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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권의 정치철학 : 자유의 계보학 | [자유의 계보학] 1강, 자유주의 이전의 자유 | 장경환 | 2014.1.24 | ||||
[자유의 계보학] 1강(1/21), 자유주의 이전의 ‘자유’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 한나 아렌트, “자유란 무엇인가?” 강의 소개 보기 ☞ 클릭 우리가 한국 근현대사를 배울 때 가장 오해하고 있는 부분이 민주주의의 발전 과정이다. ‘자유’라는 개념은 나에게 익숙하면서도 익숙하지 않은 개념이었다. 그리고 정치철학 강의 또한 생소한 분야였다. 하지만, 매 강의마다 같은 생각, 막연하지만 배워보겠다는 마음으로 이번 강의도 신청하게 됐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이 강의는 질문을 쌓아주는 강의인 것 같다. 하이데거는 “인간은 어지간하면 생각하려 하지 않는다”고 했고 그래서 “죽음 앞에서만 생각한다”고 했다. 선생님께선 그런 방법이 아니더라도 질문이 쌓이게 되면 생각하기 마련이기에 어느 부분에서도 명확한 답은 내려주지 않지만 생각할 여지를 많이 준다는 점에서 이번 강의는 의미가 있는 것 같다. 강의는 1부와 2부로 나눠져 있었다. 강의를 시작하고 1부 한 시간 동안은 자유주의에 대한 개괄적인 설명과 강의 커리큘럼을 훑어봤고 나머지 한 시간 동안 준비해주신 자료와 함께 아렌트의 이론을 살펴봤다. 자유주의 정치철학의 시작인 ‘존 롤스’에 대한 설명을 시작으로 강의는 시작됐다. 동시에 정치철학이라는 말의 모순을 설명해주셨는데 정치는 행동(act)이고 철학은 사유(thinking), 즉 움직임 + 멈춤이라는 말인데 그 자체로 모순이라고 설명하셨다. 그래서 Action in Thinking, Thinking in Acting, 행동과 이론의 결합이 필요하다고 하셨다. 다음으로 ‘한나 아렌트’라는 이론가(철학하는 사람이라 불리기 싫어했다)에 대한 설명을 해주셨다. 그녀의 살아왔던 삶과 그녀의 저작들에 대한 설명들, 그녀의 이론 등을 설명해주셨다. 그 가운데 학문적 일관성에 집착하지 않았던 아렌트의 모습들이 인상적이었다. 책의 제목과 내용의 불일치함에도 제안 받은 매력적인 책 제목을 용인한 아렌트, 독자로 하여금 빠져들게 했던 글쓰기 방법, 자신을 반대하는 사람까지도 설득시켰던 아렌트의 인생 등을 말씀하시며 정치의 본질은 설득이라고 하셨다. 자기 생각과 조금이라도 다르면 눈에 불을 키고 싸우려 들고 자기 생각이 옳다고 주장만하는 요즘 사람들에게 큰 교훈이 될 내용이었다. 2부에서는 본격적으로 텍스트에 대한 설명을 해주셨다. 먼저 1절에서는 근대 자유주의, ‘정치는 선택이다’라는 정치적 자유에 대한 언급부터 시작한다. 이것은 ‘자유는 정치가 끝난 지점에서 시작된다고 믿는 경향’으로 구체화됐다. 하지만 아렌트가 인식한 정치란 ‘유서 없이 남겨진 유산’과도 같은 것이었다. 정치적 자유라는 이유로 가지는 정치에 대한 무관심에 대해서 아렌트는 ‘자아가 세계를 등지고 숨어 있는 내적 공간’이라고 말한다. 즉, 그냥 도망치는 것일 뿐 그것이 양심의 공간인 ‘마음’이나 사유의 공간인 ‘정신’으로 오해해서는 안된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사회적 분배의 문제는 언급하지 않은 점은 아렌트가 가지는 약점인데 그녀는 ‘인간은 자유롭기 위해서 삶의 필요로부터 자신을 해방시켜야만 한다’고 했다. 즉, 모든 것을 다 지키면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말이다. 그리고 자유는 해방과 함께 자동적으로 따라오는 것이 아닌 함께하는 타자들의 무리와 공적 영역이 필요하다고 했다. 우리가 자유롭기 위해서는 공공영역이 필요하다. 하지만 우리가 다 사적 영역에서 사유하니까 ‘공유된 세계’(the common world)를 상실하게 됐고 자동적으로 자유를 상실하게 됐다. 즉, ‘공유된 세계’를 잃어버린데 근대의 문제가 있다고 했다. 또한 아렌트는 자유의지를 자유로 착각하는데서 문제가 생긴다고 판단해서 자유와 의지를 구별한다. 의지의 본질은 변덕인데 선과 악을 향한 의지를 동시에 갖고 있다고 한다. 한 방향으로 움직이려할 때 반대 방향이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이다. 의지는 끊임없이 하고 싶은데 할 수 없을 때 의지하고 자유는 행위와 동시에 발생한다. 그리고 그리스의 폴리스를 언급하면서 공연예술가와 같이 자유도 타자의 현존을 필요로 하는 특징을 갖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후 왜 의지와 자유를 동일시하게 되었는지와 그리스어와 라틴어의 “to act”라는 뜻의 단어들을 설명해주셨다. 또한 인간이 새로운 시작이기에 새로이 시작할 수 있고 시작이라는 기능을 가진 것이 바로 자유라고 하셨다. 이와 함께 아렌트의 말들을 인용하면서 어둡고 결코 변하지 않을 것 같은 세상이 변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셨다. “인간이 행위하는 존재인 한 그는 시작이다. 그러므로 예견할 수 없고 예측할 수 없는 것을 바라는 일, 정치 영역에서 ‘기적’을 준비하고 기대하는 일은 결코 미신적인 것이 아니며 오히려 현실주의적 태도일 것이다. 저울의 눈금이 재앙 쪽으로 기울면 기울수록 자유 속에 수행된 행위는 더 기적적으로 보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선생님께선 바뀔 것 같지 않은 역사의 체인 속으로 자신을 던질 때 진정한 자유가 시작된다고 하셨다. 점점 더 재앙 쪽으로 기울어지는 대한민국 정치현실이 우리의 자유 속에 수행된 행위를 기적적으로 만들 것이라는 기대감을 가지고 강의를 마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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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를 향한 역사 : 근대로의 희망 여정 | [민주주의를 향한 역사] 1강, 인민 : 신분해방, 여성해방 | 박유하 | 2014.1.16 | ||||
