻었는지 설명했다. “결과적으로 북한이 러시아, 중국 먼저 의견조율한 것은 맞지만 먼저 내려온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미국, 중국, 소련, 일본 등 결과적으로 이득을 얻었다. 최대 수혜자는 경제적 부흥을 할 수 있었던 일본이고 정치적으로 영향력을 확대한 미국, 중국도 막 혁명을 마친 국가가 미국과 대등한 전쟁을 했다는 면에서 국제적으로 각인되었으니 나름대로 혜택을 얻었다” 일본이 기지국가라고 불린 것도 ‘한국전쟁’ 때문이었다. 일본은 한국전쟁 3년 동안 미국의 무지를 제조하고 물자조달을 하면서 비약적으로 경제성장을 했다. 한마디로 전후 패망으로 힘들었던 일본에게 한국전쟁은 “신이 내린 전쟁”이었다.
김동춘 교수
전쟁의 명분은 정치적 득실
하지만 미국이 한국전쟁으로 이익을 얻었다는 말은 생소하다. 미국은 남한을 위해 북한과 싸워준 고마운 우국이 아니었던가. 도와주기만 했다는 생각은 순진한 착각이었다. 김 교수는 “미국이 무엇을 얻었는지 한국사회에서는 거의 거론하지 않는다. 하지만 미국은 한국전쟁 후 주가가 폭등했다, 45~9년에 경기침체를 겪으며 실업률이 증가하고 문제점이 대두됐었는데 한국전쟁이 호재가 됐다. 메카시즘도 50년 1월 한국전쟁 후 부활하면서 당시 미국공산당, 미국노동계(당시 전체 노동자의 30%를 차지하면서 세력이 강했다고 함)를 일거에 없애버렸다. 미국의 진보세력이 루스벨트가 있던 30년대부터 강해지다 한국전쟁 후 약해진 것이다. 또한 군사무기와 산업이 만나면서 미국보수인 군산복합체가 만들어졌다” 지금 미국 보수의 핵인 네오콘도 한국전쟁에서 출발한다고 봐야할까. 김 교수는 한국전쟁이 세계질서를 바꾸었다고 말했다. “냉전체제를 굳히고 미국우익세력의 헤게모니가 확고하게 자리잡게 됐다. 미-소간의 관계가 고착된 것이다” 남북한의 희생자만 300만-이것 역시 정확한 통계가 아님-혹은 그 이상인 큰 전쟁에서 남북한만 폐허가 되고 가담했던 나라들은 제 이익만 챙겨 돌아간 전쟁이 아니었나 싶다.
한국전쟁을 도와준 영웅으로 보는 ‘맥아더’는 어떤 이해관계에 있었을까? 맥아더는 이승만식의 북진통일을 원했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트루먼은 그에 반대하고 있었다. “이북까지 김일성 세력을 쫓아내면 중국이 가만있지 않을 것이고, 북한까지 갔다면 러시아와 전쟁이 일어나 3차 대전의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트루먼 입장에서는 “북진통일을 할 이유가 없었으며 정치적으로는 전쟁보다 전쟁을 통한 국민단합과 전쟁을 통한 경제 살리기”가 먼저였다. 맥아더는 군인이었기 때문에 전쟁에서는 무조건 이겨야한다는 생각이 었다. 김 교수는 “전쟁터에서 군인은 정치에 종속되는 것이다. 전쟁은 정치 중에 하나일 뿐이므로 최종지휘관은 정치가인 대통령이다. 정치는 국가의 이해관계를 고려해야하기 때문에 단순한 군인과는 다른 선택을 해야 한다. 트루먼은 미국의 기득권, 자본가의 이해관계를 반영해 전쟁에서 지지도 이기지도 말자는 생각이었다”고 지적했다.
김동춘 교수
일방적 기억이 ‘전쟁불사론’을 만든 것.
김교수는 한국전쟁으로 인해 지금까지 비극이 이어지고 있는 것들에 대해 설명했다. 우선 북한의 비극이다. “한국전쟁 후 김일성 단일권력체제가 만들어졌는데 이것은 비극의 시작이다. 내부의 견제권력이 없으니 권력이 썩게 되고 실패한 공산국가가 된 것이다. 또한 ‘선군정치’하는 것도 군을 앞세운다는 이야긴데 여전히 전시체제라는 이야기다. 60년 전과 똑같다.” 남한 역시 전쟁논리가 유지되고 있다. “천안함 발생 후 전쟁기념관에서 성명발표하고 전작권 환수를 연기하려는 것은 국가와 국민의 미래보다는 정치적 이해관계를 더 고려했다는 것이다. 이승만도 권력이 유지된다면 수백만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맥아더가 핵 사용하려고 할 때 이승만이 OK했다”는 점에서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른 전쟁논리는 60년 전과 같다. 바로 “분단됐기 때문”이다.
김 교수는 “한국전쟁은 60년 전에 일이지만 문제는 무엇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이것을 생각하는 것이 지금 정치의 문제”라고 강조했다. “소설과 영화로 다루어지지 않은 사건은 역사가 아니다. 일반 시민들 속에 없기 때문이다. 전쟁 때 미군이 도와준 것은 맞지만 미군이 학살한 것은 없는 역사, 객관적으로 사실이어도 우리의 기억 속에 없으면 없는 역사다. 미디어와 교육이 만들어가야 할 부분”이라고 덧붙였다. 보수신문이 수개월 동안 지면을 활애해 전쟁이야기를 하는 것에 대해서도 “기억정치다. 기억을 누가 선점하느냐, 과거문제가 아니라 현실정치다. 여론에 의해 정치가 바뀌는 것이다. 문제는 전쟁불사론을 잠재울 수 없는 사회라는 것”이라고 했다. 전쟁에 대한 일방적인 역사만 기억하기 때문에 ‘전쟁을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라는 이야기다.
김 교수는 한국전쟁에 대한 기억의 문제가 결코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고 했다. “지금 젊은이들의 목숨에 대한 문제이고 현실로서 전쟁준비체제로서의 한국사회, 국가보안법, 징집체제, 미국에 무기구입에 돈을 퍼부어야하는 체제에 대한 것”이라면서 “우리사회가 어떻게 건강한 민주적인 사회가 되느냐. 건강한 시민의식을 가진 군인이 되느냐”로 확장될 수 있는 문제라고 강조했다. "(남북한이)한국전쟁 영향 아래 여전히 있기 때문에 끌려다니지 말고 남북간의 민족적인 대타협이 필요“하다며 마무리했다.
"아담스미스"라는 단어를 들으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단어가 '자유방임'과 '보이지 않는 손'이다. 그리고 이 두 단어는 경제
활성화를 위한 시장 규제 완화의 논리에 계속 사용된다. 만약 하늘에 있는 아담스미스가 이 사실을 안다면 억울해서 다시 내려 올
수도 있겠다.
