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3일 ‘디자인, 사회를 바꾸다’ 강좌의 마지막 강의(한국 도시디자인과 정체성) 후기는 임재홍 자원활동가가 작성했습니다. - 느티나무
김민수 교수는 도시를 디자인 한다는 것은 문화와 상징 사이의 변증법적 관계를 통찰하고 해석함으로써 삶을 약속하는 일이라고 정의했다. 이어 그는 “우리의 도시이미지는 역사와 문화를 가꿔나가는 의식이 결여되어 끊임없는 건설과 공사판 만들기의 토건국가식 개발정책이 만들어낸 산물이며, 지속가능하게 가꿔나가는 삶보다는 볼거리 위주의 개발과 전시행정, 부동산투기를 위해 끝없이 변경되는 공사판 속의 삶과 욕망이 만든 도시풍경의 미학적 특징을 갖는다”고 설명했다.
이러한 모습으로 불연속적이고 덧없는 희극적 키치도시가 되고 있으며, 급조된 도시이미지는 인스턴트적인 컵라면과 같은 즉각적 만족을 위한 불연속의 미학이라는 것이다. 한국에서 도시정체성의 문제는 다름 아닌 각각의 도시만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특성을 무시한데 있다. 따라서 이러한 도시들마다의 고유한 역사성을 살리는 도시디자인이 절실하다.
새로운 것은 더욱 새롭게, 오래된 것은 오래된 대로 가꿔나갈 때 도시의 새로움이 빛을 발하게 되며, 그것이 구도시와 신도시가 공존하는 길이다. 도시의 ‘시간의 켜’를 느낄 수 있는 살아 숨 쉬는 그런 도시 말이다.
강의 말미에 김민수 교수는 5주차 강의로 그동안 디자인에 대한 잘못된 시선의 재조정, 치유, 재맥락화에 대한 공감이 이루어졌던 시간이었기를 바란다는 말로 강의를 마쳤다.
마지막 강의 이후 뒷풀이
기다림과 즐거움의 시간이 오늘의 마지막 강의로 많은 아쉬움을 남긴 채 끝이 났다. 그렇게 강의는 끝이 났지만 무언가 새로 시작되는 느낌이 드는 것은 아마도 디자인에 대한 관점이 조금은 달라졌기 때문일 것이다. 관심이 없었던, 어쩌면 당연하게 느꼈던 눈앞에 펼쳐진 모든 것들에 미안한 마음을 그리고 호기심 어린 눈을 찾아주신 김민수 교수께 감사드린다.
오는 11월 13일은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치며 자신의 몸에 스스로 불을 붙인 고 전태일 열사의 40주기가 되는 날입니다. 참여연대 노동사회위원회와 아카데미 느티나무는 40년이 흐른 2010년 오늘, 전태일을 다시금 생각해보는 강연과 답사 프로그램을 마련하였습니다.
지난 주 김남근 변호사의 첫 강의에 이어 이번 주 2강은 「부동산 계급사회」의 저자이신 손낙구 강연자를 만나는 자리였다. 강의 주제는 ‘대한민국은 부동산 계급사회다’ 였는데, 한국사회의 부동산으로 인한 경제적 사회적 문제점들을 계급적으로 다루어보고 또한 주요 통계들을 살펴보는 식으로 진행되었다. 대부분의 내용이 내 피부에 와 닿는 얘기들이라 그런지 자연스레 내가 어릴 때 살던 집이 생각났다.
어렸을 때 난 단독주택 반지하 셋방에 살았다. 어리기도 했었고 그때부터 나빴던 기억력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집에서의 기억은 하나밖에 없다. 시끄럽게 집 마당을 뛰어다니는 나 때문에 연신 허리를 숙여가며 사과를 하던 어머니의 모습.
일곱 살이 되던 해에 우리 네 식구는 방 두 칸짜리 아파트를 사서 이사했다. 처음 봐서 너무 신기했던 엘리베이터, 하지만 엘리베이터를 탈 필요가 없는 1층이라는 게 속상하긴 했지만 아무리 뛰어놀아도 뭐라고 할 사람 없는 진짜 우리 집이 생겨서 너무 좋았다. 한동안 밥만 먹으면 동생이랑 집을 나와서 다음 밥 먹을 시간이 될 때까지 엘리베이터를 타고 놀았는데 그것도 금방 질렸다. 역시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집이 최고였다.
난 아직도 그 집에 살고 있다. 7살 때는 운동장 같던 집이 스물아홉이 된 지금은 그렇게 좁을 수가 없다. 이사를 가고 싶지만 주변엔 평수를 늘려서 갈 곳이 없다. 22년이란 시간동안 집값은 10배가 넘게 올랐지만 다른 곳도 마찬가지라 소용이 없다. 7살 때 천만 원만 더 보태면 옮길 수 있던 집이 이제는 3억 이상을 더 줘야 갈 수 있단다. 전에는 꿈이라도 꿀 수 있었지만 지금은 더 이상 꿈 꿀 수 없는 집이 되어버렸다. 자산이라고는 지금 살고 있는 집이 전부인데 집값은 계속 오르니 전세로 옮겼다간 전에 살던 집마저도 가질 수 없게 될까 두려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다.
그래도 아버지는 당신 소유의 집이 있으니 행복한 사람이다. 손낙구 강연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난 지금까지 아버지 덕에 '6계급'에서 '2계급'으로의 승급해서 호화스런 생활을 해왔지만 결혼을 하고 독립을 하게 되면 다시 '6계급'으로 강등되는 도시빈민의 삶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너무 겁이 난다. 행복하기 위해서 결혼 하는 것일 텐데 결혼이 행복을 생각나게 하기 이전에 이리 저리 옮겨 다니며 뿌리 없는 삶을 살고 있는 내 모습, 마치 쓸개에 튜브가 꼽혀 죽을 때까지 쓸개즙을 빼앗기는 곰처럼, 돈을 버는 족족 제대로 써보지도 못하고 고스란히 집을 마련하는 데 올인해야 할 상황들 앞에 놓인 내가 가엾어지기까지 했다.
그래서 더 강연이 기다려졌는지 모르겠다. 당연히 그럴 수 없다는 걸 잘 알지만 마음의 위안이라도 삼게 거짓말로라도 내게 명쾌한 해답을 줄 수 있기를 기대했었다. 내게 부동산 문제는 답이 보이지 않는, 풀 수 없는 문제로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현 가능성 여부를 떠나 손낙구 강연자가 제시하는 대안인 계급별 맞춤형 주택정책이나 점진적 택지국유화를 통한 공공주택 공급 등을 들으니 공감이 가면서 조금은 위안이 된다.
그러나 사실 강연 후에도 여전히 마음은 무겁다. 당신이 살고 있는 집이 재건축 대상이 되어 집값이 오르길 바라면서도 한편으론 세 들어 장사하던 가게 주변이 재개발이 되어 보증금도 못 받고 쫓겨나 이리저리 시위하러 다녔던 우리 어머니처럼, 부동산 문제는 부동산 5적(건설재벌)이 구조화되어 있는 것 뿐만 아니라 일반 국민들의 이해관계 또한 복잡하게 얽혀 있어 더욱 더 해법을 찾기가 쉽지 않다는 점 때문이다.
내가 아버지가 될 때, 22년 전 우리 어머니처럼 집주인에게 연신 허리를 숙이는 모습이 재연 되는 일이 없기를, SH공사 광고 문구처럼 더 이상 집이 사는 것이 아닌 사는 곳이 되기를, 지금까지 내 걱정이 기우이기를 희망해 본다.
1강 부동산 덫에 걸린 한국사회와 시민운동 2009년은 하룻밤새 여섯 생명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용산참사로부터 출발했다. 그러나 그 여섯 죽음은 한국사회가 안고 있는 부동산 문제라는 빙산의 상징적 정점일 뿐이다. 2006년 전국을 강타한 뉴타운․재개발 열풍은 불과 2년도 지나지 않아 문제점을 드러냈고 그 열기마저 식은 지금은 한국사회 전체를 침몰시킬 수도 있는 덫이 될 수도 있다는 공포감마저 퍼지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2010 참여연대 부동산강좌는 늦은 감이 없지 않지만 꼭 필요한 강좌다. 그 첫 강의를 참여연대 민생희망본부장인 김남근 변호사와 함께 했다.
이번 강의는 10개의 부동산 관련 쟁점과 그에 따른 3~4개의 유제로 이어진 질문들을 가지고 토론 및 이야기하는 형식으로 이어졌다. 현재 부동산과 관려된 많은 논쟁들을 집약시켜 놓다보니 워낙 광범위해서 아쉽게도 한정된 시간 안에 모두 내용을 다루기는 어려운 부분이 있었다.
김남근 민생희망본부장
한국의 법․경제 질서에도 부합한 ‘토지정의’
이번 강의를 들으며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토지공개념 도입이 그 자체로 헌법에 위배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토지공개념 3법인 ‘토지초과이득세법’이나 ‘택지소유상한에 관한 법률’이나 ‘개발이익환수에 관한 법률’이 보수언론이 선전하는 대로 대한민국 헌법을 위배하거나 자본주의 경제 근간을 뒤흔들겠다는 불온한 발언이 아니라 세계 어느 나라에서나 대체로 시행되고 있고 세부적인 부분에 조금씩 수정이 필요할지 모르지만 오히려 건강한 경제 질서를 위해 꼭 필요한 개념들이라는 사실이었다.
대한민국 기득권의 대부분이 토지로 인한 불로소득과 특권을 누린 계층이다 보니 토지에 대한 조그만 제한조차 격렬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듯 하다. 지금까지 토지정의를 둘러싼 담론이 왜곡되어, 건전한 토론들이 너무 왜곡되어 온 것은 아닌지 생각도 들었다. 토지재산의 특성과 헌법의 재산권의 사회적 귀속성에 대한 설명과 함께 토지공개념 3법의 역사를 추적하는 것은 좋은 공부가 되었다.
투기 억제의 진짜약과 가짜약
이번 강의에서는 투기를 억제하기 위한 주택공급정책, 세금정책, 금융정책들을 두루 살펴보며 효과 있는 정책과 거의 효과를 보지 못한 정책 등이 소개되었다. DTI와 LTV, 양도소득세와 토지보유세 그리고 논란 많았던 분양가상한제의 효과 여부 등 각종 부동산 정책이 끼친 영향을 굵직굵직하게 검토해 보았다. 흥미로우면서도 또한 우울한 사실은 정부가 투기억제에 효과를 많이 거둔 정책보다는 효과를 보지 못한 정책에 치중하고, 그나마 효과 없는(부족한) 정책마저도 실천할 의지가 희박해 보인다는 사실이다.
특히 최근에 정부가 발표한 8.29 부동산 대책에서는 DTI를 한시적이나마 전면 해제되었다. 미국에서는 ‘약탈적 대출’이라서 엄격히 금지하는 정책이 국내에서는 오히려 정부가 나서서 해제하고 국민들에게 빚을 내서 집을 사도록 부추기는 것은 정말 납득하기 힘들다.
뉴타운․재개발 환상과 거짓에 기초한 사업
뉴타운․재개발에 대한 환상이 깨진 것은 조금 됐지만 이번 시간에는 그중에서 뉴타운․재개발 사업의 근거가 되었던 도시및주거환경정비법, 도시개발법 등에 대한 불법, 편법운용과 관련한 이야기도 나눴다.
김남근 본부장은 재개발 사업의 문제점을 정확하게 짚어 주었다. 재개발의 원래 목적은 열악한 주거환경에 있는 서민들의 주거환경 개선을 위함이다. 하지만 정부와 서울시가 추진하려고 하는 강북을 강남으로 만들겠다는 발상은 결국엔 재개발을 통해 그곳에서 살던 사람이 중산층으로 올라가던가 아니면 원주민들이 쫓겨나면서 그 곳에 사는 사람들이 바뀌어야 하는 두 가지 선택지밖에 없게 된다. 김남근 본부장은 대안적 재개발 방식으로 ▲ 공공의 단계적 지원을 통해 도로, 학교, 공원 등의 기반 정비가 이뤄지고, 주민은 자기 집의 일부를 고치는 식으로 나가야 한다고 했다. ▲ 또한 처음부터 사업 비용 등을 정확히 공개해야 한다고 했다. 이는 너무나 당연한 행정절차인데도 제대로 되지 못했던 부분이다. 많은 주민들이 뉴타운 재개발 바람에 휩쓸려 도대체 수억이 들지도 모를 사업에 함부로 끼어들었던 그 많은 사례들을 생각하면 순간 아찔해진다.
이렇듯 개발의 필요성을 부인할 수는 없지만 현재의 뉴타운․재개발 사업은 모든 면에서 무리한 사업이라는 것을 스스로 편법 운용을 통해 반증하고 있는 듯 했다. 이제 막연한 환상에 근거해 무모하게 사업을 밀어붙이는 식은 지양되어야만 한다.
1강 부동산 덫에 걸린 한국사회와 시민운동
환상을 넘어 진실을 직시해야 한다.
투기의 열풍 뒤에는 진실과 맞대하는 충격을 피할 수 없다. 더 오랫동안 환상을 붙잡고 있을수록 그 충격은 크고 아플 수밖에 없다. 또한 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면 막연한 공포에 휩쓸릴 수밖에 없다. 일본을 20년 불황에 몰아넣은 부동산 버블도, 미국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도 투기의 환상이 그리고 그에 비례해 닥쳐온 공포가 사태해결을 더욱 어렵게 하고 고통을 더욱 크게 만들었다.
인정하기 싫어도 진실을 인정하는 것만이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대안이고 방법이다. 정책입안자도 투기의 당사자도 투기의 피해자도 현재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이 최선인가를 가감없이 바라보고 답을 찾아야 한다. 비록 조금 늦은 것 같지만 언제나 그렇듯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행동하기엔 가장 빠른 때이다.
한편으론 김남근 본부장이 진행한 이번 강의가 첫 강보다는 마무리 강의였으면 더 좋았겠다는 아쉬움도 있다. 전 강의를 듣고 난 후 통합하고 마무리하는 의미에서 자리 했다면 보다 많은 논의가 오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다. 이후에라도 강좌를 같이하는 분들과 뒤풀이 자리 겸 토론회를 갖는다면 흥미로울 시간이 될 것 같다.
끝나지 않은 세계경제위기와 G20 (강사: 홍기빈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소장) 현재 한국은 11월에 있을 G20 정상회의로 소란스럽다. 정부에서는 G20이 국가 올림픽마냥 국격을 높이는 계기라고 홍보하고 있고, 일정에 맞춰 도심 안전 시스템을 재정비하기 바쁘다. 그런데 과연 G20은 무엇일까? 우리는 그 실체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이러한 의문을 가진 시민들을 위해 참여연대에서는 ‘G20 톺아보기’ 시민강좌를 마련했다. 그리고 오늘은 그 첫 번째 마당으로 홍기빈 강사의 ‘끝나지 않은 세계경제위기와 G20'라는 주제로 강의가 진행되었다.
