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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벌공화국을 넘어 | ['재벌 공화국을 넘어' 강좌 ④] 김대중ㆍ노무현도 못한 '서민의 호민관', 이제 누가? | 참여사회연구소 | 2012.9.25 | |
['재벌 공화국을 넘어' 강좌 ④] 김남근 참여연대 집행위원회 부위원장(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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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벌공화국을 넘어 | ['재벌 공화국을 넘어' 강좌 ③] "박근혜, 재벌의 은행 지배가 경제민주화인가?" | 참여사회연구소 | 2012.9.25 | |
['재벌 공화국을 넘어' 강좌 ③] 이동걸 전 한국금융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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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보, 다른 이름으로 저장하기 | <진보, 다른이름으로 저장하기> 1강, 21세기 진보의 재구성 | 웃으며,함께,끝까지 | 2012.9.24 | |
아카데미느티나무 20102 가을강좌 [민주주의학교] 진보, 다른이름으로 저장하기 1강(09/18) 후기
드디어, 아카데미 느티나무의 가을 학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새학기를 맞아 펼쳐진 느티나무의 새로운 시도! 시대의 요구죠, 바로 ‘소통’과 ‘참여’입니다. 수동적인 존재로 규정되는 ‘수강생’에서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주체인 ‘참여자’로, 일방향식 강의형식에서 참여자와 강사, 교육기획자가 함께 이야기하고 의견을 공유하며 함께 만들어나가는 SNS식 강의형식으로! 느티나무의 진화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 중심에는 뭐니뭐니해도 바로 이 강좌, [진보, 다른 이름으로 저장하기]가 있는데요, 변화의 움직임은 강의실에 들어서는 순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조별로 마주보고 앉을 수 있게 배치된 책상들, 그 위에 놓인 형형색색의 종이와 펜들, 마치 어린 시절 유치원의 풍경을 떠올리게 하는, 느티나무의 새로운 모습이었습니다.
강의에 앞서 질문 하나! “진보는 나에게 □이다.” 이보다 짧고 어려운 질문이 또 있을까요? 참여자 여러분은 저마다 모험, 어려운 단어, 삶, 부끄러움 등등의 이야기를 펼쳐놓았습니다. 누구에게나 진보란 어렵지만 걷고 싶은, 우리의 삶과 가까운 그런 것인가 봅니다. 진보는 우리의 ‘가치’일까요, ‘삶’일까요? 김동춘 교수님의 친구 분 중에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시는 분이 계신데, 그 분은 김 교수님을 보고 “서울의 아파트에 살면서 차도 끌고, 쌀 한 톨 생산하지 못하는 니가 무슨 진보냐?”라고 하신다는군요. 모 대학 앞에서 사회과학 서점을 했던 또 다른 지인 분은 10년 동안 달라지는 것 없는 책방을 보며 “이게 무슨 진보냐, 난 보수다.”라고 하셨답니다. 지금으로부터 100여년 전, 대표적인 친일단체였던 일진회의 전신은 바로 진보회라는 단체였는데요, 그들은 “조선도 문명개화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 그 주역은 일본이며, 우리는 그들을 통해 문명의 진보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라고 주장했다고 합니다. 과연 이들이 말하는 진보는 무엇일까요? 우리에게 진보란 도대체 어떤 것일까요?
진보? 보수? 1961년 군사쿠데타를 지지했던 세력의 상당수가 박정희를 지지했는데, 그 이유는 바로 그를 진보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지금은 구체제로 비판을 받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경우에도 64년 대선 때의 선거 전략은 못가진자, 가난한 농민의 자식이라는 이미지를 부각시키는 것이었고요. 70년대와 80년대를 거치면서 진보운동은 반미와 계급해방에 초점이 맞추어졌고, 2000년대에 들어서는 기득권에 일부 편입하기 시작했습니다. 대한민국 사회에서 그리고 그 역사 속에서 ‘진보’라는 개념은 계속해서 변화해 왔습니다. 그리고 최근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사태들로 사람들은 진보와 보수를 헷갈려하기 시작했습니다. 분파투쟁, 권위적인 조직 운영, 비정규직에 대한 미온적 태도 등을 통해 대기업 노조가 보여주는 노동계의 모습, 이들을 보수라고 해야 할까요? 외국의 경우에는 60년대가 바로 진보와 보수를 나누는 분기점이 되었습니다. 68년 학생운동이 일어나기 전에는 노동운동-노동자정당이 진보의 중심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러나 베트남 전쟁 반대-대학개혁-권위주의 타파를 주요 슬로건으로 한 68학생운동은 노동을 중심으로 한 진보의 공식을 깨뜨렸습니다. 68운동의 학생들은 기존의 노동운동이 이미 제도권화되어 기득권 세력이 되었다고 판단하였던 것이죠. 이들은 당시의 노동운동이 자본주의에 대해 더 이상 안티테제가 아닌 편승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에 실망했고, 노동운동에 기대지 않은 새로운 진보운동을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페미니즘-평화-인권-환경운동으로 대표되는 New Left, 이른바 신사회운동입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이러한 노동운동과 신사회주의 운동이 90년대에 이르러서야 본격적으로, 그것도 동시에 일어나기 시작했고 이것이 민족주의, 분단 체제와 같은 한국의 특수한 상황들과 맞물려 진보와 보수를 나누는데 큰 혼란을 가져오게 된 것입니다. 김동춘 선생님은 진보의 범위를 규정하는데 있어 정치적 진보와 사회적 진보, 경제적 진보로 구별 지어 생각하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하셨습니다. 우리 사회는 이 세 가지 개념이 뒤죽박죽 섞여있기 때문에 진보와 보수를 구별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원래 서구에서 민족운동은 보수의 가치에 속하였고 실제로 히틀러를 통해 극단적인 방식으로 표출되기도 하였지만, 한국에서는 유독 민족이 진보의 가치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이것은 우리 사회의 논쟁 구조가 계급이 아닌 민족-남북관계 등을 통해 유지되어 왔기 때문이죠. 이런 의미에서 무상급식 문제는 한국사회에 나타난 최초의 계급적 논쟁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정치적-경제적 진보와 보수의 논쟁이 이제야 시작된 것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 사회에는 사회적 진보와 보수에 대한 논쟁은 없습니다. 미국에서는 기독교-남부 백인들이 사회적 보수를 구성하는 반면, 한국의 사회적 보수는 지역주의의 형태로 나타나는 데 그쳤습니다. 앞으로의 진보는? 이 시대의 진보와 보수를 나누는 가장 대표적인 영역은 경제적 영역인데요, 경제가 모든 것을 지배하는 자본주의에서 진보와 보수의 갈림길은 신자유주의에 대한 견해 차이를 통해 드러납니다. 그러나 21세기적 가치로 삶의 질 문제가 추가되고, 복지와 안전, 불안으로부터의 해방 등이 중요하게 다루어지면서 주관적 행복의 지수가 진보의 기준으로 작동하게 되었습니다. 앞으로의 진보는 시장보다는 사회, 개인 중심의 경제보다는 공동체 중심의 경제를 이야기하게 될 것입니다. 앞으로의 진보는 민주주의를 심화·확대해 나가는 방향으로 발전할 것입니다. 직접민주주의가 가능한가에 대한 논쟁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양적인 문제와 함께 질적민주주의의 향상도 고민해 봐야할 문제일 것입니다. 기업 경영의 민주화, 노조의 개입, 기업 내 권력의 분점 등을 통해 민주주의의 적용 영역을 최대화하고 검사·대법원의 구성에 시민들이 참여하여 정치-사회-경제적 민주제도를 더욱 심화시켜 나가는 방법이 있겠죠. 평화 또한 진보의 중요한 가치 중 하나도 여겨져야 합니다. 평화가 없이는 진보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진보의 가치에 가장 치명적인 것이 바로 전쟁이기 때문이죠. 전쟁은 모든 것을 비인간화시킬 뿐만 아니라 실제로 거의 대부분의 나라에서 안보를 빌미로 한 인권침해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앞으로의 진보는 전쟁과 자본주의의 고리를 끊어내는 데에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Alt+V 지난 4월 벌어진 19대 총선에서는 진보정당을 표방하는 통합진보당은 13석의 의석을 얻으며 진정한 전국구 정당으로 거듭났다는 평가받았습니다. 그러나 채 6개월도 지나기 전에 당은 분열되었고 국민들은 말 그대로 ‘멘붕’ 상태에 빠져버렸습니다. 진보란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을 진지하게 해봐야 할 시점에 이른 것이죠. 대선이 90여일 앞으로 다가온 현재의 시점에서 보수와 진보를 구별해내는 능력은 우리에게 정말 꼭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동안 구체제로 비판받아 온 후보가 경제민주화와 복지를 외치고, 저마다 시대정신을 내세우는 상황에서 어떤 것이 보수의 가치인지 어떤 것이 진보의 가치인지 구별해내는 능력, 꼭 필요하겠죠? 강의 : 김동춘/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글 : 자원활동가 김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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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험사회,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 <위험사회,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2강, 핵에너지의 역사와 미래 | 공채원 | 2012.9.22 | |
우리나라의 원자력발전 기술력은 세계 최고 수준이라고 한다. 얼마 전, UAE로부터의 원전 수주로 국내외 여론이 들끓었던 적도 있다. 우리는 우리 영토, 영해에서 석유 한 방울 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여름이면 관공서부터 교통수단, 가정, 직장, 식당 등 모든 실내에서 에어컨 바람을 쐬며 편안하고 안락한 삶을 살고 있다. 물론 올해엔 전기를 절약한다고 권장온도를 지정하고 절전을 강요하여 평소 여름보다는 더 더웠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대다수 후진국에서 전기가 수시로 나가 에어컨은 꿈도 못 꾼 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우리는 충분히 시원한 삶을 살고 있다. 밤이 되어도 도시의 불빛은 꺼지지 않고 블랙아웃이 일상이 아니라 공포가 되어야 할만큼 우리는 블랙아웃이 없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이 모든 것이 바로 원자력 발전의 덕분이다. 통계에 따르면 2030년에는 전력 사용에 있어 원자력 의존도가 60%대에 진입할 것이라는 통계분석도 있다. 이처럼 우리의 삶은 원자력, 즉 핵에너지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과연 우리가 하루종일 에어컨을 틀고 살아야 할 만큼 더운가? 과연 우리가 이렇게 새벽까지 불을 밝혀야 하는가? 우리가 에어컨을 자제하고 안 쓰는 형광등은 꺼두며 산업체에서는 에너지효율을 위해 노력한다면 원자력 없는 세상을 만들 수 있다. 물론 당장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렇기에 정부 차원에서 탈 원전에 대한 장기적 플랜을 제시해야 한다. 그리고 세부적인 플랜을 세워 단계적으로 에너지 사용의 효율성을 제고하고 절약을 생활화하여 환경과 미래를 생각하는 에너지소비를 추구해야 한다. 이제는 에너지 문제에 접근할 때 비용뿐만 아니라 우리들의 미래도 고려해야할 때이다. 글 : 자원활동가 공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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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과서 저자와 함께 읽는 한국 근현대사Ⅱ | [한국근현대사Ⅱ] 3강, 그 섬에 가고 싶다 - 완도의 항일운동 | 서동호 | 2012.9.21 | |
[한국근현대사Ⅱ] 3강, 그 섬에 가고 싶다 - 완도의 항일운동 안녕하세요. 강좌가 없는 주를 틈타 재빠르게 후기를 올리고 있는 자원봉사자 서동호 입니다. 지난 토요일 답사는 잘 다녀오셨나 모르겠네요. 저는 성묘하러 고향에 가야해서 답사에 함께하지 못했습니다. 역사공부의 꽃은 현장답사라는 말을 들었었는데 정말 아쉽더라구요. 그래도, 다녀오신 회원분들은 뜻깊은 시간 되셨으리라 믿습니다. 지난 강좌는 박찬승 선생님의 마지막 강의인 만큼 강의자료부터 엄청났지요. A4용지로 서른 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자료를 보고 ‘학점을 달라고 말씀드려볼까...’하는 생각을 잠깐 했습니다. 사실 지난 시간에도 임시정부에 대한 연구나 관심이 높지 않다는 이야기가 나왔었고, 이번 강의가 끝난 후 뒷풀이 자리에서도 선생님은 “역사학과 신입생들에게 ‘이동휘를 아느냐?’고 물으면 아는 학생이 없다”며 독립운동에 대한 시민들의 관심이 크지 않은데 아쉬움을 드러내셨었죠. 그래서인지 이번 학기 강의에 대한 선생님의 열정이 남다르신 것 같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3회 강좌에서는 '완도의 항일운동'과 '친일파의 계보와 변명담론' 그리고 마지막으로 '위안부 문제'를 다뤘습니다. 각각의 주제를 하루에 강의하기에도 벅찰만큼 무거운 주제들인데 선생님의 짜임새 있는 강의로 두 시간동안 쉴틈없이 강의가 진행됐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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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꿈 투사 워크숍, 성찰과 치유를 위한 꿈작업 | [꿈투사] 첫날 | 별밤 | 2012.9.14 | |
공부하길 싫어하는 저는 강좌 같은건 들어본적이 없는 사람이랍니다. 하하 그런데 참여연대 아카데미 꿈강좌는 리플렛이나 포스터를 볼때마다 꼭 듣고 싶었어요. 올 가을이 아니면 두고두고 후회할 것 같았어요. 그래서 지난주에 신청했지요.
그렇게 듣고 싶던 꿈강좌 첫날 아침부터 도망가고 싶더라구요. 비가 오고 몸이 쑤셔서 그런건 아니었어요. 겁이 났어요. 대충 숨겨도 되는 그런 시간은 아닐텐데.. 왠지 피하고 싶고 불안한 마음이었지만 아닌척 카페통인에 들어섰죠. 열댓분이 오셨고, 두분 빼고 모두 여성이었고, 기수강자들도 여럿 계시더라구요. 헬스 끊듯이, 감을 잊지 않기 위해 계속 수강하신다는 말씀도 인상적이었어요. 인기 강좌에 어떤 연으로든 앉아 있구나 싶으니 감사했어요.
