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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좌명 | 강좌후기 | 글쓴이 | 날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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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으로 읽는 중남미 역사와 문화 | [문학으로 읽는 중남미 역사와문화] 2강, 네루다 자서전 | 느티나무 | 2012.11.21 | ||
[인문학교] 문학으로 읽는 중남미 문화와 역사, 2강(11/07)
두 번째 강의.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편의 절망의 노래” 중 ‘스무 번째 사랑의 시’>라는 시로 강의를 시작했다. 사랑했던 연인을 그리며 쓴 감성적인 시였다. 네루다가 스무 살 때 냈다는 이 시는 많은 사랑을 받았던 작품이다. 체가 전장에서도 이 시를 자주 읽었다는데 그만큼 네루다의 시를 사랑했다. 네루다는 체게바라가 가장 존경했던 사람이며 세계적인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시인이지만 중남미의 정치, 경제가 연관된 사람이다. 공산당에 입당하였고 정치가이기도 한 그는 혁명투사에게 영향을 많이 주는 시인이었다. 칠레의 민중시인인 네루다의 삶을 구광렬 강사님의 유쾌한 강의로 들었다. ‘네루다’ (1904~1973)는 원래 필명이었다고 한다. 가부장적이고 마초적인 아버지가 시인이 되는 것을 반대했기 때문에 아버지의 탄압을 피하고자 처음엔 필명을 썼다. 필명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찾아보니 체코의 작가 얀 네루다의 성을 빌리고, 파울로에서 영감을 얻은 듯 한 파블로라는 이름을 만들었다고 한다. 네루다는 가브리엘라 미스트랄이라는 선생을 만나서 그의 문학적 능력을 인정받고 발전시켰다. 놀라웠던 점은 네루다와 가브리엘라 미스트랄 두 사람 모두 훗날 노벨문학상을 받았다는 거였다. 네루다는 여성편력이 심했다고 한다. 부인도 여러 명이라고 한다. 작가의 개인사를 접하니, 세계적인 시인 네루다도 평범한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강사님이 말씀하시길 네루다에 대해 너무 많이 포장 돼있는데 그 부분을 지적하고싶다(?)라고 하신 게 기억에 남는다.
△ 네루다의 첫 번째 결혼식 사진
칠레에 민중 시인이자 세계적인 시인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일포스티노>라는 영화로 유명한 네루다의 삶을 강사님의 유쾌한 강의로 들여다 본 기분이다. 체가 너무나도 존경했던 네루다. 민중 시인이지만 ‘사랑’을 화두로 한 시로 더 유명하다고 한다. 물론 나중에는 저항의식이 가득한 민중시도 집필했다. 네루다의 시를 몇 편 찾아본 결과 <시>라는 작품이 기억에 남는다. 체게바라로 시작해서 네루다까지 온 강의를 들으면서 중남미 역사와 문화를 훑는 기분이다. 앞으로의 강의가 기대된다. -------------------------------------------------------------------- 시(時) - 파블로 네루다
그리고 나, 티끌만 한 존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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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크숍: 소심한 사람들의 유쾌한 꼼지락 – 소리를 내면 세상이 바뀐다 | [소심한 사람들의 유쾌한꼼지락] 3강, 소심하고 유쾌한 체험담 나누기 | 우진아빠 | 2012.11.21 | ||
'소심한 사람들의 유쾌한 꼼지락 : 소리를 내면 세상이 바뀐다' 3강 (11/12, 월)
세 번째 강의는 1층 카페통인에서 진행됐다. 1층 카페에 책상은 다 치워져 있었고, 그동안 참여자들을 반긴 돗자리 대신에 큰 원으로 놓여진 각양각색의 의자들이 참여자들을 맞이했다. 큰 원 가운데에는 사무실에서 나온 각종 재활용품들과 색연필, 크레파스등 사무용품들이 쌓여 있었다. 1. 진행자는 참여자들에게 가운데 있는 잡동사니를 3개만 잡아 서로 붙이고 그려 아무거나 만들어 보라고 했다. 이 수업에는 정말 상상력이 특출난 사람들만 모였나보다. 모두들 5분 도 채 안 되는 시간에 무언가를 뚝딱 만들었다. 사슴벌레 모자, 재활용 필통, 앞머리, 과대포장 등 그리고 다시, 앞에 놓인 잡동사니로 '나무'를 만들어보라고 했다. 이 역시.. 2. 카페 바닥에 포스터 6장을 이어 붙인 큰 종이를 깔았다. 그리고 그 위에 나무를 그리고 다시 포스터를 12등분으로 자른 후 나눠가지고, 각자 가지고 있는 조각을 그림 모양대로 자른다음 그 모양을 예쁘게 꾸민 후 자기가 가장 적극적이었을 때의 모습을 적었다. 마지막으로 각자가 갖고 있는 그림조각들을 벽에 붙여, 원래의 모습이었던 나무모습을 완성했다. '혼자 밥을 먹을때' '이 강의를 들으러 올때, 운동(줄넘기) 할때' '컴퓨터 오락을 2박3일 내내 한 적이 있다' '수업시간에 딴짓을 할때' '6시30분에 출근할때' 한 참여자는 '연인에게 헤어지자는 말을 할때' 가 가장 적극적인 행동이었다고 말하면서 그런 적극적인 행동은 적극적인 후회를 불러왔다고 말해 참여자에게 큰 웃음을 줬다. 진행자인 이래은 선생님은 참여자 한 명 한명의 적극적 행동을 소개해주며 소심한 우리들도 이렇게 적극적으로 행동할 때가 있다면서, 이때 함께 사회적 발언을 하면 우리도 할 수 있다고 했다. 혹시 서로 잘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도 있지만, 아까 아무런 상관없는 것들을 이용해 각자가 새로운 작품을 창조했듯이 이러한 행동과 발언이 서로 어울리지 않을꺼라는 생각은 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설상 서로 안 맞더라도, 뭐가 어떤가? 내가 할 수 있는 것, 잘 하는 것으로 그런 행동을 시작하면 어떨까? 3. 이번 강의의 초대손님은 문화연대 신유아 활동가였다. '삶을 위해 싸우는 농성과 연대의 예술활동은 하나다' 신유아님은 포크코 비정규직 농성장, 콜트콜텍, 용산참사 농성장 등에서 싸우는 노동자, 예술가들과 함께 공공미술을 설치했으며 한진중공업 희망버스를 기획하고 함께 했었다. 그런 신유아님의 활동경험을 통해 문화행동에 대해 보고 배우는 시간을 가졌다. 어떻게 하면 좀 더 많은 시민들에게 관심도 받고 서로 교감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에서 출발했다는 신유아님의 행동들이 운동에 있어 얼마나 중요한 마중물이 되었는지 새삼 느낄 수 있었다. 4. 항상 강의의 마지막은 사회자의 질문에 답하는 시간으로 마무리된다. '무엇을 보았나요?' '무엇이 달라졌나요?' 그리고 이 번 강의는 특별히 과제를 내주셨다. 각자 오늘 발표한 적극적 행동을 하면서 유쾌하게 꼼지락거리는 자신의 모습을 찍어오는 것이다. 글 : 아카데미느티나무 천웅소 간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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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 다른 이름으로 저장하기 | [진보, 다른이름으로 저장하기] 5강, 나의 삶은 진보적인가? | 웃으며,함께,끝까지 | 2012.11.12 | ||
아카데미느티나무 20102 가을강좌 [민주주의학교] 진보, 다른이름으로 저장하기 5강(10/22) 후기 ① 1강 <21세기 진보의 재구성> 후기 다시보기 >> 클릭 ② 2강 <21세기 진보의 재구성> 후기 다시보기 >> 클릭 ③ 3강 <21세기 진보의 재구성> 후기 다시보기 >> 클릭 ③ 4강 <21세기 진보의 재구성> 후기 다시보기 >> 클릭
나의 삶은 진보적인가?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어느 가을, 다섯 번에 걸친 만남을 통해 우리는 깨달았습니다. 우리는 ‘진보’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이 사회에 떠도는 수많은 진보 담론들 중에 어떤 것이 진보이고 어떤 것이 진보의 탈을 쓴 보수인지를! 우리는 만남이 이어질수록 ‘멘붕’에 빠져들었고 드디어 마지막 수업, 우리는 “나의 삶은 진보적인가?” 라는 질문 앞에 섰습니다. 마지막 강의답게 세 분의 선생님이 오셨는데요, 각자 젊음, 돈, 예술이 어떻게 진보와 만났는지 재밌게 이야기해 주셨습니다. 우리의 삶은 과연 어떤 진보와 맞닿아 있을까요? ‘네 멋대로 해라’ ‘뜨겁게 안녕’ ‘ 불량소녀 백서’ 등 김현진 선생님은 여러 저작을 통해 젊음과 진보의 만남에 대해서 이야기해 왔습니다. “진보적 매체에 지면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나를 진보적 인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매체와 나의 글이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을 뿐”이라는 김 선생님은 진보가 무엇인지 솔직히 아직도 잘 모르겠다고 말합니다. 다만, 자신에게 중요한 것은 그때그때 비위에 맞는 일을 하는 것뿐이라고요. 김현진 선생님이 처음으로 삐딱(?)하게 나가게 된 계기는 대안학교 1세대인 자신이 고등학교에 다니던 시절 교장선생님과 대판 싸운 일이었습니다. 그 이후에도 계속 어떤 것이 내 비위를 상하게 하는지, 그것을 면밀히 검토하고 생각하는 사람이 되었고요. 한예종 사태 때 취재를 통해 처음으로 민주주의에 대한 고민을 시작했고, 그러한 고민은 홍대청소노동자 문제, 고공농성장 등으로 이어졌습니다. 김현진 선생님은 RT진보, 입진보를 경계하자고 합니다. 내 자식이 식당에서 서빙 일을 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내 자식만큼은 서울대에 다니는 진보적인 청년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말과 생각이 따로 노는 입진보가 될 뿐이라고요. 진보란 주변 사람들에게 비난을 듣더라도 자신의 정치적 주장을 할 수 있는 각오와 용기를 필요로 하는 것이라고 얘기합니다. 에듀머니, 대부업체의 냄새가 강하게 나는 이 이름의 사회적 기업은 말 그대로 ‘돈을 가르칩니다.’ 돈, 엄밀히 얘기하면 ‘돈을 쓰는 법’을 가르쳐주는 것이죠. 더 구체적으로 얘기하면 ‘돈을 주체적으로 쓰는 법’을 가르쳐준다고 합니다. 이 회사의 대표인 제윤경 선생님은 신용카드를 버리라고 말합니다. 광고를 가급적 멀리하고, 보게 되면 욕을 하라고도 합니다. 신용카드나 광고는 사람들이 필요와 선호를 생각하기 이전에 우선 충동적으로 그 물건을 구매하게 함으로써 결국 제돈 쓰고 유쾌하지도 않은 소비를 하게 한다는 것이죠. 그렇다고 돈을 쓰지 말라는 얘기는 아닙니다. 자신을 유쾌하게 하는 소비를 오히려 최우선순위에 두라고 합니다. 저축을 하되 자산을 형성하지 않는 저축을 하라고도 하십니다. 제 선생님이 만난 한 택시기사 분은 자신도 사업이 망해서 노숙을 하다 택시운전을 하게 되었는데, 승객들이 동전까지 탈탈 털어 택시를 타는 모습을 보고 짠한 마음이 들어서 이와 관련된 정책을 제안하시더랍니다. 진보란 함께 공감하고 더불어 살며 분노하고 그래서 뭔가 실천하고자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물론 그 실천을 위해서는 쫄지 말고 돈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하겠죠. 헤어스타일과 복장이 예사롭지 않은 김강 선생님은 강의 내내 혁명가에 어울릴 법한 엄청난 스케일의 사진들을 보여주시면서도 대수롭지 않게 “아님 말고!”를 외칩니다. 문래동 예술인 마을에서 오신 김강 선생님은 진보에 대해 잘 모르겠다고 얘기하면서 다만 “문래동에 처음 들어갈 때 우리 예술인들은 가난했고, 저기 빈 공간이 있으니 한번 들어가보자. 안되면 말고!”라고 생각했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고 합니다. 문래동의 빈 건물에 들어가기 위해, 그러니까 남의 건물에 불법적으로 들어가기 위해 점거연습까지 하는 철저한 이들은, 점잖은 윗분들이 보시기에는 정말 위험한 사람들임에 틀림없습니다. 나름 진보적이라고 자처하는 우리 수강생들조차도 “저래도 되나~” 싶었을 겁니다. 온 몸을 이용한 의사 표현은 물론이고, 주거권이나 공간의 확보 등을 위해 대사관 앞에서 침낭을 칭칭 감고 자면서 1인 시위를 한다거나, 캠핑카를 주거공간으로 개조해서 유쾌한 주장을 펼칩니다. 어쩌면 우리는 우리만의 진보의 틀 안에 갇혀 유쾌한 저항의 상상력을 자꾸만 상식 또는 법체계의 안으로 끌어들이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우선 저질러 놓고 보는 거죠, 안되면 말고! 그게 원래 늘 ‘합리’를 얘기하는 ‘보수’와는 다른, ‘진보’의 무기 아니었나요? 진보에 대한 다섯 번의 강의를 듣고나니, 언젠가 혜민스님의 페이스북을 통해 들은 이외수 선생님의 ‘존버 정신’에 대한 얘기가 생각납니다. 이외수 선생님이 혜민 스님을 만나 “우리에겐 존버 정신이 필요합니다.”라고 했답니다. 혜민 스님은 “존버 정신이 뭐죠?” 라고 물었고 이외수 선생님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스님, 존버 정신은 ‘존나게 버티는 정신’입니다.”라고요. 진보들의 ‘멘붕 탈출’을 위한 우리의 여행은 끝이 납니다. 누군가는 그 답을 찾고 누군가는 여전히 멘붕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겁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적어도 하나의 깨달음은 얻은 것 같습니다. 진보의 길은 한계도 없고 끝도 없다. 다만 늘 고민하고, 버티며, 계속해서 걸어하는 것 뿐이라고요.