현재 우리 나라의 경우 G20에 대한 태도는 ‘G20 만세’ ‘G20 때려잡자’ ‘관심없다’ 크게 이 세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이번 강의를 통해 이 세가지 태도를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G20 만세’의 경우는 G20의 실효성에 대한 고찰없이 정부의 홍보를 무조건적으로 수용하는 태도다. 그와는 반대로 무조건 ‘G20 때려잡자’는 주장 역시 G20이 형성된지 2년밖에 안되어서 이렇다 할 행적이 없는 G20을 무조건적으로 비난하는 것 역시 적절하지 않다. 아울러, ‘관심없다’는 관점은 현재 한국 사회에 팽배한 ‘무관심=쿨함=멋짐’의 이상한 논리와 맥을 같이하는, 정치적 시민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방기하는 무책임한 태도이다. 그렇다면 ‘G20에 대처하는 우리들의 자세는?’ 여기에 대해서 홍기빈 강사는 ‘개입’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끝까지 개입해 보고 안되면 그 때 그만둬도 됨을, 그러므로 지금의 상황에서는 앞 선 세 가지 태도 모두 지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서두를 통해 G20을 대하는 우리들의 자세를 교정하게 되었다. 뭔가 콩고물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니 올림픽 마냥 좋아할 필요도 없고, 지배계급의 모임이라면서 분노의 반대를 할 필요도 없으며, 나아가 난 그런 거 관심 없다면서 토익 공부만 해서도 안 됨을 알았다. 그런데 뭔가 허전하다. 그래, 그래서 G20이 대체 뭔데?
G20에 대해 알기 위해서는 세계 경제적 흐름에 대해 간략하게나마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1970년대 세계 금융체제와 재정체제는 미국이 환율을 정하는 ‘고정 환율제’를 채택하면서 그 전제로 국가 간에는 자유로운 자본의 이동이 없음을 명시하였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미국이 더 이상 고정 환율을 유지할 수 없게 되면서 기존의 체제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는 결국 스태그플레이션 현상을 유발하였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70년 대 후반에는 사적 은행이 자금을 융통하게 되면서 국가 간 자본에 대한 규제가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980년대 금융체제를 국가적으로 관리할 수가 없게 되면서 자본을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에 맡기기로 한다. 가능한 한 규제를 풀고 수요와 공급에 의한 균형을 토대로 시장의 자율성에 무한한 신뢰를 부여하게 된 것이다. 특히 부자에 대한 감세를 주장하였는데 그 근거로 감세를 통해서 투자를 확대하면 이를 통해 부의 순환이 더 원활함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자본의 자유시장 경제 모델을 맹신한 채 20여 년이 흐른 오늘 날, 역사적으로 유래가 없는 경제 위기가 발생하고 있다. 바로 금융위기와 재정위기가 동시 다발적으로 지구상의 여러 국가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G20 정상회의는 세계 각국의 정상들이 기존의 경제 모델에 대해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새로운 대안적 모델을 제시하기 위한 자리로서 의미가 크다.
그렇지만, 2009년 런던 정상회의를 시작으로 한 G20 정상회의는 2010년 6월에 있었던 토론토 회의에 이르러서는 ‘G20 leaders agree to disagree. 합의하지 않기로 합의하다’라는 맥빠지는 결론을 내렸다. 금융개혁골격을 마련해야 하는 자리에서, 금융위기의 해결은 각 국가가 알아서 하자고 결론을 내리다니.... 이처럼 확고한 해결책 하나 세우지 못한 상황에서 오는 11월 한국에서 G20 정상회의를 개최하게 된 것이다. 더욱이 그리스 경제 위기를 통해 새로운 경제 모델에 대한 대안이 긴요해진 시점에서, 한국 정상회의는 앞으로의 한국 경제 모델에도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 그래서 더욱 주의깊게 관심을 가져야 한다.
이쯤되니 G20이 나와 동떨어진, 관심 갖지 않아도 되는 고위 간부들의 간단한 회담은 아니라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결국 우리가 해야 할 일은, G20 이 지구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 기존의 ‘신자유주의 경제 모델’을 비판적으로 검토할 것을 요청하면서 새로운 대안적 모델을 제시하기를 촉구하는 것이 아닐까. 더 이상 ‘보이지 않는 손’에 의지하지 않고, 우리들의 목소리로 ‘보이는 손’으로 규제를 하라고 요청하고, 부자에 대한 증세를 통해 국가재정을 확보하도록 촉구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더불어 지금껏 전문가의 영역으로 넘겨왔던 금융과 재정의 문제를 시민들 스스로가 더 많은 논의와 연구를 통해 새로운 모델을 제시해보는 것 역시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아직, G20에 대해서 뚜렷한 감은 잡히지 않는다. 그렇지만 5주 간의 강의를 다 듣게 된다면, 하나 둘 더욱 명료하게 G20의 실체를 파악하게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어려운 경제용어가 많아서 머리가 지끈거리기도 했지만, G20에 대해 보다 더 진지하게 고찰해 볼 수 있었던 계기가 된 홍기빈 강사님의 강좌에 기립박수를 보내며-.
두번째 G20강좌 G20: 기대와 우려, 가능성과 한계 한국 지구촌빈곤퇴치 시민네트워크(GCAP-Korea) G20 실무분과 의장이자 참여연대 국제연대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는, 이성훈 한국인권재단 상임이사를 모시고 G20 정상회의를 국제정치적 관점으로 이해하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지난 목요일(9월 2일) 느티나무 가을 강좌가 본격적으로 시작됐습니다. 그 첫 마당은 <삶과 문화가 있는 맥주 이야기> 입니다. 1강에는 <나의 맥주이야기>를 주제로 푸르메 재단 백경학 이사님과 수강생들이 함께 맥주에 관련된 즐거운 수다를 나눴습니다.
즐거운 분위기에서 진행된 맥주 강좌
첫 대화 주제 : "맥주는 나에게 [ ]이다." ' 추억','친구','한 여름밤의 시원한 맛' 등 다양한 대답이 나왔습니다. 한 수강생이 이야기한 의외의 대답이 있습니다. 바로 "바나나" 맥주와 바나나가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바나나맛 맥주일까요? 생각만 해도.. -_-;) "나이가 많지는 않지만.."이라고 운을 띄운 수강생은 "지금은 바나나를 싸고 쉽게 먹을 수 있지만, 어렸을 때 바나나는 비싸서 쉽게 먹을 수 없었다. 처음 술을 접하게 된 대학 입학 때 선배들이 비싸다고 맥주를 안사주고 소주만 사줬다."라고 옛 추억을 떠올리며 바나나와 맥주의 관계를 설명해 주셨습니다.
나의 맥주 이야기 : 푸르메 재단 백경학 상임이사 1부에서 백경학 상임이사님은 본인이 맥주와 관계를 맺게 된 이야기를 짧게 들려주셨습니다. 이사님은 독일에서 아내가 불의의 사고를 당하면서 장애를 갖게 되고, 이때 겪었던 어려움 때문에 장애인을 위한 재활병원을 만들기로 결심하게 됐습니다. 병원을 만들기 위한 재단 설립을 위해 하우스 맥주집으로 지금은 너무나 유명해진 "옥토버 훼스트"를 만들고 이를 기반으로 "푸르메 재단"이 만들어졌습니다. 소외되고 약한자를 위한 선생님의 진솔한 이야기가 마음에 남는 시간이었습니다.
푸르메 재단 백경학 상임이사
거품 : Krone를 아시나요 2부에는 본격적으로 맥주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보통 맥주집에 가면 "거품 빼고 가득주세요"라는 이야기를 쉽게 들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맥주를 잘 모르시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독일에서 맥주 거품은 krone라고 합니다. 영어의 크라운(crown), 즉 왕관입니다. 맥주잔의 70% 정도는 맥주로 채우고 나머지 30%는 거품을 채웁니다. 이사님은 "맥주는 눈으로 색을 즐기고, 코로 향을 맡고, 입으로 맛을 음미하는 것입니다"라고 이야기 해 주셨습니다. 맥주 양이 조금 줄어들기는 하겠지만 다음부터는 꼭 거품과 함께 맥주를 음미해 봐야겠습니다.
이외에도 맥주의 본고장 독일에서 맥주가 가지는 의미, 역사와 제조과정 등을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맥주에 대해 알고나니, 물처럼 벌컥 벌컥 마시거나, 다른 음료(?)와 섞어 마시는 것도 다시 생각해 보게 됐습니다. 앞으로는 '맥주에 대한 예의'를 가지고 눈, 코, 잎으로 즐겨봐야 겠습니다.
맥주 강좌는 9월 9일과 9월 16일 두번의 강좌가 더 남았습니다. 2강에는 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 조관연 교수님이 <유럽문화 속의 맥주>를 3강에는 전 한겨레신문 문화부장으로 <술꾼의 품격>의 저자 임범 선생님과 함께 진행됩니다. 맥주에 대한 여러 이야기와 맥주를 좋아하는 사람들과의 유쾌한 대화를 원하시는 분은 지금이라도 오셔도 됩니다.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과 참여를 기대합니다. 문의 02-723-0580 김민수 간사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했던가. 한국의 냉전적 사고, ‘좌파’낙인 등 현재 한국사회의 부조리를 만날 때마다 들었던 의문은 “우리나라는 대체 언제부터 이랬던 거야?”였다. 숨막히는 경쟁을 해야 하는 지금에는 외환위기라는 과거가 있었고, 부패와 기만의 정치 너머에는 청산되지 못한 역사가 있었다. 천안함 사고로 전작권 환수를 연기해야한다는 극우들의 외침에는 ‘한국전쟁’이 자리하고 있음을 4번째 강의에서 깨달았다.
김동춘 교수
한국전쟁은 남과 북만의 전쟁이 아닌 동아시아 전쟁
4번째 강사로 나선 김동춘 교수는 천안함 사고와 관련한 일본의 후텐마기지 문제 해결이 우연인 듯하지만 국제적으로 보면 같은 문제라고 했다. 후텐마기지는 대만을 보호하면서 중국을 견제하고 동아시아에 미국의 영향력을 유지, 확대할 수 있는 곳이다. 후텐마기지문제가 일본사회에 대두되면서 하토야마 전 총리가 기지이전을 약속했기 때문에 민주당이 정권을 교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전을 반대하는 미국과 협상이 지연되면서 지지율은 곤두박질 쳤고 때마침 천안함 사고가 발생하면서 이전문제가 없던 일로 결론이 났다. 비록 우연의 일치일지라도 천안함 사고가 북한어뢰로 판명나면서 후텐마기지문제까지 해결되어버린 것은 국제적인 외교문제로 볼 때 ‘미국의 영향력’면에서 같은 문제라는 것이다.
김 교수는 “한국전쟁 역시 국제적으로 보면 남과 북만의 내전이 아닌 미국, 소련, 중국 등이 가세한 동아시아 전쟁”이라고 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전쟁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이다. 오늘날까지 우리 삶에 영향을 미치는 한국전쟁을 어떻게 살아있는 역사로 기억하는가”이다. 그것만이 오늘과 같은 천안함의 현실을 냉정하게 바라보고 같은 비극을 반복하지 않는 방법일 것이다.
먼저 김교수는 한국전쟁에 참여한 국가들이 전쟁 후 어떤 것을 잃고 얻었는지 설명했다. “결과적으로 북한이 러시아, 중국 먼저 의견조율한 것은 맞지만 먼저 내려온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미국, 중국, 소련, 일본 등 결과적으로 이득을 얻었다. 최대 수혜자는 경제적 부흥을 할 수 있었던 일본이고 정치적으로 영향력을 확대한 미국, 중국도 막 혁명을 마친 국가가 미국과 대등한 전쟁을 했다는 면에서 국제적으로 각인되었으니 나름대로 혜택을 얻었다” 일본이 기지국가라고 불린 것도 ‘한국전쟁’ 때문이었다. 일본은 한국전쟁 3년 동안 미국의 무지를 제조하고 물자조달을 하면서 비약적으로 경제성장을 했다. 한마디로 전후 패망으로 힘들었던 일본에게 한국전쟁은 “신이 내린 전쟁”이었다.
김동춘 교수
전쟁의 명분은 정치적 득실
하지만 미국이 한국전쟁으로 이익을 얻었다는 말은 생소하다. 미국은 남한을 위해 북한과 싸워준 고마운 우국이 아니었던가. 도와주기만 했다는 생각은 순진한 착각이었다. 김 교수는 “미국이 무엇을 얻었는지 한국사회에서는 거의 거론하지 않는다. 하지만 미국은 한국전쟁 후 주가가 폭등했다, 45~9년에 경기침체를 겪으며 실업률이 증가하고 문제점이 대두됐었는데 한국전쟁이 호재가 됐다. 메카시즘도 50년 1월 한국전쟁 후 부활하면서 당시 미국공산당, 미국노동계(당시 전체 노동자의 30%를 차지하면서 세력이 강했다고 함)를 일거에 없애버렸다. 미국의 진보세력이 루스벨트가 있던 30년대부터 강해지다 한국전쟁 후 약해진 것이다. 또한 군사무기와 산업이 만나면서 미국보수인 군산복합체가 만들어졌다” 지금 미국 보수의 핵인 네오콘도 한국전쟁에서 출발한다고 봐야할까. 김 교수는 한국전쟁이 세계질서를 바꾸었다고 말했다. “냉전체제를 굳히고 미국우익세력의 헤게모니가 확고하게 자리잡게 됐다. 미-소간의 관계가 고착된 것이다” 남북한의 희생자만 300만-이것 역시 정확한 통계가 아님-혹은 그 이상인 큰 전쟁에서 남북한만 폐허가 되고 가담했던 나라들은 제 이익만 챙겨 돌아간 전쟁이 아니었나 싶다.
한국전쟁을 도와준 영웅으로 보는 ‘맥아더’는 어떤 이해관계에 있었을까? 맥아더는 이승만식의 북진통일을 원했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트루먼은 그에 반대하고 있었다. “이북까지 김일성 세력을 쫓아내면 중국이 가만있지 않을 것이고, 북한까지 갔다면 러시아와 전쟁이 일어나 3차 대전의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트루먼 입장에서는 “북진통일을 할 이유가 없었으며 정치적으로는 전쟁보다 전쟁을 통한 국민단합과 전쟁을 통한 경제 살리기”가 먼저였다. 맥아더는 군인이었기 때문에 전쟁에서는 무조건 이겨야한다는 생각이 었다. 김 교수는 “전쟁터에서 군인은 정치에 종속되는 것이다. 전쟁은 정치 중에 하나일 뿐이므로 최종지휘관은 정치가인 대통령이다. 정치는 국가의 이해관계를 고려해야하기 때문에 단순한 군인과는 다른 선택을 해야 한다. 트루먼은 미국의 기득권, 자본가의 이해관계를 반영해 전쟁에서 지지도 이기지도 말자는 생각이었다”고 지적했다.
김동춘 교수
일방적 기억이 ‘전쟁불사론’을 만든 것.
김교수는 한국전쟁으로 인해 지금까지 비극이 이어지고 있는 것들에 대해 설명했다. 우선 북한의 비극이다. “한국전쟁 후 김일성 단일권력체제가 만들어졌는데 이것은 비극의 시작이다. 내부의 견제권력이 없으니 권력이 썩게 되고 실패한 공산국가가 된 것이다. 또한 ‘선군정치’하는 것도 군을 앞세운다는 이야긴데 여전히 전시체제라는 이야기다. 60년 전과 똑같다.” 남한 역시 전쟁논리가 유지되고 있다. “천안함 발생 후 전쟁기념관에서 성명발표하고 전작권 환수를 연기하려는 것은 국가와 국민의 미래보다는 정치적 이해관계를 더 고려했다는 것이다. 이승만도 권력이 유지된다면 수백만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맥아더가 핵 사용하려고 할 때 이승만이 OK했다”는 점에서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른 전쟁논리는 60년 전과 같다. 바로 “분단됐기 때문”이다.
