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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좌명 | 강좌후기 | 글쓴이 | 날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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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정치와 현대사, 그리고 주체 | <인문정치와 현대사, 그리고 주체> 3강 | 데브린 | 2012.7.17 | |||
<인문정치와 현대사 그리고 주체> 3강 "전태일 분신과 광주대단지 사건: 사건을 통해 본 70년대"는 김원 선생님께서 진행해 주셨습니다. 3층 소회의실에서 강연을 진행하니 준비하고 정리하는 입장에서는 편했..어요 허허. 꾸준히 많은 분들이 나와주셨습니다. :) 그럼 평소처럼 후기는 '-하다'체로 작성하겠습니다. 사건, "숨겨진 자들이 이름을 드러내는 방법" 강연은 사건에 대한 새로운 해석으로 시작했다. 일반적으로 사건은 공적 사료를 토대로 '중심'에 초점을 두고 기록된 역사를 뜻한다. 그러나 이 강연에서 사건은 비가시적이고 숨겨져 있던 주체가 드러나는 계기이며, 이들 주체가 자신들에게 기존에 부여된 정체성 및 의미에서 벗어나려는 흐름이다. 이러한 "잊혀진 주체"는 자기 기록을 남기지 않고 스러진다. 바로 사건을 통해 그들의 실존을 드러낼 수 있다. 이 강연에서는 70년대의 두 사건, 전태일 분신과 광주 대단지 사건을 통하여 어떤 주체가 자신의 실체를 어떤 방식으로 드러내었는지가 이야기 되었다. 전태일: 겁쟁이들과 연대 기존 역사 담론에서 전태일의 분신사건은 "낮은 수준의 운동" 혹은 우연적인 것으로 그려지며, 이에 대한 우리의 이미지도 막연하게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죽어간 전태일에 국한된다. 그러나 전태일의 분신은 역사 서술에서 목소리를 갖지 못하고 사각지대에 놓여있던 "겁쟁이" 여공들을 가시화하였다는 점에서 더 깊은 의미를 갖는다. 당시 평화시장의 노동환경이란 다음과 같았다. 노동 조직(노조)이 존재하지 않았고, 근로자들은 대개 16~20(21)세의 어린 소녀들로 농촌에서 상경한 단신이었다. 이들은 주로 가부장적 농촌 환경에서 장남 교육을 위해 서울로 올라와 근로하고 있었고, 사적 영역인 농촌 가정에서의 가부장적 질서는 평화시장이라는 공적 영역에서도 되풀이 된다. 이들은 쉽게 "아버지" 공장주에게 이의제기하지 못했으며, 어린 나이에, 아무 연고도 없고, 그들 사이 마땅한 조직을 갖고있지 않은 상황에서 여공들이 근로기준법(권리)를 주장할 여지는 거의 없었다. 전태일이 분신하기 전후 시기 대다수 여성 노동자들은 비가시적 "겁쟁이"였던 것이다. 여공들의 환경을 개선해보려 한 전태일은 67년 "시다들을 버릇없게 만든다"는 이유로 해고당하게 되고 이후 <바보회>를 결성한다. 『평화시장 근로 조건 실태조사』(1970)를 작성한 그는 근로감독관과 노동청에 진정서를 보내나 묵살당하고 대통령과 근로감독관에게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요구입니다>란 진정서를 보낼것을 계획한다. 이 진정서는 대통령을 "국부"라 칭하고 자신을 포함한 노동자들을 "소자"라 칭하며 보호를 요청하는 화법을 사용하여 "지배담론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만든 <평화시장 근로조건 실태조사> 설문지에는 분명 노동자에 대해 "지배담론"이 부여한 정체성을 벗어나려는 모습이 드러나 있다. 예컨대 11번과 12번 문항이다. 11번 문항 "당신 교양을 위한 서적은?"과 취미를 묻고 있는 12번 문항은 분명 지배계층이 위치지은 노동자의 관념 및 정체성에서 이탈하는 것으로, "사유하는 인간"으로서의 "노동하는 인간"(노동자)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았을 때 전태일의 분신은 '노동자는 묵묵히 일해야 한다'는 주어진 정체성에서 벗어나려는 의지적, 의도적 행동이다. 그의 연대란 "겁쟁이" 여공들이 지배계층으로부터 주어진 정체성에서 벗어나도록 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가 이 부분의 강의에서 제기된 요지라 할 수 있겠다. 강의 앞부분에서도 제기되었듯이 "겁쟁이" 여공들과 같은 비가시적 주체는 공식 사료에는 등장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그들이 드러나는 것은 전태일 분신과 같은 사건을 통해서이다. 그러나 점차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동대문 시장에서 일하던 여공들이 "'전태일이 알던 불쌍한 여공들'로만 그려지는 게" 안타까워 직접 쓴 기록을 남겨야 겠다 생각해 결국 올해 6월 12일 통과된 석사학위 논문으로 자신의 삶을 그려낸 '7번 시다' 신순애 씨의 경우이다. "평화시장 노동자에 대한 저술은 많지만 당사자가 직접 쓴 것은 처음"이라는 지도교수의 말1처럼 "비가시적 주체"들은 여지껏 드러나기 쉽지 않았지만 시간이 흐른 뒤 스스로 목소리를 드러내기도 한다. 1971년 광주대단지: 봉기의 사건 1971년 광주대단지 사건은 1971년 8월 10일 오후에 3-4시간 광주대단지 지역에서 일어난 집단행동으로, 지금까지도 "난동"으로 인식되는 사건이다. 그러나 이 사건은 무조건적으로 비합리적이었던 폭동이 아니라 나름의 이유를 가진, 광주에서의 삶을 꿈꾸던 도시빈민이라는 산재해있던 주체들을 가시화해준 사건이다. 산업화 초기 서울시는 도시 빈민과 무허가 주택에 살고있던 사람들에 대한 대책의 일환으로 서울 근교에 정착지 조성을 함으로써 이주정책을 시행한다. 대단지 사업이 발표된 후 많은 사람들이 광주대단지로 이주하는 것을 꿈꾸는 소위 '대단지 붐'이 일었고, 이들은 대규모 이주를 준비하였다. 그러나 "인구 10만 명만 모아놓으면 어떻게 해서든 뜯어먹고 산다"는 '편의주의적' 발상으로 진행된 광주대단지 조성은 전문가의 자문수렴도 거의 고려되지 않았고 몇 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이주민들은 토지를 받았을 뿐이지 다른 물자는 제대로 갖추고 있지 못하여 이들의 생존대책이 부재한 상태에서 대단지 입주에 따른 문제는 잇따라 발생하였다. 토지는 있으나 집을 만들 능력은 없었던 이들은 입주권을 매각하고 새로 무허가 건물을 지어 살았고, 대단지에 지어진 공장은 균형있는 고용상태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리대가 성행하였고, 기아 문제도 대두되었다. 이렇게 문제가 생겨 나오는 한편 71년 총선시기에 차지철과 같은 국회의원 후보자와 서울 시장에 임명된 양택식은 대단지에 "낙원이 올 것이란 환상"을 부풀리는 데 일조하였으나 선거가 끝남에 따라 이러한 환상을 배반하는 조치들이 잇따랐다. 대단지 일대의 땅에 대해 전매금지조치가 내려져 토지 매각을 금지하고 전매 소유지에 집을 짓지 않으면 철거당할 위기에 놓여있었고, 이에 따라 대단지 주민들은 대책위원회를 구성할 것을 제안하고 유지대회를 개최하였으며 진정서 제출을 계획한다. 그러나 서울시는 분양가격을 8천원에서 만2천원으로 올려받겠다고 하여 주민들을 격분시킨다. 이에 주민들은 진정서를 보냈으나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 이런 가운데 경기도는 취득세 납부 통지를 통해 취득세를 징수한다. 이후 대책위와 주민들은 좀 더 강경한 대응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궐기대화를 개최한다. 정확한 숫자를 파악하기는 어려우나 8월 10일 궐기대회에 3만에서 6만에 이르는 주민이 모였으며, 이들은 8월 9일 서울시 부시장과 합의한대로 시장이 와서 협상할 것을 기다리나 서울 시장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이에 따라 표출된 주민들의 분노가 바로 8월 10일의 소요사태이다. 비록 신문에서는 이들을 비이성적 폭도로 규정하였으나 광주대단지 사건은 사실상 정부 및 정치권의 비합리적인 광주대단지 조성에 의해 쌓여온 주민의 분노가 터져나온 사건이라 할 수 있으며, 진정서와 협상의 단계를 거치고 난 후에도 제대로 문제가 해결되지 못한 상황에서 이들은 "협상보다 뭔가 확실한 행동과 분노를 보여주는 것 이외에 의사 표현의 방식이 없는 상태였다." 그러나 이들의 "의사표시"는 위험스러운 것으로 간주되어 "엄벌"에 처해지게 된다. 이 또한 민중 봉기에 대한 부정적, 혹은 '지나치게 두려워하는' 시각을 보여주는 선례이다. 사건, 탈정체화의 장소 앞에서 봤던 것처럼 전태일 분신사건과 광주 대단지 사건은 비가시적 존재들, "몫이 없는 자들", 주변의 존재들이 "정치적 주체로 거듭나는" 장소였다. 이 장소는 기존의 프레임에 따라 부여된 정체성에서 벗어남으로써 정치적 주체가 된다. 기존 정치에 관한 생각들, 예컨대 정당, 노동조합 등을 통한 조직화는 기존의 프레임에 따른 질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오히려 이들을 기존 질서에 편입시키는 것일 수 있으며, "다른 정치의 장소의 가능성"을 상상해 볼 필요가 있다. 이번 강의는 의문이 가는 점이 많았다. 질문도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는데, 그 중 인상깊었던 것이 "그렇다면 그 탈정체화된 존재들의 새로운 언어는 무엇인가"였다.
1 「나의 삶을 말한다 "내 이름은 '7번 시다'였어요"」, 『경향신문』,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206152148185&code=940702>. 자원활동가 김수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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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란의 소리, 저항의 노래 | 반란의소리 저항의노래 1강 - 한과 희망이 뒤섞인 저항의 노래 (7/11) | 웃으며,함께,끝까지 | 2012.7.17 | |||
[반란의 소리 저항의 노래] 1강 : 유럽과 러시아/소련의 저항가요 동구와 서구, 한과 희망이 뒤섞인 저항의 노래
꽃다지 ‘노래의 꿈’ 중에서
노래는 변합니다. 수많은 음과 노랫말들이 새로이 나타나 불려 지다가 사그라지고 또 다른 음과 노랫말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다가 또 다시 사그라지고. 우리는 매일 새로운 가수들이 새 앨범을 발표하는 음악홍수의 시대에 휩쓸려, 계속되는 새로운 음악적 시도들을 경험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참여연대 아카데미느티나무 2012 여름강좌 [반란의 소리, 저항의 노래] 의 시작은 유럽과 러시아/소련에서 건너온 우리에겐 상당히 낯선 몇 곡의 노래로 꾸며졌습니다. 박노자 선생님은 이 노래들을 통해 무슨 이야기를 전하고 싶었을까요? 선생님의 짧은 질문으로 강의는 시작되었습니다.
△ 강연을 하고 있는 박노자 교수 (사진=참여연대 아카데미느티나무)
여는 말 : 우리는 왜 혁명가요를 들을까요? 지난 5월 모스크바의 크렘린 궁 앞에서는 <바르샤바 노동자 행진곡>이 울려퍼졌습니다. 블라디미르 푸틴의 대통령 3선 취임을 반대하는 2만여 명의 시위대가 크렘린 궁 쪽으로 진출하려다 경찰과 대규모 충돌을 빚었고, 치열한 투석전 끝에 250여명이 체포되기에 이른 것입니다. 1993년을 끝으로 사라졌다가 19년 만에 다시 벌어진 격렬한 반정부 저항시위였지만, 사람은 변했고 노래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왜 노동운동가요를 불렀을까요? 유럽의 혁명가요(또는 저항가요)는 19세기 후반 프랑스 독일 러시아 등에서 발달하였습니다. 특히 독일에서는 다른 유럽 선진국들에 비해 사회민주주의가 발달하고 노동조합이 잘 조직되어 있어서 노동가요들이 더욱 많이 나왔습니다. 지금의 대한민국보다 노동조합 조직율이 2배정도 높았던 당시의 독일 노동자들에겐 노동조합에서의 생활이 삶의 전부였습니다. 그들은 아침에 일어나면 노동조합에서 발행한 소식지와 신문을 읽고, 일이 끝나면 조합에서 만든 노동자 도서관에 모여 서클활동을 하거나 공부를 하였으며, 노동자 합창회를 만들어 함께 노래를 부름으로써 조직의 단결과 귀속의식 등을 강화했습니다. 독일의 노동자들에게는 단순 반복 작업의 정신적 긴강감을 해소하기 위해 문화생활이 필요했고 합창이 이러한 역할을 수행하면서 1차대전 전까지 독일에서 노동가요의 황금시대를 열었던 것입니다. <Die Arbeidsmanner>(1870) <노동자들> Wer schafft das Gold zu Tage? 누가 금을 빛의 세계로 가져오는가? <노동자들>의 가사에서도 알 수 있듯이, 초기의 노동가요들은 노동자의 계급적 정체성을 규정합니다. ‘우리’와 ‘적’으로 세계를 분명히 양분화하면서 모든 것을 만드는 것은 우리이지만 결국 받아먹는 것은 부자들이며,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왜 고난을 겪는가, 우리의 적은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집니다. 노동가요는 당시의 노동자들이 접하기 어려운 고급문화였던 오페라 등의 멜로디를 차용하여 이들에게 신분상승의 느낌을 줌으로써 인기를 끌기도 했습니다. 초기 소련의 혁명가요 중 하나인 <우리 모닥불이여 높이 솟아오르라>는 러시아 혁명 5년 후인 1922년에 작곡되어 당시 9-16세 아이들이 속했던 “소년공산당” 조직의 당가로 사용되었습니다. 이 노래는 ‘우리는 노동자의 아들, 딸들이며, 전투의 날이 돌아올 것이니 늘 준비되어 있으라’는 전위의 대표적 사례라고 할 수 있는데, 재밌는 것은 이 노래가 오페라 <파우스트>의 멜로디를 차용하여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이 노래를 들으면서 노동자들이 자연스럽게 <파우스트>를 접할 수 있는, 고급문화세계로의 다리 역할을 했던 것이지요. 이 노래의 특징은 노동자들의 자발적인 동원을 유도할 수 있는 전투적이고 유쾌한 멜로디로 이루어져 있어서 집단의 귀속의식을 심어주는 역할을 했다는데 있습니다. <우리 모닥불이여 높이 솟아오르라> 그렇다고 노동가요가 집단의식만을 강조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대부분의 혁명가요의 내용은 노동운동 사상의 압축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노동자들은 신문이나 잡지, 선전물보다는 노래 하나를 들음으로써 더욱 효과적으로 노동운동 사상을 이해했습니다. <인터내셔널가>
(제1절) 또한 노동가요들은 노동자의 기원-수난-전투-승리와 낙원이라는 역사의 전개과정을 담아냄으로써 마치 성경의 압축판과 같은 느낌을 주었습니다. 즉, 노동자의 정체성과 수난의 과정, 불만의 확인, 최후의 결전과 승리의 과정을 감성적으로 매우 강하게 호소하면서 세계적 전파성을 과시하게 된 것입니다. <서광을 향하여(독일)> Dem Morgenrot entgegen 서광을 향하여 <서광을 향하여(러시아)> <서광을 향하여(일본)>
위로부터의 동원일까, 아래로부터의 경험일까? 동원과 경험은 교묘하게 결부되어 있어서 정확히 구분하기가 사실상 어렵습니다. 민중들이 그 노래를 애창하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면서 자율적인 동원이 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민중가수나 시인들의 노래가 중앙에서 받아들여져 다시 각 지방으로 보급되는 경우도 있었고, 스탈린의 독재가 강해져 가는 상황에서는 새로운 집권자의 역사의식에 맞추어지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쇳덩어리 수병>(1936년 유행) - 가사는 ‘진짜’ 혁명영웅이었던 ‘쇳덩어리 수병’과는 무관 B степи под Херсоном - 케르손시 근방의 초원에서 풀이 높이 자란다 중앙에서 각색한 노래가 있는가하면 <계곡 넘어 언덕 넘어>의 경우에는 민중들이 만든 노래 중 가장 유명한 것입니다. 이 노래는 내전이 끝났을 당시 빨치산 중의 한명이 자신들을 묘사하며 지은 노래로서, 기본적으로 공산당이나 소비에트 정권은 언급되지 않고 지역에서 자신들의 삶을 만들겠다는 의지가 주로 드러납니다. 공산당 중앙에서는 1929년부터 군악대에서 이 노래를 연주하기 시작하였고, 점차 민중들의 기억이 붉은 군대의 레퍼토리에 편입되는 형태로 발전하였습니다. <계곡 넘어 언덕 넘어(러시아)> (1922) 계곡 넘어 언덕 넘어 사단은 진군했다 <계곡 넘어 언덕 넘어(일본)> 1950,60,70년대에는 스탈린 시대를 넘어 혁명이 어느 정도 완료되었음에도 혁명가요들은 계속해서 제작되었는데, 이는 집권관료와 민중의 이해가 맞아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집권관료들은 통치 명분을 혁명으로 삼아 계속해서 혁명에 대한 기억을 강화하고자 했고, 민중은 국가기관들이 점차 사유화되고 관료들이 사적 재산을 늘려나가자 혁명의 순수했던 과거를 떠올리며 혁명에 대한 향수를 간직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즉, 관료들은 혁명가요를 이용했고 민중들은 혁명가요를 통해 위로를 받았습니다. <시간이라는 동무여>
맺는 말 : 혁명가요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가? 무상계급 운동에는 음악, 영화, 신문 등 노동자들만의 문화적 부문이 존재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이 노동자의 노래였습니다. 이들은 합창 과정을 통해 자신들의 계급의식과 귀속의식을 함양하였고, 이를 성경과 유사한 기원-고난-투쟁-승리라는 도식으로 표현해냈던 것입니다. 비록 이러한 과정에서 국가적 선전선동의 역할이 컸지만 이것만으로는 혁명가요를 설명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실제로 혁명가요의 상당수가 전투의 참가자들 또는 민중들의 자발적인 역사의식이 당에 의해 포섭되고 다시 민중으로 퍼져나가는 형태를 띠었기 때문입니다.