[민주주의를 향한 역사: 근대로의 희망 여정] 1강(1/13), 인민: 신분 해방, 여성 해방 강의 소개 보기 ☞ 클릭 우리가 한국 근현대사를 배울 때 가장 오해하고 있는 부분이 민주주의의 발전 과정이다. 해방 후 1948년 미군정이 신탁통치를 시작하면서 민주주의가 한국 사회에 이식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신분해방의 물결이 일고 만민평등 사회로의 진입이 시작된 시기는 그보다 훨씬 전인 19세기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18세기와 19세기는 세계사적으로 신분 해방의 격변이 혁명으로, 민란과 변란으로 요구되던 시대였고 조선 역시 서구나 중국, 일본 등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1896년에 상하귀천이 없는 만민평등의 주체인 인민을 위한 신문이 창간되었다는 선언은 서재필이 미국의 영향을 받고 쓴 것이 아니라 당대 민중들이 요구하던 내용이었다. 일제에 항거하는 독립운동이 지향하는 체제는 독재의 안티테제인 민주주의일 수밖에 없었다. <민주주의를 향한 역사: 근대로의 희망 여정>는 이처럼 민족주의를 넘어 민주주의 관점에서 역사를 보며 인민, 자치, 개인도덕 등의 근대적 가치가 우리 사회의 특수성과 맞물려 어떻게 나타났는지 돌이켜보고자 하는 강좌이다. 노비 해방의 길 1894년은 가히 노비해방의 해라 부를만하다. 동학농민운동이라는 아래로부터의 개혁과 갑오개혁이라는 위로부터의 개혁이 일어난 해이기 때문이다. 동학농민군의 폐정개혁안은 노비문서를 불태워 노비를 해방하자는 강력한 주장이었다. 농민군 내 천민부대의 공로를 인정받아 지위가 점점 올라갔으며 노비 출신의 지도자가 등장하기도 했다. 갑오개혁에서는 공식적으로 공사노비의 제도를 모두 없애고 인신의 판매를 금하였다. 이후 독립협회가 인권을 강조하며 불법적 노비 매매 등 노비제 잔재를 청산하는 데에 앞장섰다. 양반들의 반발과 저항이 지속되었으나 역사의 흐름을 막을 수는 없었다. 여성 해방의 길 동시대 서양, 중국과 일본과 비교했을 때에는 아쉬운 점이 여럿 보인다. 애초에 여성을 계몽하던 주체는 박영효 등 남성 지식인이었고 여성교육도 사회인이 아닌 가정에서의 여성의 역할을 강조하는 데에 그쳤다. 그리고 여성들이 남성의 영역이었던 곳으로 정치적 진출을 했던 경우가 많은 대신 여성에 의한 여권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나지는 못하였다는 점을 지적하기도 한다. 백정 해방의 길 발단은 백정 자녀의 학교입학 거부 문제였다. 계급타파, 모욕적 칭호 폐지, 교육 권장, 상호 친목 등을 추구하였다. 비슷한 시기에 일어나던 일본 특수부락민 수평운동의 영향을 받았고 그와 비교되기도 한다. 그러나 현재 우리나라에선 백정에 대한 차별대우가 거의 남아있지 않은 반면 일본의 부락민의 차별은 지금도 여전히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는 결정적인 차이점이 있다. 이후 형평사는 계급 해방을 지향하는 사회주의 운동과 연계해 발전해나갔으나 1930년대 들어 극악해진 일제의 탄압 아래 다른 사회운동단체와 함께 해체되고 말았다. 민주주의 관점으로 바라보는 역사: 우리 역사에서 희망을 찾는 올바른 방법 "대한민국의 인민은 남녀, 귀천 및 빈부의 계급이 없고 평등함"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헌장 제3조다. 신분해방운동의 최종적인 지향점을 이토록 간단명료하게 서술하기도 힘들 것이다. 노비와 백정, 여성이 차별과 배제의 대상에서 평등의 주체로 거듭나기까지 100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제도 개혁과 자발적 결사체를 통한 운동이 맞물려 이루어낸 결과였다. 전근대와 근대는 칼로 자르듯 나눌 수 있는 개념이 아니고 민주주의와 평등은 외부에서 주어진다고 해서 이식되는 가치가 아니다. 일제와 독재정권 아래에서 억압당하고 후퇴하였다 해도 민주주의에 대한 민중의 열망에는 깊은 뿌리가 있다. 이제 첫 강을 들었을 뿐이지만 외세 개입이 없었어도 자발적인 근대화가 가능했을 거라는 생각에 확신을 얻을 수 있었다. ‘긍정적 역사관’을 갖는 일은 일제 식민통치와 독재정권을 미화하는 이들에게 동조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믿는다. 이에 대한 근거는 앞으로 이 강좌를 들으며 하나하나 배워가고 싶다. 글 : 자원활동가 박유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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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으로 이해하는 정치사상 - 근대편 | [고전으로 이해하는 정치사상-근대편] 7강, 자본주의 합리성은 진정 합리적인가? - 마르크스 | 기라 | 2014.1.4 | ||||