김 교수는 “한국전쟁은 60년 전에 일이지만 문제는 무엇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이것을 생각하는 것이 지금 정치의 문제”라고 강조했다. “소설과 영화로 다루어지지 않은 사건은 역사가 아니다. 일반 시민들 속에 없기 때문이다. 전쟁 때 미군이 도와준 것은 맞지만 미군이 학살한 것은 없는 역사, 객관적으로 사실이어도 우리의 기억 속에 없으면 없는 역사다. 미디어와 교육이 만들어가야 할 부분”이라고 덧붙였다. 보수신문이 수개월 동안 지면을 활애해 전쟁이야기를 하는 것에 대해서도 “기억정치다. 기억을 누가 선점하느냐, 과거문제가 아니라 현실정치다. 여론에 의해 정치가 바뀌는 것이다. 문제는 전쟁불사론을 잠재울 수 없는 사회라는 것”이라고 했다. 전쟁에 대한 일방적인 역사만 기억하기 때문에 ‘전쟁을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라는 이야기다.
김 교수는 한국전쟁에 대한 기억의 문제가 결코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고 했다. “지금 젊은이들의 목숨에 대한 문제이고 현실로서 전쟁준비체제로서의 한국사회, 국가보안법, 징집체제, 미국에 무기구입에 돈을 퍼부어야하는 체제에 대한 것”이라면서 “우리사회가 어떻게 건강한 민주적인 사회가 되느냐. 건강한 시민의식을 가진 군인이 되느냐”로 확장될 수 있는 문제라고 강조했다. "(남북한이)한국전쟁 영향 아래 여전히 있기 때문에 끌려다니지 말고 남북간의 민족적인 대타협이 필요“하다며 마무리했다.
"아담스미스"라는 단어를 들으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단어가 '자유방임'과 '보이지 않는 손'이다. 그리고 이 두 단어는 경제
활성화를 위한 시장 규제 완화의 논리에 계속 사용된다. 만약 하늘에 있는 아담스미스가 이 사실을 안다면 억울해서 다시 내려 올
수도 있겠다.
지난 5월 14일(금) 참여연대 아카데미 느티나무에서 김수행
교수님이 최근 출간한 <청소년을 위한 국부론>출판기념 강연회가 열렸다. 강연에서 선생님은 국부론이 쓰여진 배경과 맥락에
대해 쉽게 설명해주셨다.
김수행 교수님
아담스미스가 꿈꾼 세상
김수행 선생님은 아담스미스가 원했던 미래사회를 절대주의 왕정을 몰락시켜 '모든 사람이 자유롭고 평등하게 잘 사는 사회'로
설명하셨다. "국부론은 wealth & the
nation을 말합니다. 국부론의 핵심은 국가의 부를 어떻게 증진시킬것인가입니다. 여기서 국가란 국민전체, 모든 사람의 부
입니다"
아담스미스는 1776년 스코틀랜드에서 국부론을 저술했다. 당시 스코틀랜드는 절대왕정시기로 중상주의 정책을 썼다. 중상주의는 국가에
금과 은이 많으면 잘 사는 나라로 이해한다. 이를 위해 절대왕정은 수출을 장려하고 수입을 제한한다. 왕정은 수출을 장려하는
수단으로 수출을 많이 한 사람에게 수출장려금을 주고. 수출을 위한 수입품의 경우 수입세금을 환급해주고, 동인도 회사 같은 독점적인
무역회사를 설립한다. 반대로 수입을 제한하기 위해 절대왕정은 수입 관세를 과다하게 적용하고, 수입을 금지하기도 한다.
문제는 수출 특혜를 일부 제조업자와 무역업자에게만 제한한 것이다. 왕정은 실이 국내에서 대량으로 생산되더라도 실은 수출을 제한하고
실로 제조된 천 수출을 장려했다. 천을 제조하고 수출하는 업자들은 자신의 이익을 보장하기 위해 왕정에 천 수줄 장려 정책을
로비해서 자신의 이익을 확대했다.
강의 중인 김수행 선생님. 칠판에 글자가 빽빽하다.
18세기 영국에서만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다. 1960년 독재정권 부터 지금까지 끊임없이 일부 제조업자와 무역업자에게만 특혜를 주는
정부의 정책은 계속되고 있다. 1960년 독재정권 시절, 삼성은 정부로 부터 어머어마한 액수의 수출 장려금을 받았다. 또한
수출을 많이 하는 대기업과 재벌은 대출을 받을 때 금리가 7~8%였다. 대출금리가 25%인 시절이야기다. 또한 철도를 이용해
항구로 화물을 운송하면 요금을 10%밖에 적용하지 않았다.
아담스미스는 절대왕정이 일부 업자에게만 수출 특혜를 주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경제적 이익을 얻지 못하는 사실을 발견했다.
아담스미스가 말한 자유방임은 위와 같은 맥락에서 정부의 규제를 철폐해야 한다고 나온 단어다. 하지만 현재 우리나라에서 자유방임은
당시 절대왕정과도 같은 정부, 대기업에 의해 자의적의로 해석되 사용되고 있다. "정부, 주류 경제학자들, 일부 언론사들은 재벌, 대기업에 규정을 완화해야 한다고, 즉 자유방임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기업에 부과하는 세금을 낮추고, 최근에는 종합부동산세로 걷어간 돈까지 다 돌려줬습니다. 아담스미스가 말한 자유방임과는
정반대 이야기입니다. 아담스미스는 억압받고 못사는 사람들을 자유방임하라고 주장했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단어를
왜곡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보이지 않는
손은 정말 보이지 않는다
아담스미스는 뉴튼이 과학을 통해 자연질서를 발견한 것과 같이 신학을 통해 사회 질서를 찾아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아담스미스가
사회질서를 말하기 위해 사용한 개념이 보이지 않는 손이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아담스미스가 국부론에서 '보이지 않는손(an
invisible hand)'을 딱 한번 언급했다는 사실이다. "모든 사람에게 자기의 개인적인 이익을 추구하게 하라. 그리하면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리어 사회의 이익도 증진된다." (김수행 선생님의 국부론-552페이지/선생님은 페이지도 정확하게 가르쳐
주셨다) 아담스미스의 다른 책을 포함해도 평생동안 보이지 않는 손을 언급한 횟수는 세번. 충격적이다. 상식적으로 아담스미스가
보이지 않는 손을 중요한 개념으로 말했다고 보기 어렵다. 평생에 세번 밖에 말하지 않은 단어를 그 사람의 핵심 개념으로
이해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또한 아담스미스가 뉴튼처럼 보편전 질서를 발견하기 어렵게 되자 보이지 않는(un indivisual)이라고 표현했을 수도 있다.
김수행 선생님은 "아담스미스가 모든 사람에게 자기의 개인적 이익을 추구하게 하라는 명제와 사회 이익이
증진된다는 명제를 연결하는 질서를 찾으려 했습니다. 하지만 그 질서를 발견할 수 없자 '보이지 않는 손'이라고 말한 것 아닌가
싶습니다"라고 말했다.
더 놀라운 사실은 보이지 않는 손이 절대왕정을 타도하기 위한 슬로건일 수 있다는 사실이다. "아담스미스는 절대왕정을 타도하고 싶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개인적 이익을 추구하게 하라. 그러면
사회의 이익도 증진된다고 말하는 것은 절대주의 왕정에 대한 도전입니다. 보이지 않는 손은 혁명 구호입니다."
참여연대 여름강좌로 김수행 선생님과 함께하는 국부론 읽기가 진행됩니다. 6월 22일부터 7월 13일까지 총 4주간 매주 화요일 저녁 7시부터 9시까지 진행되는 강좌에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이번 강의를 듣기 전에 가장 궁금했던 것은 “김귀옥 교수님은 한국전쟁의 어떤 부분에 주목하고 계신가.”이었다. ‘한국전쟁’이 최근에 새롭게 등장한 연구주제도 아니지만, 김귀옥 교수님은 ‘여성’이라는 점과 ‘사회학자’라는 부분에서 한국전쟁이라는 문제와 그다지 친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름 사회학과 학생으로서 적지 않은 사회학 수업을 들어봤다고 생각했는데, 전쟁을 핵심 주제로 하는 수업을 들어 본 적이 있었던가? 아마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 더욱 김귀옥 교수님이 우리에게 전쟁에 관하여 어떤 문제와 관점을 던져주실지 기대가 되었다.
사람들의 삶을 통해 한국 전쟁을 연구
한성대학교 김귀옥 교수님은 전쟁 후 세대로서 내가 왜 한국전쟁을 연구해야 하는가를 종종 생각해본다고 하셨다. 왜냐하면 전쟁은 피해야만 할 것이기 때문에, ‘전쟁은 없는 것’이라고 가정을 하여 살아가고 전쟁 없는 평화를 말한다면 더욱더 행복할 텐데. 그런데도 왜 전쟁을 이야기해야 하는가.
정치학에서는 종종 전쟁론, 평화론을 이야기 하지만 사회학적인 측면에서 ‘사람’에 문제의식을 갖고 전쟁을 본격적으로 연구를 시작했을 무렵, 사람들은 대단히 낯설어 했다고 하셨다. “전쟁은 정치학자들의 것이고 외교학자들이 그동안 연구해왔던 부분인데, 왜 사회학에서 전쟁을 연구하는가. 이 얘기는 바로 내가 왜 전쟁을 연구하는가와 왜 이 강의에 자리하신 분들이 전쟁에 직면해야 했는가라는 문제의식과 맞닿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60년 전 한국을 가장 심각하게 뒤집었던 사건인 한국 전쟁. 여전히 한국전쟁은 우리에게 무언가를 말하고 있으며 정전 이후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의 삶은 한국전쟁에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고 하셨다. “그래서 ‘천안함 사건’은 처음도 아니고 어떤 의미에서는 너무도 불행하지만 이런 남북 대결구조 국면 속에서는 마지막 사건이 아닐 수 있습니다. 바로 그 전쟁의 시대를 살게끔 했던 것은 무엇이냐? 가장 중요한 우리의 분수령은 틀림없이 한국전쟁입니다. 한국전쟁이 있었기에 우리는 아직도 남북통일이 되지 못하고 한반도가 평화롭지 못한 채 동북아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과거를 알기 위해서 한국 전쟁을 보지만 또 한편으로 우리가 과거를 알아야 할 가장 중요한 이유는 바로 우리의 미래를 풀어나가기 위한 하나의 출발지점이기 때문입니다.”
전쟁은 새로운 사회를 만든다.
김귀옥 교수님은 전쟁은 다양한 차원에서 전쟁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모습의 사회의 만든다고 하셨다. “전쟁은 반공주의 사회를 열었습니다. 6,70년대 박정희 대통령의 혁명 제 1공약이 반공이었죠. 우리 정부의 반공주의는 독재와 경제 성장주의 그리고 냉전이 결합된 개념으로서 북을 우리의 적으로 보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합리적인 이성이 마비된 사회. 네가 나의 적이라고 여겨질 땐 어떤 말을 해도 그것의 옳고 그름을 논할 필요가 없는, 그래서 ‘적과 나’의 이분법이 작동하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빨갱이냐 아니냐의 의미만을 쇠뇌당한 우리의 머릿속엔 반공의 나침반이 생겼습니다. 우리는 195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이러한 나침반에 의해 이성이 마비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전쟁은 군대적 사고가 사회전반에 뻗어있는 군사주의 사회를 만들었다고 하셨다. 폭력제일 주의, 사람 목숨을 파리 목숨이라 여기는 생명경시풍조.. 합리적인 이성은 필요 없는 사회가 되어버린 것이다. 또한 전쟁을 거치면서 과거의 공동체 주의가 사라지고 이런 요소들이 결합되어 권력 있는 사람들에게 빌붙어 출세를 잘 하려는 기회주의 의식, 돈이 최고라는 황금만능주의 등 성공, 출세 중심의 가치관이 퍼지게 되었음을 지적하셨다.
전쟁은 새로운 사람을 만든다.
전쟁은 한마디로 여성의 사회를 만든다고 하셨다. 전쟁으로 많은 남성들이 전사했기 때문이다. 전쟁미망인(未亡人)이 된 여성들은 생존을 위해 경제활동에 뛰어 들어야만 했다. 대다수의 전쟁미망인들은 식모살이나 행상으로 생계를 유지했으나 그것마저 힘든 여성들은 성매매 산업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고, 정부는 성매매 산업을 적극 지원·유지했다.
“정부가 관리하는 공창제를 제도로서 열어놓고, 법률로서 금지한 이후에도 군 당국의 묵인 하에 기지촌이 군대가 있는 모든 곳에 생겨났습니다. 철저하게 정부관리 하에 만들어 진 것입니다. 이것은 한미동맹을 수호하기 위해서 미군을 즐겁게 하기위한 우리정부의 사명이 만들어 낸 것입니다.” 1960년대 당시 기지촌 경제가 GDP의 25%를 차지하는 경제적인 측면과 한미 간의 친선이라는 목적아래 정부는 성매매 산업과 성매매 여성들을 철저하게 관리했다.
전쟁과 고통
김교수님은 전쟁으로 인한 학살규모는 ‘모른다’가 정답이라고 하셨다. 학살 가해자 집단은 인민군뿐만 아니라 미군(유엔군), 국군, 경찰, 자위대 등 다양한 집단들이 있었고 학살의 성격도 보복, 예방, 동원의 차원에서부터 무차별적인 민간인 학살도 수없이 자행되었다고 하셨다. 또한 정부는 민간인을 동원, 경찰권을 부여하여 학살과 감시의 권한을 줌으로써 같은 동네에 사는 사람들끼리 죽이고 죽임을 당하는 잔인한 일들이 벌어졌다. 그리고 신원조회를 통해 부역혐의자와 그 가족, 친척들에 대한 일상적인 감시의 임무도 수행했다. 이처럼 전쟁의 고통은 학살자뿐만 아니라 피학살 민간인들에게도 지속되었고, 이러한 신원조회는 1980년대, 90년대에도 계속 존재해 왔다.
21세기 평화의 길은
21세기를 살면서 우리가 풀어야할 숙제에는 빈익빈 부익부, 교육의 불평등 등 다양한 문제들이 있지만 가장 중요한 문제 중에 하나는 바로 ‘평화’라고 하셨다. “끊임없이 남을 의심해야 하고 평화롭게 살 수 없는 조건 속에 살면서 평화는 그저 고상한 하나의 가치가 아니라 절대 절명의 인권입니다. 이러한 기본 인권으로서 우리가 평화롭게 사는 것은 가장 중요한 권리이고 국가는 반드시 평화를 이행해야할 중요한 책무가 있습니다.”
“한반도에 평화를 가져오기 위해서는 조건 없는 대화를 해야 한다.”는 교수님의 말씀. 그러나 지금 상황에서 정부는 전혀 ‘대화’할 마음이 없어 보인다.
‘노래=음악’인 걸까요? 물론 노래는 음악의 속성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 가사 덕에 문학일 수도 있죠. <서울, 도시와 공간의 인문학> 일곱 번째 강의는 대중가요를 문학의 관점에서 살펴보고, 거기에 비친 서울과 도시민의 모습을 엿보았습니다. 강의를 해주신 분은 ‘음악 평론가’ 말고 '노래 평론가‘라 불리길 원하신 이영미 선생님입니다.