자원활동가 김주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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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정치와 현대사, 그리고 주체 | <인문정치와 현대사, 그리고 주체> 2강 | 데브린 | 2012.7.9 | |||
7월 3일 <인문정치와 현대사, 그리고 주체> 2강은 "8.15 그 커다란 환호성은 어디로 사라졌을까?"라는 제목으로 이승원 선생님(성공회대학교)께서 진행해 주셨습니다. 비가와서 안 오시는 분들이 많을 거라 생각했는데 자리를 꽉 채워주셔서 훈훈했습니다. *저번 후기와 마찬가지로 이하 편의상 '-하다'체를 쓰겠습니다. 양해부탁드립니다. :D 해방 후 대한민국 건국까지의 기간: "한국 현대 정치의 근원이자 본질이자 축소판" 1945년이라면 반세기도 넘게 지난 상당히 과거의 일 같기도 하다. 그러나 이 시기는 나를 포함한 지금의 20대의 조부모 세대가 몸소 체험한 시기이다. 여기서 이 시기를 몸소 체험한 선세대와 그러한 경험을 결여한 후세대 사이 상호 이해와 소통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따라서 이 시기는 여전히 현재의 기억 속에 존재하며, 사실은 굉장히 중요한 현재이다. 아울러 좌/우, 진보/보수 이념이 갈라지는 기원이 바로 여기에 있기 때문이라는 점에서 더욱 중요한 시기이다. 이 때의 좌/우 프레임은 해방된 지 상당한 시간이 흐른 지금 진보/보수 적대의 프레임의 원형을 이룬다. 이러한 적대적 대립은 세대 간 대립으로 이어지고 있으며, 공동체 형성을 방해한다.
해방전야-조선 총독부의 불안감과 여운형 해방 전날인 1945년 8월 14일 조선 총독부는 본토로부터 히로히토의 대 연합군 항복 선언문을 전달받았다. 한반도가 이남과 이북으로 나뉠 것이고, 남쪽은 미군정, 북쪽은 소군정에 의해 지배받을 것이 확실한 상황에서 일본은 자신들의 총독부가 있는 강북지역은 소련에 의해 점령당할 것이라 예측하였다. (당시 경계는 한강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위기의식을 느낀 일본측은 자신들이 본토로 무사히 귀환할 수 있도록 도와줄 조선의 정치 지도자를 찾기 시작한다. 총독부는 여운형을 선택한다. 사회주의자였고 청년층의 지지를 얻었던 카톨릭교도 여운형은 급진적이라기보다는 화합적 성향을 띄었기 때문이다. 여운형은 총독부에 5개 사항을 제시하는데 다음과 같다.
위의 5개 조항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사실상 건준은 대항국가로서의 성질을 가지며 사실상 건국에 대한 구상이 있었다 할 수 있다. 조선건국위원회의 활동과 특징, 그리고 딜레마 건준은 조선 건국을 준비하며 상당히 실질적이고 활발한 활동을 하였는데, 먼저 질서유지다. 일본인과 조선인 사이 사적 보복과 테러행위 방지, 일제 하 건설된 유효한 공공시설과 사회간접시설, 일본인이 소유하는 재산을 관리 분배하였다. 일제 공포정치의 상징격인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던 정치범들을 대대적으로 출감시킨다. 서대문 형무소는 당시 해방을 실감할 수 있는 장소였다. 아울러 전국적으로 지방단위의 지역 건준 그리고 인민위원회와 같은 자치조직이 상당수(총 2244 개에 이름) 건설되었는데 이들은 소작제 폐지, 여성문제, 노사문제에 관하여 논의와 같은 상당히 민주적 지역 자치활동이었다. 이 때에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와 같은 노동자 조직도 결성되었다. 건준의 "대항국가(counter-state)"로서의 특징을 갖는다. 대항국가란 "외세로부터의 독립이후 기존 식민통치 기구를 접수하여 이를 기반으로 새로운 독립국가를 건설하려는 아직은 미발달된 수준의 국가" (Smith)라 할 수 있는데, 종전 이후 민족자결주의를 보였던 건준이 이에 해당한다. 건준은 민족주의와 민주주의를 동시에 강조하는데 양자는 어느정도 긴장관계를 이루고 있다. 먼저, 건준은 "조선의 완전한 자주 독립국가의 건설"을 제 1강령으로 함으로써 철저하게 조선의, 조선인에 의한, 조선인을 위한 국가를 수립하려 하는 민족주의적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민족주의가 지나칠 경우 왕조 국가로의 회귀, 파시즘이 나타날 우려가 있다. 이러한 우려를 견제하는 것이 또 다른 주요 원칙인 민주주의다. 건준은 민주주의 원칙에 따라 참여의 균등성과 개방성을 강조하는 한편 친일부역자는 배제하는 모습을 보였다. 아울러 실질적 민주주의를 꾀하여 조선왕조, 과두제 부활을 막기 위해 노력하였으며, 전국 인대표자대회를 조직하여 이 목표를 달성하려 하나 이는 완벽했던 것은 아니었다. 우리의 민주주의 논의는 미소공동회의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한편 건준은 총독부에 의해 승인된 권력이라는 점에서 딜레마를 내포하고 있었다. 민주주의를 주요 원칙으로 내세우는 한편 친일 부역자는 배제하는 적대적 민족주의 모습을 보이기는 하였으나 총독부가 본토로 무사 귀환 할 수 있게끔 선택한 여운형이 중심이 되어 구성된 기관이라는 점에서 모순점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해방 이후 최대 관심사였으며 인민들이 원했던 토지개혁과 주요 산업의 국유화와 같은 실질적인 사안은 상대적으로 간과되었다. 건준은 근대 국가로 발전하기에는 한계를 보였다. 그럼에도 9월 8일 미군의 상륙까지 건준의 해방 후 건국 준비는 굉장히 폭발적이고 역동적이었다. 당시에, 특히 여운형은 미군정에 대해 크게 걱정하지 않았으나 1945년 9월 6일 박헌영 중심의 좌익 계열은 미군에 대항할 수 있는 외교주체로 조선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한다. 미군정의 시작 미 24군단은 1945년 9월 8일 인천항에 도착한다. 이들은 <작전 명령 4호>를 통해 일본군의 무장해제, 군정실시, 외부 정치 세력의 축출, 한반도 이남의 법질서 유지와 같은 4개의 임무를 전달한다. 문제는 이들 미군들과 조선인 간의 소통이 제대로 이루어지기 어려웠다는 점이다. 영어 능숙자가 매우 적었고 미국은 한국에 대한 정보가 부족했다. 그나마의 정보는 "부르주아" 지식인, 친일자들과 같이 건준과는 다른 성격의 집단에게서 얻었다. 이들에게 들은 첫번째 정보는 건준은 친소세력이라는 것이었고, 소련의 남하를 최대한 억제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던 미국은 건준을 "적"으로 간주해버렸다. 아울러 조선은 패전국의 식민지였다. 태평양 전쟁 참전 이유로 미국은 조선을 일본과 동일집단-패전국으로 간주하였다. 이에 따라 미군정은 <작전명 베이커>를 통해 3개 육군 사단을 전국적으로 한반더 이남에 투입하여 모든 지역정치조직들을 감시하였다. 미군정은 소련의 남하를 최소화하고 미국의 경계(American Boundary)를 최대한 한반도로 전진배치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기 때문에 국내 좌익 성향의 인민공화국과 인민위원회 등 조선인의 자치조직과 대립하였다. 미군은 여운형을 만나 조선인민공화국의 공화국 사용을 중단하고 '정당'으로 명칭을 바꿀 것을 요구하여 이후 미군정과 인민공화국의 갈등이 점차 심화되었다. 한편 김구와 이승만 등 우익세력의 정치세력화가 진행되었다. 건준의 와해와 반탁운동, 분열 건준은 식량문제에 대한 나름의 해결을 해 나아갔기 때문에 해방정국을 주도할 수 있었다. 그러나 45년 10월 5일 미군이 일반고시 제 1호를 통해 <미곡의 자유시장건>을 공포함에 따라 건준의 분배역할은 약화된다. 이후 미군은 일반고시 2호를 공포하는데 이는 1호와 더불어 물가의 상승을 유발하여 대략 1년 사이에 쌀 가격이 15배 상승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에 혼란을 더한 것은 모스크바 삼상회의였다. 45년 12월 16일 미.소.영 외무장관이 모여 조선의 독립을 포함한 전후 질서 논의가 오간 이 회의에서 소련은 1 조선의 즉각적인 독립을 위한 임시 조선정부 수립 2 미국이 요구한 신탁통치 문제 협의 3 조선에 미소공동위원회 개최를 제안하고 미국은 조선의 임시정부 수립을 명시하지 않고 5년 간의 미.소.영.중에 의한 조선의 신탁통치를 제안하였다가 거부당한다. 여기서 미국이 제기한 조선의 신탁통치는 과도정부나 자치라기보다는 네 나라끼리 합의를 통한 통치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논의를 동아일보가 "조선, 신탁통치 결정 소련이 신탁통치 주장...미국은 즉각 독립주장"이라 오보함으로써 혼란은 가중되고 반탁운동이 전개되어 반공세력이 정치적 명분을 획득하게 된다. 특히 북에서 내려온 청년들인 김구, 이승만은 반공민족주의를 표방하며 반공주의 세력을 정치세력화한다. 여기서 반공-민족-민주가 결합하는 "가장 획기적 전환"이 일어나게 된다. 좌익과 우익의 분열은 더욱 심화되어 1946년 미소공동위원회는 결렬된다. 이 가운데 이승만이 6월 3일 정읍에서 자신들은 자주독립국가를 원하는데 친소세력(좌익)들이 통일국가를 원하고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남한의 독자적인 정부수립 가능성을 시사하였다. 좌익세력은 미군정에 대한 저항을 전면화하였고 미군정은 좌익계열에 대한 탄압을 본격화하였다. 식량 부족, 물가 폭등과 더불어 이러한 혼란과 공포, 생존에 대한 열망은 당대를 살았던 사람들에게 경험으로 사무쳐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때의 반공주의가 지금까지 이어진다. 나가며 8.15와 이후 3년 간의 기억이 여전히 "현재의 기억"이며, 이는 선생님의 부모세대 (나에게는 조부모 세대)의 실제 현실, 살아있는 기억이라는 점과 선세대와 후세대 간의 의견, 이념 대립 및 소통의 문제에 대한 지적이 강의 처음에 언급되었는데, 이것이 오늘 강의의 주요 지점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든다. 사실 강의 초반에 제기된 세대 간의 대립은 정말 피부로 느끼곤 했던 것이었기 때문이다. 학교에 진보쪽에서 유명하신 선생님께서 오셔서 강연을 하신 적이 있는데 질의응답시간에 한 유명한 보수단체로 추정되는 분께서 "그래서 당신이 말하는 주체는 [북한의] 주체 철학에서 말하는 그 주체랑 똑같은 것이냐"는 질문을 하신 적이 있어 뜬금없다고 주변 친구들이랑 생각했던 적이 있다. (강연 내용은 북한이라는 단어와 하등 관련 없는, 영국의 한 문학을 탈식민주의적 관점에서 읽는 것이었다.) 이 이외에도 이런 저런 사연은 조금 있다. 여지껏 이분들에 대해 "그래, 몸소 체험하며 살아오셨으니 어쩔 수 없지 뭐. 저분들은 바뀌지도 않으실거야"라는 체념어린 생각을 막연하게 해 왔다. 그러나 강의를 들으면서 해방 후 혼란과, "그 커다란 환호성"을 감출 수밖에 없던 상황을 다시 생각해보았다. 강의 텍스트에서 "공포"와 "생존"이라는 단어가 인상깊었다. 처음에는 지나친 단어라 생각했는데 당시 상황을 실재했던 사람들의 입장에서 잘 설명해주는 단어란 생각이 들었다. 공포는 생각을 하기 이전에 몸으로 느끼는 것이다. 당시 상황은 극도의 혼란, 그리고 공포였을 것이다. 당시의 좌우 대립은 생존을 좌우하는 것이었을테고 이러한 공포는 몸에 정말 사무쳤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이전에는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았던 그분들을 '인간으로' 다시 바라보았다. (그래도 여전히 그 공포는 온전히 전달되지 않겠지만) 하지만 여전히 계속해서 질문이 남는다. 우리가 행하는 이해의 노력과 더불어 그분들의 노력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이다. 그 소통은 어떻게 실현될 수 있을까. 자원활동가 김수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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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정치와 현대사, 그리고 주체 | <인문정치와 현대사, 그리고 주체> 1강 | 데브린 | 2012.7.2 | |||
<인문정치와 현대사, 그리고 주체> 1강은 "3.1 운동, 아래로부터의 역사를 새로 쓰다"라는 제목으로 하승우 선생님께서 강의해 주셨습니다. 첫 시간이라 가는 길에는 설레고 막상 도착해서는 마음이 편해졌어요. 다양한 나이대의, 다양한 분들을 만나 즐겁고 유익했습니다. 첫 시간은 텍스트를 복사해드렸는데요, 앞으로는 복사해드리지 않고 각기 텍스트를 준비해 오시길 부탁드리며 책은 대안지식연구회에서 나온『인문정치와 주체』입니다.