[고전으로 이해하는 정치사상-근대편] 7강(12/23), 자본주의 합리성은 진정 합리적인가? - 마르크스 강의소개 보기 >> 클릭 1강 후기 보기 >> 클릭 2강 후기 보기 >> 클릭 3강 후기 보기 >> 클릭 4강 후기 보기 >> 클릭 5강 후기 보기 >> 클릭 6강 후기 보기 >> 클릭 보강 후기 보기 >> 클릭 후기가 많이 늦어서 죄송합니다. 종강 11일 만에 올리는 ‘고전으로 이해하는 정치사상- 근대편’의 마지막 강의 후기입니다. 특별히 마지막 강의 자료는 김만권 선생님께서 수강생들의 개인 이메일 계정을 통해 공유해주셨습니다. 제 계정으로는 베버 파트만 메일이 와있긴 하던데 다른 분들은 마르크스 ppt까지 다 받으신 거죠? 오늘은 자세한 내용보다는 수업 진행과 소감 위주로 간략하게 후기를 마무리 짓겠습니다. 강의의 마지막 주인공은 칼 마르크스였습니다. 지난 보강에서 마르크스 공부를 위해 베버를 다루었었고요. 강의 초반부에는 보강을 함께하지 못한 분들을 위해 베버와 마르크스를 다시 한 번 비교해보았습니다. 동시대를 살았던 둘은 근대에 벌어지고 있는 비극의 주범으로 자본주의적 합리성을 지목하고 어떻게 이 운명을 극복할 수 있을까에 대해 고민했지만 제시한 대응 방이 달랐죠. 이에 대해서는 김만권 선생님께서 결론을 내리며 더 명확하게 설명해주시니 저도 후기를 마무리 지으며 자세히 적겠습니다. 선생님께서 계속 베버처럼 멋있게 늙어야 한다고 해서 재밌었어요. 베버는 실제로 젊은 시절의 모습보다 나이 든 모습이 중후하고 근엄해 보이죠. 반면 마르크스는 젊은 시절의 모습이 정말 꽃미남이 따로 없어서 여성 수강생 분들의 마음을 흔들었으나 중년의 모습은...ㅎ 제 생각엔 목적과 수단의 일치를 통해 개개인의 진정한 합리성을 구축할 것을 주장한 베버는 자신의 목적과 수단을 합리화해서 편한 인생을 살아서 외모가 멋있어진 반면, 마르크스는 프롤레타리아적 합리성을 위해 온갖 고생을 해서 외모가 쇠퇴하지 않았을까 해요...ㅎㅎ 물론 농담. ^^; 그러고 나서 김만권 선생님께서 마르크스라는 인물에 대해, 그의 생애에 대해 말씀해주셨어요. 마르크스의 집안과 청년시절의 이야기부터 각국을 떠돌다 런던에 정착하기까지의 파란만장한 마르크스의 삶이 한 편의 영화처럼 펼쳐지는 듯 했습니다. 학자로서 마르크스는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됩니다. 바로 경제학자로서의 마르크스와 철학자로서의 마르크스지요. 많은 사람들이 이 두 마르크스 사이에 모순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룬트 리세>라는 작품을 읽으면 그 오해가 풀린다고 하네요. 우리나라에 번역되어 있는 책은 아닌데 김만권 선생님께서는 수강생들에게 설명해주셨답니다. 요약하자면 ‘인간 소외(마르크스 철학) 때문에 구조 변동(마르크스 정치경제학)이 시작 된다’ 라고 할 수 있겠네요. 그리고 본격적으로 마르크스의 <1884년 경제-철학수고>에 담긴 내용을 배웠습니다. 마르크스는 “국민경제학은 사적소유라는 사실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그렇지만 국민경제학은 우리에게 그 사실을 설명하지 않는다.”며 고전 경제학파를 비판했습니다. 마르크스는 경제모델들의 전제가 되는 사적소유가 애초에 왜 그런 것인지조차 고전 경제학자들은 생각해보지 않았다고 지적합니다. 실제로 극단적인 사적소유까지 인정하는 자본주의는 인간의 노동을 왜곡합니다. 원래 노동은 인간이 자연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가장 창조적일 수 있도록 하는 활동인데 자본주의에서는 노동을 하는 이와 이윤을 얻는 이가 다릅니다. 따라서 노동자는 이윤의 부스러기만 가져가고, 그 부스러기를 두고 또 서로가 경쟁함으로써 더 가난하고 피폐해집니다. 마르크스는 이를 ‘노동 소외’라고 명하고 구체적으로 네 가지 현상을 지적합니다. 후기에서는 생략. ^^ 이런 현실을 타파하려면 자본주의 체제 자체를 붕괴시키고 그에 대항적인 합리성을 지닌 사회체제로 전환해야 합니다. 마르크스는 그 변화의 주체가 자본주의에서 가장 고통 받고 있는 노동자들이며, 이 때 이들이 갖추어야 할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합리성이 프롤레타리아 합리성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는 보편적 역사 발전 법칙에 따라 자본의 축적이 극대화되면 필연적으로 일어나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일어나지 않은 것은 ‘계급의식’의 부재 때문입니다. 프롤레타리아들이 스스로 자본주의의 피해 당사자가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계급의식에 따라 사고하지 못하는 것이죠. 따라서 마르크스는 정말 이 세계가 변화하려면 노동자들이 정치 교육을 통해 프롤레타리아 합리성으로 무장하고 하나의 계급으로 확실히 연대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물론 2014년의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공산주의 실험은 시작도 전에 끝나버렸고, 오늘날 우리는 단순히 계급을 두 부류로 나누기엔 너무도 분화된 사회 속에서 각자의 가치를 가진 채 살아갑니다. 특히 우리나라는 자본가들의 헤게모니에 장악된 채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계급을 배반하는 의식과 행위에 동조하죠. 오늘 강의의 결론은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 베버와 마르크스입니다. 두 사상가 모두 자본주의라는 운명에 저항하고자 했으나 한 사람은 자본주의라는 주어진 운명 내에서 생각했고 한 사람은 그 운명 자체를 깨부수고자 했습니다. 또, 한 사람은 운명에 맞서는 일을 개인의 책임으로 넘겼기 때문에 개개인을 통합할 수 있는 더 강력한 지도자, 카리스마적 지도자를 생각해냈다면 한 사람은 노동자들이 하나의 민주적 집단으로서 프롤레타리아적 합리성을 갖추길 바랐습니다. 이러한 철학의 차이는 실제로 두 인물의 삶에서도 차이를 낳았습니다. 한 사람은 의회정치가로서의 삶을 살았고, 한 사람은 스스로 인터내셔널을 창설했죠. 실제로 마르크스보다 조금 더 늦게 태어나고 죽은 베버는 ‘마르크스가 과학이라는 이름 아래 독단적이며 책임질 수 없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고 마르크스를 비난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후대에 칼 뢰비트는 둘을 비교한 자신의 저서에서 ‘베버는 자신의 신념 때문에 자본주의의 병폐를 진단만 할 수 있었지만, 마르크스는 현실에 존재하는 모순을 우리가 정확하게 파악할 수만 있다면 그것을 전복시킬 수 있다는 신념하에 하나의 해결책을 내놓을 수 있었다’고 평가합니다.