고혜경 선생님이 앞으로의 10주를 어떻게 보낼지 인트로 설명을 해주셨어요. 이해가 잘 안 되는 부분도 있었지만 확실한건 이번 강좌가 제 인생에 큰 도움이 될 것 같아요. 숙제도 내주셨어요. 꿈을 상세히 적어오라구요. 오늘 꿈노트를 마련하려구요. 숙제를 잘 해보고 싶네요. 흔들거리는 나를 위해, 나의 무의식의 세계에 손을 내밀어 볼꺼예요. 기대돼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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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험사회,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 <위험사회,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1강 축산 산업화가 빚어낸 공포, 광우병 | 공채원 | 2012.9.12 | |
광우병의 공포로 광화문광장이 뜨거웠던 이명박 정권의 집권 초기에 나는 고등학교 1학년생이었다. 그 때 벌써 내 친구들 중엔 집회에 참석해 촛불을 드리운 녀석들도 있었지만 나는 축구와 같은 것들에 더욱 관심을 가졌던 기억이 난다. 이번 강의의 주제는 ‘축산 산업화가 빚어낸 공포, 광우병’ 이다. 그러나 이번 강의의 핵심은 광우병이 아니었다. 물론 화두는 광우병이었지만, 주 내용은 축산 산업화를 통한 극단적 이익추구가 어떻게 인간사회와 환경을 황폐화시키고 피폐하게 만드느냐에 관한 것이었다. 그리고 광우병은 그 축산 산업화가 가져온 다른 수많은 폐해 중의 하나였다.
이것은 육류소비의 풍조가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곡물 소비량은 2배, 4배, 8배 증가하게 됨을 의미한다. 유럽과 미국, 한국, 일본 등의 산업국들의 부유한 국민들이 소고기 1Kg을 소비할 때마다 곡물 8Kg이 소비되고 곡물이 부족해져 곡물가격의 상승을 가져오게 되어 개발도상국의 빈민들의 밥그릇을 위협하게 되는 것이다. 현재 축산업에 소요되는 곡물은 인간 식량의 1/3정도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가축과 인간이 한정된 식량을 두고 경쟁하고 있는 셈이다. 제레미 리 프킨이 『육식의 종말』에서 지적하였듯이 한쪽에서는 굶어 죽어가는 사람들이 식량자원을 갈망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육식위주의 식습관으로 비만이 문제시되는 것이다.
소를 키우기 위해서는 곡물 재배에 비해 15배 이상의 물이 필요하다고 하며, 다른 가축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가축에게 먹이로 주는 곡물을 기르기 위해서도 수자원이 들어가는 것을 고려하면 참으로 엄청난 양의 수자원이 육식을 위해 고갈되어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육식에 대한 욕망으로 굶주린 아이들에게 돌아가야 할 곡식을 빼앗아 가축에게 먹이고, 소를 빨리 살찌우기 위해 초식동물인 소에게 죽은 소를 갈아 만든 사료를 먹이는 인간. 그렇다면 광우병은 육식과 이윤추구의 욕망으로 자연의 질서를 깨뜨린 인간에게 내려진 자연의 경고가 아닐까? 글 : 공채원 자원활동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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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과서 저자와 함께 읽는 한국 근현대사Ⅱ | [한국근현대사Ⅱ] 2강 임시정부 이야기 - 머 나먼 혁명의 길 | 서동호 | 2012.9.11 | |
안녕하세요 교과서 저자와 함께 읽는 한국 근현대사 참여자 여러분. 이번 교과서 저자와 함꼐읽는 한국 근현대사 시즌2 자원봉사자 서동호 입니다. 지난 강좌가 끝나고 벌써 3일이 지났네요! 늦어도 강좌가 있었던 주에는 후기를 올려야 한다는 강한 심리적 압박감에 컴퓨터 앞에 앉긴 했습니다만 글재주도 없고, 그렇다고 선생님이 강의해주시는 내용을 빠삭하게 알고 있는 것도 아니라 고민이 많습니다. 어떤 식으로 매주 후기를 써야하나 고민하던 차에, 그냥 '내 블로그에 쓴다'는 생각으로 편하게 써보려고 합니다.
강의 내용은 선생님께서(작성하시고 제가)수업 전에 나눠드린 강의안에 너무 자세히 나와있어서 제가 따로 요약하거나 정리할 필요가 없을것 같습니다. 대신 다음강좌 부터는 매주 제가 강의를 들으며 흥미로웠던, 혹은 새로 알게된 사실에 대해서 간략하게 적는걸로 후기를 대신하려 합니다.
그 전에, 지난 강좌 쉬는시간에 봤던 영상을 링크했습니다. 소리도 좀 작았고, 뒤에 계신 분들은 잘 안보이시는지 기웃기웃 거리시는 모습을 봤거든요. 같은 영상이니 다시 보기를 원하는 분들은 다시 한 번 감상하세요. ^^
임시정부의 설립 2강에서는 1강에 이어 본격적인 독립운동의 시기를 다룹니다. 3.1운동 이후 4월 13일(아래 영상에는 11일이라고 나와있습니다만, 임시정부가 수립되고 이 사실을 공표한 날이 13일 입니다.) 중국 상해에서 드디어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설립됐습니다. 그리고 이 임시정부를 기반으로 독립을 위한 무장투쟁과 외교운동이 벌어지게 됩니다.
임시정부의 수난 과거 임시정부가 설립되는 과정에서처럼 임시정부가 세워진 이후에도 임시정부 내부에서 꽤나 많은 잡음이 발생했습니다. 이는 국내와의 연락체제의 두절과 임시정부 내의 계파간의 의견차 등이 주된 원인인데, 이승만의 위임통치(미국의 위임통치를 요청하겠다는 이승만의 주장), 이동휘의 레닌 자금 사건(이동휘가 레닌에게 받은 독립운동자금을 자신의 사회주의운동을 위해 사용한 사건)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이처럼 어렵게 설립된 임시정부는 역시나 순탄치 않은 항해를 계속합니다.
임시정부 중심의 좌우파 결집 이후 김구가 이끌던 한국국민당, 이청천이 이끌던 조선혁명당, 조소앙이 이끌던 재건한국독립당의 3당 통합을 이루어 내고 임시정부 역시 이를 계기로 조직을 확대하고 구조를 개편합니다. 그리고 1940년 9월에 한국광복군이 창설됩니다. 이로서 임시정부는 한국독립당과 광복군, 그리고 임시정부의 당, 군, 정의 체제를 확립했습니다. 이에 41년 4월, 미주와 하와이의 모든 한인단체들이 총집결해 만들어진 재미한족연합회의 지지와 후원으로 이어져 해외 한국독립운동과 통일/단결의 구심점으로 자리잡습니다. 이후 41년 11월에 '대한민국 독립헌장'을 발표합니다. 최초로 발표된 대한민국 독립헌장에서 눈에 띄는것은 바로 경제적 형평성을 헌장에 명시했다는 점입니다. 임시정부는 '대한민국 임시헌장' 3장(건국)에 토지와 대기업에 대해서는 국유/국영화를 그리고 중소기업에 대해서는 민간이 소유할수 있다는 조항을 명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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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벌공화국을 넘어 | ['재벌 공화국을 넘어' 강좌 ②] "안철수 할아버지가 집권해도 봉착할 문제는 바로…" | 참여사회연구소 | 2012.9.10 | |
['재벌 공화국을 넘어' 강좌 ② : 이병천 강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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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벌공화국을 넘어 | ['재벌 공화국을 넘어' 강좌 ①] "'대마불사' 재벌, 한국 사회 위기의 근원" | 참여사회연구소 | 2012.9.4 | |
['재벌 공화국을 넘어' 강좌 ① : 정태인 새사연 원장]
"'대마불사' 재벌, 한국 사회 위기의 근원"
프레시안 허완주 기자
A와 B가 있다고 하자. 이 둘이 있는데 하늘에서 만 원이 A에게 떨어졌다. A는 내키는 대로 그 돈의 일부를 B에게 준다고 하자. 얼마든 상관없다. 그 돈을 받고 B가 흡족해서 '예스'라고 하면 끝난다. 하지만 B가 만족하지 못하고 '노'라고 하면 둘 다 돈은 한 푼도 가지지 못한다면 어떻게 될까.
* 이 글은 프레시안(www.pressian.com)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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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란의 소리, 저항의 노래 | 반란의소리 저항의노래 - 3강 한국의 저항가요, 독립군가에서 <헌법 제1조>까지 | 웃으며,함께,끝까지 | 2012.8.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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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란의소리 저항의노래 - 3강 한국의 저항가요, 독립군가에서 <헌법 제1조>까지 2004년의 늦은 봄, 교정 한 켠에 세워진, 선배열사의 기념비 앞에서 불렀던 노래가 기억납니다. 비록 최루탄 연기의 매퀘함은 사라졌어도 자못 젖은 목소리였던 것 같습니다. 무엇이 우리들을 젖어들게 했는지는, 글쎄요. 잘 모르겠습니다. 다시 한 번 2008년의 늦은 봄, 광화문 거리에 노래가 다시 울려퍼졌습니다. 촛불 사이를 스치는 노래 속에는 웃음이 함께 했습니다. 사람들은 높이 막아선 명박산성 앞에 옹기종기 모여앉아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고 율동을 나누었지요. 노래가 변한 것이었을까요? 시대가 변해서였을까요? 아니면 우리가 변했던 것일까요? 참여연대 아카데미느티나무 2012 여름강좌 [반란의 소리, 저항의 노래] 그 마지막 이야기는 서양과 일본을 지나 드디어 이 곳, 우리들의 노래에 다다랐습니다. 한국 저항가요의 특성 박노자 선생님께서는 첫 시간에 서양 그리고 러시아 저항가요의 경우, 그 가사를 통해 무엇을 주장하려고 하는지 선명하게 알 수 있다고 하셨었죠. 그렇지만 한국의 저항가요는 어떠한 주장을 담기보다는 감성적인 경향을 보입니다. 즉, 그 시대에 있었던 저항운동의 감성적 경향을 이해하는 것, 그리고 그 안에 담겨진 사람들의 마음을 읽는 것이 중요합니다. 한국 저항가요의 특징은 생산과 보급의 과정을 기성의 전문가가 아닌 수용자 집단이 주도하였다는 점입니다. 전문 창작자가 만들어서 대중에게 불리는 것이 아니라, 수용자 대중이 부르기 때문에 만들어지거나 저항가요로 소환되는 것이지요. 노래의 주인이 창작자가 아닌 수용자이기 때문에 전승과정에서 작품이 변형되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해방직후 시기와 1988년 이후 시기는 상대적으로 전문가의 개입이 강했던 시기였습니다. 여기에는 그 이전의 저항가요의 축적이 많았고, 민중의 조직된 힘이 강해 권력의 통제 영역 바깥의 활동이 활발해진 시기였다는 배경적 조건이 크게 작용했습니다. 그렇지만 정작 막강한 민중가요 문화가 형성되고 향유된 시기는 70년대 중반부터 90년대 중반까지였습니다. 여기에는 평소에도 대중가요보다는 다른 노래를 부르고 싶다는 집단적인 자발성 욕구와 이러한 욕구를 시간적-공간적으로 지속시킬 수 있는 힘이 큰 역할을 했습니다. 강력한 민중가요 문화가 형성되는데 에는 결국 주구장창 생활을 함께 하며 함께 먹고 함께 노는 학생운동권과 노동운동권이 중심이었습니다. 또한 한국의 민중가요는 분단이후 해외사회주의 운동의 영향을 거의 받지 못하게 되면서 특유의 자생성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식민지시대 저항가요, 기성노래의 가사 바꾸기 전통시대에는 이러한 저항가요가 있었을까요? 동학에서 불리워진 가사 등은 존재했던 것 같습니다. 다만 식민지 저항가요의 태반은 기성가요를 개사한 것이었습니다. 못갖춘마디를 특징으로 하는 서양 어법의 음악체계는 전통시대의 사람들에게는 상당히 어려운 것이었지요. 그래서 처음에는 기존의 서양 노래를 가사를 바꿔 부르는 형식으로 저항가요가 만들어졌는데, 이러한 운동을 이끌면서 노래를 가르치고 부르며 이 문화를 향유한 사람들은 대부분 신교육을 받은 지식인층이었습니다. 이 시기 저항가요의 가장 많은 원천은 일본의 노래, 특히 일본 군가를 개사하여 부른 노래가 많았습니다. 대표적인 노래인 <봉기가>의 경우에는 일본 군가인 <아무르강에 흐르는 피>를 개사한 것입니다.