지난 5월 14일(금) 참여연대 아카데미 느티나무에서 김수행
교수님이 최근 출간한 <청소년을 위한 국부론>출판기념 강연회가 열렸다. 강연에서 선생님은 국부론이 쓰여진 배경과 맥락에
대해 쉽게 설명해주셨다.
김수행 교수님
아담스미스가 꿈꾼 세상
김수행 선생님은 아담스미스가 원했던 미래사회를 절대주의 왕정을 몰락시켜 '모든 사람이 자유롭고 평등하게 잘 사는 사회'로
설명하셨다. "국부론은 wealth & the
nation을 말합니다. 국부론의 핵심은 국가의 부를 어떻게 증진시킬것인가입니다. 여기서 국가란 국민전체, 모든 사람의 부
입니다"
아담스미스는 1776년 스코틀랜드에서 국부론을 저술했다. 당시 스코틀랜드는 절대왕정시기로 중상주의 정책을 썼다. 중상주의는 국가에
금과 은이 많으면 잘 사는 나라로 이해한다. 이를 위해 절대왕정은 수출을 장려하고 수입을 제한한다. 왕정은 수출을 장려하는
수단으로 수출을 많이 한 사람에게 수출장려금을 주고. 수출을 위한 수입품의 경우 수입세금을 환급해주고, 동인도 회사 같은 독점적인
무역회사를 설립한다. 반대로 수입을 제한하기 위해 절대왕정은 수입 관세를 과다하게 적용하고, 수입을 금지하기도 한다.
문제는 수출 특혜를 일부 제조업자와 무역업자에게만 제한한 것이다. 왕정은 실이 국내에서 대량으로 생산되더라도 실은 수출을 제한하고
실로 제조된 천 수출을 장려했다. 천을 제조하고 수출하는 업자들은 자신의 이익을 보장하기 위해 왕정에 천 수줄 장려 정책을
로비해서 자신의 이익을 확대했다.
강의 중인 김수행 선생님. 칠판에 글자가 빽빽하다.
18세기 영국에서만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다. 1960년 독재정권 부터 지금까지 끊임없이 일부 제조업자와 무역업자에게만 특혜를 주는
정부의 정책은 계속되고 있다. 1960년 독재정권 시절, 삼성은 정부로 부터 어머어마한 액수의 수출 장려금을 받았다. 또한
수출을 많이 하는 대기업과 재벌은 대출을 받을 때 금리가 7~8%였다. 대출금리가 25%인 시절이야기다. 또한 철도를 이용해
항구로 화물을 운송하면 요금을 10%밖에 적용하지 않았다.
아담스미스는 절대왕정이 일부 업자에게만 수출 특혜를 주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경제적 이익을 얻지 못하는 사실을 발견했다.
아담스미스가 말한 자유방임은 위와 같은 맥락에서 정부의 규제를 철폐해야 한다고 나온 단어다. 하지만 현재 우리나라에서 자유방임은
당시 절대왕정과도 같은 정부, 대기업에 의해 자의적의로 해석되 사용되고 있다. "정부, 주류 경제학자들, 일부 언론사들은 재벌, 대기업에 규정을 완화해야 한다고, 즉 자유방임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기업에 부과하는 세금을 낮추고, 최근에는 종합부동산세로 걷어간 돈까지 다 돌려줬습니다. 아담스미스가 말한 자유방임과는
정반대 이야기입니다. 아담스미스는 억압받고 못사는 사람들을 자유방임하라고 주장했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단어를
왜곡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보이지 않는
손은 정말 보이지 않는다
아담스미스는 뉴튼이 과학을 통해 자연질서를 발견한 것과 같이 신학을 통해 사회 질서를 찾아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아담스미스가
사회질서를 말하기 위해 사용한 개념이 보이지 않는 손이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아담스미스가 국부론에서 '보이지 않는손(an
invisible hand)'을 딱 한번 언급했다는 사실이다. "모든 사람에게 자기의 개인적인 이익을 추구하게 하라. 그리하면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리어 사회의 이익도 증진된다." (김수행 선생님의 국부론-552페이지/선생님은 페이지도 정확하게 가르쳐
주셨다) 아담스미스의 다른 책을 포함해도 평생동안 보이지 않는 손을 언급한 횟수는 세번. 충격적이다. 상식적으로 아담스미스가
보이지 않는 손을 중요한 개념으로 말했다고 보기 어렵다. 평생에 세번 밖에 말하지 않은 단어를 그 사람의 핵심 개념으로
이해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또한 아담스미스가 뉴튼처럼 보편전 질서를 발견하기 어렵게 되자 보이지 않는(un indivisual)이라고 표현했을 수도 있다.
김수행 선생님은 "아담스미스가 모든 사람에게 자기의 개인적 이익을 추구하게 하라는 명제와 사회 이익이
증진된다는 명제를 연결하는 질서를 찾으려 했습니다. 하지만 그 질서를 발견할 수 없자 '보이지 않는 손'이라고 말한 것 아닌가
싶습니다"라고 말했다.
더 놀라운 사실은 보이지 않는 손이 절대왕정을 타도하기 위한 슬로건일 수 있다는 사실이다. "아담스미스는 절대왕정을 타도하고 싶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개인적 이익을 추구하게 하라. 그러면
사회의 이익도 증진된다고 말하는 것은 절대주의 왕정에 대한 도전입니다. 보이지 않는 손은 혁명 구호입니다."
참여연대 여름강좌로 김수행 선생님과 함께하는 국부론 읽기가 진행됩니다. 6월 22일부터 7월 13일까지 총 4주간 매주 화요일 저녁 7시부터 9시까지 진행되는 강좌에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이번 강의를 듣기 전에 가장 궁금했던 것은 “김귀옥 교수님은 한국전쟁의 어떤 부분에 주목하고 계신가.”이었다. ‘한국전쟁’이 최근에 새롭게 등장한 연구주제도 아니지만, 김귀옥 교수님은 ‘여성’이라는 점과 ‘사회학자’라는 부분에서 한국전쟁이라는 문제와 그다지 친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름 사회학과 학생으로서 적지 않은 사회학 수업을 들어봤다고 생각했는데, 전쟁을 핵심 주제로 하는 수업을 들어 본 적이 있었던가? 아마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 더욱 김귀옥 교수님이 우리에게 전쟁에 관하여 어떤 문제와 관점을 던져주실지 기대가 되었다.
사람들의 삶을 통해 한국 전쟁을 연구
한성대학교 김귀옥 교수님은 전쟁 후 세대로서 내가 왜 한국전쟁을 연구해야 하는가를 종종 생각해본다고 하셨다. 왜냐하면 전쟁은 피해야만 할 것이기 때문에, ‘전쟁은 없는 것’이라고 가정을 하여 살아가고 전쟁 없는 평화를 말한다면 더욱더 행복할 텐데. 그런데도 왜 전쟁을 이야기해야 하는가.