이렇게 마지막 강의 후기까지 쓰고 나니 비로소 종강이 실감납니다. 종강 당일에는 더 이상 강의가 없다는 생각에 슬프더니 해가 바뀌고 후기를 쓰면서는 개운한 기분도 드네요. 이 강의에 자원활동가로 참여할 수 있었던 건 정말 굉장한 행운이었어요. 다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또 뵙겠습니다. ^^ 글: 자원활동가 김슬기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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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으로 이해하는 정치사상 - 근대편 | [고전으로 이해하는 정치사상-근대편] 보강, 자본주의 합리성은 진정 합리적인가? - 베버 | 기라 | 2013.12.25 | ||||
[고전으로 이해하는 정치사상-근대편] 보강(12/20), 자본주의 합리성은 진정 합리적인가? - 베버 강의소개 보기 >> 클릭 1강 후기 보기 >>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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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막스 베버 (Max Weber 1864.4.21.-1920.6.14.) 느티나무에서 이례적으로 강의 보충이 있던 날이었습니다. 온갖 연말 모임을 뒤로 한, 또는 게으름을 툭툭 털고 집에서 나선 열정적인 수강생들이 스무 명 가까이 모였어요. 게다가 보강과 불금이 주는 특별한 느낌 덕인지 박주련 선생님께서는 뜨끈뜨근한 붕어빵을 두 봉지 가득, 구문숙 선생님께서는 샛노란 군고구마를 한 아름 간식으로 들고 오셨답니다. 절로 마음이 훈훈해지는 보강이 아닐 수 없지요? 오늘의 사상가는 막스 베버(Max Weber, 1864-1920)입니다. 7강으로 준비되어있는 칼 마르크스를 공부하기 전에 꼭 비교하며 공부해야 할 사상가라서 보강으로라도 베버를 준비하셨다는 김만권 선생님의 말씀. 저는 보강이니 만큼 간단하게 후기를 써야겠다고 생각했으나 그 게 마음처럼 되지 않아서 슬픔. 마르크스와 베버는 공통적으로 둘 다 자본주의가 낳은 근대의 비극을 지적했던 사상가입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적 합리성 안에 모순이 있다면 그 걸 깨고 새로운 합리성을 만들어서 사회를 바꿀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반면, 베버는 자본주의적 합리성을 ‘철장(iron cage)’에 비유하며 결코 우리가 떨쳐낼 수 없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1.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그리고 ‘섹터’ 아마 많은 분들이 이 책에 대해서는 잘 알고 계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김만권 선생님이 강조하신 것은 책의 내용보다 베버가 책을 썼던 이유입니다. 베버의 질문은 ‘왜 유독 서구 사회에서만 근대적 자본주의가 나타났는가?’, ‘어떻게 무한한 이윤추구 행위가 도덕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었는가?’입니다. 정리하자면 왜 굳이 서구에서 끝없는 이윤추구가 인간의 덕인 양 하는 자본주의가 탄생할 수 있었냐는 것이죠. 책의 내용은 간단합니다. 청교도의 구원예정설로 인해 청교도인들은 열심히 일하면서도 검소한 삶을 꾸리며 부를 축적하는 방식으로 자신이 구원받을 수 있는 가능성을 확인하려고 했다는 겁니다. 특히 신을 위해 행하는 지속적인 노동과 부의 추구는 하나의 소명으로서도 받아들여졌습니다. 이렇게 근대적 자본주의는 서구에서 도덕적인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었습니다. 사실 아직까지는 큰 문제가 없습니다. 베버는 이윤추구 행위 자체는 사회적 병폐를 만들어내지도 않고 자본주의의 특징도 아니라고 설명합니다. 사실 이윤추구는 언제나 인간의 역사와 함께했죠. 자본주의가 문제가 되는 건 그 이윤추구가 무절제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절제한 이윤추구는 바로 그 프로테스탄트 윤리 정신이 사라졌기 때문이라고 베버는 지적합니다. 자본주의가 처음 시작되었을 때에는 종교적 공동체인 섹트가 있었습니다. 섹트는 사람들이 모여서 신앙생활을 하는 중심적 터전이었고, 개인은 섹트로써 자신의 신용을 대외적으로 증명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고도화, 개인주의, 도시화 등으로 인해 섹트는 급속도로 없어졌습니다. 자본주의가 자기 스스로를 제어하던 윤리적 터전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종교적 윤리로 발전한 자본주의는 섹트의 쇠퇴와 함께 계산만이 남으며 급속히 타락하게 되었습니다. 베버는 종교윤리가 상실된 자본주의는 끝없는 타락의 길로 빠질 것이며 “영혼 없는 전문가”를 양산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2. 세계의 합리화 베버는 근대 사회가 무엇보다도 탈주술화로 특징지어진다고 말했습니다. 근대의 탈주술화란 근대세계가 이성을 초월하여 중세를 지배하던 신의 원리에서 벗어나 이성의 힘으로 합리화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베버가 볼 때 근대세계의 합리화는 두 가지 차원에서 진행되었는데 첫째가 가치의 영역들이 구분된 것, 둘째가 자본주의의 발전과 맞물려 사회가 관료적·제도적으로 발전한 것입니다. 첫째, 가치 영역의 구분이란 모든 가치를 통합하던 신의 권위가 사라지고 과학, 도덕, 법, 종교, 예술 등이 모두 각자의 영역에서 각자의 가치를 추구하게 된 상태를 말합니다. 베버는 이를 문화적 분화(cultural differentiation)라고 말하며 더 이상 이러한 가치들은 화해 불가능하므로 근대는 가치다원주의에 이를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둘째, 탈주술화가 낳은 합리화는 자본주의의 합리화를 낳았습니다. 우리는 자본주의가 이윤 극대화를 하는 데에 정확한 계산을 적용하면서 조직을 체계화시키고 노동 효율을 극대화시킨 것을 자본주의적 합리성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이익을 극대화하는 데 기여했을 뿐만 아니라, 근대 국가의 행정 조직에도 파고들었고, 이내 사회 곳곳으로 침투하였습니다. 더불어 베버는 이러한 극단적 합리화가 오히려 비인간화를 초래하면서 운명적으로 비합리성을 길러낸다고 말합니다. 이윤추구가 목적이 되고, 이를 위해 이성을 도구화시키는 삶의 방식이 오히려 비합리적이라는 뜻입니다.