‘대중가요’라면 아무래도 소비주체인 ‘대중’의 존재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겠죠. 정의하기 나름이겠지만, 전근대적 공동체를 중심으로 점점이 조직된 것과는 다른, 대규모로 조직된 근대적 인간 집단이래야 ‘대중(大衆)’이라는 칭호가 어색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광범위한 동원의 과정에서 대중매체의 개입은 필수적입니다. 이 “대중매체에 의해 상업적으로 대량생산되고 대량유통되는” 것이 바로 대중가요입니다. 그러다 보니 아무래도 자본주의니 시장경제니 하는 것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본주의의 중심인 도시와도요. 대중가요가 도시인의 경험과 욕망을 노래하게 되는 배경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대중가요가 시작된 시점 역시 대중매체와 관련지어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음반인 윤심덕의 <사의 찬미>가 제작된 것이 1926년입니다. 또한 식민지 조선에 일본어 방송이 시작된 것이 1927년이고 한국어 방송이 시작된 것은 그보다 두 해 뒤니까, 대략 그즈음을 우리나라에도 대중가요라는 것이 본격 시작된 시점이라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머지않아 1934~35년 무렵에 식민지 조선의 대중가요는 전성시대를 맞게 됩니다. 이영미 선생님은 전성기가 이 시기에 찾아온 이유로 세대의 문제를 짚습니다. 1930년대 중반에 문화를 적극적으로 향유하는 세대는 1910년대, 즉 이미 조선이 일제의 식민지가 된 이후에 태어난 이들이라는 점이지요. 이들은 독립운동에 대한 이렇다 할 신념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해방을 상상하기도 힘들었습니다. 어쩌면 일본 중심의 아시아 질서가 이들에게는 당연히 주어진 전제였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바로 그 식민지 시대의 신세대들이 당대 일본에서 유행한 최첨단 스타일을 들여온 것이지요.
하지만 외부로부터 이식된 유행은 무언가 부자연스러운 긴장을 일으킬 수밖에 없습니다. 식민지 조선의 대중가요에서 그려지는 서울은 그러한 긴장을 담고 있습니다. 과장될 정도의 화려한 불야성과 미개발된 자연녹지. 그것은 이상과 현실, 외래와 토착의 먼 간극을 여실히 드러냅니다. 또한 욕망과 억압이라는 모순된 방식으로 수용된 근대화의 부조리함을 보여줍니다. 가령 김해송의 <꽃서울> 속 다음과 같은 가사에서는 화려하지만 무언가 마음 한켠을 불편하게 하는 도시를 그려냅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른다고 해서 이상과 현실이라는 딜레마가 치유될 수 있을까요? 한 켠에서는 서양식 선진화의 논리가, 다른 켠에서는 민족주의의 논리가, 아직까지도 힘을 얻는 우리나라에서 외래와 토착의 갈등이 사라질 수 있을까요? 50, 60년대의 대중가요는 상대를 일본에서 미국으로 바꾸었을 뿐, 식민지 시대와 똑같은 갈등을 반복합니다. 우리 스스로를 실제보다 과장해서 서양화한 것으로 그려낸 가사는, 서양이 욕망과 동일시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영어를 과시적으로 사용하는 것도 그러한 사례가 될 수 있겠네요. 현인의 <서울야곡>처럼 말이죠.
“네온도 꺼져가는 명동의 밤거리에 / 어느 님이 버리셨나 흩어진 꽃다발 / 레인코트 깃을 올리며 오늘밤도 울어야 하나 / 베가본드 맘이 아픈 서울 엘레지”
서양의 어설픈 아류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래도 당시 서울은 시골 사람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이었습니다. 바야흐로 이촌향도의 시대였지요. 정부의 중앙집중식 개발 계획 하에서 지방은 서울의 내부식민지로 종속될 수밖에 없었으니까요. 마치 식민지 조선 사람들이 일본과 미국을 동경했던 것처럼, 식민지 지방은 서울을 동경의 대상으로 삼게 됩니다. “새빨간 장미보다 새하얀 백합보다 천 배나 만 배나”(봉봉사중창단 <꽃집의 아가씨>) 예쁜 서울의 아가씨의 화려함 이면에는, “애타도록 보고픈 머나먼 그 서울을 바라보다 검게 타버린 흑산도 아가씨”(이미자 <흑산도 아가씨>)의 동경과 소외감이 있습니다.
다시 한번 세대가 바뀌고 70, 80년대에 들어서게 되면 이러한 서울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이들이 나타나게 됩니다. 이들은 서울에서 나고 자라 도시의 삶을 일상으로 여기기 때문에 거꾸로 전원을 꿈꿀 수 있습니다. 도시가 준 희망보다 상처를 더 많이 기억하게 된 세대니까요. “나는 돌아가리라 쓸쓸한 바닷가로 / 그곳에 작은 집을 짓고 돌담 쌓으면 / 영원한 행복이 찾아오리라”(양희은 <한계령>) “저 푸른 초원 위에 / 그림 같은 집을 짓고 / 사랑하는 우리 님과 / 한 평생 살고 싶어”(남진 <임과 함께>) 하지만 이들이 그렸던 전원은 다분히 이상화된 것이었습니다. 희망만 있을 것 같았던 서울이 좌절을 안겨준 것처럼, 현실의 전원은 또 다시 기대를 배신할 수밖에 없겠지요. 그래서 다른 한 편에서는 고달픔을 안고 서울의 삶을 수용하는 태도도 나타납니다. 윤수일의 <아파트> 같은 곡이 그리듯이요.
도시의 삶이 희망적이지만은 않다는 자각과 그 안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현실은, 낙원으로 회피하거나 도시를 수용하는 것과는 다른 목소리로 출구를 열기도 합니다. 가령 정태춘의 곡들이 그런 특징을 보여주는데, 그의 초기작들이 자연에 대한 막연한 동경을 표출했다면, 80년대 중반에 이르면서 문명비판적 태도를 보이는 작품을 내놓습니다.
“저 어둔 밤하늘에 가득 덮인 먹구름이 밤새 당신 머릴 짓누르고 간 아침 / 나는 여기 멀리 해가 뜨는 새벽 강에 홀로 나와 그 찬물에 얼굴을 씻고 / 서울이라는 아주 낯선 이름과 또 당신 이름과 그 텅 빈 거릴 생각하오 / 강가에는 안개가 안개가 가득 피어나오” - 정태춘 <북한강에서>
그리고 조금 덜 정제된, 직설적인 언어로 풀어내는 목소리도 있습니다. 평범한 노동자가 가사를 쓰고 거기에 곡을 붙인 민중가요지만, 적나라한 감정 묘사가 감정을 쥐고 흔듭니다.
“너희집은 큰 집에서 네 명이 살지 우리 집은 작은 방에 일곱이 산다 / 그것도 모자라서 집을 또 사니 너희는 집 많아서 좋겠다 / 하얀 눈 내리는 겨울이 오면 우리 집도 하얗지
내일이면 우리 집이 헐리워진다 쌓아놓은 행복들도 무너지겠지 / 오늘도 그 사람이 겁주고 갔다 가엾은 우리 엄마 한숨만 쉬네 / 개새끼 개새끼 나쁜 사람들 엄마 울지 마세요
아버지를 따라서 일터 나갔지 처음 잡은 삽자루에 손이 아파서 / 땀흘리는 아버지를 바라다보니 나도 몰래 내 눈에서 눈물이 났다 / 하늘에 태양아 잘난 척 마라 자랑스런 우리 아버지“ - 양병집 <못생긴 얼굴>
참담하게도 여전한 현실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모자라 강의는 70, 80년대의 대중가요를 살펴보는 것에서 마무리되었습니다. 아쉽기는 하지만 지금 여기의 대중가요를 돌아보게 하는 데에는 부족함이 없었던 시간이었습니다. 걸그룹의 <텔미 Tellme>나 <지 Gee>같은 곡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장기하의 <싸구려 커피>처럼 루저의 감성을 드러내는 곡이 간간히 주목받는, 그리고 홍대 앞 철거건물 두리반을 중심으로 일군의 문화공동체가 만들어지고 있는 지금의 대중가요가 그리는 여기 서울의 풍경은 어떤가요? 혹 여전히 팍팍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민중가요가 사라진 원인이 궁금하신가요?
“민중가요 문화가 정치적인 진보성으로 유지되는 것은 아닙니다. 민중가요는 매체를 통해 유지되지 않습니다. 80년대에는 구전됐지요. 대안적 문화를 꿈꾸는 공동체가 만들어지지 않으면 민중가요는 만들어질 수 없습니다. 여성운동, 시민운동에서 민중가요가 생겨날 수 없는 것은 삶을 함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디가 대안이 될 수 있지만 그 역시도 메인스트림 곁에 있으니 힘이 부칩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수용자인 대중인데, 주류의 흐름을 거슬러 문화공동체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도 희망적인 것은 마을을 중심으로 한 공동체가 생겨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난 철학 강의 후기 때도 떠들어댔던 바, 난 10대 소년의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30대 후반의 아줌마... 그러므로 이건 뭐 어른도 아니고 아이도 아니고... 굳이 말하자면 최근 즐겨듣는 노래 <sad thing>을 부른 가수의 이름처럼 ‘어른아이’이다. 그 노래의 가사는 무척이나 단순해서 단 두 줄의 가사가 전부이다. 외우기 무지 쉽다.
첫째 줄 - i saw you... you in me...
난 내 안의 너를 보았다. 이 때 내 안의 너는 나일수도 타인일수도 있는데 만약 그게 나라면... 그래, ‘나 안의 나’는 어찌 보면 익숙한 존재이다. 이 따끔 내 존재를, 내 삶을 차분히 응시하게 되는 순간은 누구한테나 있기 마련이다. 내 안에 갇혀 있는 나는 잘 살고 있는 건지 제대로 된 길을 가고 있는 건지 도대체 뭐가 문제인지... 그렇게 안부를 묻다보면 지쳐있는 내가 보이기도 하고 뒷걸음쳐 도망가는 나도 보인다.
<어른의 탄생>이라는 강의는 그렇게 내 안에 있는 나에게 그동안 미뤄왔던 기나긴 안부들을 묻는 시간이 아닌가 싶다. 20대의 나름 치열했던 사랑의 시기에서부터 결혼이라는 제도를 거치고, 일에서 성공을 이루고 주머니에 돈이 들어오고 자식들이 주렁주렁 열리고...
이 나만의 history 안에서 ‘나’는 그동안 어떻게 지내왔느냐고 안부를 묻는 시간...
수강생들 각자의 역사 그리고 그들이 그동안 살아오며 자신들에게 물어왔던 안부의 소소한 내용들로 강의는 흘러갔다. 물론 김선주 선생님 개인의 역사와 안부들도 강의를 통해서 또 매회 이루어졌던 점심식사와 그 뒷공간들을 통해 실컷 들을 수 있었다. 강의보다 오히려 강의 뒷풀이가 더 박진감 넘쳤다고나 할까...
일에 치이고 아이에 치이고 사람들, 돈, 나이 등등에 치이고... 그렇게 마구 치이다 우리는 정작 자신을 돌아보고 자신에게 진지한 안부를 묻는 일의 소중함은 잊어버린 게 아닌지... 가끔 전화나 메일로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지내는지는 그들의 일상은 어떤지는 물으면서도 정작 자신에게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그렇게 사는 게 힘들진 않는지 따위를 묻는 일에는 너무 야박하게 굴었는지도 모른다.
<어른의 탄생>이라는 강의가 내 안에서 <나에게 안부를 묻다>로 바뀌는 순간이다.
마지막 줄 - it's so sad... sad thing...
강의를 통해 그렇게 성찰의 시간들을 갖는다. 그리고 그동안 내가 정신적으로 그리 독립적이지 못했다는 뼈아픈 사실을 얻었다. 거의 연애 10년 결혼생활 10년을 함께 한, 그래서 무슨 솥바닥 누룽지처럼 달라 붙어있던 내 생애 유일한 남자...
한 사람과 20년 동안 거의 한 공간에서 머물면 누구라도 그러지 않을까하는 변명과 위로의 말도 좀 건네며 나는 이제 나 자신의 독립을 조용히 준비한다. 솥 안에다 물을 확 부어야겠다. 누룽지는 서서히 불어 솥바닥에서 분리될 것이고 물은 그렇게 우리 둘 사이를 별다른 상처 없이 떼어내어 줄 것이다. 그 과정이 순탄히 진행되어 우리 둘의 관계가 숭늉으로 남게 되길... 그렇게 구수함으로 남게 되길 바란다.
it's so sad...라고? 그래 그렇게 서로 분리되어 섞이는 일이 마냥 해피하지만은 않지...그래도 내 분신과 같은 사람이지 않은가... 김선주 선배님의 표현을 빌리자면 육친과 같은 관계이다. 하지만 선생님 조언대로 독립할 기회를 실기(失期)하지는 않으리라...
내가 내 안에 자리 잡은 무언가를 차분히 응시하는 일 또한 언제나 행복한 작업은 아니다. 그것이 나 자신이든 타인이든 다른 무엇이든... 말없이 들여다보면 세상에 온갖 아름다운 것들 안에는 언제나 슬픔이 함께 한다. 아름다움이 깊은 울림으로 남을 수 있는 건 바로 그 슬픔 때문일 지도 모른다.
나의 시간을 벤자민 버튼식으로 되돌려 보면... 내 추억 속에 깊이 각인되어 있는 것들의 공통점 또한 그 바탕은 슬픔이다.
아홉 살 무렵이었던가... 시골 야트막한 구릉에 누워 한 없이 하늘만 올려다보던 어느 봄날 오후가 있었다. 해저물녘 풍경이 간직하고 있는 비스듬한 햇살, 온 곳을 알 수 없는 바람과 구름, 나무와 풀들이 흔들리는 소리...
그때 알았다. 무언가를 깊게 들여다본다는 것은 슬프다.
그 기억 때문에 난 슬픔이 주는 힘을 믿는 사람이 되었다. 외로움이 주는 동력을 믿는 사람이 되었다.
내 안의 나를 돌아보는 일이 슬픈 일이라도, 내 일상들이 어떻게 굴러가는지를 알고 나면 무척 외로워질지라도 이젠 잠시 짬을 내서 용감히 거울 앞에 서야할 시간이다.
그 슬픈 응시가 끝나고 나면... 그 안에서 다시 힘차게 고개를 들고 일어날 또 다른 무언가가 내 안에 있다고....... 난 믿는다.
p.s. 다음 강의 시간에, 주은경선생님이 이 쯤이 음악을 틀 때라고 말씀하시면 바로 그 순간 여러분께 <sad thing> 들려드릴께요!
"이러다 전쟁나는거 아냐?"
지난 20일 국방부 민군합동조사단이 결정적 증거인 "1번"을 들이밀며 북한이 공격했다고 조사 결과를 발표한 날, 이곳 저곳에서
흔하게 들리던 내용이다. 나 역시 맛있는 저녁식사를 하면서 평안하게 하루를 마무리 했지만 한켠에 찜찜한 마음을 지울 수는 없었다.
"이러다 전쟁 나는 거 아니야.."
박태균 선생님
멍청한 지도자가 전쟁을 부른다.