이후 편의를 위해 존대말은 생략하고 '-하다'체로 쓰겠습니다.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3.1운동, "씨알의 역사"의 신기원 3.1운동에 관해 우리에게 친숙한 이미지는 까만 치마와 하얀 무명저고리를 입고 태극기를 흔드는 유관순, 총칼 앞에서 태극기를 흔들고 힘없이 짓밟히는 사람들일 것이다. 다층적 차원에서 서로 다른 개인이 혼재하는 복잡한 현실은 그것이 역사화되었을 때 하나의 덩어리로 해석되는 경우가 많다. 3.1운동 또한 마찬가지이며, 이는 유관순과 같은 하나의 사건으로 정리될 수 없다. 3.1운동은 역사학자 박은식에 따르면 "씨알의 역사", "자주하는 민의 역사"의 시작이다. 이 3.1운동의 주체는 다름 아닌 민중이었으며 이 3.1운동을 통하여 민중은 재발견되었다. 그러나 이 민중, 주체는 일반적으로 생각되듯 일원적인 존재가 아닌 다양한 존재이다. 민중의 요구사항과 투쟁 원인은 다양하였으며 이는 3.1운동에 대한 기존의 관점, 예컨대 일제에 의한 피해 이미지, 민족 대표 33인과 같은 하나의 관점으로는 포착하기 어렵다. 오히려 3.1운동은 민중이라는 다양한 주체들을 드러나게 한 사건이었다. 3.1운동의 배경 3.1운동의 저항성을 강조하는 시각은 그 이전의 저항을 상대적으로 가벼이 다룬다. 그러나 1919년 3.1운동 이전에도 계속 저항하는 사건은 있어왔다. 1907년부터 1911년은 저항하는 역사라 할 수 있으며 이런 과정에서 1910년 조약이 이루어진 것이지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조약에 의해 간단히 나라가 넘어간 것은 아니다. 단순히 뺏김/안 뺏김으로 볼 수 없는 맥락이 있다는 말이다. 식민 정치 체제는 “국가 폭력”의 형태로 경찰과 군대식 체제로 이루어져(커밍스) 지금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특히 경찰의 권한은 굉장히 포괄적이었으며 상당히 일상적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경찰은 치안이라는 명목으로 사람들의 일상 구석구석을 통제할 수 있었다. 즉, 일상자체가 국가 폭력에 항시 노출되었다. 이는 3.1운동 시 경찰서를 습격한 이유를 제공하였다. 일제의 식민 정치는 ‘정치적’ 차원 뿐 아니라 일상의 영역 곳곳을 파고들었다. 사법체계에서도 재판 없이 구류, 태형 등의 처분이 가능하였으며, ‘의생규칙’을 통해 한의를 개편하는 등 사람들의 생활관습 또한 개화라는 명목으로 개조하였다. 이런 식으로 불만이 1919년 3.1운동까지 누적되었다. 3.1운동의 양태 3.1운동 이미지의 중심은 2.8독립선언과 33인 선언, 서울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지식인층의 독립 선언은 분명 계기를 제공한 것이기는 하였으나 사실상 일제의 식민 정치로인해 지속적으로 쌓여 온 민중의 불만이 터져 나온 것에 가깝다. 아울러 3.1운동은 서울 뿐 아니라 다른 지역에까지 퍼졌으며, 지방에서 더욱 오래 지속되었다. 일제가 이후 조사한 3.1운동의 원인에 따르면 민중들의 불만은 단순히 식민 지배/피지배의 구분을 넘는 더욱 다양하고 일상과 맞닿아 있는 것이었다. 양반, 유생의 특권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 부역이 과중하다는 점, 행정관리의 오만 등 다양한 계층의 다양한 불만이 결집된 것이 3.1운동이었으며, 대개 그 불만은 식민 지배와 같은 거대담론보다는 구체적 자기 삶의 문제와 연관된 것들이었다. 시위 형태도 다양하였다. 도시락을 들고 시위꾼, 만세꾼이 국가 권력에 통제되지 않은 채 주변 지역을 돌며 독립을 외쳤으며, 한밤중에 산꼭대기에서 만세를 외치기도 했다. 체포 기록을 보면 농민이나 지식인 뿐 아니라 자영업자와 같은 상인들도 상당수였는데, 이들은 동맹파업, 일본인에게 물건 안 팔기 등으로 시위에 참여했다. 3.1운동, 민중의 재발견 일반적으로 3.1운동은 일제의 잔인한 탄압으로 실패한 사건으로 일컬어진다. 그러나 3.1운동은 민중의 재발견이라는 점에서 상당히 의미있는 사건이다. 이 사건을 통해 민중의식이 성장하였다 할 수 있다. 3.1운동의 “실패”를 통해 왜 우리가 짓밟혔나를 생각게되었으며, 점차 걸음마 단계였던 민중의식은 의식화, 조직화 된다. 지식인층(젊은 학생층)은 이제 봉기뿐 아니라 학습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데, 이는 농민과 같이 봉기해도 하대하던 의식이 있던 이전과는 상당히 다른 것이다. 점차 지식인층은 농민층의 사람들과 조직해야 함을 깨닫게 되며, 이 과정에서 민은 대상화의 존재가 아니라 함께 일을 도모하는 존재로 생각되며, 민은 스스로 주인이 되려는 존재가 된다. 20년대는 이러한 의식화와 조직화가 폭발적으로 드러난 시기이다. 조선노동 공제회가 출현하였으며, 192,30년대에는 서울 청년회 조선 공산당이 출현한다. 19세기에도 이념이나 사상은 존재하였으나 주로 지식인 중심이었던 반면 20세기에는 점차 다른 계층에까지 퍼지게 된다. 이에 따라 지식인이 지방에 내려가 야학, 강연회를 여는 등 구체적 일상과 사상이 접전을 찾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은 공식 역사에서 빠져있고, 보통 3.1운동 이후는 암흑기로 다루어진다. 강의를 마치고 무언가 이슈가 되는 사건이 터질 때마다 느끼는 것은 “우와 정말 혼란이다.”이다. 지금 당장 여기 벌어지고 있는 일은 이것이 정확히 무슨 일인지, 후에 어떻게 기억될는지 명확하게 답변을 내리기 어렵다. 너무나도 다양한 관점이 얽히고 섥혀 바로 옆에 산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은 그 사건과 나의 시간적, 심리적 거리와, 역사가의 관점에 의해 그 성격이 상당히 단순화 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3.1운동은 막연히 조선독립을 외친 사건, 비폭력 투쟁과 같은 이미지로 기억되어 있었다. 하지만 유관순 판결문의 내용은 내가 생각했던 이미지와 상당히 다른 것이었고, 민중의 요구도 어떠한 거대담론으로 쉽게 해석할 수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지극히 일상과 닿아 있는 것들이었다. 개인적으로 난 어떠한 이념이 저항을 뒷받침하는 것이라 하더라도 그 거대담론으로만 저항의 주체가 해석될 경우, 그것 또한 개별 주체의 생명력을 앗아가는 것이라 생각한다. 비록 ‘주체’라는 한 단어로 묶여있으나 그 주체는 너무나 다양한 개인을 포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3.1운동의 주체를 다각화한 이번 강의는 그때 당시 사람들을 생생하게 느끼게 해주었다. 아울러 예전에 학교에서 들었던 강의 중 조선 후기 공론장의 태동과 관련된 강의가 떠올랐다. 3.1운동에서 민중이 재발견되었다는 것이 오늘 강의의 요지라 할 수 있겠는데, 나는 1889년즈음부터 시작된 민의 성장과 더불어 해석이 되었다. 19세기 말 신문을 함께 읽고, 각 동네마다 연설장을 만들고 서울에는 19일동안 만민공동회가 열리며 조금씩 성장하던 민중이 3.1운동으로 수면 위로 드러나고 그 이후 더욱 조직화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문화 통치 이후 분열을 거듭하며 이러한 민중은 시민으로까지는 성장하지 못하였다는 생각이 들어 안타까웠다. 그 몫은 100여년이 지난 지금 우리의 몫이라는 생각이 든다
자원활동가 김수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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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정치의 고전으로 오늘을 읽는다 : 시민정치와 시민불복종 | 시민정치와 시민불복종 5강 -누가 악법도 법이라 말했나? (6/11) | 우진아빠 | 2012.6.14 | |||
이번 시간에는 김선욱 선생님을 모시고 <한나 아렌트와 시민불복종>이라는 주제로 강의를 들었습니다.
열정적이고 유익한 강의를 해주신 선생님과 월요일로 강의시간이 변경됐음에도 불구하고 와주신 수강생들께 감사드립니다.
비록 낮은 출석률이었지만 너무 너무 좋은 시간이었어요!!
누가 악법도 법이라고 말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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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은 무엇인가?
1
우리는 법을 이야기 할 때 소크라테스가 말했다고 알려진 ‘악법도 법이다’라는 일화가 떠오른다. 법은 무엇일까?
이번 강의를 맡으신 김선욱 교수님께서는 시민불복종을 말하기 앞서
‘그럼 불복종의 대상이 되는 법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해야 한다고 하셨다.
법은 삶의 안정성을 담보하지만 그때그때마다 변화하는 현실을 바로 반영하지 못하는 양면성을 갖고 있다고 한다.
또한 앞선 강의에선 법은 불완전하기 때문에 시민불복종과 같은 행위를 통해 좀 더 완전한 방향으로 간다고도 하였다.
선생님께서는 법에 대한 아래 두가 일화를 예로 들었다.
법은 사람을 괴롭히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2
구약성경에 나오는 안식일이라는 게 있다. 간단히 말하자면 일요일에는 일을 하지 말고 쉬라는 뜻이다.
하루는 예수님이 제자들을 데리고 길을 걷다 배가 고파서 들에 있는 곡식을 빻아 빵을 만들어 먹었는데 하필 그날이 안식일이었다.
마침 그 앞을 지나가던 유대교인들이 예수님과 그 제자들을 가르켜
‘안식일에는 일을 하지 말라고 그랬거늘 곡식을 빻는 일을 한다’며 질타하며 일행들을 손가락질 했다고 한다.
이에 예수님이 답하기를 ‘안식일은 사람을 편히 쉬게 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지,
이렇게 다른 사람을 괴롭히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나는 이 얘기를 들으면서 문득 헌법적 권리인 집회결사의 자유를
하위법인 집시법과 경찰의 규정을 들이대며 오히려 권리를 제한하는 경찰이 떠올랐다.
악법도 법이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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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일화는 소크라테스는 ‘악법도 법이다’라고 한 적이 없다는 내용이었다.
선생님 본인 원문을 읽어봤지만 그런 문장은 없었다고 하셨다.
오히려 소크라테스의 철학사상을 공부하면 오히려 그 반대의 생각을 갖고 있었을 거라고 하는데
소크라테스가 그런 말을 했다고 하며 탈옥을 거부한 이유는 다든 이유들이 종합적으로 작용해서 내린 판단이라고 하셨다.
더불어 어떤 명사 든 앞에 수식어가 붙으면 본질이 변할 수밖에 없기에 ‘악법도 법이다’라는 명제는 아예 성립이 될 수 없다고 하셨다.
원문에는 없던 말이 어떻게 버젓이 교과서에도 실리게 되었을까?
만일 정부가 악법도 법이라고 주장한다면, 허위계약서=계약서, 가짜 술= 술, 꾀병=병 등등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양심적 병역거부는 시민불복종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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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인 본문으로 들어가 소로우는 불복종이 양심에 기초해서 발생한다고 말한 반면
아렌트는 양심은 그 작동원리를 보면 개인적인 사적인 상황에서 네거티브한 방식(…해서는 안 돼)으로 작동되기 때문에
부수적으로 언급할 수 있겠지만 ‘정치적 의미’로 갖기에는 대단히 약하다고 했다.
하기에 양심적 병역거부와 시민불복종은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했다.
이후 강의에서 선생님은 아렌트가 말하는 시민불복종의 특성, 정치개념, 시민불복종과 폭력의 문제,
사적이익과 공적이익 등 아주 유익한 얘기들을 해주셨으나 첨부된 강의 자료로 대신하려고 한다.
마지막으로 교수님이 언급하셨던 기사를 찾아 링크를 걸어놨으니 한 번씩 읽어보면 좋을 것 같다.
후기작성 : 천웅소, 아카데미느티나무 간사
강의자료 : AC201210611_시민불복종_5강.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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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 그 매력과 두려움 | <공동체 강좌> 여섯번째 시간, 내가 꿈꾸는 공동체 | 느티나무 | 2012.6.9 | |||
<여섯번째, 공동체 그 매력과 두려움> 내가 꿈꾸는 공동체 자원활동가 | 김기연 2주 빠지고 듣는 수업이라 그런지 분위기가 많이 달라져 있었어요. 수강생도 줄어 있었구요. 한층 친밀해진(듯한?) 분위기는 좋았지만 보다 많은 수강생분들과 함께하지 못해 아쉬운 점도 있었어요. 마지막 강의인 만큼 강의를 들으며 공동체와, 공동체를 생각하는 자신에 대해 이야기해보는 시간을 가졌어요. 공동체에 대한 두려움과 내가 꿈꾸던, 그리고 꿈꾸게 된 공동체에 대해 이야기 나누었어요. 심경의 변화도 많았는데, 강의를 들으며 직접 뜨개질 공동체를 만드신 분도 있었고, 지역공동체 조성을 추진 중인 분도 있었어요. 공동체에 대한 막연한 생각에서 구체적으로 고민하게 되었다는 게 수강생들의 공통적인 의견이었어요. 소감을 말하는 자리가 끝나고 강사님의 진행에 따라 각자 원하는 공동체의 모델을 토론하고, 그중에서 몇 가지를 뽑아 모둠을 만들어 세부적인 내용을 정해보는 시간을 가졌어요. 이웃공동체, 동네친구들 공동체, 학습(?)공동체 중에서 저는 <동네친구들> 공동체에 함께 했어요. 동네에 친구나 마음 맞는 사람이 없어서 외롭다는 공통된 생각을 기반으로 각자 있었으면 하는 공동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이야기 끝에 은평구를 지역기반으로 하는 2030 공동체, 텃밭 공동체, 전업주부 공동체 이렇게 세 공동체가 꾸려졌어요. 은평구와 가까운 곳에 살고 있어서 2030공동체에 대해 함께 이야기 했는데 진행 중인 프로젝트여서 그런지 상당히 진전되어 있었어요. 은평구 동네 친구들 공동체는 은평구에 거주하는 25세 이상, 36세 이하의 외로운 은평구 주민들이 모여서 축제를 기획하기도 하고 치킨에 맥주를 마시며 사는 이야기도 하는, 소박하지만 나름의 목표가 있는 공동체였어요. ![]() ![]() 각자 구상한 공동체를 발표하며 질문도 하고 각자의 의견을 공유도 하며 그렇게 마지막 강의를 마무리 했어요. 마지막 강의를 마치고 든 생각은 공동체는 미래가 아니라는 것 이었어요. 지금도 할 수 있는 것이 아닌 미래에 내가 몸담을 곳 이라는 생각이 공동체를 막연하게 만들고 있었다는 거예요. 2030 공동체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공동체에 대해 실현가능한 쪽으로 생각해보게 되었어요. 제가 만들고 싶어 하는 공동체에 보다 가까워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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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되고 참신한 참여연대 토크쇼- 참쇼! ; 첫 번째 초대손님 <파업자들> | 첫번째 <참쇼> 파업자 김민식피디, 최경영기자를 만나다 | 느티나무 | 2012.6.8 | |||
6월의 첫 날, 더군다나 금요일 저녁 7시. 느티나무홀에는 스무명 남짓한 사람들이 쉽지 않는 시간에 모였다. “여러분 안녕하세요. 참쇼는 일방적으로 강연자의 이야기를 듣는 형식이 아니라 참여하신 분들의 질문과 이야기로 채워지는 토크쇼입니다. 본인 소개와 간단히 참쇼에 함께 하게 된 이유를 먼저 말씀해 주시길 부탁드릴게요.” 느티나무 수강생 황미정님의 낯설은 질문으로 <참쇼>가 시작되었다. “안녕하세요? 지적장애인 거주 및 재활시설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평소에 현장에...사회에...큰 관심을갖고 살지 못하는데, 요즘은 정말 불끈 불끈 할 때가 많습니다. (옆에 앉은 여성을 가르키며)여자친구와 함께 이 자리에 왔습니다” “김민식피디님 블로그에서 오늘 토크쇼 소식을 접했습니다. 바쁘게 살다보니 사회문제에 관심을 가질 여력이 없었어요. 그런데 어느날 퇴근 후에 뉴스를 보다가, 이게 뉴슨가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티비를 켜면 당연스럽게 나오던 ’제대로‘된 뉴스를 왜 못보고, 인터넷에 올라온 ’뉴스타파‘, ’리셋뉴스‘를 다운 받아서 봐야하나 라는 생각이 들면서 화가 났습니다. 부탁드리고 싶은건, 이상한 사람들이 더이상은 뉴스에 등장하지 않도록 응징했으면 좋겠습니다.” “고등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티비를 안 본지 5년이 되었습니다. 현장에서 생생하게 싸우고 있는 분들의 고민을 듣고 싶습니다. 저는 고3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데요. 지금 언론파업과 관련해서 학생들에게 울림을 줄만한 한 마디가 있다면 듣고 싶습니다” “아침마다 출근길에 여의도 텐트촌을 지나고 있는 직장인입니다. 그 광경이 참 답답합니다. 당연하게 뉴스를 볼 수 있다고 생각해 왔는데, 그럴 수 없다는 현실이 많이 갑갑했습니다.” “이렇게 오랫동안 파업을 했는데... 세상이 이렇게 조용할 수 있나 싶습니다.” “채식카페에서 왔습니다. 채식을 하는 사람으로서 사회적 소수자라고 생각을 하고 있고, 옳지 않은 것에 대해 자신 있게 얘기하며 살고 싶습니다. (떨리네요.)” “친구를 먹을걸로 꼬셔서 데리고 왔습니다. 방송파업을 모르고 있는 사람이 훨씬 많아요. 드라마가 안 나오면 많은 사람이 알지 않을까 싶은데...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릴 수 있는 방법이 뭘까요?” “공영방송 쟁취와 김인규, 김재철 사장 아웃이 서로 어떤 연관이 있을까요? 좋은 전략이라고 판단하시나요?“ 이렇게 30분 정도 지났을까, 참여자들은 하나둘씩 이 자리까지 발걸음하게 된 이유와 오늘 나누고 싶은 이야기, 물음, 기대 의견을 충분히 모아 주었다. 최 요새 가장 많이 하는 생각을 얘기하면 제가 어떤 성향의 사람인지 아실 것 같아요. 저는 참 겁없이 살아요. 딸이 둘 있고, 앞으로 교육은 어떻게 할것이며... 라는 생각이 들고, 이것들로부터 두려울 줄 알았어요. 