3. 목적과 수단이 일치하는 합리성 베버는 이미 사회의 가치가 너무 분화된 버린 탓에 자본주의적 합리성에 물든 근대를 돌이킬 수 없을 것이며 이를 우리의 운명, 즉 빠져나올 수 없는 ‘철장’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고 자유를 박탈당한 채 절망하고 있자는 뜻이 아닙니다. 베버가 볼 때 철장에 갇힌 우리의 현실을 직시하고, 새로운 삶의 방식을 찾는 것이 자유를 되찾는 길이었습니다. 곧, 우리의 자유는 철장을 벗어나려는 비현실적인 소망을 버리고 합리적인 목적과 이에 부합하는 합리적인 수단을 찾을 때 얻어진다는 것이죠. 그러므로 베버는 개인들이 자신이 설정한 목적과 수단에 대해 스스로 책임지는 책임윤리를 말하기도 했던 것입니다. 자본주의가 초래한 비극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개인이 더 강력한 합리성으로 무장하여 자유를 찾으라고 말한 베버. 현실의 문제를 해결할 책임을 구조나 집단이 아닌 개인에게 돌림으로써 많은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베버는 개인이 집단에게 책임을 전가해버릴 위험성을 인지했기 때문에 자유를 쟁취할 합리성의 주체로서 개인을 지목했던 것입니다.
4. 카리스마적 지도자와 바이마르 헌법 제 48조 개인의 주체성을 강조한 것에서도 알 수 있듯 베버는 니체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베버의 카리스마적 지도자 개념도 상당 부분 니체의 위버멘쉬와 맞닿아 있죠, 가치가 분화된 사회에서 각각 다른 개인들을 통합하여 국가가 지향할 점을 결단하고 이끌어갈 수 있는 이가 카리스마적 지도자입니다. 베버는 카리스마적 리더십을 ‘전통주의, 공식적인 법적-합리적 권위와 관료적 규칙들과 단절할 수 있는 상징적 변화 및 제도와 법을 만들 수 있는 초일상적인(extraordinary) 힘’으로 정의합니다. 카리스마적 지도자는 그냥 어디선가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의회 정치라는 시스템에서 길러진다는 것이 베버의 생각입니다. 각각 신념이 다른 수많은 군소정당들을 적절하게 규합하고 그 속에서 자기 권력을 쟁취해내어 지도자가 된 이는 카리스마적 리더십을 갖추고 있을 가능성이 크니까요. 이렇게 보면 베버가 바이마르 헌법 초안 위원회의 고문으로 있으면서 바이마르 헌법 제48조를 매우 강조했던 것도 이해가 됩니다. 이 문제의 조항은 다음과 같습니다. “대통령은 국가의 평화를 위해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할 수 있고 공공의 안전과 질서를 위해 필요한 수단을 동원할 수 있었다.” 독일에서는 히틀러가 이 조항을 악용해 권력을 잡아 논란이 되었고, 우리나라 또한 이 조항을 따와서 문제가 되었었죠. 김만권 선생님께서 영화 ‘변호인’을 적극 추천해주셔서 저도 어젯밤에 보고 왔습니다. 영화가 끝나고도 여운이 한참 동안 가시질 않았었는데 송강호의 외침이 특히 머릿속을 맴도네요. ‘국가란 국민입니다!’ 카리스마적 지도자가 독재자로 변질되었던 역사, 독재자의 딸이 그 자신 역시 독재자가 되어 자기의 입으로 약속했던 국민 행복을 가장 거스르고 있는 오늘을 생각하니 베버의 카리스마적 지도자에 대한 의심이 생깁니다. 카리스마적 지도자가 국가가 국민이라는 것을 잊지 않는다면 괜찮은 문제일까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글: 자원활동가 김슬기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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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으로 이해하는 정치사상 - 근대편 | [고전으로 이해하는 정치사상-근대편] 6강, 근대의 개인은 진정 주체적인가? - 니체 | 기라 | 2013.12.2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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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강, 한 강 지나오다 보니 벌써 여섯 번째 시간이네요. 김만권 선생님의 강의를 들을수록 정치사상을 더 넓고, 깊게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마 어렵고 멀게만 느꼈던 정치철학을 선생님께서 쉽고 재밌게 가르쳐주셔서 흥미가 붙은 거겠죠. 김만권 선생님은 느티나무에 혜성처럼 등장한 인기강사라고 불리시는데, 저도 이제 선생님의 그 타이틀 앞에 겸허히 고개를 숙이고 박수를 보내게 돼요. 매 수업의 첫머리에는 지난 시간의 내용을 잠깐 짚어봅니다. 원래는 수강생들이 써냈던 질문을 선생님께서 답변해주시는 방식으로 진행되는데, 오늘은 근래 큰 화제가 되고 있는 ‘안녕들 하십니까’로 칸트를 생각해보았습니다. 우리들의 안녕을 묻는 대자보 행렬들이 바로 칸트가 말했던 ‘이성의 공적 사용’이죠. 덕분에 최근 들어 깊은 회의감에 빠져 있던 선생님께서는 한 주 동안 즐거우셨다고 합니다.^^
1.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 1844-1900) 선생님께서는 니체를 기분 나쁜 사람이라고 소개하셨습니다. ‘너네 바보지? 생각도 없지? 내가 하는 말도 못 알아듣겠지?’라고 말하는 사람이라고요. 실제로 니체는 천재였습니다. 24살에 이미 교수로 채용되었고, ‘아포리아’라고 하는 새로운 글쓰기의 형태와 ‘계보학’이라는 새로운 연구방법론을 개발하였습니다. 그것도 대충 만든 게 아니어서 ‘아포리아’는 누구든 한 번 쯤은 시도해보고 싶게 하는 매력적인 글쓰기이고, ‘계보학’ 역시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진리에 대해 다시 되돌아볼 수 있게 하는 뛰어난 방법론이라 합니다. 이쯤 되면 우리 같은 범인들은 열등감과 질투가 샘솟지 않나요? 게다가 저는 니체가 교수가 되었다는 바로 그 스물 네 살의 마지막 한 달을 보내고 있거든요. ‘니체는 벌써 이 때 교수를 하고 있었구나... 난 뭐하고 산 걸까...’라는 생각이 절로 들더라고요. 그러나 천재는 불행하다고 하던가요? 니체는 평생을 편두통과 안질환에 시달렸고, 매독에 걸리기도 하고, 심지어 마지막 10년 동안엔 심각한 정신병을 앓았다고 합니다. 게다가 언제나 유명해지기를 바랐으나 딱 죽는 그 날부터 유명해졌다죠. 생전에는 학계로부터 무시당하고, 종교계와 도덕주의자들로부터 혹독한 비판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물론 니체는 이후 철학계와 문학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지금은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철학자로서 평가받고 있습니다.