조금 위안이 되었던 것은 지난 17일 참여연대 아카데미 느티나무에서 진행된
<한국전쟁 60년 기념강좌> 때문이다. 서울대 국제대학원 박태균 선생님은 전쟁이 발발하는 이유에 대해 "전쟁이 발발하는 원인은 위기의 실제 크기 때문이 아닙니다. 전쟁을
결정하는 사람들이 가진 위기 극복의 인식 문제 입니다. 정책 입안자들의 잘못된 생각들(오산, 오판, 망각)이 전쟁을 일으키는 것
아닐까요?"라고 말했다. 물론 이 ‘오판’은 계산된 판단일 수 있다. 당연하다. 위협을 객관적 지수로 측정할 수
없다. 위협은 사람에 따라 주관적일 수 밖에 없다. 정책 지도자가 어떻게 느끼는지에
따라서 결과가 굉장히 달라진다.
전쟁에 대한 사회적 인식도 중요 지도자는 개인에 종속되지 않는다. 이 지도자를 뽑은 사회가 존재한다.
"사회적으로 어떤 여론과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느냐가 굉장히 중요하다. 위기라는 것을 보면서 사회적인 공감대가 어떤식으로
형성되느냐가, 지도자에 대해서 사회가 어떤 태도를 보이느냐가 굉장히 중요하다고 본다. 사회 구성원들에게도 상당한 책임이 있다고
본다."
베트남 전쟁에서 사회 구성원들에 대한 책임을 엿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베트남에 군대를 파병할 때 김형욱과 손원일만 반대했다. 그
당시 야당은 한일 협정 반대를 주요 이슈로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반대하지 않았다. "한국은 전쟁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지도자 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들도 반성해야 한다. 북한의 대남정책에 있어서 굉장히 깊이 있게 생각해 봐야 한다."
김대중 대통령의 망언
박태균 선생님은 "고 김대중 대통령이 어떤 강연에서 ‘전쟁은
40대가 일으키지만, 40대가 일으킨 전쟁에서 죽는 것은 20대입니다. 그래서 모든 군인은 40대로 채워야 합니다’라는 말을 듣고
정말 멋있는 대통령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집에가서 이야기를 했더니 아내가 화를 내며 ‘민방위 끝낸게 언젠데!’라며 화를
내더군요"라며 지도자를 잘 뽑아야 함을 다시금 강조했다.
전쟁하면 돈번다는 기억
시민이 가진 역할은 지도자를 잘 뽑는 것 만이 아니다. 기억도 잘 해야 한다. 수없이 많은 무고한 생명이 죽어가고 자연이 무참히
파괴되는 전쟁은 경험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문제는 전쟁이 경제성장과 만나는 순간이다. 2003년 이라크 파병을 결정할 때도
전쟁을 통해 경제적 이득을 얻을 수 있다는 담론 때문에 파병 여론이 확산됐다. "다들 ‘이라크에 안가면 우리가 얻을 것을 남들이 다 가져간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폴란드가 가져갔습니까.
스페인이 가져갔습니까. 아닙니다 미국과 영국 메이저 회사가 다 가져갔습니다. 우리도 조금 가져왔는데, 이것이 파병 때문이었습니까?
한국전쟁에 대한 기억을 국가가 왜곡, 반복해왔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더 무서운 것은 ‘전쟁하면 돈번다’는 기억입니다. 이런
생각들이 있는한, 재파병의 논리가 악순환 될 것입니다. 한국전쟁에 대한 기억이 가지고 있는 가장 무서운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광주 30년 무엇을 할 것인가. 지난 10일(월) 광주항쟁 30년 기념강좌 "광주
30년, 무엇을 할 것인가"가 한홍구 선생님의 강의로 진행되었다. 한홍구 선생님은 광주 민주화 운동이 일어난 배경부터 현재 우리가
안고 있는 과제를 일목요연하게 설명해주셨다.
한홍구
교수
대학교 때 광주 사건에 대한 책을 읽으면서 눈물 흘렸다. 강의를 들으면서
다시 감동할 수 밖에 없었다. 무차별 구타와 연행, 군대의 시민을 향한 발포. 가장 극단적인 폭력의 공간에서 가장 극단적인 평화가
구현된 사건을 들을 때마다 가슴을 울린다. 당시 총기가 5000청이 깔렸다. 그럼에도 폭동은커녕 매점 매석조차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아주머니 들이 길거리에 솥을 걸고 주먹밥을 만들어서 사람들에게 나눠줬다. 광주로 들어가는 모든 통행로가 막혔음에도 오히려
음식이 남았다. "나 말고 아이들 주세요." 해방 광주만 생각하면 벅차오르는 가슴은 한홍구 선생님 뿐만이 아니다.
광주 때문에
삐딱선을 탄 사람들 계엄군이 광주로 진입한다는 전단이 살포된 26일. 일부는 남고, 일부는
돌아갔다. 전남도청에 남아있던 사람들 중 살아남은 분들은 “참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한홍구 선생님은 이것을 ‘그냥
반대했다’고 표현한다. "어떻게 텅빈 도청을 전두환에게 그냥 놔줄 수 있냐. 전두환이 웃으면서 들어오게 놔줄
수 있냐. 이미 죽은 사람들은 어떡하냐" 한홍구
선생님은 “80년 광주가 우리에게 준 충격. 죽음을 슬퍼할 수도, 언급할 수도, 추도할 수도
없는 사건이었다. 죽음마저 죽어버린 죽음의 역사. 80년대는 죽음을 끼고 산 세대다. 죽은 사람들이 내 몸 어딘가에 들어와
버렸다”고 말했다. "만약에 내가 광주에 있었다면.." 광주에 대한 빚이 있었다.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군사독재를 향해 온몸을 던져 투항했다. 군사독재가 물러나긴 했다.(그럼에도 용서 받을 사람은 없다.
전두환의 명언 "나, 29만원 밖에 없소") 수많은 엘리트가 노동 현장으로 갔다. 이런 수많은 헌신으로 우리나라는 참 많이
바뀌었다.
"민주화 운동 후 살림살이 좀 나아지셨습니까?" 딱 여기까지다. 한홍구 선생님은 광주에 빚진 사람들을 두고 "우리나라가
민주화 되지 않았는데, 자기들만 민주화 됐다. 그러면서 어떻게
됐나. 6월항쟁까지 하나가 되서 군사독재와 싸웠지만 영호남이 나뉘고 재야와 정치권으로 나뉘고 재야는 노동운동과 시민운동으로
나뉘었다"고 말했다. 광주의 세례를 받은 바보들이
똑똑해 지기 시작했다. 광주와 비정규직을 잊는 고리가 여기서 생긴다. 민주화 운동 후 살림살이가
나아졌다. 하지만 자본이 대응을 달리하면서 용역, 파견, 도급. 하청, 그리고 이름도 생소한 비정규직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청년 실업의 대부분이 비정규직 아닌가.
이런나라가 세상에 어디있는가."라고 한홍구
선생님은 말한다.
한홍구 교수
계속 되는 한홍구 선생님의 날선 비판이다. "모닝 차 공장에
내려갔다. 전 노동자가 비정규직인 꿈의(?) 공장이다. 비정규직 투쟁을 했는데 연대를 누가 했냐. 기륭전자 아줌마들이 했다.
연대니 소통이니 했는데..이길 수 있겠습니까."
광주 민주화 운동은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일어난 사건이다. 그럼에도
빚이다. ‘진보’에 관심있다고 하는 그 누구가 광주 사건에 자유로울 수 있을까. 그래서 빛이다. 잊지 않고, 푸념으로도 풀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그래서 방아타령이 우습다. 광주는 빛이다.
혹시 마음 한켠에서 ‘슬리퍼’로 고쳐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나요? 우리 말에 뿌리내린 일제의 잔재를 청산해야 한다는 의무감 말이죠. 하지만 가만 따져보면 ‘쓰레빠’는 ‘슬리퍼’가 표현하지 못하는 어떤 의미나 정서를 전달해 줍니다. 두 단어가 지칭하는 대상이 살짝 다르기도 하구요. 이미 수십년 우리와 더부살며 의미를 형성해 온 ‘쓰레빠’를 없애버리면 우리는 그 단어가 내포했던 것들을 함께 잃게 될지도 모릅니다. 일제 청산은 분명 미완된 현재의 문제이지만, 과도한 강박으로 작용할 경우 오히려 우리 자신을 해치는 칼날이 될 수 있습니다. 다른 누군가가 아닌 우리 스스로를 위해, 일제 잔재가 아닌 일제 콤플렉스를 청산할 필요가 있는 것이죠. 그래서 김어준은 말합니다. “쓰레빠는 쓰레빠다.”
콤플렉스는 세상을 굴절시킵니다. 얼굴에 난 뾰루지가 불만인 사람에겐 손톱만한 것도 주먹만하게 느껴지지요. 일제에 대한 우리의 콤플렉스도 그렇습니다. 식민지 조선을 평화적이고 순박하고 선량한 민족성을 지닌 피해자로, 제국 일본을 폭력적이고 교활하고 사악한 민족성을 지닌 가해자로 과장하는 심리의 기저에는 식민지적 피해망상이 있는 것입니다. 이 선악의 이항분리가 다친 우리의 마음을 달래줄는지는 모르겠지만, 현실을 명징하게 인식하고 분석하는 데는 걸림이 됩니다.
그 식민지적 피해의식의 대표 사례로 일제의 ‘풍수단맥설’을 꼽을 수 있습니다. 일본이 조선왕조의 전통적 상징공간을 의도적으로 훼손했고, 토착신앙을 탄압한 대신 神道신앙을 강요했으며, 전통적 문화유산을 철저하게 무시하고 계획적으로 약탈했다는 주장을 담고 있지요. 조선의 기를 꺾기 위해 북한산에 박았다는 거대한 쇠말뚝이며, 북한산(大)-총독부(日)-경성부청(本)을 통해 서울에 각인했다는 ‘대일본’ 같은 것들에 우리는 얼마나 치를 떨었나요. 하지만 그런 것들이 정말 일본의 치밀한 의도에서 비롯됐을까요? 혹시 일본적인 것을 개척하는 과정에서 의도하지 않게 일어난 훼손은 아닐까요?
가령 을미사변 때 명성황후를 위해 희생되었던 두 충신을 기리기 위해 세웠던 장춘단이 있죠. 일제는 그 바로 앞에 신마치 유곽과 이토히로부미를 기리는 박문각을 세우고, 장충단을 일본인의 공원으로 만드는가 하면, 국사당을 없애고 조선신궁을 짓는 등 조선인들에게는 불쾌할 수밖에 없는 행동들을 했구요. 하지만 이러한 행동들을 꼭 일본의 악의에 의한 것으로만 해석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남산 지역이 조선인들에게는 상징적 가치를 지니는 장소이기는 하지만, 1882년부터 서울에 진출하기 시작한 일본인들에게 있어서는 자신들의 본거지가 그곳이었으니까요. 이미 남산을 중심으로 세력권을 형성하고 있었던 일본인들에게는 장소가 지니는 의미와는 무관하게 한 행동들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식민지는 수탈을 하기 위한 여러 가지 기본적인 도시 인프라나 철도 네트워크나 도로망 같은 인프라를 설치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고 그 과정에서 어떤 형태로든 근대적인 형태의 사회공간적인 변화가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니까요. 일제가 조선의 전통적인 풍수지리적인 공간 조형 방식을 잘 파악하고 그것을 악의적으로 왜곡해서 민족의 정기를 꺾으려는 방식으로 도시 계획 같은 것들이 주로 이루어졌다는 주장은 낭설로 여겨집니다.
경복궁 앞에 위치했던 조선총독부의 입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경복궁에 대해 과도한 상징성을 부여하고 있는 측면이 있습니다. 물론 경복궁은 조선의 정궁으로 지어진 것이기는 하지만, 태종 때 창경궁이 지어져 양궁체제로 운영이 되었지요. 게다가 임진왜란 이후 대원군 이전까지 기간 경복궁은 버려진 빈터에 가까웠습니다. 대원군이 중건하기는 했지만 경운궁을 중건할 때 경복궁에서 많은 것을 떼어와 많이 황폐해지기도 했구요. 한반도의 500년 이하의 건물에 대해서는 평가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해 철거를 서슴지 않았던 일본의 입장에서 지어진 지 얼마안된 경복궁의 가치란 말할 것도 없겠지요.
그럼에도 확실히 일본의 제국주의는 여타 서양의 제국주의에 비해 파괴적인 측면이 있었습니다. 민족 말살 정책이나 치밀한 동화정책 같은 것을 보면 말이죠.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일본은 전세계에서 유일한 유색인종 제국주의였잖아요. 처음에는 탈아입구를 외치며 ‘유럽인이 되자’, ‘기독교로 개종하자’ 했던 일본인들이 러일전쟁에서 백인들을 이기는 등 승승장구하니까 대아시아주의 같은 황인종 제국주의를 꿈꿔볼 수 있었던 거죠. 애시당초 지배 인종과 피지배 인종이 확연하게 구분되었던 서양의 제국주의와는 다르게, 같은 인종이 지배-피지배의 관계를 형성하니까 동화정책을 펼 조건이 마련된 것입니다.
일제가 후발 제국주의라는 점도 서양 제국주의와의 차이를 설명해 줍니다. 사실상 전세계 식민지 영토 분할이 끝나가던 시기에 뒤늦은 출발을 한 셈이니, 팽창의 공간적 제약이 있었겠지요. 결국 일제는, 먼 바다로 개척해 나가는 서양의 원격제국주의와는 달리, 대륙으로 향하는 철도제국주의로 방향을 잡습니다. 그렇다 보니 식민지에 대해서 완전영토화 전략을 취하게 되었구요. 서양 제국주의는 식민지도시를 건설할 때, 그 도시에서 차지하는 지배 민족의 인구가 0.2~0.3% 정도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경성에 거주했던 일본인의 비중은 30%에 다다를 정도로, 일본은 조선을 그들의 땅으로 만드려고 했지요. 영국의 지배 하에 있었던 무굴제국과 비교해 봐도 차이는 확연하게 드러납니다. 영국은 기존 무굴제국의 지배 시스템을 그대로 두고 통치 비용은 최소화하면서 실리만 챙기는 간접통치 방식을 취했는데, 일본은 훨씬 직접적이고 전면적인 통치 방식을 택했잖아요. 그렇다보니 상대적으로 짧은 36년의 피지배 기간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많은 영향이 남아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구요.
일제의 완전영토화 전략은, 일본이 본국의 도시 개발 과정에서 취했던 정책들을 식민지 도시에도 비슷하게 적용하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당시의 경성 개발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본의 근대 도시 형성 과정을 살필 필요가 있는 것이죠. 오늘날 일본의 도시들을 보면 일본식 전통과 서양식 현대가 어색한 듯 자연스럽게 섞여있는 독특한 분위기를 발견할 수 있죠. 실제로 이 전통과 현대의 알력이 근대 도시 형성 과정에서도 크게 작용했다고 합니다. 조약개정․문명개화․부국강병 등 서양화의 경향과 전통적 공간 구성 요소나 통제방식을 재동원해 변용하는 일본화의 경향이 공존했던 것이죠. 그리고 그 이면에는 자원과 역량의 부족이라는 현실적인 고려가 있었습니다. 모든 것을 근대화하는 급속한 개혁은 많은 비용을 필요로 하는 것이니만큼, 전통의 것들을 어느 정도 이용하면서 생활 인프라와 같은 것들은 시민의 자발적 역할에 맡기고 나머지 자원을 군국주의 노선 강화에 이용한 것입니다. 러일전쟁 이전에는 전체 예산의 50% 이상을 군사 쪽에 쏟았다고 하니, 사회민주적 후진성은 어쩔 수 없는 결과였겠죠. 외국인들에게 보여줄 쇼케이스 격으로 만들어진 오늘날 동경의 긴자 정도만 일단 시구개정 사업에 착수합니다. 그래서 도시 계획은 일본 본토보다도 타이페이가 훨씬 더 앞서 갑니다. 경성에서도 일본과 마찬가지로 비용 문제 때문에 제대로 초기 도시 계획을 하기보다는 간선도로망을 어떻게 뚫을 것인가 이것이 가장 큰 과제가 되었습니다. 1912년부터 계획된 시구개정사업이 그것을 잘 보여줍니다. 오늘날 종로․을지로․충무로 등지의 격자형 도로가 바로 이 시구개정사업의 결과물입니다.