정치학에서는 종종 전쟁론, 평화론을 이야기 하지만 사회학적인 측면에서 ‘사람’에 문제의식을 갖고 전쟁을 본격적으로 연구를 시작했을 무렵, 사람들은 대단히 낯설어 했다고 하셨다. “전쟁은 정치학자들의 것이고 외교학자들이 그동안 연구해왔던 부분인데, 왜 사회학에서 전쟁을 연구하는가. 이 얘기는 바로 내가 왜 전쟁을 연구하는가와 왜 이 강의에 자리하신 분들이 전쟁에 직면해야 했는가라는 문제의식과 맞닿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60년 전 한국을 가장 심각하게 뒤집었던 사건인 한국 전쟁. 여전히 한국전쟁은 우리에게 무언가를 말하고 있으며 정전 이후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의 삶은 한국전쟁에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고 하셨다. “그래서 ‘천안함 사건’은 처음도 아니고 어떤 의미에서는 너무도 불행하지만 이런 남북 대결구조 국면 속에서는 마지막 사건이 아닐 수 있습니다. 바로 그 전쟁의 시대를 살게끔 했던 것은 무엇이냐? 가장 중요한 우리의 분수령은 틀림없이 한국전쟁입니다. 한국전쟁이 있었기에 우리는 아직도 남북통일이 되지 못하고 한반도가 평화롭지 못한 채 동북아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과거를 알기 위해서 한국 전쟁을 보지만 또 한편으로 우리가 과거를 알아야 할 가장 중요한 이유는 바로 우리의 미래를 풀어나가기 위한 하나의 출발지점이기 때문입니다.”
전쟁은 새로운 사회를 만든다.
김귀옥 교수님은 전쟁은 다양한 차원에서 전쟁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모습의 사회의 만든다고 하셨다. “전쟁은 반공주의 사회를 열었습니다. 6,70년대 박정희 대통령의 혁명 제 1공약이 반공이었죠. 우리 정부의 반공주의는 독재와 경제 성장주의 그리고 냉전이 결합된 개념으로서 북을 우리의 적으로 보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합리적인 이성이 마비된 사회. 네가 나의 적이라고 여겨질 땐 어떤 말을 해도 그것의 옳고 그름을 논할 필요가 없는, 그래서 ‘적과 나’의 이분법이 작동하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빨갱이냐 아니냐의 의미만을 쇠뇌당한 우리의 머릿속엔 반공의 나침반이 생겼습니다. 우리는 195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이러한 나침반에 의해 이성이 마비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전쟁은 군대적 사고가 사회전반에 뻗어있는 군사주의 사회를 만들었다고 하셨다. 폭력제일 주의, 사람 목숨을 파리 목숨이라 여기는 생명경시풍조.. 합리적인 이성은 필요 없는 사회가 되어버린 것이다. 또한 전쟁을 거치면서 과거의 공동체 주의가 사라지고 이런 요소들이 결합되어 권력 있는 사람들에게 빌붙어 출세를 잘 하려는 기회주의 의식, 돈이 최고라는 황금만능주의 등 성공, 출세 중심의 가치관이 퍼지게 되었음을 지적하셨다.
전쟁은 새로운 사람을 만든다.
전쟁은 한마디로 여성의 사회를 만든다고 하셨다. 전쟁으로 많은 남성들이 전사했기 때문이다. 전쟁미망인(未亡人)이 된 여성들은 생존을 위해 경제활동에 뛰어 들어야만 했다. 대다수의 전쟁미망인들은 식모살이나 행상으로 생계를 유지했으나 그것마저 힘든 여성들은 성매매 산업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고, 정부는 성매매 산업을 적극 지원·유지했다.
“정부가 관리하는 공창제를 제도로서 열어놓고, 법률로서 금지한 이후에도 군 당국의 묵인 하에 기지촌이 군대가 있는 모든 곳에 생겨났습니다. 철저하게 정부관리 하에 만들어 진 것입니다. 이것은 한미동맹을 수호하기 위해서 미군을 즐겁게 하기위한 우리정부의 사명이 만들어 낸 것입니다.” 1960년대 당시 기지촌 경제가 GDP의 25%를 차지하는 경제적인 측면과 한미 간의 친선이라는 목적아래 정부는 성매매 산업과 성매매 여성들을 철저하게 관리했다.
전쟁과 고통
김교수님은 전쟁으로 인한 학살규모는 ‘모른다’가 정답이라고 하셨다. 학살 가해자 집단은 인민군뿐만 아니라 미군(유엔군), 국군, 경찰, 자위대 등 다양한 집단들이 있었고 학살의 성격도 보복, 예방, 동원의 차원에서부터 무차별적인 민간인 학살도 수없이 자행되었다고 하셨다. 또한 정부는 민간인을 동원, 경찰권을 부여하여 학살과 감시의 권한을 줌으로써 같은 동네에 사는 사람들끼리 죽이고 죽임을 당하는 잔인한 일들이 벌어졌다. 그리고 신원조회를 통해 부역혐의자와 그 가족, 친척들에 대한 일상적인 감시의 임무도 수행했다. 이처럼 전쟁의 고통은 학살자뿐만 아니라 피학살 민간인들에게도 지속되었고, 이러한 신원조회는 1980년대, 90년대에도 계속 존재해 왔다.
21세기 평화의 길은
21세기를 살면서 우리가 풀어야할 숙제에는 빈익빈 부익부, 교육의 불평등 등 다양한 문제들이 있지만 가장 중요한 문제 중에 하나는 바로 ‘평화’라고 하셨다. “끊임없이 남을 의심해야 하고 평화롭게 살 수 없는 조건 속에 살면서 평화는 그저 고상한 하나의 가치가 아니라 절대 절명의 인권입니다. 이러한 기본 인권으로서 우리가 평화롭게 사는 것은 가장 중요한 권리이고 국가는 반드시 평화를 이행해야할 중요한 책무가 있습니다.”
“한반도에 평화를 가져오기 위해서는 조건 없는 대화를 해야 한다.”는 교수님의 말씀. 그러나 지금 상황에서 정부는 전혀 ‘대화’할 마음이 없어 보인다.
‘노래=음악’인 걸까요? 물론 노래는 음악의 속성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 가사 덕에 문학일 수도 있죠. <서울, 도시와 공간의 인문학> 일곱 번째 강의는 대중가요를 문학의 관점에서 살펴보고, 거기에 비친 서울과 도시민의 모습을 엿보았습니다. 강의를 해주신 분은 ‘음악 평론가’ 말고 '노래 평론가‘라 불리길 원하신 이영미 선생님입니다.