해방 직후 시기와 전쟁기 이 시기에는 매우 드물게도 전문 창작자가 적극적으로 개입한 시기였습니다. 여기에는 좌우의 인사가 함께 개입하였고 <독립행진곡>의 경우에는 <해방가>라는 제목으로 90년대까지 전승되기도 하였습니다. 해방직후 시기는 이전까지의 저항가요를 집대성한 마지막 시기였고, 저항가요조차도 분단을 통해 완전히 갈라지면서 이후세대로 전승되지 않았습니다. 4.19혁명을 전후한 시기 1950년대에는 관제 궐기대회를 제외한 데모가 없었던 시대였기 때문에 민중가요의 문화가 거의 존재하지 않았고, 그러한 이유로 4.19혁명 당시에도 <학도호국단가>, <애국가>, <삼일절노래>, <6.25노래>등의 노래가 불렸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당시 세대가 사회주의 운동과 절연하고 1950년대의 반공 제도교육을 받은 새로운 세대임을 보여줍니다. 한일수교반대데모 이후 유신체제 초기까지 한일수교반대투쟁 등에서부터 지식인들의 反박정희 태도가 분명해지고 결집하는 한편, 학생운동이 가열되면서 새로운 노래들이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흥미롭게도 이 시기부터는 행진을 위한 노래 이외에 구전가요 스타일의 노래 등이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이러한 현상은 점차 시위가 오랜 기간의 농성과 지속성을 수반하게 되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이 시기에는 <농민가>나 <정의가>와 같이 다소 구호적이고 계몽적인 경향의 행진곡 풍의 노래 등이 만들어졌습니다. 1970년대 후반, 민중가요 문화의 형성 이 시기에 이르면 적게 잡아 수십곡, 많게는 2-300여곡의 노래가 민중가요 문화로 축적되었고, 단순한 데모용 기능요에 머무르지 않고 다양한 경향의 노래들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1975년 긴급조치 9호 이후 총학생회가 사라지고 학내에서 집회가 불가능해지면서 학생운동이 양적으로 축소되었는데, 오히려 질적으로는 더욱 심화되는 양상을 보였습니다. 이슈 파이팅에 머물지 않는 이른바 ‘과학적 학생운동’이 시작되면서 운동권 학생들은 자신의 일상을 재조직하게 되고 이 과정에서 국내 대중가요, 복음성가 등 다양한 노래들을 민중가요로 소환하고 재해석하게 됩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미국-서구 근대를 모델로 한 민주주의가 우리 사회의 모델이었던 시대였기 때문에 이 시기는 복음성가를 비롯한 미국발 저항가요가 적극적으로 계승된 시대였습니다. 음악적으로 볼 때, 일제시대를 경유하며 형성된 행진곡의 전통보다 미국식 포크의 영향력이 강해진 시대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김민기, 김영동, 서유석, 한대수 등 국내 대중음악인들의 노래를 저항가요의 영역으로 소환하게 되고, <아침이슬>, <친구>, <상록수> 등이 불려진 것이 바로 이 시기였습니다. 제5공화국 시기, 포크의 쇠퇴와 비장한 단조의 노래들 1980년 봄은 민중가요 문화가 전 대학생 사회로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고, 향후 10년동안 민중가요의 최고 전성기를 맞게 됩니다. 70년대까지의 노래만으로는 수용자의 요구를 충족할 수 없었기 때문에 기성의 노래를 소환하는 것을 넘어서서 수용자 스스로 창작하고 그 안에서 전문가들을 창출해냈습니다. 포크의 자유로운 분위기, 명랑한 미국적 질감 등이 퇴조되면서 대신 비장한 단조의 노래로 급격한 경향의 변화를 맞게 됩니다. 이전의 행진곡들은 구호성과 계몽성을 벗고 서정성을 획득함으로써 인간의 고통과 절망, 이를 극복려는 의지를 비장한 정서로 표현하게 되었습니다. 저항가요 중에서도 행진곡 이외에 ‘서정가요’로 지칭된 노래들이 생겨났는데, 여기에는 <청산이 소리쳐 부르거든>, <타는 목마름으로>, <민중의 아버지>, <부활하는 산하>, <솔아 푸르른 솔아> 등이 있습니다. 1980년을 계기로 노래운동의 지향을 확실히 한 대학 포크 서클 출신들이 1984년부터는 대학 바깥에서 전문적인 노래운동을 시작하게 됩니다. 즉, 비전문가 사이에서 전문가가 탄생하게 된 것인데 그렇다고 이들이 상대적으로 음악적 전문성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노래운동 활동가들의 주도로 노동자 기타반 지도가 이루어지면서 노동자 창작품들이 생겨나기도 했고, 마당극 운동의 흐름에서 파생된 민요연구회는 전통민요의 적극적 계승과 새로운 창작을 통해 새로운 형태의 저항가요를 만들어냈습니다. 6월 시민항쟁과 노동자대투쟁 이후 문민정부 초기까지 1980년대 후반에 이르면 초중반의 노래 경향이 지속되면서 좀더 다양하고 일상적인 노래들이 생산됩니다. 운동이 대중화되면서 ⓵노동자 대중으로의 계층적 확산 과 함께 ⓶대중가요 공간에서의 합법적 활동이 성공하게 됩니다. 이로써 노래의 경향은 더욱 다양해지고 전문 노래운동 창작자들의 작품도 급증하게 됩니다. 이 시기에 접어들면 노동자가 수용하는 노동가요가 민중가요를 주도하면서 노동자노래단, 예울림, 꽃다지 등이 활발히 활동하였고, 특히 김호철 씨는 <파업가>, <단결투쟁가>, <끝내 살리라>, <포장마차> 등을 통해 노동자들의 독특한 감수성을 노동가요 속에 잘 담아냈습니다. 노래를 찾는 사람들, 노래마을 등은 대중가요 공간에서 활동하면서 <사계>, <솔아 푸르른 솔아> 등을 통해 가요순위와 악보피스 판매에서 커다란 성공을 거두기도 했습니다. 1990년대 후반 이후, 집단의 목소리에서 개인의 목소리로 이 시기에는 점차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의 조직력이 하락하면서 생활의 대부분을 공유하는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고 결국 민중가요 문화의 쇠퇴로 이어졌습니다. 이 과정에서 민중가요는 시위장 기능요의 방향으로 나아가거나 개인의 목소리로 이어져가는 두 갈래 길에 접어들게 됩니다. 결국 수용자들의 취향에 따라 새로운 길을 걸어 나가게 된 셈입니다. 2012년 오늘, 그리고 우리의 노래 다시 늘어난 ‘촛불’ 광화문 모여 ‘난장 공연’ http://news.nate.com/view/20080620n15669 MBC파업콘서트에 '나가수' 가수들도 동참 http://news.nate.com/view/20120625n12379 노찾사·꽃다지 잇따라 공연 http://news.nate.com/view/20120419n33000 트로트가수 현빈이 부른 <빠라빠빠>를 개사한 <한미FTA반대가> http://news.nate.com/view/20120419n33000 집회에 모인 시민들이 ‘난장공연’을 벌이고, 비교적 성공한 대중가수들이 ‘파업콘서트’라는 이름의 새로운 무대에 오르며, 또 한켠에서는 기존의 노래운동 활동가들이 공연을 여는... 2012년을 사는 오늘 우리에게 저항가요란 어떤 의미일까요? 노래가 변하고 시대가 변하고 우리가 변해도 오늘도 내일도, 우리의 노래는 계속될 것입니다. 첫 시간에도 이야기했듯이, 노래란, 그런 것이니까요.
글 : 자원활동가 김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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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문정치와 현대사, 그리고 주체 | <인문정치와 현대사, 그리고 주체> 5강 | 데브린 | 2012.8.3 | |
드디어 마지막 5강입니다! 마지막 강의는 "6월 항쟁, 다수가 만든 민주주의의 성공과 역설"이라는 제목으로 이영제 선생님께서 강의해 주셨습니다. 평소처럼 후기는 -하다체로 작성할게요 :) 6월 항쟁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6월 항쟁의 주체들은 동시대인들로, 6월 항쟁은 좀 더 우리와 관련된 이야기이다. 그러나 그것이 어떠한 의미를 갖는지, 6월 항쟁이 민주주의를 만들었다는데 그것이 무엇인지는 아직 모호하다. 6월 항쟁이 국가 기념일로 지정된 것은 불과 5년 전 일이고 20주년 행사에도 6월 항쟁 유가족은 참여를 거부한 일이 있었다. 6월항쟁의 성격또한 불분명하다. 6.10항쟁 혹은 87년 6월 항쟁이라고도 불리며 '항쟁'에 해당하는 부분은 contention, struggle, uprising, democratic movement 등으로 다양하게 불린다. 이중 가장 보편적인 말은 민주화운동에 해당하는 democratic movement이다. 이번 강의는 6월항쟁이 우리에게 남긴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강의였다. 민주화 요구의 분출과 억압(85년 2.12 총선~86년 말) 독재 정권하에 있으면서도 민주화에 대한 국민들의 열망은 조금씩 분출해 나왔다. 이 열망은 신한민주당(신민당)에 대한 지지로 조금씩 표출되었다. 이들은 직선제 개헌을 내세웠으며, 85년 2.12총선에서 276석 중 67석을 획득해 제 2정당의 위치를 갖게 되었다. YS와 DJ의 합으로 신민당과 민한당이 결합함으로써 신민당 중심으로 야권통합이 이루어졌으며 이들은 의석 103석을 획득하였다. 이에 따라 개헌은 민정당이 마음대로 할 수 없게 되었고 형식적으로나마 야당의 동의를 거쳐야 하게 되었다. 이제는 장외(제도 밖) 뿐 아니라 국회 안에서도 민주화에 대한 요구, 특히 직선제에 대한 요구가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학생운동또한 조직력이 더욱 높아져 학원 자율화를 주장하던 학생운동은 점차 정치 민주화에 문제의식을 두었고, 점차 정치화, 급진화 되었다. 이에 대응하여 정부는 학원안정법을 제정하였으나 이 조치에 대해 범야권 및 민주화 세력의 저항또한 상당하여 결국 법안은 철회된다. 이렇게 직선제 개헌 요구가 높아졌음에도 86년 전두환 대통령은 올림픽의 성공적 개최 이후, 즉 89년 이후로 개헌논의를 미룬다고 발표하였으며, 민주화 세력은 이에 반발하였다. 신민당과 민추협, 학생운동을 진행한 학생들은 개헌추진본부를 결성하고 개헌 추진 서명운동에 돌입하였으며 천주교 등 종교계와 여성, 문화, 학계 등의 시국선언도 잇따랐다. 정부의 억압에도 활발했던 야당과 재야세력, 학생들의 민주화 요구는 점차 분열된다. 신민당 개헌추진위원회 현판식은 국민, 민통련, 학생운동세력 등 다양한 세력이 참여한 가운데 잘 발족이 되었으나 대학가의 반미, 전방입소 거부투쟁과 이재호, 김세진 분신사건에 대해 민국련(신민당과 민통련 간 연락기구)은 소수 학생들의 반미 논리와 과격시위에 대한 비판서명을 발표하고 민통련은 민국련을 탈퇴함으로써 한 목소리를 냈던 야당과 재야세력은 분리가 된다. 이런 가운데 4월 30일 영수회담에서 이민우 총재의 "좌익 학생을 다스려야 하며 급진세력과 단절해야 한다"는 발언에 재야 민주화 운동세력과 야당과의 갈등은 더욱 심화되었다. 이러한 갈등이 폭발했던 것이 5.3 인천사건이다. 5.월 3일 인천 개헌 추진위 결성대회에서 재야 민주화 운동 세력이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면서도 신민당을 비판하며 격렬한 시위를 전개한 것이 이 사건이다. 야당과 재야 세력은 갈라서게 되었고, 국회에서는 여야 만장일치로 개헌특위가 발족하였으나 여당은 의원내각제를, 야당은 대통령 직선제를 요구하여 의견 불일치로 개헌특위는 유명무실화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학생운동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고, 개헌특위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자 야당은 다시 장외로 나와 투쟁을 진행하였다. 12월 24일에는 "선 민주화 후 내각제 협상을 할 수 있다"는 '이민우 구상'이 발표되었고, 이에 반발한 김대중, 김영삼은 통일민주당을 결성하였다. 6월 항쟁의 전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으로 개헌 열망은 더욱 광범위 하게 퍼져나갔다. 박종철 군 추도대회가 열리면서 '고 박종철 군 국민 추도회 준비 위원회'와 같은 전국적 조직이 형성되었고 운동방식에 대한 고민도 나타났다. 2.7대회와 3.3대회와 같은 민주화 대행진도 전개되었다. 정부는 이에 대해 민추협과 전국 105개 대학 압수 수색을 시행하였고 재야 인사 7백 여명을 가택 연금하였으며, 5만 병력을 동원하여 검문, 검색하였다. 아울러 전두환 대통령은 "개헌논의를 유보하고 현행 헌법으로 정부를 이양하며, 대통령 선거를 연내에 실시한다"는 4.13 호헌조치를 발표하였다. 이는 제도 내, 외에서 민주화 논의 및 개헌논의를 더 이상 허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명동 성당에서 5.18 광주항쟁 희생자 추모 미사에서 박종철 군의 고문 치사사건이 조작되었다고 폭로함에 따라 <박종철 고문 살인 은폐 조작 규탄 범국민 대회 준비위원회>가 결성되고 6월 10일 규탄대회가 진행될 것이 결정되었다. 5월 27일 <민주 헌법 쟁취 국민 운동 본부(국본)> 발대식이 거행되었고, 야당을 참여하도록 할 것인가 말 것인가에 대한 갑론을박이 이어졌으나 야당까지 포함하기로 결정함으로써 모든 민주화 세력이 연합되게 되었다. 6월 10일을 앞두고 정부는 검문과 가택연금을 벌이고, 6.10대회장으로 예정되어 있던 성공회대성당을 원천 봉쇠한다. 6월 9일 이한열 군의 최루탄 피격 사진이 국내외 언론에 보도됨에 따라 6월 항쟁의 불씨는 더욱 촉발되었다. 6.10대회에는 전국 22개 지역 30여만명이 참여하였으며, 밤늦게까지 시위를 전개하던 "일부 학생과 시민 8백 명 가량"은 명동성당에서 농성을 시작하였다. 이 명동성당 농성 참여자들은 온건 노선과 반대 축에 서 있던 사람들로 항쟁을 지속시키는 징검다리 역할을 하였다. 시민들의 지지 방문이 이어졌으며, 근처 일반 회사원 '넥타이 부대'가 점심시간, 퇴근 시간을 이용하여 부담없이 참여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시위 참여 방법은 다양하고 간단한 것들도 많았다. 6시에 손수건을 들고 흔든다든가, 9시 '땡전뉴스'가 시작할 때 불을 끄는 것 등도 포함되었다. 2만여 명이 시위에 참여하였으나 이후 군투입 빌미가 될 거라는 우려에 해산한다. 지역에서는 시위가 확대되었다. 6월 18일 최루탄 추방대회가 열렸다. 국본은 군 투입설이 유포되는 가운데 국민대회 개최를 강행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세력과 여야 영수회담 진행 경과를 보고 신중할 것을 제안하는 세력으로 나뉘어 졌다. 24일 영수회담에서 "거둔 게 없다"고 평가됨에 따라 26일 국민평화대행진에는 무려 150만명이 참여하였다. 이에 대응하여 노태우 민정당대표위원은 직선제 개헌, 김대중 사면 복권 등을 담은 6.29선언을 발표하고 전두환 대통령은 수용하나 항쟁 시위는 불법으로 간주한다고 밝힌다. 이후 김대중, 김영삼, 재야세력, 학생운동 등 민주화 세력은 분열하였다. 6월 항쟁과 중산층 "부르주아 없이 민주주의도 없다"는 베링턴 무어의 말과 같이 민주화 이행에서 중산층의 태도는 민주화의 양과 질에 관련된다. 중산층개념은 모호한 면이 많아 개념 규정조차 쉽지 않다. 당시 서울대 사회과학 연구소에서 제시한 것은 20-60평 대 아파드 거주자였는데 이에 따르면 무주택자는 제외하게 된다. 강의는 중산층을 계급적으로 보기보다는 "운동권이 아닌 세력들", 즉 소극적 지지자들로 보았다. 중산층은 처음 신민당을 통해 제도 안 에서 소극적으로 분노를 표출하다가 점차 적극적으로 민주화 열망을 지지하고,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들의 변모는 6월 항쟁에서 다수 형성의 계기가 되었다. 이들 일반 시민, 비조직화 된 대중, 그리고 특히 넥타이 부대는 당시 민주 세력에 대해 "빨갱이"라 칭하던 반공 이데올로기를 무력화하는 것이었다. 이런 차원에서 언급되었던 것이 노동자 대투쟁이었다. 뜬금없이 들릴 수도 있겠지만 6월 항쟁과 시기적으로 함께 했던 (그리고 생산직 노동자도 6월 항쟁의 주체였다.) 노동자 대투쟁은 "노동 삼권의 완전 보장"을 주장하며 민주주의의 확산을 꾀했다. 이런 점에서 6월 항쟁과 연관되어 말할 수 있겠다.