강의가 끝나고 이 강의의 기획의도와 관련해서 앞으로 서울이 어떻게 변화했으면 좋겠는지 묻는 질문에 선생님은 이렇게 답했습니다.
“그동안 우리가 서울을 개발해 온 방식은, 어마어마한 발전이 있었던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만, 위로부터 디자인된 플랜을 가지고 이루어진, 아래로부터의 참여나 지역 커뮤니티 사람들의 노하우를 활용하는 방식이 아닌, 일방적으로 이뤄진 방식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강북 뉴타운 같은 계획은 강남 개발보다 훨씬 더 나쁜 계획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강북이라는 장소가 갖고 있는 장소성, 역사성을 다 사장시켜버리는 것이잖아요. 사실 그런 것들이 역사도시가 갖는 가장 소중한 재산이거든요. 서울 안에 들어 있는 여러 가지 다양한 지층들의 기억, 장소성이 녹아들어 있는 것들이 색바랜 도시의 매력인데, 그런 것들을 그냥 말끔하게 고층빌딩 세워서 없애버리는 방식이 지금까지 우리가 주로 해온 방식이었죠. 그것이 여러 가지 형태로 우리의 성장잠재력을 제약해 왔다고 생각합니다. 식민지 연구자 입장에서 보면 우리가 원래부터 갖고 있던 고유한 공간 운영의 노하우 같은 것들을 식민지기를 거치면서 다 폐기처분하면서 시작된 정신적인 아노미 현상이 지금까지 이어졌고, 서구에서 유행하는 새로운 패턴과 양식을 빌려왔죠. 그러다 보니까 자기 것은 아무 것도 없이 사라진 국적 없는 도시가 돼 버린 거잖아요. 스스로 자기가 갖고 있는 자산을 찾아내는 눈을 갖는 것. 그게 중요하고 그러기 위한 조건으로서 우리 사회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좀 천천히 가자라는 것입니다. 너무 우리는 속도주의에 익숙해져 있는 것 같아요. 사실 20세기 후반에 전세계에서 가장 빨리 변한 도시잖아요. 조금 천천히 가면서 우리가 갖고 있는 여러 가지 가능성, 잠재력 이런 것들을 돌아봤으면 좋겠습니다. 일본 같은 경우를 보면, 어떤 사람들은 일본을 형편없는 도시라 얘기하지만, 어쨌든 자신이 전통적으로 가져온 공간 노하우 같은 것들을 최대한 활용하거든요. 롯폰기힐스 같은 경우를 보더라도 수백회 이상 주민들과 면담을 하면서 계획을 수정하고 협상하고 이런 테이블들이 마련이 되고요. 그냥 마스터플랜 만들어서 확 밀어버리는 방식의 진행은 아니거든요. 그런 부분에서 도시가, 공간이 생명력을 갖는 이유는 뭔가에 대해 우리가 근본적으로 재고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아이디어의 문제라기보다는 사람들의 마인드를 바꾸고, 개발하는 관행이나 제도나 문화를 바꾸는 것이 훨씬 더 큰 문제인 거죠.”
'내가 만들어 보는 사극 시놉시스 발표와 강평' 이라는 주제로 마지막 강의가 진행되었습니다. 마지막 강의를 위해 5주차에 조편성을 하였고 각각의 조는 조원들과 함께 모임을 갖으며 주제를 찾고 시놉시스를 만드는 과정을 거쳤습니다. 그리고 지난 목요일 저녁 이에 대한 발표가 있었습니다.
발표는 1. 조 구성 2. 준비과정 3. 시놉시스 발표 4. 질문과답변 순으로 진행되었으며 발표가 끝나면 주진오 교수님께서 부가 설명을 곁들여 주시는 방식으로 진행되었습니다.
1조의 구성은 신경임, 오영주, 황미정, 장인선 님으로 구성되었고 4개의 조 중에서 가장 많은 모임을 가졌다고 합니다. '조선의 사랑' 등 천민여성을 다룬 책들을 많이 보았으며 이를 통해 기획의도는 천민여성의 삶과 억압을 이겨내는 과정을 설정하였지만 발표 당일 사랑이야기로 급전환하였다고 합니다.
과거를 지운여자, 과거를 용서한 남자 <과거를 지운여자, 과거를 용서한 남자>라는 제목으로 수연(조선의 7대 왕인 세조의 딸)과 김정우(김종서의 손자)라는 인물을 설정하여 시놉을 전개하였습니다.
계유정난을 통해 수양대군은 왕이 되고 그 과정에서 김종서는 살해당하고 맙니다. 이러한 모든 과정을 딸인 수연은 못마땅하게 여깁니다. 그리하여 수연은 세조에게 강력하게 저항을 하고 궁을 나오게 됩니다. 궁에서 나온 수연은 화적떼에게 봉변을 당하려던 순간 이를 도와준 이가 있었는데 그는 김종서의 손자인 김정우였습니다. 이들은 서서히 정이 들었고 서로의 신분을 속인체 결혼을 하고 두 아이의 부모가 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세조와 수연은 대면하게 되고 이 장면을 김정우가 보게 됩니다. 불구대천의 원수인 세조. 그는 바로 자신의 장인이자 자신의 아이들을 외할아버지가 되는 것 입니다. 그날 밤 수연은 정우에게 이사를 가자고 청하고 자신의 사연을 모두 털어 놓게 됩니다. 정우는 그녀를 이해 할 수밖에 없었고 그 둘은 머나먼 곳으로 떠나면서 시놉은마무리 됩니다.
주진오 교수님께서는 세조의 왕위찬탈에 대한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김종서는 무조건 좋은 사람이고 수양대군은 나쁘다는 생각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어린 단종이 왕위에 오르고 권력을 독점하여 서로를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상황에서 수양대군이 아닌 김종서가 칼자루를 쥐고 있었다면 죽임을 당하는 것은 김종서가 아니라 수양대군이 되었을 것이 뻔한 상황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역사를 볼 때는 선과 악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냉정하게 어느편에도 서지 말고 사건의 맥락을 명확히 볼 수 있는 안목이 필요하다고 말씀해주셨습니다.
덕혜옹주 다음으로 2조의 구성원은 전병훈, 이춘산, 김버들, 김미연, 장강규 님입니다. 구성원만으로도 드림팀이라는 이야기가 오고 갔는데 명색에 걸맞는 결과물을 보여주셨습니다. 장강규 학생은 덕혜옹주로 시놉시스를 선택한 이유를 "우리는 흔히 역사 속 인물들을 업적이나 능력 위주의 결과로만 기억하고 평가합니다. 저는 조원 분들과 이번 시놉시스 주제를 정하면서 역사 속 인물이 업적과 같은 결과물을 갖고 있지 않거나 그것이 좋지 못할 경우 그 인물에 대해서 알 필요가 없느냐 라는 의문을 갖게 되었고, 마땅히 알아야 하지만 보이는 결과물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우리들에게서 친근하지 못한 인물을 다루어 보고자 했습니다."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등장인물로는 주인공 덕혜, 덕혜의 몸종인 복순 그리고 그의 일본인 남편 소다케유키, 그리고 끊임없이 덕혜를 괴롭히는 소 다케유키의 집안에서 데려온 하녀 미요. 마지막으로 덕혜와 약혼 하기로 되어 있던 박장한이라는 인물까지입니다.
행복했던 유년시절을 회상하며 덕혜는 일본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조국 그리고 고종,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 자신과 부부의 연을 맺을 뻔 했던 장한의 믿음직스럽던 눈빛을 떠올리며 꼭 다시 돌아오리라는 마음을 먹고 말입니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늘 독살의 두려움에 시달려야 했던 덕혜는 복순의 도움으로 장한을 다시 만나게 되지만 일본 백작 집안의 소 다케유키와 강제로 결혼을 하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임신을 하게 되고 서로의 양육관에 충돌이 일게 됩니다. 미요는 덕혜를 정신이상자로 몰아 정신병원에 강금하게 됩니다.
시간이 흘러 일본이 패망하게 되지만 덕혜는 정신병원에 갇혀 홀로 세월을 이겨냅니다. 딸 정혜는 집을 나가 행방불명이 되고 소 다케유키는 일방적인 이혼을 선택하게 됩니다.시간이 흘러 장한의 도움으로 덕혜는 고국의 땅을 밟게 됩니다. 정신병원에서의 고통으로 정신이 혼미해진 덕혜. 정신이 온전해지자 복순은 덕혜를 데리고 덕수궁으로 나들이를 가게 됩니다. 아버지와 함께 했던 즐거운 유년시절을 회상하던 찰나 한 가이드가 덕수궁으로 관람 온 관광객에게 덕혜옹주에 대한 설명을 하게 됩니다. 관광객들은 저마다 한마디씩 합니다. 이에 복순은 반박을 하려 하지만 덕혜는 이를 말립니다. 그 모습에 통곡하는 복순, 그리고 그러한 모습을 지켜보는 관광객들을 뒤로한 체 시놉은 막을 내립니다.
주진오 교수님께서는 소설과 현실에 대한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덕혜옹주'라는 소설에서의 모십이 진실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번 시놉을 볼때 소설의 영향이 많이 느껴진다는 평이었습니다. 많은 말씀중에 결혼에 관련 된 말씀은 살펴볼만 합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덕혜는 불쌍하고 남편은 나쁜놈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 입니다. 덕혜의 남편인 소 다케유키는 동경대학을 나왔고 상당한 인텔리이며 미남입니다. 영친왕과는 다르게 덕혜는 왕실에서 대우를 받는 존재도 아니며 옹주라고 해서 사람들이 떠받드는 존재도 아닙니다. 하지만 민족적 관점으로 보기 때문에 앞서 언급했던 등식이 성립되는 것입니다. 또한 둘의 관계에 대해서 말이 많지만 둘의 사이에 아이가 있었다는 점과 덕혜가 고국으로 돌아와 있을 당시 낙선재에 소 다케유키가 방문했다는 점으로 볼때 그들의 관계가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았다고 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다시 한번 살펴봐야 할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홍경래 다음으로 3조입니다. 구성원으로는 김성훈, 김안나, 김종우, 최성호 님입니다. 제가 속해 있는 조입니다. 제가 예비군 훈련으로 참여를 못해서 많이 죄송스러웠습니다.(ㅠ.ㅠ) 3조는 따로 모임을 갖지는 않았습니다. 강의가 끝난 이후 각자의 역할을 정했습니다. 첫 만남때 관심있는 사료를 찾아오기로 했는데 김성훈님은 19세기 초에 대한 사회적 배경을 김안나님은 홍경래의 난에 가담했다고 전해지는 연홍을 저는 홍경래의 난을 조사해 와서 깜짝 놀랄만한 완벽한(?) 팀웍을 보였습니다. 그 이후에는 저를 제외하고 김종우님께서 합류하셔서 좋은 시놉을 만드셨습니다.
19세기 초 서북지방에서 일어난 홍경래의 난을 주제로 하였는데 기획의도는 홍경래의 난 안에서의 민중들의 모습을 그려보고 싶었습니다. 난을 일으킨 홍경래를 믿을 수 없으며 그렇다고 자신을 괴롭혀 온 관군은 더 믿을 수 없어 혼란스러워 했던 민중들의 모습 말입니다. 시놉인 관게로 전체적인 맥락을 집었고 그 과정에서 기획의도가 잘 드러나지 않아 다소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서북인에 대하 조정의 뿌리 깊은 차별은 이 지역 양반들의 처지를 더욱 구석으로 몰아 붙였습니다. 비리도 심해 급제하는 이는 모두 뒷배 좋은 권세가문들의 자제들 이었습니다. 사마시에 낙방한 홍경래는 조선 사회의 부조리에 대한 불만이 가슴에 일고 있었습니다. '뒤집어야 한다.' 그는 팔도를 누비며 사람을 모았다. 신분제에 불만을 품고 있었던 박생을 비롯한 상인, 중인들 뿐만 아니라 기녀 연홍도 만나게 됩니다. 사회부조리에 대한 불만은 있었지만 체계화 된 신념은 갖지 못했고 이것이 이후에 화근이 되고 맙니다.
1811년 흉년이 들어 민심은 크게 동요하였습니다. 홍경래 일당은 임신년 정월을 거사일로 잡았지만 비밀이 새나가 신미년 음력 12월로 거사를 앞당기게 됩니다. 관아를 털어 식량을 나누며 개혁적인 정책으로 민심을 다독이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신분제 철폐를 주장하는 박생과 대립하게 되는데 홍경래와 연홍도 신분의 차이로 인해 사이가 갈라지게 됩니다. 관군의 반격이 시작되고 연이은 패배에 내부 갈등은 심화되게 됩니다. 관군은 탈환한 지역의백성에게 홍경래와 결탁했다는 누명을 씌어 무자비한 고문과 살육을 자행합니다. 결국 홍경래는 정주성으로 피하고 이를 따르던 백성들도 정주성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홍경래가 좋아서라기 보다는 관군을 피해 살아남기 위함이었습니다. 시간이 지나 성에 물자가 바닥이나고 성벽까지 무너지게 됩니다. 진압과정 중 홍경래는 총에 맞아 죽고 붙잡힌 주모자들도 포로가 되어 한양으로 압송되어 처형 당하게 됩니다. 이리하여 홍경래의 난은 끝이나고 맙니다.
주진오 교수님께서는 19세기의 상인과 신분제로 인한 홍경래와 연홍이 연을 맺지 못헌 것에 대해 말씀해 주셨습니다. 3조의 시놉에서 보면 박생이라는 상인이 나오는데 그는 홍경래의 편에 섰다가 자신의 뜻이 관철되지 않자 배반을 하는 인물입니다. 실제로는 당시 만상의 임상옥이라는 상인도 비슷했다고 합니다. 사료에서는 홍경래에게 돈을 대줬지만 나중에는 관군으로 돌아선다고 하는데 상인의 특성상 기회에 투자를 하는 것이고 투자가치가 떨어지면 가장 먼저 등을 돌리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한 점에서 시놉에서 박생이라는 인물을 잘 표현했다는 평이었습니다.
다음으로 신분제 입니다. 홍경래와 연홍은 신분제의 차이와 홍경래가 결혼을 했다는 이유로 연을 맺지 못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지극히 현재의 관점이라는 것입니다. 조선시대의 경우 첩이라는 것이 합법화 되어 있는 마당에 신분제로 인해 두 사람이 갈등을 겪을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4조 입니다. 4조는 서로 시간이 맞지 않아서 처음 모였을 당시 사료로는 삼국유사에서 원효라는 인물과 의상대사, 설총까지 포함하여 원호는 자유인, 설총은 정신적인 양아들이라는 설정으로 시놉을 구성하려고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준비가 미흡하셔서 발표는 하지 않고 만들어 오신 시놉을 읽어보는 것으로 대체 하였습니다.
