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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좌명 | 강좌후기 | 글쓴이 | 날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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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드라마, 사료로 다시보기 | 역사드라마, 사료로 다시보기[8강] | 최성호 | 2010.5.2 | |||
'내가 만들어 보는 사극 시놉시스 발표와 강평' 이라는 주제로 마지막 강의가 진행되었습니다. 마지막 강의를 위해 5주차에 조편성을 하였고 각각의 조는 조원들과 함께 모임을 갖으며 주제를 찾고 시놉시스를 만드는 과정을 거쳤습니다. 그리고 지난 목요일 저녁 이에 대한 발표가 있었습니다. 발표는 1. 조 구성 2. 준비과정 3. 시놉시스 발표 4. 질문과답변 순으로 진행되었으며 발표가 끝나면 주진오 교수님께서 부가 설명을 곁들여 주시는 방식으로 진행되었습니다. 1조의 구성은 신경임, 오영주, 황미정, 장인선 님으로 구성되었고 4개의 조 중에서 가장 많은 모임을 가졌다고 합니다. '조선의 사랑' 등 천민여성을 다룬 책들을 많이 보았으며 이를 통해 기획의도는 천민여성의 삶과 억압을 이겨내는 과정을 설정하였지만 발표 당일 사랑이야기로 급전환하였다고 합니다. 과거를 지운여자, 과거를 용서한 남자 <과거를 지운여자, 과거를 용서한 남자>라는 제목으로 수연(조선의 7대 왕인 세조의 딸)과 김정우(김종서의 손자)라는 인물을 설정하여 시놉을 전개하였습니다. 계유정난을 통해 수양대군은 왕이 되고 그 과정에서 김종서는 살해당하고 맙니다. 이러한 모든 과정을 딸인 수연은 못마땅하게 여깁니다. 그리하여 수연은 세조에게 강력하게 저항을 하고 궁을 나오게 됩니다. 궁에서 나온 수연은 화적떼에게 봉변을 당하려던 순간 이를 도와준 이가 있었는데 그는 김종서의 손자인 김정우였습니다. 이들은 서서히 정이 들었고 서로의 신분을 속인체 결혼을 하고 두 아이의 부모가 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세조와 수연은 대면하게 되고 이 장면을 김정우가 보게 됩니다. 불구대천의 원수인 세조. 그는 바로 자신의 장인이자 자신의 아이들을 외할아버지가 되는 것 입니다. 그날 밤 수연은 정우에게 이사를 가자고 청하고 자신의 사연을 모두 털어 놓게 됩니다. 정우는 그녀를 이해 할 수밖에 없었고 그 둘은 머나먼 곳으로 떠나면서 시놉은마무리 됩니다. 주진오 교수님께서는 세조의 왕위찬탈에 대한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김종서는 무조건 좋은 사람이고 수양대군은 나쁘다는 생각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어린 단종이 왕위에 오르고 권력을 독점하여 서로를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상황에서 수양대군이 아닌 김종서가 칼자루를 쥐고 있었다면 죽임을 당하는 것은 김종서가 아니라 수양대군이 되었을 것이 뻔한 상황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역사를 볼 때는 선과 악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냉정하게 어느편에도 서지 말고 사건의 맥락을 명확히 볼 수 있는 안목이 필요하다고 말씀해주셨습니다. 덕혜옹주 다음으로 2조의 구성원은 전병훈, 이춘산, 김버들, 김미연, 장강규 님입니다. 구성원만으로도 드림팀이라는 이야기가 오고 갔는데 명색에 걸맞는 결과물을 보여주셨습니다. 장강규 학생은 덕혜옹주로 시놉시스를 선택한 이유를 "우리는 흔히 역사 속 인물들을 업적이나 능력 위주의 결과로만 기억하고 평가합니다. 저는 조원 분들과 이번 시놉시스 주제를 정하면서 역사 속 인물이 업적과 같은 결과물을 갖고 있지 않거나 그것이 좋지 못할 경우 그 인물에 대해서 알 필요가 없느냐 라는 의문을 갖게 되었고, 마땅히 알아야 하지만 보이는 결과물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우리들에게서 친근하지 못한 인물을 다루어 보고자 했습니다."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등장인물로는 주인공 덕혜, 덕혜의 몸종인 복순 그리고 그의 일본인 남편 소다케유키, 그리고 끊임없이 덕혜를 괴롭히는 소 다케유키의 집안에서 데려온 하녀 미요. 마지막으로 덕혜와 약혼 하기로 되어 있던 박장한이라는 인물까지입니다. 행복했던 유년시절을 회상하며 덕혜는 일본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조국 그리고 고종,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 자신과 부부의 연을 맺을 뻔 했던 장한의 믿음직스럽던 눈빛을 떠올리며 꼭 다시 돌아오리라는 마음을 먹고 말입니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늘 독살의 두려움에 시달려야 했던 덕혜는 복순의 도움으로 장한을 다시 만나게 되지만 일본 백작 집안의 소 다케유키와 강제로 결혼을 하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임신을 하게 되고 서로의 양육관에 충돌이 일게 됩니다. 미요는 덕혜를 정신이상자로 몰아 정신병원에 강금하게 됩니다. 시간이 흘러 일본이 패망하게 되지만 덕혜는 정신병원에 갇혀 홀로 세월을 이겨냅니다. 딸 정혜는 집을 나가 행방불명이 되고 소 다케유키는 일방적인 이혼을 선택하게 됩니다.시간이 흘러 장한의 도움으로 덕혜는 고국의 땅을 밟게 됩니다. 정신병원에서의 고통으로 정신이 혼미해진 덕혜. 정신이 온전해지자 복순은 덕혜를 데리고 덕수궁으로 나들이를 가게 됩니다. 아버지와 함께 했던 즐거운 유년시절을 회상하던 찰나 한 가이드가 덕수궁으로 관람 온 관광객에게 덕혜옹주에 대한 설명을 하게 됩니다. 관광객들은 저마다 한마디씩 합니다. 이에 복순은 반박을 하려 하지만 덕혜는 이를 말립니다. 그 모습에 통곡하는 복순, 그리고 그러한 모습을 지켜보는 관광객들을 뒤로한 체 시놉은 막을 내립니다. 주진오 교수님께서는 소설과 현실에 대한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덕혜옹주'라는 소설에서의 모십이 진실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번 시놉을 볼때 소설의 영향이 많이 느껴진다는 평이었습니다. 많은 말씀중에 결혼에 관련 된 말씀은 살펴볼만 합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덕혜는 불쌍하고 남편은 나쁜놈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 입니다. 덕혜의 남편인 소 다케유키는 동경대학을 나왔고 상당한 인텔리이며 미남입니다. 영친왕과는 다르게 덕혜는 왕실에서 대우를 받는 존재도 아니며 옹주라고 해서 사람들이 떠받드는 존재도 아닙니다. 하지만 민족적 관점으로 보기 때문에 앞서 언급했던 등식이 성립되는 것입니다. 또한 둘의 관계에 대해서 말이 많지만 둘의 사이에 아이가 있었다는 점과 덕혜가 고국으로 돌아와 있을 당시 낙선재에 소 다케유키가 방문했다는 점으로 볼때 그들의 관계가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았다고 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다시 한번 살펴봐야 할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홍경래 다음으로 3조입니다. 구성원으로는 김성훈, 김안나, 김종우, 최성호 님입니다. 제가 속해 있는 조입니다. 제가 예비군 훈련으로 참여를 못해서 많이 죄송스러웠습니다.(ㅠ.ㅠ) 3조는 따로 모임을 갖지는 않았습니다. 강의가 끝난 이후 각자의 역할을 정했습니다. 첫 만남때 관심있는 사료를 찾아오기로 했는데 김성훈님은 19세기 초에 대한 사회적 배경을 김안나님은 홍경래의 난에 가담했다고 전해지는 연홍을 저는 홍경래의 난을 조사해 와서 깜짝 놀랄만한 완벽한(?) 팀웍을 보였습니다. 그 이후에는 저를 제외하고 김종우님께서 합류하셔서 좋은 시놉을 만드셨습니다. 19세기 초 서북지방에서 일어난 홍경래의 난을 주제로 하였는데 기획의도는 홍경래의 난 안에서의 민중들의 모습을 그려보고 싶었습니다. 난을 일으킨 홍경래를 믿을 수 없으며 그렇다고 자신을 괴롭혀 온 관군은 더 믿을 수 없어 혼란스러워 했던 민중들의 모습 말입니다. 시놉인 관게로 전체적인 맥락을 집었고 그 과정에서 기획의도가 잘 드러나지 않아 다소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서북인에 대하 조정의 뿌리 깊은 차별은 이 지역 양반들의 처지를 더욱 구석으로 몰아 붙였습니다. 비리도 심해 급제하는 이는 모두 뒷배 좋은 권세가문들의 자제들 이었습니다. 사마시에 낙방한 홍경래는 조선 사회의 부조리에 대한 불만이 가슴에 일고 있었습니다. '뒤집어야 한다.' 그는 팔도를 누비며 사람을 모았다. 신분제에 불만을 품고 있었던 박생을 비롯한 상인, 중인들 뿐만 아니라 기녀 연홍도 만나게 됩니다. 사회부조리에 대한 불만은 있었지만 체계화 된 신념은 갖지 못했고 이것이 이후에 화근이 되고 맙니다. 1811년 흉년이 들어 민심은 크게 동요하였습니다. 홍경래 일당은 임신년 정월을 거사일로 잡았지만 비밀이 새나가 신미년 음력 12월로 거사를 앞당기게 됩니다. 관아를 털어 식량을 나누며 개혁적인 정책으로 민심을 다독이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신분제 철폐를 주장하는 박생과 대립하게 되는데 홍경래와 연홍도 신분의 차이로 인해 사이가 갈라지게 됩니다. 관군의 반격이 시작되고 연이은 패배에 내부 갈등은 심화되게 됩니다. 관군은 탈환한 지역의백성에게 홍경래와 결탁했다는 누명을 씌어 무자비한 고문과 살육을 자행합니다. 결국 홍경래는 정주성으로 피하고 이를 따르던 백성들도 정주성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홍경래가 좋아서라기 보다는 관군을 피해 살아남기 위함이었습니다. 시간이 지나 성에 물자가 바닥이나고 성벽까지 무너지게 됩니다. 진압과정 중 홍경래는 총에 맞아 죽고 붙잡힌 주모자들도 포로가 되어 한양으로 압송되어 처형 당하게 됩니다. 이리하여 홍경래의 난은 끝이나고 맙니다. 주진오 교수님께서는 19세기의 상인과 신분제로 인한 홍경래와 연홍이 연을 맺지 못헌 것에 대해 말씀해 주셨습니다. 3조의 시놉에서 보면 박생이라는 상인이 나오는데 그는 홍경래의 편에 섰다가 자신의 뜻이 관철되지 않자 배반을 하는 인물입니다. 실제로는 당시 만상의 임상옥이라는 상인도 비슷했다고 합니다. 사료에서는 홍경래에게 돈을 대줬지만 나중에는 관군으로 돌아선다고 하는데 상인의 특성상 기회에 투자를 하는 것이고 투자가치가 떨어지면 가장 먼저 등을 돌리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한 점에서 시놉에서 박생이라는 인물을 잘 표현했다는 평이었습니다. 다음으로 신분제 입니다. 홍경래와 연홍은 신분제의 차이와 홍경래가 결혼을 했다는 이유로 연을 맺지 못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지극히 현재의 관점이라는 것입니다. 조선시대의 경우 첩이라는 것이 합법화 되어 있는 마당에 신분제로 인해 두 사람이 갈등을 겪을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4조 입니다. 4조는 서로 시간이 맞지 않아서 처음 모였을 당시 사료로는 삼국유사에서 원효라는 인물과 의상대사, 설총까지 포함하여 원호는 자유인, 설총은 정신적인 양아들이라는 설정으로 시놉을 구성하려고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준비가 미흡하셔서 발표는 하지 않고 만들어 오신 시놉을 읽어보는 것으로 대체 하였습니다. 모든 발표가 끝나고 주은경 부원장님께서는 과거 종교와 전쟁이라는 강의에서도 이번과 같은 토론 시간을 편성했지만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번 강의에서는 기대 이상의 준비와 발표로 대단히 만족스럽고 감사하다는 말씀을 전해주셨습니다.
8주동안 열성적으로 강의를 해주신 교수님들과 준비를 해주신 김민수 간사님, 주은경 부원장님 그리고 매 강의마다 활력을 불어 넣어주시며 수강해주신 모든 여러분들께 박수를 짝짝짝. *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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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삶을 사랑하는 지혜 | 철학, 삶을 사랑하는 지혜[4-6강] | 놀이정신 | 2010.5.1 | |||
tv채널을 돌리다가 커피프린스라는 드라마 재탕하는 걸 보게 되었다. 재밌다 헤헤... 쿡tv로 4일 동안 잠 안고 18화까지 전부 독파했다. 1회당 60분 정도니까 다 합치면 1000시간 이상을 이 순정만화 같은 드라마에 올인한 것이다. 난 늘 이런 식이다. 그 드라마 인기 있을 땐 모른척하다 결국 혼자 뒷북친다. 뒷북도 사이즈 큰 걸로다가 친다. 남자라도 사랑하겠다는 이 자알 생기고 섹시한 청년, 공유의 눈물섞인 대사 한마디에 온몸의 감각들이 죄다 들고 일어났다. 한마디로 감각들이 난리법석이다. 중년 여성의 냉철한 이성 따윈 내다버리기도 귀찮아 그냥 깔아 뭉개버렸다. 다 늙어가지곤 풋풋한 청춘남녀 연애 얘기에 정신줄 놓아버리는 아줌마가 하도 안쓰러워 한동안 술도 좀 먹여주고 만화책도 좀 보여주느라 이 달에 계획했던 독서스케줄은 엉망이 되고 말았다(조광제 선생님 강의 들으면서 사이드 메뉴로 골라 놓은 철학책 마저 읽어야 하는데 ㅠ_ㅠ).
나이 먹어서 서러운 것은... 몸은 늙는데 마음은 늙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래서 인생은 점점 균형을 잃고 자아는 분열된다. 공중회전낙법을 하다 이마에 큰 혹이 생겼을 때도 몸은 할 수 없다고 두려움을 호소했지만 마음은 받아주지 않았다. 이렇게 물리적인 나이와 상관없이 늘 10대 소년(?)의 마음으로 산다는 건......... 민폐다, 자신에게도 타인에게도. 몸과 마음이 만들어 내는 불협화음, 그 소란을 잠재울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걸까? 4강 몸과 마음의 열림으로 38살 아줌마의 몸과 10대 소년의 마음이란 어떤 관계인지 지금부터 철학적으로 고민해 보자. 우선 몸과 마음 둘 중에서 어떤 것이 더 근원적인 걸까? 숲의 나무 하나하나 도끼로 넘어뜨리며 나가는 고된 길이 예상되므로 심약자, 노인, 어린이, 임산부 등등은 각자가 알아서 할 일이다. 먼저 마음을 근원으로 보는 시각 : 대표적인 사람이 데카르트인데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라는 유명한 카피를 남겼더랬다. 이 때 생각이란 내가 나를 생각하는 이른바 ‘반성적 사유’로 내 마음이 내 마음을 생각의 대상으로 삼고, 그렇게 내 마음을 대상으로 삼고 사유하는 내 마음이라는 그 주체를 또다시 사유의 대상으로 삼는 또 다른 주체로서의 내 마음이 존재하고 계속 이런 식이다. 이렇게 되면 마음은 제 자신의 꼬리만을 향해 빙빙 돌 뿐 그 바깥으로 빠져나올 방법(타인과의 소통)이란 도무지 존재하지 않는다. 이를 유식한 말로 유아론(唯我論)적인 개인이라고 한다는데, 근대적 개인의 개념은 이런 유아론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원리상 타인을 인정할 수 없다. 결국 서로가 서로를 향해 ‘목숨을 건 투쟁’에 돌입할 수밖에 없다는 우리 시대의 슬픈 자화상은 근대 자본주의의 배타적 개인이라는 개념을 낳은 이 유아론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비슷한 견해를 갖고 있는 이가 라이프니츠인데 그는 진정으로 존재하는 것을 ‘모나드’라 칭했다. 이때 그가 말하는 길이를 갖지 않는 모나드란(길이를 갖는다는 것은 또 다시 무언가로 나뉠 수 있으므로 근원적이라 할 수 없다는 논리) 물질이 아니라 정신이다. → 이 두 사람처럼 마음을 더 근원적인 것으로 상정하면 우리는 더 이상 타인과 소통할 수 없는 존재로 전락하고 만다. 이런 닫힘의 철학 위에 근대 자본주의가 철옹성처럼 서 있다.