‘대중가요’라면 아무래도 소비주체인 ‘대중’의 존재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겠죠. 정의하기 나름이겠지만, 전근대적 공동체를 중심으로 점점이 조직된 것과는 다른, 대규모로 조직된 근대적 인간 집단이래야 ‘대중(大衆)’이라는 칭호가 어색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광범위한 동원의 과정에서 대중매체의 개입은 필수적입니다. 이 “대중매체에 의해 상업적으로 대량생산되고 대량유통되는” 것이 바로 대중가요입니다. 그러다 보니 아무래도 자본주의니 시장경제니 하는 것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본주의의 중심인 도시와도요. 대중가요가 도시인의 경험과 욕망을 노래하게 되는 배경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대중가요가 시작된 시점 역시 대중매체와 관련지어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음반인 윤심덕의 <사의 찬미>가 제작된 것이 1926년입니다. 또한 식민지 조선에 일본어 방송이 시작된 것이 1927년이고 한국어 방송이 시작된 것은 그보다 두 해 뒤니까, 대략 그즈음을 우리나라에도 대중가요라는 것이 본격 시작된 시점이라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머지않아 1934~35년 무렵에 식민지 조선의 대중가요는 전성시대를 맞게 됩니다. 이영미 선생님은 전성기가 이 시기에 찾아온 이유로 세대의 문제를 짚습니다. 1930년대 중반에 문화를 적극적으로 향유하는 세대는 1910년대, 즉 이미 조선이 일제의 식민지가 된 이후에 태어난 이들이라는 점이지요. 이들은 독립운동에 대한 이렇다 할 신념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해방을 상상하기도 힘들었습니다. 어쩌면 일본 중심의 아시아 질서가 이들에게는 당연히 주어진 전제였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바로 그 식민지 시대의 신세대들이 당대 일본에서 유행한 최첨단 스타일을 들여온 것이지요.
하지만 외부로부터 이식된 유행은 무언가 부자연스러운 긴장을 일으킬 수밖에 없습니다. 식민지 조선의 대중가요에서 그려지는 서울은 그러한 긴장을 담고 있습니다. 과장될 정도의 화려한 불야성과 미개발된 자연녹지. 그것은 이상과 현실, 외래와 토착의 먼 간극을 여실히 드러냅니다. 또한 욕망과 억압이라는 모순된 방식으로 수용된 근대화의 부조리함을 보여줍니다. 가령 김해송의 <꽃서울> 속 다음과 같은 가사에서는 화려하지만 무언가 마음 한켠을 불편하게 하는 도시를 그려냅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른다고 해서 이상과 현실이라는 딜레마가 치유될 수 있을까요? 한 켠에서는 서양식 선진화의 논리가, 다른 켠에서는 민족주의의 논리가, 아직까지도 힘을 얻는 우리나라에서 외래와 토착의 갈등이 사라질 수 있을까요? 50, 60년대의 대중가요는 상대를 일본에서 미국으로 바꾸었을 뿐, 식민지 시대와 똑같은 갈등을 반복합니다. 우리 스스로를 실제보다 과장해서 서양화한 것으로 그려낸 가사는, 서양이 욕망과 동일시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영어를 과시적으로 사용하는 것도 그러한 사례가 될 수 있겠네요. 현인의 <서울야곡>처럼 말이죠.
“네온도 꺼져가는 명동의 밤거리에 / 어느 님이 버리셨나 흩어진 꽃다발 / 레인코트 깃을 올리며 오늘밤도 울어야 하나 / 베가본드 맘이 아픈 서울 엘레지”
서양의 어설픈 아류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래도 당시 서울은 시골 사람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이었습니다. 바야흐로 이촌향도의 시대였지요. 정부의 중앙집중식 개발 계획 하에서 지방은 서울의 내부식민지로 종속될 수밖에 없었으니까요. 마치 식민지 조선 사람들이 일본과 미국을 동경했던 것처럼, 식민지 지방은 서울을 동경의 대상으로 삼게 됩니다. “새빨간 장미보다 새하얀 백합보다 천 배나 만 배나”(봉봉사중창단 <꽃집의 아가씨>) 예쁜 서울의 아가씨의 화려함 이면에는, “애타도록 보고픈 머나먼 그 서울을 바라보다 검게 타버린 흑산도 아가씨”(이미자 <흑산도 아가씨>)의 동경과 소외감이 있습니다.
다시 한번 세대가 바뀌고 70, 80년대에 들어서게 되면 이러한 서울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이들이 나타나게 됩니다. 이들은 서울에서 나고 자라 도시의 삶을 일상으로 여기기 때문에 거꾸로 전원을 꿈꿀 수 있습니다. 도시가 준 희망보다 상처를 더 많이 기억하게 된 세대니까요. “나는 돌아가리라 쓸쓸한 바닷가로 / 그곳에 작은 집을 짓고 돌담 쌓으면 / 영원한 행복이 찾아오리라”(양희은 <한계령>) “저 푸른 초원 위에 / 그림 같은 집을 짓고 / 사랑하는 우리 님과 / 한 평생 살고 싶어”(남진 <임과 함께>) 하지만 이들이 그렸던 전원은 다분히 이상화된 것이었습니다. 희망만 있을 것 같았던 서울이 좌절을 안겨준 것처럼, 현실의 전원은 또 다시 기대를 배신할 수밖에 없겠지요. 그래서 다른 한 편에서는 고달픔을 안고 서울의 삶을 수용하는 태도도 나타납니다. 윤수일의 <아파트> 같은 곡이 그리듯이요.
도시의 삶이 희망적이지만은 않다는 자각과 그 안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현실은, 낙원으로 회피하거나 도시를 수용하는 것과는 다른 목소리로 출구를 열기도 합니다. 가령 정태춘의 곡들이 그런 특징을 보여주는데, 그의 초기작들이 자연에 대한 막연한 동경을 표출했다면, 80년대 중반에 이르면서 문명비판적 태도를 보이는 작품을 내놓습니다.
“저 어둔 밤하늘에 가득 덮인 먹구름이 밤새 당신 머릴 짓누르고 간 아침 / 나는 여기 멀리 해가 뜨는 새벽 강에 홀로 나와 그 찬물에 얼굴을 씻고 / 서울이라는 아주 낯선 이름과 또 당신 이름과 그 텅 빈 거릴 생각하오 / 강가에는 안개가 안개가 가득 피어나오” - 정태춘 <북한강에서>
그리고 조금 덜 정제된, 직설적인 언어로 풀어내는 목소리도 있습니다. 평범한 노동자가 가사를 쓰고 거기에 곡을 붙인 민중가요지만, 적나라한 감정 묘사가 감정을 쥐고 흔듭니다.