그런데 저는 정말 별일 없이 살고 있어요. 사측은 이런제가 얼마나 제가 미울까요.(좌중폭소) 그런데 제가 가장 두려워하는 건 대중이 저를 어떻게 생각하고 규정할지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 여러분의 아버지 어머니 자식들에게 가령, 진보니 좌빨이니 노빠니 빨갱이니 라고 제가 규정이 되어 버리면... 자유로운 언론활동에 가장 방해가 되요. 사람은 ‘논리적’으로 설득할 수 있는 것에 한계가 있어요. 어느 순간 이후부터는 정서구요. 이미 일정 나이, 경력이 쌓이면 그것은 절대 변하지 않아요. 저는 진짜 자유인이 되고 싶어요. 저는 태생적으로 자유로운 사람이고, 개인주의적인 사람이에요. 분명히 정치적인 성향이 있죠. (하지만 그것이 언론활동과는 별개의 영역이란 의미) 파업이 시작된 것과 오래 지속되는 것은 또한 그 만큼의 억압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최소한의 상식을 지키는 방송을 하고 싶습니다. 김 >> 님은 아름다운 일을 하고 계십니다. 일하면서, 이런 강의 들으러오고 부천에서 부터 따라오는 여자를 만났다는 것만으로도 당신은 복 받은 겁니다.(좌중폭소) >> 파업을 나설 때 하나 이야기 합니다. 우리는 무조건 즐겁게 파업하자. 김재철사장 왔을 때 39일간 파업을 했어요. 그 때 알아봤어요. 이 양반은 공정언론 하지 못할 것이다. 그 당시 파업에서 (여자)선배가 삭발했어요. 이근행위원장은 단식 농성하다가 응급실 실려 갔어요. 그런데, 김재철은 특급호텔 전전하면서 회사에는 들어오지도 않고 피했지요. 우리는 왜 이렇게 고통 받으며 투쟁하는가. 절대 고통스럽게는 말자라고 생각했습니다. 지난 2년간 나는 너무너무 괴로웠고, 지금 파업하고 있는 것이 너무너무 즐겁습니다. 우리가 괴로워 봤자 그들은 슬퍼하지 않아요. 님께서 즐거움을 느끼시면 되어요. 저 인간보다는 나은 인간이 되는거죠. >> 저도 집에 티비가 없어요. 그런데 님은 심지어 티비도 안 보고, 채식도 하세요? 님은 절에 들어가시면 되겠네요.(좌중대폭소) 저는 정말 전형적인 딴따라에요. ‘39일 파업’ 당시에도 <내조의 여왕>을 찍었어요. 그런데 사람들이 묻습니다. 왜 너는 지금 파업을 하냐구요. 나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저는 정말 엠비씨를 사랑하는데요. 그 이유가 시청률 대박 피디와 쪽박 피디가 월급이 같아요. 정말로 좋은 조직이라면 어떤 사람의 성공에 대한 보상보다는 실패했을 때를 그것을 받쳐주고 더 격려하는 조직이 이라고 생각해요. 이것을 뒷받침하는 것은 노동조합입니다.(엠비씨는 노동조합 조합률이 높은편) 드라마 피디나 미술부 엔지니어나 월급이 똑같아요. 아름다운 조직이죠. 어떤 사람들은 공을 크게 세우면 보상을 크게 주는게 맞지 않냐고 얘기해요. 그런데 이런 예를 들어 봅시다. 어느 인디어 마을에서 100명이 창을 던져 버팔로를 잡으러 갑니다. 창은 던지면 버팔로에게 3개 정도 맞을 확률이 있어요. 어느날 어떤 인디언이 창에 이름을 적어서 던지자고 해요. 운 좋은 사람은 3개중에 하나의 창에 두 번이상 걸릴 수도 있고, 창을 꽂은 3명이 버팔로를 차지하게 되죠. 그렇게 몇 달 내내 반복해요. 자 그 뒤엔 한 50명은 굶어 죽을 수 있어요. 50명이 창을 던지면 한 개, 두 개 맞을까요? 버팔로가 창에 맞을 확률도 그 만큼 떨어지죠. 제가 진보의 가치를 좋아하는게 경쟁에서 뒤쳐진 사람들을 보호해 줄 수 있기 때문이에요. 엠비씨의 노동조합원은 750명에서 총선 끝나고 778명이 되었어요. 오히려 늘었죠. 걱정마시고요. 저희는 즐겁습니다. ^^ 저는 완전 루저에요. 덕후에요. 10대, 20대 덕후는 먹어줘요. 근데 저는 40대 덕후에요. 저는 늘 제가 좋아하는 것만 해요. <서늘한 간담회> 나가서 사장님을 놀리는데요. 저는 그게 정말 그게 재밌어요. 그래서 놀려요. 엠비씨 최고의 “아가리파이터”죠. 최경영 기자는 키보드워리어구요.(좌중 대폭소) 소수자 얘기하셨는데요. 우리 모두는 소수자에요. 자신을 다수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우매한거죠. >> 이렇게 지지를 받을 줄 몰랐어요. 이렇게 오래 하는건 여러분 덕분이에요. 한달하고 접을까했었는데요. 비오는데 여의도 공원 콘서트에 3만명 오시고... 돌아 갈래도 갈 수가 없는거에요.(좌중 대폭소) >> 더 많은 사람들이 파업을 알게 하려면 드라마를 불방 시켜야 한다고 하셨는데요. 방법은 있어요. 해품달이 한번 결방되었는데요. 왜 결방됐냐면요. ‘엠비씨 프리덤’을 제작하고 제가 정직 3개월 받았어요. 드라마 피디가 집행부를 한적도 처음이었구요. 그래서 드라마 해품달이 한번 섰었구요. 무신도 섰었죠. 제가 구속되면 드라마 결방 될 수도 있어요. (좌중폭소) >> 개인비리와 공영방송의 상관관계에 대해서 물으셨는데요. 최 >> 2008년 8월 8일에 경찰특공대가 출동했습니다. 정연주사장을 해임하는 이사회가 열리는데. 그 사람들이 우리 인원보다 많이 장악하고 있었어요. 정권은 이미 이명박 정권이구요. 직원들이 무서웠을겁니다. 노조도 마찬가지구요. 그때는 증거도 없었고, 지금와서는 모두가 불법이었다는걸로 드러났죠. 대법원에서 판결이 났어요. 털다 털다 안 나와서 배임죄를 걸었는데 결국 무죄였죠. 미디어 포커스, 한국 사회를 말한다, 탐사보도팀에 포함되어 있었어요. 정연주 사장이 좋아해준 프로그램이었는데... 저희는 사장이 와도 일어서서 인사하지 않았어요. 같은 프로그램에서 일하는 기자 피디들도 서로 언제 방송이 나가는지 몰라요. 제작 자유와 독립권이 있었죠. 권력이나 권위가 먹히지 않았어요. 그렇게 5년을 있었는데. 특공대 출동시켜서 공영방송사장 해임을 시키는 거에요. 도저히 가만있을 수 없었죠. 노조집행부는 물러서는 집행부였어요. 싸우겠다는 조합원에게 노조위원장은 "그러시던가"라고 했어요. 400명이 싸우고 있는데... 밀리다가 밀리다가 1층 사무실로 들어오게 되었어요. 그런데 굉장히 시원하더라구요. 충격을 받았어요. 앉아서 일을 하고 있더라구요. 그 때 어디선가 “이제 그만 나가 주시죠.” 라는 말이 들려 왔어요. 그 기억이 너무나 선명합니다. 탐사보도팀은 스포츠중계팀, 부산, 울산으로 도처로 뿔뿔히 흩어졌어요. 저희 탐사보도팀이 24번 상을 받았어요. 상금 만도 2억이었어요. 회사에 끼친 손해가 없어요. 저희는. 그런데, 탐사보도팀에서 축적한 보도 노하우들이 닮긴, 탐사쩜씨오점케알을 넘겨주면서 다음팀에게 전하라고 했죠. 그런데 모든 공개된 취재 노하우가 담긴 그 웹페이지를 없애버렸어요. 우리가 5년 동안 쌓아온 보도의 아성을 날렸어요. 400명을 고립시키고 지방으로 돌리고, 저는 그 뒤로 수십년 동안 해야 할 수 있는 스포츠 중계팀으로 옮겨 졌어요. 제가 뭘 할 수 있었겠어요. 완전히 사람을 바보로 만든거죠. 구노조와 새노조에 대한 질문에 설명하는 최기자에게 김민식피디는 참 어려운 이야기다.라며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그만 나가주시죠라고 했던 그 말이 상처가, 서로간에 도저히 넘을 수 없는 간극이 생긴거죠. 김인규 사장이 들어올 때...당연히 이정도는 파업을 할 줄 알았어요. 이명박의 언론특보였던 자가 사장으로 오는데... 갈등을 짓밟은 다음에 화합하자는 건, 화합이 아닌 억압이에요. 처음 질문이 나왔던 이야기들에 대한 토크로 시간은 이미 훌쩍 지나와 버렸다. 자리한 사람들은 각자의 생각을 정리해 보며, 잠시 쉬는 시간을 갖었다.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삶을 진지한 농담 만으로 살면 지금보단 즐거운 나날이지 않을까란 생각이 들었다. “엠비씨프리덤” (김디피가 USB메모리에 닮아가지고 다니는 고해상도 버전으로)을 함께 보며 노래와 춤을 따라 흥얼거렸다. 쉬지 않고 한번에 찍었다는 3분짜리 짧은 동영상만으로도 그들이 얼마나 즐겁게 파업에 함께하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더 궁금한 내용에 대해 질문이 이어졌다. 김 최
김 피디님에게, 나에게 연출이란? >> 좋은 질문입니다. 어렵고요. 기본적으로 대중과 소통하는 사람이죠. 이런 드라마, 이야기를 사람들이 좋아할까? 고민을 하죠. ‘공감을 하는’ 직업을 가진 드라마 피디가 옆에 있는 기자와 피디가 고통을 받고 있는데, 혼자 즐겁고 신나면 그게 사람인가요. 미친놈입니다. 방송은 저에게 있어서, 장난감이에요. 덕후중에 최고가 건담만드는 덕후죠. 만들어서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이 최고의 행복이죠. 그런데 망가트리면 미치죠. 저한테는 엠비씨가 그래요. (좌중박수) 어떤 님의 응원의 3행시 낭독. 응원합니다 최/초로 경/질되었지만 영/원히 기억될거에요^^ 김/아가리 파이터님! 민/둥산이되어가는 MBC를 식/상하지 않게 즐겁게 끝까지 투쟁! 닥치고 투쟁! 파이팅! 글 편집·정리는 아카데미 느티나무 전보임간사 (워낙에 많은 이야기가 오고 가서, 부족한 내용은 함께 했던 여러분이함께 정리해 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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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정치의 고전으로 오늘을 읽는다 : 시민정치와 시민불복종 | 시민정치와 시민불복종 4강 -비폭력은 시민불복종의 본질인가 (6/4) | 신동은 | 2012.6.7 | |||
세 여자가 있다. 나이는 40대에서 60대 초반까지다. 우리나라에선 한참 아이들을 키우거나 맞벌이를 하며 몸과 마음이 지쳐있을 때쯤이다. 하지만 이 세여자들은 유럽인이다. 남들을 만나면 직장이 힘들다거나 자식들이 어느대학에 들어갔다거나 하는 말은 하지 않는다. 직업에 대해 물어보면 ‘논다’고 말한다. 노는건 좋은데, 놀러다니는 장소가 남들과는 좀 다른 것 같다. 세명 중 한명인 엔지는 얼마 전 강정마을에서 활동하다가 강제출국을 당했다. 강정마을에 쳐져있는 울타리를 뜯고, 보트를 타고 해군기지 공사장안으로 진입을 시도하는 등 군인이 미워할 짓(?)을 많이 해서다. 업무집행방해죄로 강제출국된거니까, 정말 미운짓을 해서 쫓겨난거 맞다. 그런데 그녀를 포함한 이세명은 한국에서뿐 아니라 영국에서도 몇 번씩 체포되었다. 96년도 인도네시아가 동티모르와 전쟁을 벌일 때, 영국기지에 몰래 침입해 전투기를 부수었고, 98년에는 핵잠수함에 들어가서 조종실을 부수고 그 안에서 파티를 하다가 잡혔다. 둘다 현장에서 잡혔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총맞을지도 모르는 이 위험천만한 상황을 겪고도 살아남아서는 법원에서 당당하게 ‘무죄’판결을 받았다. 무죄판결을 받은 이유는 둘다 국가의 행위가 불법의 여지가 있기 때문이었다. 전투기를 부술 당시 인도네시아는 동티모르를 점령하기위한 점령전을 벌이고 있었고 수많은 학살을 자행했다. 수출한 무기는 그 전쟁에 쓰일 게 뻔했고, 점령을 위한 일반인의 학살은 불법이다. 핵무기 또한 오랜 시간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안좋은 영향을 줄 수 있으므로 불법이라고 국제재판을 통해 입증됬다. 둘다 국가가 불법의 여지가 있는 사례들이고, 시민이 국가의 불법을 막는 건 의무이므로, 그들은 무죄를 받았다.(심지어 96년에는 판사가 ‘더 많이 부술수록’무죄근거가 강해진다고 말했다고 한다)
폭력은 뭐고, 비폭력은 뭐냐 일을 벌인 그녀에게 많은 언론/정치인들은 비난을 퍼부었다. 폭력적인 불법행위라는 이유에서였다. 그런데, 폭력이라는 말이 대체 무엇인가? 강연을 해주신 이대훈님(호칭이 싫다셔서..)은 강연당시 지금 강연을 듣는 것 만으로도 누군가에게 폭력을 저지를수 있다고 말했다. 불을 키기 위해서 사용하는 전기는 후손의 삶을 담보로 한다. 우리가 아무데나 구겨넣는 종이를 만들기 위해 원시림이 파괴된다. 원시림의 훼손으로 그곳이 삶의 터전이었던 누군가는 굉장히 고통스러운 삶을 살게 된다. 영국이 무기를 팔아서 돈을 벌고, 덕분에 많은 영국시민들의 삶이 나아지는 반면 무기로 인해 불행해지는 사람들의 삶은? 우리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다른 사람의 불행을 밟고 행복해질 수 있다. 망치를 들고 살상무기를 부수는 것만이 폭력이라고 말할수 있나? 세상은 폭력과 비폭력으로 말끔하게 나눠질수 없는 게 대부분이다. 또 사회가 운영되기 위해서 불가피하게 필요한 권력관계는 항상 폭력적일 수 있다. 평화적인 체제라고 인식되는 자유 민주주의도 마찬가지다. 다수의 의견이 받아들여진다면 소수의 의견은 무시당하기 마련이다. 그들에게 민주주의라는 제도 자체가 폭력적일 수 있다. 벤야민은 국가의 법 발달은 특정 폭력 억제를 위한 보편폭력의 독점이라고 했다. 시대나 체제가 바뀔 때마다 새로운 법이 제정되고 그 법으로 국가는 폭력을 사용하여 폭력을 통제한다. 법은 개인이 저지르는 폭력을 막기 위해 만들어 진 것이다. 하지만 개인보다 국가가 저지르는 폭력이 더 무지막지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이 저지르는 폭력은 용서되지 않는 중죄고, 국가가 저지르는 폭력은 당연하다는 듯이 넘어가는 현실.
해결하지 못한 문제 벤야민은 신적폭력을 이야기하며 ‘정당화 할 수 있는 폭력’을 이야기 한다. 신적폭력(=시원적폭력)은 최종심판과 개벽을 위한 폭력으로, 체제가 바뀔 때 일어난다. 과거의 체제를 바꾸기 위해서는 산발적이고 조그만 폭력으로는 안된다. 때문에 불가피하게 과거의 시기를 과격하게 부수고 파괴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4.19나 프랑스혁명을 예로 들 수 있다. 그 시기에는 많은 사람들이 공동의 인식상태를 가지고 뚜렷한 적을 부순다. 흔히 반란과 혁명은 한끗차이라고 한다. 혁명들은 대부분 당시에는 반란으로 간주되어 기득권에게 억압당한다. 하지만 몇십년이 지나고 역사는 그들을 혁명가들로 규정한다. 반란도 마찬가지다. 그당시에는 혁명이라고 외치며 성공했더라도 결국은 자신의 사익을 위해 무고한 사람들을 죽인 예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우리나라역사만봐도 숱하게 있어왔다. 이렇게 역사가 평가할 수밖에 없는 사건들을 어떻게 '시원적 폭력이다, 아니다'라고 규정할수 있을까. 그것 역시 역사에 맡겨야만 할까? 또 아직 풀리지 않은 문제가 있다. 국가가 명백한 불법을 저질렀을 때 과연 시민의 잘못은 없는걸까. 불법을 저지르는 권력자들은 대부분 대의민주주의를 통해 뽑은 사람들인데. 그들이 하는 일을 응원하겠다며 투표로 그들을 선발한 것 아닌가. 시민의 잘못은 분명히 있고, 그렇다면 그들은 이 체제에 문제가 생기는데 각자 한 몫을 담당한 거나 마찬가지다. 그런데 그들을 죽이거나 해를 입히는 것을 정당화 할 수 있을까.
글 : 신동은 수강생 (자원활동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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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정치의 고전으로 오늘을 읽는다 : 시민정치와 시민불복종 | 시민정치와 시민불복종 3강 -시민불복종과 직접행동 (5/29) | 놀이정신 | 2012.5.31 | |||
주권(主權) 〔명사〕내가 날 때부터 이미 가지고 있는, 내가 나일 수 있는, 내가 나답게 살아갈 수 있는 고유의 권리 1 강의를 듣고 집으로 돌아오며 후기로 쓸 제목을 이리저리 생각했다. 그리곤 전혀 제목답지 않은, 사전의 한 페이지를 닮은 이상한 놈을 하나 골라 떡하니 대문 앞에 걸었다. 심지어 그 사전적 정의의 내용 또한 내 마음대로 지껄여 놓았다. 네이버에서 찾은 것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 맞다. 난 네이버 사전에 개기고 있는 중이다. 뭐? 국가의 의사를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권력이 주권이라고? 흥! 웃기고 있네. 난 국가의 의사를 한 번도 최종적으로 결정한 기억이 없다. 그 최종적 결정들이 맘에 들지 않아 반대의 목소리를 내고자 할 때, 국가는 내게 한겨울의 물대포를 보냈다. 국가 단위는 고사하고, 내 개인의 의사를 최종적으로 결정하려는 것조차 온전히 나의 의지대로 하기 어려운 세상, 그렇게 내가 사는 세상은 주권 따윈 실현되지 않는 곳이다. 그래서였을까... 강의를 듣는 내내 유독 이 ‘주권’이라는 단어가 마음 언저리를 맴돌았다. 결국 우리가 불복종을 말하고 그것의 정당성을 찾으려 하는 이 모든 몸부림들은, ‘내’가 내 삶의 최종 결정권자가 되기 위함일 것이다. 해서 이미 나의 것이었고 앞으로도 그래야할, 너무도 당연한 그 권리가 침해받을 때... 난 한없이 개기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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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영상 출처 : http://youtu.be/SR8Y7tO8yrI
△ 동영상 출처 : http://youtu.be/hO8jgvglDyc 동영상 하나를 같이 보며 강의가 시작된다. 삼성전자 반도체공장에서 죽어간 노동자들에 관한 이야기였다. 어두워진 강의실에서 화면을 쫓고 있는 내 자신이 한없이 움츠려든다. 죽어간 이들의 명패가 주르륵 나열된 화면, 단 한 건의 산재도 인정하지 않는 삼성이라는 제국, 자식의 죽음을 부정당한 부모의 절규, 그리고 그런 차가운 현실에 등을 대고 누어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또 다른 사람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세상의 온갖 부조리함이 한꺼번에 가슴을 때리니 숨을 쉬기도 버겁다. 그 답답함은 강의 내내 지속되었고... 그리고 난 지금도 여전히 답답하다. 우리를 보호하라고 우리 손으로 만들어 놓은 정부가 정작 우리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정부는 왜 있어야하는 것인가? 정부가 막강한 권한을 앞세워 폭정의 길을 갈 때 그걸 막아달라고 만들어 놓은 법이, 그 법의 집행자와 해석자들이 정작 정부와 함께 미쳐 날뛰며 되려 우리의 목에 칼날을 들이댄다. 그렇다면 법의 존재이유는 무엇인가? 나에 의한 정부가 나를 부정하는 어마어마한 모순 앞에, 왜 내겐 그런 정부에 저항할 권리가 법으로 보호 되지 않는가? 더 이상 법이 일반 시민들이 거대한 국가권력에 맞서 싸울 때 손에 쥘 수 있는 ‘무기’가 되어주지 못하는 이 세상에서 그래도 우리는 여전히 그따위 법을 지켜내기 위해 비폭력을 이야기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그런 폭력적인 국가와 법은 과연 누가, 어떤 정의를 빌어, 어떻게 단죄할 수 있단 말인가? 꼬리를 무는 수많은 난제들 앞에서 난, 내가 처음 이 강의를 듣고자 했을 때 품었던 의문점들을 천천히 곱씹고 있었다.