그렇다면 몸이 더 근원적이지 않을까 : 이런 소통불능의 상태를 피하기 위해서 우린 다른 대안이 필요하다. 몸이 더 근원적이라는, 즉 마음이나 생각 이런 것조차 마음이 아니라 몸이 하는 것으로 보자는 과감한 시각 이른바 ‘몸주체 이론’이 그것이다. 몸이 말하고, 몸이 느끼고, 몸이 지각하고, 몸이 의지를 발동하고, 몸이 판단하고, 몸이 미치고... 물론 이 논리 역시 빈틈없이 완벽하게 정당화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오류를 낳기도 하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점은, 몸은 지각된다는 것이다(보고 만지고 할 수 있으니까). 몸은 타인의 마음처럼 아예 접근조차 할 수 없는 것이 결코 아니다. 서로의 몸은 서로의 몸을 향해 지각의 차원에서 상당 부분 이미 열려있다. 비록 마음을 좀 더 근원적으로 보기는 했지만 의식이 하는 작용 중에서 지각작용이야말로 가장 근원적이라는 주장을 펼친 후설의 이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다면, 이러한 지각작용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판단, 평가, 소원, 상상 등과 같은 작용들 또한 타인에게 어느 정도는 열려있는 상태라고 볼 수 있다. 즉, 몸은 지각적으로 타인에게 열려 있고, 우리가 흔히 정신적인 작용이라 말하는 것들 또한 이러한 지각작용을 바탕으로 해서 성립함으로 마음의 영역이라 일컬어지는 작용들조차 타인에게 어느 정도 열려 있는 것이다. → 이런 몸주체 이론을 받아들이면 이제 우리는 마음이 아니라 행동을, 그 행동과 절대로 뗄 수 없는 감각을 더 근원적인 것으로 보게 된다. 여기까지 오는 데 난관도 많고 힘도 들었지만 어쨌거나 이로써 소통불능의 상태를 이끈 갇힘의 철학들은 박살냈다. 몸의 판정승! 그렇다면 마음의 대표주자로 인식되는 언어나 생각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몸이 더 근원적인 것이라고 볼 때, 우리가 생각들을 주고받는다고 여기는 언어조차 실은 생각이 아니라 나의 감각과 행동들을 주고받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생각도 마찬가지다. 생각의 내용을 잘 들여다보면, 생각은 생각에서 생겨날 수 없다. 생각은 늘 생각을 할 대상을 필요로 한다. 즉 생각의 내용은 생각이 아닌 것들을 바탕으로 한다. 생각이 아닌 것들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감각이고 행동이다. 빰빠라빠~~~ 드디어 몸이 더 근원적인 것으로 인정되는 감격적인 순간이다. 같은 논리를 펼치는 현상학자 메를로 퐁티가 주장하는 바에 의하면 우리의 몸은 일반화된 구조적 장치 이른바 ‘몸틀’이라는 것을 지니고 있다. 몸틀이란 살면서 각자의 몸에 일정한 형태로 유형화된 행동방식들로서 우리 몸에 습관처럼 배어 있는 것들이다. 따라서 사람마다 갖고 있는 몸틀의 종류도 다르고 수도 다르다. 몸틀의 수준과 깊이도 물론 다를 수밖에 없다. 자신이 구비하고 있는 몸틀에 따라서 행동하는 방식이 다르고 그래서 몸틀이 너무 다른 사람들을 만나면 소통이 쉽지 않다. 하지만 몸틀이 다른 사람과 만난다는 것은 그만큼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게 된다는 것이다. 나와는 다른 몸틀을 가진 사람을 만났을 때 그 사람이 하는 행동으로 인해 나는 그에 대응하는 새로운 감각들을 생성해낸다. 내 세계가, 내가 향유할 수 있는 시공간이 좀 더 넓고 좀 더 깊게 확장되는 것이다. 결국 몸을 근원적으로 보았을 때야말로, 우리는 서로에게 지각적, 감각적으로 열려 있을 수 있고 이런 감각을 바탕으로 소통을 이룰 수 있고, 이러한 소통을 바탕으로 공유적 향유를 성취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 자신의 삶을 향유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타인을 향해 몸을 열어야한다. 이 시대의 철학은 닫힘의 철학이 아니라 열림의 철학이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전혀 엉뚱한 얘기로부터 시작하는 것 같아도 언제나 항상 소통과 공유적 향유라는 목적지를 잃지 않고 찾아내는 나의 길찾기 솜씨에 조금은 감탄하며 자뻑하고 있다. 5강 사회적인 욕망과 권력을 넘어서 4강의 정리가 길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철학에 문외한인 내가 생각해보아도 몸이 마음까지도 아우르는 주체로서 당당히 우뚝 서는 이 대목이야말로 이 강좌 전체의 클라이막스 내지 결정타의 순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 결정타의 공은 이제 어디로 굴러갈 것인가? 몸이, 행동이, 감각이 중요하고 더 근원적이라는 건 이제 알겠는데 그래서 뭐 어쩌라고?... 아마 이러고들 계실 것이다. 그래서 5강 6강은 짧게 질러간다. 4강에서 숲의 나무들을 하나하나 베어내며 길을 갔다면 5강 6강부턴 그 숲 위로 헬기 타고 지나간다. 한방에 훅~~~ 두두두두(헬기소리)~~~ 이쯤에서 권력이 강의에 등장하는 건 이름도 찬란한 그 미셀 푸코 덕분이다. 푸코에게 있어 권력관계란 몸의 관계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몸이 모든 것의 근원인 상태에서, 권력은 그러한 감각덩어리로서의 몸 다시 말해 그 몸의 감각들을 지배하고자 한다. ‘생체권력’이라는 멋드러진 단어를 푸코아저씨가 여기에 갖다 붙였단다. 감각의 관계는 좀처럼 눈으로 확인하기가 쉽지 않다. 따라서 이러한 감각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권력관계도 항상 명시적으로 이루어지는 건 아니다(푸코: 권력관계의 미시망). 예를 들어 군대의 지휘관과 부하 사이의 관계에 존재하는 눈에 확 띄는 권력관계들도 있지만, 일상적인 대화에서 내세우는 언어의 선택에도 분명 권력관계는 존재한다. 이는 MBC에서 다큐로 만든 걸 본 적이 있어 이해가 쉽다. 내가 모르는 어려운 영어단어들을 계속해서 사용하거나 전혀 알지 못하는 분야가 화제로 떠올랐을 때 사람들이 어떻게 그 공간에서 배척되고 소외되는가 하는 줄거리였다. 강준만은 이를 두고 지식폭력이라고까지 하는 것 같던데... 이러한 권력이 오늘날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우리 ‘감각덩어리들’과는 어떻게 맞닿아 있는 걸까? 자본주의 아래서 감각의 양을 더 늘리기 위해서는 자본이 중요한 수단이 된다. 당연하다. 돈이 있어야 골라먹는 재미를 느낄 것 아닌가... 한편 자본의 입장에서도 자본을 더 증식시키려면 감각에 호소하여 상품을 파는 길 밖에 없다. 이렇게 감각과 자본은 서로가 서로에게 수단이 된다.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게 있다. 감각의 향유를 위해 자본이 필요하다는 것은 사실 그 자본을 얻기 위해 노동을 해야한다는 어찌보면 너무나도 당연한 칼날을 품고 있다. 그것이 왜 칼날인고 하니... 우리가 얻고자 하는 건 감각이었는데, 그 감각을 얻기 위해 자본이 필요하고 그 자본을 얻기 위해 다시 노동을 해야하고 거기까진 좋은데 결국 노동을 하느라 감각을 향유할 여유는 점점 사라져간다는 딜레마만이 덩그러니 남기 때문이다. 결국 본말이 전도된 삶, 감각을 향유하기 위한 노동이 아니라 노동에 치여 감각적 향유라는 원래 삶의 목적마저 까마득히 잊어버린 삶을 살고 있는 우리 불쌍한 감각덩어리들만이 득실거리는 세상이 되고 말았다. 이렇게 되면 모든 것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감각도 노동을 강요하는 자본과의 싸움에서 여지없이 KO패 당하고 만다. 아니라고? 근사한 아파트 한 채를 감각적으로 향유하기 위해 우리가 저당잡힌 인생의 대부분이 그걸 또렷이 입증한다. 그런 것도 감각을 향유하는 게 아니냐고 반문하실 분도 계실 것이다. 그렇다. 집, 차, 더 많은 돈을 소유하는 것도 감각이다. 마르크스는 이걸 소유감각이라고 이름붙였다. 하지만 이러한 소유감각은 실제 소비를 통해 느끼는 감각에 비하면 추상적이고 관념적이고 획일적이서 제대로 된 감각이 아니다. 소유감각은 다른 모든 실재의 감각을 억누르고 폄하하는 철저히 왜곡된 감각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자본을 소유함으로써 얻어지는 감각은 더 나아가 다른 사람의 몸(감각)에 대해 권력을 행사하고자 하는 권력감각으로까지 발전한다. 나의 돈으로 타인의 노동력을 살 수 있다는 걸 생각해보면 된다. 우리는 돈으로 남의 노동력을 사는 행위를 통해, 즉 그 사람의 몸을 일정하게 구속함으로써 그 사람이 누릴 수 있는 감각을 시간적 공간적으로 통제할 수 있다. 결국 자본주의 아래에서 우리는 실제적인 감각은 억누르고 철저히 왜곡된 소유감각, 권력감각을 통해 타인의 삶을 통제하려드는 파시즘적인 욕망들만을 키워나가고 있는 셈이다. 즉 지금 시점에서 우리의 삶은 순수하고도 실제적인 감각의 존립이 점점 더 어려워지는 삶으로 내몰리고 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이 질문에 대해 철학자 조광제가 제시하는 답은 이렇다. 불필요한 감각들을 정리하라!!! 왜곡된 감각들을 얻기 위한 쓸데없는 노동은 줄이고 실제 감각들을 공유적으로 향유하기 위한 시간적 공간적 여유를 충분히 확보하라!!! 하지만 정답을 찾았다고 마냥 기쁘지만은 않은 이 심리는 뭐지? .말은 쉽고 실천은 어렵고, 이론은 쉽고 행동은 어렵고... 끙! 어쨌거나 권력에서 출발하여 감각의 공유적 향유로까지 오는 길찾기(5강 정리) 또 성공~~ 6강 예술세계로의 초대 자본의 무한한 증식이라는 전제 없이도 감각을 공유적으로 향유할 수 있는 사회, 그를 위해 국가가 자본(기술)을 독점하고 → 사용가치만을 통용시켜 돈을 줘야만 살 수 있는 상품의 수를 현격히 줄이고 → 사야하는 상품의 수가 줄어드니 그걸 사기 위해 노동해야 하는 시간도 줄어들고 → 이렇게 노동이 줄어들면 노동을 구매함으로써 얻어지는 권력감각도 줄어들고 → 이럴 줄 알았는데 권력의 문제는 생각보다 쉽게 해결이 안 되고 → 이런 사람들 간의 권력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권력을 새롭게 인식시키기 위한 인간 재교육 과정이 필요하게 되고 → 그 과정에서 더 집약되고 독점적인 권력이 창출되더라~~~ 이게 공산주의가 걸어간 쇠락의 발자취다. 하지만 이 새드 무비가 마냥 슬프지만은 않은 이유는, 왜곡된 감각과 자본과 권력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뭇 인간들의 몸부림이 이 세상 곳곳에서 아직 온기를 잃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쯤에서 예술이 등장해 주신다. 5강과 연결시켜 이야기를 하자면, 결국 왜곡된 감각, 자본, 파시즘적 욕망, 불필요한 감각 등에서 벗어나 실제적인 순수 감각들을 향유하자는 것이 이 시대 나름의 대안이었는데 바로 여기서 우리는 예술과 필연적으로 조우하게 된다. 정신 차리고 보니, 아니 헬기타고 한방에 간다던 5강, 6강이 왜 이러냐.. 잠시 반성적 사유 모드... 이 헬기가 1953産 소련제라서 그렇다는 변명을 깔고 어쨌든 6강은 좀 더 스피디하게 고고!!! 전통적인 예술의 개념으로 보면, 관객 내지 청중으로 불리는 일반 대중(예술 향유자)는 항상 수동적인 존재일 수 밖에 없다. 예술에 대한 감상을 통해 간접적으로밖에 다가갈 수 없다는 뜻이다. 이러한 상태라면 우리는 예술을 공유적으로 향유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20세기에 등장한 깨우친 예술가들은 예술을 극소수 있는 자들의 전유물에서 다시 일반대중에게로 돌려주기 위해 예술가과 관객 사이의 장벽을 허무는 작업들을 시도하기 시작했다. 이런 예술을 아방가르드(전위예술)라 칭하는데 다다이즘, 미래파, 입체파, 초현실주의 등이 여기에 속한다. 이런 개념에서 예술을 다시 들여다보면 우린 누구나 예술가가 될 수 있고 세상의 모든 것이 예술품일 수 있다. 이것이 가끔 나를 헷갈리게 만드는 현대미술의 정체다. 이러한 현대예술은 전통적인 예술관을 무너뜨리는 것 같지만 잘 생각해 보면 오히려 모든 우주적인 존재 자체를 예술로 봄으로써 예술철학의 지평을 확산시키고 있다. 즉 가끔 정말 이해가 안 가는 전위예술가들의 장난과 같은 퍼포먼스도 예술을 공유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이해한다면 이쁘게 봐 줄 수도 있다는 얘기다. 현대미술의 차원에서만 보더라도 배타적 소유를 뛰어넘어 감각의 공유적 향유를 위한 인간의 몸부림은 공산주의, 사회주의의 실패를 겪으면서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임을 알 수 있다. 내가 바로 예술가이고 세상의 모든 것이 예술이라는 개념. 이러한 예술의 초대에 적극적으로 응한다는 건 자본주의가 부추기는 배타적인 소유와 그에 따른 소유감각의 쇠사슬을 끊고 나의 감각을 타인과 공유적으로 향유함으로써 서로가 서로를 통해 더욱 강화, 심화되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인다는 것, 자본주의적인 삶의 방식을 혁명적으로 파기하겠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내가 제일 어러워 하는 ‘예술’을 통해서도 감각의 공유적 향유(소통)라는 이 강좌 본연의 목적지를 길을 잃지 않고 무사히 찾아냈다. 저번 후기처럼 엑기스만 뽑아 박스 형태로 정리하고자 하는 욕구는 묻어 두어야겠다. 여기까지 오는 데만도 장장 6시간이 걸린 관계로... 에너지 절약을 통해 전지구적 환경재난을 막기 위해 컴퓨터 사용을 자제함으로써.... 뭔 소리냐 이건... 강의를 마치며.... 수업을 너무 열심히 들은 관계로 박스 형태의 요약은 없어도 그동안 있었던 철학 강의 총 6강을 한 마디로 정의할 수는 있다. 삶을 제대로 누리려면 제대로 된 감각을 타인과 제대로 소통하라! 조금 쉬었다가, 난 내 몸속에 자리잡은 10대 소년의 감수성을 불러내 진지하게 소주 한잔 기울이며 소통할 예정이다(이건 인터넷을 통해 공유에 관한 온갖 정보들을 수렴하겠다는 말과 동일어이다. 이때 공유란 그 공유가 아니라 배우 공유... 헷갈려). 혹 내가 배우 공유를 좋아하게 된 것도 이 철학 강의 때문은 아닐까? 어쨌든 서두에서 제기했던 내 개인적인 문제, 38살 아줌마 몸과 10대 소년인 마음과의 관계 정리는 대충 원만하게 이루어질 것 같다. 그 마음이 몸에서 왔다는데... 어찌 마음의 철없음을 탓하리오. 내 몸은 비록 늙었어도 여전히 한 구석에 10대 소년의 마음을 숨겨두고 있는 것을... 그게 철학을 통해서 바라본 현재의 나다. 강의 가이드 역할을 훌륭히 소화해 주신 조광제 선생님, 철학이라는 낯선 여행길의 든든한 길동무가 되어주신 수강생 여러분에게도 감사의 말 전한다.
사족 : 철학은... 의외로 재밌다. ㅋㅋㅋ 철학, 삶을 사랑하는 지혜 1-3강 후기 보기 => 클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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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시와 공간의 인문학 | 서울, 도시와 공간의 인문학[1, 2강] | pjm | 2010.4.30 | |||
4월 13일 [서울, 도시와 공간의 인문학] 강좌가 막을 올렸다. <서울은 깊다>의 저자이신 전우용 선생님이 1강과 2강의 강의를 맡아 열강해주셨다. 전우용 선생님의 강의는 "도시"라는 공간이 생기게 된 배경과 "서울"이 조선의 도시로 자리매김한 과정을 들을 수 있었다.
1강 조선이 서울에 담은 꿈 문명과 도시 고대 사람들은 '신'을 매우 중시했다. 자연재해나 죽음처럼 사람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일들이 빈번했고 그런 문제의 해결을 위해 인간보다 우월한 존재를 상정했다. 그들은 '신'이 자연 속에 있다고 믿었으며 이런 믿음은 자연숭배-하늘 숭배 사상으로 발전했다. (예를 들어 하늘나라를 옥황상제가 사는 신성한 곳으로 생각했던 식이다)
신석기 시대 농업혁명으로 인해 발생한 잉여생산은 인구의 축적을 낳았으며 드디어 "도시"가 만들어 지기 시작한다. 도시는 농사를 짓지 않는 땅에 오로지 신을 위한 공간으로 처음 등장했다. 그 곳에 신에게 봉사하는 사람들이 살았으며 농사일에서 자유로우며 신을 위한 의식에 치중했던 이들의 생활과 문화는 농촌보다 훨씬 화려하고 다양했다. 도시에 권력(신성권력:사제집단+세속권력:왕)이 집중되면서 이제 도시는 자신의 공간에 권력적 요소들을 드러내게 된다. 권력자들은 이런 가시적인 형태를 통해 사람들에게 도시가 선택받은 특권적인 장소임을 보여주고 싶어했고 그들의 믿음과 신뢰를 얻고자 했다. 특히 도시의 화려하고 웅장한 건조물들은 이를 통해 건물과 그 내부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신성성을 부각하며 일반인들에게 감탄과 존경심을 불러일으키는 효과를 목적으로 장식이 발달했다.
조선이 서울에 담은 꿈 서울은 '새벌-서나벌-셔블-서울'의 변화를 거쳐 만들어진 단어로 순 한글말이며 "가장 신성한 땅"이란 뜻이다. ("새벌"의 "새"는 새로움, 동쪽을 뜻하고 "벌"은 땅을 의미함.) 이성계가 고려의 수도 개경을 버리고 새로운 도읍지로 한양(서울)을 택한 것은 개경에 깊게 뿌리내리고 있던 구 특권 세력의 해체와 새 나라를 위한 건국이념을 세우기 위함이었다. 정도전은 이런 서울을 설계한 인물로, 그는 자신의 이상이던 유교이념을 정립하기 위해 주자성리학적 공간관을 바탕으로 도시를 건설한다. 전조후시前朝後市 : 궁궐의 전면에 관청을, 후면에 시전을 배치 좌모우사左廟右社 : 궁궐의 왼쪽에 종묘 오른쪽에 사직울 배치
제후칠궤諸侯七軌 : 제후의 길(광화문)은 마차 7대가 나란히 지나갈 수 있는 길로 함. 경복궁을 창건할 때도 주자성리학에 따르는 정도전의 이상이 반영된다. 경복궁을 보면, 40칸에 이르는 수정전이나 신하들과 함께 하는 연회를 열었던 경회루 등 신하들을 위한 공간이 왕을 위한 공간에 뒤지지 않음이 드러난다. 이는 신하들의 정치참여를 격려하여 신권과 왕권을 대등한 관계로 유지하고자 했던 정도전의 정치 이상이 드러나 있다. 그러나 이런 주자성리학에 입각한 궁궐을 역대 조선 왕들은 그리 달가워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들은 끊임없이 경복궁을 외면하고 다른 궁에서 기거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 덕분에 조선왕조의 5대 궁궐은 지금까지도 공원이 거의 없는 서울에서 시민들이 그나마 숨 쉴 수 있는 녹지와 휴식공간이 되어 주고 있다.