2. 자신을 망각한 근대의 개인 우리는 원자의, 원자적 혼돈의 시대에 살고 있다. (...) 모든 인간질서의 목적은 인간의 생각을 혼란스럽게 만들어 삶을 깨닫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반시대적 고찰> 계몽, 이성, 자율성으로 상징되는 근대를 살았던 사상가들은 두 가지 전제를 놓고 ‘개인’을 가정합니다. 첫째는 모든 개인이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이 있고, 그 결정에 따라 행위하고 책임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외부의 제약 없이 자유롭다면 개인은 창조적으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해 자아를 실현하고 궁극적으로 사회 발전에 기여할 것이라는 것이고요. 그러나 니체는 그 가정을 반박합니다. 니체는 어릴 적부터 ‘개인이 진정 주체적인가’라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10대에 벌써 자서전을 몇 편씩 썼던 니체는 ‘나는 내가 어떻게 내가 되었나,’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많은 고민하기도 했고요. 그런 니체가 확신을 가진 하나가 있다면 바로 스스로의 힘으로 자기 삶을 결정하는 활력 있는 삶이야말로 진정한 삶이라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니체가 보기에 근대의 인간들은 공동체와의 깊은 관계 속에서 살아가던 고대인들과 달리 파편화되어 있었습니다. 이는 기독교를 필두로 모든 사회적 구조나 제도들이 진리라는 이름 아래 개인들이 진정할 삶을 영위하지 못하도록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절망적인 근대의 상황은 물론, 그 상황으로 인해 자기 자신이 되는 법을 자기가 잊어버렸다는 사실조차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3. 기독교 비판 신은 죽었다. 신은 죽은 채로 남아있다. 그리고 우리가 그를 죽였다. 그러나 그의 그림자는 여전히 어둠 속에 드리워져 있다. -<즐거운 학문> 개신교 목사의 아들이었던 니체는 신의 죽음을 선언하고야 맙니다. 앞서 말했듯이 니체는 기독교가 개인이 진정한 삶을 깨닫는 것을 막고 근대를 혼탁하게 하는 일등공신이라 생각했습니다. 기독교는 육체는 영혼보다, 본능과 열정은 이성과 합리성보다 열등한 것으로 여기도록 가르칩니다. 니체가 볼 때 인간에는 디오니소스적인 면과 플라톤적인 면이 있어 이것이 조화롭게 맞물려 돌아가야 하는데 기독교는 오로지 플라톤적인 면만을 강조하였던 것이죠. 또한 신의 진리라는 이름 아래 기독교는 이 지상의 삶이 피상적이고 가공적이고 환상적이며 오류로 가득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오늘은 찰나일 뿐이고 현실 세계는 너무 사소하니 영원의 세계인 내세를 중시해야 한다고요. 이러한 세계관은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세상을 열등한 것으로 만들어버립니다. 니체는 ‘그리스도교가 인간 스스로 지상의 삶을 가치 없는 것이라고 여기게 하는 노예의 도덕을 만들어내고 있다’고 말합니다. 4. 너 자신이 되어라 비록 우리의 미래가 희망을 위한 어떤 근거를 주지 않는다 할지라도, 우리가 확연히 이곳에 지금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 우리가 우리의 법과 기준을 따라 살아가는 가장 강력한 동기가 되어야 한다. (...) 우리는 우리의 존재에 대하여 우리 자신에게 책임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반시대적 고찰> 근대의 개인들은 기독교와 개인을 기만하는 각종 사회적 장치들에 의해 짜여진 삶을 살고 있습니다. 니체는 지금 당신이 행하고, 생각하고, 바라는 것 모두가 당신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우린 모두 속고 있는 것이고, 세상이 시킨 대로 행하고, 생각하고, 바라고 있을 뿐인 것이지요. 그러니까 정신을 차리고 진정한 나를 찾아 ‘다른 시간이 아닌 오늘을 살라’는 것이 니체의 주장입니다. 오히려 삶의 유한성을 원동력으로 삼고 자신만의 도덕, 자신만의 정의, 자신만의 삶의 기준을 찾을 것을 요구하는 것이죠. '너 자신이 되어라!' 음, 니체가 말하는 삶의 태도가 자기계발서의 한 구절 같은 것은 제 기분 탓인가요...^^; 삶은 위대한 중요성을 가진 드물고 고립된 순간들과 수없이 많은 쉼표(자신의 삶과 사회에 책임 없이 살아가려는 수많은 대중)로 이루어진다. (...) 사랑, 봄, 모든 아름다운 멜로디, 산, 달, 바다, 이 모든 것들이 한 번은 우리에게 말을 건다. 한 번이라도 자신들을 말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면 말이다. 대개의 사람들은 전혀 그런 순간을 갖지 못하는데, 대부분의 이들에게 실제 삶이란 심포니에서 쉼표이고 막간이기 때문이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그러나 니체는 또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러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죠. 오로지 소수의 인간만이 진정한 삶을 깨달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오늘에 책임을 지고, 자신만의 기준으로 삶을 실천하는 극소수의 천재들만이 자기 삶의 주인이 되고, 교향곡에서 의미 있는 소리를 낼 수 있습니다. 저는 극소수의 천재는 아닌 것 같아요, 니체가 저를 봤다면 '야, 이 쉼표야!'라고 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러나 저와 같이 평범한 대중에 속해있다고 생각되시는 분들, 기분 나쁠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결국 니체는 자기 자신만의 기준을 세우라고 했잖아요. 저는 니체에게 이렇게 대답해주겠습니다. '쉼표 없이 교향곡이 가능할 거 같아?'