6월 항쟁과 다수 6월 항쟁의 주체는 야권, 재야세력, 학생운동세력, 노동자들, 가정 주부들, 자영업자들이 공통적으로 민주화를 요구한다는 점에서 동일한 집단이다. 즉 "최대 다수 연합"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이들 '다수'라는 점이 조건이면서 한계이기도 하다는 평가를 내릴 수 있다. '민주화 세력'으로 한 덩어리로 인식되나, 이들이 원하는 민주주의의 양과 질은 상이하며 그런 점에서 이들은 다수의 소수집단으로 다시 나뉠 수 있기 때문이다. 6월 항쟁의 주체로서 다수는 각자의 머릿속에 있는 민주주의 간 차이는 인정되지 않았다. 6월 항쟁은 분명 민주주의의 커다란 성과인 것은 사실이나 이러한 아쉬움이 "6월 항쟁에서 실질적으로 얻은 것은 직선제 뿐"이라는 평가가 나오기도 한다. 직접 참여는 이따금씩 이루어지며 국민들은 "선거때만 자유롭다"는 것이다. 87년 체제 이후 항쟁의 주체들은 모두 흩어지고 지금의 민주주의는 이중 압력을 받는다. 하나는 민주주의가 너무 방만하다는 입장으로 주로 보수측에서 나오는 의견이고, 또 다른 하나는 민주주의가 너무 적다는 의견으로 소수자 문제 및 사회복지를 중시하는 입장이다. 연합된 다수는 사라지고 민주주의 간의 줄세우기가 지금 사회의 자화상이다. 나가며 이번 강의 또한 흥미로웠다. 6.10민주 항쟁에서 막연하게 '민주화 세력'으로 단일하게 생각했던 존재들을 야당/재야세력/학생운동세력 등으로 나누어 본 것 또한 유익하였다. 다수가 차이에 대한 인식 없이 연합함으로써 누군가에게는 불충분한 민주주의가 주어졌다는 것이 6월 항쟁의 한계라는 지적 또한 생각해보지 못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6월 항쟁의 한계라기보다는 민주주의 자체의 한계, 그리고 연대의 한계라는 생각이 들었다. 연대의 경우, 상이한 소수집단이 흩어져 있으면 각기 원하는 목표가 달성되지 않으므로 공동의 목표를 창출하여 서로 힘을 합하는 것이라 생각하는데, 이 과정에서 각자의 차이는 물론 염두에 두어야 하나 어느정도 유보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각자의 차이를 공동의 목표만큼이나 중시하면서 연대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이는 6.10항쟁 뿐 아니라 다른 연대, 혹은 혁명에도 해당한다고 생각한다. 분명 6.10항쟁에서 "직선제만 얻었다"는 평가는 '6월 항쟁=민주주의의 완성'이라는 일반적 생각에 대한 아쉬움의 표현에는 적합할 수 있으나, 평가의 측면에서는 무리가 있다고 생각된다. 6월 항쟁에서 얻은 직선제와 '87년 체제'가 그 때에는 유보될 수밖에 없었던 '차이'에 대한 공론화 및 개선의 초석이 되었음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아울러 6월 항쟁이 "'선거때만 자유로운'인민을 만들었다"는 지적은 6월 항쟁의 한계로 다루기보다는 민주주의 혹은 대의민주주의의 한계로 다루는 것이 더 적합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거 이외에 시민의 참여가 제대로 이루어지기 힘든 것은 대의민주주의가 태생적으로 갖고 있는 한계라는 생각이다. 나는 오히려 6월 항쟁은 우리에게 '자랑스러운 기억'을 가져다 주었고 이러한 자신감을 토대로 이후 점차 시민의식이 향상하고 있어 대의민주주의가 보완될 여지가 증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현재 시민참여가 미흡한 것은 사실이나, 이는 민주화자체가 이루어진 것이 얼마 되지 않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한편, 현재 민주주의에 대한 개념 정의가 서로 다르며, 6월 항쟁 이후 정치적 민주주의는 공평하게 분배되었으나 다른 영역까지 침투된 것은 아니라는 것에 대해 중요한 지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민주주의를 만들어 갈 것인지 끊임없는 진통을 겪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각 주체의 합리적인 시민의식이라는 생각이 든다. 종강소감 이번 강의를 끝으로 <인문정치와 현대사, 그리고 주체> 총 5강이 끝났습니다. 모두들 날도 더운데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1층 카페 통인을 꽉 채워주셔서 마음도 따뜻했어요. (더불어 후기를 늦게 올려 죄송합니다.) <인문 정치와 현대사, 그리고 주체>는 다섯 분의 선생님께서 다섯 개의 다른 사건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신 거라 강의마다 미묘한 차이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공통적인 주제의식이 꿰뚫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008년 촛불 시위때 저는 "이 많은 사람이 어디서 온 걸까"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정말 그 많은 사람은 어디서 온 걸까요. 이러한 '사건'들, 강의에서 다루어진 3.1운동, 8.15해방, 전태일과 광주대단지 사건, 5.18 광주항쟁, 87년 6월 항쟁의 주체들은 역사의 전면에 나오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정치적, 경제 사회적으로 활동해 지금으로 따지면 네이버에 이름을 치면 인물 검색으로 나올 사람들이 아니라 대다수 이름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모여 근현대사에서 각기 전환기적 사건을 만들었다는 것은 놀랍기도 하고 흥미롭습니다. 앞으로 나올 '주체'는 어떤 자들일지, 그들이 추구할 가치는 어떤 것일지 궁금합니다. 이는 미래의 어느시점에 틱 던져지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문제의식에서 비롯되겠지요. 그리고 미래에 부끄럽지 않을 가치를 오늘 추구해가며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 자원활동가 김수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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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란의 소리, 저항의 노래 | 반란의소리 저항의노래 2강 – 일본의 저항가 연대기 : <인터내셔널>도입에서 후쿠시마까지 | 웃으며,함께,끝까지 | 2012.7.2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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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란의소리 저항의노래 2강 – 일본의 저항가 연대기 : <인터내셔널>도입에서 후쿠시마까지 이 나라를 걷다 보니 원전이 54기 교과서도 CM도 말했었지, 안전하다고 우리들을 속이고 변명이라는 게 ‘예상 밖’ 그리운 그 하늘 가려운 검은 비 다 거짓말이었던 거야 역시 들통났네 진짜 거짓말이었던 거야 원자력이 안전하다는 건 (중략) 다 시궁창이었던 거야 도쿄전력도 훗카이도 전력도 주부전력도 규슈전력도 이제 꿈같은 거 꾸지도 않지만 다 시궁창이었던 거야 그런데도 계속할 생각이야 진짜 시궁창이었던 거야 뭔가 하고 싶은 이 기분 일본의 인기 록가수 사이토 가즈요시가 자신의 히트곡을 개사해서 부른 <다 거짓말이었어> 라는 노랫말입니다. 수업시간에 직접 동영상을 통해 보신 분들도 계시겠지만, 이 노래는 일본에서 동영상으로 만들어져 인터넷을 중심으로 울려퍼졌고 결국에는 사이토 가즈요시가 속한 레코드 회사(원전 건설회사인 東芝의 자회사 EMI Music Japan Inc.)의 강력한 요구로 인터넷에서 삭제되는 소동을 벌이게 됩니다. 지난 해 3월 일본에서는 가히 재해라고 부를 수 있을만한 경악스러운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바로 후쿠시마의 원자력 발전소 방사능 유출 사건이었죠. 하지만 당시 일본의 전력회사, 관료, 정치가, 언론, 학자들은 자신들의 이권을 지키기 위해 사고를 축소, 은폐하려 했고 오히려 방사능이 위험하지 않다는 선전을 전개하며 공분을 샀습니다. 결국 이에 분노한 시민들은 광장으로 모여들었고, 임경화 선생님의 이야기는 바로 이곳에서 출발했습니다. 참여연대 아카데미느티나무 2012 여름강좌 [반란의 소리, 저항의 노래] 의 두 번째 시간은 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의 저항가요에 대한 이야기로 꾸며졌습니다. 2011년 일본, 그리고 2008년의 기억 2011년 7월 16일 도쿄의 한 광장에서는 17만 명의 시민이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바로 후쿠시마 원전사고에 대한 정부의 대응에 국민들이 분노한 것인데, 이런 대규모 집회는 일본에서 무려 40년 만의 일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앞에서 들려드린 <다 거짓말이었어>라는 저항의 노래가 있었습니다. 2008년의 광화문 앞거리를 기억하시나요? 굳건한 ‘명박산성’앞에서 시민들은 촛불을 들고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는 짦지만 강렬한 메시지를 외쳤었지요. “<대한민국 헌법 제1조>도 <다 거짓말이었어>도 ‘눈앞의 사익보다 생명’을 외치는 시민들의 중심에서 시민들의 깃발이 되고 무기가 되고 심장이 되었”다는 임경화 선생님의 이야기는 규모도 성질도 다른 한국과 일본의 두 사건을 ‘저항의 노래’라는 하나의 시선으로 바라보게 합니다. 52년만에 ‘10만 시위’… 日국민 입열다 http://media.daum.net/foreign/newsview?newsid=20120725031104068 일본의 저항가요 저항의 노래는 혁명가, 노동가 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는데, 결국 체제에 반대하고 의문을 제기하는 노래들을 모두 저항가라고 이름 붙일 수 있을 것입니다. 자본주의가 도래하면서 노동자 계급이 형성되고, 이들이 계급의식을 가지고 국가 권력에 저항하기 시작하면서 이들을 묶어내기 위한 도구로서 노래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고, 표현과 사상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았던 그 당시에는 지금보다도 더 강력한 기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중 대표적인 노래가 <인터내셔널가>인데, 임경화 선생님은 이 노래 하나만으로도 일본의 저항가요의 연대기를 책 한권 분량으로 쓸 수 있다고 하시니, 그 내용이 더욱 궁금해집니다. 일본의 저항가요는 한국에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식민지 시절에 대한 트라우마 때문일까요? 그동안 한국은 일본의 대중문화를 수입금지하는 조치를 취해온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오히려 일본의 저항가야말로 일본의 재무장-제국주의화에 저항하고자 했던 움직임이었고 일본 저항가의 역사 속에는 조선과 일본의 연대의 기록들이 남아있습니다.