조선 초 한양(서울)은 새로운 도시로서 활기가 넘쳐나는 도시였다고 한다. 과거제를 거쳐 각 지역에서 올라온 신진사대부들을 통해 각 지역의 문화가 융합되면서 한양(서울)만의 문화가 꽃을 피웠던 것이다. 세종대왕 시기의 새로운 발명과 창조가 가능했던 것도 조선 초기 수도 한양의 문화에 영향을 입은 것이었을 것이다.(2010년 서울은 어떤가?) 에밀 졸라는 "백화점은 현대의 신전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이를 바꿔 말하면 "물질(자본)은 현대의 신이다."라고도 할 수 있다. 실제로 백화점이나 면세점이 과거의 신전이 위치하던 곳을 차지하는 경우가 많다. 현대 자본주의의 신은 자본 그 자체(물신)이지 인격이나 어떤 가치를 담고 있는 존재가 아니다. 요즘 사람들의 가치 선택 기준은 "이게 돈이 되는가?"이다. 그러나 이런 질문으로는 도시가 자본의 수단으로밖에 되지 않는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정말 인간적인 것은 무엇인가?"를 묻고, "우리 도시의 모습이 어떻게 되는 것이 더 인간적인가?"를 자문해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도시는 어디에 있을까? 바로 우리 자신들의 마음을 바꾸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할 일이다
* * * * * * * * 4월 20일 참여연대에서 두번째 수업이 있었다. 2강 서울, 근대로 향하다 사람을 가장 크게 변화시키는 요인은 무엇일까? 혹자는 신념이나 가치 이데올로기라고 말할지 모르고, 혹자는 지식체계의 변화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봤을 때 가장 크고 중요한 삶의 변화 요인은 바로 "자연"이다. 기후변화같은 자연문제는 앞으로도 우리 미래의 삶 자체를 바꿀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요인이 될 것이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임진왜란 역시 17세기 소빙기에서부터 시작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7세기 동아시아 대륙에 소빙기가 찾아오자 기상 이변으로 인한 농작물 피해와 기근, 질병이 만연하게 되고 이는 당시 동아시아에 존재하던 국가-명나라, 청나라, 조선, 일본-들이 자국의 문제를 외부를 통해 해소하는 방식을 택하게 만든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며 서울은 기능과 모습이 크게 파괴된다. 인구는 급격히 감소하고 기근과 전염병은 끊이질 않았다. 많은 인구 감소로 양민의 수가 줄어들자 이를 늘리기 위해 군공과 면천을 실시하는 등 폐쇄적이던 신분제도도 흔들리기 시작한다. 전쟁 후 이런 어수선함 속에서 서울의 재건을 위해 궁궐 복구와 성곽 수리 및 군사 시설 정비가 시작된다. 사회 전체가 이전의 방법으로는 해석할 수 없는 새로운 방향으로 빠르게 변화하자 실학처럼 새로운 학문이 등장해 당시 사회 모습을 다루고자 하기도 했다. 이런 어려움을 거쳐 농업생산력 및 의학의 발전을 통해 인구가 증가하면서 서울도 늘어난 인구와 함께 확장하기 시작한다. 농촌의 잉여인구가 도시로 진입하며 서울 교외 지역 확장도 일어났다. 특히 서울의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던 시기가 두 번 있는데 한 번은 한국전쟁 직후이고 또 한 번은 양란(임진왜란,병자호란) 직후인 17세기 중반이다. 도시공간이 계속 팽창하면서 18세기 한양(서울)은 근대적 양상을 띄게 된다. 근대적인 도시 문제(주택문제, 일자리문제, 환경문제, 범죄 등)들도 발생하는데 이는 서울의 독특한 문화를 형성하는데 한 몫을 하기도 한다. 이런 모습들을 통해 우리는 일본 우파들이 말하는 "일제침략이 조선의 근대성에 이바지했다"는 주장이 전혀 맞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근대화와 도시화가 같은 개념에서 시작된다고 보면 이미 일제 침략 전인 18세기에 근대적인 모습이 서울에 존재했던 것이다. 대한제국의 황제 고종은 당시 조선의 기득권 세력이자 비리 투성이었던 노론을 넘어서기 위해 더 아래 신분인 일반 백성들과 손잡기를 원했고 이는 민본적 절대주의라고 말할 수 있다. 고종은 도시를 민본적 절대주의가 드러나 있는 공간으로 만들고자 했다. 시민공원과 상설시장의 등장은 백성을 위한 고종의 의도가 잘 드러난 도시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종로를 관통하는 동서축을 강조한 "황도건설"은 이 길을 주로 이용하게 될 국민에 대한 배려이자 근대성의 표지라고 할 수 있으며 무엇보다 자주독립, 전제황권을 도시 공간 위에 표시함으로서 고종의 정치적 의도를 잘 드러내며 조선시대 도시근대화의 면모를 볼 수 있는 것이다.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간에 종로를 중심축으로 삼았던 것은 이후 일제 식민지 시기에 그나마 종로가 일본인 중심의 명동에 맞서 조선인 상권의 중심이 되는데 큰 역할을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질의응답 시간에 많은 질문이 오갔다. 그 중에 가장 의미심장했던 질문과 답변을 올려본다. "서울을 주도할 가치와 신념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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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드라마, 사료로 다시보기 | 역사드라마, 사료로 다시보기[7강] | 뚜빠뚜빠띠 | 2010.4.27 | |||
어느덧 7강입니다. 남은 8강이 조별 시놉시스 발표라는 것을 감안하면, 사료를 토대로 기존 역사드라마를 재고찰하는 것은 마지막인 셈입니다. 매 강의가 끝날 때마다 주은경 아카데미 부원장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있죠. “우리가 모르는 게 정말 많구나.” 소크라테스는 상대로 하여금 스스로의 무지를 성찰케 하는 방법으로 문답법을 썼다 합니다, 상대방의 대답이 막힐 때까지 묻고 또 묻는 거죠. 그리고는 이미 떡실신한 상대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 자신을 알라.” 저에게는 이 <역사드라마, 사료로 다시보기> 강의가 소크라테스의 물음보다도 곤혹스러운 질문 공세였습니다. 처음 <선덕여왕> 강의를 들었을 때의 공포스러운 좌절감을 기억합니다. 6~7세기 한반도를 종횡무진한 전덕재 선생님의 강의에 정신은 몇 번이고 길을 잃었습니다. 밀실에서도 미아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처음 깨달았습니다. 강의 후기를 쓰는 일은 또 다른 고통이었습니다. 희미한 기억 조각들을 어렵게 반추하며 하나씩 꿰는 과정은 많은 인내를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조심스럽게 아리아드네의 실을 붙잡고 미로를 탈출하는 과정은 기쁨이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머리 속에 작게나마 복원된 과거상를 보며 조금은 이 복잡한 역사의 미로를 견딜 수 있게 되었습니다. 드라마 <제중원>을 중심으로 개화기 병원의 역사를 살펴본 7강도 저의 무지를 통렬하게 드러내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이 괴롭고 즐거운 미로를 알려주신 분은 주진오 상명대 역사콘텐츠학과 교수님입니다. 선생님이 던져주신 아리아드네의 실을 조심스럽게 쥐어 봅니다. 길을 잃을지 모르니 바짝 따라 오세요. 출발~
▲ 주진오 교수 조선 정부가 세운 최초의 근대식 서양 병원, 제중원. 드라마에서 그리는 제중원은 명의(名醫) 알렌의 주도로 세워진 것으로 그려집니다. 알렌은 1858년 미국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 “1년 동안 콜럼버스에서 의학을 공부한 후 1883년 3월 신시내티의 마이애미의과대학을 졸업하여 의사면허를 취득”, 같은 해 10월 북장로회 선교사로 중국에 들렀다가, 이듬해인 1884년 9월 우리나라에 들어온 인물입니다. 젊은 나이에 짧은 의학 경력, 과연 알렌이 드라마에서 묘사하는 것처럼 훌륭한 의사였을지 의문입니다. 실제 그는 임상경험이 부족해 치료 중 환자가 죽는 일이 일어나기도 했다 합니다. 아무튼 알렌은 조선 주재 미국 공사관의 무급의사로 일하다, 같은 해 12월 일어난 갑신정변 와중에 외무협판 묄렌도르프의 소개로 민영익을 구합니다. 여기서 알렌은 고종의 신뢰를 크게 얻습니다. 고종의 어의가 되는가 하면, 각국 공사관의 부속의사로 임명될 정도로요. 이러한 신뢰를 바탕으로 1885년 1월 알렌은 고종에게 제중원 설립 제안을 하게 되지요. 이 제안에 고종은 알렌에게 홍영식의 집을 줘 제중원을 설립하게 합니다. 홍영식은 갑신정변을 주도해 죽은 인물이죠. 지금 종로구 헌법재판소 안에 그 터가 있는 홍영식의 집을 조정에서 몰수했다가 넘긴 것입니다. 1882년에 폐지된 전통적 대민의료기구인 혜민서의 후신격인 제중원은 1885년 4월에 설립됩니다. 설립 초기 잠깐 ‘광혜원’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지만, 며칠 가지 않아 ‘제중원’으로 부표됩니다. ‘부표’란 국왕의 재가를 받았던 것을 수정할 때 쓰는 용어라고 합니다. 갑신정변으로부터 제중원 설립까지 걸린 시간은 고작 넉달. 굉장히 빠르게 일이 진척된 셈입니다. 드라마에서는 제중원을 마치 알렌이 만든 것처럼 그리고 있지만 그렇지 않다고 합니다. 조선 정부는 이미 그 전부터 서양의학에 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가령 고종은 1884년 여름, 잠시 조선에 왔던 일본 주재 감리교 선교사 맥클레이가 김옥균을 통해 제안한 병원과 학교 설립에 대해 허가의 뜻을 밝힌 바 있습니다. 그런데 갑신정변이 터지면서 김옥균이 역적이 되자 감리교를 통해 추진되던 방식이 막혀버린 것입니다. 하지만 감리교는 이후 선교 의사 스크랜튼이 1885년 9월에 자체적으로 진료소, 시병원(施病院)을 열었습니다. 제중원 설립이 일사천리로 진행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토양이 바탕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하나 의문이 생깁니다. 고종이 서양식 병원을 추진할 생각이었다면 여러 방법이 있었을텐데, 왜 굳이 알렌에게 혜택을 주는 방법을 택했나 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대답은 당시 복잡했던 한반도 주변 정세와 관련이 있습니다. 제국 열강의 한반도 지배 야욕에 고종은 지칠대로 지쳐 있었습니다. 임오군란이니 갑신정변이니 하는 사건들에 시달린 고종에게, 미국은 그나마 조선 영토에 대한 욕심이 없는 나라로 비쳤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일본이나 청을 견제할 수 있는, 신뢰할만한 나라라는 기대를 품었던 것입니다. 실제로 미국은 조선의 영토보다는 선교나 무역에 힘을 쏟았습니다. 그래서 알렌을 통해 미국을 끌어 들이려는 계산이 작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실제로 알렌은 1901년부터 주한 미국 특명전권공사로 활동하며 친한적인 태도를 보여 루즈벨트와 갈등하다 해임됩니다. 그런 고종의 기대 때문일까요? 드라마는 미국을 지나치게 미화하고 있습니다. 미국 역시 제국주의적 팽창욕에 경인철도 부설권, 운산광산 채굴권 등을 가져간 나라인데도 말이죠. 알렌이 친한적인 태도를 보인 본심 역시 조선의 독립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일본에게 빼앗길 이권에 있었습니다. 일본은 악하게 미국은 선하게 그려놓은 드라마의 선악이분법적 민족주의는 오류라는 것이 선생님의 설명입니다. 일본 역시 개화기에 가이세(카이로세) 등 의사를 비롯해,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나라 근대 의학 발전에 기여한 바가 있음에도, 미국의 역할만 지나치게 부각했다는 것입니다. 아무튼 제중원 설립 후 그 안에서 알렌과 갈등을 빚게 되는 또 한 명의 선교사가 있습니다. 헤론입니다. 미국인인 그는 의과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하는가 하면, 모교로부터 교수직을 제안받을 정도로 실력이 뛰어난 의사였습니다. 알렌보다 일찍 북장로회를 통해 조선에 파견될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결국 한발 늦어 1885년 6월에야 조선에 들어옵니다. 알렌과 헤론은 물과 기름 같이 갈등했다고 합니다. “알렌은 의료 사업이 곧 선교 사업이라 직접적인 선교 활동보다는 의료 활동에 무게를 두었지만 헤론의 경우에는 의료는 선교의 수단일 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목사 선교사 언더우드가 헤론 편을 들면서” 알렌은 늘 압박을 받아야 했습니다. 결국 알렌은, 1887년 조선 정부가 미국에 공사관을 설치하며 알렌을 참찬관으로 임명하자, 선교사직을 사임하고 미국으로 돌아갑니다. 그 자리를 헤론이 대신하다 1890년 운명합니다. 그리고 알렌은 1889년 다시 조선으로 돌아와, 헤론 사후 반년간 제중원에 대한 책임을 다시 맡지요. 아무튼 제중원은 알렌의 책임 하에 운영되었는데, 그렇다고 해서 드라마가 그리는 것처럼 알렌이 제중원의 1대 원장인 것은 아닙니다. 알렌은 1대 원장은커녕, 1887년까지는 정식 직원도 아니었습니다. 제중원은 엄연한 국가 기구였고 운영권 역시 국가에 있었습니다. 1894년 에비슨이 제중원에 책임을 맡을 무렵에 가서야, 조선정부의 무관심과 불성실 등으로 제중원을 운영하기가 매우 어려워, 운영권이 북장로회선교부에 이관됩니다. 그리고 에비슨은 클리블랜드의 실업가이자 자선사업가인 세브란스가 기증한 재원으로 1904년에 조선 최초의 현대식 병원인 세브란스 병원을 건립합니다. 오늘날의 연세대학교의 ‘세’는 이 세브란스의 첫음을 딴 것입니다. “대한제국기에 제중원은 세브란스병원으로 발전해 나갔다. 평소 연합병원의 건설은 물론 의료사업을 효율적으로 진행시킬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에비슨은 건축가 친구인 고든에게 부탁해 40명의 환자를 입원시킬 수 있는 병원의 설계도면을 부탁하였다. 그리고 선교부의 요청으로 1900년 4월말 뉴욕에서 열린 만국선교대회에 참석한 에비슨의 강연을 들은 부호 세브란스가 병원 건립 기금으로 1만 달러를 희사하면서 병원 건축을 위한 계기가 마련되었다. 비록 1만 달러의 절반 정도를 병원 건립에 사용하라고 주장한 평양 선교사들의 반대가 있었지만, 세브란스가 금액 전부를 병원 건립에 사용하게 함으로써 무마되었다. 부지 선정 문제로 인해 지연되던 병원 건립계획은 부지 매입을 위한 세브란스의 추가 기금으로 인해 속도가 붙었고, 남대문 밖 남산 기슭 복숭아골에 병원 부지 매입이 이루어졌다. 조선정부의 건축허가 불허, 건축자재 값 폭등 등 여러 어려움이 계속되었지만, 마침내 1904년 9월 23일 새 병원의 봉헌식을 올림으로써 입원실 규모가 40병상인 한국 최초의 현대식 종합병원이 문을 열게 되었다. 병원의 이름은 기증자의 이름을 따 '세브란스기념병원'이라 불렀고, '기념'을 생략해서 부르기도 했다.” 그리고 이 세브란스의학교는 1908년 6월 우리나라 최초의 의사 7명을 배출하는데, 그 중 한 사람이 바로 드라마 <제중원>의 주인공, 황정의 모델이 된 박서양입니다. 드라마에서는 황정이 제중원 설립과 동시에 그곳에서 일하는 것으로 그려집니다. 하지만 박서양은 1885년 9월 생으로 제중원이 설립된 해에 태어난 인물이라, 황정에 대한 설정은 백정 부분만 따온 것일 뿐 나머지는 허구입니다. “박서양은 1885년 9월 30일 최하층으로 취급받던 백정 박성춘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박성춘은, 1893년 서울에 도착한지 얼마 되지 않았던 에비슨이 신분을 차별하지 않고 직접 몇 번에 걸친 왕진을 통해 자신을 성실하게 치료해 준 것에 감명을 받아 개신교인이 되었다. (중략) 여러모로 에비슨과 인연이 있었던 박성춘은 그의 초대로 아들인 박서양의 혼인식에 참석한 에비슨에게 자식의 교육을 부탁했다. 그래서 얼마 후 박서양의 부친의 부탁을 받은 에비슨은 박서양을 병원에 데려왔고, 그의 사람됨을 알아보기 위해 처음에는 병원 바닥 청소와 침대정리 및 잡무를 시켰다. 박서양이 힘든 모든 일을 아무 불평 없이 거뜬히 처리하자 에비슨은 그에게 글공부를 시작하게 하고 1900년 8월 30일 정규과정으로 입학시켰다. 박서양은 1908년 6월 우리나라 최초의 7명의 의사 중 한명으로 세브란스의학교를 졸업하였다. 그는 졸업 직후 화학을 맡아 강의를 하다가 다음에 해부학을 가르쳤고, 외과에서 근무하였다. 또한 세브란스 간호원양성소의 교수로 활동하였다. 학교와 후진양성을 위해 많은 활동을 했다. 그는 1918년까지 학교에 근무하다가 사임하고 만주 용정의 국자가局子街에 구세의원을 개업하였다.”
▲ 질의 응답 시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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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드라마, 사료로 다시보기 | 역사드라마, 사료로 다시보기[6강] | 뚜빠뚜빠띠 | 2010.4.20 | |||
엉기조차 벙기조차 엉기벙기 버벙기. 무슨 말인가 싶으시죠? 어릴 적 읽었던 전래 동화 속 주인공 이름입니다. 몇 명 자식을 낳았지만 모두 일찍 죽어버려 애가 탄 부부가 있었습니다. 마침 또 하나의 아이를 갖게되자 이번에는 부디 무병장수하라는 바람으로 지은 이름입니다. 이름이 길어야 명도 길다는 무당의 조언이 있었거든요. 사람의 이름이 간혹 이처럼 어떤 사람에 대한 정보를 함축적으로 드러낼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 이름만으로도 능히 그 사람의 일생이 짐작되는 이가 있습니다. 만덕(萬德). 재산을 털어 굶주린 백성들의 가난을 구제한 여인입니다. 누구의 기대가 섞였는지 모르겠지만, 그 주술의 힘이 대단합니다. <역사드라마, 사료로 다시보기> 여섯 번째 강의는 이름값 톡톡히 한 이 여인의 삶을 따라가 보았습니다. 강의는 약자에 대해 따뜻한 시선을 가진 정창권 고려대 국어국문과 교수님이 맡아주셨습니다.
교수님은 스스로를 페미니스트 2세대라 칭했습니다. 저서 <홀로 벼슬하며 그대를 생각하노라>나 <향랑, 산유화로 지다>는 그러한 여성관이 녹아 있는 책들입니다. 우리는 흔히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본 여성사를 ‘남성에 의한 종속사’로 보곤 하죠. 하지만 교수님은 적어도 우리나라만은 그러한 역사의 예외지대라고 말합니다. 정치적인 지위가 아닌 일상 생활의 측면에서 봤을 때 한반도 역사상 여성의 지위는 그렇게 낮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가령 16세기까지만 해도 매맞는 아내 얘기는 찾기 힘듭니다. 오히려 매맞는 남편이야기만 나오지요. 조선 중종 때는 ‘이러다 조선 남자 씨가 마르겠다’는 (다소 엄살섞인) 우려도 있었다 하네요. 이외에 처가살이라던지, 족보에 남녀의 이름을 모두 기재하는 거라던지, 자녀 간 공평한 재산분배 같은 것들을 보아도 그렇습니다. 이런 흐름이 뒤바뀌어 남녀 사이 불평등이 심해진 것은 우리 역사 속에서 불과 2~300년 사이의 일입니다. 18세기 무렵부터 점점 악화된 여성에 대한 대우가 조선 말, 일제 시대를 거치면서 완전한 관행으로 자리잡았고, 오늘날 우리 사회의 남녀 차별의 근원이 된 것입니다. 교수님이 만덕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그 ‘여성사 암흑기’에 드물게 성공한 사례에 만덕이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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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의 눈으로 과학기술을 보다 | 과학기술 6강:과학기술과 시민참여 | 생명은 소중해 | 2010.4.19 | |||
<'마지막'이라는 단어> '마지막'이라는 단어는 힘이 세다! 마지막 순간, 마지막 회, 마지막 숨소리, 마지막 세일, 마지막 사랑, 마지막 수업... '마지막'이라는 단어는 다시는 같이 할 수 없을 수도 있다는 엄청난 불안을 안고 있어서 사람들을 긴장시키고 단번에 사람들의 관심을 이끌어낸다.
<마지막 강좌를 향해> '시민의 눈으로 보는 과학기술'의 4강(회사일때문에)과 5강(황당하게 지하철사고로)을 결석해서 마지막 6강좌는 꼭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마지막 강좌에 꼭 가야겠다는 생각에는 지금까지 함께 강좌를 들었던 분들과 마지막 만남이 될 수도 있고 그래서 마지막 강좌를 참석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도 큰 몫을 차지했다. 그리고 이 과학기술 강좌 자체의 마지막도 함께 하고 싶었다. 하여튼 마지막 강좌를 듣기 위해 긴급한 회사일도 모두 때려치우고 경복궁역을 향했다. 서둘렀지만 퇴근시간가까이에 일이 몰려서(이상하게 퇴근시간만 되면 없던 일들도 생긴다) 6시 12분을 넘기고 말았다. 6시 12분은 정자역에서 선릉역방향 지하철이 출발하는 시간이다. 지금까지 경험으로 6시 12분을 넘겨서 지하철을 타면 늦어지는 것 같고 지하철에 사람들이 많았다.
<언제나 즐거운 지하철 책읽기> 다행이 사람이 많지 않았다. 나는 적당한 자리에 서서 '소설 기문둔갑'을 손에 받치고 읽었다. 이 책에 대한 내용은 다 읽었고 뒷부분에 부록으로 있는 기문둔갑에 대한 내용을 읽고 있었다. 정말 시간을 주관하는 신들의 방향을 알고 그 신들과 친하게 지내면 나에게 불운도 비켜갈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하며 진지하게 책을 읽었다. 뒷부분에 있는 흥미로운 숫자들과(가로세로 더해서 모두 같은 수가 나오는) 붉은 부적이 인상적이었다. 도곡역에서 사람들의 파도에 잘 휩쓸려 3호선으로 잘 환승했다. 어느덧 시간은 7시를 막 넘기고 있었다. 언제나 지각하지만 7시를 넘겼다는 것이 마음을 급하게 한다.
<빈자리의 행운, 새로운 경험 하나> 아마 옥수역쯤이었던 것 같다. 내 앞에 자리가 하나 비는 행운을 얻었다. 게다가 7자리중에 오른쪽 끝자리였다. 나는 바로 앉았다. 나는 언젠가 왜 지하철 자리는 7자리씩 만들었을까 하고 궁금해했다. 지하철 한 칸의 좌석수는 7*6 + 3*4(노약자,장애인,임신부를 위한) = 54석이다. 54라는 숫자는 예전 초등학교때 한 반의 학생수가 50여명(49, 50, 51)을 떠올리게 했다. 나는 자리에 앉아서 가방을 안고 가방위에 책을 놓고 읽고 있었다. 아마 약수역쯤에 내 오른쪽 자리가 비더니 누군가가 앉았다. 그 누군가가 앉는 순간 시크한 냄새가 2초동안 났다가 사라졌다. 이 갑작스런 경험에 살짝 눈을 책에서 꺼내 오른쪽으로 움직였다. 거기에 몸집에 좋은 백인 아저씨가 앉아계셨다. 그 순간 '아, 누군가가 백인에게서 난다는 특이한 냄새가 이런 냄새였구나'하고 생각했다. 누군가 백인에게서 나는 냄새를 얘기했을 때 그 때는 내가 왜 그런 냄새를 못 맡을까 혹시 내 후각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나도 이제 그런 냄새를 맡았으니 내 후각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고 새로운 냄새 하나를 기억하게 되었다. 하지만 단 2초동안의 경험이었지만 그리 기분좋은 냄새는 아니었던 것 같다.
<조여오는 압박 그리고 해제> 그런데 그 후각 경험은 2초밖에 지속되지 않았지만 그후로 또 다른 문제가 지속되고 있었다. 그 분이 나를 자꾸 압박하고 조여오는 것이다. 그것은 그 분의 몸집이 크기 때문이었다. 그 분도 의도적인 것은 아니지만 그 분에게는 자리가 좁았던 것 같다. 그래서 그냥 일어날까 생각하기도 했다. 내가 일어나면 누군가 앉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만약 앉지 않는다면 내 오른쪽에 계신 백인남자분은 당황해할 것이다. 그리고 내 앞에 젊은 여자분이 서 계셨는데 그 분도 내가 일어섰을 때 앉아아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을 할 것이다. 앉으려니 옆에서 압박할 것이고 자리가 비어있는데 서 있으려니 옆 백인남자에게 미안해할 것이고. 나는 이런 생각을 하며 그냥 앉아있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책에 눈을 두고 있었지만 내 앞에 있는 여자분은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다고 느꼈다. 내가 일어날지를 주시하는 것 같았다. 이런 긴장상황은 곧 해제되었다. 그 백인남자분이 내리셨고 그 전에 내 앞에 계신 여자분도 사라지셨기 때문이다.
<마지막을 향한 달리기> 나는 기문둔갑을 거의 다 읽어갔고 경복궁역에 도착했다. 농학교를 향한 출구를 찾아 서둘렀다. 출구를 나와 뛰기 시작했다. 매번 경복궁역 출구에서 참여연대까지는 뛰어야 했다. 이미 지각이기 때문에. 전에는 뛰는 게 힘들었고 조금 지겨웠지만 오늘은 힘들기는 하지만 아쉬움이 더 켰다. 다시는 이렇게 뛸 수 없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역시 '마지막'은 힘이 셌다. 전과 같이 참여연대 3층은 어두웠고 조용했다. 하지만 그 너머 강의실은 불빛을 밝히고 있었다. 나는 뒷문으로 들어갔다. 아는 몇몇분이 눈을 맞춰주셨고 인사하셨다. 나는 자리를 잡고 강좌를 듣기 시작했다. 다행이 많이 진행된 것 같지는 않았다. 오늘은 국민대학교 사회학과 김환석 교수님께서 '과학기술과 시민참여'에 대하여 강의해주셨다.