3 선생님의 강의가 끝나고 조별로 수강생들의 토론 시간이 있었다. 문제는 늘 그렇듯,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였다. 각자 자신들의 이야기를 쏟아놓는다. 그들의 얼굴을 찬찬히 돌아본다. 어떻게 할까를 고민하고 있지만 이미 어떻게든 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동안 내가 들어본 정치의 개념 중 제일 맘에 드는 것이다. 완벽한 세상이 오지 않는 한 결국 우린 이 불완전한 세상과 불화하며 끊임없이 저항할 수밖에 없다. 그 과정이 곧 정치다. 랑시에르는 멋지고 유식하게 말했지만, 난 짧고 무식하게, 그러나 강렬하고 쉽게 말 할 수 있다. 결국 정치란 엿 같은 세상에 개기는 거라고, 시민정치는 그래서 곧 시민불복종일 수밖에 없는 거라고 말이다. 자신의 심장을 두드려 깨울 줄 아는 사람들과 함께 세상에 제대로 개기는 방법을 고민하는, 실로 무척이나 유익한 시간들이 흘러가고 있다. 글 : 박현아 수강생 (자원활동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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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정치의 고전으로 오늘을 읽는다 : 시민정치와 시민불복종 | 시민정치와 시민불복종 2강 -시민불복종은 불법인가 (5/22) | 신동은 | 2012.5.30 | |||
얼마전 반값등록금집회에 나간 대학생들에게 200만원의 벌금고지서가 날아왔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사람들 대부분은 ‘너무하다’고 했다. 등록금 400만원이 없어 거리에 나왔던 청년들에게 ‘반값고지서’라니. 그런데 저 벌금이 너무하다는 건 둘째치고,‘ 학생들이 한 행동이 불법인가?’ 라는 질문을 다시 해보자. 아마 불법이다 아니다, 여러 의견이 충돌할 것이다. 반값등록금 뿐만 아니라 다른 집회도 마찬가지다. 물론 반값등록금이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면서 반값등록금집회를 보는 시선이 달라지기는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로 장벽을 만들고 사이렌을 울리고 경고방송을 쉴새없이 내보내는 경찰들의 ‘불법집회를 하고 계십니다’라는 말에 동요하는 사람이 있는 것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이번 강의에서는 드워킨의 『법의 권리』와 롤즈의 『정의론』을 중심으로 시민불복종과 법에 대해 배웠다. 저서 내용의 체계적인 정리를 기반으로 책을 읽듯이 풀어나간 이번 강의로, 막연하던 시민불복종의 의미에 대해 배웠다.
1. 드워킨의 법의 권리 드워킨의 시민불복종론을 시작하자마자 교수님은 이번 강의에서 제일 핵심적인 지적을 한다. 바로 시민불복종이 사회적으로 도덕적인행위일지언정 법적으로는 허용될수 없다는 인식이다. 동기가 무엇이든 법을 어겼다면 처벌해야 모두에게 법을 공평하게 적용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틀린 지적이 아니므로 충분히 의미있는 문제다. 드워킨은 시민불복종이 법을 지키느냐 마느냐의 문제라기보다는 한발자국 더 나아가 근본적인 문제제기를 하고 있다고 본다. 시민들이 불법을 통해 그들의 사사로운 이익을 추구하려는 게 아니다. 불법을 통해 그 법 자체가 타당한지 아닌지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시민불복종에 대한 대표적인 예로 베트남 전쟁에 대한 징병 거부를 든다. 베트남 징병거부가 불법일수 있다는 논리에 맞서 징병 자체에 대한 헌법적 문제점을 제시함으로서 시민의 징병거부가 타당성을 가질 수 있다는 주장이다. 결국 시민불복종은 ‘의심없이 타당한 법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법 자체에 문제제기를 하는,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는 시민참여의 한 방법이다. 만약 시민이 어떠한 법에 대해 문제제기를 했지만 대법원의 판결이 시민의 의견과 달리 나오게 된다면? 드워킨은 아무리 헌법재판소에서 그 법이 타당하다고 결론지었더라도 개인적으로 타당하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그 법을 지키는데 소극적이어도 된다고 본다. 이러한 문제제기는 대법원의 권위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충성스런 반대’로서 대법원이 보다 합당한 결론을 내기 위한 과정중 하나다. 드워킨은 시민 불복종으로 인한 피해보다는 각자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는 권리가 더 중요하다고 본다. 때문에 시민불복종자들을 위한 정부의 배려가 있어야 한다. 검사는 시민불복종자를 기소하지 않는 것으로, 의회는 불복종자의 처벌을 완화하는 법령을 만드는 것으로, 법원은 불복종자들을 유죄판결 하지 않는 것으로 각자의 역할을 해야한다. 그렇지만 검사와 판사, 입법기관의 역할은 역할모델일 뿐이지 현실과는 약간 동떨어져 있는 듯 하다. 이러한 역할제시는 기본적으로 그들이 이 과제를 받아 들일거라 거라 믿는 신뢰가 먼저 있어야 한다. 아무리 ‘그래야 한다’고 이야기 하더라도 의무가 아닌 권유이기 때문에 기관이 시민불복종자들을 어떻게 대할지는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드워킨의 나라 미국은 잘 모르겠으나 한국은? 음.... 나는 잘 모르겠다. 어떤 악법도 날치기처리가 가능하고, 자본주의를 연구하는 동아리활동만 해도 국가보안법으로 잡혀들어가는 나라에서 검사 판사 국회의원을 믿으라니 씁쓸하다.
△ 로널드 드워킨 (출처:경향신문) 법철학 시민불복종론에서 드워킨과 맥을 같이하면서도 양대산맥을 이루는 학자는 존 롤즈이다. 드워킨은 책을 읽으면 이야기를 듣는것처럼 서사의 흐름이 있지만, 롤즈의 책은 개념과 목차를 중심으로 항목정리에 충실한다. 막상 읽을때는 잘 이해가가지 않지만, 하나하나씩 다 이해하고 나면 퍼즐맞추듯 깔끔하게 정리된다는 점에서 나름대로 특징이 있으니 책을 읽을 때 참고하고 보면 될 듯하다~ 2. 존 롤즈의 시민불복종론 위에서 말했듯이 롤즈의 시민불복종론은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있다. 드워킨과는 달리 롤즈는 시민불복종이 명백하게 불법(실정법에서)이라고 말한다. 그렇지만 제한적인 범위 내에서 시민불복종은 허용되어야 한다. 롤즈는 시민불복종이 정의의 제 2원리 가운데 기회균등의 원리를 침해하는 부정의에 대한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 부정의의 정도가 심각하여 계속적으로 국가와 사회 전체에 악영향을 주어야 시민불복종이 정당화 될 수 있다고 본다. 또한 개선 시도가 통상적인 입헌 절차를 통해 충분히 시도되었으나 전혀 개선이 되지 않았을 때 최후의 수단으로 시민불복종이 필요하다. 1강에서 소개했던 소로우는 개인이 생각하기에 부당한 점을 변화시키기 위해 가능한 모든 노력을 벌인 후에, 아무것도 변화하지 않았을 때 최후의 수단으로 폭력을 쓸수 있다고 말했다. 반면에 롤즈는 폭력이 수반된다면 시민불복종의 범위를 넘어선다고 본다. 폭력은 시민불복종의 본질을 침해한다. 정말 폭력적이고 기본적으로 부정의한 체제로 개인에게 폭력을 가할 경우의 폭력적 시민불복종은 정당방위지만 역시 시민불복종이라기보다는 저항권의 정당한 사용이라고 본다. 시민불복종의 수단으로 다른 행정법규를 위반하거나 하는 방법을 통해 악법의 부당함에 대해 계속적으로 호소는 할 수 있지만 비폭력성을 끝까지 유지하여야 한다. 강의를 한 후 질문시간까지도 ‘폭력이 시민불복종으로 허용될수 있는가’에 대한 논의가 계속되었는데, 무엇보다 기억에 남았던 것은 정태욱 교수님의 의견이었다. 대법원장을 임명하는 대통령이나, 입법을 하는 국회의원 역시 유권자들이 투표를 통해 결정했으므로 만약 그들이 제대로 하지 못해 문제가 발생한다면 책임의 일정정도는 시민들에게 있을 수 있기에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정당하지 못한 행위라는 말이었다. 사실 롤즈가 말하는 국가에서 생기는 지속적이고 치명적인 부정의란 국가의 구성원인 시민이 모른척할 때 생길 수 있다.
학계에서는 드워킨과 롤즈를 자유주의자라 말한다. 자유주의자는 우리나라에서는 보통 (시장)자유주의자를 말할 때 쓴다. 금융이나 시장의 법적규제를 풀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말하고 부정적으로 쓰일 때가 많다. 하지만 정태욱 교수님이 말하는 철학적 자유주의란 자기한계를 스스로 인식하는 체제다. 어떤 사회나 국가도 스스로가 완벽할 수 없음을 인정하며 그렇기 때문에 권력을 사용하는 데 신중해야 한다. 또한 개인의 문제제기가 타당할수 있으므로 개인이 신념대로 행동할 권리를 허용한다. 드워킨과 롤즈의 시민불복종론, 필요할 때만 자유를 내세우는 우리사회의 일부 구성원들이 생각해봐야 할 지점이다. 글 : 신동은 수강생 (자원활동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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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민중항쟁 32주년 기념특강 : 오월은 다시 창조적 고통이 필요하다 | 5.18특강 - 오월은 다시 창조적 고통이 필요하다 (5/18) | 느티나무 | 2012.5.24 | |||
[참여연대 아카데미느티나무 5.18 민중항쟁 32주년 기념특강 후기]
밥상공동체로 지켜낸 항쟁
△ 화가 홍성담이 말하는 '오월은 다시 창조적 고통이 필요하다' 특강(사진=참여연대) 강의에 앞서 홍 선생님께서는 본인의 5.18 판화가 전시되고 있는 세계의 여러 미술관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언급했는데 듣다보니 정말 많았습니다. 만약 홍 선생님께서 보통 작가였다면 개인의 자랑처럼 느껴졌겠지만 평생을 광주를 주제로 작품 활동을 하신 홍 선생님께서 판화를 통해 말하고자 했던 5.18의 의미를 생각하니 오히려 듣고 있는 제가 더 뿌듯했습니다. 본격적인 강의가 시작되고 선생님께서는 약 50여 점에 달하는 본인의 5.18판화를 PPT로 보여주며 당시의 상황 설명을 해주셨습니다. 특히 ‘유신잔재 척결 대회에 모인 사람들’이라는 판화에서는 모인 군중 한명 한명의 사연과 포즈를 설명해주셨는데, 그 동안은 미처 보지 못했던 부분들까지 사실적으로 그리고 때로는 해학적으로 표현되어 있었습니다. 설명을 다 마칠 때 쯤, 선생님께서는 ‘시체를 끌어안고 있는 사람’이라는 판화에 가장 애착이 간다고 말씀해주셨는데요. 한 외국인으로부터 '시체의 발을 끌어안고 있는 모습에서 시체의 발만 보이는 것도 이례적이지만 그 발이 하얗게 표현된 것이 더욱 인상 깊었다'는 평을 받고난 후 더 애착이 가게 됐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선생님의 설명을 듣고 나니 판화에 나오는 인물 하나하나가 서로에게 말을 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Episode1 첫 번째 에피소드는 밥상에 얽힌 이야기였는데, 항쟁 초기 시민군과 운동권간의 갈등을 해결했던 촉매제 역할부터 광주항쟁 기간 동안 밥이 어떤 역할을 했었는지 설명해주셨습니다. 특히 광주항쟁 당시 총이 5천개 이상 풀렸는데도 불구하고 총기사고, 오발사고, 절도강도사건 하나 없었던, 인류역사상 벌어진 민중항쟁 가운데 도덕적으로 가장 완벽했던 항쟁(어디서 많이 들어 본 표현이죠?)이라고 하시면서 그렇게 되기까지 '광주 여성들이 내 놓은 밥상'이 큰 역할을 했다고 강조하셨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이를 두고 '밥상공동체로 지켜낸 항쟁'이라고 표현하셨습니다. Episode2 두 번째 에피소드는 '당시 부산에 정박한 미 항공모함'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Episode3 세 번째 에피소드는 '도청 진압 이후'에 대한 얘기였습니다.
△ 특강 중인 화가 홍성담 선생님 (사진=참여연대) 이후 간첩죄로 피고인 신분이었던 홍 선생님과 대법관이었던 이회창씨와 인연, 아시아인들이 K-POP에 열광하는 이유, 등 80년대를 넘어 90년대 2000년대 이야기들을 해주셨고 마지막으로 광주 5.18민중항쟁의 의의를 "광주는 시민을 탄생시켰다!", "현대의 시작을 알렸다."라고 정리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의미는 아시아 전체의 민주주의에 큰 영향과 교훈을 주었다고도 덧붙이셨습니다. "참여연대도 공동체적 성격이 강화되어야 합니다." 강의가 끝나고 못다한 얘기를 나누는 시간에는 그동안 참여연대 느티나무의 강좌에 참여했거나, 참여연대 회원들이 "나 자신이 겪은 5.18, 그것이 지금 나의 삶에서 어떤 의미인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밤늦도록 때로는 진지하게 때로는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다가 한 분이 여행지에서 당일 가져온 주먹밥과 어묵을 나누어 먹었습니다. 광주항쟁이 하나의 밥상공동체였다고 하는데, 역시 뒷풀이시간에도 이렇게 아주 맛있는 걸 나눠먹으니 분위기가 더욱 좋았습니다.