모든 발표가 끝나고 주은경 부원장님께서는 과거 종교와 전쟁이라는 강의에서도 이번과 같은 토론 시간을 편성했지만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번 강의에서는 기대 이상의 준비와 발표로 대단히 만족스럽고 감사하다는 말씀을 전해주셨습니다.
역사드라마, 사료로 다시보기 강좌는 기념사진을 찍는 것으로 강의의 끝을 맺었습니다.
8주동안 열성적으로 강의를 해주신 교수님들과 준비를 해주신 김민수 간사님, 주은경 부원장님 그리고 매 강의마다 활력을 불어 넣어주시며 수강해주신 모든 여러분들께 박수를 짝짝짝.
tv채널을 돌리다가 커피프린스라는 드라마 재탕하는 걸 보게 되었다. 재밌다 헤헤... 쿡tv로 4일 동안 잠 안고 18화까지 전부 독파했다. 1회당 60분 정도니까 다 합치면 1000시간 이상을 이 순정만화 같은 드라마에 올인한 것이다. 난 늘 이런 식이다. 그 드라마 인기 있을 땐 모른척하다 결국 혼자 뒷북친다. 뒷북도 사이즈 큰 걸로다가 친다. 남자라도 사랑하겠다는 이 자알 생기고 섹시한 청년, 공유의 눈물섞인 대사 한마디에 온몸의 감각들이 죄다 들고 일어났다. 한마디로 감각들이 난리법석이다. 중년 여성의 냉철한 이성 따윈 내다버리기도 귀찮아 그냥 깔아 뭉개버렸다. 다 늙어가지곤 풋풋한 청춘남녀 연애 얘기에 정신줄 놓아버리는 아줌마가 하도 안쓰러워 한동안 술도 좀 먹여주고 만화책도 좀 보여주느라 이 달에 계획했던 독서스케줄은 엉망이 되고 말았다(조광제 선생님 강의 들으면서 사이드 메뉴로 골라 놓은 철학책 마저 읽어야 하는데 ㅠ_ㅠ).
나이 먹어서 서러운 것은... 몸은 늙는데 마음은 늙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래서 인생은 점점 균형을 잃고 자아는 분열된다. 공중회전낙법을 하다 이마에 큰 혹이 생겼을 때도 몸은 할 수 없다고 두려움을 호소했지만 마음은 받아주지 않았다. 이렇게 물리적인 나이와 상관없이 늘 10대 소년(?)의 마음으로 산다는 건......... 민폐다, 자신에게도 타인에게도.
몸과 마음이 만들어 내는 불협화음, 그 소란을 잠재울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걸까? 38년을 살아도 철들지 못하는 행동주의자, 추적 나선다.
4강 몸과 마음의 열림으로
38살 아줌마의 몸과 10대 소년의 마음이란 어떤 관계인지 지금부터 철학적으로 고민해 보자. 우선 몸과 마음 둘 중에서 어떤 것이 더 근원적인 걸까? 숲의 나무 하나하나 도끼로 넘어뜨리며 나가는 고된 길이 예상되므로 심약자, 노인, 어린이, 임산부 등등은 각자가 알아서 할 일이다.
먼저 마음을 근원으로 보는 시각 : 대표적인 사람이 데카르트인데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라는 유명한 카피를 남겼더랬다. 이 때 생각이란 내가 나를 생각하는 이른바 ‘반성적 사유’로 내 마음이 내 마음을 생각의 대상으로 삼고, 그렇게 내 마음을 대상으로 삼고 사유하는 내 마음이라는 그 주체를 또다시 사유의 대상으로 삼는 또 다른 주체로서의 내 마음이 존재하고 계속 이런 식이다. 이렇게 되면 마음은 제 자신의 꼬리만을 향해 빙빙 돌 뿐 그 바깥으로 빠져나올 방법(타인과의 소통)이란 도무지 존재하지 않는다. 이를 유식한 말로 유아론(唯我論)적인 개인이라고 한다는데, 근대적 개인의 개념은 이런 유아론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원리상 타인을 인정할 수 없다. 결국 서로가 서로를 향해 ‘목숨을 건 투쟁’에 돌입할 수밖에 없다는 우리 시대의 슬픈 자화상은 근대 자본주의의 배타적 개인이라는 개념을 낳은 이 유아론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비슷한 견해를 갖고 있는 이가 라이프니츠인데 그는 진정으로 존재하는 것을 ‘모나드’라 칭했다. 이때 그가 말하는 길이를 갖지 않는 모나드란(길이를 갖는다는 것은 또 다시 무언가로 나뉠 수 있으므로 근원적이라 할 수 없다는 논리) 물질이 아니라 정신이다.
→ 이 두 사람처럼 마음을 더 근원적인 것으로 상정하면 우리는 더 이상 타인과 소통할 수 없는 존재로 전락하고 만다. 이런 닫힘의 철학 위에 근대 자본주의가 철옹성처럼 서 있다.
그렇다면 몸이 더 근원적이지 않을까 : 이런 소통불능의 상태를 피하기 위해서 우린 다른 대안이 필요하다. 몸이 더 근원적이라는, 즉 마음이나 생각 이런 것조차 마음이 아니라 몸이 하는 것으로 보자는 과감한 시각 이른바 ‘몸주체 이론’이 그것이다. 몸이 말하고, 몸이 느끼고, 몸이 지각하고, 몸이 의지를 발동하고, 몸이 판단하고, 몸이 미치고... 물론 이 논리 역시 빈틈없이 완벽하게 정당화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오류를 낳기도 하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점은, 몸은 지각된다는 것이다(보고 만지고 할 수 있으니까). 몸은 타인의 마음처럼 아예 접근조차 할 수 없는 것이 결코 아니다. 서로의 몸은 서로의 몸을 향해 지각의 차원에서 상당 부분 이미 열려있다. 비록 마음을 좀 더 근원적으로 보기는 했지만 의식이 하는 작용 중에서 지각작용이야말로 가장 근원적이라는 주장을 펼친 후설의 이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다면, 이러한 지각작용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판단, 평가, 소원, 상상 등과 같은 작용들 또한 타인에게 어느 정도는 열려있는 상태라고 볼 수 있다. 즉, 몸은 지각적으로 타인에게 열려 있고, 우리가 흔히 정신적인 작용이라 말하는 것들 또한 이러한 지각작용을 바탕으로 해서 성립함으로 마음의 영역이라 일컬어지는 작용들조차 타인에게 어느 정도 열려 있는 것이다.
→ 이런 몸주체 이론을 받아들이면 이제 우리는 마음이 아니라 행동을, 그 행동과 절대로 뗄 수 없는 감각을 더 근원적인 것으로 보게 된다. 여기까지 오는 데 난관도 많고 힘도 들었지만 어쨌거나 이로써 소통불능의 상태를 이끈 갇힘의 철학들은 박살냈다. 몸의 판정승!
그렇다면 마음의 대표주자로 인식되는 언어나 생각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몸이 더 근원적인 것이라고 볼 때, 우리가 생각들을 주고받는다고 여기는 언어조차 실은 생각이 아니라 나의 감각과 행동들을 주고받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생각도 마찬가지다. 생각의 내용을 잘 들여다보면, 생각은 생각에서 생겨날 수 없다. 생각은 늘 생각을 할 대상을 필요로 한다. 즉 생각의 내용은 생각이 아닌 것들을 바탕으로 한다. 생각이 아닌 것들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감각이고 행동이다.
빰빠라빠~~~ 드디어 몸이 더 근원적인 것으로 인정되는 감격적인 순간이다. 같은 논리를 펼치는 현상학자 메를로 퐁티가 주장하는 바에 의하면 우리의 몸은 일반화된 구조적 장치 이른바 ‘몸틀’이라는 것을 지니고 있다. 몸틀이란 살면서 각자의 몸에 일정한 형태로 유형화된 행동방식들로서 우리 몸에 습관처럼 배어 있는 것들이다. 따라서 사람마다 갖고 있는 몸틀의 종류도 다르고 수도 다르다. 몸틀의 수준과 깊이도 물론 다를 수밖에 없다. 자신이 구비하고 있는 몸틀에 따라서 행동하는 방식이 다르고 그래서 몸틀이 너무 다른 사람들을 만나면 소통이 쉽지 않다. 하지만 몸틀이 다른 사람과 만난다는 것은 그만큼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게 된다는 것이다. 나와는 다른 몸틀을 가진 사람을 만났을 때 그 사람이 하는 행동으로 인해 나는 그에 대응하는 새로운 감각들을 생성해낸다. 내 세계가, 내가 향유할 수 있는 시공간이 좀 더 넓고 좀 더 깊게 확장되는 것이다.
결국 몸을 근원적으로 보았을 때야말로, 우리는 서로에게 지각적, 감각적으로 열려 있을 수 있고 이런 감각을 바탕으로 소통을 이룰 수 있고, 이러한 소통을 바탕으로 공유적 향유를 성취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 자신의 삶을 향유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타인을 향해 몸을 열어야한다. 이 시대의 철학은 닫힘의 철학이 아니라 열림의 철학이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전혀 엉뚱한 얘기로부터 시작하는 것 같아도 언제나 항상 소통과 공유적 향유라는 목적지를 잃지 않고 찾아내는 나의 길찾기 솜씨에 조금은 감탄하며 자뻑하고 있다.
5강 사회적인 욕망과 권력을 넘어서
4강의 정리가 길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철학에 문외한인 내가 생각해보아도 몸이 마음까지도 아우르는 주체로서 당당히 우뚝 서는 이 대목이야말로 이 강좌 전체의 클라이막스 내지 결정타의 순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 결정타의 공은 이제 어디로 굴러갈 것인가? 몸이, 행동이, 감각이 중요하고 더 근원적이라는 건 이제 알겠는데 그래서 뭐 어쩌라고?... 아마 이러고들 계실 것이다. 그래서 5강 6강은 짧게 질러간다. 4강에서 숲의 나무들을 하나하나 베어내며 길을 갔다면 5강 6강부턴 그 숲 위로 헬기 타고 지나간다. 한방에 훅~~~ 두두두두(헬기소리)~~~
이쯤에서 권력이 강의에 등장하는 건 이름도 찬란한 그 미셀 푸코 덕분이다. 푸코에게 있어 권력관계란 몸의 관계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몸이 모든 것의 근원인 상태에서, 권력은 그러한 감각덩어리로서의 몸 다시 말해 그 몸의 감각들을 지배하고자 한다. ‘생체권력’이라는 멋드러진 단어를 푸코아저씨가 여기에 갖다 붙였단다. 감각의 관계는 좀처럼 눈으로 확인하기가 쉽지 않다. 따라서 이러한 감각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권력관계도 항상 명시적으로 이루어지는 건 아니다(푸코: 권력관계의 미시망). 예를 들어 군대의 지휘관과 부하 사이의 관계에 존재하는 눈에 확 띄는 권력관계들도 있지만, 일상적인 대화에서 내세우는 언어의 선택에도 분명 권력관계는 존재한다. 이는 MBC에서 다큐로 만든 걸 본 적이 있어 이해가 쉽다. 내가 모르는 어려운 영어단어들을 계속해서 사용하거나 전혀 알지 못하는 분야가 화제로 떠올랐을 때 사람들이 어떻게 그 공간에서 배척되고 소외되는가 하는 줄거리였다. 강준만은 이를 두고 지식폭력이라고까지 하는 것 같던데...
이러한 권력이 오늘날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우리 ‘감각덩어리들’과는 어떻게 맞닿아 있는 걸까? 자본주의 아래서 감각의 양을 더 늘리기 위해서는 자본이 중요한 수단이 된다. 당연하다. 돈이 있어야 골라먹는 재미를 느낄 것 아닌가... 한편 자본의 입장에서도 자본을 더 증식시키려면 감각에 호소하여 상품을 파는 길 밖에 없다. 이렇게 감각과 자본은 서로가 서로에게 수단이 된다.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게 있다. 감각의 향유를 위해 자본이 필요하다는 것은 사실 그 자본을 얻기 위해 노동을 해야한다는 어찌보면 너무나도 당연한 칼날을 품고 있다. 그것이 왜 칼날인고 하니... 우리가 얻고자 하는 건 감각이었는데, 그 감각을 얻기 위해 자본이 필요하고 그 자본을 얻기 위해 다시 노동을 해야하고 거기까진 좋은데 결국 노동을 하느라 감각을 향유할 여유는 점점 사라져간다는 딜레마만이 덩그러니 남기 때문이다. 결국 본말이 전도된 삶, 감각을 향유하기 위한 노동이 아니라 노동에 치여 감각적 향유라는 원래 삶의 목적마저 까마득히 잊어버린 삶을 살고 있는 우리 불쌍한 감각덩어리들만이 득실거리는 세상이 되고 말았다. 이렇게 되면 모든 것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감각도 노동을 강요하는 자본과의 싸움에서 여지없이 KO패 당하고 만다. 아니라고? 근사한 아파트 한 채를 감각적으로 향유하기 위해 우리가 저당잡힌 인생의 대부분이 그걸 또렷이 입증한다.
그런 것도 감각을 향유하는 게 아니냐고 반문하실 분도 계실 것이다. 그렇다. 집, 차, 더 많은 돈을 소유하는 것도 감각이다. 마르크스는 이걸 소유감각이라고 이름붙였다. 하지만 이러한 소유감각은 실제 소비를 통해 느끼는 감각에 비하면 추상적이고 관념적이고 획일적이서 제대로 된 감각이 아니다. 소유감각은 다른 모든 실재의 감각을 억누르고 폄하하는 철저히 왜곡된 감각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자본을 소유함으로써 얻어지는 감각은 더 나아가 다른 사람의 몸(감각)에 대해 권력을 행사하고자 하는 권력감각으로까지 발전한다. 나의 돈으로 타인의 노동력을 살 수 있다는 걸 생각해보면 된다. 우리는 돈으로 남의 노동력을 사는 행위를 통해, 즉 그 사람의 몸을 일정하게 구속함으로써 그 사람이 누릴 수 있는 감각을 시간적 공간적으로 통제할 수 있다.
결국 자본주의 아래에서 우리는 실제적인 감각은 억누르고 철저히 왜곡된 소유감각, 권력감각을 통해 타인의 삶을 통제하려드는 파시즘적인 욕망들만을 키워나가고 있는 셈이다. 즉 지금 시점에서 우리의 삶은 순수하고도 실제적인 감각의 존립이 점점 더 어려워지는 삶으로 내몰리고 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이 질문에 대해 철학자 조광제가 제시하는 답은 이렇다. 불필요한 감각들을 정리하라!!! 왜곡된 감각들을 얻기 위한 쓸데없는 노동은 줄이고 실제 감각들을 공유적으로 향유하기 위한 시간적 공간적 여유를 충분히 확보하라!!!
하지만 정답을 찾았다고 마냥 기쁘지만은 않은 이 심리는 뭐지? .말은 쉽고 실천은 어렵고, 이론은 쉽고 행동은 어렵고... 끙!