강의 내용 (시작) ----------------------- <과학만능주의에 대한 회의> 계몽주의 이후로 과학기술은 '합리성과 진보'로 인식되어 왔다. 하지만 여러 사고들(인도 보팔(1984년): 아직도 보상못받고 있음, 체르노빌(1986) 사고)들로 인해 과학기술에 대한 회의가 제기되었음. 즉, 과학만능주의에 대한 회의이다. 점차 사람들은 과학기술이 만능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과학기술이 발달하지 않던 시대로 돌아갈 것인가? 기존에는 국가의 과학기술정책의 결정에 훈련받은 전문가들의 조언을 얻어서 결정했다. 일반 시민들은 그 결정을 통보받는 소비자역할만 했었다. 하지만 전문가들이 결정한 과학기술정책에도 문제가 있음을 알게 되었고 그래서 서구에서는 1990년부터 시민참여를 통해 과학기술의 민주적 통제를 하기 시작했다.
<과학기술, 또다른 불합리성의 생성> 근대화란 결국 모든 것의 합리화를 뜻한다고 할 수 있다. 과학기술을 통해 오랜 불확실성과 위협들을 줄였지만(합리화), 전에 없던 불확실성과 위협들과 대면하게 되었다. 결국 혹땔려다 또 다른 혹이 붙은 격이다. 기존의 불확실성을 합리화시켰지만 과학기술 자체로 인해 또 다른 불확실성이 생겼다. 일상 생활에서 과학기술로 인해 개인의 자유와 복지는 증가하지만 개인의 통제영역밖에 있는 '전문가체제'에 대한 의존이 증가함. 이 전문가체제가 안정과 안전한 생활을 보장못할 경우가 문제이다. 예를 들면, 약사가 권해준 약을 먹었을 때 부작용, 인터넷 사용시 개인정보 유출.
<지금은 '탈정상과학의 시대'> 과학기술이 점점 발달할수록 자연에 개입을 더 많이 하게 됨. 개입이 증가할수록 부작용은 복잡해지고 위험이 커짐. 예를 들면, 원자력발전, 지구온난화, 오존층파괴. '오존층파괴'는 과학자들이 제일 먼저 알아낸 것임. 일반인은 알 수 없음. 과학 스스로가 이런 위험,현상을 설명할수록 과학자체의 불확실성이 드러나고 있음. 가치나 이해관계가 개입된다면 전문가들도 확신못하는 논쟁으로 확대됨. 예를 들면, 4대강에 대한 찬성과 반대에 대한 과학자들의 대립. 찬성과 반성에 대한 과학자(전문가)들의 논리안에는 그들만의 가치나 이해관계가 개입되어 있음. 따라서 지금 시대는 '탈정상과학의 시대'임. '탈정상과학(Post normal science)'이란 '정상과학'이 없다는 뜻. '정상과학'이란 지금 이 시대를 지배하고 있는 과학 패러다임임. 예를 들면 과거 천동설이 지배하고 있던 시대에는 천동설이 정상과학이었고 누구도 천동설에 대하여 의심하지 않았음. 하지만 지금은 하나의 정상과학이 있기 힘드므로 사람들은 불안해하고 전문가들만의 검증과 관리로서는 한계가 있음. 그래서 다양한 시민들의 지식과 의견도 더해져야 함. 예를 들면, 사람들은 비행기 타는 것과 자동차 타는 것 중에 비행기 타는 것이 더 위험하다고 느낀다. 하지만 실제 통계를 내보면 자동차 타는 것이 사고날 확률이 높다. 따라서 전문가들은 비행기 타는 것이 더 안전하다고 알려준다. 하지만 실제로 사람이 느끼는 것은 다르다. 사람들이 비행기 타는 것을 더 위험하게 생각하는 이유는 통제가능성과 선택의 폭이 자동차 타는 것보다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람의 심리와 감정적인 측면을 고려해야 한다. 따라서 한 분야의 전문가의 의견만 믿고 따르는 것보다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여 어떤 정책을 결정하는 것이 좋다. 아마 이런 측면은 시민들의 의식이 성장했기 때문에 나타났다고 생각한다. 예전에는 전문가들과 일반시민들은 전문가 집단이 대중을 지배하는 상하관계였으나 이런 과학기술의 불확실성의 증가로 인한 논쟁의 증가는 이것을 뒤집을 수 있는 민주적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다. "위험한 기술에 대한 대중적 논쟁들이 근대사회의 기본적 토대에 도전할 수 있는 보다 민주적인 정치의 씨앗을 그 안에 안고 있음" (울리히 벡, <위험사회>, 1992) <위험사회>가 출판되던 시기에 체르노빌 사고가 터져서 이 책 대박났고 저자도 덩달아 유명해졌다고 함. 과학기술의 불확실성에 대한 시민들의 규제 요구에 국가는 고민이 깊어간다.
<잠시 쉬는 시간> 어떤 분이 쓰시는 '종이연필'이 화제가 되었다. 김훈 작가가 쓰신 '공무도하'와 종이연필이 어떤 관련이 있는 것 같았다. 누군가 김훈 작가는 '마초남'이라고 하신다^^ 김훈 작가는 앞에 가고 부인은 뒤에 따라오는 모습. 마초남도 귀여운 면이 있다고 함^^ 일본에서는 초식남에 질려서 마초남에 대한 호응이 좋다고 함. 나는 쉬는 시간에 김밥을 몇 개 먹었다.
<과거의 모델('과학을 위한 사회계약')의 한계> 2차 세계대전 이후 '과학을 위한 사회계약': 국가세금으로 과학연구 지원, 그 혜택은 사회가 누림. 1960년대말에 대두된 여러 사회운동들은 과학기술의 민주적 통제를 주장하기 시작함. 미국의 환경보호청(EPA: Environment Agency), 기술영향평가국(OTA: Official Technology A~) 설치. 1970년에 이후로 유럽, 미국의 경기하락으로 자금지원 감소, 연구 부정 스캔들로 인해 '과학을 위한 사회계약'모델의 위기가 옴.-> 1980년대 '대중의 과학 이해'(PUS) 사업을 추진(과학계 자체내에서 추진됨, 영국의 왕립과학원(Royal Society)) 하지만 TA 정책과 PUS 정책은 '시민참여'에 대한 한계가 있었음.
<구성주의적 과학기술학(STS)과 시민참여> 1970~1980년대에 구성주의적 과학기술학(STS) 연구가 성장함. 구성주의적 과학기술학의 발견과 통찰은 '과학과 기술은 결코 보편합리적 '지식'이 아니라 우연적, 국지적 요인들이 작용한 '실천'의 구성물'이라는 것이다. (내 생각에 우연과 국지적이라고만 할 수는 없을 듯 한데... 전적으로 이 통찰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2/3정도는 동의함) STS의 실천적 대안 제시: 숙의민주주의(Delivery Democracy) 이론과 참여적 공공정책분서과 결함.-> 숙의적 방식의 시민참여를 통해과학기술이 구성되는 전 과정(연구, 개발, 이용)에 대한 의사결정을 민주화하는 것이 오늘날 기술사회의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길. (정확히는 이해 안되지만, 과학기술이 점점 복잡해지고 통제하기 힘들어지므로 과학기술 정책을 세울 때 숙의적 방식의 시민참여가 필수적이라는 뜻 같음.)
<숙의적 방식의 시민참여: 유럽에서의 전환> '숙의적 방식의 시민참여'의 예는 네덜란드의 '구성적 기술영향평가'(CTA)와 덴마크의 '합의회의'(Consensus Conference)이다. 다양한 일반시민들로 구성된 패널들이 전문가로부터 지식과 정보를 얻고 토론하여 정책결정에 반영(보고서 작성). 전문가가 결정하고 시민에게 통보하는 모델은 과거에 해봤지만 분명한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음. 그래서 쌍방향 대화를 강조하는 모델쪽으로 변경됨. 1990년대 후반, 광우병 사건과 GMO 반대운동이 가장 심했던 영국은 새로운 과학정책으로의 전환을 공식 선언했음(2000년에 발표한 <과학과 사회> 보고서='대중의 과학 참여'(PES) 접근으로 이행)(인터넷으로 열람가능). 이런 방향이 나노기술, 기후변화에 대한 대응 등으로 꾸준히 진행되고 있음. 유럽에서는 시민참여로 정책이 전환되었음!
<시민참여의 여러 방법들> 후원자가 존재(국가 등)하고 숙의적인(시민기여가 높은) 경우는 합의회의(검사,변호사 등의 전문가를 불러서 시민배심원들이 토의하여 영향력행사->보고서 작성), 시민배심원, 숙의적 여론조사(시민들에게 각종 정보 제공, 학습시킴, 분임토의후)가 있음. (나는 여기서 시민들을 '학습'시킨다는 것에 놀랐다. 하지만 시민들도 학습해야 한다는 것을 자주 듣지 못해서 그렇지 그리 놀라운 것은 아닌 것이다.) 후원자가 존재(국가 등)하고 비숙의적(시민기여가 낮은) 경우는 여론조사, 공청회(우리나라의 경우는 결정을 미리 다 해놓고 공청회하여 반영안되는 경우가 많음), 주민투표(스위스는 GMO에 대하여 주민투표했음)가 있음. 자발적이고 숙의적(시민기여가 높은) 시민참여는 환자단체의 행동(에이즈 환자들의 치료제 개발에 대한 적극적인 참여), 과학상점 이 있다. 과학상점(Science Shop)은 네델란드 학생, 교수들이 시작했음. 당장 지여사회에 나가서 과학기술에 대한 문제를 찾아서 해결해줌. 지역사회 문제에 대해 연구하여 논문을 발표함. 지역주민들의 반응이 아주 좋았음. 시민들이 이에 대한 보답으로 국회에 제출-> 네델란드 대학마다 과학상점에 대한 지원이 제도화됨, 현재는 과학뿐만 아니라 사회, 인문학적으로 확대되었음. 자발적이고 비숙의적(시민기여가 낮은) 시민참여는 주민들의 자발적 저항운동(NIMBY) 등이 있음.
<시민참여에 대한 우리나라의 사례> 2001년 <과학기술기본법>부터 시민참여를 명시했음. '참여연대 시민과학센터'가 1997년 11월에 출범하면서 합의회의, 과학상점 등을 국내에 소개했음. 합의회의: 1998년 유전자조작식품, 1999년 생명복제기술에 대한 합의회의 개최, 시민과학센터는 2004년 전력정책과 원자력발전의 미래를 주제로 합의회의 개최. 정부는 숙의적 시민참여 방법에 대해 소극적이었으나 비판을 판고 2006년 유비쿼터스컴퓨팅 기술, 2007년 기후변화협약 대응기술에 대하여시민공개포럼 실시함. 2008년 '국가재난질환(예, 광우병, 신종플루) 대응체계 시민배심원회의'를 개최. 자발적이고 숙의적 시민참여는 환자단체의 활동(의료비용 지원요구 등)과 과학상점(몇몇 대학에서 시도됐으나 큰 효과없이 중단됨, 2004년 대전지역 '시민참여연구센터'(참터) 출범->시민을 위해 연구해 줄 만한 연구자가 부족)
<지구온난화에 관한 전 세계인의 견해(WWViers)> 2009년 9월 26일 덴마크 DBT의 제안으로 38개 국가에서 총 4천명이 넘는 일반시민들이 동시에 참여한 숙의민주적 시민참여 실험을 했음(World Wide Views on Global Warning). 2009년 코펜하겐 기후회의에 일반시민들의 견해를 알리기 위한 의도가 있었음. 코펜하게 기후회의에는 전문가, 환경단체의 견해만 의논될 것이기 때문에 이런 숙의민주적인 시민참여로 일반시민들의 의견을 알리려고 했음. 아시아는 8개국(중국, 대만, 일본 포함)이 참석했고 우리나라는 참가 초청을 받았으나 정부의 비협조로 결국 참가를 포하했음. 부끄러운 일! '환경재단'이 주도했으나 환경재단이 대운하반대 운동을 했음. 정부가 비협조. 결국 참여못하게 됨.
<국내의 후퇴하는 과학기술에 대한 시민참여> 이명박 정부는 시민참여를 확대하지 않고 오히려 기존의 기술관료적인 태도도 '민주주의의 후퇴'가 벌어지고 있음.->그 결과로서 과학기술의 불확실성과 위험의 강호, 정책결정에 대한 대중의 환멸과 불신이 심화될 것. THE MEATRIX(동영상): http://www.themeatrix.com/intl/korean/
<질문 시간> 1) 페미니즘에서 과학기술을 비판한 이유? -> 출산에 대하여 여성이 통제할 수 있었는데, 과학기술이 발전할수록 산부인과에 의존하여 남성에 대한 의존이 높아짐. 과학기술자들은 대부분 남성, 자연스레 남성권력이 형성, 발휘되는 분야로 인식됨. 여성이 과학기술분야에 약한건 자질부족은 아니다. 뿌리깊은 문화, 관습의 영향이 크다. WISE(Women In Science Engine)운동. 2) NIMBI 현상, 정상적인 방어현상도 NIMBI 인가? -> 국가가 민주적으로 유도, 이해하려는 노력을 제공해야 함. 숙의과정 필요. 대중의 신뢰를 얻어야 함. 3) 책추천해주세요. -> 진보의 페러독스(이메일로 보내준 참고문헌에 있음), 과학기술~, 한국의 과학기술 민주화. 과학기술 이외의 다른 분야도 시민참여를 할 수 있다!
-------------- 강의 내용 (끝)
<참여연대 계단 명화, 마지막 한 컷> 뒷풀이를 위해 우리는 참여연대 건물에서 빠져나갔다. 나는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2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의 창에 걸린 명화 한점을 보고 내 디카가 담아왔다. 여전히 가로등의 하얀 빛들이 검은 기와지붕을 부드럽게 쓰다듬고 있었다.
<마지막 강좌 뒷풀이(쭈꾸미집)> 경복궁역근처에 좁은 골목으로 갔다. 시골장터를 연상시키는 곳이었다. 우리는 쭈꾸미집으로 들어갔다. 쭈꾸미 요리가 나오고 막걸리와 소주가 몇 번 왔다간 이후에 우리는 자연스레 이야기꽃을 피웠다. 내앞에 계신 교수님, 그리고 내옆에 계신 멋쟁이 여자분과 촛불정신과 1Q84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IQ84는 사놓고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그 자리에 계신분들 대부분은 야하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김환석 교수님은 딸이 2분인데 둘 다 대학졸업하고 20대 중반이시란다. 그런데 딸들에게 정말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면 결혼을 하지 말라고 하셔서 우리들의 눈길을 끌었다. 그 이유는 우리나라에서 여성의 결혼은 여성에게 손해가 많다는 것이다. 충분히 이해가 된다. 그런데 이 교수님 소막(소주+막걸리)를 즐기신다. 저런 술조합은 처음 봤다. 한미 FTA반대를 위해 분신하신분의 3주년이 얼마전이었다는 얘기도 있었고 오마이뉴스의 10만인클럽이신 두 분을 만나서 반가웠다(나도 10만인클럽이다^^)! 쭈꾸미 삶은 것을 파에 싸서 초고추장에 찍어먹는 것은 여기서 처음 먹어봤다. 10시쯤부터 시작한 술자리가 어느새 11시 50분쯤 되어 민수 간사님이 마지막 교수님의 말씀을 청했다. 과학기술 강좌가 다음에 또 준비하고 있다는 말씀도 하셨다. 처음이 있으면 마지막도 있다. 그래도 우리는 마지막을 함께 했다. 그래서 또 다른 만남을 기대하게 된다. 처음, 마지막, 그리고 또 다른 만남에 대한 기대, 이런 것들을 반복하는 것이 우리 삶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우리의 마지막 자리를 기념하기 위해 사진을 찍었다. 중간에 오셨던 한 분이 찍어주셨다. 모두 한 잔들 하셔서 얼굴이 재미있으시다^^
<집으로> 우리는 쭈꾸미집에서 나와서 서로 갈 길을 갔다. 나와 지하철을 같이 타신 분은 두 분이다. 그 두 분과 핸드폰 번호를 교환했다. 그리고 최영아님과 양재역까지 가면서 이야기했다. 나는 좋은생각 5월호를 선물했고 영아님은 양재역에서 내렸다. 나는 도곡역에서 분당선을 갈아탈려고 했지만 분당선이 끊겼다. 그 때 시간이 12시 30분쯤. 그래서 다시 3호선을 기다렸다. 그런데 아무도 없는 플래폼. 정말 이상했다. 메트릭스에서 네오가 기차를 기다리는 장면같았다. 다음 3호선을 타고 가락시장까지 갔다. 가락시장에서 성남가는 버스를 타려고 했다. 보통 버스는 지하철보다 오래동안 있기 때문이다. 가락시장에서 복정까지 가는 버스를 타고 복정에서 성남가는 버스를 기다렸다. 그러는 중에 영아씨에게 문자가 왔다. 잘 갔냐는 걱정이 묻어있는 문자였다. 그래서 복정에서 버스기다리다가 안오면 택시타고 갈 생각이라고 답문을 보냈다. 다행이 1시가까이에 407번 버스가 왔다. 이 버스는 내가 사는 신흥역 성남우체국 앞까지 간다. 1시쯤에 내 집까지 가는 버스가 있다는 신기했고 고마웠다. 버스에 탔는데 버스안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환자처럼 보였다. 대부분 졸고 있거나 이상하게 보였다. 하긴 새벽 1시니 무리도 아니겠지^^ 나는 집에 와서 씻고 2시쯤 잤다. 내일 아침은 피곤하겠지만 마지막 강좌는 내 기억에 남을 것이다. 그리고 그 덕에 이렇게 후기를 쓰고 있지 않은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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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주인이 되는 돈의 인문학 | 돈의 인문학 - 삶이 뒤집어 질 그날까지 '돈'과의 '전쟁'은 계속된다. | 맑은바람 | 2010.4.18 | |||
어릴때 소세지 도시락 반찬이 너무 부러워, 어머니께 조르면, ‘돈 없어 안돼’ 였다. - 경제적으로 어려웠다. ‘소세지반찬’과 ‘돈’이 어떤 관계인지 몰랐으나, 그때는, 막연히, 소세지를 바꿀 수있는 ‘돈’은, 내가 좋아하는 도시락 반찬의 ‘주제’를 결정하는 ‘힘 있는 어떤 물체’ 라고 생각했던것 같다. 이때 ‘돈’은 물물 교환의 수단쯤 되었을까? 아무튼^^‘소세지’ 보다는 덜 중요했다. ^^ 돼지 저금통에 몇 년씩 잔돈을 넣으면서도, 오빠가 저금통 밑을 교묘히? 핀으로 움직여, 숱하게 빼가는 것을 모를 정도로 ‘둔했고’ (언니와 동생은 저금통을 비밀장소에 보관하였다) - 왜 안채워지지? 고민한번에 그냥넘어가기 100 번 이었다. - 돈에 대한 관리력 제로 - 세뱃돈으로 받은 지폐를 언니와 오빠가온갖 ‘감언이설’로 꼬드겨, 잔돈과 바꾸자하면, 사심 없이 바꾸곤 했다. 부모님은 ‘여자는 공부 많이해도 소용없다 - 돈 많은 남편 만나면 인생 핀 다’ 말씀하셨다. 지금은, 너무 어렵게 삶을 살아온 부모님의 생을 이해하면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 으로 이해했지만, 그때는, 부모님 말 씀 중, ‘인생 핀다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했고, 도대체 ‘돈 많은 남편의 기준’은 무엇인지 궁금했었다. 세탁기 안에, 세금낼 수표 한 장을 사정없이 돌려, 분분 떨어진 '낙화' 같이 해놓고도, ‘어찌하든 살리려는 노력도 못해보고 (잘몰랐다- ) 옷에 묻은 ‘흰종이 가루’를 어찌 떼어낼지만 고민하고, 답답해 했다. ‘돈’에 얽힌 ‘덤덤한?’ 몇 가지 단상 이다. 어느 날, 부모님이 편찮으셨고, 생사를 오가는 병원 생활 가운데, ‘경제적 책임감’이 주어졌다. 저축도없고, 병원비때문에 , 결국 ‘대출’ 이란 달콤한? 제도를 알게 되었고, 마이너스 통장을 갖게 되었다. 마이너스 통장은 참? 신기? 했다. 덤덤했던 돈과 관련한 나의 일상'을 조금씩 바빠지게도 했고, 앞의 마이너스 (-) 를 보지못해 '빚' 이 마치 '내 저축한 돈' 인양 생각하고 지출하게 하였다. 월급은 통장에 기호(숫자)로만 찍히기 때문에, 마이너스 금액만 줄어들 뿐, 다시 채워졌기에, 내역이 모호해 졌다. 처음엔 ‘빚’을 갚기위해, 용돈을 쪼개고, 야근도 하고, 나름 노력했는데, 어느 순간, ‘돈’을 벌기위해, ‘밥’을 먹고, ‘병’이 나면, 또 ‘돈’을 들여 ‘약’으로 치료하고, 다시 ‘돈’을 벌기위해, '밥' 먹는 행위?를 되풀이 하고 있었다. 그럴수록 '돈에 대한 개념은 희박해지고, 욕심이 생기고, 카드사용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몇 주, 몇 달을 살다보니, 삶은, '돈' 에 무뎌지는 (실제는, 돈에 지배 당하는) 습관이, 삶이 되어 있었다. 지치기도 하고, 바꿔보고 싶었으나, '돈으로 익숙해진 편리한 삶' 은 , 쉽게 변화지 못했다. 않았다. 우연히, ‘돈의 인문학’ 글을 읽게 되었다. 홀딱 깨었다. 집중해서 읽고, 중요부분은 메모했다. 생각의 변화가 시작되고, 삶의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바로 이때, 참여연대 강좌를 듣게 되었다. 돈과나, 화폐의 역사, 돈의주인되기, 그리고 마지막, 우리는 무엇을 원하나 까지, 어떤 시간, 어떤과목, 중요하지 않은 시간이 없었다 너무 시간이 짧았다. 후기를 쓰는 지금도 아쉬움이 계속 남는다. ‘돈 에 얽매인 사고와 가치관, 삶‘이 자리 잡은, 나의 총체적인 현재 삶을 갈무리하는 좋은 시간이었다. 제일 집중했던^^ 왜 돈의 인문학인지부터 시작하여, 돈의 정체, 그리고,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것을 찾아 관계속에서 창조되는, 가치와 사회적 유대를 위하여. 라는 총 정리로 마무리 되었던, 마지막 강의가 생각난다.- 진정한 ‘가치’와 '진정한 능력' 이란 무엇인지 제대로 배우는 시간이었고, ''사회적네트워크'의 중요성과 가치에 대해서도 다시한번 알게되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문득, 나는 낯선사람을 얼마나 믿을까?.. 사회적 만용과 맹신부분을 떠올려 보았다. 유년기엔 너무 믿어? 유괴 당한 경험도 있지만, 어른이 되어선 절대 믿지 않음, 아니 믿지 못함, 오히려 믿는 이들을 재점검? 하는 지경까지 이르렀슴을 깨닫고 씁쓸했다. 이 안에는 ‘돈’이 ‘관계’되 있슴은 인정하기 싫지만 사실이었다. 또한, 강의를 통해, 식탐은 있으나, 앞으로, 돈 벌기위해 먹지 않겠다 결심하고, 또 조심하겠다 다짐 했다. - ^^ 돈맹 체크리스트에선 E 임을 알고 ‘경악’ 했으나 ‘주위반응’은 ‘당연함’ 이었고, 이에 절절히 ‘반성’하며, ‘돈’을 ‘돈’ 답게 생각하고, 잘 사용 하는 것의 중요함을 '뼈속 깊이' 알게 되었다. 그러더니 작심 3일만에 일?을 치를 뻔했다. - 사람이 홀리는건 순간 이라는것을 꼭 말하고 싶다. 지난 금요일... 통장 정리하러 은행 갔다가, '착하게? ' 생긴 여직원 꾐에 넘어갔다...- 머릿속엔 '돈'에 대한 ‘정의’가 활활 타고 있었슴 에도, ‘인정’에 끌린 건지 ‘홀렸던 건지’ 지금생각하니 ‘경제 재무적 무력감’ 탓 일 가능성이 컸다. 아무튼. 월 15만원을 5년간 부은 다음 다시 5년을 기다리면, (결국 10년 ) 1천만원을 준다는 말에 '혹' 했다. 기간은 생각지 않고, 1천만원 이란 숫자에 '와~우' 생각했고, 머릿속엔 '돈의 인문학' 이 윙윙 거렸으나 잠시 접었다. - 설명을 들어도 그닥? 잘 이해하진 않았으나, 결론 에 '혹' 했던 것 같다. 선생님 말씀처럼 ' 이상품 가입해서 은퇴 준비 안하면 큰일 난다' 혹은, '아직도 이런거 하나 없냐? 늦었다 ' 라는 말도 여지없이 들었다. 낼 모레 지구의 종말이 올때, 돈없어 쩔쩔매면 어쩌려고, 남한테 민폐 끼치지말고, 정신줄 있고, 젊었을때, 조금씩 해놓으라는 그녀말에 왠지 ‘위기감을 느껴’ ‘진짜다’ 라는 맘으로 도장을 찍었다. - 월 15만원...생활비에서 더 쪼개어 부어보자...이건 저축이다. 세뇌했고, 다른 한 쪽 뇌의 울림을 무시했다.. 한 마음 두 생각이라고나 할까? 그리고 다음날.. 머릿속이 꽉차서 어지럽고, 심장이 간질거리고, 뱃속이 더부룩했다. 아무도 없을땐, 빨간불 일때 건너라. 착각하는 것처럼, 녹색불에 건너는것이 당연하고, 그렇게 배웠음에도, 마치 빨간불 일 때, 횡단보도를 당당히 걷는것에 동의한 느낌 이었다. 숫자에 눌려 숨막히는 꿈부터 시작하여, 나의 이중성에 온통 예민하여 , 급기야 착한 나'를 홀딱 꼬인 여직원이 ‘나쁜사람’ 이라 스스로 욕하기 까지 했다. 열심히듣고, 적용하기로했는데, 이것이 무슨짓인가? 배우면 뭐하나...~현실앞에 다시 무력해져, 귀가 얇아 홀딱 넘어가 는것을, 실천하지 못한 무력감과 자괴감이 들었다. 실망했다. 역시 난 안되는건가? 깊은고민에 빠졌다. 주말이 많이 힘들었다.. 작심 3일의 대표적 예였다. 바보같이 ‘지구의 종말이 오면 다같이 죽을건대, 돈이 왜 필요한가? 돈이 무슨쓸모가 있는지?’ 지금도 어려운데, 한달에 15만원을 어디서 쪼개? 그게 다 '빚'인 줄 몰라? 왜 그래? 정신 차려보니, 이제서야 제모습이 돌아왔다.. 나의 장점이자 단점인 '단순, 무식, 용감' 을 가지고, 빨리 제정신 '돌아왔을때' 움직여야 한다는 당위성을 가지고 월요일 아침 출근하자마자 은행을 찾았다.. "엊그제 가입했는데, 도저히 안되겠어요.. 다른 것도 있어 부담되서요.. .해지해 주세요.." 개미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입은 웃고있으나, 눈은 가재미가 된 ' 그 착해 보이는 은행직원 (이미 모습은 바뀜)' 과 눈도 못 맞춘 채, 말만 했고, 그 직원은, 아직 전산서류 넘어가지 않은 상태라 '해지' 아닌 ' 그냥 취소' 라고 하며, 더 한번 나를 '설득' 하려 했으나 고개숙인 나를 보고 포기 한듯 종이만 내밀었다. 10분 정도. A4 용지 한장에 간단한 '취소싸인' 을 하고 은행을 나왔다. 주말내 괴롭혔던 '신경괴물체'를 멀리 날려 버렸다.. 비로소 자유인이 된듯했다. 또 한번 '돈' 에 '넘어갈 뻔한' 이번 일은, 단 10분만에 지옥을 천국으로 바꿔 놓았지만, 얼마나 '삶' 바꾸기가 쉽지않은지 깨닫게 하는 '작심3일 대표적 예' 였다.