1960년대 일본에서는 이른바 전공투 세대가 있었는데, 69년 3월에는 고등학생들도 데모에 주체적으로 참여함으로써 졸업식에서 기미가요 대신 인터내셔널가를 부르는 등의 저항운동이 있었습니다. 또한 베트남전쟁 반전 운동이 전세계적으로 퍼지면서 일본에서는 포크붐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당시의 저항가요들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상징이었고 계급투쟁의 연장선상에서 저항가요를 불렀기 때문에 당시에는 상당히 고가의 악기였던 기타를 써서는 안된다는 논의도 있었다고 합니다. 다카다 와타루는 <기동대에 들어가자>라는 노래를 불러 유행시켰는데, 이 노래는 ‘자위대에 들어가서 꽃처럼 산화하자. 악의 축을 쳐부수자’라는 가사를 통해 오히려 일본이 군비증강을 통해 이미 제국주의의 길을 걷고 있다는 자위대에 비판의식을 담고 있었습니다. 또한 이 노래는 2011년에는 원전을 비판하는 내용으로 개사하여 불리워지기도 했습니다. <인터내셔널가>의 도입 일본의 경우에는 청일전쟁 이후 후발자본주의 국가로서의 길을 걷게 되면서 급격한 산업화의 과정을 거쳤고, 여기에 저항하기 위해 1901년에는 사회당과 같은 좌파정당이 생겨났는데, 아마도 이 무렵 <인터내셔널가>가 처음 일본에 전해였을 것이라고 추측됩니다. 한국의 병합은 일본에서는 국내적으로 저항세력을 초토화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910년도에는 일본 내의 좌파세력이 대부분 제거되기에 이르렀는데, 변혁운동이 다시 숨을 쉬기 시작한 것은 1917년 러시아혁명 이후였습니다. 여기에 영향을 받은 민중들의 봉기는 쌀값봉기, 보통선거권 투쟁 등으로 옮겨갔고, 1920년대에 제1회 메이데이 행사가 개최되었습니다. 그리고 1922년, 일본 공산당이 창설되고 러시아 혁명 5주년 기념행사가 벌어지면서 <인터내셔널가>가 본격적으로 도입되었습니다. 이 당시에는 <적기가>나 <군가>등도 개사하여 들어왔는데, 이러한 유명한 저항가 중에는 기숙사 노래 등을 개사해서 부른 경우도 있었습니다. 외국곡들을 번안하기도 했는데 이 당시에는 검열이 너무 심해서 ‘부르주아 계급을 쳐부수자’라는 가사 등이 들어가면 발표가 금지되었기 때문에 일본에서의 <인터내셔널가> 번역은 전혀 혁명가요 ‘스럽지’ 않은 형태로 번안되었습니다. 이를테면 어떤 목적인지를 밝히지 않고 다만 ‘목적을 위해 목숨을 바쳐 희생하자’는 식으로 일본의 무사도와 자기희생에 바탕을 둔 혁명 저항가 등이 많이 나왔습니다. 프롤레타리아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창작곡을 만들어야한다는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인터내셔널가>와 <적기가>가 불려지는 것은 차마 1년이 되지 않았습니다. 1923년 관동대지진 이후 저항가요들이 금지되고 좌파운동가들이 대거 구속되면서 이후 공식석상에서는 <인터내셔널가>를 허밍이나 라라라 등으로 바꿔 부르거나 소비에트 등의 가사를 쓸 수 없어서 ‘빛의 나라’로 바꾸어 부르기도 했습니다. 20년대 중반 이후에는 문학동맹이나 음악동맹 등이 많이 생기면서 PM 활동이나 가집 편집, 레코드 취입, 메이데이가, 라라라행진곡(인터내셔널가 허밍버전), 창작곡 제작, 음악회 개최 등의 활동이 활발해졌고, 이 과정에서 재일조선인들과의 연대활동이 이루어졌습니다. PM이 편집한 최초의 가집 <프로레타리아>를 통해 이루어진 저항가요의 조일연대는 제3회(1922) 행사에서 본격적으로 조선인 단체가 참가하고 제4회(1923) 행사에도 조선인 노동자들이 참가하면서 더욱 활기를 띄었고, 오사카 메이데이 슬로건으로는 “일조노동자 단결하라”가 채용되기도 하였습니다. 1931년 10월호에 발표된 김용제의 시 <사랑하는 대륙이여>에 하라 다로가 첼로 반주의 혼성 4부 합창으로 작곡한 곡이 제4회 프롤레타리아 대음악회(1932)를 위해서 만들어졌으나 검열로 인하여 삭제되어 연주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 노래는 저항가요에서 조일합작의 효시를 이룬 작품이었습니다. 패전 이후에 전후 민주주의에 대한 욕구가 많아지면서 1950년대에는 메이데이 참가 인원이 폭발적으로 늘었고 60년대에는 전공투를 중심으로 학생운동과 반전운동이 절정에 달했지만, 이후 고도성장에 따른 소비사회로 분위기가 전환되면서 저항운동의 불씨가 잦아들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2011년, 원전사고를 계기로 40여년 만에 일본의 거리에 저항의 노래가 다시 울려퍼지게 된 것입니다. 우타고에 운동의 전후사 우타고에 운동이란, 패전 후 일본공산당의 혁명운동과 깊은 관련성 속에서 합창을 중심으로 하고 서클활동을 기반으로 전개된 음악운동을 말합니다. 우타고에는 전쟁 전 PM운동의 유산을 전승하면서 사회주의 음악문화의 직수입, 전문가 집단의 인민에 대한 봉사, 공동 창작은 물론 노동운동과 반전평화운동, 학생운동을 지도하는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당시 대학생들은 일본사회에서 5%정도 밖에 되지 않아 크게 주목받지 못했는데, 우타고에가 48년 전학련의 결정에 맞춰 동경대학의 합창 서클을 지도하면서 일본공산당과 관련된 조직 중에 유일하게 대중성을 확보한 운동조직으로 기능하게 됩니다. 때마침 미국이 태평양 비키니 섬에서 실행한 수폭실험에 일본어선이 휩쓸리는 사고가 발생하였고, 이에 맞춰 일본공산당이 미국을 적으로 규정하면서 반미운동의 움직임이 확산되기에 이릅니다. 1954년의 수폭금지운동, 미군기지 반대운동을 거치며 우타고에 운동이 크게 성장하였고 이 운동의 가집들은 숨은 베스트셀러로 확산됩니다. 원수폭금지운동의 상징이 된 노래인 <원폭을 용서하지 않으리>는 ‘고향땅이 불타버리고 육신이 사라진 땅, 용서하지 않으리’ ‘히로시마 나가사키 비키니.. 세 번째는 피폭당하지 않으리, 세 번은 용서하지 않으리, 세 번은 허락하지 않으리..’라는 가사를 통해 일본 민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오늘날까지도 꾸준히 원수폭금지운동의 중심에서 불려지고 있습니다. 운동노선이 국제운동보다는 민족운동에 집중되면서 점차 혁명성 있는 소련의 가곡들이 덜 불려지게 되었고, 대학생들은 우타고에 운동의 중심이 노동자에서 국민으로 옮겨가고 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저항가요는 함께 부르는 형태에서 소비되는 형태로, 그리고 합창을 하지 않는 세대로 이행되면서 점차 우타고에 운동은 고령화되어 가는 추세에 있다고 합니다. '5월 광주정신'을 노래하는 일본인들 http://news.nate.com/view/20120517n34751 5.18 민주화운동 32주년을 맞은 지난 5월, 광주에서는 우타고에의 노래가 울려퍼졌습니다. 사회적인 위기나 모순을 깨는 강력한 첫 목소리, 사람들을 하나로 묶는 저항의 노래는 민족을 넘고 국경을 건넙니다. 2008년 광화문 광장에 <대한민국 헌법 제1조>가 울려퍼지고 2011년 도쿄 고엔지에서 <다 거짓말이었어>가 불려진 것은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다음 시간에 이어질 한국의 저항가요 이야기가 더욱 기대되는 이유입니다. 글 : 자원활동가 김주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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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문정치와 현대사, 그리고 주체 | <인문정치와 현대사, 그리고 주체> 4강 | 데브린 | 2012.7.24 | |
<인문정치와 현대사, 그리고 주체> 4강은 "5.18 광주 항쟁과 저항주체"라는 제목으로 김정하 선생님께서 강의해 주셨습니다. 벌써 4강이네요! 다음 강의가 마지막 강의입니다.
이후 편의를 위해 존대말은 생략하고 '-하다'체로 쓰겠습니다.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재현의 문제 재현은 현실 재구성 과정을 수반한다. 재구성 과정은 해석하는 주체와 관점에 따라 달라진다. 5.18 광주항쟁 또한 재현의 문제를 갖는다. 광주항쟁의 재현을 둘러싸고 많은 담론이 각축을 벌였으며, 다음에서 발펴볼 것이다. 국가 중심적 재현 국가 중심적 재현은 시민군의 형상에 주목한다. 먼저 사회 운동의 재현으로서 5.18을 바라볼 수 있다. 이러한 관점은 민중 항쟁이 아니라 혁명에서 5.18을 해석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광주 항쟁은 크게 세 시기로 나뉠 수 있는데, 5월 18일부터 21일/5월 21일부터 26일/5월 27일 “최후의 항전”이다. 마지막 시기인 5월 26일에는 “수습파”에 반대하면서 항전을 주장하는 “항전파”가 전체 조직을 장악하는데, 사회운동의 관점은 바로 이 항전파를 국가에 대항하는 대안국가 내지는 대항국가로 바라본다. 이들 시민군은 하나의 민중 권력이었으며, “임시 혁명 권력”이었으며 “광주 코뮌”이었다. 더욱이 항전파의 주체는 노동자 계급, 사회 하층민 등의 소외계층이었다는 점은 이러한 관점을 뒷받침한다. 이 해석은 80년대 학생 운동권에서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보다 급진적인 것이 필요하다는 현실 문제 의식에 기인한다. 비록 광주항쟁의 의도는 아니었으나 광주항쟁을 맑스주의의 복원과 연결지어 해석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사회주의 국가들의 몰락과 역사를 이념에 끼워 맞춘다는 비판에 의해 영향력을 상실했다. 사회 운동론의 뒤를 이은 해석은 바로 민주화운동론으로, 민주 정부 이후 국가적 차원에서 담론을 만들면서 재현된 것이다. 이 관점은 광주항쟁을 군부 독재에 대항하는 민주화 운동으로 바라봄으로써 사회 운동적 관점에서 강조했던 “새로운 국가”는 민주국가가 되므로 사회운동적 관점에서 해석했던 광주항쟁의 반자본주의적 성격은 사라진다. 항쟁의 주체 또한 시민으로 일컬어지며 탈계급적인 것으로 해석되는 등 저항성이 약화된다. 이후 광주 항쟁의 연구가 인권, 평화 등을 중심으로 정체화 된 측면이 있다.
주체 중심적 재현 사회 운동론 이후 침체된 저항적 면모를 보존하면서도 개념을 새로이 하는 가운데 등장한 이 관점은 광주 항쟁을 “새로운 주체의 탄생”으로 바라보는 입장이다. 광주 항쟁은 “가난한 사람들의 잡색 부대”였던 다중이 직업, 신분, 정체성에서 벗어나는 자유로운 초인으로 거듭나는 것이었다 이들은 기존 사회로부터 부여된 정체성에 따른 것이 아니라 그 경계를 넘어 서며 “유목민”으로 재탄생하는 것이었다. 기존 사회의 인칭은 사라지고 항쟁의 주체들은 “비인칭적” 존재가 되었다고 이 관점은 해석한다. 이는 자연스럽게 국가 중심적 재현에 대한 비판적 측면을 갖는다. 국가 중심적 재현은 광주 항쟁을 기존 국가 권력을 전복하고 새로운 민중 권력을 수립하는 행위로 해석하였다. 주체 중심적 재현은 이러한 국가 중심적 재현에 대해 권력의 중심만 바뀔 뿐 기존 질서는 그대로라는 점에서 이를 진정한 혁명으로 보기는 어렵다는 입장이라 할 수 있다. 주체 중심적 재현은 기존 질서마저도 새롭게 의미부여하는 시도로 광주 항쟁을 바라보는 입장이다. 그러나 이 해석은 광주 항쟁민들을 “초인” “영웅”으로 표현함으로써 광주 항쟁에 참여했던 사람들을 과장하는 면이 있다. 도청에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사람들조차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다양한 면모를 이 관점은 간과하는 면이 있다. 주체 구성과 사건 주체의 구성 양상은 정체화(identification), 반정체화(counter-identification), 탈정체화(dis-identification) 세 가지 방식으로 나눠볼 수 있다. 정체화는 주체화라 할 수 있는데, 사회적으로 주어진 위치에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이다. 예컨대 아버지라는 역할기대에 맞추어 자신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식이다. 반정체화란 그러한 위치 부여를 거부하는 것으로, 이 과정에서 히피, 6,70년 대 문화 운동 등의 하위문화 및 이를 토대로 한 새로운 공동체가 형성되기도 한다. 탈정체화란 주어진 위치를 벗어나 자기 자신만의 삶의 양식을 이루는 것이다. 바로 이 탈정체화를 행하는 것이 저항주체라 할 수 있다 (랑시에르). 탈정체화의 전개는 두 가지 정도에서 살펴볼 수 있는데 상징계(이미 주어진 의미체계)에서 벗어나려는 시도, 즉 주어진 주체 위치 자체에서 벗어나려는 시도가 그 하나이며, 주체 위치 자체보다는 주체 위치가 담고 있는 의미, 기능들을 바꾸어 나가는 것이 다른 하나이다. 그렇다면 5.18에서 저항주체는 어떻게 구성되었는가. 자신들이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자의식을 강하게 가지고 있었고 “군대가 어떻게!”라는 분노에 찬 시민들은 국민으로 과잉정체된 (over-identified) 상태였다 할 수 있으며, 도청에서 최후의 항전 참여자들은 새롭게 형성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에서 탈정체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사건은 “상징 질서의 파열”이다. 사건은 막 발생한 상황에서는 충격이지만 사회적으로 해석되고 받아들여짐에 따라 기존 상징 질서로 포섭된다. 사건을 상징 질서로 포섭하는 과정, 의미부여하는 과정에서 기존 상징 질서를 재구성하게 되고, 이는 주어진 주체-위치의 탈 정체화로 이어진다. 다시 말해, 처음에는 이름 붙이기 어려웠던 사건이 점차 사회적으로 의미 부여됨에 따라 그 의미를 부여하는 기존 사회 질서 또한 재구성되고 기존 의미에 균열이 간다는 것이다. 5.18은 처음에는 “빨갱이 폭도”라 규정되었으나 이는 맞지 않는 위치지음이었고, 이에 새로운 상징의 필요성이 제기된 가운데 기존 주체 위치를 파열시킨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인문정치와 주체 위까지가 5.18과 관련된 강연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고, 마지막에는 강의 제목이기도 한 “인문 정치와 주체”의 뜻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다. 여기서 “주체”는 누구이고 “인문정치”는 무엇인가 하는 이야기였다. 우선 배제된 사람이 가장 보편적이라는, 배제와 보편의 동일성을 전제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런 의미에서 “주체”는 “추방된 자, 배제된 자, 몫없는 자, 아무것도 없는자”라 할 수 있으며 인문정치는 이들 “‘추방된 자의 시선’(이명원)으로 보고 듣고 행하는 정치”를 의미한다. 배제된 자들(“서발턴”)의 문제는 구조적 힘을 결여한다는 것으로, 이들이 연합적 힘을 만들어 가는 것은 쉽지 않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에게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알 수 있도록 하고 부여하는 것이 과제가 된다. 나가며 5.18 광주항쟁 하면 떠오르는 것은 민주화 운동인데, 5.18 광주항쟁의 재현 양상들의 변화를 보니 흥미로웠다. 시민군을 새로운 혁명권력으로 보고 코뮌으로까지 간주하는 사회 운동 재현 관점이나 새로운 질서를 가지는 초인으로 바라보는 주체 중심적 재현까지. 하나하나 각 관점에 대한 설명을 들으며 한편으로는 솔직히 말하자면 “해석에 저항”하고픈 심정도 있었다. 거대 담론이 사람들을 가려버리고, 사람들의 생동감을 앗아버리는 느낌이었다. 좀 격하게 말하면 사람들이 거대 담론 내지는 이념의 도구가 되는 기분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5.18이라는 사건이 어떤 식으로 재현되어 왔고, 어떤 식으로 의미부여 되어왔는가를 살펴보고, 이 사건에서 주체들이 어떤 식으로 구성되었는지를 훑어보았던 이 강의는 흥미로웠다. 아울러 인문정치와 주체에 대한 설명은 비록 내가 생각하는 인문학과는 차이가 있기는 했지만 어쨌거나 설명을 들으니 서로 다른 선생님들의, 서로 다른 강의 전반의 기저에 깔린 문제의식이 좀 더 선명하게 인식되었다. 정말 주변부 존재들 예컨대 ‘폐지 줍는 할머니’와 같은 분들의 몫은 어떻게 주장될 수 있을까. 자원활동가 김수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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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명 안으로 : 근대문명에 대한 성찰 | <문명안으로 : 근대문명에 대한 성찰> 종강 소감 | 느티나무 | 2012.7.17 | |
2012 봄 <문명안으로 : 근대문명에 대한 성찰> ![]() [2012.07.12 문명안으로 7강_박노자 강연] 박노자선생님의 열강으로 <7강 대안문명을 생각하다> 종강했습니다. 매 강의 때마다 열정적이고 적극적인 자세로 함께 해주신 주신 모든 참여자에게 감사를 전합니다. 본 강좌를 통해서 배움에 대한 자세와 성찰이 가져다 주는 지적자극으로 참 많이 행복했습니다. 더불어 조별로 간식과 뒤풀이간식을 준비하는것에 뜻을 모아주신 덕분에 모두가 함께 만들어 가는 강좌가 될 수 있었습니다. ^^ 가을학기에 다시 만나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12.07.12 문명안으로 7강 고민과 호기심이 넘실대는 뒤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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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문정치와 현대사, 그리고 주체 | <인문정치와 현대사, 그리고 주체> 3강 | 데브린 | 2012.7.17 | |