“너희집은 큰 집에서 네 명이 살지 우리 집은 작은 방에 일곱이 산다 / 그것도 모자라서 집을 또 사니 너희는 집 많아서 좋겠다 / 하얀 눈 내리는 겨울이 오면 우리 집도 하얗지
내일이면 우리 집이 헐리워진다 쌓아놓은 행복들도 무너지겠지 / 오늘도 그 사람이 겁주고 갔다 가엾은 우리 엄마 한숨만 쉬네 / 개새끼 개새끼 나쁜 사람들 엄마 울지 마세요
아버지를 따라서 일터 나갔지 처음 잡은 삽자루에 손이 아파서 / 땀흘리는 아버지를 바라다보니 나도 몰래 내 눈에서 눈물이 났다 / 하늘에 태양아 잘난 척 마라 자랑스런 우리 아버지“ - 양병집 <못생긴 얼굴>
참담하게도 여전한 현실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모자라 강의는 70, 80년대의 대중가요를 살펴보는 것에서 마무리되었습니다. 아쉽기는 하지만 지금 여기의 대중가요를 돌아보게 하는 데에는 부족함이 없었던 시간이었습니다. 걸그룹의 <텔미 Tellme>나 <지 Gee>같은 곡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장기하의 <싸구려 커피>처럼 루저의 감성을 드러내는 곡이 간간히 주목받는, 그리고 홍대 앞 철거건물 두리반을 중심으로 일군의 문화공동체가 만들어지고 있는 지금의 대중가요가 그리는 여기 서울의 풍경은 어떤가요? 혹 여전히 팍팍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민중가요가 사라진 원인이 궁금하신가요?
“민중가요 문화가 정치적인 진보성으로 유지되는 것은 아닙니다. 민중가요는 매체를 통해 유지되지 않습니다. 80년대에는 구전됐지요. 대안적 문화를 꿈꾸는 공동체가 만들어지지 않으면 민중가요는 만들어질 수 없습니다. 여성운동, 시민운동에서 민중가요가 생겨날 수 없는 것은 삶을 함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디가 대안이 될 수 있지만 그 역시도 메인스트림 곁에 있으니 힘이 부칩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수용자인 대중인데, 주류의 흐름을 거슬러 문화공동체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도 희망적인 것은 마을을 중심으로 한 공동체가 생겨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난 철학 강의 후기 때도 떠들어댔던 바, 난 10대 소년의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30대 후반의 아줌마... 그러므로 이건 뭐 어른도 아니고 아이도 아니고... 굳이 말하자면 최근 즐겨듣는 노래 <sad thing>을 부른 가수의 이름처럼 ‘어른아이’이다. 그 노래의 가사는 무척이나 단순해서 단 두 줄의 가사가 전부이다. 외우기 무지 쉽다.
첫째 줄 - i saw you... you in me...
난 내 안의 너를 보았다. 이 때 내 안의 너는 나일수도 타인일수도 있는데 만약 그게 나라면... 그래, ‘나 안의 나’는 어찌 보면 익숙한 존재이다. 이 따끔 내 존재를, 내 삶을 차분히 응시하게 되는 순간은 누구한테나 있기 마련이다. 내 안에 갇혀 있는 나는 잘 살고 있는 건지 제대로 된 길을 가고 있는 건지 도대체 뭐가 문제인지... 그렇게 안부를 묻다보면 지쳐있는 내가 보이기도 하고 뒷걸음쳐 도망가는 나도 보인다.
<어른의 탄생>이라는 강의는 그렇게 내 안에 있는 나에게 그동안 미뤄왔던 기나긴 안부들을 묻는 시간이 아닌가 싶다. 20대의 나름 치열했던 사랑의 시기에서부터 결혼이라는 제도를 거치고, 일에서 성공을 이루고 주머니에 돈이 들어오고 자식들이 주렁주렁 열리고...
이 나만의 history 안에서 ‘나’는 그동안 어떻게 지내왔느냐고 안부를 묻는 시간...
수강생들 각자의 역사 그리고 그들이 그동안 살아오며 자신들에게 물어왔던 안부의 소소한 내용들로 강의는 흘러갔다. 물론 김선주 선생님 개인의 역사와 안부들도 강의를 통해서 또 매회 이루어졌던 점심식사와 그 뒷공간들을 통해 실컷 들을 수 있었다. 강의보다 오히려 강의 뒷풀이가 더 박진감 넘쳤다고나 할까...
일에 치이고 아이에 치이고 사람들, 돈, 나이 등등에 치이고... 그렇게 마구 치이다 우리는 정작 자신을 돌아보고 자신에게 진지한 안부를 묻는 일의 소중함은 잊어버린 게 아닌지... 가끔 전화나 메일로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지내는지는 그들의 일상은 어떤지는 물으면서도 정작 자신에게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그렇게 사는 게 힘들진 않는지 따위를 묻는 일에는 너무 야박하게 굴었는지도 모른다.
<어른의 탄생>이라는 강의가 내 안에서 <나에게 안부를 묻다>로 바뀌는 순간이다.
마지막 줄 - it's so sad... sad thing...
강의를 통해 그렇게 성찰의 시간들을 갖는다. 그리고 그동안 내가 정신적으로 그리 독립적이지 못했다는 뼈아픈 사실을 얻었다. 거의 연애 10년 결혼생활 10년을 함께 한, 그래서 무슨 솥바닥 누룽지처럼 달라 붙어있던 내 생애 유일한 남자...
한 사람과 20년 동안 거의 한 공간에서 머물면 누구라도 그러지 않을까하는 변명과 위로의 말도 좀 건네며 나는 이제 나 자신의 독립을 조용히 준비한다. 솥 안에다 물을 확 부어야겠다. 누룽지는 서서히 불어 솥바닥에서 분리될 것이고 물은 그렇게 우리 둘 사이를 별다른 상처 없이 떼어내어 줄 것이다. 그 과정이 순탄히 진행되어 우리 둘의 관계가 숭늉으로 남게 되길... 그렇게 구수함으로 남게 되길 바란다.
it's so sad...라고? 그래 그렇게 서로 분리되어 섞이는 일이 마냥 해피하지만은 않지...그래도 내 분신과 같은 사람이지 않은가... 김선주 선배님의 표현을 빌리자면 육친과 같은 관계이다. 하지만 선생님 조언대로 독립할 기회를 실기(失期)하지는 않으리라...
내가 내 안에 자리 잡은 무언가를 차분히 응시하는 일 또한 언제나 행복한 작업은 아니다. 그것이 나 자신이든 타인이든 다른 무엇이든... 말없이 들여다보면 세상에 온갖 아름다운 것들 안에는 언제나 슬픔이 함께 한다. 아름다움이 깊은 울림으로 남을 수 있는 건 바로 그 슬픔 때문일 지도 모른다.
나의 시간을 벤자민 버튼식으로 되돌려 보면... 내 추억 속에 깊이 각인되어 있는 것들의 공통점 또한 그 바탕은 슬픔이다.
아홉 살 무렵이었던가... 시골 야트막한 구릉에 누워 한 없이 하늘만 올려다보던 어느 봄날 오후가 있었다. 해저물녘 풍경이 간직하고 있는 비스듬한 햇살, 온 곳을 알 수 없는 바람과 구름, 나무와 풀들이 흔들리는 소리...
그때 알았다. 무언가를 깊게 들여다본다는 것은 슬프다.
그 기억 때문에 난 슬픔이 주는 힘을 믿는 사람이 되었다. 외로움이 주는 동력을 믿는 사람이 되었다.