후기 글 : 자원활동가 김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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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서 저자와 함께 읽는 한국 근현대사Ⅱ | [한국근현대사Ⅱ] 9강 답사 - 여운형에서 박정희까지 비운의 정치가들 | 느티나무 | 2012.11.9 | ||
교과서 저자와 함께 읽는 한국 근현대사Ⅱ | [한국근현대사II] 10강, 5.16은 불가피한 선택이었나 | 우연필연 | 2012.11.8 | ||
들어가며 안녕하세요. <교과서 저자와 함께 읽는 한국 근현대 II> 도 어느덧 막바지를 향해 가고 있습니다. 이번 시간에는 한국전쟁(남북전쟁) 이후 이승만 정권과 장면, 그리고 박정희 정권을 아우르는 역사를 다루었습니다. 이날 26분 정도가 참석하셨습니다^^ 이날 강의장에 한 시간 일찍(6시) 도착했는데 영상물을 상영하고 있었습니다. 영상물은 이 강의에 참여하시는 한 참여자께서 제공해주셨는데 역사적 자료를 바탕으로 이승만의 행적을 비판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습니다. 제 학창시절 근대사를 배우며 막연하게 생겼던 의문들이 이 영상물을 통해 점점 해소되어가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단절되어 있던 사건들 사이의 연결고리를 발견하거나 또는 그동안 잃어버렸던 퍼즐 조각들을 찾아 기억의 빈자리에 끼워넣는 것 같았습니다. 특히 중반에 윤봉길 의사가 남기신 글귀가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개인의 자유는 민중의 자유로부터 얻어진다.” 로 얼추 기억하는데, 보이는 글귀 자체에 우리의 가슴을 뜨겁게 하는 무언가가 담겨있는 것 같습니다. 이날도 이 선생님께서는 조금 늦으셨습니다..(30분^^;;;).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기다림이 길어질수록 강의에 대한 기대도 더욱 커지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 선생님의 강의는 역시 저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이번 시간에는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전후 한국의 역사를 다루었습니다.
국군포로 문제 한국전쟁은 근본적으로 같은 민족 간의 전쟁이다 보니 포로 교환이 잘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전쟁 초기 북한은 포로들에게 사상 교육을 실시하고 전향 여부를 물었다고 합니다. 이때부터 지금까지 풀려나지 못한 포로들을 우리 남쪽에서 추정하기로는 약 5만명 정도가 된다고 합니다. 그중 254명 정도가 파악되고 있는데 국군포로문제는 오늘날까지 복잡한 문제로 남아 있습니다. 또한 그동안 우리 쪽에서 북으로 보냈던 북파공작원의 수도 정확히 추산되지 않은 상황입니다. 이들을 대략 7천명 정도로 추정하는데 이중 미귀환자가 얼마정도 있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아마 정부는 알 수 도 있겠죠..) 이들의 송환은 정치적으로 더욱 민감한 문제일 겁니다.
2005년 8월 열린 제11차 이산가족 상봉에서 정현한 할아버지(왼쪽)가 국군포로로 생이별한 북측의 형 정진현 할아버지를 만나 얼싸안고 있다. 북한은 국군포로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이날 만남은 ‘특수이산가족 상봉’이라는 이름으로 이뤄졌다. 출처 : 세계일보
어느 국군포로의 수기에 따르면, 북한군 포로 수용소에서는 정신교육을 매일 실시했다고 합니다. 전쟁 직전에 월북했던 사람들이 선동하여 인민군에 입대를 권유했답니다. 이때 국군포로의 실상은 하루 식량은 안삶은 옥수수 배급 두 차례가 전부였기에 춥고 배고픈 현실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전향, 북한군에 입대했다고 합니다. 특이한 점은 당시 이렇게 북한군에 재입대 했다가 다시 국군에 포로로 잡힌 경우, 전향을 다시 하면 원래 소속인 국군으로 편입시켰다고 합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포로수용소에서 자대 배치를 받은 뒤, 전후 1980년대까지 감시를 당했다고 합니다. 이 수기는 이러한 처지에 놓인 국군포로가 증언한 내용이며, 이 분은 자신의 처지와 현실에 울분을 갖고 있었다고 합니다. 남북 모두 포로의 출신성분을 의심했습니다. 사실 상상조차 할 수 없이 힘들었던 당시이기에 우리가 어떻게 판단해야 할지 어려운 경우도 있습니다. 현재 북한에 있는 5만명의 포로들이 자발적으로 남은 것인지, 강제로 남은 것인지 알 길이 없습니다. 또한 우리의 경우 인민군인데 전후에 귀환하지 못한 사람들은 지리산에 빨치산으로 남겨졌습니다. 이들을 우리는 대한민국 국민이 반란을 일으킨 것으로 간주하여 처벌했습니다. 여담으로 이 선생님은 한국전쟁 때 세균전이 있었는지에 대한 의혹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당시 몇몇 증언이 있었다고 했는데, 만일 실제로 있었다면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또 국제적으로 금지된 대인지뢰가 전쟁중, 전후에 매설되어 한반도 도처에 있다고 합니다.
민주주의의 부재, 50년대 한국 정치 1948, 50, 52, 54, 56, 58, 60 순서대로 대선, 총선, 대선, 총선.... 이 실시되었다고 합니다.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은 한민당과 연합하여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당시 연합 정당인 한민당은 내각제를 선호했지만 이승만이 대통령 중심제를 주장했습니다. 결국 대통령 중심제가 관철되었고 나아가 내각 임명에서도 한민당은 배제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한민당은 야당으로 돌아서게 됩니다. 48년 초대 대통령 선거는 간접선거인 반면 52년에는 직선제로 바뀌게 됩니다. 이때부터 이승만의 위기이자 고민이 시작됩니다. 52년 5월 부산 정치 파동으로 헌법을 개정하는데 이때를 가리켜 ‘발췌개헌‘ 이라고 합니다. 대통령은 중임이 불가하기 때문에 이승만이 56년에 다시 대통령을 출마하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하지만 이승만은 다시한번 꼼수를 써 54년 초대 대통령에 한해 그 조항을 적용하지 않는 취지의 사사오입 개헌을 단행합니다. 60년대 선거에서 이승만은 대중의 인기가 없었습니다. 사실 이미 56년 선거 때 부통령에 장면이 당선되었고, 대통령 후보로 2등을 했던 조봉암도 이승만을 위협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장면암살을 시도하고 58년에는 가장 강력한 대통령 후보였던 조봉암을 간첩죄로 처형합니다. 그래도 불안해서 1960년 우리도 잘 아는 3.15 부정선거를 저지르게 됩니다. 60년대의 3.15 부정선거는 참 웃기는(?) 선거였습니다. 크게 세 가지 부정이 있었습니다. 사전 투표를 조작하여 지지율을 기본 4할로 맞추고, 3,6,9인을 짝지어 공개 투표를 실시했습니다. 그리고 야당 참관인을 투표 당일날 투표소에서 퇴장시킵니다. 자유당 유세에 버스와 트럭으로 청중을 동원하는 모습.
출처: http://dugok.x-y.net/kor-his/eve/3.15masan.htm
한마디로 말하면 50년대 한국의 정치는 이승만을 어떻게 대통령 만들 것인가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고 봐도 무방한 것 같습니다. 정의는 반드시 승리한다고 했던가요. 우리 국민들의 피와 투쟁으로 얼룩진 4.19 시민혁명을 통해 이승만 정권이 몰락하고 새 선거가 실시되었습니다. 이때 민주당이 당선되었는데 결과적으로는 아쉽게도 혁신과 개혁의 정치를 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5.16 군사쿠데타가 벌어지게 됩니다.
5.16 군사 쿠데타와 박정희 사실 이승만이 퇴진하고 5.16이 벌어지기 전까지 장면 정부가 있던 시기를 어떻게 보느냐의 문제를 두고 의견이 갈립니다. 5.16 쿠데타를 지지하는 세력은 4.19 혁명 이후의 대한민국을 큰 혼란의 시기로 인식합니다. 이러한 시기에 유일하게 근대화 교육을 받은 세력은 군대라고 주장하며 군대에 의한 쿠데타에 정당성을 부여하고자 합니다. 반대의 입장에서는 이 시기를 일종의 과도기로 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민주화와 근대화를 어떤 과정을 거쳐서 이루어가야 하는지의 문제입니다. 이를 둘러싸고 이 선생님은 몇 가지 논점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 4.19 혁명 이후 장면 정부의 혼란이 우리 사회의 발전을 위한 필요한 혼란이었는가 아니면 그냥 무능한 정부로 인한 혼란이었는가? - 박정희 대통령이 아니었어도 유사한 수준의 경제 성장은 가능했는가? - 민주화와 산업화가 같이 이루어질 수 있는가? 마지막으로 이선생님은 역사적 근거를 토대로 박정희의 행적을 알려주셨습니다. 박정희는 일제 강점기 일본의 위성국인 만주국의 군관이었으며 군관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혈서까지 썼습니다. 만주군 소위로 임관 한 뒤의 행적은 나타나 있지 않는데, 일본 패망 후 즉시 일본군을 탈출해서 광복군의 중위로 가입하게 됩니다. 한편 해방 후 친형 박상희가 남로당의 선전부장이었는데 경찰에 사살되자 이에 남로당에 가입하여 승승장구 하게 됩니다. 그러다 여순 사건을 계기로 군대 내 이른바 빨갱이 색출작업이 진행되자 박정희는 붙잡히게 됩니다. 옛 만주군관학교 출신들의 구명운동과 함께 남로당 내부 조직 정보를 누설하는 조건으로 석방되어 국군 정보 계통의 군인으로 근무합니다. 특이한 점은 박정희가 쿠데타 후에 대통령에 당선되었을 때 북한에서 친형의 절친한 친구를 특사로 파견합니다. 초창기에는 남북관계가 긍정적인 분위기였지만 미국에 발각되자 돌변, 친형의 절친한 친구이자 특사를 간첩혐의로 처형시킵니다. 여담으로 이 시기 박정희의 과거 기록을 지우기 위한 작업들이 진행되었다고 합니다. 국내 기록은 이미 거의 없앴고, 그나마 미국에 있는 자료들은 문서보관소에 가서 대출하고 반납을 하지 않는 방법을 통해 경력 ‘세탁’을 시도하였다고 합니다.