<인문정치와 현대사 그리고 주체> 3강 "전태일 분신과 광주대단지 사건: 사건을 통해 본 70년대"는 김원 선생님께서 진행해 주셨습니다. 3층 소회의실에서 강연을 진행하니 준비하고 정리하는 입장에서는 편했..어요 허허. 꾸준히 많은 분들이 나와주셨습니다. :) 그럼 평소처럼 후기는 '-하다'체로 작성하겠습니다. 사건, "숨겨진 자들이 이름을 드러내는 방법" 강연은 사건에 대한 새로운 해석으로 시작했다. 일반적으로 사건은 공적 사료를 토대로 '중심'에 초점을 두고 기록된 역사를 뜻한다. 그러나 이 강연에서 사건은 비가시적이고 숨겨져 있던 주체가 드러나는 계기이며, 이들 주체가 자신들에게 기존에 부여된 정체성 및 의미에서 벗어나려는 흐름이다. 이러한 "잊혀진 주체"는 자기 기록을 남기지 않고 스러진다. 바로 사건을 통해 그들의 실존을 드러낼 수 있다. 이 강연에서는 70년대의 두 사건, 전태일 분신과 광주 대단지 사건을 통하여 어떤 주체가 자신의 실체를 어떤 방식으로 드러내었는지가 이야기 되었다. 전태일: 겁쟁이들과 연대 기존 역사 담론에서 전태일의 분신사건은 "낮은 수준의 운동" 혹은 우연적인 것으로 그려지며, 이에 대한 우리의 이미지도 막연하게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죽어간 전태일에 국한된다. 그러나 전태일의 분신은 역사 서술에서 목소리를 갖지 못하고 사각지대에 놓여있던 "겁쟁이" 여공들을 가시화하였다는 점에서 더 깊은 의미를 갖는다. 당시 평화시장의 노동환경이란 다음과 같았다. 노동 조직(노조)이 존재하지 않았고, 근로자들은 대개 16~20(21)세의 어린 소녀들로 농촌에서 상경한 단신이었다. 이들은 주로 가부장적 농촌 환경에서 장남 교육을 위해 서울로 올라와 근로하고 있었고, 사적 영역인 농촌 가정에서의 가부장적 질서는 평화시장이라는 공적 영역에서도 되풀이 된다. 이들은 쉽게 "아버지" 공장주에게 이의제기하지 못했으며, 어린 나이에, 아무 연고도 없고, 그들 사이 마땅한 조직을 갖고있지 않은 상황에서 여공들이 근로기준법(권리)를 주장할 여지는 거의 없었다. 전태일이 분신하기 전후 시기 대다수 여성 노동자들은 비가시적 "겁쟁이"였던 것이다. 여공들의 환경을 개선해보려 한 전태일은 67년 "시다들을 버릇없게 만든다"는 이유로 해고당하게 되고 이후 <바보회>를 결성한다. 『평화시장 근로 조건 실태조사』(1970)를 작성한 그는 근로감독관과 노동청에 진정서를 보내나 묵살당하고 대통령과 근로감독관에게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요구입니다>란 진정서를 보낼것을 계획한다. 이 진정서는 대통령을 "국부"라 칭하고 자신을 포함한 노동자들을 "소자"라 칭하며 보호를 요청하는 화법을 사용하여 "지배담론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만든 <평화시장 근로조건 실태조사> 설문지에는 분명 노동자에 대해 "지배담론"이 부여한 정체성을 벗어나려는 모습이 드러나 있다. 예컨대 11번과 12번 문항이다. 11번 문항 "당신 교양을 위한 서적은?"과 취미를 묻고 있는 12번 문항은 분명 지배계층이 위치지은 노동자의 관념 및 정체성에서 이탈하는 것으로, "사유하는 인간"으로서의 "노동하는 인간"(노동자)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았을 때 전태일의 분신은 '노동자는 묵묵히 일해야 한다'는 주어진 정체성에서 벗어나려는 의지적, 의도적 행동이다. 그의 연대란 "겁쟁이" 여공들이 지배계층으로부터 주어진 정체성에서 벗어나도록 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가 이 부분의 강의에서 제기된 요지라 할 수 있겠다. 강의 앞부분에서도 제기되었듯이 "겁쟁이" 여공들과 같은 비가시적 주체는 공식 사료에는 등장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그들이 드러나는 것은 전태일 분신과 같은 사건을 통해서이다. 그러나 점차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동대문 시장에서 일하던 여공들이 "'전태일이 알던 불쌍한 여공들'로만 그려지는 게" 안타까워 직접 쓴 기록을 남겨야 겠다 생각해 결국 올해 6월 12일 통과된 석사학위 논문으로 자신의 삶을 그려낸 '7번 시다' 신순애 씨의 경우이다. "평화시장 노동자에 대한 저술은 많지만 당사자가 직접 쓴 것은 처음"이라는 지도교수의 말1처럼 "비가시적 주체"들은 여지껏 드러나기 쉽지 않았지만 시간이 흐른 뒤 스스로 목소리를 드러내기도 한다. 1971년 광주대단지: 봉기의 사건 1971년 광주대단지 사건은 1971년 8월 10일 오후에 3-4시간 광주대단지 지역에서 일어난 집단행동으로, 지금까지도 "난동"으로 인식되는 사건이다. 그러나 이 사건은 무조건적으로 비합리적이었던 폭동이 아니라 나름의 이유를 가진, 광주에서의 삶을 꿈꾸던 도시빈민이라는 산재해있던 주체들을 가시화해준 사건이다. 산업화 초기 서울시는 도시 빈민과 무허가 주택에 살고있던 사람들에 대한 대책의 일환으로 서울 근교에 정착지 조성을 함으로써 이주정책을 시행한다. 대단지 사업이 발표된 후 많은 사람들이 광주대단지로 이주하는 것을 꿈꾸는 소위 '대단지 붐'이 일었고, 이들은 대규모 이주를 준비하였다. 그러나 "인구 10만 명만 모아놓으면 어떻게 해서든 뜯어먹고 산다"는 '편의주의적' 발상으로 진행된 광주대단지 조성은 전문가의 자문수렴도 거의 고려되지 않았고 몇 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이주민들은 토지를 받았을 뿐이지 다른 물자는 제대로 갖추고 있지 못하여 이들의 생존대책이 부재한 상태에서 대단지 입주에 따른 문제는 잇따라 발생하였다. 토지는 있으나 집을 만들 능력은 없었던 이들은 입주권을 매각하고 새로 무허가 건물을 지어 살았고, 대단지에 지어진 공장은 균형있는 고용상태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리대가 성행하였고, 기아 문제도 대두되었다. 이렇게 문제가 생겨 나오는 한편 71년 총선시기에 차지철과 같은 국회의원 후보자와 서울 시장에 임명된 양택식은 대단지에 "낙원이 올 것이란 환상"을 부풀리는 데 일조하였으나 선거가 끝남에 따라 이러한 환상을 배반하는 조치들이 잇따랐다. 대단지 일대의 땅에 대해 전매금지조치가 내려져 토지 매각을 금지하고 전매 소유지에 집을 짓지 않으면 철거당할 위기에 놓여있었고, 이에 따라 대단지 주민들은 대책위원회를 구성할 것을 제안하고 유지대회를 개최하였으며 진정서 제출을 계획한다. 그러나 서울시는 분양가격을 8천원에서 만2천원으로 올려받겠다고 하여 주민들을 격분시킨다. 이에 주민들은 진정서를 보냈으나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 이런 가운데 경기도는 취득세 납부 통지를 통해 취득세를 징수한다. 이후 대책위와 주민들은 좀 더 강경한 대응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궐기대화를 개최한다. 정확한 숫자를 파악하기는 어려우나 8월 10일 궐기대회에 3만에서 6만에 이르는 주민이 모였으며, 이들은 8월 9일 서울시 부시장과 합의한대로 시장이 와서 협상할 것을 기다리나 서울 시장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이에 따라 표출된 주민들의 분노가 바로 8월 10일의 소요사태이다. 비록 신문에서는 이들을 비이성적 폭도로 규정하였으나 광주대단지 사건은 사실상 정부 및 정치권의 비합리적인 광주대단지 조성에 의해 쌓여온 주민의 분노가 터져나온 사건이라 할 수 있으며, 진정서와 협상의 단계를 거치고 난 후에도 제대로 문제가 해결되지 못한 상황에서 이들은 "협상보다 뭔가 확실한 행동과 분노를 보여주는 것 이외에 의사 표현의 방식이 없는 상태였다." 그러나 이들의 "의사표시"는 위험스러운 것으로 간주되어 "엄벌"에 처해지게 된다. 이 또한 민중 봉기에 대한 부정적, 혹은 '지나치게 두려워하는' 시각을 보여주는 선례이다. 사건, 탈정체화의 장소 앞에서 봤던 것처럼 전태일 분신사건과 광주 대단지 사건은 비가시적 존재들, "몫이 없는 자들", 주변의 존재들이 "정치적 주체로 거듭나는" 장소였다. 이 장소는 기존의 프레임에 따라 부여된 정체성에서 벗어남으로써 정치적 주체가 된다. 기존 정치에 관한 생각들, 예컨대 정당, 노동조합 등을 통한 조직화는 기존의 프레임에 따른 질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오히려 이들을 기존 질서에 편입시키는 것일 수 있으며, "다른 정치의 장소의 가능성"을 상상해 볼 필요가 있다. 이번 강의는 의문이 가는 점이 많았다. 질문도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는데, 그 중 인상깊었던 것이 "그렇다면 그 탈정체화된 존재들의 새로운 언어는 무엇인가"였다.
1 「나의 삶을 말한다 "내 이름은 '7번 시다'였어요"」, 『경향신문』,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206152148185&code=940702>. 자원활동가 김수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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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란의 소리, 저항의 노래 | 반란의소리 저항의노래 1강 - 한과 희망이 뒤섞인 저항의 노래 (7/11) | 웃으며,함께,끝까지 | 2012.7.17 | |
[반란의 소리 저항의 노래] 1강 : 유럽과 러시아/소련의 저항가요 동구와 서구, 한과 희망이 뒤섞인 저항의 노래
꽃다지 ‘노래의 꿈’ 중에서
노래는 변합니다. 수많은 음과 노랫말들이 새로이 나타나 불려 지다가 사그라지고 또 다른 음과 노랫말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다가 또 다시 사그라지고. 우리는 매일 새로운 가수들이 새 앨범을 발표하는 음악홍수의 시대에 휩쓸려, 계속되는 새로운 음악적 시도들을 경험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참여연대 아카데미느티나무 2012 여름강좌 [반란의 소리, 저항의 노래] 의 시작은 유럽과 러시아/소련에서 건너온 우리에겐 상당히 낯선 몇 곡의 노래로 꾸며졌습니다. 박노자 선생님은 이 노래들을 통해 무슨 이야기를 전하고 싶었을까요? 선생님의 짧은 질문으로 강의는 시작되었습니다.
△ 강연을 하고 있는 박노자 교수 (사진=참여연대 아카데미느티나무)
여는 말 : 우리는 왜 혁명가요를 들을까요? 지난 5월 모스크바의 크렘린 궁 앞에서는 <바르샤바 노동자 행진곡>이 울려퍼졌습니다. 블라디미르 푸틴의 대통령 3선 취임을 반대하는 2만여 명의 시위대가 크렘린 궁 쪽으로 진출하려다 경찰과 대규모 충돌을 빚었고, 치열한 투석전 끝에 250여명이 체포되기에 이른 것입니다. 1993년을 끝으로 사라졌다가 19년 만에 다시 벌어진 격렬한 반정부 저항시위였지만, 사람은 변했고 노래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왜 노동운동가요를 불렀을까요? 유럽의 혁명가요(또는 저항가요)는 19세기 후반 프랑스 독일 러시아 등에서 발달하였습니다. 특히 독일에서는 다른 유럽 선진국들에 비해 사회민주주의가 발달하고 노동조합이 잘 조직되어 있어서 노동가요들이 더욱 많이 나왔습니다. 지금의 대한민국보다 노동조합 조직율이 2배정도 높았던 당시의 독일 노동자들에겐 노동조합에서의 생활이 삶의 전부였습니다. 그들은 아침에 일어나면 노동조합에서 발행한 소식지와 신문을 읽고, 일이 끝나면 조합에서 만든 노동자 도서관에 모여 서클활동을 하거나 공부를 하였으며, 노동자 합창회를 만들어 함께 노래를 부름으로써 조직의 단결과 귀속의식 등을 강화했습니다. 독일의 노동자들에게는 단순 반복 작업의 정신적 긴강감을 해소하기 위해 문화생활이 필요했고 합창이 이러한 역할을 수행하면서 1차대전 전까지 독일에서 노동가요의 황금시대를 열었던 것입니다. <Die Arbeidsmanner>(1870) <노동자들> Wer schafft das Gold zu Tage? 누가 금을 빛의 세계로 가져오는가? <노동자들>의 가사에서도 알 수 있듯이, 초기의 노동가요들은 노동자의 계급적 정체성을 규정합니다. ‘우리’와 ‘적’으로 세계를 분명히 양분화하면서 모든 것을 만드는 것은 우리이지만 결국 받아먹는 것은 부자들이며,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왜 고난을 겪는가, 우리의 적은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집니다. 노동가요는 당시의 노동자들이 접하기 어려운 고급문화였던 오페라 등의 멜로디를 차용하여 이들에게 신분상승의 느낌을 줌으로써 인기를 끌기도 했습니다. 초기 소련의 혁명가요 중 하나인 <우리 모닥불이여 높이 솟아오르라>는 러시아 혁명 5년 후인 1922년에 작곡되어 당시 9-16세 아이들이 속했던 “소년공산당” 조직의 당가로 사용되었습니다. 이 노래는 ‘우리는 노동자의 아들, 딸들이며, 전투의 날이 돌아올 것이니 늘 준비되어 있으라’는 전위의 대표적 사례라고 할 수 있는데, 재밌는 것은 이 노래가 오페라 <파우스트>의 멜로디를 차용하여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이 노래를 들으면서 노동자들이 자연스럽게 <파우스트>를 접할 수 있는, 고급문화세계로의 다리 역할을 했던 것이지요. 이 노래의 특징은 노동자들의 자발적인 동원을 유도할 수 있는 전투적이고 유쾌한 멜로디로 이루어져 있어서 집단의 귀속의식을 심어주는 역할을 했다는데 있습니다. <우리 모닥불이여 높이 솟아오르라> 그렇다고 노동가요가 집단의식만을 강조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대부분의 혁명가요의 내용은 노동운동 사상의 압축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노동자들은 신문이나 잡지, 선전물보다는 노래 하나를 들음으로써 더욱 효과적으로 노동운동 사상을 이해했습니다. <인터내셔널가>
(제1절) 또한 노동가요들은 노동자의 기원-수난-전투-승리와 낙원이라는 역사의 전개과정을 담아냄으로써 마치 성경의 압축판과 같은 느낌을 주었습니다. 즉, 노동자의 정체성과 수난의 과정, 불만의 확인, 최후의 결전과 승리의 과정을 감성적으로 매우 강하게 호소하면서 세계적 전파성을 과시하게 된 것입니다. <서광을 향하여(독일)> Dem Morgenrot entgegen 서광을 향하여 <서광을 향하여(러시아)> <서광을 향하여(일본)>
위로부터의 동원일까, 아래로부터의 경험일까? 동원과 경험은 교묘하게 결부되어 있어서 정확히 구분하기가 사실상 어렵습니다. 민중들이 그 노래를 애창하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면서 자율적인 동원이 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민중가수나 시인들의 노래가 중앙에서 받아들여져 다시 각 지방으로 보급되는 경우도 있었고, 스탈린의 독재가 강해져 가는 상황에서는 새로운 집권자의 역사의식에 맞추어지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쇳덩어리 수병>(1936년 유행) - 가사는 ‘진짜’ 혁명영웅이었던 ‘쇳덩어리 수병’과는 무관 B степи под Херсоном - 케르손시 근방의 초원에서 풀이 높이 자란다 중앙에서 각색한 노래가 있는가하면 <계곡 넘어 언덕 넘어>의 경우에는 민중들이 만든 노래 중 가장 유명한 것입니다. 이 노래는 내전이 끝났을 당시 빨치산 중의 한명이 자신들을 묘사하며 지은 노래로서, 기본적으로 공산당이나 소비에트 정권은 언급되지 않고 지역에서 자신들의 삶을 만들겠다는 의지가 주로 드러납니다. 공산당 중앙에서는 1929년부터 군악대에서 이 노래를 연주하기 시작하였고, 점차 민중들의 기억이 붉은 군대의 레퍼토리에 편입되는 형태로 발전하였습니다. <계곡 넘어 언덕 넘어(러시아)> (1922) 계곡 넘어 언덕 넘어 사단은 진군했다 <계곡 넘어 언덕 넘어(일본)> 1950,60,70년대에는 스탈린 시대를 넘어 혁명이 어느 정도 완료되었음에도 혁명가요들은 계속해서 제작되었는데, 이는 집권관료와 민중의 이해가 맞아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집권관료들은 통치 명분을 혁명으로 삼아 계속해서 혁명에 대한 기억을 강화하고자 했고, 민중은 국가기관들이 점차 사유화되고 관료들이 사적 재산을 늘려나가자 혁명의 순수했던 과거를 떠올리며 혁명에 대한 향수를 간직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즉, 관료들은 혁명가요를 이용했고 민중들은 혁명가요를 통해 위로를 받았습니다. <시간이라는 동무여>
맺는 말 : 혁명가요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가? 무상계급 운동에는 음악, 영화, 신문 등 노동자들만의 문화적 부문이 존재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이 노동자의 노래였습니다. 이들은 합창 과정을 통해 자신들의 계급의식과 귀속의식을 함양하였고, 이를 성경과 유사한 기원-고난-투쟁-승리라는 도식으로 표현해냈던 것입니다. 비록 이러한 과정에서 국가적 선전선동의 역할이 컸지만 이것만으로는 혁명가요를 설명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실제로 혁명가요의 상당수가 전투의 참가자들 또는 민중들의 자발적인 역사의식이 당에 의해 포섭되고 다시 민중으로 퍼져나가는 형태를 띠었기 때문입니다.