내 안의 나를 돌아보는 일이 슬픈 일이라도, 내 일상들이 어떻게 굴러가는지를 알고 나면 무척 외로워질지라도 이젠 잠시 짬을 내서 용감히 거울 앞에 서야할 시간이다.
그 슬픈 응시가 끝나고 나면... 그 안에서 다시 힘차게 고개를 들고 일어날 또 다른 무언가가 내 안에 있다고....... 난 믿는다.
p.s. 다음 강의 시간에, 주은경선생님이 이 쯤이 음악을 틀 때라고 말씀하시면 바로 그 순간 여러분께 <sad thing> 들려드릴께요!
"이러다 전쟁나는거 아냐?"
지난 20일 국방부 민군합동조사단이 결정적 증거인 "1번"을 들이밀며 북한이 공격했다고 조사 결과를 발표한 날, 이곳 저곳에서
흔하게 들리던 내용이다. 나 역시 맛있는 저녁식사를 하면서 평안하게 하루를 마무리 했지만 한켠에 찜찜한 마음을 지울 수는 없었다.
"이러다 전쟁 나는 거 아니야.."
박태균 선생님
멍청한 지도자가 전쟁을 부른다.
조금 위안이 되었던 것은 지난 17일 참여연대 아카데미 느티나무에서 진행된
<한국전쟁 60년 기념강좌> 때문이다. 서울대 국제대학원 박태균 선생님은 전쟁이 발발하는 이유에 대해 "전쟁이 발발하는 원인은 위기의 실제 크기 때문이 아닙니다. 전쟁을
결정하는 사람들이 가진 위기 극복의 인식 문제 입니다. 정책 입안자들의 잘못된 생각들(오산, 오판, 망각)이 전쟁을 일으키는 것
아닐까요?"라고 말했다. 물론 이 ‘오판’은 계산된 판단일 수 있다. 당연하다. 위협을 객관적 지수로 측정할 수
없다. 위협은 사람에 따라 주관적일 수 밖에 없다. 정책 지도자가 어떻게 느끼는지에
따라서 결과가 굉장히 달라진다.
전쟁에 대한 사회적 인식도 중요 지도자는 개인에 종속되지 않는다. 이 지도자를 뽑은 사회가 존재한다.
"사회적으로 어떤 여론과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느냐가 굉장히 중요하다. 위기라는 것을 보면서 사회적인 공감대가 어떤식으로
형성되느냐가, 지도자에 대해서 사회가 어떤 태도를 보이느냐가 굉장히 중요하다고 본다. 사회 구성원들에게도 상당한 책임이 있다고
본다."
베트남 전쟁에서 사회 구성원들에 대한 책임을 엿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베트남에 군대를 파병할 때 김형욱과 손원일만 반대했다. 그
당시 야당은 한일 협정 반대를 주요 이슈로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반대하지 않았다. "한국은 전쟁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지도자 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들도 반성해야 한다. 북한의 대남정책에 있어서 굉장히 깊이 있게 생각해 봐야 한다."
김대중 대통령의 망언
박태균 선생님은 "고 김대중 대통령이 어떤 강연에서 ‘전쟁은
40대가 일으키지만, 40대가 일으킨 전쟁에서 죽는 것은 20대입니다. 그래서 모든 군인은 40대로 채워야 합니다’라는 말을 듣고
정말 멋있는 대통령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집에가서 이야기를 했더니 아내가 화를 내며 ‘민방위 끝낸게 언젠데!’라며 화를
내더군요"라며 지도자를 잘 뽑아야 함을 다시금 강조했다.
전쟁하면 돈번다는 기억
시민이 가진 역할은 지도자를 잘 뽑는 것 만이 아니다. 기억도 잘 해야 한다. 수없이 많은 무고한 생명이 죽어가고 자연이 무참히
파괴되는 전쟁은 경험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문제는 전쟁이 경제성장과 만나는 순간이다. 2003년 이라크 파병을 결정할 때도
전쟁을 통해 경제적 이득을 얻을 수 있다는 담론 때문에 파병 여론이 확산됐다. "다들 ‘이라크에 안가면 우리가 얻을 것을 남들이 다 가져간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폴란드가 가져갔습니까.
스페인이 가져갔습니까. 아닙니다 미국과 영국 메이저 회사가 다 가져갔습니다. 우리도 조금 가져왔는데, 이것이 파병 때문이었습니까?
한국전쟁에 대한 기억을 국가가 왜곡, 반복해왔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더 무서운 것은 ‘전쟁하면 돈번다’는 기억입니다. 이런
생각들이 있는한, 재파병의 논리가 악순환 될 것입니다. 한국전쟁에 대한 기억이 가지고 있는 가장 무서운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광주 30년 무엇을 할 것인가. 지난 10일(월) 광주항쟁 30년 기념강좌 "광주
30년, 무엇을 할 것인가"가 한홍구 선생님의 강의로 진행되었다. 한홍구 선생님은 광주 민주화 운동이 일어난 배경부터 현재 우리가
안고 있는 과제를 일목요연하게 설명해주셨다.
한홍구
교수
대학교 때 광주 사건에 대한 책을 읽으면서 눈물 흘렸다. 강의를 들으면서
다시 감동할 수 밖에 없었다. 무차별 구타와 연행, 군대의 시민을 향한 발포. 가장 극단적인 폭력의 공간에서 가장 극단적인 평화가
구현된 사건을 들을 때마다 가슴을 울린다. 당시 총기가 5000청이 깔렸다. 그럼에도 폭동은커녕 매점 매석조차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아주머니 들이 길거리에 솥을 걸고 주먹밥을 만들어서 사람들에게 나눠줬다. 광주로 들어가는 모든 통행로가 막혔음에도 오히려
음식이 남았다. "나 말고 아이들 주세요." 해방 광주만 생각하면 벅차오르는 가슴은 한홍구 선생님 뿐만이 아니다.
광주 때문에
삐딱선을 탄 사람들 계엄군이 광주로 진입한다는 전단이 살포된 26일. 일부는 남고, 일부는
돌아갔다. 전남도청에 남아있던 사람들 중 살아남은 분들은 “참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한홍구 선생님은 이것을 ‘그냥
반대했다’고 표현한다. "어떻게 텅빈 도청을 전두환에게 그냥 놔줄 수 있냐. 전두환이 웃으면서 들어오게 놔줄
수 있냐. 이미 죽은 사람들은 어떡하냐" 한홍구
선생님은 “80년 광주가 우리에게 준 충격. 죽음을 슬퍼할 수도, 언급할 수도, 추도할 수도
없는 사건이었다. 죽음마저 죽어버린 죽음의 역사. 80년대는 죽음을 끼고 산 세대다. 죽은 사람들이 내 몸 어딘가에 들어와
버렸다”고 말했다. "만약에 내가 광주에 있었다면.." 광주에 대한 빚이 있었다.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군사독재를 향해 온몸을 던져 투항했다. 군사독재가 물러나긴 했다.(그럼에도 용서 받을 사람은 없다.