생을 마감할때까지, 수없이 많은 '돈'을 만나고, 함께하고, 같이 갈 것이다. 위와같은일도 비일 비재할 것이다. 아직까지, ‘돈의 인문학’ 통해 배운것처럼 '돈'과 함께, '흔들리지않고' ‘완벽히, 제대로’ 삶을 살아갈 자신은 없으나, 이번 강의를 통해 '돈'에 대해 '제대로 이해' 한것과 '관련한 삶' 을 나누고 배운 것으로 첫 발을 내딛었다는 '긍정적 희망' 을 가지고, 앞으로 쭈~욱, ' 돈 과의 전쟁' 을 치뤄보려 한다. '돈'에 대한 생각과 마음과 행동이 완전히 개조되어 ' 삶이 뒤집어 질 그날 ' 까지 계속 해보려 한다.
혹시, 지금 ‘돈’과 함께 살면서 ‘이것이 사는게 아니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진지하게 말하고 싶다. ‘돈의 인문학’을 들어보고, 알아보라고...배워보라고.... ‘돈’을 정말 ‘돈’스럽게 알게된다고 ... .‘돈’맹?을 타파해주신^^ 강사님들과, 수고해 주신 간사님들께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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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살아나는 과거, 대한민국의 역주행 | 되살아나는 과거, 대한민국의 역주행[5강] | 부엉이의 눈 | 2010.4.13 | |||
3월 8일부터 김동춘
선생님의 <되살아나는 과거, 대한민국의 역주행> 강좌가 시작되었습니다.
되살아나는 과거, 대한민국의 역주행 5강 “빨갱이 시비는 콤플렉스를 덮기 위한 자기 정당화” ‘빨갱이’ 만큼 한국사회에서 가장 비이성적이며 폭력적인 것이 또 있을까? ‘빨갱이’의 위력은 민주화 이후에도, 민주정권이 들어선 이후에도 여전하다. ‘빨갱이’라는 낙인이 찍히면 누구든지 언론과 여론의 마냥사냥을 감내해야한다. 전체주의에서나 있을 법한 ‘사상검증’이 왜 아직도 있는 것일까? 한사람의 삶을 그 자리에서 정지시키고 그 주변사람들까지 망가뜨리는 ‘빨갱이’는 무엇인가? 대체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 <되살아나는 과거, 대한민국의 역주행>5강은 이 물음에 대한 답이었다. ‘빨갱이’는 현재진행형인 주제다. 김동춘 교수는 “우리사회를 이해할 수 있는 코드가 바로 오늘의 주제”라고 했다. “국가보안법(1948.11)이 62년이 됐다. 여순사건(1948.10)과 같다. 이 둘은 지금의 현실을 이해할 수 있는 역사”다. 재밌는 것은 국가보안법이 60년이나 됐는데 이 법을 연구한 법학자가 거의 없다는 사실이다. 재야 변호사인 박원순씨만이 국가보안법에 대해 책을 처음으로 냈다고 한다. 김 교수는 “국가보안법은 헌법보다 상위법으로 행사됐다. 헌법을 위반한 사례가 무수하다. 그 이념은 극우반공주의와 빨갱이 사냥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이 한국을 지탱해온 것”이라고 했다. ‘빨갱이 사냥’은 어디서 왔는가? 그럼 이 같은 빨갱이 사냥은 한국에만 있는 것인가? 김 교수는 유사한 형태의 빨갱이 사냥이 있다고 했다. 미국이다. “미국에서는 빨갱이를 ‘Reds’라고 쓴다. 미국에서 적색공포가 온 것은 러시아혁명(1917)발생 후였다. 차르황제 당시에 미국의 부자들이 러시아 국공채에 투자를 많이 했다.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나 못 받는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러시아에 괴물이 나타났다고 생각하게 된다. 미국에서는 혁명이 일어나지 않았음에도 러시아 혁명에 대한 공포감이 미국 부자들을 건드린 것이다. 이것이 빨갱이 사냥의 광기로 나타났다”고 한다. 그 이후 미국 노동자들의 운동에 대한 탄압도 거세지고 매카시즘이 50년에 나타났다고 한다. 매카시즘이 원조라고 생각했는데 러시아 혁명이 발단이었다니 ’돈‘이 무섭긴 무섭다. 독일에서도 ‘빨갱이’사냥이 있었다. 히틀러 나치 하에서 벌어졌다. 독일 국가에 충성심을 표하지 않는 자들, 국적 없는 유대인들이 그 대상이었다. 김 교수는 “유대인이 좌파, 무정부주의, 마르크스주의자가 많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역사상 이방인이었던 시간이 길기 때문에 국가에 대한 충성심이 낮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라고 했다. ‘유대인=공산주의’라고 생각해 수용소 감금과 체포를 동시 진행하고, 러시아 스파이로 간주했다고 한다. 빨갱이 사냥의 원조는 미국, 독일인 것이다. “미국의 정치는 일종의 파라노이드(낯선 사람에 대한 의심과 공포) 정치다” - 리차드 홉스테더 리차드 홉스테더가 말한 ‘파라노이드 정치’는 낯선 사람을 과대포장해서 두려움을 갖는 증상을 의미한다. 김 교수는 “19세기 미국의 정치는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의 갈등이었다. 가톨릭은 앵글로색슨 주류에 밀려난 상태고 개신교는 미국의 주류였다. 개신교 사람들은 18세기 미국건국 때부터 가톨릭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기독교 근본주의가 빨갱이 사냥으로 된 것”이라면서 파라노이드(공포) 정치에 대해 설명했다. “한국기독교는 미국기독교 근본주의와 같다. 가톨릭에 대한 공포가 미국 정치에 바탕을 두고 있다. 빨갱이 공포는 단순한 반공주의와는 성격이 다르다. 정신의학적인 측면이 있다. 극도의 정신적 스트레스와 극도의 자기존재에 대한 위기의식을 해결하기 위한 방편으로 익숙하지 않은 상대에게 공격적인 태도를 갖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특별한 트라우마(PTSD)를 갖는 사람들은 공격적이고 비뚤어지게 생각한다. “이것은 (가톨릭에 공포를 가진)기독교 근본주의 문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기독교 근본주의는 세상을 이분법적으로 본다. 상대에 대한 관용이 없다. 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애야 한다. 그래야 평화가 온다고 생각한다. 이런 문화적, 종교적 태도가 전쟁과 결합했을 때 극히 극단적이고 공격적으로 나온다”고 했다. “상대를 악마로 모는 사고방식이 정치적 이해관계와 매스미디어의 선전, 선동 등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꼭 반공주의가 아니어도 이런 경우가 많다”고 지적했다. 상대를 악마로 모는 심리는 외부에 의해 극단적인 공포가 발생했을 때 드러난다. 1923년 관동대지진(도쿄인근지역)때 동경에 살던 조선인 5천명이 학살당한 사건이 이를 잘 말해준다. 김 교수는 “당시 일본인들은 미친 듯이 조선인들을 잡았다. 지진이라는 위기상황에 조선인에게 광기를 휘둘렀다”고 했다. 전쟁 중인 데다가 대지진이 일어났으니 일본인들의 심리적 공항상태가 광기가 되어 만만해 보이는 조선인들에게 폭력을 행사했다는 얘기다. 민주화 운동의 정신적 지주인 고 함석헌 선생의 전집에 유학당시 경험담이 실려 있다고 한다. ‘내가 겪은 관동대지진’이라는 글인데 “당시 조선인들은 왜 학살을 많이 당했나? 위기에 처한 일본의 권력이 사회주의에 대한 공포감과 지진으로 인한 경제위기를 조선인들에게 퍼부은 것이다. 이것을 보면 정부에 쓴소리를 계속 하는 명진 스님을 ‘좌파’라고 모는 안상수 원내대표의 발언의 그 기본적 원리가 동일하다”고 지적했다. 한국의 빨갱이 사냥은 어떻게 만들어졌나? 김 교수는 미국과 다른 점으로 “의심 가는 사람을 빨갱이 사냥하는 것이 아니라 멀쩡한 사람을 빨갱이로 만드는 게 차이”라면서 “그 가족, 주변인에게 공포감을 느끼게 하는, (미국보다) 한 단계 더 나간 것”이라고 했다. 7~80년대 납북어부들은 “빨갱이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 교수는 “빨갱이를 사람이 아닌 동물로 간주해 동정심과 자비심, 공감 등의 감정을 없애고 죽어 마땅하다는 식의 감정을 이입해 도덕적 부채의식을 면제시키면서 폭력행사를 정당화했다”고 했다. 개인뿐 아니라 관련된 가족들, 지인들까지 빨갱이 취급을 한 것은 일종의 연좌제다. 이것은 국가보안법의 불고지죄를 행사한 것인데 여기서 ‘연’이 두 가지 의미라고 김 교수는 지적했다. 연(連)-‘관련된 사람’과 연(緣)-‘혈연, 가족’을 의미한다. 아는 사람과 가족들 둘 다 적용한다는 말이다. 과장해서 말하면 “천륜을 파괴하면서 빨갱이 사냥을 한 것이다. 이것은 전체주의적인 논리”라면서 “MB정부의 방식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일제고사 거부 교사 파면을 보면 알고 있는 교사들까지도 공포감을 느끼게 하고, '아는 체 하면 피해를 볼 수 있다', '모른 체 해야 살아남는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고 덧붙였다. 정치적 반대세력은 무조건 ‘빨갱이’ - 여순사건 때부터 제주 4.3사건, 여순사건은 그 연좌제가 명백히 드러난 사건이다. 연루된 민간인들은 다 처벌당했으니 말이다. 김 교수는 “500명 좌익계열 무장빨치산 중에는 산에 올라간 사람과 가족, 실종된 사람과 그의 가족, 단독정부 반대한 사람까지 다 섞여 있었다. 서북청년단은 태극기를 파는 척하며 빨갱이 사냥을 했다. 태극기를 사라고 강요하면서 돈이 없어 못 사는 사람도, 돈이 있지만 안사는 사람도 빨갱이로 만들어버렸다. 국기에 대한 경례를 안 하고 애국가를 안 불러도 빨갱이 취급을 했다. 70년대 박정희 시절 애국가 나오면 벌떡 일어났다. 안 일어나면 욕먹었다”면서 비이성적 빨갱이 사냥을 지적했다. 박찬길 검사사건에 대한 설명도 이어졌다. 조만식(기독교 민족주의자)의 제자였던 박찬길 광주지검 검사는 사상적으로 좌익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양심적인 검사였다. 경찰이 ‘빨갱이’라고 잡아도 혐의가 없으면 풀어주었다고 한다. 이에 대해 경찰들이 좋게 볼 리 없다. 박찬길 검사는 여순사건 때 도망가지 않고 여수에서 숨어있었는데 이를 경찰이 반란군 협조 혐의를 씌워 그 자리에서 총살을 한 것이다. 검사를 재판에 회부하지 않고 경찰이 총살했다는 것은 당시 경찰의 권력을 말해준다. 법무부 당시 권승렬 장관이 경찰 처벌을 요구했으나 경찰반대에 부딪혀 결국 박 검사는 빨갱이로 남게 되었다고 한다. 경찰들 위세가 커서 총살한 경찰을 용서한 이 사건은 사법부가 공안권력에 굴절당한 획기적 사건이다. 이후, 국가보안법 걸린 사람 풀어주면 빨갱이로 오해받을 수 있으니까 빨갱이 논리에 검사들이 공안권력에 겁을 냈다고 한다. '그 배후에는 김구가 있다'고 계속 이승만이 흘리고 나중에는 우파임에도 좌익의 배후로 몰려 49년 암살이 정당화 된다. 정치적 반대세력을 ‘빨갱이’로 모는 이분법이 여순사건부터 나타났다고 한다. 한국 빨갱이 사냥의 배경들 - 상처받은 영혼들의 몸부림. 김 교수는 문제의 배경을 남북한의 분단 상황으로 꼬집으면서도 분단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것도 있다고 강조했다. 그것은 이데올로기 이전에 정신적 스트레스다. “북한에 큰 책임이 있다. 북한 초기 사회주의 개혁과정을 무리하게 추진했다. 1945~6년 토지개혁 때 중립적인 사람들까지 친일로 몰고 자본가로 간주해 남한으로 쫓아냈다. 중도적 인사를 끌어안기보다 내치는 북한의 사회주의는 지금까지 남한에서 광기어린 반공반북에 대한 감정을 갖게 했다”고 설명했다. 김 교수는 “사람은 동물이지만 식물적 존재라고 생각한다. 안정적인 것을 원한다. 식물적 존재인 인간을 삶의 터전에서 뽑아 다른 곳에 강제로 살게 했을 때 공포는 남쪽사람들까지도 전부 빨갱이”로 보일 수 있다고 지적했다. 또한 이들은 대부분 기독교인들로 기독교 근본주의와 통하면서 반공색채는 더 진해진다. 강한 친일콤플렉스 제일 결정적인 배경은 한국 우익들의 친일 콤플렉스였다. 해방 후 친일세력들(한민당)은 이승만 하에서 친일경력을 은폐하려했고 그를 위해서는 맹목적인 반공주의로 정치적 입장을 취해야했다는 것이다. 친일행적이 심할수록 극도로 반공주의가 되었다. 빨갱이 시비 벌이는 사람들은 대부분 한국전쟁 때 민간인을 학살한 김창룡, 김종원 등이다. 이들은 일본헌병, 독립운동가를 잡으러 다녔던 비밀경찰출신이다. 가장 악질적인 친일파는 친일경력을 덮을 수 있는 것이 중요했다. 미국에 대한 절대적인 의존도 마찬가지다. 피신할 곳 없는 친일자들의 은신처였기 때문이다. 조선일보의 행태를 이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김 교수는 “조선일보를 이해하는 데 있어 우익반공주의만으로는 설명 안 된다. 조선일보는 일제 때 친일신문이라는 콤플렉스를 덮고 자기정당화하기 위해 이승만, 박정희 영웅만들기 기사를 계속 내보내는 것이다. 트라우마를 가진 자들과 행동이 유사하다”고 꼬집었다. 그럼 87년 민주화 이후 빨갱이 사냥은 무엇인가? 비판적 지식인, 운동권 출신들이 한나라당으로 들어가면서 자신의 변신을 정당화하기 위한 것이라고 김 교수는 지적했다. 김 교수는 또한 “한국에 자유주의자는 없다. 자유주의자가 없는 이유는 반공주의자들이 심각한 콤플렉스를 못 벗어났기 때문”이라면서, “이승만에게는 김구에 대한 콤플렉스, 박정희에게는 친일경력과 김일성에 대한 콤플렉스가 레드콤플렉스로 된 것이다. 레드콤플렉스는 분단 후 거시적으로 만들어졌다. 그것을 만드는 심성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통일과 정상적인 국가로 가기 위해 극복할 부분이기 때문이다. 레드콤플렉스는 무의식적으로 정서에 깔려있다”고 했다. 한국의 반공주의는 상처받은 자유주의 정신적 상처가 심하면 공격적이 되고, 과도할 정도로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으려고 한다. 국가도 마찬가지다. 한국 빨갱이 사냥의 논리다. 전향한 좌파나, 피해 입은 사람들이 극우적 행태를 더 보이는 것은 그만큼 상처가 깊다는 의미다. 김 교수는 마지막으로 “‘좌파’를 이야기하는 것은 한나라당내 입지를 높이고, 출세하기 위해 더 존재감을 과시하려는 것이다. 특정인을 욕해야 내가 살고, 대세에 편승해야 자신의 안정을 보장받으려는 정치적 심리는 레드콤플렉스를 조장하는데 기여한다. 빨갱이 시비를 강하게 벌일수록 강한 콤플렉스를 의미한다.(친일, 군사정권, 비판적 지식인, 운동권, 애국과 관계없는 기회주의) 극복하지 않는 이상 한국 시민사회는 정상적인 발전은 어렵다”고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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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드라마, 사료로 다시보기 | 역사드라마, 사료로 다시보기[5강] | 최성호 | 2010.4.11 | |||
태조 이성계를 시작으로 마지막 왕인 27대 순종에 이르기까지 조선시대 성군이라 칭하는 왕중에서 빠지지 않는 왕이 바로 22대 정조일 것 입니다. 그는 개혁군주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시대를 조선 최고의 부흥기로 만들 었지만 그의 죽음 이후 조선은 쇠퇴의 길로 접어들게 됩니다. 조선의 전환기로 볼 수 있는데 혹자는 정조가 조금만 더 오래 살았다면 대한민국의 역사가 바뀌었을 것이라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만큼 그의 죽음 이후 조선이 급격히 쇠퇴했음을 의미합니다. 이번 강의는 정조를 소재로해서 많은 사랑을 받았던 MBC 드라마 `이산` 입니다. '이산' 왕의 이름을 함부로? 조선시대 뿐만 아니라 다른 시대에도 왕의 이름은 함부로 부를 수 없었습니다. 왕의 이름은 불러서도 안되고 비슷한 발음을 해서도 안되는 것이 었습니다. 현재의 대한민국은 왕조 자체가 무너져 그렇겠지만 만약 지금까지 왕조가 이어져 오고 있는 상황에서 '이산'이라는 제목으로 드라마를 방영했다면 연출자는 역적중에 역적으로 몰려 큰 벌을 받았을 것입니다. 이를 방증하는 하나의 사례가 있습니다. 조선시대 함경도 지방에 이산이라는 지명이 있었는데 왕의 이름과 같다하여 지명을 바꾼 것입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산'이라는 금지 된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영조를 현대의 시선으로 바라본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조선의 22대 왕 '정조'를 말하다. 드라마와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캐릭터일 것입니다. 드라마 '이산'도 마찬가지 입니다. 드라마에서 이산은 상당히 점잖고 근엄하며 말하는 것을 최대한 절제합니다.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멋있는 남자입니다. 이러한 캐릭터 설정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왕에 대한 이미지 때문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렇다면 실제 정조는 드라마 이산에서 보여준 이미지와 비슷할까요? 드라마에서 보여주는 것과 마찬가지로 정조는 여러가지 측면에서 매력적인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공부를 잘했으며 글쓰는 것을 좋아해서 저작도 많이 남겼죠. 26대 왕인 고종도 저작은 많지만 의 경우 자신이 직접 쓴 글은 많지 않습니다. 하지만 정조의 경우는 다릅니다. 저작 대부분이 자신이 쓴 글이며 자신이 쓴 글과 남이 쓴글을 구분했다고 합니다. 대필을 시키면 반드시 대필의 흔적을 남기게 했다고 합니다. 즉 자신의 글에 대한 자신감이 있었고 능력이 탁월했다는 증거입니다. 정조에게 가르침을 받은 제자도 많은데요. 정조의 제자들은 19세기에 위대한 학자로 이름을 알리게 됩니다. 대표적으로 정약용과 서유구 등이 있습니다. 드라마에서는 정약용이 정조에게 많은 도움을 주는데 실제로는 그 반대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드라마 '이산'의 모습이 실제 정조의 모습일까? 최근까지 정조는 왕이라는 선입견 때문에 사료에서 너무 근엄하게 번역됐다고 합니다. 하지만 얼마전 발견된 299통의 비밀편지를 통해 놀라운 반전이 일어나게 됩니다. 정조는 저작도 많고 말도 많은 왕이었습니다. 성격은 다혈질이었고 자신 스스로 태양증이라고 말하고 다녔을 정도라고 합니다. 왕임에도 불구하고 우스갯소리를 자주 했으며 속된 표현도 거침없이 사용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문제로 신하가 상소까지 올렸다고 하니 짐작할 만하지 않습니까?