마치며 이선생님의 말에 따르면 우리는 경제성장과 관련하여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미국의 원조는 50년대 이후 중단되었으며 박정희 정부 시절 경제 성장 계획을 수립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민주주의와 산업화를 함께 진행할 수는 없었을까요? 박정희 정부의 집권 동안 경제 성장을 위해, 또는 정권 유지를 위해 희생된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경부고속도로의 신화 이면에는 경부고속도로를 짓다가 사망한 사람들, 또 중단되었다가 막바지 작업을 위해 투입된 군인들의 희생이 있습니다. 당시 학교 진학률이 저조했고 대부분이 공장으로 가서 일을 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보면 경제 성장은 한 개인의 공로나 업적이라기보다 우리 국민, 시민의 힘으로 이룩한 것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경부고속도로 추풍령 휴게소에 있는 경부고속도로 준공 기념탑
출처 : 루리웹 http://ruliweb.daum.net/news/view/MD20100204143607107.daum
끝으로 박정희 대통령 기념관과 관련하여 이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을 제 나름대로 재구성하면서 후기를 마치고자 합니다. 우리가 어떤 인물이 기념할만한 인물인지 아닌지 판단할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해답은 훗날 우리가 그 인물을 기념하는 동상이나 기념관으로 우리의 자녀들을 데려갔을 때, 자녀들에게 이 인물을 본받으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지 여부에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충북 옥천 옥천군 금강휴게소 인근에 세워진 '경부고속도로 순직자 위령탑'
건설현장에서 순직한 77명의 순직자를 기리기 위해 세운 탑. “조국근대화를 향한… 거룩한 초석이 된 것이니… 우리 어찌 그들이 흘린 피와 땀의 은혜와 공을 잊을 것이랴….” 출처 : 지역정보포털 http://www.oneclick.or.kr/contents/nativecult/area09.jsp?cid=805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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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크숍: 소심한 사람들의 유쾌한 꼼지락 – 소리를 내면 세상이 바뀐다 | [소심한 사람들의 유쾌한꼼지락] 2강, 뭐든지 괜찮아 아님말고 | 우진아빠 | 2012.11.8 | ||
'소심한 사람들의 유쾌한 꼼지락 : 소리를 내면 세상이 바뀐다' 2강 (11/05, 월)
1.
두 번째 강의다. 첫 강의의 여파(?)였는지~ 다들 익숙하고 편안한 모습이었다.
손체조를 시작으로 자연스럽게 강의가 시작됐다.
각자 이면지 종이 한 장씩을 갖고, 마음 내키는대로 3등분으로 잘랐다. 그리고서
첫번째 종이에는 '오늘 제일 많이 들었던 감정'
두번째 종이에는 '그런 감정 때문에 했던 행동'
마지막 종이에는 '그런 오늘의 나의 모습을 명사로 적었다.'
진행을 맡은 이래은 선생님은
각자 돌아가면서 발표를 시키며, 이것이 오늘의 작품명이라 했다.
각자가 발표하는 작품명을 듣고있자니 마치 '늑대와 춤을' 영화에서 나온 인디언들의 이름같았다.
'무덤덤해서 일을 잘한 토끼'
'초초해서 열심히 공부하려 한 빵순이'
'어이가 없어서 웃은 겨울'
'부끄러워 하루종일 쳐박혀 있던 감자'
'조마조마한걸 무시한 사슴벌레'
'약간 따스한 기분에 즐겁게 얘기한 양지쪽에 앉은 곰'
2.
세 명씩 짝을 지어 앉았다.
한 장의 종이에,
첫 번째 사람은 점,선,면을 기하학적으로 그리고
두 번째 사람은 이것을 기초로 그림을 완성하고
마지막 사람은 작품의 제목을 적었다. 그리고 매 번 순서를 바꿨다.
1분도 채 안 되는 시간에 작품이 하나씩 튀어나왔다.
이를 두고 한 참여자는
'생각이 역전되는 재미, 예측불허의 즐거움 있다'고 표현했다.
3.
이어서 오늘 초대손님으로 오신 박재동 선생님의 강의가 시작됐다.
너무 주옥같은 그리고 감명깊은 말씀을 해주셨는데
그 중 가장 인상깊었던 말씀을 인용하면서 강의 내용은 대신한다.
"일을 잘 하고 못하고의 차이는 목표르 어느정도까지 뒀냐? 라는 것에 차이다"
"1cm를 그려도 그림이다"
"부럽다는 생각이 든다면, 이미 여러분은 목표에 가까이 온것이다. 가능성이 있다. 너무멀리 있으면 그런 생각조차 안 든다"
"정치민주화, 경제민주화에 이어 예술민주화의 시대도 곧 올것이다"
"우리는 모두 그림을 그릴 권리가 있다"
그리고 모두다 눈을감고 머리속의 그림을 함께 그리는 시간이 있었는데,
가슴을 울리는 시간이었다. 그러나 아~ 짧은 글로는 그 감동을 전할 수가 없네~ 머리 속으로 그리는 그림, 장면#1 "푸른 바다가 있습니다" "흰 구름이 떠 있습니다." "큰 조개 안에 코끼리가 있습니다." "배가 떠 있고, 날치(?)떼가 배 위를 넘나듭니다." "갈매기가 날치떼 중 한 마리를 낚아 챕니다." 4.
마지막으로
요즘 선생님이 굉장히 관심을 갖고 계신 "낙서예술"을 모두가 함께 하면서 강좌는 마무리 됐다.
그리고 뒷풀이 시간때는 박재동 선생님이 손수 참여자들의 캐리커쳐를 그려주시는 팬 서비스도 함께^^
글 : 아카데미느티나무 천웅소 간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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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교육활동가 평화교육 워크숍: 누구나 맘대로 톡톡 | [네번째 세션후기]평화교육워크숍:누구나맘대로톡톡 - 나와 세계 | 느티나무 | 2012.11.6 | ||
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10월의 마지막 날, 평화교육 워크숍의 네번째 시간이 시작되었습니다. 진행자가 잔잔하게 안부 인사를 건네며, 지난 시간 레아씨와의 오감을 자극 받았던 워크숍을 놓친것을 안타까워 했어요. 1. 어떤 그림이 나왔을까요? 에그머니나! 한 사람씩 차례가 돌아갈 수록 갈등을 하게 되더라구요. 간단한 그림 그리기에서 무엇을 생각해 보셨나요? 2. 정체성 모자 예쁜 고깔모자를 써보았어요. '이주노동자'라는 고깔은 쓴 분에게 "냄새나 절루가", "짜증나", "너네 나라로 돌아가라" 라는 말을 내뱉었을 때, 3. 서울 v s비서울, 젋은 vs 나이듦, 학사이하 vs 석사이상, 영어가능자 vs 불가능자 제목만 봐도 짐작이 되셨나요? "내가 속한 그룹이 계속 달라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한쪽은 한국사회에서 우열하다고 여겨지는 그룹이고, 다른 한쪽은 그 반대의 경우같았습니다. 나는 한 쪽에 계속 서있었는데, 마지막에 다른 한쪽으로 불편한 다리를 잡고 옮겨 걸어가면서(몇주전 다리에 부상을 입어 거동이 조금 불편한 참가자였다)이렇게 나뉘어져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내가 속했던 그룹에 있던 사람들도 계속 바뀌고 있는 것을 관찰했습니다" 우리는 그저 다를 뿐인데, 이렇게 다름이 차별이 되는구나! 앞서 진행한 모든 활동을 정리하는 시간이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다시 내가 겪은 차별의 순간을 한 문장으로 적고 다른 사람과 교환한 뒤, 바뀐 내용의 차별에 대해서 마치 내가 겪은 이야기 처럼 조원들에게 그 상황을 설명하는 활동을 갖었습니다. 참 다양한 상황의 차별 이야기가 있더군요. 나이 많은 할아버지에게 차별 받은 젊은 여성의 사례, 차남으로서의 집안 내의 차별, 직장에서 권위에 대한 복종 강요... 내가 받은 차별이야기를 다른 사람이 설명해 주면서, 또 다른 사람이 동조해 주고 조언해 줄 때 나에게 따뜻한 위로의 이야기를 해주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질문, 여기 모여있는 16명의 생각이 얼마만큼 다를 수 있을까요? 결론적으로 각자의 생각은 "달라도 너무~" 달랐지요. <독재자가 군림하는 이웃나라에 미군과 한국군이 독재정권을 무너뜨리는 연합공격을 할 수 있다>라는 두번째 질문은 첫 번째 질문을 받고 협상하는 과정보다 조금 더 여유있고 빨리 줄이 세워졌다. 역시 이유는 다양했고 정도의 차이도 분명히 다르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다같이 돌림노래를 배웠습니다. 아프리카 지역에서 평화를 이야기 할 때 많이 부르는 노래라는 설명이 기억이 납니다. "툴라툴라마마 툴라 툴라마마 툴라 투라 에투투 - 움 움마에 움 움마에 움 투루루.......아에! 툴라투 툴라마마 툴라 예~띠 툴라투 툴라마마 툴라 오마에-띠" 그리고 오늘 세션을 모두 마친 뒤 짧은 소감을 날씨로 표현해 보았습니다. 여러분 오늘 날씨가 어떤가요? '기분 좋을 정도로 쌀랑한 바람이 부는 시원할 날'. '해가 쨍쨍한데, 그렇게 너무 쨍쨍하지 않아서 좋은 날', '비가 내려 나뭇가지 위에 물방울이 ㅤ맺혀 있고 그 사이로 쌍무지개가 떠있는날'. ' 구름 가득낀 하늘 어딘가 구름 사이 빛이 내리 쬐는 날', '맑은 하늘에 바람이 쉭-하고 지나가는 날', '무슨일이 벌어질 듯한 느낌의 따뜻한 바람이 지나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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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크숍: 소심한 사람들의 유쾌한 꼼지락 – 소리를 내면 세상이 바뀐다 | [소심한 사람들의 유쾌한꼼지락] 1강, 소심해도 괜찮아 그냥 한 번 꼼지락 | 느티나무 | 2012.11.5 | ||
'소심한 사람들의 유쾌한 꼼지락 : 소리를 내면 세상이 바뀐다' 1강 (10/29, 월)
1.
매우 흥미롭지만 한편으론 막연한 제목 탓이였는지,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질문을 동시에 받았던 강좌가 드디어 개강했다.
이 강좌 는 <민주주의학교>부류의 강좌에서는 몇 주 앞서 시작한 <평화교육워크숍>에 이어 처음으로 시도되는 워크숍 형태의 강의이기도 하다.
약 20명 정도의 인원이 워크숍 장소인 3층 중회의실에 모였다.
이들을 맞은 것은 난데없는 돗자리. 그러나 다들 주저 없이 신발을 벗고 돗자리에 둥글게 마주보고 앉았다. 그리고 언제 시작을 알리는 멘트도 없이 서로의 안부를 묻다가 자연스레 워크숍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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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으로 읽는 중남미 역사와 문화 | [문학으로 읽는 중남미 역사와문화] 1강, 체 게바라의 홀쭉한 배낭 | 놀이정신 | 2012.11.3 | ||
[인문학교] 문학으로 읽는 중남미 문화와 역사, 1강(10/31) 구광렬지음 | 실천문학사
너에게 묻는다 1. 강의를 맡아주신 분은 구광렬.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기도 하지만 사실 그는, 시인이다. 한국어로 쓰기도 하지만 주로 스페인어로 시를 쓰는, 그리고 그 스페인어 시를 스스로 한국어로 번역도 하는, 아주 특이한 사람이다. 이토록 특이한 분이 참여연대 느티나무홀에서 강의를 했다. 그것도 맨발로...