전두환의 명언 "나, 29만원 밖에 없소") 수많은 엘리트가 노동 현장으로 갔다. 이런 수많은 헌신으로 우리나라는 참 많이
바뀌었다.
"민주화 운동 후 살림살이 좀 나아지셨습니까?" 딱 여기까지다. 한홍구 선생님은 광주에 빚진 사람들을 두고 "우리나라가
민주화 되지 않았는데, 자기들만 민주화 됐다. 그러면서 어떻게
됐나. 6월항쟁까지 하나가 되서 군사독재와 싸웠지만 영호남이 나뉘고 재야와 정치권으로 나뉘고 재야는 노동운동과 시민운동으로
나뉘었다"고 말했다. 광주의 세례를 받은 바보들이
똑똑해 지기 시작했다. 광주와 비정규직을 잊는 고리가 여기서 생긴다. 민주화 운동 후 살림살이가
나아졌다. 하지만 자본이 대응을 달리하면서 용역, 파견, 도급. 하청, 그리고 이름도 생소한 비정규직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청년 실업의 대부분이 비정규직 아닌가.
이런나라가 세상에 어디있는가."라고 한홍구
선생님은 말한다.
한홍구 교수
계속 되는 한홍구 선생님의 날선 비판이다. "모닝 차 공장에
내려갔다. 전 노동자가 비정규직인 꿈의(?) 공장이다. 비정규직 투쟁을 했는데 연대를 누가 했냐. 기륭전자 아줌마들이 했다.
연대니 소통이니 했는데..이길 수 있겠습니까."
광주 민주화 운동은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일어난 사건이다. 그럼에도
빚이다. ‘진보’에 관심있다고 하는 그 누구가 광주 사건에 자유로울 수 있을까. 그래서 빛이다. 잊지 않고, 푸념으로도 풀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그래서 방아타령이 우습다. 광주는 빛이다.
혹시 마음 한켠에서 ‘슬리퍼’로 고쳐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나요? 우리 말에 뿌리내린 일제의 잔재를 청산해야 한다는 의무감 말이죠. 하지만 가만 따져보면 ‘쓰레빠’는 ‘슬리퍼’가 표현하지 못하는 어떤 의미나 정서를 전달해 줍니다. 두 단어가 지칭하는 대상이 살짝 다르기도 하구요. 이미 수십년 우리와 더부살며 의미를 형성해 온 ‘쓰레빠’를 없애버리면 우리는 그 단어가 내포했던 것들을 함께 잃게 될지도 모릅니다. 일제 청산은 분명 미완된 현재의 문제이지만, 과도한 강박으로 작용할 경우 오히려 우리 자신을 해치는 칼날이 될 수 있습니다. 다른 누군가가 아닌 우리 스스로를 위해, 일제 잔재가 아닌 일제 콤플렉스를 청산할 필요가 있는 것이죠. 그래서 김어준은 말합니다. “쓰레빠는 쓰레빠다.”
콤플렉스는 세상을 굴절시킵니다. 얼굴에 난 뾰루지가 불만인 사람에겐 손톱만한 것도 주먹만하게 느껴지지요. 일제에 대한 우리의 콤플렉스도 그렇습니다. 식민지 조선을 평화적이고 순박하고 선량한 민족성을 지닌 피해자로, 제국 일본을 폭력적이고 교활하고 사악한 민족성을 지닌 가해자로 과장하는 심리의 기저에는 식민지적 피해망상이 있는 것입니다. 이 선악의 이항분리가 다친 우리의 마음을 달래줄는지는 모르겠지만, 현실을 명징하게 인식하고 분석하는 데는 걸림이 됩니다.
그 식민지적 피해의식의 대표 사례로 일제의 ‘풍수단맥설’을 꼽을 수 있습니다. 일본이 조선왕조의 전통적 상징공간을 의도적으로 훼손했고, 토착신앙을 탄압한 대신 神道신앙을 강요했으며, 전통적 문화유산을 철저하게 무시하고 계획적으로 약탈했다는 주장을 담고 있지요. 조선의 기를 꺾기 위해 북한산에 박았다는 거대한 쇠말뚝이며, 북한산(大)-총독부(日)-경성부청(本)을 통해 서울에 각인했다는 ‘대일본’ 같은 것들에 우리는 얼마나 치를 떨었나요. 하지만 그런 것들이 정말 일본의 치밀한 의도에서 비롯됐을까요? 혹시 일본적인 것을 개척하는 과정에서 의도하지 않게 일어난 훼손은 아닐까요?
가령 을미사변 때 명성황후를 위해 희생되었던 두 충신을 기리기 위해 세웠던 장춘단이 있죠. 일제는 그 바로 앞에 신마치 유곽과 이토히로부미를 기리는 박문각을 세우고, 장충단을 일본인의 공원으로 만드는가 하면, 국사당을 없애고 조선신궁을 짓는 등 조선인들에게는 불쾌할 수밖에 없는 행동들을 했구요. 하지만 이러한 행동들을 꼭 일본의 악의에 의한 것으로만 해석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남산 지역이 조선인들에게는 상징적 가치를 지니는 장소이기는 하지만, 1882년부터 서울에 진출하기 시작한 일본인들에게 있어서는 자신들의 본거지가 그곳이었으니까요. 이미 남산을 중심으로 세력권을 형성하고 있었던 일본인들에게는 장소가 지니는 의미와는 무관하게 한 행동들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식민지는 수탈을 하기 위한 여러 가지 기본적인 도시 인프라나 철도 네트워크나 도로망 같은 인프라를 설치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고 그 과정에서 어떤 형태로든 근대적인 형태의 사회공간적인 변화가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니까요. 일제가 조선의 전통적인 풍수지리적인 공간 조형 방식을 잘 파악하고 그것을 악의적으로 왜곡해서 민족의 정기를 꺾으려는 방식으로 도시 계획 같은 것들이 주로 이루어졌다는 주장은 낭설로 여겨집니다.
경복궁 앞에 위치했던 조선총독부의 입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경복궁에 대해 과도한 상징성을 부여하고 있는 측면이 있습니다. 물론 경복궁은 조선의 정궁으로 지어진 것이기는 하지만, 태종 때 창경궁이 지어져 양궁체제로 운영이 되었지요. 게다가 임진왜란 이후 대원군 이전까지 기간 경복궁은 버려진 빈터에 가까웠습니다. 대원군이 중건하기는 했지만 경운궁을 중건할 때 경복궁에서 많은 것을 떼어와 많이 황폐해지기도 했구요. 한반도의 500년 이하의 건물에 대해서는 평가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해 철거를 서슴지 않았던 일본의 입장에서 지어진 지 얼마안된 경복궁의 가치란 말할 것도 없겠지요.