자원활동가 김주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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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문정치와 현대사, 그리고 주체 | <인문정치와 현대사, 그리고 주체> 2강 | 데브린 | 2012.7.9 | |
7월 3일 <인문정치와 현대사, 그리고 주체> 2강은 "8.15 그 커다란 환호성은 어디로 사라졌을까?"라는 제목으로 이승원 선생님(성공회대학교)께서 진행해 주셨습니다. 비가와서 안 오시는 분들이 많을 거라 생각했는데 자리를 꽉 채워주셔서 훈훈했습니다. *저번 후기와 마찬가지로 이하 편의상 '-하다'체를 쓰겠습니다. 양해부탁드립니다. :D 해방 후 대한민국 건국까지의 기간: "한국 현대 정치의 근원이자 본질이자 축소판" 1945년이라면 반세기도 넘게 지난 상당히 과거의 일 같기도 하다. 그러나 이 시기는 나를 포함한 지금의 20대의 조부모 세대가 몸소 체험한 시기이다. 여기서 이 시기를 몸소 체험한 선세대와 그러한 경험을 결여한 후세대 사이 상호 이해와 소통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따라서 이 시기는 여전히 현재의 기억 속에 존재하며, 사실은 굉장히 중요한 현재이다. 아울러 좌/우, 진보/보수 이념이 갈라지는 기원이 바로 여기에 있기 때문이라는 점에서 더욱 중요한 시기이다. 이 때의 좌/우 프레임은 해방된 지 상당한 시간이 흐른 지금 진보/보수 적대의 프레임의 원형을 이룬다. 이러한 적대적 대립은 세대 간 대립으로 이어지고 있으며, 공동체 형성을 방해한다.
해방전야-조선 총독부의 불안감과 여운형 해방 전날인 1945년 8월 14일 조선 총독부는 본토로부터 히로히토의 대 연합군 항복 선언문을 전달받았다. 한반도가 이남과 이북으로 나뉠 것이고, 남쪽은 미군정, 북쪽은 소군정에 의해 지배받을 것이 확실한 상황에서 일본은 자신들의 총독부가 있는 강북지역은 소련에 의해 점령당할 것이라 예측하였다. (당시 경계는 한강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위기의식을 느낀 일본측은 자신들이 본토로 무사히 귀환할 수 있도록 도와줄 조선의 정치 지도자를 찾기 시작한다. 총독부는 여운형을 선택한다. 사회주의자였고 청년층의 지지를 얻었던 카톨릭교도 여운형은 급진적이라기보다는 화합적 성향을 띄었기 때문이다. 여운형은 총독부에 5개 사항을 제시하는데 다음과 같다.
위의 5개 조항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사실상 건준은 대항국가로서의 성질을 가지며 사실상 건국에 대한 구상이 있었다 할 수 있다. 조선건국위원회의 활동과 특징, 그리고 딜레마 건준은 조선 건국을 준비하며 상당히 실질적이고 활발한 활동을 하였는데, 먼저 질서유지다. 일본인과 조선인 사이 사적 보복과 테러행위 방지, 일제 하 건설된 유효한 공공시설과 사회간접시설, 일본인이 소유하는 재산을 관리 분배하였다. 일제 공포정치의 상징격인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던 정치범들을 대대적으로 출감시킨다. 서대문 형무소는 당시 해방을 실감할 수 있는 장소였다. 아울러 전국적으로 지방단위의 지역 건준 그리고 인민위원회와 같은 자치조직이 상당수(총 2244 개에 이름) 건설되었는데 이들은 소작제 폐지, 여성문제, 노사문제에 관하여 논의와 같은 상당히 민주적 지역 자치활동이었다. 이 때에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와 같은 노동자 조직도 결성되었다. 건준의 "대항국가(counter-state)"로서의 특징을 갖는다. 대항국가란 "외세로부터의 독립이후 기존 식민통치 기구를 접수하여 이를 기반으로 새로운 독립국가를 건설하려는 아직은 미발달된 수준의 국가" (Smith)라 할 수 있는데, 종전 이후 민족자결주의를 보였던 건준이 이에 해당한다. 건준은 민족주의와 민주주의를 동시에 강조하는데 양자는 어느정도 긴장관계를 이루고 있다. 먼저, 건준은 "조선의 완전한 자주 독립국가의 건설"을 제 1강령으로 함으로써 철저하게 조선의, 조선인에 의한, 조선인을 위한 국가를 수립하려 하는 민족주의적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민족주의가 지나칠 경우 왕조 국가로의 회귀, 파시즘이 나타날 우려가 있다. 이러한 우려를 견제하는 것이 또 다른 주요 원칙인 민주주의다. 건준은 민주주의 원칙에 따라 참여의 균등성과 개방성을 강조하는 한편 친일부역자는 배제하는 모습을 보였다. 아울러 실질적 민주주의를 꾀하여 조선왕조, 과두제 부활을 막기 위해 노력하였으며, 전국 인대표자대회를 조직하여 이 목표를 달성하려 하나 이는 완벽했던 것은 아니었다. 우리의 민주주의 논의는 미소공동회의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한편 건준은 총독부에 의해 승인된 권력이라는 점에서 딜레마를 내포하고 있었다. 민주주의를 주요 원칙으로 내세우는 한편 친일 부역자는 배제하는 적대적 민족주의 모습을 보이기는 하였으나 총독부가 본토로 무사 귀환 할 수 있게끔 선택한 여운형이 중심이 되어 구성된 기관이라는 점에서 모순점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해방 이후 최대 관심사였으며 인민들이 원했던 토지개혁과 주요 산업의 국유화와 같은 실질적인 사안은 상대적으로 간과되었다. 건준은 근대 국가로 발전하기에는 한계를 보였다. 그럼에도 9월 8일 미군의 상륙까지 건준의 해방 후 건국 준비는 굉장히 폭발적이고 역동적이었다. 당시에, 특히 여운형은 미군정에 대해 크게 걱정하지 않았으나 1945년 9월 6일 박헌영 중심의 좌익 계열은 미군에 대항할 수 있는 외교주체로 조선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한다. 미군정의 시작 미 24군단은 1945년 9월 8일 인천항에 도착한다. 이들은 <작전 명령 4호>를 통해 일본군의 무장해제, 군정실시, 외부 정치 세력의 축출, 한반도 이남의 법질서 유지와 같은 4개의 임무를 전달한다. 문제는 이들 미군들과 조선인 간의 소통이 제대로 이루어지기 어려웠다는 점이다. 영어 능숙자가 매우 적었고 미국은 한국에 대한 정보가 부족했다. 그나마의 정보는 "부르주아" 지식인, 친일자들과 같이 건준과는 다른 성격의 집단에게서 얻었다. 이들에게 들은 첫번째 정보는 건준은 친소세력이라는 것이었고, 소련의 남하를 최대한 억제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던 미국은 건준을 "적"으로 간주해버렸다. 아울러 조선은 패전국의 식민지였다. 태평양 전쟁 참전 이유로 미국은 조선을 일본과 동일집단-패전국으로 간주하였다. 이에 따라 미군정은 <작전명 베이커>를 통해 3개 육군 사단을 전국적으로 한반더 이남에 투입하여 모든 지역정치조직들을 감시하였다. 미군정은 소련의 남하를 최소화하고 미국의 경계(American Boundary)를 최대한 한반도로 전진배치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기 때문에 국내 좌익 성향의 인민공화국과 인민위원회 등 조선인의 자치조직과 대립하였다. 미군은 여운형을 만나 조선인민공화국의 공화국 사용을 중단하고 '정당'으로 명칭을 바꿀 것을 요구하여 이후 미군정과 인민공화국의 갈등이 점차 심화되었다. 한편 김구와 이승만 등 우익세력의 정치세력화가 진행되었다. 건준의 와해와 반탁운동, 분열 건준은 식량문제에 대한 나름의 해결을 해 나아갔기 때문에 해방정국을 주도할 수 있었다. 그러나 45년 10월 5일 미군이 일반고시 제 1호를 통해 <미곡의 자유시장건>을 공포함에 따라 건준의 분배역할은 약화된다. 이후 미군은 일반고시 2호를 공포하는데 이는 1호와 더불어 물가의 상승을 유발하여 대략 1년 사이에 쌀 가격이 15배 상승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에 혼란을 더한 것은 모스크바 삼상회의였다. 45년 12월 16일 미.소.영 외무장관이 모여 조선의 독립을 포함한 전후 질서 논의가 오간 이 회의에서 소련은 1 조선의 즉각적인 독립을 위한 임시 조선정부 수립 2 미국이 요구한 신탁통치 문제 협의 3 조선에 미소공동위원회 개최를 제안하고 미국은 조선의 임시정부 수립을 명시하지 않고 5년 간의 미.소.영.중에 의한 조선의 신탁통치를 제안하였다가 거부당한다. 여기서 미국이 제기한 조선의 신탁통치는 과도정부나 자치라기보다는 네 나라끼리 합의를 통한 통치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논의를 동아일보가 "조선, 신탁통치 결정 소련이 신탁통치 주장...미국은 즉각 독립주장"이라 오보함으로써 혼란은 가중되고 반탁운동이 전개되어 반공세력이 정치적 명분을 획득하게 된다. 특히 북에서 내려온 청년들인 김구, 이승만은 반공민족주의를 표방하며 반공주의 세력을 정치세력화한다. 여기서 반공-민족-민주가 결합하는 "가장 획기적 전환"이 일어나게 된다. 좌익과 우익의 분열은 더욱 심화되어 1946년 미소공동위원회는 결렬된다. 이 가운데 이승만이 6월 3일 정읍에서 자신들은 자주독립국가를 원하는데 친소세력(좌익)들이 통일국가를 원하고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남한의 독자적인 정부수립 가능성을 시사하였다. 좌익세력은 미군정에 대한 저항을 전면화하였고 미군정은 좌익계열에 대한 탄압을 본격화하였다. 식량 부족, 물가 폭등과 더불어 이러한 혼란과 공포, 생존에 대한 열망은 당대를 살았던 사람들에게 경험으로 사무쳐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때의 반공주의가 지금까지 이어진다. 나가며 8.15와 이후 3년 간의 기억이 여전히 "현재의 기억"이며, 이는 선생님의 부모세대 (나에게는 조부모 세대)의 실제 현실, 살아있는 기억이라는 점과 선세대와 후세대 간의 의견, 이념 대립 및 소통의 문제에 대한 지적이 강의 처음에 언급되었는데, 이것이 오늘 강의의 주요 지점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든다. 사실 강의 초반에 제기된 세대 간의 대립은 정말 피부로 느끼곤 했던 것이었기 때문이다. 학교에 진보쪽에서 유명하신 선생님께서 오셔서 강연을 하신 적이 있는데 질의응답시간에 한 유명한 보수단체로 추정되는 분께서 "그래서 당신이 말하는 주체는 [북한의] 주체 철학에서 말하는 그 주체랑 똑같은 것이냐"는 질문을 하신 적이 있어 뜬금없다고 주변 친구들이랑 생각했던 적이 있다. (강연 내용은 북한이라는 단어와 하등 관련 없는, 영국의 한 문학을 탈식민주의적 관점에서 읽는 것이었다.) 이 이외에도 이런 저런 사연은 조금 있다. 여지껏 이분들에 대해 "그래, 몸소 체험하며 살아오셨으니 어쩔 수 없지 뭐. 저분들은 바뀌지도 않으실거야"라는 체념어린 생각을 막연하게 해 왔다. 그러나 강의를 들으면서 해방 후 혼란과, "그 커다란 환호성"을 감출 수밖에 없던 상황을 다시 생각해보았다. 강의 텍스트에서 "공포"와 "생존"이라는 단어가 인상깊었다. 처음에는 지나친 단어라 생각했는데 당시 상황을 실재했던 사람들의 입장에서 잘 설명해주는 단어란 생각이 들었다. 공포는 생각을 하기 이전에 몸으로 느끼는 것이다. 당시 상황은 극도의 혼란, 그리고 공포였을 것이다. 당시의 좌우 대립은 생존을 좌우하는 것이었을테고 이러한 공포는 몸에 정말 사무쳤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이전에는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았던 그분들을 '인간으로' 다시 바라보았다. (그래도 여전히 그 공포는 온전히 전달되지 않겠지만) 하지만 여전히 계속해서 질문이 남는다. 우리가 행하는 이해의 노력과 더불어 그분들의 노력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이다. 그 소통은 어떻게 실현될 수 있을까. 자원활동가 김수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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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문정치와 현대사, 그리고 주체 | <인문정치와 현대사, 그리고 주체> 1강 | 데브린 | 2012.7.2 | |
<인문정치와 현대사, 그리고 주체> 1강은 "3.1 운동, 아래로부터의 역사를 새로 쓰다"라는 제목으로 하승우 선생님께서 강의해 주셨습니다. 첫 시간이라 가는 길에는 설레고 막상 도착해서는 마음이 편해졌어요. 다양한 나이대의, 다양한 분들을 만나 즐겁고 유익했습니다. 첫 시간은 텍스트를 복사해드렸는데요, 앞으로는 복사해드리지 않고 각기 텍스트를 준비해 오시길 부탁드리며 책은 대안지식연구회에서 나온『인문정치와 주체』입니다.