2. 첫 강의는 ‘체게바라의 홀쭉한 배낭’을 읽고 모이는 자리. 체게바라가 볼리비아 정부군에게 사살 당할 당시 소지하고 있었다는 배낭 안에서 발견된 초록노트 그리고 그 안에 필사된 69편의 시들에 대한 이야기가 이 책의 주요 내용이다. 그 69편의 시는 총 4명의 시인들 작품이었다. 칠레 출신의 파블로 네루다, 페루의 세사르 바예호, 쿠바의 니콜라스 기옌, 스페인의 레온 펠리뻬. 책의 중간 중간 그들의 시가 실려 있어 체게바라가 게릴라전을 펼치던 전장에서 어둠을 밝혀가며 읽고 필사했던 시들을 함께 감상할 수 있던 시간이었다. 체게바라가 웬만한 월드스타 못지않게 유명한 탓도 있고 전에 평전을 읽었던 기억도 있고 해서 책의 내용이 새삼스럽진 않았지만 문학과 혁명의 그 이상하리만큼 끈끈한 관계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된 듯하다. 아니, 그저 상상을 해 보는 거다. 하루하루 목숨을 걸고 싸우는 전장에서 배낭에 시집을 넣고 다니는 마음이란 어떤 걸까. 피곤한 육신을 누이고 쉬게 하는 그 짧은 휴식의 순간에 시 한편을 노트에 베껴 적는 마음이란 대체 무엇인가.
세계인들의 무한한 사랑을 받고 있긴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안티-체로 활동하고 있는 이들도 많은 모양이다. 그 중에서 책에 소개된 유명한 안티-체 인사는 아르헨티나 출신의 칼럼니스트 후안 호세 세브렐리. 그는 다각도에서 체를 비판하고 있다. 그중 한 대목,
“게바라주의는 마르크스주의 혹은 정통사회주의와 충돌하는 것이다. 체게바라는 자연스런 해방을 교조적 카리스마로, 인민동원을 개인적 소집 차원에서, 사회민주주의를 정치적 독재로, 빈자와 노동계급을 농부로, 객관적인 조건들을 주관적인 의지로, 오로지 선진사회에서만 가능한 사회주의를 가장 가난한 국가에서 실현시키려 했다.”
내용이 어려워 몇 번 반복해서 들여다보니, 결국 이 비판의 많은 부분이 체의 개인적인 매력과 카리스마에 대한 것들이라 가벼운 웃음이 났다. 인민동원을 개인적 소집 차원에서 이끌어냈다는 비난의 부분이 무척 우습다. 게릴라 시절 그가 지나가면 사람들이 농기구를 들고 그의 뒤를 따라나섰다고 하는데, 이렇게 치명적인 매력을 지닌 게 잘못이라고 지적하는 이 남자의 얼굴이 문득 궁금해졌다. 더욱 가관인 것은 객관적인 조건들을 주관적인 의지로 바꾸고 변화시키려 했다는 부분... 객관적인 조건들을 오로지 자신의 신념과 의지로 넘어서려 하는 게 게릴라들의 본분 아니던가, 그게 바로 혁명의 골자가 아니던가 말이다. 천식을 앓으면서도 평생 싸움의 현장을 누볐던 게바라의 착한 눈매에서, 고열에 시달리면서도 밀림 속을 몇 십일씩 걸어다니며 투쟁했던 호치민의 깡마른 살갗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었던 건 그들의 지닌 그 강인한 의지와 정신력이 아니던가. 체를 향해 정치적 바보라 칭했다는 이 인사를 향해 더 이상 주저리주저리 떠드는 일은 여기서 그만 두는 게 오히려 체에 대한 예의가 아닐까 싶다.
문학과 혁명으로 체를 그려내는 책의 내용 때문인지 문득 요즘 읽고 있는 다른 책이 떠오른다. 책과 혁명에 관해 쓴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이란 책이다. 책을 읽는다는 것, 책을 쓴다는 것은 책을 다르게 읽는다는 것과 책을 다르게 쓴다는 것이고 이 행위는 오로지 그 행위 자체로서도 이미 혁명임을 11-12세기에 걸쳐 일어났던 ‘중세해석자혁명’과 ‘루터의 대혁명’, 이 두 사건의 재조명을 통해 밝히고 있는 책이다. 어려운 논증의 과정을 거치지만, 거칠게 설명하자면 이런 거다. 신의 말씀의 왜곡되어 인간의 삶을 옭아매고 있던 중세에 루터가 한 일은 성경을 되풀이해서 읽는 행위, 오로지 그것 하나였다. 그 행위 하나를 통해 세상이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 성경과 신의 말씀은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치는 과정, 그것은 진정한 혁명의 행위였음을... 그래서 책을 읽는다는 건 곧 혁명이며 그런 불가능한 책읽기를 우린 어렵더라도 읽어내야 한다는 것.
체게바라도 그랬던 게 아닐까. 시를 읽으며 그 시가 자신의 눈앞에서 목격하는 낮은 자들의 남루한 삶과 별개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던 날들, 시를 읽으며 분노하고 눈물짓던 그 시간을 자신의 삶에서 지워버리지 않으려 발버둥치던 순간들. 그의 배낭에 들어있던 시집은 학문과 예술의 한 갈래로서가 아니라 그저 가지지 못한 자들, 너무나 쉽게 모든 걸 빼앗겨야 하는 이들의 삶 한 조각이었는지도 모른다.
3.
그러고 보니 시를 찾아 읽은 지도 아니 서점에서 시집을 사지 않은 지도 너무 오래되었다. 젊은 날 읽었던 그 많고 많은 시 중에서 오늘은 유독 안도현의 ‘너에게 묻는다’가 떠오른다.
너에게 묻는다 연탄재 함부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결국 소설은, 시는, 문학은, 책은, 나에게 ‘묻는’ 놈들이다. 나의 부끄러움을 가리키며 말이다.
글 : 박현아 자원활동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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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서 저자와 함께 읽는 한국 근현대사Ⅱ | [한국근현대사Ⅱ] 8강, 진주 외공리 산 속에 묻힌 사람들. | 우연필연 | 2012.10.31 | ||
10.18일에 있었던 한국근현대사 II 강좌 후기입니다. 늦은 후기 죄송합니다 ^^; 들어가며 오늘 강의는 이선생님께서 지방출장 다녀오신 관계로 조금 늦게 시작되었습니다.(그래봐야 5분정도 늦으셨습니다^^;) 눈에 띌 정도로 지난 시간보다 훨씬 많은 분들이 아카데미에 나와주셨습니다. 세어보니 대충 25분 오셨는데 남성은 저와 자원활동가 선생님 포함 여섯 명이었습니다. 다음 학기 역사 강좌에는 많은 남성분들이 관심 가져주시길 기대합니다.. 오늘은 지난 시간 다루지 못한 토지개혁 부분을 마무리하고 남북전쟁(6.25)과 관련한 쟁점들을 이야기 나눠보았습니다.
위안부의 그림자 흔히들 ‘위안부 문제’ 하면 일제 강점기 시절 일본군에 강제로 동원된 위안부 여성들을 떠올리실 겁니다. 그러나 6.25 시절 한국군에서 기생촌을 운영하였는데 이 때 위안부에 동원되었던 여성들이 다시 동원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베트남 전쟁 시기 현지 여성들을 중심으로 우리 군대에 위안부와 유사한 형태의 조직이 있었다고 합니다. 어쩌면 위안부 문제는 과거에 벌어진 일제의 만행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를 포함한 전세계에서 자행되고 있는 문제일지도 모릅니다. 출처 : http://www.koreahealthlog.com/719
북한사(史)? 그동안 우리는 한반도 3.8선 이남의 역사를 우리 대한민국의 역사로 배웠습니다. 국사책은 8.15 해방 이후부터 한반도 남쪽에서 벌어진 사건들을 중심으로 근현대사를 기술하고 있습니다. 공식적으로 북한사는 우리 대한민국의 역사로 인정받지 못합니다. 뉴라이트 계열 학자들 뿐 아니라 대부분 북한사를 알지 못하며 부정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생각해볼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 헌법은 우리 영토를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 헌법을 따른다면 8.15 해방부터 지금까지의 북한 역사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북한의 역사와 관련된 논쟁은 세 가지 정도로 말할 수 있습니다. 1.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우리나라에서 북한사를 어떻게 자리매김해야 할까요? 2. 남한에 진주한 미군은 해방군이고 소련군은 점령군일까요? 당시 미군은 직접통치를 하고 소련군은 간접통치를 했다고 합니다. 미군의 역할은 근현대사를 통해 잘 알고 있지만 소련군의 경우에는 잘 알지 못합니다. 당시 북측에 진주한 소련군의 입장은 “조선의 새로운 국가는 조선인이 건설하는 것이다.” 였다고 합니다. 대신 정치위원회 설립 시 소련이 강제로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를 1:1 비율로 구성했다고 합니다. 상대적으로 소수였던 공산주의자에게 유리한 조건인 것입니다. 3. 사회주의 혁명인가? 당시 북측에서는 조선노동당 창건을 전후한 1949년 8월부터 10월 사이의 사건들을 사회주의 혁명이라 하지 않고 인민민주주의 혁명으로 불렀다 합니다. 당시 레닌, 스탈린 등이 주장한 ‘사회주의 혁명’ 은 일반적으로 다음의 네 가지 조건을 갖춰야 했습니다. 첫째, 노동자와 농민이 연합한 정권, 둘째, 사유재산 불인정, 셋째, 상공업을 허용하지 않을 것, 넷째, 토지개혁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하지만 그 당시 북측은 토지개혁만 실시했기 때문에 사회주의 혁명이라 부르지 않았던 것입니다. 1970년대 이후 사회주의 혁명으로 규정한 것이 오늘날까지 이어져왔다고 합니다.
북한의 토지개혁 북한의 역사는 우리 학교에서 다루지 않으며 일반 대중이 접하기 어렵습니다. 특히 북한의 토지개혁은 북한 정권 수립 시기와 맞물려 있기에 우리들은 그 내막을 잘 알지 못합니다. 몰수대상은 일본인의 토지와 일본의 국유지, 친일파와 지주들의 토지였습니다. 지주들의 경우 5정보(1정보: 3천평)이상을 소유한 지주들의 토지를 전부 몰수했습니다. 법령 시행 전까지 기부하면 상관없기 때문에 지주들이 5정보가 안될 정도로만 남기고 다 기부하여 토지 강탈을 면했다고 합니다. 실제로 농사짓는 농민들만 분배대상이었으며 토지개혁에 대한 저항은 미미했고 상당수의 지주들이 월남했다고 합니다. 당시 종교단체의 토지도 몰수했기 때문에 종교적인 기반이 약화되었다고 합니다. 특히 특정 종교나 마을 지도자를 중심으로 잘 운영되던 마을 공동체가 토지개혁을 둘러싸고 계급 간 갈등으로 비화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한국전쟁? 남북전쟁? 1950년에 발발한 남측과 북측의 전쟁을 우리들은 6.25, 혹은 6.25사변, 한국전쟁으로 말합니다. 우리는 한국전쟁으로 통일했고, 북측은 조선 전쟁이라 부른다고 합니다. 민족의 비극인 한국전쟁에 대해 생각해볼 점들이 있다고 합니다. 우선 전쟁이 6월25일에 일어났는지의 문제입니다. 이선생님 말씀에 따르면1950년 6월 25일 전에도 38선을 중심으로 소규모 전투가 빈번하게 있었다고 합니다. 그 다음은 한국전쟁 혹은 남북전쟁이라 불리는 이 전쟁을 누가 시작한 것으로 볼 것인지의 문제입니다. 이 전쟁은 국제전으로 확대되었으며 총 21개 국가가 참여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우리 남측을 도와준 16개국과 남북, 그리고 중국, 소련, 일본 도합 21개 국가입니다. 전쟁 전 이승만 대통령은 북진통일을 주장했고 김정일 또한 남진통일을 주장했다고 합니다. 49년 당시에도 소규모 전투가 빈번했다고 합니다. 전쟁의 시작을 6.25로 보는 것이 문제 있다고 이선생님께서는 말씀하셨는데, 이 대목에서 저는 약간의 의문이 들었습니다. 비록 6.25 전에 소규모 전투가 계속되었다 해도, 만일 북측에서 6.25일에 맞춰 대대적으로 탱크와 무기를 준비하여 한꺼번에 밀고 내려왔다면 그때부터를 전면적인 전쟁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오늘날 연평도 사건과 같은 북측의 여러 군사적 시도들을 도발이라고 하지 전쟁이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전투의 양상이 점점 확대되어 시작 시기를 가늠하기 어려운 경우는 있을지 몰라도, 대규모 군대를 동원해 전면적으로 밀고 내려왔다면 그때부터를 전쟁의 시작으로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요?