그럼에도 확실히 일본의 제국주의는 여타 서양의 제국주의에 비해 파괴적인 측면이 있었습니다. 민족 말살 정책이나 치밀한 동화정책 같은 것을 보면 말이죠.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일본은 전세계에서 유일한 유색인종 제국주의였잖아요. 처음에는 탈아입구를 외치며 ‘유럽인이 되자’, ‘기독교로 개종하자’ 했던 일본인들이 러일전쟁에서 백인들을 이기는 등 승승장구하니까 대아시아주의 같은 황인종 제국주의를 꿈꿔볼 수 있었던 거죠. 애시당초 지배 인종과 피지배 인종이 확연하게 구분되었던 서양의 제국주의와는 다르게, 같은 인종이 지배-피지배의 관계를 형성하니까 동화정책을 펼 조건이 마련된 것입니다.
일제가 후발 제국주의라는 점도 서양 제국주의와의 차이를 설명해 줍니다. 사실상 전세계 식민지 영토 분할이 끝나가던 시기에 뒤늦은 출발을 한 셈이니, 팽창의 공간적 제약이 있었겠지요. 결국 일제는, 먼 바다로 개척해 나가는 서양의 원격제국주의와는 달리, 대륙으로 향하는 철도제국주의로 방향을 잡습니다. 그렇다 보니 식민지에 대해서 완전영토화 전략을 취하게 되었구요. 서양 제국주의는 식민지도시를 건설할 때, 그 도시에서 차지하는 지배 민족의 인구가 0.2~0.3% 정도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경성에 거주했던 일본인의 비중은 30%에 다다를 정도로, 일본은 조선을 그들의 땅으로 만드려고 했지요. 영국의 지배 하에 있었던 무굴제국과 비교해 봐도 차이는 확연하게 드러납니다. 영국은 기존 무굴제국의 지배 시스템을 그대로 두고 통치 비용은 최소화하면서 실리만 챙기는 간접통치 방식을 취했는데, 일본은 훨씬 직접적이고 전면적인 통치 방식을 택했잖아요. 그렇다보니 상대적으로 짧은 36년의 피지배 기간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많은 영향이 남아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구요.
일제의 완전영토화 전략은, 일본이 본국의 도시 개발 과정에서 취했던 정책들을 식민지 도시에도 비슷하게 적용하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당시의 경성 개발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본의 근대 도시 형성 과정을 살필 필요가 있는 것이죠. 오늘날 일본의 도시들을 보면 일본식 전통과 서양식 현대가 어색한 듯 자연스럽게 섞여있는 독특한 분위기를 발견할 수 있죠. 실제로 이 전통과 현대의 알력이 근대 도시 형성 과정에서도 크게 작용했다고 합니다. 조약개정․문명개화․부국강병 등 서양화의 경향과 전통적 공간 구성 요소나 통제방식을 재동원해 변용하는 일본화의 경향이 공존했던 것이죠. 그리고 그 이면에는 자원과 역량의 부족이라는 현실적인 고려가 있었습니다. 모든 것을 근대화하는 급속한 개혁은 많은 비용을 필요로 하는 것이니만큼, 전통의 것들을 어느 정도 이용하면서 생활 인프라와 같은 것들은 시민의 자발적 역할에 맡기고 나머지 자원을 군국주의 노선 강화에 이용한 것입니다. 러일전쟁 이전에는 전체 예산의 50% 이상을 군사 쪽에 쏟았다고 하니, 사회민주적 후진성은 어쩔 수 없는 결과였겠죠. 외국인들에게 보여줄 쇼케이스 격으로 만들어진 오늘날 동경의 긴자 정도만 일단 시구개정 사업에 착수합니다. 그래서 도시 계획은 일본 본토보다도 타이페이가 훨씬 더 앞서 갑니다. 경성에서도 일본과 마찬가지로 비용 문제 때문에 제대로 초기 도시 계획을 하기보다는 간선도로망을 어떻게 뚫을 것인가 이것이 가장 큰 과제가 되었습니다. 1912년부터 계획된 시구개정사업이 그것을 잘 보여줍니다. 오늘날 종로․을지로․충무로 등지의 격자형 도로가 바로 이 시구개정사업의 결과물입니다.
강의가 끝나고 이 강의의 기획의도와 관련해서 앞으로 서울이 어떻게 변화했으면 좋겠는지 묻는 질문에 선생님은 이렇게 답했습니다.
“그동안 우리가 서울을 개발해 온 방식은, 어마어마한 발전이 있었던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만, 위로부터 디자인된 플랜을 가지고 이루어진, 아래로부터의 참여나 지역 커뮤니티 사람들의 노하우를 활용하는 방식이 아닌, 일방적으로 이뤄진 방식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강북 뉴타운 같은 계획은 강남 개발보다 훨씬 더 나쁜 계획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강북이라는 장소가 갖고 있는 장소성, 역사성을 다 사장시켜버리는 것이잖아요. 사실 그런 것들이 역사도시가 갖는 가장 소중한 재산이거든요. 서울 안에 들어 있는 여러 가지 다양한 지층들의 기억, 장소성이 녹아들어 있는 것들이 색바랜 도시의 매력인데, 그런 것들을 그냥 말끔하게 고층빌딩 세워서 없애버리는 방식이 지금까지 우리가 주로 해온 방식이었죠. 그것이 여러 가지 형태로 우리의 성장잠재력을 제약해 왔다고 생각합니다. 식민지 연구자 입장에서 보면 우리가 원래부터 갖고 있던 고유한 공간 운영의 노하우 같은 것들을 식민지기를 거치면서 다 폐기처분하면서 시작된 정신적인 아노미 현상이 지금까지 이어졌고, 서구에서 유행하는 새로운 패턴과 양식을 빌려왔죠. 그러다 보니까 자기 것은 아무 것도 없이 사라진 국적 없는 도시가 돼 버린 거잖아요. 스스로 자기가 갖고 있는 자산을 찾아내는 눈을 갖는 것. 그게 중요하고 그러기 위한 조건으로서 우리 사회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좀 천천히 가자라는 것입니다. 너무 우리는 속도주의에 익숙해져 있는 것 같아요. 사실 20세기 후반에 전세계에서 가장 빨리 변한 도시잖아요. 조금 천천히 가면서 우리가 갖고 있는 여러 가지 가능성, 잠재력 이런 것들을 돌아봤으면 좋겠습니다. 일본 같은 경우를 보면, 어떤 사람들은 일본을 형편없는 도시라 얘기하지만, 어쨌든 자신이 전통적으로 가져온 공간 노하우 같은 것들을 최대한 활용하거든요. 롯폰기힐스 같은 경우를 보더라도 수백회 이상 주민들과 면담을 하면서 계획을 수정하고 협상하고 이런 테이블들이 마련이 되고요. 그냥 마스터플랜 만들어서 확 밀어버리는 방식의 진행은 아니거든요. 그런 부분에서 도시가, 공간이 생명력을 갖는 이유는 뭔가에 대해 우리가 근본적으로 재고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아이디어의 문제라기보다는 사람들의 마인드를 바꾸고, 개발하는 관행이나 제도나 문화를 바꾸는 것이 훨씬 더 큰 문제인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