글 : 아카데미느티나무 천웅소 간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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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 그 매력과 두려움 | 공동체 5강 - 사례 : 청년 이그나이트 그리고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코리아 (5/14) | 느티나무 | 2012.5.21 | |||
공동체란 나에게 허상에 가까운 단어다. 실제로 실체가 없기도 하고 정확한 정의를 잘 모르겠기도 하고. 막연하게 드는 느낌은 ‘설레임’보다는 ‘두려움’에 가깝다. 주위에서 쉽게 접할수 있는 사람의 집단이지만 워낙 개인주의가 사람들에게 익숙해져있는 시대라 어딘가에 소속되어있음을 속박으로 생각하는 이들도 많다. 이런 사회에서 어딘가에 완벽한 공동체를 꾸리기란 가능할까? 공동체에 대한 막연한 고민들만 머릿속에 떠오르던 나. 아쉽게도 5강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듣게되었다. 다음시간(6강)에는 실제로 공동체를 만들기 위한 구체적인 계획을 세운다고 하니 논의가 상당히 진행되어 있는 듯. 이번 강의는 마지막 사례발표로, 청년 이그나이트와 온라인 협업공동체 크리에이티브 커먼즈(Creative Commons, 이하CC)에서 각각 한명씩 참여해 자신의 공동체를 소개했다. 1. 청년 이그나이트 ‘전태일을 계승한다’는 말을 듣고 살짝 오해했다. 운동권임을 티내기 위해 그런 줄 알고. 우리 사회에서 ‘운동권’이라는 단어는 그 한마디로 공동체를 규정한다. 경험해 볼 것도 없이 저사람들은 뭔가 꿍꿍이를 가지고 있다는. 그러니 굳이 티를 낼필요는 없을텐데. 왜? 섣부른 걱정과는 달리 좀더 인간적인 의미의 전태일정신을 본받고 싶다는 청년 이그나이트의 대표 김선경씨. 자신의 버스비를 힘들게 일하는 여공들에게 풀빵을 사주는 데 쓰고 자신은 몇시간이 걸려 집까지 걸어갔던 그 마음을 계승하고 싶다고 했다. 혼자 살지 않고 타인과 나누려는 마음. 경쟁에 내몰려 남을 돌아보지 못하는 청년세대가 경쟁에서 벗어나 좀더 인간적인 삶을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할 것이다. 그러려면 우선 청년의 문제를 해결할 필요가 있다. 미친듯한 실업률 높은 등록금등등. 이러한 문제를 청년들이 힘을모아 해결해나가기 위한 단체가 청년 이그나이트다. 2009년, 같은 고민을 가진 5명이 모여 제일먼저 한 일은 카페를 만든 것. 모임 공간을 만들기로 결심하고 참고한 모델은 오바마 대통령 당선의 주역이었던 ‘커피파티’와 ‘마을회관’.마을회관의 발상이 참신했는데, 시골의 마을회관처럼 뭐든 필요한 것들이 다 있는 곳을 만들고 싶었다고. 그런 공간을 만들기 위해 청년들은 한푼 두푼 모아 종로 한복판에 카페를 마련했다. 이후 카페를 기반으로 다양한 활동을 했다. 여러 세미나와 선거참여운동, 재개발지역 마을꾸미기 등등. 그들의 취지에 공감, 일을 함께하는 사람들은 5명에서 50명으로 늘어났다. 그는 이번해를 시즌2로 정의하며, 구성원과의 소통을 어떻게 잘 할 것인가, 재정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에 대한 대안을 찾을 예정이라고 했다. 개인적으로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집합할 공간을 가진다는 건 매우 중요한 일이라 생각한다. 같이 모여 이야기할 공간이 없으면 그 공동체는 너무도 쉽게 해체 위기에 내몰린다. 약속하지 않으면 만나지 않는 관계를 맺기 때문일까. 언제나 항상 사람들이 서로에 대한 생각만 하는 건 아니니까. 공유하는 공간이 있다면 그래도 조금은 안심할 수 있다. 아무 때나 그 공간에 가면,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항상 있다니 생각만해도 소속감이 생기지 않는가. 또 그 공간을 기반으로 주위의 지역사회와 교류할수 있는 기회도 생긴다. 그런 점에서 카페를 만들었던 일은 탁월한 선택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여러 가지 좋은 점에도 불구하고 공간을 가진다는 것은, 돈이 없으면 엄두도 내지 못한다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용기를 내서 공간 만들기를 실행한 이그나이트 역시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수입이 안정적이게 자리잡았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월세와 세금 등등으로 인건비를 마련하진 못한다. 언젠가 내가 아는 가난한 활동가 언니와 공동체를 위한 공간에 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그때 그 언니는 공동체 주택을 운영하는 게 평생의 ‘꿈’이라고 했다. 지나가다가 서있는 허름한 빌라를 보면서 입맛을 다시며 하는 말, “저 땅이라도 가지고 있으면 뭐든 할 것 같은데..”. 재벌들은 너무도 쉽게 가지고 있는, 공간이 없어 공동체에 대한 열망은 여전히 그녀에겐 꿈이다. 2.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코리아(Creative Commons Korea, 이하CC) CC의 사례발표는 나에게 뜻밖의 충격이었다. 공동체라는건 고정된 사람들이, 끈끈한 유대감을 바탕으로 지속된다는 나의 편견을 산산조각내주었기 때문이다. 마을공동체 붕괴 이후의 세대인 젊은이들은 예전 어른들처럼 태어날 때 부터 소속되어있는 공동체가 없다. 그러다보니 주로 스스로 공동체를 찾아나선다. 이는 현실세계 뿐 아니라 가상세계인 인터넷에서도 마찬가지다. 네티즌들은 여러 동호회, 커뮤니티들을 통해 비슷한 흥미나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찾아다닌다. CC는 이런 인터넷 환경을 기반으로 만들어졌다. 사실 CC라는 단체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 듣는 나로서는 그들이 하는 일을 이해하기에 좀 어려웠다. 주로 온라인 컨텐츠 저작권 문제에 관련된 일을 하는데, ‘저작자 권리를 보호하면서도 저작물 전파에 제약은 없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를 기반으로 내놓은 저작권 규약이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이하 CCL, Creative Commons License)다. CCL은 아직 한국에서 공식지정된 규약은 아니지만 외국에서는 훨씬 널리 쓰이고 있다고 한다. 하는 일도 다소 생소했지만 조직이 운영되는 방식도 생소했다. 온라인 협업 공동체이므로 일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빠르게 모이고, 일을 한다. 예를들어 ‘저작권 관련 외국 원서 번역’이라는 일이 있으면 하고싶은 사람들이 모여서 함께 일을 하는 식이다. 일을 하면서 마음이 맞는 사람들은 모임을 만들어서 공부를 하기도 하고. 또 CC의 멤버가 다른 곳에 가서 중심이 되어 공동체를 만들기도 하고. 쉽게 모였다 흩어지는 인터넷 환경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공동체라서 그런지 결집과 해체가 자유로운 것 같았다. 느슨한 집단도 공동체로 볼 수 있을 것인가, 좀더 구성원의 다양성을 인정 할 수 없을까, 변하는 구성원들 속에서도 좀더 끈끈한 유대관계를 가져갈 방법이 없을까 등등... 주요 업무에 대한 이야기만 들었을 때는 공동체인가? 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가 고민을 들으며 공동체구나! 라고 생각했다. 관계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노력, 이를 위한 여러 가지 시도들이 보여서다. 사무처와 상근자를 만들기도하고 없애보기도 하고, 서로 평등한 소통을 하기 위해 회의방식을 바꿔보기도 하는 등 여러 가지 시행착오를 통해 지금의 CC가 만들어졌다. CC나 이그나이트, 각각 공동체의 특징은 있겠지만 그들의 고민은 모든 공동체가 현재 하고있는 고민일 것이며 미래에 할 고민일 거다. 이번 수업은 수강생에게 실제 공동체 운영에 따른 고민을 한번쯤이라도 미리 생각해 보는 기회를 가지게 했다. 공동체를 꾸려나가는 과정은 분명히 다사다난하고 순탄치 않은 과정이다. 하지만 이 경험과 과정은 쓸데없는 게 아니라 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각자 삶의 궤적이 한군데에서 만나고, 그것이 함께 뻗어나가는 과정일테니까. 후기작성 | 신동은(자원활동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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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으로 읽는 이슬람 사회와 문화 | 문학으로 읽는 이슬람 6강 - 황금마차는 하늘로 오르지 않는다 (5/9) | 칸쵸 | 2012.5.18 | |||
[문학으로 읽는 이슬람 사회와 문화 6강]
참여연대 느티나무 아랍문학 마지막 강좌는 살와 바크르의 책 ‘황금마차는 하늘로 오르지 않는다’로 진행되었다. 살와 바크르는 이집트의 페미니즘 여성 작가이다. 기존의 아랍 여성 작가들의 일반적인 페미니즘 경향은 남성의 억압이 여성 고난의 근본 원인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살와 바크르는 여성 고난의 원인이 남성 중심 사고와 사회적 가치관을 비판 없이 인정하는 남녀 모두에게 있다고 생각했다. 그의 작품들에는 주로 하층민에 속하는 여성들의 고난을 형상화되어 있다. 그러나 그 고난의 원인을 규명하고 남녀 간의 투쟁이나 남성에 대한 여성의 적대적 태도를 지향하기보다는 여성 인격을 폄하하는 사회 관습과 가치관 개혁을 통해 남녀 해방이 이루어지는 것을 그리고 있다. 이 소설에 나오는 15명의 여성 재소자들은 단지 범죄를 저지른 가해자가 아니라 남성 중심의 가치관에 희생된 희생자이기도 하다. 그들이 정상적인 삶의 범위를 벗어나 교도소에 오게 된 이유는 남성들의 폭압, 권리 침해 같은 계기가 있었던 것이다. 이는 작가 살와 바크르가 바라보는 여성문제, 사회문제를 가장 분명하게 드러내주는 구체적인 예가 되고 있다. 지난 5강에 이어서 강의를 진행해 주신 김능우 선생님께서는 책에 대한 설명에 앞서 이집트 여성 문학의 발전과정과 여성해방 운동의 전개 과정을 함께 설명해주셨다. 이집트의 여성문제에 대한 인식은 19세기 후반 시리아를 중심으로 일어난 아랍문예부흥 운동과 무함마드 알리의 현대화 계획에 힘입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리고점차 여성 교육이 증가함으로써 자신들의 문제를 인식하지 못했던 여성들의 의식은 깨어나게 되었다. 작가 살와 바크르에게도 글쓰기는 단지 억눌린 감정을 발산하는 통로만이 아니라 더 나은 세상을 구축하는 하나의 방법이자 도구로 작용했다. 수업이 끝나고 1층에 있는 까페 통인에서 김능우 선생님과 함께 하는 뒷풀이가 이어졌다. 수강생들은 대부분이 여성이었고 그래서 그런지 책 내용에 공감하는 분위기가 쉽게 형성되었다. 남성들에게 핍박을 받았던 여성들의 복수가 통쾌하게 들렸다는 의견도 있었다. 이집트에서 여성문제를 제기한 남성 지식인들 중 하나인 까심 아민 (1863~ 1908)은 근본적으로 여성은 남성과 동등하다고 말했고 여성의 참여 없이 이집트는 문명국가로 나아갈 수 없다고 말했다. 그로부터 1세기가 지났지만 여성은 여전히 소수 집단으로 존재하고 동등하게 대우받지 못한다. 그러나 살와 바크르가 생각했던 것처럼 이 문제들은 여성들이 연대해서 남성에 대항하는 방식만으로 해결 되기는 힘들 것이다. 또한 페미니즘이 하나의 권력 집단이 되는 것도 또한 페미니즘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글 : 최혜진 수강생, 자원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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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정치의 고전으로 오늘을 읽는다 : 시민정치와 시민불복종 | 시민정치와 시민불복종 1강 -소로우가 생각한 시민불복종은 무엇인가 (5/15) | 느티나무 | 2012.5.17 | |||
<시민정치와 시민불복종> 1강- 소로우가 생각한 시민불복종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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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먼저 인간이어야 하고, 그 다음에 국민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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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제목조차 잘 기억나지 않지만, 예전에 간디와 관련된 책을 읽은 적이 있다. 그의 삶이 모순적이라 느껴졌고 그 때문인지 예상했던 것보다 큰 감명을 받진 못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기억에 남는 건, 그가 보여준 비폭력 저항운동이었다. 소금을 구하기 위해 바다까지 걸어가는 간디와 그의 뒤를 따르는 기나긴 행렬 그리고 그들의 머리위로 떨어지는 가차 없는 몽둥이질. 그렇게 맞고 터지고 피흘려가면서도 누구하나 부당함을 소리쳐 외치지 않는 그 괴이한 침묵의 저항을 바라보면서, 난 무엇보다 당혹감을 느꼈다. 정의롭다거나 평화적이라거나 그런 지고지순의 가치와는 먼, 이건 아니지 않는가 하는 참담함이 먼저였다.
저항.
이 단어를 들을 때마다 연달아 떠오는 비폭력, 불복종이란 말들이 그래서 내겐 여전히 명백하지 않는 형태로, 판단이 유보된 상태로 내 삶에서 비껴나 있다. 이 강의를 듣기 시작한 건 그래서였다. 무엇이 불복종이고 무엇이 저항인가, 비폭력은 항상 올바른 것인가, 폭력을 동반하는 저항은 비난받아 마땅한 것인가... 이제 유보된 판단을 불러들일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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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시간은 소로우의 이야기다. ‘월든’의 작가로만 익숙한 그가 실은 처음으로 불복종의 개념을 제안한 사람이었다는 조금은 쇼킹한 사실. 그리고 이어지는 그가 남긴 유명한 말,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실천하며 사는 것, 이것은 곧 내가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에는 저항해야 한다는 명제와 연결된다. 이것을 좀 더 확대시키면, 잘못을 저지르는 정부에게 는 고집스럽게 맞서야 한다는, 그렇게 우리의 삶은 올바르지 않는 것들과 끝내 타협하지 않는 것이어야 한다는 실천적 강령이 된다. 결국, 내 삶을 내 의지대로 살며 자신의 존엄을 스스로 지키려하는 자는 ‘불복종’의 길을 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결점 없는 정부, 순도 백의 정의로운 사회란 앞으로도 영원히 없을 터이니 말이다.
이처럼 ‘불복종’은 다만 복종하지 않는다는 수동의 의미가 아니라, 우리가 우리의 삶을 우리의 의지대로 살 수 없게 만드는 이 사회의 폭력적 시스템에서 풀려날 수 있게 대화의 길을 모색하고 구체적인 저항의 활동을 벌이는, 무척이나 적극적인 능동의 의미이다. 나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상대나 세상을 향해 저항하거나 맞서지 않는다는, 그런 좀 이상하고도 논리적이지 않는 이야기가 아니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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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무엇이 저항인가? 대체 어쩌란 말인가?
소로우는 이렇게 답한다.
그리고 그는 이어서 이런 말도 했다. 악을 뿌리 뽑는 데 자신을 받치는 것이 의무는 아니지만 그러나 적어도 악에서는 손을 떼어야 한다고. 악을 뒷밭침하는 일은 하지 않는 게 사람의 의무라고, 그렇게 우리는 다른 사람의 어깨를 밟고 올라서는 일은 하면 안 된다고 말이다. 그가 꿈꾸는 좋은 삶은, 내 삶이 나의 의지대로 흘러가는 것, 그를 위해 남을 짓밟는 짓은 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삶이 불가능하게 하는 것들, 그 악의 축을 향해 복종하지 않고 저항하는 것이다.
이런 삶을 실험하기 위해 그는 윌든으로 갔다. 호숫가에 허름한 오두막 하나를 짓고, 먹을 만큼만 생산하고, 최소한의 소비를 하며, 남는 시간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들로만 채웠던 그 소박하고 간결한 삶 앞에서 난 신의 자리 가까이에 다가간 자의 모습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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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든 호숫가로 갔을 때, 소로우의 나의 28세였다. 강의를 맡아 주신 하승우 샘이 덧붙이신다. 불복종, 저항 이런 거 많이 배우고 다 커서 준비가 충분히 된 다음에 하는 거, 그런 거 아니라고... 맞다. 자신이 스스로를 가치 있게 여기고 그 존엄을 지켜내는 삶을 살고자할 때, 결국 우리는 일어나 싸우게 되는 것일 게다. 내가 여기 있다고,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알리며, 각자 자신의 삶터에서 걸어 나오는 그 모습이 ‘시민불복종’의 진짜 얼굴일 것이다.
그래서 역사 속에서, 농민들은 낫과 곡괭이를 들고 일어섰으며, 노동자들은 기름에 전 옷과 굉음을 내는 기계차를 몰고 거리에 섰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생각나는 게 있다. 나도 내 삶터에서 들고 일어나 거리로 나가야했기에 몇 년 전 종로 시위 현장에 큰 아이를 태운 우모차를 몰고 나간 적이 있다. 그 모습 그대로가 나의 정체성일 테고, 나의 삶이였을 것이다.
시위현장에서 얼굴도 낯선 이들과 함께 구호를 외치다가도 때가 되면 아이의 입에 젖병을 물리고 한데서 기저귀를 갈아야 했던, 그 날것의 삶 그대로 말이다.
그 아이가 이제 커서 초등학교 4학년이 되었다. 그리고 때때로 난 아이에게 이런 이야기를 한다.
그러고 보니, 잘 몰라서 그렇지 그동안 참 불복종의 삶을 꾸준히 살아왔던 것 같기도 하다.
다음 강의는 한나 아렌트다. 소로우가 개인의 양심을 중요하게 인식한 것에 비해 한나 아렌트는 양심의 문제로만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라는 주장을 한다하니....
다음 강의 또한 무지하게 기대된다.
후기작성 : 박현아 수강생, 자원활동가
강의자료 : 강의자료_시민불복종_1강.pdf
월든(Walden) 북트레일러 ☞ http://youtu.be/IN5vEU8XzT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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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서 저자와 함께 읽는 한국 근현대사 Ⅰ | 한국근현대사 4강 - 갑신정변의 길을 따라 걷다 (4/28) | 느티나무 | 2012.5.14 | |||
“자, 오늘 여러분은 저와 함께 갑신정변 군이 되어 그 길을 따라가 보는 겁니다.”
참여연대 교과서 저자와 함께 읽는 한국 근현대사 4강은 ‘갑신정변의 길을 따라 걷다’라는 제목의 답사로 진행되었다. 야외수업을 참여하는 수강생들의 눈빛은 초롱초롱했다. 화창한 날씨였다.
갑신정변은 1884년 음력 10월 17일 우정총국의 낙성을 기념하는 축하연을 틈타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서재필 등 젊은 양반 관료들이 메이지 유신을 모델로 하여 일으킨 정변이다. 이들의 계획은 지금 풍문여고 자리인 안동별관에 화재를 일으켜 소동을 일으키고 전,후,좌,우 군영의 4영사를 죽이면서 시작되는 것이었으나 화재가 생각보다 쉽게 진압되자 민가에 불을 지르면서 거사를 시행하게 된다. 이때 축하연에 참석했던 민영익은 밖에 나갔다가 일본 무사에게 변을 당하였다. 그는 중상을 입었지만 다시 연회장으로 들어왔고 그 때 연회장에 있었던 독일공사 멜렌도로프는 그를 자신의 집에 옮기고 미국 의료 선교사 알렌의 치료를 받게 한다. 그는 몇 달 뒤 완쾌된다.
갑신정변군은 우정총국에서 창덕궁에 가기 전에 일본 공사관으로 향했다. 그 이유는 일본공사에게 자신들의 거사에 지원을 해줄 수 있는지에 대한 확답을 받기 위해서였다. 그 당시 갑신정변을 주도한 급진 개화파는 일본의 지원 없이는 움직이기가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 일본 공사관은 예전 공사관이 임오군란 때 전소되었기 때문에 부마 박영효의 집을 쓰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 위치는 현재 인사동 안에 있는 경인 미술관 자리이다. 이곳에서 일본 공사에게 병력 지원에 대한 확약을 받은 갑신정변군은 비로소 창덕궁으로 향한다.