이 땅에 전쟁이 남기고 간 깊은 상처들 하지만 전쟁을 이데올로기적인 시각이 아닌 다른 측면에서 바라보면 우리가 그동안 보지 못한 참상들이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진주 외공리에서 600여구의 유골이 머리에 총탄자국이 난 채로 발견되었습니다. 당시 유골의 의복에 달린 명찰로 경기도의 모 상고 학생도 포함된 것을 확인하였습니다. 대부분은 부녀자였다고 합니다. 한국전쟁 당시 누가 이들을 정확히 언제 죽였고, 이들이 왜 죽었는지 지금도 밝혀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러한 한국전쟁의 미해결 사건들이 많다고 합니다. 한국전쟁 초기 남한 정부에서는 평택 이남의 형무소에 있는 사상범을 모두 처형하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합니다. 보도연맹에 가입한 1500명이 처형되고 도합 3천여명이 처형된 사건이 보도연맹 사건입니다. 또한 전쟁 중에 많은 피난민들이 군인들에 의해 학살당했습니다. 한편 전쟁 초기 북측이 서울을 점령했을 때 잔류파 국회의원 중 54인의 국회의원이 전향했다고 합니다. 잔류파 국회의원들 중 김규식, 조소암과 같은 민족주의자는 자의로 남고 나머지는 한강다리가 폭파되어 못간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인민군의 공작도 있었지만 전향한 사람들은 공산당 지지성명을 했습니다. 반면에 일반 민중들은 살기위해 부역을 했습니다. 이들은 훗날 북진할 때 공산당에 협력했다는 이유로 처형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부역 혐의로 민간인을 학살한 사건들이 오늘날 많이 밝혀졌는데, 고양시 금정굴에서는 1천여명의 민간인이 부역혐의로 굴 안에서 처형되었고 그 유골이 발굴되었습니다. * 외공리 유골들. 출처 ; http://blog.ohmynews.com/malddug/
마치며 이선생님께서는 우리가 이데올로기적 시각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데올로기가 아닌 전쟁의 참상 그 자체를 놓고 일반 백성, 시민들의 입장에서 바라보았을 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이데올로기적인 입장에서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기에 아직도 이 땅에 많은 이산가족들과 여러 피해자들이 고통 받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여전히 왜 죽었는지도 모르는 수많은 유골들이 이 땅 어딘가에 묻혀있다는 생각을 하면 가슴이 아픕니다. 인간 생명에는 이데올로기가 없습니다. 진정한 역사는 이데올로기가 아닌 휴머니즘으로 쓰여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다음시간에는 답사가 예정되어 있습니다. 해방 직후에는 북촌이 정치적으로 중심지였다고 합니다. 여운형, 박헌영 등이 건국준비위원회로 활동하던 장소를 방문해 그들의 자취를 짚어보고 그 후에 박정희 대통령 시절과 관련된 청와대 주변의 여러 장소들을 둘러보는 코스로 예정되어 있습니다. 이날 강의 후에는 강의실에서 간단한 안주와 함께 맥주를 마시며 뒤풀이를 했습니다. 많은 참여자분들이 남으셔서 열띤 토론을 했는데, 여러모로 유익하고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언젠가는 강의실 밖에서도 이러한 자리가 마련될 수 있기를 기대하면서 10월 18일 강좌 후기를 마치고자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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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경제위기와 경제민주화 | [세계경제위기와 경제민주화] 3강 장석준, 99%, Too big to fail | Oversmiler | 2012.10.30 | ||
3강, 99%, Too big to fail
[2012 강좌 후기 ③] 신자유주의가 답이 아니라면 우리의 미래는 어디로?
장석준 진보신당 상상연구소 부소장의 강의는 2008년 미국 월스트리트에서 발생한 금융위기가 그 이후 어떻게 세계 전체에 영향을 미쳤고, 정치 사회적 변혁을 촉발시키게 되었는지를 소위 "1968 세계혁명"이라고도 불리는 68년 당시의 상황과 비교하며 설명한다. 이 강의에 귀를 기울이다보니, 1968년의 상황은 물론 2008 서브프라임 사태와 2011 아랍의 자스민 혁명 당시에 그 사태들이 인류와 역사에 주는 의미, 영향에 대해 무관심 했던 나를 돌아보게 되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경제의 새로운 주류로 등장한 케인즈주의 경제는 44년 발동된 브레턴우즈 체제와 더불어 "자본주의의 호황기"를 누리며 30년 동안 승승장구한다. 이 기간 동안 한국을 비롯한 신생독립 국민국가들이 다수 생겨나고 유럽에서는 복지국가가 등장했으며, 노동자조합의 세력도 날로 번창하며 소위 "진보의 시대"가 꽃을 피운다. 그러다가 자본과 노동의 세력이 모두 막강해진 70년대에, 장석준 부소장에 따르면 이 두 세력간의 전면 대결이 불가피해졌고, 이 대결에서 자본의 세력이 승리함으로써 신자유주의가 등장하게 되는 배경이 된다고 그는 해석한다. 자본과 노동간의 '권력투쟁'이 신자유주의를 촉발하게 되었다는 정치, 사회학적인 해석은, 선뜻 수긍이 가지는 않았지만, 흥미로운 해석이라고 생각되었다.
1971년 닉슨쇼크로 말미암아 브레턴우즈 체제가 붕괴되면서 불안정성과 휘발성이 증폭된 경제는 영국의 외환위기, 프랑스 미테랑정부의 개혁 실패, 라틴아메리카의 외채위기, 동아시의 외환위기, 미국의 닷컴버블 붕괴 등 수많은 금융 및 경제위기를 촉발시킨다. 이 과정에서 자본주의는 노동과 남반구를 제압하는 금융자본주의가 주도하는 시대로 돌입한다. 그런데 금융세력의 경제지배, 민영화 등으로 대표되는 신자유주의가 확대되는 과정에서 "대중자본주의"이론으로 설명되는, 노동자 세력들의 동의 과정이 있었다고 한다. 대중이 스스로를 자본가라고 여기고 자신도 주식투자, 부동산투자를 통해 큰 돈을 벌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안고 말이다.
그럼 이제 2008년 미국 금융위기 이후 전세계에서 일어난 변화들을 살펴보자. 2009년 미 금융위기의 직격탄을 맞은 아이슬란드의 경제가 붕괴하고 영국 대학생들의 등록금 인상 반대시위 ,칠레에서의 시위가 일어나고 튀니지에서 한 대졸 무직자의 분신을 계기로 일어난 민주화 열풍이 이집트, 리비아, 시리아, 예멘 등 아랍세계로 퍼져 나갔다. 또한 금융위기의 여파로 재정위기에 몰린 그리스, 스페인, 포르투갈 등 남부유럽에서도 긴축정책에 반대하는 시위가 연이어 일어났다. 일련의 사건들의 결과로 아이슬란드에서는 긴축정책을 거부한 좌파-좌파 연정이 들어섰고 아랍 일부 국가에서는 독재정권이 무너졌으며 그리스에서는 '급진좌파연합'이 2차 총선에서 27%의 득표를 받아 제1야당이 되었다. 그리고 2011년 드디어 위기의 본산지인 월스트리트에서 "월가를 점령하라", "우리가 99%다"와 같은 금융자본에 맞서는 시위가 일어나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2008년 이후 전세계적으로 일어난 시위, 투쟁이 1968 혁명과 같은 점은 청년층이 투쟁의 중심이라는 점이다. 반면 다른 점은 68년 시기의 청년들은 안정된 일자리가 보장되어 있었지만 현재의 청년들은 일자리가 막혀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차이점은 SNS 와 같은 정보통신기술로 말미암아 권력이 수평화되었다는 점이다.
한편 "점령하라"로 대표되는 청년층 주도의 사회운동의 한계와 도전과제는 무엇일까? 지금까지 대다수의 노동자, 서민, 중산층은 신자유주의를 떠받치고 있는 세력으로도 볼 수 있지만, 이제는다수의 지지를 받는 개혁을 정말로 실현시킬 수 있도록, 이들이 개혁적인 정치세력과 결합하는 소위 '정치세력화'가 필요해 보인다.
현재 우리는 어디에 서 있는가? 2008년 금융위기 이전 폭발적인 호황과 성장이라는 화려하기 그지없었던 잔치 후에 지금은 끝이 보이지 않는 긴 불황의 터널 속에 있다. 신자유주의 경제 체제 하에서 서민들과 중산층의 삶은 더욱 어려워지고 양극화도 계속 심화되었다. 기득권과 가진 자들은 자신들이 가진 것을 내놓기에 인색하고, 권력을 쥔 자본세력은 정치권과 노동자들의 요구를 가능한 한 외면하려고 하고 있다. 게다가 기후변화를 포함한 전 지구적인 환경위기까지 겹쳐 인류의 생존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이다. 쉽지 않겠지만, 희망을 가지고 인류가 앞으로 매진해야 할 과제는 화폐, 금융 제도 개혁을 통해 친환경적이고 지속가능한 경제 체제를 구축하도록 노력하고, 안정된 경제체제하에서 정치, 경제, 사회 전반적인 민주화를 이루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민중 각자가 정치, 경제, 사회의 문제에 대해서 자신의 일처럼 관심을 가지고 적극 참여하며 끊임없이 개혁을 이루어나가도록 서로를 북돋워주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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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교육활동가 평화교육 워크숍: 누구나 맘대로 톡톡 | [두번째 세션후기]평화교육워크숍 : 평화의 비전 세우기 | 느티나무 | 2012.10.26 | ||
지난 10월 17일 평화교육 워크숍 두번째 세션의 문이 열렸습니다. 먹을 것이 있으면 낯빛이 밝아지고 기분도 좋아 지는 법^^ 출출함을 달래니, 오늘은 어떤 평화로의 여정을 걷게 될지 궁금했습니다. 손과 손이 만난 다는 것 동그란 원에 둘러 앉은 참여자들이 한 명씩 일어나 손을 내밀며 인사를 했어요. " 안녕 (산책) 좋은 아침이야" 한 바탕 인사를 하고 나서 피티의 첫 느낌은 '아주 예쁜 삽화가 그려진 동화책이구나' 였어요. 무심코 봤으면 삽화와 글을 읽어며 아는게 병이다? 갈등의 해결 나와 국가와 세계 폭력 이후의 상황 대안 어떤 지도력 어떤 정체성 동화책에 표현된 각종 상황을 키워드를 통해 짚어 내며 각 조별로 완성한 평화의 비전 꽃이 어떤가요? ^^ 각각의 생각을 협의를 통해 하나로 모으기에 시간이 참 많이 걸린다는 것도 알게 되었어요. 듬성듬성 비어있는 꽃 잎은 앞으로 네번의 세션이 진행되는 동안 채워갈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모든 결과물들은 워크숍 내내 느티나무홀 벽에 붙여 둡니다.) 10월 27일 토요일 오전 10시부터 필리핀에서 오는 레아씨와 함께 웃고 뛰고 노는 세번째 시간을 기대하며! 소략한 2번째 세션 후기를 마칠게요. 소감은 참여자들 각자가 자유롭게 나눌 수도 있겠지요? ^^ 그럼, 다음 시간에 뵐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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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경제위기와 경제민주화 | [세계경제위기와 경제민주화] 2강 정세은, 유럽 재정위기와 복지의 미래 | Oversmiler | 2012.10.23 | ||
2강, 유럽 재정위기와 복지의 미래, 충남대학교 정세은 교수
경제학 용어는 외계 언어처럼 어렵습니다. 강의 서두에서 PIIGS라는 단어를 듣고 '읭? 웬 돼지?'라고 생각했던 경제바보는 유럽의 재정위기라는 말을 처음 딱 들었을 때, '과도한 복지지출'과 '방만한 재정 운용' 이 정도를 떠올렸습니다. 그런데 정세은 교수는 단호히 "복지 때문이 아니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의 재정위기는 사실 유로존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적은 나라라 볼 수 있어, 조기에 잘 해결될 수 있는 문제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유로존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주도적인 두 나라, 독일과 프랑스는 그리스의 채권을 많이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 문제를 신속하게 해결하지 못했고, 결국 이 불똥이 아일랜드와 포르투갈로 튀기 시작했습니다.