어쨌거나 권력에서 출발하여 감각의 공유적 향유로까지 오는 길찾기(5강 정리) 또 성공~~
6강 예술세계로의 초대
자본의 무한한 증식이라는 전제 없이도 감각을 공유적으로 향유할 수 있는 사회, 그를 위해 국가가 자본(기술)을 독점하고 → 사용가치만을 통용시켜 돈을 줘야만 살 수 있는 상품의 수를 현격히 줄이고 → 사야하는 상품의 수가 줄어드니 그걸 사기 위해 노동해야 하는 시간도 줄어들고 → 이렇게 노동이 줄어들면 노동을 구매함으로써 얻어지는 권력감각도 줄어들고 → 이럴 줄 알았는데 권력의 문제는 생각보다 쉽게 해결이 안 되고 → 이런 사람들 간의 권력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권력을 새롭게 인식시키기 위한 인간 재교육 과정이 필요하게 되고 → 그 과정에서 더 집약되고 독점적인 권력이 창출되더라~~~
이게 공산주의가 걸어간 쇠락의 발자취다. 하지만 이 새드 무비가 마냥 슬프지만은 않은 이유는, 왜곡된 감각과 자본과 권력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뭇 인간들의 몸부림이 이 세상 곳곳에서 아직 온기를 잃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쯤에서 예술이 등장해 주신다. 5강과 연결시켜 이야기를 하자면, 결국 왜곡된 감각, 자본, 파시즘적 욕망, 불필요한 감각 등에서 벗어나 실제적인 순수 감각들을 향유하자는 것이 이 시대 나름의 대안이었는데 바로 여기서 우리는 예술과 필연적으로 조우하게 된다.
정신 차리고 보니, 아니 헬기타고 한방에 간다던 5강, 6강이 왜 이러냐.. 잠시 반성적 사유 모드... 이 헬기가 1953産 소련제라서 그렇다는 변명을 깔고 어쨌든 6강은 좀 더 스피디하게 고고!!!
전통적인 예술의 개념으로 보면, 관객 내지 청중으로 불리는 일반 대중(예술 향유자)는 항상 수동적인 존재일 수 밖에 없다. 예술에 대한 감상을 통해 간접적으로밖에 다가갈 수 없다는 뜻이다. 이러한 상태라면 우리는 예술을 공유적으로 향유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20세기에 등장한 깨우친 예술가들은 예술을 극소수 있는 자들의 전유물에서 다시 일반대중에게로 돌려주기 위해 예술가과 관객 사이의 장벽을 허무는 작업들을 시도하기 시작했다. 이런 예술을 아방가르드(전위예술)라 칭하는데 다다이즘, 미래파, 입체파, 초현실주의 등이 여기에 속한다. 이런 개념에서 예술을 다시 들여다보면 우린 누구나 예술가가 될 수 있고 세상의 모든 것이 예술품일 수 있다. 이것이 가끔 나를 헷갈리게 만드는 현대미술의 정체다. 이러한 현대예술은 전통적인 예술관을 무너뜨리는 것 같지만 잘 생각해 보면 오히려 모든 우주적인 존재 자체를 예술로 봄으로써 예술철학의 지평을 확산시키고 있다. 즉 가끔 정말 이해가 안 가는 전위예술가들의 장난과 같은 퍼포먼스도 예술을 공유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이해한다면 이쁘게 봐 줄 수도 있다는 얘기다.
현대미술의 차원에서만 보더라도 배타적 소유를 뛰어넘어 감각의 공유적 향유를 위한 인간의 몸부림은 공산주의, 사회주의의 실패를 겪으면서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임을 알 수 있다. 내가 바로 예술가이고 세상의 모든 것이 예술이라는 개념. 이러한 예술의 초대에 적극적으로 응한다는 건 자본주의가 부추기는 배타적인 소유와 그에 따른 소유감각의 쇠사슬을 끊고 나의 감각을 타인과 공유적으로 향유함으로써 서로가 서로를 통해 더욱 강화, 심화되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인다는 것, 자본주의적인 삶의 방식을 혁명적으로 파기하겠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내가 제일 어러워 하는 ‘예술’을 통해서도 감각의 공유적 향유(소통)라는 이 강좌 본연의 목적지를 길을 잃지 않고 무사히 찾아냈다. 저번 후기처럼 엑기스만 뽑아 박스 형태로 정리하고자 하는 욕구는 묻어 두어야겠다. 여기까지 오는 데만도 장장 6시간이 걸린 관계로... 에너지 절약을 통해 전지구적 환경재난을 막기 위해 컴퓨터 사용을 자제함으로써.... 뭔 소리냐 이건...
강의를 마치며....
수업을 너무 열심히 들은 관계로 박스 형태의 요약은 없어도 그동안 있었던 철학 강의 총 6강을 한 마디로 정의할 수는 있다.
삶을 제대로 누리려면 제대로 된 감각을 타인과 제대로 소통하라!
조금 쉬었다가, 난 내 몸속에 자리잡은 10대 소년의 감수성을 불러내 진지하게 소주 한잔 기울이며 소통할 예정이다(이건 인터넷을 통해 공유에 관한 온갖 정보들을 수렴하겠다는 말과 동일어이다. 이때 공유란 그 공유가 아니라 배우 공유... 헷갈려). 혹 내가 배우 공유를 좋아하게 된 것도 이 철학 강의 때문은 아닐까?
어쨌든 서두에서 제기했던 내 개인적인 문제, 38살 아줌마 몸과 10대 소년인 마음과의 관계 정리는 대충 원만하게 이루어질 것 같다. 그 마음이 몸에서 왔다는데... 어찌 마음의 철없음을 탓하리오. 내 몸은 비록 늙었어도 여전히 한 구석에 10대 소년의 마음을 숨겨두고 있는 것을... 그게 철학을 통해서 바라본 현재의 나다.
강의 가이드 역할을 훌륭히 소화해 주신 조광제 선생님, 철학이라는 낯선 여행길의 든든한 길동무가 되어주신 수강생 여러분에게도 감사의 말 전한다. 김간사 너도 고마워!
4월 13일 [서울, 도시와 공간의 인문학] 강좌가 막을 올렸다. <서울은 깊다>의 저자이신 전우용 선생님이 1강과 2강의 강의를 맡아 열강해주셨다. 전우용 선생님의 강의는 "도시"라는 공간이 생기게 된 배경과 "서울"이 조선의 도시로 자리매김한 과정을 들을 수 있었다.
1강 조선이 서울에 담은 꿈
문명과 도시
고대 사람들은 '신'을 매우 중시했다. 자연재해나 죽음처럼 사람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일들이 빈번했고 그런 문제의 해결을 위해 인간보다 우월한 존재를 상정했다. 그들은 '신'이 자연 속에 있다고 믿었으며 이런 믿음은 자연숭배-하늘 숭배 사상으로 발전했다. (예를 들어 하늘나라를 옥황상제가 사는 신성한 곳으로 생각했던 식이다)
신석기 시대 농업혁명으로 인해 발생한 잉여생산은 인구의 축적을 낳았으며 드디어 "도시"가 만들어 지기 시작한다. 도시는 농사를 짓지 않는 땅에 오로지 신을 위한 공간으로 처음 등장했다. 그 곳에 신에게 봉사하는 사람들이 살았으며 농사일에서 자유로우며 신을 위한 의식에 치중했던 이들의 생활과 문화는 농촌보다 훨씬 화려하고 다양했다. 도시에 권력(신성권력:사제집단+세속권력:왕)이 집중되면서 이제 도시는 자신의 공간에 권력적 요소들을 드러내게 된다. 권력자들은 이런 가시적인 형태를 통해 사람들에게 도시가 선택받은 특권적인 장소임을 보여주고 싶어했고 그들의 믿음과 신뢰를 얻고자 했다.
특히 도시의 화려하고 웅장한 건조물들은 이를 통해 건물과 그 내부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신성성을 부각하며 일반인들에게 감탄과 존경심을 불러일으키는 효과를 목적으로 장식이 발달했다.
조선이 서울에 담은 꿈
서울은 '새벌-서나벌-셔블-서울'의 변화를 거쳐 만들어진 단어로 순 한글말이며 "가장 신성한 땅"이란 뜻이다. ("새벌"의 "새"는 새로움, 동쪽을 뜻하고 "벌"은 땅을 의미함.)
이성계가 고려의 수도 개경을 버리고 새로운 도읍지로 한양(서울)을 택한 것은 개경에 깊게 뿌리내리고 있던 구 특권 세력의 해체와 새 나라를 위한 건국이념을 세우기 위함이었다. 정도전은 이런 서울을 설계한 인물로, 그는 자신의 이상이던 유교이념을 정립하기 위해 주자성리학적 공간관을 바탕으로 도시를 건설한다.
전조후시前朝後市 : 궁궐의 전면에 관청을, 후면에 시전을 배치
좌모우사左廟右社 : 궁궐의 왼쪽에 종묘 오른쪽에 사직울 배치
제후칠궤諸侯七軌 : 제후의 길(광화문)은 마차 7대가 나란히 지나갈 수 있는 길로 함.
경복궁을 창건할 때도 주자성리학에 따르는 정도전의 이상이 반영된다. 경복궁을 보면, 40칸에 이르는 수정전이나 신하들과 함께 하는 연회를 열었던 경회루 등 신하들을 위한 공간이 왕을 위한 공간에 뒤지지 않음이 드러난다. 이는 신하들의 정치참여를 격려하여 신권과 왕권을 대등한 관계로 유지하고자 했던 정도전의 정치 이상이 드러나 있다. 그러나 이런 주자성리학에 입각한 궁궐을 역대 조선 왕들은 그리 달가워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들은 끊임없이 경복궁을 외면하고 다른 궁에서 기거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 덕분에 조선왕조의 5대 궁궐은 지금까지도 공원이 거의 없는 서울에서 시민들이 그나마 숨 쉴 수 있는 녹지와 휴식공간이 되어 주고 있다.
조선 초 한양(서울)은 새로운 도시로서 활기가 넘쳐나는 도시였다고 한다. 과거제를 거쳐 각 지역에서 올라온 신진사대부들을 통해 각 지역의 문화가 융합되면서 한양(서울)만의 문화가 꽃을 피웠던 것이다. 세종대왕 시기의 새로운 발명과 창조가 가능했던 것도 조선 초기 수도 한양의 문화에 영향을 입은 것이었을 것이다.(2010년 서울은 어떤가?)
에밀 졸라는 "백화점은 현대의 신전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이를 바꿔 말하면 "물질(자본)은 현대의 신이다."라고도 할 수 있다. 실제로 백화점이나 면세점이 과거의 신전이 위치하던 곳을 차지하는 경우가 많다. 현대 자본주의의 신은 자본 그 자체(물신)이지 인격이나 어떤 가치를 담고 있는 존재가 아니다. 요즘 사람들의 가치 선택 기준은 "이게 돈이 되는가?"이다. 그러나 이런 질문으로는 도시가 자본의 수단으로밖에 되지 않는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정말 인간적인 것은 무엇인가?"를 묻고, "우리 도시의 모습이 어떻게 되는 것이 더 인간적인가?"를 자문해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도시는 어디에 있을까? 바로 우리 자신들의 마음을 바꾸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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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0일 참여연대에서 두번째 수업이 있었다. 이번 강의도 전우용님의 열강으로 흥미진진한 수업이었다.
2강 서울, 근대로 향하다
사람을 가장 크게 변화시키는 요인은 무엇일까? 혹자는 신념이나 가치 이데올로기라고 말할지 모르고, 혹자는 지식체계의 변화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봤을 때 가장 크고 중요한 삶의 변화 요인은 바로 "자연"이다. 기후변화같은 자연문제는 앞으로도 우리 미래의 삶 자체를 바꿀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요인이 될 것이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임진왜란 역시 17세기 소빙기에서부터 시작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7세기 동아시아 대륙에 소빙기가 찾아오자 기상 이변으로 인한 농작물 피해와 기근, 질병이 만연하게 되고 이는 당시 동아시아에 존재하던 국가-명나라, 청나라, 조선, 일본-들이 자국의 문제를 외부를 통해 해소하는 방식을 택하게 만든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며 서울은 기능과 모습이 크게 파괴된다. 인구는 급격히 감소하고 기근과 전염병은 끊이질 않았다. 많은 인구 감소로 양민의 수가 줄어들자 이를 늘리기 위해 군공과 면천을 실시하는 등 폐쇄적이던 신분제도도 흔들리기 시작한다. 전쟁 후 이런 어수선함 속에서 서울의 재건을 위해 궁궐 복구와 성곽 수리 및 군사 시설 정비가 시작된다. 사회 전체가 이전의 방법으로는 해석할 수 없는 새로운 방향으로 빠르게 변화하자 실학처럼 새로운 학문이 등장해 당시 사회 모습을 다루고자 하기도 했다.
이런 어려움을 거쳐 농업생산력 및 의학의 발전을 통해 인구가 증가하면서 서울도 늘어난 인구와 함께 확장하기 시작한다. 농촌의 잉여인구가 도시로 진입하며 서울 교외 지역 확장도 일어났다.
특히 서울의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던 시기가 두 번 있는데 한 번은 한국전쟁 직후이고 또 한 번은 양란(임진왜란,병자호란) 직후인 17세기 중반이다.
도시공간이 계속 팽창하면서 18세기 한양(서울)은 근대적 양상을 띄게 된다. 근대적인 도시 문제(주택문제, 일자리문제, 환경문제, 범죄 등)들도 발생하는데 이는 서울의 독특한 문화를 형성하는데 한 몫을 하기도 한다.
이런 모습들을 통해 우리는 일본 우파들이 말하는 "일제침략이 조선의 근대성에 이바지했다"는 주장이 전혀 맞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근대화와 도시화가 같은 개념에서 시작된다고 보면 이미 일제 침략 전인 18세기에 근대적인 모습이 서울에 존재했던 것이다.
대한제국의 황제 고종은 당시 조선의 기득권 세력이자 비리 투성이었던 노론을 넘어서기 위해 더 아래 신분인 일반 백성들과 손잡기를 원했고 이는 민본적 절대주의라고 말할 수 있다. 고종은 도시를 민본적 절대주의가 드러나 있는 공간으로 만들고자 했다. 시민공원과 상설시장의 등장은 백성을 위한 고종의 의도가 잘 드러난 도시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종로를 관통하는 동서축을 강조한 "황도건설"은 이 길을 주로 이용하게 될 국민에 대한 배려이자 근대성의 표지라고 할 수 있으며 무엇보다 자주독립, 전제황권을 도시 공간 위에 표시함으로서 고종의 정치적 의도를 잘 드러내며 조선시대 도시근대화의 면모를 볼 수 있는 것이다.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간에 종로를 중심축으로 삼았던 것은 이후 일제 식민지 시기에 그나마 종로가 일본인 중심의 명동에 맞서 조선인 상권의 중심이 되는데 큰 역할을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질의응답 시간에 많은 질문이 오갔다. 그 중에 가장 의미심장했던 질문과 답변을 올려본다.
"서울을 주도할 가치와 신념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도시는 그 도시 사람들을 닮기 마련이다. 서울이 세계에서 가장 추악한 도시 6위에 뽑혔다는 얘기를 들은 적 있는데, 만약 그 내용이 사실이라면 서울 시민도 가장 추악한 시민 6위라는 소리다. 도시는 도시인들의 모습을 반영한다. 권력과 돈이 일차적으로 움직이는 곳이 바로 도시개발, 도시주권이다. 한강이 파괴되어도 집 값이 올라가면 상관없다는 사람들이 많으면 결국 그런 식으로 도시 모습은 흘러가게 된다. 무엇보다 서울 시민들의 모습에 따라 앞으로의 서울의 모습을 유추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과연 나는 어떤 욕망을 가슴에 품고 도시를 바라보고 있는지, 자기 자신의 속마음을 들여다보길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