갑신정변군은 금호문을 거쳐 숙장문, 합문으로 들어가 고종에게 청이 쳐들어 왔다는 거짓보고를 하고 자신들은 고종을 보호하기 위해 왔다고 한다. 고종은 철종의 부인인 왕대비, 효명세자의 부인인 조대비 등 왕실 식구들을 거닐고 금호문으로 빠져나가 정변군의 비호를 받아 경우궁으로 향한다.
개화파의 입장에서 경우궁은 창덕궁에 비해 규모가 작기 때문에 왕실 가족을 감시하기엔 훨씬 더 수월한 곳이었다. 그 당시 왕이 자리를 옮기면 신하들은 알현을 하게 되어있었는데 정변군은 경우궁에 고종에게 알현을 하러 온 신하들을 한 사람씩 죽였다.
그러나 경우궁은 생활공간이 아니라 순조의 생모 수빈 박씨의 사당으로 죽은 이의 혼을 모신 곳이었기에 생활하기에 매우 불편했다. 왕과 왕비는 계속해서 환궁을 요청했지만 개화파는 들어주지 않았다. 그러나 일본 공사는 개화파와 상의도 없이 이를 수용했고 왕과 왕비는 다시 창덕궁으로 돌아간다. 정변이 일어난 그 다음날 저녁이었다.
셋째 날, 창덕궁에서는 전투가 일어났다. 일본군과 청나라 군대와의 싸움이었다. 이 때 조선의 병사들은 우왕좌왕하다 청나라의 편에 서서 일본군과 싸웠다. 정변군이 일본으로부터 병력을 지원받았다고는 하지만 실상 이때 들어온 일본군은 300명이 채 되지 않는 숫자였다. 일본군은 수적인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후퇴하고 이 때 고종, 홍영식, 박영교는 북관묘로, 왕비, 대왕대비, 세자는 북문으로 피신한다. 그리고 개화파 일행은 거사에 실패하고 일본으로 망명을 가게 된다.
급진 개화파들이 일본에게 도움을 요청했던 이유는 그들의 지지기반이 취약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일본 정부가 정변 개입을 승인하지 않는다는 훈령을 받게 되자 정변군은 힘을 잃고 결국 정변은 실패하게 된다. 그러나 거사가 실패한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그들이 백성들의 호응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백성들에게 갑신정변은 급진 개화파가 외세를 끌어 들여 국왕을 속이고 중신을 죽인 것으로 여겨졌다. 그만큼 개화파는 권력을 장악하는 것에 급급하여 백성들의 지지를 얻지 못했고 백성들은 그들에게 적대적인 반응을 보였다.
갑신정변은 3일 천하라고들 말한다. 급진 개화파들은 그들이 정변만 일으키면 조선이 근대 국가가 되는 양 무리하게 거사를 거행했지만 그들의 천하는 그들이 왕과 있었던 3일 밖에 지속되지 못했던 것이다. 치기어린 꿈이었다.
참여연대 4강 답사는 개화파의 이루지 못한 개혁의 꿈을 좇아 우정총국에서 일본 공사관으로, 마지막으로 창덕궁에서 일정이 마무리 하였다. 주진오 교수님은 “내가 어떤 생각을 하는 것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에 사람들의 공감을 얻으려는 노력이 없다면 소용이 없는 것이다”라고 말씀을 끝맺었다. 공감을 얻는 것의 중요성은 시공간을 뛰어넘어 여전히 우리에게 중요한 화두로 남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후기작성 | 최혜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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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 그 매력과 두려움 | 공동체 4강 - 문래동 예술인 마을, 용산 빈집 공동체 사례 보기 (5/7) | 느티나무 | 2012.5.10 | |||
<공동체, 그 매력과 두려움> 4강 후기 누군가는 또 다시 누군가와 만나게, 그렇게 돼 있다. 아니라고? 음.... 아님, 말고..... 벌써 강의가 네 번째 시간을 맞았다. 첫날 품었던 공포심과 의문들... 그것들을 잘 기억하고 매 강의에 들어갔다. 그건 공식을 대입해서 풀어내야 하는 수학문제 그런 것의 일종이었다. 문제가 있으니, 해결 공식이 존재할 것이고 그렇다면 답 또한 있을 터이니, 강의 중간 중간 흘려질 공식들을 잘 잡아내서 멋지게 답을 맞춰내리라... 아, 이 범생이의 자세! ㅋㅋㅋ 근데 강의를 듣다보니 커다란, 실로 커다란 문제가 발생했다. 처음에 ‘문제’라고 상정하고 시작했던 것들, 그것들이 사실은 그리 문제가 될 게 없더라는 것. 이러면 공식도 답도 구하기 어려워진다. ‘함께 살아가는 것’에 대해 밖에서 내내 구경만 하던 사람들이 만들어 낸 공포심이 점점 부풀려졌던 것, 그것이 첫 강의 때 제시되었던 각종 문제와 의문들의 실체가 아니었나 한다. 개인의 자유가 어떤 식으로든지 침해당할 것이라는 뭇사람들의 우려 또한, ‘그럼 넌 함께 살지 않는 관계로 무한히 자유로우냐?’라는 반문 앞에서는 할 말을 잃는다. 즉, 첫날 제시되었던 숱한 문제점들과 의문들의 성이 와르르 무너졌다는 게 지금까지 내 입장이다. 그 문제들이 사라지게 된 이유는 어찌 보면 무척 단순하다. 공동체든 아니든, 사는 건 다 지지고 볶는 거, 딱 그 수준인 관계로 공동체 안에서도 서로 미워하고 욕하고 싸우고 뒷담화가 무성하다. 제일 겁나는 건 누군가 삐지는 일이고, 그동안도 문제가 많았고 또 지금도 새로운 문제들이 끊임없이 생겨나고 있다. 하여 어쩔 수 없이 누군가는 욕먹고 누군가는 상처를 받는다. 공동체도 그렇게 산다. 뭐 더 폼 날 것도 더 도덕인 삶일 것도 없다. 단, 좀 더 재밌기는 하다. 그러니, 강의를 들으며 발견해 낸 공식과 해답은 더할 나위 없이 명료하다. 그게 바로 사는 거라는 거! 공동체라고 다르지 않아. 하고 싶은 일이 생기면, 하고 싶은 놈이 나서서 하면 되는 거고, 문제가 생기면 만나서 얘기하면 되는 거고, 그래도 해결이 안 되면, 뭐 어쩔 수 없는 거고.... 그렇게 흘러간다. 아! 여기서 발견한 공동체의 ‘위대한 정신’은 바로 이것이다. ‘아님, 말고.... ’ 이 너무도 적절한 삶의 자세 앞에서 지금 난 잠시 할 말을 잃고 있다. 근데, 이건 사실 2강 때, 성미산 마을 이야기를 들으며 느낀 점들이다. 그리고 난 4강의 후기를 쓰기로 돼 있다. 그러니 이젠 그걸 쓰자. 문래동예술인마을 : 철공소 노동자들과 예술가들의 만남 예술가들은 어느 시대나 그렇게 가난한 걸까? 문래동예술인마을을 일군 한 무리의 예술가들도 예외 없이 가난했다. 작업공간이 필요한 그들은 문래동에 빈 공간들이 있다는 말을 듣고 불법적으로 점거하기 위해 들어왔다. 이른바 스쾃이다. 자본주의 하에서 ‘공간’이 지나치게 사유화되고, 있는 자들에게만 편중되어 있다는 것이 스쾃의 문제의식이다. 근데, 와보니 점거를 할 필요가 없었다. 임대료가 너무 쌌다. 20평 남짓한 공간이 보증금 200에 월세 20만원... 이러니 불법은 불필요해졌다. 얼마든지 합법적으로 예술해도 괜찮은 조건이 아닌가. 그렇게 예술가들은 문래동에 자리를 잡았다. 그 이후... 너무도 많은 일들이 그곳에서 벌어졌기에 여기서 일일이 다 설명하는 건 불가능하다. 재개발 문제를 가지고 지역민들과의 마찰도 있었다. 철공소 노동자들과 함께 산악회도 꾸리고 있다. 텃밭 사업도 하고 지역 아이들과 함께 문화예술 수업을 하기도 한다. ‘문래예술공장’이 들어서기도 했다. 그 운영방식에 대해서도 말들이 많고 풀어야할 문제들이 산재해 있다. 강의를 직접 해주셨던 김윤환(예술과 도시사회연구소)씨는 조합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철공소 단지를 포함한 예술마을을 가꾸는 목적의식적 결사체인 예술생산자조합... 그런 조합이 만들어진다면 문래예술공장도 예술인들의 손에 의해서, 마을의 손에 의해서 운영될 수 있을 것이다. 문래동에서 작업하고 있는 예술가들은 개별적 관계망을 가지고 움직인다. 소통구조도 제각각이어서 생산의 시너지가 약하다. 이 네트워크를 조합의 형태로 묶어내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그래야 창작네트워크가 스스로 사이클을 만들어내 ‘문래동표 물건(작품)’이 탄생하게 될 것이라고... 이런 생각을 말하고 다니는 그는 예상대로 욕을 많이 먹고 있었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그를 의심한다. 너, 문래예술공장을 차지하고 싶은 거지? 공동체... 참 힘들다. 공동체에서는 나서서 무언가를 제안하는 사람들이 먼저 총 맞는 구조인듯... 이게 사람들이 말하는 공동체의 두려움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가 속한 문래동예술인마을은 계속 무언가를 품고 있다. 그게 공룡알이든 메추리알이든, 품었으니 때가 되면 나올 것이다. 그때, 보러 가면 된다. 주거공동체 ‘빈집’ : 너무 급진적이야.... 혹시 공산당? ㅎㅎ 빈집의 이야기는... 듣는 내내 충격이었다. 우선, 그 탄생신화가 그렇다. 어느 부부가 있었는데, 그들이 자신들의 집을 사유화하지 않고 사람들에게 내놓았다. 아니, 준 게 아니라, 공간을 공유하기 위해 내놓은 것이다. 필요하면 들어와서 함께 살자. 얼굴도 모르는 이에게 내가 사는 방을, 거실을, 특히 화장실을 내 준다는 것... 이 얼마나 급진적이 사유방식이란 말인가. 그렇게 살게 된 ‘빈집’은, 그래서 주인이 없다. 그곳에서 함께 살아가는 이들 모두가 손님일 뿐이다. 게스트하우스? 뭐 비슷하긴 하지만 그곳에는 호스트가 있으니까 사실 굉장히 다르다. 주인이 없다는 것을 제외하면 이들이 살아가는 모습은 가족과 별반 다르지 않은 듯 보인다. 다만, 그 가족공동체가 양성평등이 실현되고 가사노동이 공평하게 분배되고 권위적인 가장의 존재가 없다는 것 그게 일반적인 가족공동체와 크게 다른 점이긴 하다. 식구들이 많으면 많은대로 한방에서 같이 자기도 하고 또 누군가 자기만의 공간이 필요하다고 하면 형편껏 그 요구를 들어주기도 한다. 빈고라는 신협 비슷한 체계도 갖추고 있고 빈집에서 운영하는 가게도 있다. 함께 공부하고 싶은 사람들은 세미나를 만들기도 하고 마을잔치도 하고 연극공연도 하고 밴드 활동도 있다. 하긴, 저희 공동체엔 무슨 무슨 프로그램들이 있어요... 라는 게 뭐가 중요하단 말인가. 모여 있으니 맘만 맞으면 무엇이든 만들 수 있고 또 아니다 싶으면 바로 엎어질 수 도 있는 거지... 빈집에서 생활하고 있다는, 올해 갓 20살이 된 앳된 아가씨 둘이 와서 이야기에 동참했다. 그들이 했던 말들을 짧게 요약하면, 빈집에서 함께 살면서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많이 변했다, 가끔 부모님 집에 들르는데 그때마다 충격을 받는다, 냉장고를 3대나 두고 쓰다니, 또 웬 음식은 그렇게 많이 하고 버리는지... 그 중 가장 충격적이었던 발언은 들깨의 이야기였다. “처음에 들어올 때 갖고 있던 나 자신의 욕구, 욕망조차 변하더라구요.” 아니, 공동체가 대체 뭐길래 욕망의 구조까지 흔들어 놓는단 말인가... 우리가 가진 것 중에 가장 사유화하기 힘든 것이 살림과 그 살림을 사는 공간일 것이다. 그래서 주거까지 함께하는 공동체가 더욱 위대해(?) 보이는 건 사실이다. 그중에서도 빈집이 유독 튀어 보이는 이유는 그 구성원들의 성격에 있다. 빈집은 무엇인가를 공유하는 이들의 모임이 아니다. 무슨 목적을 이루기 위해 뭉친 사람들도 아니다. 그저 살 곳이 필요한 사람들이 들어와 함께 사는 곳일 뿐이다. 계약기간 같은 것도 없다. 필요하면 들어와서 며칠 같이 살다가 불쑥 나가버릴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와...진짜... 급진적인 공동체라고 밖에 할 말이 없다. 이렇게도 공동체가 되는 거구나 싶다. 물론 이곳에서도 문제는 발생하고 다툼이 있다.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니 미움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생각해보자. 공동체를 이루며 살고자 하는 사람들이 꿈꾸는 것은 대개가 소통이 있는 삶이다. 하지만 소통은 아름다운 내용의 대화만 오고가는 게 아니다. 오히려 많은 대화가 다른 이 혹은 이토록 불완전한 세상에 대한 불만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러니 웃을 일 만큼 싸우고 울 일도 있는 게 당연하다. 외려 그런 삶이 더 완전해 보이기까지 한다. 사는 게 그런 거니까 말이다. 지지고 볶고, 싸우고 화해하고, 모였다 흩어지고, 아니면 갈라서기도 하고... 결국 우리는 그런 다툼이 있을까봐 지레 겁먹고는, 아이고 그렇게 피곤하게 살 필요가 뭐 있어 하면서 이렇게 외롭게들 살고 있는 거다. 아니 단지 외로움의 차원이 아니라 뭔가 좀 비정상적인 삶을 살고 있는 듯하다. 손으로 움켜쥐면 손가락 사이사이로 죄다 흩어져버리는 모래 알갱이 같은 삶. 사진첩을 들추면 온통 내 피붙이 밖에는 다른 얼굴들이 없는 기괴한 삶 말이다. 그러면서 위로한다. 다들 그렇게 살고 있는데 뭐... 근데 이 강의를 듣다보니 다들 그러고 사는 게 아니었다. 문래동도 그렇고 빈집도 그렇고 일단 몇몇의 사람들이 다른 이들과 함께하는 삶을 그려나가니 그 만남이 자꾸 옆으로 번져만 갔다. 그렇게 우리네 삶은, 누군가는 또 다른 누군가와 만나게 되어 있는 것 같다. 그런 깨달음 속에서 나만 이렇게 게으른 삶을 사나 싶어 또 다시 겁이 난다. 그동안 나의 삶은 구더기 무서워서 장 같은 것은 그냥 마트에서 사다 먹는 삶이었다. 근데 다른 이들과 인생을 나누며 살아가는, 나의 시간과 공간이 타인의 그것 속에서 어우러지는 달콤쌉싸름한 쌈장 같은 삶은 마트에 안 판다. 겁이 나고 무서워도 이제 된장도 담그고 고추장도 담가야 하지 않을까 싶다. 뭐라고 담그려는 시도를 해봐야 거기서 쌈장이 나올지 구더기가 나올지 볼 수 있지 않을까. 구더기가 나오면 발로 밟아 죽이면 된다. 아예 장독을 엎어버릴 수도 있는 거고..... 아니라고? 아님, 말고.......... 후기 | 박현아(수강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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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으로 읽는 이슬람 사회와 문화 | 문학으로 읽는 이슬람 4강 - 오르한 파묵<이스탄불> (4/25) | 느티나무 | 2012.5.2 | |||
이스탄불은 오르한 파묵이란 작가를 만든 곳입니다. 오르한 파묵이 만약 이스탄불에서 나고 자라지 않았다면 그는 지금과 같은 소설을 쓰지 못했을 거예요. 일찍이 발터 벤야민은 아케이드 프로젝트라는 책에서 도시와 문학에 대한 관계를 연구했었죠. 그만큼 이스탄불이라는 도시는 오르한 파묵의 작품을 이해하는데 있어 중요한 공간입니다. 나보코프, 네이폴 같은 이민 작가들도 이렇게 말했지요. 현재 터키의 수도는 앙카라이지만 이것은 1923년 터키 공화국이 선포되면서부터 지정된 곳이라고 한다. 그 전까지는 이스탄불은 동방 그리스도교 세계와 이슬람 세계의 정치, 문화, 종교의 중심지 역할을 담당했던 도시였다. 동로마 제국의 수도였던 콘스탄티노플이 현재의 이스탄불인 것이다. 그처럼 이스탄불에는 과거의 영화를 간직한 문화유산들이 많다. 일례로 이스탄불에 있는 술탄 아흐멧 자미라는 사원은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이 곳은 오스만 제국 14대 술탄 아흐멧 1세가 1616년 준공한 사원으로 블루 모스크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 곳은 이슬람의 자존심이라고 할 정도로 아름답다고 한다. 오르한 파묵은 과거 문화, 정치, 종교의 중심지로 찬란했던 이스탄불이 지금은 세계의 변방으로 밀려난 것을 자각했다. 부유하게 자랐던 그에게도 외곽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슬픔과 분노가 있었던 것이다. 그에게 글쓰기란 그 깊숙한 비애를 표현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그는 사람들은 세계 어느 곳에서나 닮아 있다는 낙관적인 믿음을 가지고 언젠가는 자신의 글이 읽히리라는 신념으로 꾸준히 글을 썼다. 그는 터키에도 세계화가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인정했지만 그것이 서양 문명 중심으로만 흘러가는 것은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 문제의식은 역시 그의 작품에 오롯이 녹아있다.