한국의 경우에도 1997~8년 이러한 재정위기를 겪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 국민들은 열심히 금도 모았지만, 결국 이를 극복하게 해주었던 중요한 두 가지 동력은 '원화환율의 절하'와 '수출의 증가'였답니다. 그러나 그리스는 유로존 안에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환율 정책을 쓸 수 없었고 확장적인 재정정책을 펴기도 불가능했다고 합니다. 즉, 그리스에서 촉발된 유럽재정위기의 원인은 과도한 재정지출 문제도 있지만 유로존 자체가 가진 문제가 더 컸다는 것이죠. 그리고 이러한 유로존 자체가 가진 문제는 상당부분 독일의 근린궁핍화 정책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유럽의 경우에는 임금의 결정방식이 나라마다 각자 다르며, 이러한 요인으로 인한 물가상승률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는데, 독일의 입김이 센 유럽중앙은행은 여전히 남유럽 국가들의 수출에 불리한 환율과 이자율을 적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독일은 1998년 사민당이 정권을 잡고 2년간의 좌우파 노선 투쟁 과정에서 슈뢰더가 집권하면서 우파사민주의가 득세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들은 '아젠다2010' 이른바 '하르츠개혁'이라는 개혁정책을 발표했는데, 이 주요 내용은 노동의 유연화와 사회보장의 축소, 즉 일하는 사람한테만 근로복지의 혜택을 주겠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독일은 실제로 이 과정에서 노동자의 임금을 많이 낮췄고 가격경쟁력을 가지게 된 반면, 이러한 개혁을 하지 못했던 남유럽의 경우에는 실질이자율이 낮아지면서 주변 국가로부터 돈을 많이 꾸는 유인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부채가 증가하고 수출이 감소하는 결과를 초래한 것입니다. 게다가 유로존에 가입함으로써 자본 이동이 수월해진 독일의 기업들이 자신들의 나라에 직접투자할 것이라던 기대는 실제로는 이러한 자본과 설비가 동유럽으로 집중되면서 산산조각 나고 말았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도 한 번 외쳐볼까요! 문제는 복지가 아냐! 그렇게 재정이 걱정되면 괜한 재벌이나 대기업들의 세금이나 왕창 깎아 주지마! 우리가 낸 세금으로 멀쩡한 4대강이나 파지마! 라고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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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사회,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 <위험사회,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5강 - 보이지 않는 위험, 나노기술 | 공채원 | 2012.10.20 | ||
아카데미느티나무 20102 가을강좌 [민주주의학교] 위험사회, 어떻게 살것인가 5강(10/10) 후기
나노기술이란 바이러스 보다도 작은 물질단위를 다루는 기술을 의미한다. 흔히 분자의 조합구조를 변형시키거나 원자를 인위적으로조합하여 미립자 상태로 존재시킴으로써 화합물의 반응성을 극도로 향상시키는 것을 의미하곤 한다. 한때 인기를 끌었던 은나노세탁기는 은에 원래 존재하던 살균성을 나노기술로 극대화시킨 예이다. 나노물질은 매우 작은 입자들이 덩어리지지 않고 서로 간격을 유지하고 있어 표면적이 넓어지는 효과를 가져온다. 이에 따라 단위물질당 반응성도 급격하게 커지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나노기술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나노물질은 크기가 매우 작으므로 표피세포 사이를 비집고 인체에 유입되거나 심지어 세포 안으로 투과될수도 있다. 만약 이런 일이 발생한다면 나노물질은 반응성이 극도로 높으므로 인체의 활동에 장애를 초래하거나 세포를 변형시킬 수도 있다. 다행이라 할 수 있는 것은 나노기술의 경우 발전 초기부터 기술에 대한 통제의 문제가 지속적으로 제기되어 왔다는 것이다. 덕분에 나노기술 연구소에 사회학자가 참여여 통제의 문제를 고민하고 정부 및 환경단체의 지속적인 감시가 이루어짐에 따라 기술의 진보와 통제가 비교적 동시성 있게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종종 '기술에 대한 통제의 딜레마'라는 표현을 접하곤 한다. 이는 기술 발달 초기엔 기술 자체에 대한 이해가 이루어지지 않아 통제가 불가능하고 기술이 어느정도 발전하면 기술이 통제가능 범위를 넘어섬에 따라 통제 자체가 불가능해진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다. 나노기술은 다행히 기술 발달 초기부터 기술에 대한 사회의 통제가 꾸준히 추구되고 있는 최초의 기술 분야이다. 지금 인류는 기술에 대한 효과적이고 효율적인 통제에 목마르다. 과연 나노기술이 그 첫 성공 사례가 될지 세상은 그 결과에 주목하고 있다. 강의 : 김병윤, 시민과학센터 운영위원 / 서강대 연구교수 후기 : 공채원 자원활동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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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 다른 이름으로 저장하기 | <진보, 다른이름으로 저장하기> 4강, 진보정치, 새로운 탄생은 가능한가 | 스피노 | 2012.10.19 | ||
아카데미느티나무 20102 가을강좌 [민주주의학교] 진보, 다른이름으로 저장하기 4강(10/15) 후기 ① 1강 <21세기 진보의 재구성> 후기 다시보기 >> 클릭 ② 2강 <21세기 진보의 재구성> 후기 다시보기 >> 클릭 ③ 3강 <21세기 진보의 재구성> 후기 다시보기 >> 클릭
이번 수업은 노회찬의원이 강의해주셨습니다. 지금 진보정의당의 창당 준비위원회에 몸 담고 있다며 소개해주신 의원님, 진보가 초창기에 정치에서 보이기 시작했을 때부터 진보진영에 있었다고 말씀하시며, 이번이 세번째 창당 준비위원회에서 일하는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노회찬의원은 학생 때는 학생운동을 했고, 그 이후에는 노동운동을 했는데, 그 후 정치인이 되겠다고 하자 주변에서 만류가 많았다고 합니다. ‘어느 당에 갈 것이냐’라는 물음에 새로운 당을 만들겠다고 하니, 더욱 자신을 아끼는 사람들의 만류가 컸다고 합니다. 지난 30년간 진보 정치 세력에서 계속 있으면서 시행착오도 많았지만 그 속에서 이뤄낸 성취도 많다고 자평하셨습니다. 또한 노회찬의원은 작년 통합진보당 창당을 할 때부터 여러 가지로 충돌이 일어날 수 있을 것이라 예상했으나 이렇게 빨리 파열음이 나올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었고, 죄송한 부분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번에 심상정의원의 대선출마와 관련해서는 그래도 진보에서 대선후보가 나와서 정책이라던지 국민들에게 메세지를 전달하고, 방향을 제시하는 역할을 해야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다 나중에 특정 후보의 지지를 표명하는 것도 한 방법이고, 가치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하셨습니다. 군사정권이 무너지고 민주와 보수의 대결은 그 의미를 잃게 되었고, 이제는 보수와 진보의 대결이 되고 있습니다. 그에 따라 진보를 이야기하는 사람이 많아지고, 진보를 원하는 사람이 늘어났는데, 진보 정치인들이 이런 요구와 목소리에 잘 대응하지 못한 것 같아 안타깝고 송구스럽다고 전하셨습니다. 요즘 새누리당도 통합민주당도 복지정책을 보면 어느 쪽이 보수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이런 공약들이 과연 거짓인지, 사탕발림인지는 봐야 아는 것이겠지만, 이렇게 보수가 지지 세력을 포섭하기 위한 움직임으로 인해, 진보세력의 정책들이 그 빛이 바래지는 일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이런 부분에 있어서, 노회찬 의원은 덧붙여서 과거에 정책을 만들 때, 조언해주고 함께 했던 사람들이 민주당 행을 택하는 것을 보면, 진보세력의 힘이 약하구나, 세력을 구축하지 못했기 때문에 저 사람들을 포용하지 못했구나 라는 반성을 하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저를 포함하여 ‘진보, 다른 이름으로 저장하기’ 듣는 사람들은 요즘 여러 상황들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에 대해 궁금했습니다. 또 ‘진보는 정말 안되나?’ , ‘언제쯤 진보가 제 목소리를 내고, 달라진 생활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던졌습니다. 브라질은 우리보다 10년정도 그 정치의 변화가 앞서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큰 흐름들이 10년정도 빨리 진행되었으니, 우리도 진보가 집권하는 시대가 곧 오지 않겠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에게도 진보가 집권해서 생활이 달라지는 날이 오기를 바랍니다. 노회찬의원은 앞으로 어떤 진보를 지향하는지에 대해서는 ‘브라질’의 사례를 들며 ‘다원적 민주주의’가 이뤄지는 진보여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브라질 진보세력은 다수의 원칙 속에 각자 세력이 자신이 생각하는 정책을 연구하고, 표를 가장 많이 얻은 정책을 당의 뜻으로 내세우며, 진보라는 이름 속에 여러 진보 세력이 융합되어 있다고 합니다. 진보도 여러 방면의 진보 세력이 있습니다. 이 세력들이 권력을 잡으려면 싸우는 모습보다는 다원주의에 따라 서로 협력하는 모습이 보여야 사람들도 진보세력에게 실망하거나 등돌리는 일 없이 지지를 계속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강연 : 노회찬의원 후기 : 강가혜 자원활동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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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경제위기와 경제민주화 | [세계경제위기와 경제민주화] 1강 홍기빈, 세계경제위기의 구조와 국가의 역할 후기 | Oversmiler | 2012.10.16 | ||
세계경제위기와 경제민주화,1강, 세계경제위기의 구조와 국가의 역할,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홍기빈 소장
거울아 거울아 경제민주화가 뭐니~?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홍기빈 소장은 오늘의 강연에서 이것 하나는 기억하라고 했다. 안데르센 동화 중 가장 똑똑한 것으로 이름난 백설공주 왕비의 거울이 실제로 있다는 점. 그 거울의 실체는 ‘주가’로 표현되는 금융시장의 평가라는 점. 그런데 영원히 깨지지 않을 것 같은 이 거울에 금이 가고 있다고 한다.