5. 초인(Übermensch) 차라투스트라의 몰락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 나는 사랑하노라. 몰락하는 자로서가 아니라면 달리 살줄을 모르는 사람들을. 그런 자들이야 말로 저기 저 편으로 건너가고 있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니체는 도덕을 지배자들이 민중, 피지배자를 통제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보고, 여기에 머무르지 않고 인간 본연의 모습을 찾은 이상적인 사람을 '초인'이라고 말했습니다. 초인은 첫째로 기존의 형이상학을 믿지 않으며, 둘째로 인간으로서 삶의 몰락을 두려워하지 않고, 셋째로 ‘너희는 마땅히 해야 한다’와 맞서는 사람입니다. 여기에 맞서기 위해서는 정신이 3단계를 통해 변하는 과정이 필요한데, 니체는 이를 무거운 짐을 지고 사막을 달려야 하는 낙타(1단계), 왜 사막을 힘들게 가야하는지에 의문을 품고 자신의 자유를 쟁취한 사자(2단계), 그리고 마지막으로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는, 순진무구한 놀이하는 어린 아이(3단계)에 비유합니다. 그리고 니체는 이러한 초인의 모습을 차라투스트라를 통해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차라투스트라는 10년 동안 자신의 기준을 찾기 위해 수련한 뒤 마침내 사회의 형이상학을 거부하는 선지자가 되어 ‘나 너희들에게 위버멘쉬를 가르치노라’고 기존의 행복, 이성, 덕, 정의, 연민에 대한 경멸을 연설합니다. 대중들은 차라투스트라를 비웃지만 그는 초인답게, 굴하지 않고 자신을 비웃는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 다시 자신의 깨달음을 이야기합니다.
니체는 세상이 바뀌지 않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대중들이 차라투스트라를 비웃어댔다는 대목에서 알 수 있듯 대중과 그 대중들이 구성하고 있는 세계는 늘 그대로 반복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신이 되는 법을 찾은 소수의 인간에 속한다면, 우리는 '나'의 가치와 실제로 세상이 돌아가는 모습 사이에 늘 존재하는 괴리로부터 좌절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또한 그것을 긍정하고 다시 삶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말한 것도 니체였습니다. 개인이 진정한 주체가 되고자 한다면 엄청난 용기와 도전으로 최선을 다해 오늘을 살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그 도전과 용기를 희생이라 생각하지 말고, 그 자체로서 삶의 의미로 삼으라는 것이 니체의 가르침입니다.
니체 강의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생각에 휩싸여 까만 창밖을 바라보았습니다.
글 : 자원활동가 김슬기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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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으로 이해하는 정치사상 - 근대편 | [고전으로 이해하는 정치사상-근대편] 5강, 계몽이란 무엇인가? 칸트, 푸코 | 이나단 | 2013.12.1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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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임마누엘 칸트(1724~1804) 내가 여러 차례 또 오랜 시간 성찰하면 할수록 더욱 새롭고 더욱 높아지는 경탄과 경외심으로 나의 마음을 가득 채우는 두 가지가 있다. 이 두가지란, 내 머리 위에 있는 별이 빛나는 하늘과 내 마음 안에 있는 도덕 법칙이다. - 칸트의 묘비명에 새겨진 말 늦은 시간까지 겨울비가 그치지 않았던 월요일 저녁. 느티나무 강의실은 칸트와 푸코의 사상에 대해 배우고자 하는 학생들로 가득찼습니다. 김만권 선생님은 칸트의 묘비명에 새겨져 있다는 유명한 문장으로 강의를 시작했습니다. 칸트는 모든 도덕을 나의 내부로부터 비롯된다고 보았습니다. 이러한 칸트 도덕의 특이성을 ‘자기입법’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도덕원칙은 자기 자신이 세운다는 것입니다. 칸트의 도덕은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헤겔이 강조하는 인륜과 비슷한) 도덕과 다릅니다. 칸트가 말하는 도덕은 영어로 morals 로 표현되는데, 이는 개인이 세운 도덕원칙에 따른 행위를 의미합니다. 이런 점에서 칸트는 헤겔과 대비하여 형이상학적 도덕주의자로 불리기도 합니다. 칸트의 계몽에 관한 신념은 당대에 대한 비판적 태도로 이해되어 푸코를 비롯한 일부 후기 구조주의 철학과 데리다 등에 스며들었습니다. 프랑스 지식인 전통으로 이어진 것이지요. 또한, 도덕에 대한 그의 신념은 독일의 프랑크푸르트학파와 영미계열의 롤스주의자들이 이어받았다고 합니다. 전해듣기만 해도, 당대 철학에 미친 칸트의 영향력이 얼마나 강력했는지 느껴질 정도입니다.