드라마에서의 연애. 그리고 그의 관심사 드라마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 사랑이야기 입니다. 이산에서도 정조가 '송연'이라는 인물과 연애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허구입니다. 사극에서의 연애는 대부분 허구인 경우가 많은데요. 대부분의 왕은 많은 여성과 관계를 맺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기반으로 하여 가상인물을 만들어 드라마의 소재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정조의 경우에는 이러한 가정도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정조는 여자와 사치에는 관심이 없었다고 합니다. 실제로 여자 관계도 복잡하지 않다고 하는데요. 세종대왕의 경우 자식들이 수십명에 이르지만 정조의 아들은 한 명뿐 입니다. 또한 음식도 좋아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정조는 오직 학문에 관심이 있었으며 관심이 생기는 분야가 생기면 그 주제에 파고드는 것에 거침이 없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이유로 다른 어떠한 왕보다 자료가 많고 모든 자료들이 상당히 가치가 높다고 합니다. 희소성의 원칙에 의해 그 반대가 되어야 하는 상황임에도 정조의 그의 필체도 매우 다양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암살과 독살, 그리고 정순황후. 드라마에서 약 10번정도의 암살시도가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과장 된 측면있다고 합니다. 조선시대의 경우 암살의 문화는 아니라고 합니다. 소현세자의 경우는 예외라고 할 수 있지만 사약을 받을 때도 왕에게 절을하고 예를 갖춘다고 합니다. 송시열의 경우 70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건강했기에 사약을 한사발 먹고도 죽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한 사발 더 먹고 죽었다고 합니다. 임금이 죽으라고하는데 안죽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충을 중하게 여기는 시대에 그렇게 많은 암살시도는 불가능이라는 것입니다. 드라마 후반부에 역적을 모의했다는 이유로 정조의 할마니인 정순황후를 골방에 가두고 포박하는 장면이 있는데 이러한 경우는 불가능 하다고 합니다. 조선시대는 충과 효를 중히여기는데 그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면 효라고 합니다. 국왕이 효를 부정하면 그 근본이 무너진다는 것입니다. 연산군과 광해군을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손자가 할머니를 포박하는 일은 드라마에서의 설정일 뿐이라고 합니다. 정조의 죽음이 자연사가 아니라 독살이라는 설이 많습니다. 299통의 비밀편지를 통해 그에 대한 궁금증이 해소 된 감이 있지만 이에 대한 질문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당시의 사료와 정조의 나이, 그리고 그가 오랜시간 동안 병을 앓고 있었다는 상황을 고려할 때 독살에 대한 주장은 설득력을 잃을 수 밖에 없다고 교수님께서는 답변해주셨습니다. 드라마 '이산'에 대한 교수님의 평. 드라마에 대한 전체적인 느낌은 정조와 그 시대를 흥미롭게 잘 포착하여 만든 드라마라고 하셨습니다. 소품도 비교적 잘 구현했고 특히나 주인공과 여주인공의 인물이 괜찮았다고(^.^). 다만 정확하게 고증이 안된 부분은 아쉽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작은 부분이지만 '이산'의 경우 조선시대의 책은 두껍고 무겁기 때문에 일본, 중국과 달리 5개의 줄로 책을 엮는다고 합니다. 하지만 6개로 엮은 모습을 포착하시고 스트레스를 받으셨다고 합니다. 그 말씀을 듣고 강의를 듣는 분들 대부분이 그러한 것 까지 하나 하나 살피시는 모습이 놀랍다는 반응이었습니다. 교수님께서는 드라마 이산이 사극 장르를 표방하여 역사를 잘 활용했으며 상상력 발달 차원에서 큰 도움을 주는 드라마라고 생각하셨다고 합니다. 역사가는 사실을 근거로해서 정확히 저술하는 것이지만 드라마의 연출자는 그러한 의무는 가질 필요가 없다는 말씀과 함께 드라마와 소설이 역사적 사실에 치중하다보면 그 의미가 퇴색될 수 있다는 점도 강조하셨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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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주인이 되는 돈의 인문학 | 삶의 주인이 되는 돈의 인문학[5강] | 오드리 | 2010.4.10 | |||
무엇이 삶의 가치를 드높이는가? 강의자/ 김찬호(성공회대 교양학부 교수)
1.반성과 성찰을 위한 돈의 인문학 우선 강의의 시작은 현재의 우리를 돌아보는 것으로 시작하였습니다. 김교수는 '인간은 이성적이기 보다는 습관에 지배를 받는 동물'이라고 진단하였습니다. 매사에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 같아도 실제로 우리를 끈질기게 움직이는 힘은 습관에서 비롯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고정관념과 연결됩니다. 경험하지 않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 것, TV, 휴대폰, 인터넷등이 처음 개발되었을때 그것들의 실용적 가치에 대한 주위의 비판적인 시선 등을 예로 들었습니다. 또한 김교수는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안에서 우리가 경험해야 했던 비현실적인 여러 상황이나, 이미지 노출의 폭발적 증가로 겪는 과잉 감성을 경험하게 되면서 결국 스스로 자아를 설정하고 삶의 방식을 상상하는 것은 옛날의 개인보다 부족한 면이 많다고 지적하였습니다. 정보의 폭증과 급속한 사회 변화는 결국 개인의 상상력을 위축시켰으며 이는 사회와 시스템에 대해 맹목적 신용이 팽배하게 되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김교수는 이러한 상황에서 '개인의 삶의 태도를 성찰하는 것이 인문학이라면 돈은 어디쯤에 자리매김할 수 있을지' 이번 강의를 통해 가늠해볼 것을 제안하였습니다.
2. 돈, 지구에 온 목적이 뭐냐? 여기에서 김교수는 돈의 정체를 알기 위한 몇가지 질문을 던졌습니다. 돈은 물질이 아닙니다. 돈은 숫자이며 기호입니다. 그래서 둘을 같은 등식에 올려놓는 오류를 범하기 쉽지만 "돈을 좋아하는 것을 물신주의라고 할 수는 없다"고 김교수는 지적합니다. 돈을 가진 사람과 그만한 가격의 물건을 가진 사람 중에 누가 더 힘이 셀까요? 물론 품귀현상이나 사재기가 벌어진다면 다르겠지만. 현재로서는 "물건의 공급과잉상태를 고려할 때 돈을 가진 사람이 권력을 갖고 있다"고 합니다. 돈과 행복의 상관관계도 살펴보았습니다. 돈 때문에 행복해지는 경우가 있고 돈 때문에 불행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한 돈을 쓰고도 기분 좋은 상황이 있고 돈을 얻고도 기분 나쁜 상황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근본적으로 우리는 왜 돈을 추구할까요? 프로이드는 돈을 <불멸에 대한 환상>이라고 정의내렸다고 합니다. 사람의 미모, 건강,권력 등은 모두 사라지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돈이라는 것은 휴지조각이 되지 않는 이상 그런 걱정은 할 필요가 없지요. 그래서 흔히 인간은 자신의 유한성을 극복할 수 있는 든든한 장치로서 돈에서 만족감을 산출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3. 주변에 속지 않고 진짜 원하는 것 찾기 "알콜 의존증 환자는 술이 있으면 행복하겠지만, 그들의 행복도를 재는 데 있어 그들의 손에 들려 있는 술의 양을 척도로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 클라이브 해밀턴 <성장 페티시> 김교수는 우리의 욕망이 진정 자신이 원하던 욕망인지 확실히 따져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자기 마음을 탐구하는 것, 자기의 존재가능성, 잠재력 등을 계속 새롭게 밝혀내는 작업이 필요할 것입니다. 남들이 갖고 있기 때문에, 혹은 흔히 가질 수 없는 것이어서, 다른 사람들이 모두 원하기 때문에 나도 원한다는 식의 마음가짐이 현대의 마케팅 기법과 얽혀 현대인의 욕망에 들러붙어있습니다. 또한 욕망 뿐 아니라 혐오감 역시 타인에게 종속되어 있다고 합니다. 흔히 손꼽는 장애인시설, 소각장, 정신병원, 화장장 심지어 최근의 노인병원까지 주민들이 설립을 반대합니다. 큰 이유는 본인이 싫기 때문이 아니라 앞으로 이사올 사람들이 싫어해 땅값이 떨어질 것 같아서인 경우가 많다고 김교수는 설명했습니다. 나 자신의 욕망과 혐오감이 타인에게 종속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또한 돈에 대한 갈망 역시 외부에서 비롯한 것이 아닐지 성찰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돈은 잘 버는데 '무능한(삶의 가치를 높이는 능력이 낮은)'사람들이 너무 많은 세상에서 주어진 삶과 공간을 아끼고 가꾸는 소박한 정신이 진정으로 자신의 영혼을 들여다볼 수 있는 거울이 될 것입니다. 4. 관계와 유대를 향하여 현재 대규모의 시장은 모든 것의 가치가 가격으로 익명화, 추상화 되어 보편적인 돈만 있으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것으로 교환할 수 있다는 환상을 갖게 합니다. 이는 잠재적 가치가 발현되는 구체적인 상호작용의 다양한 맥락을 은폐합니다. 정보사회에서 유형의 자산보다 귀중한 것은 정보를 나누면서 함께 업그레이드 할 수 있는 관계라고 김교수는 역설하였습니다. 개인이 무엇을 소유하느냐 보다 어떻게 신뢰관계를 맺고 지내느냐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공동의 경험 자원을 공유하여 함께 공명할 수 있는 모형은 모두가 참여하고 공유하며 가치를 이끌어내고 향상시키는 촉매가 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김교수는 우리시대의 청년실업이 큰 문제가 되는 이유는 단순히 돈을 못벌어서가 아니라 인간관계 안에서 공적인 자아를 경험할 기회를 가질수 없게 되는 점이라고 발언하였습니다. 세대의 경계를 넘어 서로 배우면서 성장하는 공간이 구축된다면 '지혜의 클러스터-시장을 통하지 않고서 사회에 접속할 수 있는 회로'로서 작용할 수 있는 가교가 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김교수는 이번 강좌를 통해 돈 자체의 증식에 관심을 두기 보다는 자신 스스로의 가치를 증식시킬 수 있는 관심의 공동체를 만들어 볼 것을 강조했습니다. 나의 자산은 바로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이란 이야기입니다. 돌봄을 강조하는 구체적인 사회관계가 미약한 우리사회에서는 개인이 시장이라는 개체를 통해 자기를 방어할 수 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김교수는 가족, 친구, 선후배, 동호회, 이웃 등 모두가 살아가는 힘을 북돋우며 가치를 만드는 공간을 경청과 응시, 우정과 환대, 돌봄과 소통 등의 방법을 통해 빚어낼 수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김교수는 마지막으로 외국의 한 서점에 붙어있는 글귀를 소개하였습니다. 5. 정리 <돈의 인문학> 강좌가 5강을 끝으로 막을 내렸습니다. 매주 화요일, 안락의 유혹을 가열차게 뿌리치고 총총히 강의에 참가하셨던 모든 분들께 일말의 동지애를 느끼며 마지막 후기를 썼습니다. 그동안 원활한 강의를 위해 애써주신 간사님과 강의 해주신 모든 강사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처음 해보는 자원활동에 매우 즐겁게 참여했었고 그만큼 부족한 점도 많았네요. 같이 강의들은 분들과 다음 좋은 강의때도 또 얼굴 뵈었으면 좋겠습니다. 모두들 건강하게 잘 지내시고 따뜻한 봄기운 많이 받고 힘내시길 바래요.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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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삶을 사랑하는 지혜 | 철학, 삶을 사랑하는 지혜[1-3강] | 느티나무 | 2010.4.10 | |||
이 글은 느티나무 자원활동가 박현아님이 보내주신 후기 입니다. 인생에서 철학이 절실했던 순간 내 나이 어느덧 30대 후반. 인생의 절반을 살아내면서 죽음의 공포를 지독하게 느껴 본적이 몇 번이나 있었나. 가까운 이가 공황장애를 겪는 걸 곁에서 그냥 지켜봐야 했을 때조차, 그 사람이 죽음의 공포를 온몸으로 표현해 내는 걸 목격했을 때조차도 난 그게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여자의 몸으로 새 생명을 둘이나 세상에 내보낼 때도 그 아이들의 탄생에서 이미 그것의 일부일 수밖에 없는 죽음을 쉽게 읽어내지 못했다. 무순처럼 아이들이 자라고 평온한 일상들이 포화 상태에 이르렀을 때, 그 즈음이었다, 내가 죽음을 공포로 겪어낸 것은. 잠든 아이들의 얼굴에서 형언할 수 없는 충만함을 느꼈던 그 때, 아 이 순간이 바로 찰나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 이 순간은 다시 오지 않을 시간이 되어 계속 흘러만 가고 있다는 생각, 죽고 나면 다시는 아이들과 아주 사소한 일조차 함께 할 수 없다는 생각들이 실체가 되어 죽음이라는 형상으로 내 앞에 나타났다. 그건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는, 오로지 혼자서 감당해내야만 하는 무척이나 외롭고도 섬뜩한 공포였다.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을 때도 그래서 힘들었다. 급기야 <더 로드>라는 영화를 보고 나서는 잠든 아이들 곁에 누워 그들이 내뱉는 숨소리에서 한참이나 위로를 받아야 했다. 어디선가 읽었던 글귀도 스쳐갔다. 인간이 이루어내는 모든 것들은 결국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처절한 몸부림의 결과라는 말. 그렇게 죽음과 친해지고 나니 죽음이 도처에서 보이기 시작했다. 죽음은 내가 좋아하는 색조차 생명력을 상징하는 초록으로 바꾸어 놓았다. 철학이 절실히 필요해지는 순간이었다. 원죄와도 같은 죽음의 공포... 그것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은 삶과 죽음과 인생과 인간에 대해 열심히 생각하는 길 밖에는 없을 터였다. 나는 그렇게 철학 책을 샀다.