강연은 ‘경제 민주화’라는 단어의 의미가 뭔지에 대해서부터 시작되었다. 먼저 ‘민주화’란 무엇인가? 민주주의의 어원은 그리스어 ‘domokratia'로 ’demos(다중)‘와 ’kraots(지배)‘의 합성어이다. 그럼 다중이 지배자가 되어 권력을 가지는 것이 절대적으로 바람직한가? 이걸 그런 뜻으로 볼 수 있는가? 홍기빈 소장은 민주주의란 ’내가 인간으로서 자율적으로 삶을 개척해 나가기 위해 필요한 만큼만의 권력을 가진다‘는 것으로 일컬었다. 한 명 또는 몇 명에게 집중된 권력을 위 이상에 부합할 만큼 재분배하는 것. 이것이 ’민주화‘라고 했다. 그렇다면 ‘경제 민주화’는 ‘경제 영역에서의 권력의 재분배’로 바꾸어 말할 수 있겠다. 홍기빈 소장은 이러한 뜻의 '경제민주화'를 바꾸어 말하면 '사회민주주의'에 가까운 것이라 소개했다.
이젠 세계경제위기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갈 차례. 홍기빈 소장은 물어본다. 도대체 뭐가 경제위기라는 건가? 코스피 지수는 2,000에 육박하고, 다우지수를 봐도 경제상황이 좋다. 한쪽에서는 경제위기라고 부르짖고 있는데, 실제 사람들이 느끼는 위기감은 없는 불편한 진실을 들춰졌다. 도대체 경제위기라는 말의 본질은 무엇일까? 홍기빈 소장은 세계경제위기란 바로 지난 몇 십년간 세계경제를 유지해 왔던, 바로 그 원리가 무너진 것이라고 답했다. 그 원리란 인간사회의 조직과 운영이 자본시장의 명령에 따라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문제는 자본시장을 정점으로 하는 경제의 원리는 이제 무너지고 있다는 점이다. 자본시장의 명령이 올바르다는 믿음은 헛되고 헛된 것임이 증명되었다. 기존의 경제 패러다임이 해체되고 있는 현재의 상황이 세계경제위기의 본질임을 부인할 수 없다.
어느덧 강연은 마무리에 접어들었다. 요약하자면 경제민주화는 단순히 개인에게 돈을 나눠 달라는 요구가 아니라고 했다. 경제민주화란 경제적 권력의 편중을 해소하고 그 권력을 각 주체적 개인에게 분배하여 자신의 경제적 운명을 스스로 개척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강연을 들으며 세계경제위기의 대안으로 경제민주화가 설정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치 영역이든 경제 영역이든 권력은 발생할 수밖에 없지만, 그 권력이 몇몇에게 집중되지 않도록 사회적으로 통제하는 시스템을 제대로 갖추는 것이 지금 우리 앞에 놓인 과제가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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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서 저자와 함께 읽는 한국 근현대사Ⅱ | [한국근현대사Ⅱ] 7강, 정치가 김구와 제주‘항쟁’ - 균형 잡힌 역사관을 위하여 | 우연필연 | 2012.10.16 | ||
들어가며 참여연대 아카데미 느티나무의 가을학기 인문학교 강좌 ‘교과서 저자와 함께 읽는 한국근현대사II’ 는 여러 가지 이유로 검정 교과서에 담지 못했던 내용들을 저자가 설명해주는 강좌입니다. 정치적으로 민감한 역사적 사건을 비판적으로 설명하여 시민들이 균형 잡힌 시각을 갖추도록 하는 취지의 강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균형 잡힌 역사관을 위하여 이번 시간에는 지난 시간에 다뤘던 미소공동위원회에 이어 해방 후 남북협상 및 정부수립 과정을 살펴보았습니다. 이 선생님께서는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한 남북 협상 과정에서 벌어지는 역사적 사건들을 상세하게 설명하셨는데, 특히 북한의 정부 수립 역사도 다룸으로써 참여자들이 다양한 시각에서 역사적 사건들을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습니다. 이 선생님이 설명해주신 내용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 세 가지 사항이 인상 깊었습니다.
1. 4.3 제주항쟁 오늘날 우리 정부는 4.3 제주항쟁 사건을 국가권력에 의한 폭력 행사로 규정하고 있으나 군대 등 일부 집단은 여전히 4.3 항쟁에 대해 국가를 전복하려는 시도로 간주한다고 합니다. 당시 군경과 더불어 서북청년단 등 어용단체들이 투입되어 수많은 무고한 제주도민들이 학살당했습니다.(슬라이드로 보여주신 그림들이 말보다 더 직접적으로 와 닿았고 인상적이었습니다.) 이는 단순히 과거의 한 사건이 아니라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역사적 사실이며, 정부가 제주 4.3항쟁에 대해 국가에 의한 폭력으로 분명하게 규정했다면 정부가 대중에 이를 널리 알리는 작업을 수행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하여 모든 국민들이 진실에 눈을 떴을 때 다시는 우리 역사에 이러한 비극이 반복되지 않을 것입니다.
*출처 : 네이버블로그 http://blog.naver.com/gold_dragon/40030503119
2. 백범 김구 김구를 정치가로 인식했을 때 그의 정치적 선택과 행보를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민족주의자이며 기백이 넘치는 독립운동가인 김구 선생도 어쩌면 정치적인 선택의 기로에서 장고를 거듭했을지도 모릅니다. (1차) 남북협상을 위해 김규식 선생과 북으로 건너갔을 때 그의 미래가 결정된 것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어디까지나 가정이지만, 만일 김구 선생이 북으로 가는 대신 남측만 시행한 총선거에 참여하였다면 여당의 수장 내지 야당의 수장을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당시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세력이 강성했으나 그에 반발하는 세력과 민족주의자들을 규합하여 대항했다면 김구로써도 충분히 승산 있는 선거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북측 회담에 참석한 것이 결과적으로 그의 정치적 입지를 약화시켰고, 한편 그 시기 이승만은 남한 총선거를 통해 실질적으로 물리력(군경)을 행사할 수 있는 권력을 획득하였습니다. 후에 김구가 돌아왔을 때는 이미 이승만 세력이 군경 집단을 장악하고 있었기에 김구가 민족주의자들과 이승만에 반발하는 세력을 규합하고 대항하는데 있어 한계가 드러났습니다. 3. 오래된 영상물 시청 해방 후부터 정부수립까지 북한의 생활상을 담은 영상물을 시청하였습니다. 당시 주거형태나 생활 전반이 남쪽 사람들과 다른 점이 없었습니다. 김일성을 위시한 세력들이 노동당을 창당하기 전까지 태극기를 사용했다는 점이 그나마 주목할 만한 사항인 것 같습니다. 그밖에도.. 준비자 분들께서 맛있는 김밥을 마련해주신 덕분에 허기진 배를 채우고 더욱 열띤 자세로 강의를 경청할 수 있었습니다. 강의 시작과 말미에 멋진 멘트를 날리며 진행해주신 간사 선생님과 항상 애쓰시는 자원활동가 선생님의 노고에도 감사드립니다. 다음번 강좌와 함께 강좌 끝나고 진행되는 뒷풀이 또한 기대해 봅니다.
마치며 이번 시간에는 시간이 부족해 강의 진도를 다 나가지 못했으나 이러한 부분이 시민교육의 자유로움이자 ‘멋’이 아닐까 합니다. 정해진 진도를 어떻게든 채워 나가는 것보다 내용의 깊은 성찰을 통해 조각난 역사적 사실들의 연결고리를 찾고 빈틈을 매우는 작업을 참여자들과 함께 공유하는 것이 본 강좌의 취지와 성격에 더 부합한다고 생각합니다. 끝으로 이번 6강의 제목인 ‘홍명희는 왜 북한의 부수상이 되었나?’에서 홍명희는 김구 선생이 남북 협상을 위해 북으로 건너가셨을 당시 함께 동행했던 인물입니다. 그는 김구 선생이 다시 남쪽으로 돌아오실 때 함께 내려오지 않고 북쪽에 남았다고 합니다. 우여곡절 끝에 북한의 부수상이 된 홍명희가 과연 그 후에 어떻게 되었을지 상상해보며 제법 서늘해진 어느 가을날 밤에 열렸던 열띤 강좌의 후기를 마칠까 합니다.
홍명희(소설가, 1888-1968) *출처 : 네이버 인물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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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교육활동가 평화교육 워크숍: 누구나 맘대로 톡톡 | [첫번째 세션후기]평화교육워크숍:누구나맘대로톡톡 | 느티나무 | 2012.10.16 | ||
아카데미 느티나무는 올 여름부터 평화교육에 대한 워크숍을 기획하고 있었습니다.
어서오세요. 반갑습니다!
돗자리 가운데서 말하고 있진 않지만, 누군가 자신을 쳐다보기를 기다리는 존재의 에너지가 느껴집니다. 진행자는 돗자리 위에서 편안한 느낌으로 잠시 걷기를 청합니다. 바로 옆에 앉은 사람끼리 짝이 되어 등을 대로 앉아 서로 이야기 합니다.
"자신이 평화를 느낄 때가 언제인지, 그것에 대해 생각해 보면서 내 자신은 어떤 존재인지"를 한 사람씩 3분동안 이야기 합니다. 상대방은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떠오르는 이미지를 종이에 그림으로 표현합니다. 그리고 그림의 제목을 붙입니다. 서로에게 그림을 전달하고, 진행팀에게 라벨지를 받아 그림 제목을 적어 몸에 붙입니다 그렇게 등을 마주대고 온전히 내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그림을 그리고, 그림에 제목을 붙여준 바로 그것이. 워크숍 내내 사용하게 될 나의 별칭이 되었습니다. 다시 홀 안을 걸어줄 것을 요청 받았습니다. 큰 원으로 모두 모여, 잠시 쉬는 시간이 있었네요. 느티나무홀 군데 군데 붙어 있던 평화와 관련한 다양한 글 귀들을 둘러보며 나의 마음을 잡아 끄는 문구 앞에 서 있어 달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서로에게 그 이유를 공유했습니다. 십여가지의 글귀가 붙어 있었지만, 아래의 글귀가 참여자들의 마음을 잡아 끌었습니다. 들은 것은 잊어버리고 본 건 조금 기억나지만, 해보면 이해가 간다. 모든 일은 마음먹기에 달렸다. (때로는 너무 싫었던 말인데...) 참여자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니, 새삼 마음의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 마음을 잘 헤아리는 것, 타자의 마음에 귀를 기울이는 것, 그리고 소통 하는 것, 이 모두가 참여자들이 함께 공감하고 있는 화두임을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워크숍은 조금도 시간을 허투로 사용하는 법이 없었습니다. 진행자는 서있던 순서대로 "하나, 둘, 셋" 으로 돌아가며 세 조를 만들었고, <평화 장애물>, <교육 장애물>,<폭력의 원인>에 대해서 각기 세조의 사람들이 한 사람씩 돌아가면서 있는 힘껏 많이 적기를 시도했습니다. 3분 동안 칠판 가득 적힌 장애물들을 보며, '이것 모두 우리가 넘어야할 산' 이구나 싶었습니다.