“여러분 오르한 파묵에 대해 알고 싶으면 이스탄불을 먼저 읽으세요.” “그는 자신이 살고 있는 공간에 대해 정말 치밀하게 탐구하는 작가였어요. 질의 응답 시간에 계속되었던 논의들은 우리가 사는 공간에 대해서, 서울의 정체성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그것은 앞서 얘기했던 발터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에서 제기되었다는 도시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과도 맞닿아 있을 것이다. 글 : 자원활동가 최혜진 수강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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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으로 읽는 이슬람 사회와 문화 | 문학으로 읽는 이슬람 4강 - 오르한 파묵<이스탄불> -파묵의 이스탄불 그리고 우리의 서울 (4/25) | 보고타 | 2012.4.27 | |||
오르한 파묵을 다룬 세번째 수업이자, 이슬람 문학 수업의 4강은 오르한 파묵의 <이스탄불>을 다뤘다. <이스탄불>은 세계적 작가의 반열에 오른 터키의 소설가, 오르한 파묵의 자전 에세이이다. 그러나 한 유명한 소설가의 자전 에세이라 하여, 자의식 충만한 예술가의 '난 어떻게 성공했는가'라는 자기자랑 가득한 자서전이라 예단하는 것은 금물이다. 이 책의 제목은 '이스탄불'이다. 제목에서 예상할 수 있듯이,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한 이야기만큼이나 이스탄불에 대한 서술에 책의 상당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또한 한 때 세계의 중심이었던 도시에서 지금의 변방의 도시로 전락한 이스탄불의 비애어린 영혼이 책의 전반을 지배하는 주요한 분위기로 자리잡고 있다. 그는 그 자신의 삶에 대한 서술이든 이스탄불에 관한 서술이든, 책의 곳곳에서 음울한 흑백의 색깔을 띤 이스탄불의 '비애'를 계속해서 등장시킨다. 이 책에서 그는 자기 자신이 얼마나 재능있었고 뛰어났었는지를 이야기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 그저 자신이 평생을 살아온 고향이자 자신의 문학적 영감의 원천이 되었던 '이스탄불'과 그 이스탄불 속에서, 이스탄불의 영혼을 흠뻑 머금고 살아온 자신의 삶에 대해서 진솔하게 풀어내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이스탄불의 수많은 폐허들과 뒷골목을 아주 좋아했다. 오르한 파묵이 방황하던 젊은이였을 때, 그는 이스탄불의 골목 골목을 수도없이 걸었다. 이 책을 읽은지 몇 달이 지나서 내용의 대부분이 가물가물 하지만 그가 이야기하던 이스탄불의 지저분한, 곳곳에 폐허가 있는 가난한 변두리 마을의 골목들과 그 골목들을 찍은 흑백사진들만은 여전히 인상깊게 남아있다. 그가 말한 이스탄불의 '비애'라는 것도 이렇게 이스탄불 곳곳을 걸으면서 느꼈고, 그도 모르게 흡수했을 것이다. 한 때 세계의 중심이었던, 도시의 과거의 위용을 슬프게나마 보여주는 폐허들, 폐허, 화재터, 허물어진 벽들을 배경으로 자리잡고 있는 골목의 빈곤함과 지저분함 속을 걸으면서 말이다.
그러나 그에게 도시 곳곳에 음울하게 가라앉아 있는 '비애'란 영혼을 잠식하는 슬픔이면서 동시에 그것이 승화된 아름다움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비애'는 그의 예술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렇듯 이스탄불이라는 도시의 음울한 영혼과 그 영혼 속에서 비애에 젖어 고군분투하던 오르한 파묵, 그리고 그 속에서 아름다움과 예술을 발견하고, 창조성과 삶의 원동력을 이끌어 낸 그의 이야기를 읽다보면 파묵의 예민한 감수성에 감탄하게되는 동시에, 그러한 감수성을 자라날 수 있게 해준 이스탄불이 더욱 매력적인 도시로 느껴진다. 이난아 씨와 수강생들 모두가 공감한 것도 바로 이런 부분이었다. 그러면서 모두가 서울을 떠올렸다. 왜 서울을 치밀하게 느끼고 표현해낸 작가는 한국에 없는가, 과연 서울에 예민한 감수성이 자리잡고 발 디딜 틈이 있는가 등등에 대해 모두가 이야기 했다. 난 이날 오갔던 많은 이야기들 중 서울이 "괴물이 되어간다"고 했던 말이 기억에 가장 남는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끊임없이 덩치를 키우며 뿌연 김을 토해내는 서울, 온통 콘크리트 빌딩과 아파트들이 빽빽히 숲을 이룬 서울이 떠올랐고, 무서워지는 동시에 안타까웠고, 그 안에 사는 우리가 불쌍해졌다. 젊은 시절의 오르한 파묵처럼 정처없이 걸어다니길 좋아하던 내가 서울의 곳곳을 보며 느꼈던 '멍해지는 감정'이 무엇이었는지 조금은 그 윤곽이 보이는 것 같았다. 서울이 나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어떠한 도시인지 조금은 보이는 것 같았다. 서울은 '흔적'이 없는 도시다. 과거로부터 시간이 켜켜이 쌓여온 '흔적'이 온통 사라졌고, 사라지고 있는 도시다. 그로 인해 '쌓여온 시간이 이어져 존재하는 지금의 공간, 그리고 그 속의 나'를 느끼게 할 감수성은 용납되지 않는 도시다. 사실 나는 흔적이 '사라졌다'라는 표현보다는 '살균'되고 '소독'되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다고 생각한다. 이스탄불을 지배하는 감정이 비애라면 서울을 지배하는 것은 '강박'이다. 빈곤함, 지저분함, 불편함, 이러한 모든 것들을 살균하고 소독하려는 도시의 '강박'. 이 강박이 지배하는 도시에서 과거의 흔적을 안고 있는 일부분, 즉 문화유적들과 오래되고 빈곤한 동네들은 쌓여온 시간 따위는 느낄 수 없게 박제화 되었거나 드높은 콘크리트의 위세에 눌려 불안함과 위태로움 속에 연명한다. 서울은 정말 괴물이 되었다. 그러나 너무나 쾌적하고 깔끔한 괴물이다. 강박이 만들어낸 살균과 소독의 풍경은 서울에 사는 우리에게 가해지는, 시선에 대한 폭력이자 감수성에 대한 폭력이다. 그러나 현대화된 서울의 쾌적함과 깔끔함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불쌍하게 여기는 것조차 불가능하게 만든다. 수업은 오르한 파묵과 이스탄불에 대해서 이야기하며 시작했다가 우리와 서울에 대해 이야기하며 끝났다. 이 수업에 모였던 한줌의 사람들만큼은 서울에 대한 안타까움과 우리 자신에 대한 불쌍함을 느낄 수 있는 감수성의 소유자들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수업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짓고 있는 제2롯데월드 건설현장이 떠올랐다. 동시에 서울을 괴물로 만든 것은 불결하고 가난하고 지저분했던 과거와 단절하기 위한 욕망으로 미친듯이 질주해온 '단절의 근대화'라는 생각을 했다. 100층이 넘는 높이를 향해 치솟아 오르는 제2롯데월드는 바로 이 '단절의 근대화'의 정점에 있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에 씁쓸했다. 하지만 이러한 광풍 속에서도 감수성을 놓지 않은 사람들이 모였던 수업이 떠올라 조금은 희망을 가져볼 수 있었다. 이난아 씨가 오르한 파묵이 <이스탄불>을 쓴 것은 서서히 거세어지는 이스탄불의 개발 바람에 대한 저항이자 사라져가는 '비애'의 이스탄불을 영원하게 하기 위함이라 하셨다. 이보다는 훨씬 미약할지라도 이 날의 수업도 괴물이 되어가는 서울에 대한 조그마한 저항으로도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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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으로 읽는 이슬람 사회와 문화 | 문학으로 읽는 이슬람 2강 - 오르한 파묵<내이름은 빨강> (4/4) | 느티나무 | 2012.4.20 | |||
소설가란 개미와 같은 끈기로 조금씩 거리를 좁혀가는 사람이며 마법적이고 몽상적인 상상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그 자신의 인내심으로 독자들을 감동시키는 것이다. - 오르한 파묵 -
오르한 파묵은 터키 문학사상 최초로 노벨상을 수상한 작가이다. 참여연대 이슬람 문학 2번째 수업은 그의 작품 중 하나인 ‘내 이름은 빨강’을 주제로 번역가 이난아 님이 진행해 주셨다. ‘내 이름은 빨강’은 터키의 전통 화풍인 세밀화에 대한 전문 지식과 세밀화의 역사 지식을 바탕에 깔고 오스만 시대에 실존한 세밀화가들의 예술가로서의 장인정신과 고뇌를 묘사하고 있으며, 이와 대치되는 베네치아 회화라는 새로운 화풍과 전통화풍의 속에서 갈등하는 예술가의 모습을 배치하면서, 세밀화가의 살인사건의 비밀을 밝혀가는 추리기법을 채용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이 소설이 지어진 터키라는 나라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터키는 기독교 문명이었던 비잔틴 제국에서 1453년 오스만 제국이 들어서면서 이슬람 문명으로 변모하는 큰 변화를 겪는다. 역사로 보면 유럽국가라고 할 수 있지만 국토의 97%가 아시아 대륙으로 되어 있는 터키는 다인종, 다민족 국가인 터키는 동양과 서양 문명 사이에 있는 국가의 정체성에 대해 혼란을 겪게 되는 것이다. 내 이름을 빨강 또한 이런 동서양 문명의 충돌을 세밀화를 소재로 해서 그려내고 있다. 베네치아 화풍으로 언급되는 서양화의 터키유입이 결국 살인사건으로 까지 확대되고 있고 그것이 이 소설의 뼈대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오르한 파묵은 그러한 동양과 서양의 갈등을 통해 터키의 정체성을 탐구하고 있다. 그의 작품에는 나는 왜 나인가. 왜 다른 사람이 될 수 없는 가 하는 물음이 깊숙이 녹아 있다. 이 소설도 역시 여러개의 화자를 통해 이야기를 이끌어 가면서 분신 모티프를 활용한다. 세밀화는 원근법을 허용하지 않는다. 세밀화는 인간을 위한 것이 아니라 신을 위한 것이기에 모든 것은 신의 눈으로, 신의 입장에서 그려져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 그림이 그려지기까지 고군분투하는 세밀화가들의 모습도 잘 그려지고 있다. 작은 그림을 계속 보다가 결국 장님이 되고 말 정도로 그림에 몰두하는 그들의 열정은 ‘빨강’이라는 색으로 대표될 수 있다. 이 또한 세밀화를 대표하고 상징하는 색이라고 할 수 있다. 이난아 교수는 소설과 함께 오르한 파묵에 대한 개인적 성향에 대한 설명도 곁들이며 그가 얼마나 치밀한 사람인지, 그의 문학에 대한 열정이 얼마나 강한지 곁들였다. 이 소설은 화가가 되고 싶었던 오르한 파묵이 치밀한 조사를 통해 전략적으로 쓴 것이라고 한다. 그만큼 소설은 작가의 성향에도 영향을 받았고 그가 살았던 터키 이스탄불에도 큰 영향을 받았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이스탄불 가보셨어요? 겨울엔 절대 가지 마세요.” 세밀화라는 우리가 쉽게 접할 수 없는 소재를 가지고 인간이 공감할 수 있는 보편성을 이끌어내는 재주는 그가 말했던 개미와 같은 끈기로 얻어진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후기 : 최혜진 (수강생, 자원활동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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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 그 매력과 두려움 | 공동체 1강 - 우리에게 공동체는 무엇인가 (4/16) | 느티나무 | 2012.4.18 | |||
코끼리보다 못한 인간들이 모여 ‘함께 살기’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 생각보다 많은 수강생들이 모여들었다. 모두들 외로웠던 것이다. 첫 강의를 맡아주신 김찬호 선생님의 표현대로, 야생에서 살아남기 경쟁을 벌인다면 너구리, 멧돼지, 지렁이보다 못할 인간들이라 우리는 공동체라는 이 이상한 단어에 매달리고 그렇게라도 서로서로 연결해서 좀 더 나은 삶을 살아 보고자 하는 것이다. 뭉치기만 하면 세상의 반을 통째로 날려버리는 일들을 도모하다가도 정작 세상에 나 하나만 혼자 남게 되면 끼니 한번 챙기는 것조차 미션임파서블이 되어버리는 그렇게 한없이 나약한 것이 인간의 본성이니.... 우리는 어쨌든, 같이 기대며 살긴 살아야겠는데, 그게 어려운 세상이고, 그게 무서운 세상이 되었으니..... 어쩐다? 매력? 아니 아니.... 두려움! 아니나 다를까... 모인 사람들의 입에서 ‘공동체’하면 떠오르는 답답함과 억압적 이미지에 대한 성토의 목소리가 높다. 나도 한몫 거든다. 그러다 괜히 ‘공동체’라는 이름이 시빗거리가 되었다. 이 말은 대체 어디서 튀어나온 것인지.... 커뮤니티나 마을이라고 바꿔 불러야한다고 누군가 말한다. 그러나 그 말들 또한 사람들이 생각하는 ‘함께 살기’에 대한 다양한 생각과 이상들을 담아내지 못한다. 뭐가 좋을까? 주객이 전도가 된 느낌이지만 그렇다고 용어 선택에 대한 고민이 그렇게 무의미한 것만도 아니다. ‘공동체’라는 말이 뭇사람들을 겁주고 있다면, 바꿔야한다. 우리가 모여 앞으로 함께 공부하고 고민들을 나누고 할 시간들 안에서 좋은 아이디어가 탄생하길 기다려보는 수밖에... 목표가 같은 사람들의 모임이 공동체?! 누군가 “어떤 부분에 대해서 동일성을 지니고 목표가 같은 사람들의 모임이라고 해서 그것이 공동체라 할 수 있는가?”라는 화두를 던졌다. 뒤이어 “결국 어느 것 하나라도 동일성이라는 것이 꼭 획득되어져야 공동체인가?”라는 비슷한 맥락의 의문도 뒤따랐다. 그러자 “비전을 공유하지 않은 사람들의 모임 혹은 공동체는 과연 성립이 가능한 것인가?”하는 반문이 나왔고, “근대화 이전의 농촌공동체 시절처럼 지역적 기반이 자연스럽게 삶의 공동체가 되는 것이 현 시점에서 가능한가, 그것이 타당한가?”하는 의견도 제시되었다. 서로 함께 하기 위해 탄생한 것이면서도 어쩔 땐 그 테두리 밖의 사람들에겐 더 배타적으로 느껴지고 오히려 인간들 사이에 경계를 지어버리는 공동체의 무서운 이중성에 대해서도 우리는 함께 목소리를 높였다. 와우, 첫 시간인데 우린 이미 종착역 바로 5분전이다. 그 종착역까지가 쉽지 않겠지만, 이 정도의 수준이면 꽤 농도 짙은 공부가 될 것이다. 빡센 거 말구요.... 다른 거! 공동체의 이미지가 좋지만은 않은 것은, 그동안 우리에게 알려진 공동체들이 대부분 좀 빡 센 것들이라 그럴 것이다. 종교 공동체, 마을 공동체, 예술인 공동체 등 다양하게 있는 듯 싶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공동체의 일반적인 얼굴은 일상생활이나 삶터를 공유하거나 더 나아가 노동이나 경제를 공유하는 형태이기 일쑤고 종교공동체의 경우는 세계관 내지 신념까지 공유해야하니 말이다. 평범한 이들이 선뜻 공유하고 나서기엔 너무 빡세다. 그렇다고 혼자서 꿋꿋이 살아가는 것이 널널한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다시 원점? 아니다. 이제부터 좀 더 다양한 공동체를 상상해내는 것이 우리에게 남았다. 함께 모여 24시간 이것도 같이 하고 저것도 같이 하고, 니 게 내 거고, 내 게 니 거고... 이런 거 말고, 그런 공동체가 가능하다면 사실 좀 더 느슨한 공동체도 얼마든지 가능할 테니... 각자 하고 싶은 대로, 살고 싶은 모양새대로 조각을 이어 붙여 내가 생각하는 ‘함께 살기’의 모습을 구체화하고 밑그림을 그려나가야 한다. 공동체에 대한 기분 좋은 경험들이 점점 늘어나서 공동체에 대한 악몽들을 몰아낼 때, 사람들은 다시 꿈을 꿀 것이다. 그리고 그 꿈은 ‘실제로는 모두가 함께 살아가고 있었다’는 잊혀진 현실을 다시 각성시켜줄 것이다. 어떨까? 어쨌거나 함께 살아가라는 특명을 받은 우리 외로운 인간들은, 그것이 점점 더 어려워지는 이 세상에서 고통 받고 있는 관계로 앞으로도 계속 ‘함께 살기’에 대해 고민하고자 한다. 이 공부가 끝나갈 쯤엔 뭔가 산뜻한 결론이 났으면 좋겠다. 힘들겠지? 그래도 쫄지마!!! 후기 : 박현아 (자원활동가, 수강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