▲ 철학아카데미 조광제 원장 1강 제목이 심상치 않다. 내 속을 들킨 것만 같아 교안에 얼굴을 온통 파묻고 읽었다. 철학의 임무는 삶을 긍정하도록 하는 것이라는 내용이 눈에 확 들어온다. 이거다! 빙고! 삶을 긍정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들을 찾아내고, 그것들이 어떻게 그렇게 만드는지 근거를 밝히는 것 그리고 그것들이 작동하지 못하도록 뿌리에서부터 잘라내는 일에 행동으로 동 참하도록 하는 것, 더 나아가 왜 우리는 그런 일에 함께 동참하지 못하는가에 대한 이유 를 밝히는 것, 이것이 철학이다! 진실로 명쾌한 정의가 아닐 수 없다. 바로 내가 애타게 철학을 찾았던 이유들이다. 결국 내가 극복해내야 하는 것은 죽음이 아니라 죽음이 주는 공포였다. 죽음의 공포는 때론 신의 모습으로 때론 국가나 자본의 모습으로 그 형태를 바꾼다. 그 공포 때문에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며 돈에 집착하고 소유에 집착하고 경쟁에 집착한다. 국가보안법의 존재는 죽음과 똑같은 메카니즘으로 우리를 공포로 몰아넣으며 삶을 긍정하는 데 바탕을 이루는 인간의 상상력을 근본에서부터 닫아버린다. 결국 민주화의 과정이란, 사람들의 최대한의 상상력을 발휘하여 각종 두려움들을 위반하게 만들고 그런 경험을 통해 삶을 적극적으로 긍정할 수 있는, 삶을 향유할 수 있는 새로운 경지를 열어나가는 과정이다. 철학은 이렇게 길을 잃은 나에게 다른 길을 열어준다. 2강 사물과 감각속으로 그렇게 삶을 향유할 수 있는 방법에도 종류는 있다. 배타적인 향유와 공유적 향유이다. 이런 논의를 위해 강의에서는 참으로 어려운 개념어들이 많이도 등장했다. 사유와 감각, 실체와 속성, 현상학, 감각덩어리, 외연과 본질, 감각이라는 수렴, 운동이라는 확산 등등. 단순무식하게 그 줄기만 전하자면, 사람들은 외부세계를 감각기관을 통해 자신에게 끌어들여(수렴) 인식하고 그것을 다시 다른 사람들이 감각할 수 있도록 세상에 펼쳐 놓는다(확산). 그렇게 펼쳐 놓는 게 외마디 비명이든 훌륭한 예술작품이든, 이런 수렴과 확산의 과정을 통해 인류는 문화와 문명을 이루어왔다. 서로의 감각들을 주고받음으로서 우리는 더 많은 감각들을 나에게로 수렴시킬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소유 중심의 사유는 수렴에만 방점을 찍는다. 여기에서 모든 불행이 시작된다. 이렇게 확산하지 않고 오로지 수렴만 하는 배타적 향유는 주로 물질적인 것들을 그 대상으로 한다. 이에 반해 공유적 향유는 수렴과 확산의 통일을 추구한다. 공유적 향유가 많을수록 인류 모두의 인생이 한층 더 풍요로워질 수 있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다. 죽음의 공포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삶을 긍정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들을 찾아내고 그 공포들이 억눌러 왔던 나의 상상력을 다시 부활시켜 인생을 향유하도록 하고 그 방향은 공유적 항유라는 올바른 길이어야 한다는 생각까지... 여기까지 철학이 나를 이끌었다. 3강 언어와 개념을 거쳐 그렇다면 수렴이라는 과정을 통해 내가 받아들인 이러한 것들을 어떻게 확산시켜 타인과 공유하는 삶을 살아갈 것인가? 이러한 흐름에서, 공유적 향유를 위한 도구로 언어가 등장한다. 나의 삶을 다른 이들의 삶과 튼실히 맺어주기 위한 씨실과 날실로서의 언어이다. 또 다시 이를 위해 강의에서는 한 차례 어려운 개념어들이 폭풍처럼 휘몰아친다. 차이와 지속, 존립과 존재, 외부와 내부, 차이와 지속의 통일체로서의 생성, 동일성에 의존하는 지속성, 변화 없이 설명할 수 없는 차이, 동일성의 반복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본질의 반복과 그 두 개념어 사이의 차이 등등. 반복되는 것들을 일일이 새롭게 인식해야 한다는 것은 비효율적이다. 언어는 근본적으로 이러한 반복들을 잡아채기 위한 것들이다. 그렇게 우리는 언어를 이용하여 반복되는 것들을 파악하고 그것들을 이용하여 삶을 더욱 심화, 확대시킨다. 하지만 언어는 반복에만 치중한 나머지 차이는 잡아내지 못한다. 아름다운 여러 사물들을 보고 ‘아름답다’라고 코드화시켜 얘기할 수는 있다. 하지만 이 때 ‘아름답다’는 코드는 아름다움 그 자체가 아니다. 결국 생성이라는 것은 차이와 지속의 통일체인데 그 중에서 우리는 차이를 잃어버리고 있는 셈이다. 즉, 언어가 지속성을 중심으로 생성에 접근한다면 차이에 중점을 두고 생성에 접근할 무언가가 필요하게 된다. 그게 바로 인간의 감각활동이다. 차이에 대해 어쩔 수 없이 무력하기만한 언어의 그 빈 공간을 메우는 것이 바로 감각이다.
▲ 철학아카데미 조광제 원장 언어는 “나의 삶을 어떻게 공유적 향유로 메울 것인가”에 대한 답에서 출발했다. 결국 나와 타인이 사용하는 소통의 도구로서 언어가 등장했던 것인데, 우리는 흔히 소통에 감각이나 감정이 끼어들면 제대로 소통할 수 없다고 여기는 경향이 있다. 오로지 이성적인 논리에 입각해서만 진정한 소통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진정한 소통은 자신의 감각을 오롯이 타인에게 전달할 수 있을 때 이루어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공동체적 가치를 논하는 차원에서 합리적이고 지성적인 개념에 의거한 언어적인 소통은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그런 합리적 소통이 진정 이루고자 하는 바는 ‘공동체적인 감각의 삶을 더욱 확대시키고 심화’시키는데 있다는 사실 또한 늘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공유적 향유를 위해 필요한 타인과의 소통에서 이성만이 그 주인공이 아님을 철학을 통해 깨닫는다. 철학으로 꿰뚫는 삶 죽음의 공포에서 향유를 위한 삶을 이끌어 내고, 참된 향유란 타인과의 소통으로만 이루어질 수 있다는 철학적 로드맵! 그 사고의 흐름이 지닌 매끄러움에 다시 한 번 감탄한다. 이 모든 것이 나와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조광제’라는 철학자(현상학자) 덕분이다. 하지만 아직 내가 가야할, 철학과 동행해야하는 길은 끝나지 않았다. 강의 내용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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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드라마, 사료로 다시보기 | 콤플렉스와 역사.. | 별빛소리 | 2010.4.8 | |||
민주주의 학교 강의를 들은 후 개인적인 생각을 정리해 봤습니다. 복습도 열심히 하려구요..^^ 콤플렉스란 무엇인가? 검색해 보니 '잠재된 감정의 복합체' 라고 한다. 어떤 객관적인 사실, 대상에 대하여 나만의 해석하는 감정의 덧씌움이 아닐까? '이것이 나의 콤플렉스야' 라고 스스로 인정하고 밝혀버린다면 비이성적인 사유습관을 만들지 않을텐데, 부끄러운 모습에 대하여 혹은 상처받은 모습에 대하여 감추려 하기 때문에 콤플렉스는 그의 인생에서 중요한 선택의 동기가 된다. 그러나 콤플렉스가 반드시 나쁜 방향으로만 작용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오히려 좋은 방향으로 풍부한 이해력을 높이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작가 김원일처럼.. 오늘을 만든 역사는 어디에서부터 기인된 걸까? 조선후기의 정치, 남북분단을 만든 상황까지는 일단 생각하지 않겠다. 남한만의 역사를 생각할 때 그것은 과거청산을 제대로 하지 못한, 시대적 과업을 외면한 역사라는 생각이 든다. 과거청산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 권력자들(기회주의자가 대부분일 것으로 생각)은 자신의 과거를 잊기 위해, 묻어버리기 위해 새롭게 부여잡은 기회에 대하여 병적으로 집착한다. 자신의 부끄러웠던 과거를 하얗게 지우기 위하여 어떤 대상에 대한 과도한 집착과 과민반응들을 하는 것이다. 그들의 콤플렉스는 일개 개인의 삶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역사를 바꾸고, 무고한 많은 사람들을 핍박하는 내적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언제까지 우리가 이들의 콤플렉스를 받아줘야 하는가? 어떤 특수집단의 사회적 생존(성공)을 위해 상식적인 말을 하는 사람들을 계속 사회에서 몰아내야 하는 것인가? 해방된 지 65년이 지나가고 있는 시점에서 일제청산은 단지 구시대의 과업에 불과한 것인가? 반민특위의 아쉬운 미결문제일 뿐인가? 언제적 문제인데 아직까지 그걸 걸고 넘어지나? 라고 생각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용서란 용서해야 할 대상이 분명히 드러날 때 가능한 거다. 우리역사는 한번도 그들을 제대로 단두대에 세운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오히려 그들의 능력을 활용한다는 속셈으로 새 시대의 옷을 입혀 주었고 새 시대의 선봉인양 행세하도록 내버려두었다. 용서는 훌륭한 덕목이고, 잘못을 끄집어 내어 단죄하는 일은 그리 썩 유쾌한 일이 아니다. 그냥 용서하고 말지.. 그러나 용서를 빈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잘못된 권위에 부당하게 짓눌렸고, 여전히 새롭게 짓눌리는 사람들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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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살아나는 과거, 대한민국의 역주행 | 되살아나는 과거 대한민국의 역주행 4강 | 방준호 | 2010.4.7 | |||
3월 8일부터 김동춘
선생님의 <되살아나는 과거, 대한민국의 역주행> 강좌가 시작되었습니다.
되살아나는 과거, 대한민국의 역주행 4강 천안호가 침몰했다. 젊은이들이 죽었다. 또다. 서해서 군인이 죽어나갔다. 누가 그들을 죽였나? 속 시원히 대답할 수 없다. 돌아보니 항상 그랬다. 차라리 북한이 그랬다면 속이라도 시원 하겠다. 욕지기 하고, 배상해 내라고 맘껏 따져라도 보겠다. 헌데 그럴 수 없는 상황, 들끓던 여론이 언제 그랬냐는 듯 잠잠해지고 책임소재는 흐지부지 되고 마는 일이 아마 이번에도 반복될 거다. 김동춘 선생은 이번 강의에서 ‘금새 잊혀지고 피해자들만의 외로운 싸움이 되버리는’ ‘공정하게 가해자를 가리지 않은 탓에 반성과 사과 없이 뭉개져버린’ 지난 일들을 끄집어냈다. 누가 삼성 중공업을 용서했지? 태안이 그렇다. 닦아도, 닦아도 끝내 남는 기름티에 수백만이 한숨 짓고, 눈물 흘렸던 게 고작 3년 전이다. 근데 벌써 기억이 가물 하다. 우리가 잊고 있는 지금도 태안의 외로운 고통은 진행 중이다. 한 마을서 평균치를 훨씬 웃도는 암 발병 있었다. 보상위원장을 포함해 4명이 자살했다. 주민들은 3조원대 피해규모 말한다. 하지만 손에 쥔 보상금은 아직 없다. 더 큰 문제는 가해자로 지목되는 삼성이다. 삼성중공업은 법원에 50억원의 책임제한을 신청했다. 법원은 끝내 삼성 편들었다. 무책임한 공권력, 끔찍한 거리의 정의 관동대지진, 일제 강제징용자, 제주 4.3, 전쟁기 피학살자, 4.19, 7-80년대 각종 고문조작, 군의문사 사건의 피해자들, 용산 참사 등등... 셀 수 없이 많은 약자들이 무책임한 강자의 횡포에 목숨 잃었다. 언론, 대기업, 때로는 공권력 그 자체에 의해서였다. 절절한 피해자의 역사에 비해, 사과와 화해의 기억은 거의 없다. ‘이미 지난 일’ 이라며 모르쇠로 일관이다. 잘잘못 가리고 원한을 삭혀 주어야 할 국가도 비슷한 말을 한다. 누구도 당신의 억울함을 풀어주지 않는다. 이 상황에서 불신으로 가득 찬 개인의 선택은? 스스로 복수에 나서는 것이다. ‘호미부대’, ‘창녕사건’, ‘사북탄광사건’이 이런 맥락이다. 누군가 피해를 당하고, 그 피해자가 가해자로 돌변하는 악순환! 참담한 일이다. 다시, 지금 우리를 생각하다 책임을 가려야 한다. 책임져야 한다. 이미 늦어버렸다고? 선조들이 저지른 짓에 책임지는 건 억울하다고? 이렇게 말하는 일본 전후세대에게 테츠야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일본 시민권을 가진다는 것은 일본국민으로서 혜택을 누린다는 의미다. 과거의 잘못으로 얻은 것들을 포괄적으로 나눠 받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책임져야 한다.” 같은 말을 우리 스스로에게도 던져봐야 할 때다. 그래설까. 2부에선 태안, 광주와 제주 그리고 또 수많은 피해자를 잊었던 것에 대한 반성이 먼저 오갔다. 그래서 시민단체와 언론의 역할이 중요하단 이야기도 나왔다. 잊혀지는 역사를 집요하게 파고들어 끊임없이 현재화하는 것의 중요성을 모두, 새삼 깨달았다. 김동춘 선생은 아이디어로 <7,80년대 부역했던 검사 사전 만들기>, <각 의원의 법안 별 찬/반 투표 내역, 표로 만들어 배부하기>등을 이야기하기도 했다. 생각해보면 차곡차곡 쌓인 원한들 위에 지어진 사회. 그럼에도 불구, 나만큼은 피해자가 아니라 생각 할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나대면 손해라는 생각에 고개부터 숙인다면, 누구도 믿지 말란 말에 공감한다면, 억울하면 출세하란 말을 버릇처럼 되뇌인다면 그건 이미 불신과 공포 속에 살고 있단 증거다. 모두 피해자인 우리는 때문에 더 큰 목소리로 가해자를 찾아야 한다. 사과 받고 맺힌 응어리 풀어 봅세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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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의 눈으로 과학기술을 보다 | 시민의 눈으로 과학기술을 보다[4강] | bossablues | 2010.4.7 | |||
<시민의 눈으로 과학기술을 보다> 4강 후기입니다.강의 시간에 다루신 주제와 조금 다른 접근을 해봤습니다. 어디까지나 사견이니 강의 내용과 혼동 없으시길 바랍니다. - 자원활동가 한광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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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의 눈으로 과학기술을 보다 | "왜?"냐고 묻는다면 | bossablues | 2010.4.7 | |||
<시민의 눈으로 과학기술을 보다> 3강
후기입니다.강의 시간에 다루신 주제와 조금 다른 접근을 해봤습니다. 어디까지나 사견이니 강의 내용과 혼동 없으시길 바랍니다.
- 자원활동가 한광희 3월 중순까지 눈이 내렸다. 벌써 봄꽃들이 만발했을 만도 한데, 이제야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다. 아직도 쌀쌀했다가 따뜻하길 반복해서 겨울외투는 오늘도 옷장을 들락날락하고 있다. 이 와중에 태평양 어디 즈음에 있는 섬나라 투발루는 이미 수도가 물에 잠겼고 유적도 남기지 못하고 역사 속으로 수장되는 중이라고 한다. 이유는 ‘지구온난화’로 인한 해수면 상승이란다. 극명한 대조다. 이미 투발루는 콜라병에 새겨진 북극곰과 함께 ‘뜨거운 지구’를 상징하는 이미지로 각인되었다. 다분히 감정적인 이미지는 상식의 차원을 넘어 정치적 구호를 생산한다. 교토를 지나 코펜하겐까지 기후협약은 무시할 수 없는 세기의 화두가 되었다. 엄춘설한에 지구온난화가 왠 말인가? 무슨 근거로 지구가 뜨거워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러한 주장은 유엔 산하 기후변화 연구기구인 IPCC(Intergovernmental Panel on Climate Change)에 의해 꾸준히 제기되고 담론화되었다. IPCC와 엘 고어에게 노벨상수상의 영광을 안겨준 2007년 보고서(4차)는 지난 100년(1906∼2005년)간 전 지구 평균온도는 0.74도 상승했고 북극의 바닷물이 얼어붙는 해빙(海氷)범위는 1978년 이후 10년에 2.7%씩 감소했으며 지구 평균해수면은 1993년 이후 연간 3.1㎜씩 상승했다고 밝힌다. 이들은 해수 온도측정이나 위성 관측 등 객관적인 방법을 동원한 것이므로 신뢰할 수 있다고 한다. IPCC가 내세우는 객관적인 자료는 통계다. 숫자와 그래프가 온도상승폭을 보여주거나 예측하는 방식이다. 그리고 나비효과처럼 난데 없이 타격을 입은 태평양 도서국가의 현실, 녹아내리는 빙하, 천재지변을 겪고 있는 제3국가들이 오버랩된다. 놀랍게도 서로다른 시각적 지표들은 서로 얽혀 강력한 인도적 동참을 요구하고 동원시키는 정치적 구호가 된다. 물론 과학은 숫자들을 나열하고 묵시록적인 미래를 예측하는데 총력을 쏟는다. 온난화가 과장된 미래예측이라 폄하하는 입장에서도(브외른 롬보그Bjorn Lomborg로 대표되는 회의주의자들) 역시 똑같은 측정과 숫자 놀음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 순간 숫자가 난무하는 보고서는 경전이 된다. 말하자면 기후변화 훈고학의 탄생이다. 지구온도 측정들을 위해 어떤 최신 기술들이 동원되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결론은 50여년 전에 나온 로마클럽보고서의 양식을 그대로 Ctrl+V 한 것은 아닐까 생각할 정도다. 말이 나온 김에 강의시간엔 다뤄지지 않았던 IPCC의 뒷얘기를 해볼까 한다. 지난해 코펜하겐에서 개최된 기후변화회의는 세계정상들을 한 자리에 모았다. 세계인의 이목을 집중시킬만한 스케일이었다. 해당 회의는 IPCC의 ‘과학적인’ 보고서에 기초해 열린 셈이다. 문제는 과학적인! IPCC 보고서에서 심심치 않게 오류를 찾을 수 있다는 점이다. 가장 큰 사례는 빙하게이트(Glacier Gate)다. IPCC는 2007년 발표한 제4차 보고서에서 “2035이면 히말라야 빙하가 녹아 없어질 것”이라고 적었다. ‘히말라야빙하 소멸설’이다. 결론은 IPCC가 해당 안건이 과학적 근거가 없는 헛소리였음을 인정하면서 일단락 됐다.(자세한 내용은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40100125131416&Section=05&page=1) 물론 이에 대한 문제제기는 IPCC외부에서 나온 것이다. IPCC는 내부적인 검토를 거쳤다면 분명히 발견했을만한 불명확한 부분을 알면서도 보고서에 실었다. 영국의 더 타임스는 위원장인 라젠드라 파차우리가 연구비 충당을 위해 허위내용을 보고서에 실었다고 주장한다.(http://www.timesonline.co.uk/tol/news/environment /article6999975.ece) 문제는 파차우리 개인의 영욕이 아니다. 어째서 내부 과학자들 역시 동조했느냐는 점이다. 설상가상으로 세계적 기후변화연구소인 영국 이스트앵글리아대 기후연구센터의 서버가 해킹돼 이메일 1000여 통과 문건 3000여 건 등이 유출됐다. 이 연구소가 1996년부터 13년 동안 진행한 기후변화 연구 결과와 관련된 것이었다. 이메일과 문건 내용 일부가 인터넷 사이트와 언론보도를 통해 급속도로 확산되면서 논란이 불거졌다. 이 센터 소속 과학자들이 기후변화에 대한 대응이 급박하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특정 연구 결과를 공개하지 않았거나 연구 과정에서 데이터를 조작했다는 의심을 제기했기 때문이다. 또 지구 온난화가 시급한 과제가 아니라는 학자들의 논문이 주요 학술지에 공개되지 않도록 분위기를 조성한 흔적도 나타났다. 주요 언론들은 이 사건에 워터게이트 사건을 본떠 ‘기후게이트(climate gate)’라는 이름을 붙였다.(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code=115& artid=200912171056521) IPCC(Intergovernmental Panel on Climate Change)라는 이름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이들은 순수한 과학자들로 이루어진 집단이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과학적 사실이 100% 무의미한 조작물이라고 단정 짓는 것이 대안은 아니다. 우리의 사고를 조금만 바꿔서 과학과 정치 또는 사회와의 경계를 조금만 흐리게 하는 건 어떨까? 과학이 불확실한 만큼 사회도 불확실하다. 남녀탐구생활이란 프로그램이 생각날 정도로 우리는 과학을 몰라요. 과학도 우리를 몰라요. 결론은 냉소적 과학비판일 뿐이다. 때때로 냉소주의는 무시를 넘어 험악한 음모론으로 흐르기까지 한다. 실제 IPCC 보고서에서 드러난 과장된 오류는 보다 작은 과학적 검증을 거친 명백한 위험들까지 초록에 동색을 입히고 있다. 생태적 회의주의자 또는 반과학주의자들은 온난화는 뻥이라는 주장을 불확실한 상상적 서사로 완성할 뿐이다. 씁쓸하지만 공평하게 매우 대칭적인 구도다. IPCC와 관련된 크고 작은 잡음과 관계없이 국제정치적 장(場)에서 온실가스감축은 최대 이슈가 되고 있다. 냉전시대 이후로 이런 지구적 동맹이 있었을까 싶다. 그리고 공공의 적으로 온실가스를 지명한다. 대다수의 국가들은 아이러닉하게도 썩어도 준치라고 시장 패러다임을 선수로 내세운다. 바로 탄소배출권거래제(Emission Trade, Cap and Trade)다. 간단히 설명하면 국가, 기업, 개인의 수준에 탄소배출허용량(CERs)을 설정하고 잉여량에 대해 거래를 인정하자는 제도다. 시장논리에 따라 배출량이 조절될 것이라는 믿음이다. 이미 유럽에선 국가 간 배출권 거래제가 시행중이고 대다수 1세계 국가들은 탄소시장도입에 긍정적인 반응이다. 대한민국 정부 역시 2011년부터 시행예정이다. 아무래도 탄소배출권거래제가 다양한 온실가스 중 탄소에 한정하다보니 원자력도 녹색에너지가 되는 모양새다. 우선 탄소배출량을 추산하는 회계과정을 거칠 것이다. 이 과정에서 단순 생산만 집계하거나 모든 생산물과 생활양식에 기준 탄소배출량을 부과하는 식의 집계방식의 논의가 있을 것이다.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든 우리의 삶에 숫자하나가 늘어나는 것은 자명하다. 기후문제는 국내 기후와 요원하다는 애초 생각과는 달리 평행선을 그으며 진행 중이다. 기후변화 없이도 기후가 삶에 영향을 끼치는 거대담론이 되는 과정이다. 이 지점에서 기후변화는 지식의 정치와 맞닿는다. 홀몸으로 거대담론과 상대하기란 매우 벅찬 일이다. 우선 지식이 된 담론은 인식의 지평에 서서히 스며든다. 따라서 문제를 제기하기 힘든 일상적 상황으로 몰고 간다. 마치 안개 낀 새벽녘에 길을 걷는 것처럼 경험적인 감각에 의지해야 한다. 물론 선험적인 지식에 반기를 드는 건 우연에 의한 것일 수도, 외부적 계몽에 의한 것일 수도 있다. 여기서 다시 지식은 형성될 것이고 또 다른 담론이 시작된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지는 지식의 연쇄과정에서 개인의 선택은 되묻는 것이다. 이번 강의에서 다룬 화석연료와 핵발전에서 대체에너지로의 전환은 위와 같은 탄소배출량과 탄소시장의 담론지형에 배치 될 수도 있다. 한편, 1점 전력생산 방식에서 다점 생산방식으로 전환과 같은 논의는 에너지 공동체라는 새로운 형태의 교환형식을 만들 운동의 가능성도 있다. 모든 것의 시작은 지식이 형성되고 유포되는 시점에 던진 “왜?”라는 질문에서 시작한다. 질문의 층위는 정치가 작동하는 모든 부분이다. 과학적 결과물에 대한 성찰과 정치적 구호와 실천에 대한 성찰은 다소 불편하지만 불확실한 것에 대처하며 살아가는 현명한 방법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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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주인이 되는 돈의 인문학 | 불안의 노예에서 돈의 주인되기 | 오드리 | 2010.4.6 | |||
3월 31일 저녁, <삶의 주인이 되는 돈의 인문학> 제 4강이 열렸습니다. 이번 시간에는 제윤경 대표님께서 강의를 해주셨습니다. 다양한 실제 사례를 통해 우리가 흔히 잘못 알고 있는 재무설계에 대한 상식을 차분히 설명해주셨습니다. 또한 지속적으로 청중의 반응을 살피며 강의의 흐름을 조절하고 농담을 곁들여 흥미롭게 말씀하는 제대표님의 방식덕분에 돈맹에 가까운 저도 큰 어려움 없이 내용을 따라갈 수 있었습니다. 경제 연구소에서는 지난 10년간 물가상승률 보다 임금상승률이 두배이상 올랐다고 발표하였다고 합니다. 자산시장에 가격결졍 매커니즘과 상품시장의 가격결정 매커니즘이 다르고 저개발국가의 생산력 증대로 인해서 글로벌 경제에 생산력 과잉공급상태이으로 노후에 대한 걱정이 지나치게 과장된 측면이 있다고 제강사는 설명합니다. 미래의 물가상승까지 반영해서 9억이니 10억이니 따질 이유가 없을 것이라는 말이지요. 나이가 들고 자녀가 다 커서 독립하는 시기 즉, 자녀에게 큰 돈 들일이 없는 시기가 되면 그때에는 큰 욕심을 버리고 작고 소소한 일이라도 의미있는 일을 찾아서 자신의 꿈에 한걸음 다가가는 여유가 필요하다는 의견이었습니다 [삶의 주인이 되는 돈의 인문학] 1강 김찬호 선생님 강의 후기 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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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드라마, 사료로 다시보기 | 소현세자는 누가 죽였나? | 최성호 | 2010.4.4 | |||
들어가며
▲ 한명기 교수 소현세자는 누구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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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의 눈으로 과학기술을 보다 | 민주주의 관점에서 바라본 핵발전과 핵폐기물 정책 | ednhunt | 2010.4.1 | |||
시민의 눈으로 과학기술을 보다 2강 예술가란 어떤 존재일까요? 안일하고 지적인 사고를 하는 일에 게으른 인류가 다른 질문과는 달리 이 질문에는 말할 수 없이 끈질긴 태도를 보여왔습니다. <그런 건 하늘이 내려준 재능이야!> 어떤 예술가에게 감명을 받은 착실한 사람들은 이렇게 겸허하게 말합니다. 이들의 선량한 견해에 따르면 명랑하고 고상한 감명을 주려면 그 원천인 예술가도 틀림없이 명랑하고 고상할 것이라는 이야기지요. 그리하여 예술가의 이러한 재능이 극히 사악한, 극히 미심쩍은 <재능>일 수도 있다고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위의 인용문은 토마스 만의 중편소설 <토니오 크뢰거>에서 주인공(토니오 크뢰거)이 ‘리자베타’에게 ‘예술가’에 대한 환상을 깨주는 구절 중 하나이다. 나는 이렇게 교육받았다. 초등학교-중학교-고등학교 지금의 대학원생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한낱 사회학도의 길을 비스듬히 걷는 이 도중(道中)에 이르기까지도, 과학에 대한 일종의 진보적 미래지향적인 낭만성에, 마치 인용문에 표현된 듯한 예술적 재능인 것인 양. 그렇게 존중과 경의와 신뢰와 믿음으로 내 주변 생활세계를 구축해왔었다.