여기저기 겹치는 장애물들도 있었고 생각지도 못했던 장애물도 발견했습니다. 장애물에 공감하시나요? 어떤 장애물이 커보이나요? 그리고 이제 다시 서로가 서로에게 이야기 했습니다. 가만히 앉아 쓰다보니 참여자 모두의 '기대치'라는 물줄기가 '기여치'가 모여있는 아래로 흐르며 6회라는 짧은 기간이지만,
결코 서두르지 않고 차근차근 서로가 함께 호흡하며 서로가 할 수 있는 범위 안에 있는 것을 함께 고민하고 방법을 찾아가는 참여형 워크숍. ‘참여적(P)-낯설게하기(E)-예술적(A)-창의적(C)-대화식(E) 의 P.E.A.C.E. 페다고지’를 맛보고, 놀아보고, 실습해 보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아름답고도 큰 울림이 있는 시 한편을 함께 낭독하며
첫 번째 세션을 마무리했습니다. 여러분께도 그 울림이 전해지길... 두 가지 지식 - 젤랄루딘 루미 두 가지 종류의 지식이 있다. 그 하나는, 아이가 학교에 들어가 책이나 교사로부터 개념을 배우고 암기를 하면서 배우는 지식, 전통으로부터, 또한 새로운 학문으로부터 배우는 지식이다. 그러한 지식의 힘으로 너는 세상에서 일어선다. 남을 앞서기도 하고 남에게 뒤처지기도 한다. 그 지식을 습득하는 능력에 따라, 그 지식의 장 안팎으로 드나들며, 네 안의 지식의 판에 더 많은 지식을 새긴다. 또 다른 종류의 지식이 있다. 네 안에 이미 완성되어 존재하는 지식, 샘 판에서 흘러넘치는 샘물 같은 지식- 그 신선함이 가슴 한가운데를 적신다. 이 지식은, 시들지도 썩지도 않는다. 그것은 늘 흐르며, 밖에서 안으로- 배움을 연마하는 통로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다. 이 두 번째 지식은 샘의 근원이다. 네 안으로부터- 밖으로 흘러넘치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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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 다른 이름으로 저장하기 | <진보, 다른이름으로 저장하기> 3강, 진보에게 던지는 불편한 질문 | 스피노 | 2012.10.13 | ||
아카데미느티나무 20102 가을강좌 [민주주의학교] 진보, 다른이름으로 저장하기 3강(10/08) 후기 ① 1강 <21세기 진보의 재구성> 후기 다시보기 >> 클릭
② 2강 <21세기 진보의 재구성> 후기 다시보기 >> 클릭
3강은 ‘진보에 던지는 불편한 질문’이라는 주제로 진행되었습니다. 하승우 강사님은 영화 <풍산개>를 들며 사람들이 타인을 재단하려 하는 사회를 꼬집으셨습니다. 극 중 윤계상은 남과 북 어느 편에도 속하지 않기에, 양쪽 모두에게서 ‘어느 편이냐’는 질문을 듣습니다. 어느 한 편에 속하지 않으면 안전해질 수 없는 상황은 우리를 불안하게 만듭니다. 강사님은 한국의 진보도 마찬가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이론이나 사상에 권위를 부여하고 자기 식으로 해석하고, 자신과 다른 해석을 내놓는 쪽은 변절자나 개량주의로 폄하하는 일부 진보 세력들을 비판하셨습니다. 인간은 각자 자라는 환경이 다르고, 각자 다른 감수성을 갖게 됩니다. 그러므로 각자의 시선의 차이는 피할 수 없는 것이고, 토론과 합의하는 과정을 필요로 합니다. 같은 시선을 가진 사람들끼리 모여서는 세상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셨습니다. ‘동지’라는 말로 사람들을 한정지으면, 그 ‘동지’라는 말에 위화감을 느끼고 함께 연대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생겨납니다. 불편하지만 우리에 들어오지 못하는 사람들이 없도록, 조금 불편하고 어려운 사람들도 만나 우리 편을 늘려야 사회를 바꿀 수 있습니다. 한 살림과 의료생협, 그리고 강정과 쌍용이 서로 연대하는 모습을 보면, 서로가 서로의 삶에 관심을 가지면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대의명분이 삶을 바꿀 수 있을까요? 공지영씨가 쓴 ‘의자놀이’의 논쟁을 기억하시나요? 공지영씨가 이 책의 수익금을 쌍용차 노조에 모두 기부한다는 좋은 뜻을 밝혔습니다. 하지만 휴머니스트의 나라말출판사 인수와 판권에 관련된 문제, 그리고 표절 문제 등을 전부 이 때문에 묻고 넘어가야 하는 것일까요? 수익금 기부로 인해 혹 좋지 않은 시각이 생길까 판단하여 과정 속에 생긴 문제들에 대한 논의들이 자취를 감췄습니다. 약자가 강자를 이해하고 배려한 것입니다. 이는 이승만 정부가 잘 살게 해주겠다며 국민들을 억압했던 논리와 다를 바가 없다고 강사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울산 현대자동차에서 일어난 ‘밥.꽃.양’이라는 사건을 아시나요? 현대자동차 노조가 정리해고 반대를 내세워 한 무기한 전면파업이 277명의 정리해고로 타결되었습니다. 이들이 바로 식당아줌마들이었습니다. 이들 중 144명의 여성노동자들만 노조식당에 고용되었습니다. 이때 현대자동차 노조는 ‘아줌마들만 참으면 된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아줌마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곳은 없었습니다. 민주노총 등 노동단체들도 가입되어 있거나, 관련된 일이 아니면 관심을 갖지 않으니 묻히기 쉽습니다. 기륭전자, KTX, 재능교육 등 여성노동자들이 일으킨 파업은 장기화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회를 바꾸려는 곳에서도 가부장제는 남아있습니다. 우리는 누구와 연대해야 하는 것일까요? 몇 년 전 장애인들도 지하철을 탈 수 있게 해달라며 장애인들이 선로를 점거한 일이 있었습니다. 30분간 시민의 발을 묶었으나, 자신들은 30년을 집에서 기다렸다며, 지하철을 용이하게 이용할 수 있게 시설을 확충해달라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진보는 가장 아파하는 사람과 연대하고, 섬세해야합니다. 하지만 시민의 발을 묶었다는 점에서 비판이 두려웠고, 큰 이익을 얻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 진보단체는 이들과 결합하지 않았습니다. 성공회대에 근무하던 계약직 행정직원이 비정규직으로 계약이 만료되어 학교를 떠나게 되자 행정직원 정규직화를 위한 비상대책위원회를 출범시키고 서명을 받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명단에는 많은 진보적 교수들의 이름이 빠져 있었습니다. 진보적이라고 불리는 사람들도 자기 공간에서 벌어지는 부조리함에 대해서는 눈을 감을까요? 자신의 생각과 주장이 삶에서 드러나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이러한 처사는 신뢰를 잃는 계기가 됩니다. 진보가 더 나은 진보, 올바른 진보가 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사람과 연대하고, 자기책임성을 갖는 태도를 갖추어야 한다는 것을 이번 강의를 통해 알 수 있었습니다.
강연 : 하승우 풀뿌리자치연구소 이음 연구위원 후기 : 강가혜 자원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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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서 저자와 함께 읽는 한국 근현대사Ⅱ | [한국근현대사Ⅱ] 5강, 오보가 뒤흔든 대한민국 | 서동호 | 2012.10.12 | ||
안녕하세요. 시작한지 얼마 안된거 같은데 벌써 강의가 중반부로 접어들었네요. 치열했던 독립투쟁을 거쳐 이제 해방후 한국의 모습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해방 이후의 다양한 정치인들에 대해 살펴보고, 신탁통치와 관련한 동아일보의 오보사건을 다뤘습니다. 오늘 후기에는 '신탁통치 오보사건'을 중점으로 이야기 해보려고 합니다.
1. 신탁통치 오보사건 혹자는 '신탁통치 오보사건'을 '역사를 뒤바꾼 10대 오보'중에 하나로 꼽기도 합니다. 그만큼 한반도와 세계정세에 엄청난 영향을 준 사건입니다. 광복을 맞은지 4개월이 지난 후에 미국과 소련, 그리고 영국의 외상은 모스크바에서 한반도를 어떻게 할지 협상합니다. 이 회담이 모스크바 3상회이지요. 이 때 회담에 참석한 미, 소, 영과 장제으의 중화민국을 포함하는 4개국이 한반도를 신탁통치 하자는 아이디어가 구상되기 시작합니다. 이런 움직임이 저 멀리 막사과(모스크바의 당시 표현)에서 이런 논의가 진행되던 때인 1945년 12월 27일, 동아일보에서 호외를 냅니다.
<1945년 12월 27일 동아일보 기사 - 소련은 신탁통치 주장, 소련의 구실은 삼팔선분할점령. 미국은 즉시독립 주장> 당췌 읽을수가 없군요. 하얀건 종이요 까만건 글자겠죠? 그나마 보이는 사진에서 스탈린과 미국의 외무상인 번즈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소련과 미국이 만나서 뭔가 했나보군요! <위 기사를 번역한 내용입니다. - 출처 : 네이버 뉴스캐스트> 보도 내용인 즉, 임시정부 수립에 대한 협상결과가 나왔으며, 소련은 신탁통치를 찬성하고 미국은 반대하는 입장이다 라는 것인데, 문제는 이게 사실관계가 뒤바뀐, 오보라는 것입니다.
모스크바 3상회의는 앞서 말했듯 12월16일부터 27일까지 미국·영국·소련 3개국의 외무장관들이 모스크바에서 모여 전후 처리 과정에 대한 문제들을 합의하려 진행한 모임이었는데, 이 기사가 나오던 시점인 12월 27에는 회의 내용이 채 공개되지 않았던 시기였습니다. (회의 내용은 이후 12월 30일에 공개됩니다.) 기사 내용을 잘 살펴보시면 아시겠지만 '조선 독립문제가 표면화하지 않는가 하는 관측이 농후하여 가고있다'는 등의 추측성 발언을ㅈ아볼 수 있습니다. 사실에 기반해서 쓴 기사가 아니라 회의 내용에 관한 하나의 추정, 그러니까 정확하지 않은 기사라는 사실을 엿볼 수 있는거죠.
2. 극렬한 좌우대립
하지만 사실은 이와 달랐습니다. 정작 신탁통치를 주장했던건 미국이었지요. 그리고 신탁통치에 관한 미국과 소련의 입장도 차이를 보이는데, 소련의 경우 일종의 '후견인'역할의 신탁통치를 주장했고 미국의 경우 완전한 신탁통치를 주장합니다. 이 보도가 발표되자 한반도는 '친탁'을 주장하는 좌익 진영과 '반탁' 주장하는 우익 진영으로 나뉘어 좌우대립이 극에 달하게 됩니다. 일제에 의한 강제통치에서 벗어난지 얼마 되지 않던 상황에서 또 다시 강대국에 의한 지배를 받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아주 유명한 사진입니다. 신탁통치 반대시위 사진>
이승만, 김구등의 유수의 정치가들은 일제히 '3상회의 결과 수용 불가!', '신탁통치 반대'의 구호를 내걸고 반탁운동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김구와 이승만의 재빠른 신탁통치 반대운동은 여운형, 박밀려있던 지지도를 회복하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초기엔 좌익들도 "신탁통치는 우리 민족에 대한 모독"이라며 반탁을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박헌영이 소련을 다녀온 뒤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을 지지한다는 입장을 표명하여 찬탁으로 입장을 선회하지요. 이들은 결국 우익에 의해 찬탁세력으로 치부되어 범 국민적인 공격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전국적으로 반탁운동이 확장되는 과정에서 친일세력들이 자신들의 과거를 세탁해버립니다. 친일파 세력들이 친/반탁운동으로 정세가 요동치는 틈을 이용해 자신들을 '반공투사','애국자'로 둔갑시켜버린 것이 이것입니다.
3. 교과서와 반탁운동
제가 고등학교에 다닐때 "소련은 찬성, 미국은 반대"라고 신탁통치 반대운동에 대해 외웠었습니다. 교과서에서는 동아일보의 오보내용이 역사적 사실으로 아직까지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2009년 교과서 개정안을 통해 이 내용에 변화가 오게 되는데, 2010년 3월 1일에 나온 금성출판사 한국근현대사 교과서 258페이지에 "...소련이 38선 분할을 구실로 신탁통치를 주장한 반면, 미국은 즉시 독립을 주장하였다는 잘못된 보도였다"라고 설명한 구절이 첨가됩니다. 독립된 박스로 다룰 정도로 오보사건이 나름 비중 있게 등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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