이후 편의를 위해 존대말은 생략하고 '-하다'체로 쓰겠습니다.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3.1운동, "씨알의 역사"의 신기원 3.1운동에 관해 우리에게 친숙한 이미지는 까만 치마와 하얀 무명저고리를 입고 태극기를 흔드는 유관순, 총칼 앞에서 태극기를 흔들고 힘없이 짓밟히는 사람들일 것이다. 다층적 차원에서 서로 다른 개인이 혼재하는 복잡한 현실은 그것이 역사화되었을 때 하나의 덩어리로 해석되는 경우가 많다. 3.1운동 또한 마찬가지이며, 이는 유관순과 같은 하나의 사건으로 정리될 수 없다. 3.1운동은 역사학자 박은식에 따르면 "씨알의 역사", "자주하는 민의 역사"의 시작이다. 이 3.1운동의 주체는 다름 아닌 민중이었으며 이 3.1운동을 통하여 민중은 재발견되었다. 그러나 이 민중, 주체는 일반적으로 생각되듯 일원적인 존재가 아닌 다양한 존재이다. 민중의 요구사항과 투쟁 원인은 다양하였으며 이는 3.1운동에 대한 기존의 관점, 예컨대 일제에 의한 피해 이미지, 민족 대표 33인과 같은 하나의 관점으로는 포착하기 어렵다. 오히려 3.1운동은 민중이라는 다양한 주체들을 드러나게 한 사건이었다. 3.1운동의 배경 3.1운동의 저항성을 강조하는 시각은 그 이전의 저항을 상대적으로 가벼이 다룬다. 그러나 1919년 3.1운동 이전에도 계속 저항하는 사건은 있어왔다. 1907년부터 1911년은 저항하는 역사라 할 수 있으며 이런 과정에서 1910년 조약이 이루어진 것이지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조약에 의해 간단히 나라가 넘어간 것은 아니다. 단순히 뺏김/안 뺏김으로 볼 수 없는 맥락이 있다는 말이다. 식민 정치 체제는 “국가 폭력”의 형태로 경찰과 군대식 체제로 이루어져(커밍스) 지금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특히 경찰의 권한은 굉장히 포괄적이었으며 상당히 일상적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경찰은 치안이라는 명목으로 사람들의 일상 구석구석을 통제할 수 있었다. 즉, 일상자체가 국가 폭력에 항시 노출되었다. 이는 3.1운동 시 경찰서를 습격한 이유를 제공하였다. 일제의 식민 정치는 ‘정치적’ 차원 뿐 아니라 일상의 영역 곳곳을 파고들었다. 사법체계에서도 재판 없이 구류, 태형 등의 처분이 가능하였으며, ‘의생규칙’을 통해 한의를 개편하는 등 사람들의 생활관습 또한 개화라는 명목으로 개조하였다. 이런 식으로 불만이 1919년 3.1운동까지 누적되었다. 3.1운동의 양태 3.1운동 이미지의 중심은 2.8독립선언과 33인 선언, 서울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지식인층의 독립 선언은 분명 계기를 제공한 것이기는 하였으나 사실상 일제의 식민 정치로인해 지속적으로 쌓여 온 민중의 불만이 터져 나온 것에 가깝다. 아울러 3.1운동은 서울 뿐 아니라 다른 지역에까지 퍼졌으며, 지방에서 더욱 오래 지속되었다. 일제가 이후 조사한 3.1운동의 원인에 따르면 민중들의 불만은 단순히 식민 지배/피지배의 구분을 넘는 더욱 다양하고 일상과 맞닿아 있는 것이었다. 양반, 유생의 특권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 부역이 과중하다는 점, 행정관리의 오만 등 다양한 계층의 다양한 불만이 결집된 것이 3.1운동이었으며, 대개 그 불만은 식민 지배와 같은 거대담론보다는 구체적 자기 삶의 문제와 연관된 것들이었다. 시위 형태도 다양하였다. 도시락을 들고 시위꾼, 만세꾼이 국가 권력에 통제되지 않은 채 주변 지역을 돌며 독립을 외쳤으며, 한밤중에 산꼭대기에서 만세를 외치기도 했다. 체포 기록을 보면 농민이나 지식인 뿐 아니라 자영업자와 같은 상인들도 상당수였는데, 이들은 동맹파업, 일본인에게 물건 안 팔기 등으로 시위에 참여했다. 3.1운동, 민중의 재발견 일반적으로 3.1운동은 일제의 잔인한 탄압으로 실패한 사건으로 일컬어진다. 그러나 3.1운동은 민중의 재발견이라는 점에서 상당히 의미있는 사건이다. 이 사건을 통해 민중의식이 성장하였다 할 수 있다. 3.1운동의 “실패”를 통해 왜 우리가 짓밟혔나를 생각게되었으며, 점차 걸음마 단계였던 민중의식은 의식화, 조직화 된다. 지식인층(젊은 학생층)은 이제 봉기뿐 아니라 학습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데, 이는 농민과 같이 봉기해도 하대하던 의식이 있던 이전과는 상당히 다른 것이다. 점차 지식인층은 농민층의 사람들과 조직해야 함을 깨닫게 되며, 이 과정에서 민은 대상화의 존재가 아니라 함께 일을 도모하는 존재로 생각되며, 민은 스스로 주인이 되려는 존재가 된다. 20년대는 이러한 의식화와 조직화가 폭발적으로 드러난 시기이다. 조선노동 공제회가 출현하였으며, 192,30년대에는 서울 청년회 조선 공산당이 출현한다. 19세기에도 이념이나 사상은 존재하였으나 주로 지식인 중심이었던 반면 20세기에는 점차 다른 계층에까지 퍼지게 된다. 이에 따라 지식인이 지방에 내려가 야학, 강연회를 여는 등 구체적 일상과 사상이 접전을 찾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은 공식 역사에서 빠져있고, 보통 3.1운동 이후는 암흑기로 다루어진다. 강의를 마치고 무언가 이슈가 되는 사건이 터질 때마다 느끼는 것은 “우와 정말 혼란이다.”이다. 지금 당장 여기 벌어지고 있는 일은 이것이 정확히 무슨 일인지, 후에 어떻게 기억될는지 명확하게 답변을 내리기 어렵다. 너무나도 다양한 관점이 얽히고 섥혀 바로 옆에 산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은 그 사건과 나의 시간적, 심리적 거리와, 역사가의 관점에 의해 그 성격이 상당히 단순화 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3.1운동은 막연히 조선독립을 외친 사건, 비폭력 투쟁과 같은 이미지로 기억되어 있었다. 하지만 유관순 판결문의 내용은 내가 생각했던 이미지와 상당히 다른 것이었고, 민중의 요구도 어떠한 거대담론으로 쉽게 해석할 수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지극히 일상과 닿아 있는 것들이었다. 개인적으로 난 어떠한 이념이 저항을 뒷받침하는 것이라 하더라도 그 거대담론으로만 저항의 주체가 해석될 경우, 그것 또한 개별 주체의 생명력을 앗아가는 것이라 생각한다. 비록 ‘주체’라는 한 단어로 묶여있으나 그 주체는 너무나 다양한 개인을 포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3.1운동의 주체를 다각화한 이번 강의는 그때 당시 사람들을 생생하게 느끼게 해주었다. 아울러 예전에 학교에서 들었던 강의 중 조선 후기 공론장의 태동과 관련된 강의가 떠올랐다. 3.1운동에서 민중이 재발견되었다는 것이 오늘 강의의 요지라 할 수 있겠는데, 나는 1889년즈음부터 시작된 민의 성장과 더불어 해석이 되었다. 19세기 말 신문을 함께 읽고, 각 동네마다 연설장을 만들고 서울에는 19일동안 만민공동회가 열리며 조금씩 성장하던 민중이 3.1운동으로 수면 위로 드러나고 그 이후 더욱 조직화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문화 통치 이후 분열을 거듭하며 이러한 민중은 시민으로까지는 성장하지 못하였다는 생각이 들어 안타까웠다. 그 몫은 100여년이 지난 지금 우리의 몫이라는 생각이 든다
자원활동가 김수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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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민정치의 고전으로 오늘을 읽는다 : 시민정치와 시민불복종 | 시민정치와 시민불복종 5강 -누가 악법도 법이라 말했나? (6/11) | 우진아빠 | 2012.6.14 | |
이번 시간에는 김선욱 선생님을 모시고 <한나 아렌트와 시민불복종>이라는 주제로 강의를 들었습니다.
열정적이고 유익한 강의를 해주신 선생님과 월요일로 강의시간이 변경됐음에도 불구하고 와주신 수강생들께 감사드립니다.
비록 낮은 출석률이었지만 너무 너무 좋은 시간이었어요!!
누가 악법도 법이라고 말했나?
법은 무엇인가?
1
우리는 법을 이야기 할 때 소크라테스가 말했다고 알려진 ‘악법도 법이다’라는 일화가 떠오른다. 법은 무엇일까?
이번 강의를 맡으신 김선욱 교수님께서는 시민불복종을 말하기 앞서
‘그럼 불복종의 대상이 되는 법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해야 한다고 하셨다.
법은 삶의 안정성을 담보하지만 그때그때마다 변화하는 현실을 바로 반영하지 못하는 양면성을 갖고 있다고 한다.
또한 앞선 강의에선 법은 불완전하기 때문에 시민불복종과 같은 행위를 통해 좀 더 완전한 방향으로 간다고도 하였다.
선생님께서는 법에 대한 아래 두가 일화를 예로 들었다.
법은 사람을 괴롭히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2
구약성경에 나오는 안식일이라는 게 있다. 간단히 말하자면 일요일에는 일을 하지 말고 쉬라는 뜻이다.
하루는 예수님이 제자들을 데리고 길을 걷다 배가 고파서 들에 있는 곡식을 빻아 빵을 만들어 먹었는데 하필 그날이 안식일이었다.
마침 그 앞을 지나가던 유대교인들이 예수님과 그 제자들을 가르켜
‘안식일에는 일을 하지 말라고 그랬거늘 곡식을 빻는 일을 한다’며 질타하며 일행들을 손가락질 했다고 한다.
이에 예수님이 답하기를 ‘안식일은 사람을 편히 쉬게 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지,
이렇게 다른 사람을 괴롭히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나는 이 얘기를 들으면서 문득 헌법적 권리인 집회결사의 자유를
하위법인 집시법과 경찰의 규정을 들이대며 오히려 권리를 제한하는 경찰이 떠올랐다.
악법도 법이다?
3
두 번째 일화는 소크라테스는 ‘악법도 법이다’라고 한 적이 없다는 내용이었다.
선생님 본인 원문을 읽어봤지만 그런 문장은 없었다고 하셨다.
오히려 소크라테스의 철학사상을 공부하면 오히려 그 반대의 생각을 갖고 있었을 거라고 하는데
소크라테스가 그런 말을 했다고 하며 탈옥을 거부한 이유는 다든 이유들이 종합적으로 작용해서 내린 판단이라고 하셨다.
더불어 어떤 명사 든 앞에 수식어가 붙으면 본질이 변할 수밖에 없기에 ‘악법도 법이다’라는 명제는 아예 성립이 될 수 없다고 하셨다.
원문에는 없던 말이 어떻게 버젓이 교과서에도 실리게 되었을까?
만일 정부가 악법도 법이라고 주장한다면, 허위계약서=계약서, 가짜 술= 술, 꾀병=병 등등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양심적 병역거부는 시민불복종이 아니다?
4
본격적인 본문으로 들어가 소로우는 불복종이 양심에 기초해서 발생한다고 말한 반면
아렌트는 양심은 그 작동원리를 보면 개인적인 사적인 상황에서 네거티브한 방식(…해서는 안 돼)으로 작동되기 때문에
부수적으로 언급할 수 있겠지만 ‘정치적 의미’로 갖기에는 대단히 약하다고 했다.
하기에 양심적 병역거부와 시민불복종은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했다.
이후 강의에서 선생님은 아렌트가 말하는 시민불복종의 특성, 정치개념, 시민불복종과 폭력의 문제,
사적이익과 공적이익 등 아주 유익한 얘기들을 해주셨으나 첨부된 강의 자료로 대신하려고 한다.
마지막으로 교수님이 언급하셨던 기사를 찾아 링크를 걸어놨으니 한 번씩 읽어보면 좋을 것 같다.
후기작성 : 천웅소, 아카데미느티나무 간사
강의자료 : AC201210611_시민불복종_5강.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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