▲ 이영희 교수 핵 폐기물, 시민들의 삶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고 사회적으로 논란과 갈등이 큰 국가전력정책의 결정은 우리의 선량한 믿음으로 지금까지 이뤄져 왔었다. 이것이 일종의 기술관료적 패러다임을 만들어냈다. 핵폐기물 관리는 전문가들에게 맡겨야 한다는 일종의 폐쇄적인 전문가주의를 양산해 내었고 국가 정책의 위험 평가 및 관리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 2017년 한국 국토에 핵발전소 총수는 28기에 달하게 되는 고도의 풍요사회 속에서 핵폐기물의 양 또한 점점 증가할 것은 자명하다. 현재 경주 월성원전 인근 지역은 이에 대한 준비가 한창이다. 문제는 이러한 물질에 대한 안전을 그 누가 호언장담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한 전문가들은 적절한 데이터 기준수치를 들고 와서 지역 주민들에게 안전성에 대해 설득하지만 정작 피해를 입는 사람은 아마도 아닐 듯싶다. 우리나라 전력 정책의 비민주적 의사결정 구조에서는 시민들의 생활세계에 대한 고려가 전혀 없다. 이러한 과정에 대한 경고는 율리히 벡이 정의한 ‘위험사회’로의 이행이다. 이것은 후기 산업사회의 ‘위험’(핵폐기물)이 가지는 특징을 처리함에 있어 그 과정이 내재적인 대립과 모순으로 인해 계산불가능한 위험들에 직면하게 되고 이로 인해 불확실성으로 회귀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더 이상 산업사회의 제도(기술관료적 패러다임-폐쇄적 의사결정구조)들로써는 이러한 위험을 통제하지도, 이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지도 못한다. 유명했다. 우리나라의 모험심(높은 위험추구경향)은. 일명 한국의 압축적 근대화는 전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그렇기에 우리나라의 풍토가 안전보다는 속도를, 내실보다는 외형을, 과정보다는 결과를 그리고 미래에 ‘부가될 비용’보다는 현재 시점에서의 ‘비용절약’을 더 중요한 덕목으로 근대화 과정을 보편화시켰다. 경 주 지자체에게 2005년, 중/저준위 방폐장 부지선정으로 3,000억+a의 보상액을 지급한 사례를 보면 이러한 모험심은 여전히 순항중이다. 각성이 필요하다. 우리의 행위는 사회적 행위의 일부에 소속된다면 마찬가지로 우리가 추구하는 모든 것들 속에 의도하지 않은 결과들이 작동할 수 있다. 우리는 비록 전문가는 아니지만 생활세계의 피해를 그 누구보다도 앞서 먼저 당하는 입장에 속한 일반시민이다. 위험의식은 이러한 위험의 가능성에 대해서 ‘비경험’, 혹은 ‘비전문성’으로 새롭게 구성될 필요가 있다. 유대관계의 중심에 불안, 공포가 존재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생명에 기반한 공동성을 추구할 수 있다. 비록 아직까지도 우리들은 ‘과학적 합리성’(새로운 전문가집단)에 다시금 호소하는 역설이 성립될 수도 있지만 심사숙고하는 시민의식! 이것 하나로 뭉쳐진다면 이러한 문제가 지금, 당장 여기에 직면한다 했을 때도 슬기롭게 대처할 수 있는 연대를 꿈꿀 수 있지 않을까. 더 이상 과학기술은 천부적인 예술적 재능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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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드라마, 사료로 다시보기 | 애정에 눈먼 못된 어미? 천추태후 | 뚜빠뚜빠띠 | 2010.3.30 | |||
역사를 연구하고, 가르치며, 또 배우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역사학이란 단순히 과거의 사실 조각들을 수집하며 꿰맞추는 지적 퍼즐 놀이에 지나지 않은 것일까요? 아니면 일차적인 사실보다 한 차원 높은 거대 담론의 알리바이를 확보하려는 현재적 관심의 소산일까요? 그렇다면 그 거대 담론은 무엇이어야 할까요? 3월 25일, 고려 초 천추태후가 살았던 시대를 주제로 한 <역사드라마, 사료로 다시보기> 세 번째 강의는 풀리지 않는 질문들을 던져 주었습니다. 강의 오래하는 것 안 좋아하신다던 광운대 교양학부의 김인호 교수님도 결국 수강생들이 던지는 그 질문들에 발목이 잡히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여기, 우리에게 다소 익숙한 대답을 하는 드라마가 있습니다. 2009년 KBS에서 방영된 <천추태후>입니다. 천추태후, 애정에 눈먼 못된 어미? 천추태후. 태조 왕건(1대)의 손녀이고, 경종(5대)의 부인이자, 성종(6대)의 누이이자, 목종(7대)의 어머니이자, 또 현종(8대)의 이모인 여인. 이 복잡한 가계의 원인은 지방 호족 세력과 손잡기 위해 공식적으로만 29명이나 되는 부인을 둔 왕건의 전략에 있습니다. (그래서 고려시대에는 외척의 힘이 굉장히 셌습니다. 왕욱의 딸인 천추태후가 왕씨가 아닌 황보씨인 것만 봐도 짐작이 가능합니다.) 당시까지는 아직 골품제적인 풍습이 남아서 왕족끼리만 특권을 이어가겠다는 생각에 이복형제들끼리만 결혼한 것도 족보 그리길 어렵게 만듭니다. 그러다 보니 왕위 계승 문제도 복잡해집니다. 심상치 않은 갈등이 예상됩니다. 하지만 수강생 중 누구도 드라마를 본 이가 없다는 걸로 보아 썩 재미있게 작품을 그려내진 못한 것 같습니다. 종래 조선의 유학자들은 천추태후를 애정에 눈이 먼 못된 어미 정도로 치부했습니다. 남편과 사별한 후, 김치양과 눈이 맞아 아들까지 낳은 여성. <고려사>는 그 관계를 ‘간통’이라 표현했습니다. 더구나 그는 아들인 목종(7대)이 18세로 장성했음에도 여성의 신분으로 섭정을 펼쳤습니다. 보수적인 유학자들 눈에 곱게 보일 리 없었겠죠? 다분히 조선의 유교적인 질서가 반영된 평가가 이어졌습니다.
는 사극이 사실로 받아들여진다는 점”이라는 딜레마를 토로했습니다. 하지만 드라마는 이런 사소한 문제보다 좀 더 논란이 될 만한, 거창한 해석을 내놓습니다. “나는 꿈을 꾼다. 나의 고려가 대제국이 되는 그날을...” 중무장을 한 천추태후 사진 옆에 쓰인 문구입니다. 천추태후를 고구려 계승의 꿈, 민족성 혹은 자주성 회복과 같은 거창한 담론에 연결지은 것입니다. 이전에도 제국에 관련된 드라마는 있었습니다. 고구려 건국을 다룬 <주몽>, 발해 건국 이야기인 <대조영> 등이 그랬지요. <천추태후>는 이러한 드라마들의 연장선상에 있는 작품입니다. 고구려사를 중국의 지방 정권으로 편입하려는 동북공정에 대응하려는 의도도 엿보입니다. KBS 다큐멘터리 <한국사 전(傳)>에서도 이런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천추태후를 재평가합니다. 다큐는 목종대의 서경 중시 정책을 북진정책으로 해석합니다.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처럼 말이죠. 천추태후가 불교를 중시하고, 전통행사인 팔관회를 부활시킨 것은 고려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려는 자주 의식의 발로로 읽어냅니다. 이전의 성종은 스스로 송나라의 제후국임을 청했습니다. 팔관회나 연등회를 폐지하고 중추원을 설립해 유학과 중국을 지향한 정책을 펴기도 했습니다. 천추태후는 성종대의 이러한 정책 방향을 되돌려 자주성을 강조했다는 것입니다. 또한 성종과 현종 대에 받았던 거란의 침략이 목종 대에는 없었다는 점을 들어 실리외교의 결과라는 해석을 내립니다. 천추태후가 고구려 부활을 꿈꿨다? 글쎄요.
하지만 김인호 교수님은 이러한 해석들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대고구려 부활의 꿈이라고 얘기하기에는 근거가 빈약하다는 것입니다. 유일한 근거로 볼만한 게 서경 중시 정책인데, 애초에 서경은 고려 입장에서 굉장히 중요한 지역이었습니다. 또한 천추태후가 서경 근처 황주 출신인 점, 그의 연인 김치양이 그 근처인 황해도 동주 출신인 점 등이 천추태후의 의도를 순수하게 보기는 어렵게 만듭니다. 게다가 서경을 주나라의 수도인 ‘호경’으로 개칭한 것도 고구려 계승 의지에 의문을 품게 합니다.
불교 및 전통을 중시했다는 것도 의심스럽습니다. 일단 김치양이 승려 출신입니다. 동주에 사당을 건립하는 등의 정책은 이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더구나 당시 불교며 팔관회와 같은 행사들은 금전을 챙길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마치 오늘날 일부 종교나 행사가 그렇듯이요. 성종이 팔관회를 없앤 이유로 재정이 많이 들어 번잡스럽다는 점을 든 것만 봐도 중국 지향이라 단정짓기 어려운 사정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자주성 회복이라는 그럴듯한 포장 뒤에 감춰진 속살에서 풍기는 돈 냄새를 무시하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실리외교 역시 과장된 측면이 있습니다. 성종이 송과의 관계를 중시해서 거란의 침입을 불러왔다는 해석을 우리는 많이 들어왔습니다. 하지만 성종 13년 거란 침입으로 송에 구원병을 요청했다 거절당하자 송과의 관계를 단절한 사실이 있습니다. 사대라 해서 반드시 일률적인 관계만을 맺은 것을 아님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목종 역시 재위 2년에 송에 사신을 파견해 거란의 위협을 호소한 바가 있고요. 각 지역에 성을 쌓아 전쟁을 대비할 정도로 거란은 여전히 위협적이었습니다. 게다가 거란을 배척하라는 것은 훈요십조에도 기술된 태조 왕건의 유훈입니다. 고려가 후삼국 경쟁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었던 데에는 거란이 멸망시킨 발해의 유민을 포섭한 것이 크게 작용했기 때문에 그랬던 거지요. 거란 배척을 일면적으로 평가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김인호 교수
김인호 교수님은 이러한 점들을 근거로 천추태후가 대국을 지향했다는 주장을 반박합니다. 덧붙여 거대 담론에 무리하게 사실들을 엮어 넣으려는 일각의 시도에 대해 무책임하다고 비판합니다. 그러한 시도들이 일종의 콤플렉스라는 것입니다. 대륙 변방의 반도국이 갖는 콤플렉스, 식민지배 경험을 지닌 약소국이 갖는 콤플렉스 말이죠. 교수님은 그런 콤플렉스의 일종으로 우리나라가 일왕을 그냥 왕이라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일본은 물론이고 다른 외국은 모두 천황이라 부른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왕을 천황이라 불러도 사대를 하는 것은 아니고, 또 그런 호칭이 일왕의 격을 새삼 높이는 것도 아닌데 말이죠. 불필요하게 명분에 집착한 것이라는 비판과 함께 이제 그런 콤플렉스에서 벗어났으면 한다는 바람이 이어졌습니다.
물론 이런 주장에 곧바로 찬반 논란이 이어졌습니다. 한 남성 수강생은 우리가 민족을 강조하는 것, 우리가 국사를 배우는 것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며, 한두 사례로 천추태후의 고구려 계승 의지를 부정하는 것은 옳지 않다 주장했습니다. 실제로 민족주의에 대한 반성에도 불구하고, 현실 정치는 민족과 국가를 중심으로 이루어집니다. 특히나 우리나라는 주변국의 역사 왜곡에 몸살을 앓고 있는 실정이어서 더욱 반작용이 강하게 일어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주장에 다른 여성 수강생은 민족이라는 개념 자체가 19세기 유럽의 제국주의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냐며, 굳이 고대사까지 민족주의를 연결짓는 것은 무리라는 주장을 펼쳤습니다. 민족은 ‘상상의 공동체’라는 베네딕트 앤더슨의 주장을 연상시킵니다. 이 외에도 여기저기서 찬반 의견과 질문이 쏟아졌지만, 시간이 모자라 수강생들의 표정엔 아쉬움이 역력했습니다. 거대 담론이냐, 아니냐 의견은 분분하지만 그것들이 사실에 발 딛고 있어야 함에는 모두가 공감할 것 같습니다. 주변국의 왜곡에 덩달아 왜곡으로 맞서는 것은 이성에 기반해야 할 학문의 장을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정치의 장으로 변질시킵니다. 그리고 그 싸움에서 우리는 언제나 패배할 수밖에 없습니다. 거짓에 대항할 힘은 오직 진실에서만 나옵니다. 이 강의가 있던 주에는 2차 한일역사공동위원회의 활동 결과 발표가 있었습니다. 양국의 학자들은 임나일본부설이 거짓임에 동의했습니다. 하지만 을사조약의 위법성에 대해서는 합의를 보지 못하고 각국의 의견을 병기하는 선에서 활동을 접어야 했습니다. 더딘 걸음이지만 조금씩 나아가고 있습니다. 단단하고 우직한 진실의 힘으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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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주인이 되는 돈의 인문학 | <삶의 주인이 되는 돈의 인문학> 제 3강 | 오드리 | 2010.3.29 | |||
경제의 근본을 찾아서 강의자/성공회대 김찬호 교수 어느덧 세 번째 강좌가 열렸습니다. 이번 시간은 첫 번째 강좌를 맡았던 김찬호 교수가 비 경제학적인 언어를 통해 경제를 삶의 방식에서 어떻게 접근하고 풀어나갈 것인지에 대해 강의를 해주셨습니다. 보이는 숫자가 전부일까?
숫자는 근대 이후의 사회에서 객관성과 합리성을 담보하며 막강한 힘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런 숫자가 '모든 가치를 아울러 객관적으로 측정된 것인지', '과연 진실되게 현실을 반영하는지', '측정 불가능한 가치를 제대로 환산할 수 있는지'에 있다고 김교수는 말했습니다. 예를 들어 월드컵 경기장을 지을 때는 입장권수입과 관광객 유치효과, 이미지 상승에 따른 마케팅 효과 등을 고려해서 짓는 것이 이득이라고 판단, 시작하지만 건축 비용과 그에 따라 눈덩이처럼 커져가는 유지․보수비 때문에 초기 예상과 달리 돈으로만 따지면 적자로 돌아가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습니다. 경제적 효과나 손실액 같은, 돈으로 환산하기 어려운 항목은 전문가들이 어떻게 계산하느냐에 따라 크게 달라질 수 있고 이에 비전문가들은 휘둘려서 그릇된 판단을 할 수 도 있는 거지요.
단선적 인과론도 잘 따져보아야 합니다. 복합적인 실체를 몇 가지 제한된 변수들만으로 단순한 모델로 만드는 오류들이 종종 있다고 합니다. 최근의 범죄사건에서 사고가 나면 모든 악을 가해자 혼자 다 구현한 것처럼 몰고 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가해자의 삶과 환경은 고려되지 않은 채 말입니다. 복잡한 원인 중 하나를 부각시켜 그것으로 끌고 가면 너무나 명쾌하고 그 사람을 극형에 처함과 동시에 악이 종결되었다는 카타르시스까지 느낄 법하니 이런 오류는 때론 유혹적일 것입니다. 최근에 흉악범죄에 따른 사형존폐논란에 따른 각 계의 주장이 어떤 식으로 흘러가고 있는지 문득 떠올랐습니다.
허구를 지탱하는 믿음, 믿음으로 구성된 세계
점점 복잡해지는 사회
경제의 재건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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