<임마누엘 칸트 / 출처: wikipedia> 2.계몽이란 무엇인가?(1784년) 계몽주의를 어떤 학문적인 조류보다는 정치적인 철학 사조로 하나의 사회운동이라 이해하는 편이 낫습니다. 이성이 삶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사회운동입니다. ‘계몽이란 무엇인가’를 발간하고 5년이 지나, 프랑스혁명이 일어납니다. 칸트는 자신이 진정으로 믿었던 계몽의 힘이 혁명으로 나타난 것에 만족했을까요? 그 답은 ‘아니다.’입니다. 칸트가 말하는 계몽이란 스스로 타자에게 이성적 숙고와 판단을 대신 부탁하는 미성숙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타자의 도움 없이 자기 자신이 이해한 것들을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것을 미성숙하다고 말합니다. 만약 이런 미성숙의 원인이 이해의 결핍이 아니라, 타자의 안내 없이 그것을 사용할 해결책과 용기의 결핍에서 온 것이라면, 미성숙은 자기책임이라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사람들이 자신의 삶에 미성숙한 채로 남아있는 것은 게으름과 용기부족 때문입니다. 칸트는 이렇게 주문합니다. Sapere aude!! (Dare to be wise!!) 너 스스로 이해한 것을 사용할 수 있는 용기를 가져라 흥미롭게도, 칸트는 미성숙을 해결하기 위한 계몽 - 정신 성숙은 집단적으로 진행될 때 실현가능하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이성의 사적사용과 구별되는 이성의 공적사용을 강조하고 더불어 이를 위한 토대로서 자유의 필요성을 역설합니다. 이성의 공적 사용이란, 한 사람이 지식인으로서 독자 대중 앞에서 이성을 사용하는 경우를 말합니다. 인간이 이성을 위해 이성을 사용할 때, 이런 이성의 사용은 자유롭고 공적인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이성의 보편적이고, 자유로운, 공적 사용이 겹쳐질 때 계몽이 존재합니다. 이 조건은 집단적 계몽에 필요한 조건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반대로 왜 계몽이 집단적으로 오는가를 이해할 수 있는 근거가 됩니다. 이성의 사용은 나를 위해서만 쓰는 것이 아니고, 타인과의 공존을 위해서 사용하는 이성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치 이성의 본질은 도덕적 측면에 있다고 강조하며, 상호이해, 의사소통을 위한 이성을 제시했던 하버마스의 도덕적 이성과 상통하는 듯합니다. 효율을 따지고, 자기 이익을 계산하는 도구적 이성과는 다른 것이지요. ‘과감하게 도덕적이 되어라. 남과 공존할 수 있는 길이고, 공동체 안에서 살 수 있는 길이다 싶으면 과감하게 행동하라.’라고 외치는 칸트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기존의 계몽은 과학화 내지 계산에 치중했다면, 칸트는 도덕에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성의 공적사용은 현실에서 어떻게 드러날까요? 칸트는 [계몽이란 무엇인가?]에서 공적사안에 대해서 지식인들이 글을 쓸 것을 주문합니다. 왜, 글쓰기일까요? 글쓰기가 자신의 직책을 떠나 공공사에 대해 객관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 때문입니다. 또, 글이 공개되면 그 일관성을 지키기 위해서 투쟁하게 된다. 이러한 글쓰기는 논의, 토론의 객관적인 기초가 된다. 따라서, 법과 지도자의 역할로서 이성의 공적사용이 항상 자유롭도록 노력하는 것을 강조합니다. 사상의 자유와 더불어 출판의 자유 모두를 보장해주는 것이지요. 실제로 공중에게 자유가 허용된다면 계몽은 거의 확실하게 이루어질 수 잇다. 거대한 대중의 지도자로 선출된 자들내에서도 그들 전체를 위해 사고하는 몇몇 사람들이 항상 있다. 미성숙의 굴레를 한번에 벗어버린 지도자들은 개인의 가치에 대해 합리적으로 존중하는 정신과 모든 인간이 그들 스스로 생각할 의무에 대해 존중하는 정신을 퍼뜨릴 것이기 때문이다.
3. 칸트의 문제점? 칸트는 어느 시기에 이르면 미성숙에서 벗어난 계몽된 지도자가 나올 것이고, 그 지도자가 합리성이 지배하는 권력을 구축해낼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때까지 지식인들이 해야할 일은 묵묵히 세상의 잘못된 일을 글을 쓰며 비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출판의 자유, 혹은 시민의 자유가 제한될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칸트는 ‘모든 것을 자유롭게 하면, 오히려 떠드는 이가 없다.’ ‘억압되어야 자유의 소중함을 안다’는 식의 논리를 폅니다. 어둠의 시대의 자유는 더 빛난다는 이야기입니다. 인간에게 자유롭게 생각할 수 있는 시민적 자유가 주어졌을 때, 때로는 이런 자유가 인간이 생각하는 일에 장애가 되기도 한다고 봅니다. 이것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시민의 자유가 넘쳐날 때, 오히려 시민은 공공사에 무관심하게 되는 현상이 일어난다는 토크빌의 지적과 유사합니다. 생각하는 일에 대한 억압이 강할수록 인간은 더욱더 생각하려는 의지를 강하게 키웁니다. 칸트의 ‘문제점’이라고까지 말하는데 무리가 있겠습니다만, 칸트는 혁명으로는 계몽을 달성할 수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에 따르면, 공중은 계몽을 아주 서서히 달성할 수 잇을 뿐이고, 혁명은 생각하는 것에 있어 진정한 개혁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즉, 칸트는 계몽이 정신의 점진적 성숙이지 혁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혁명이 할 수 있는 일은 물리적으로 존재하던 억압적인 권력을 대체하는 새로운 편견의 등장이며 새로운 속박일 뿐이라고 지적합니다. 칸트의 입장에서 보자면, 사회의 모든 문제는 대중이 생각하지 않을 때 생겨납니다. 진정으로 사회를 바꾸고자 할 때, 우리가 해야할 첫 번째 일은 대중이 생각하도록 만드는 일이며, 계몽이란 생각하는 대중을 형성하는 일이라는 의미입니다.
4. 푸코가 말하는 계몽이란? 칸트는 계몽을 인간성이 어떠한 권위에도 복종하지 않고 자신의 이성을 사용하게 될 순간으로 묘사합니다. 바로, 비판이 필요한 순간입니다. 무엇을 알 수 있는지 무엇을 행해야 하는지, 무엇을 바라야 하는지를 결정하기 위해서 이성을 정당하게 사용할 수 있는 조건을 정의해주는 것이 비판의 역할이기 때문이다. 정당하지 않은 이성의 사용은 허상을 따라 교조주의와 타율성을 불러일으킵니다. 반면 이성의 자율성이 보장되는 것은 이성의 원리 내에서 이성의 정당한 사용이 분명하게 정의될 때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비판은 계몽 속에서 성숙된 이성의 안내서이다. 뒤집어 말하면, 계몽이란 비판의 시대이다. 이러한 비판은 파괴를 위한 비판이 아니라, 현재 우리를 위해 존재합니다. 푸코에 따르면, 계몽은 어떤 교조적 요소에 충실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시대를 끝없이 비판하려는 철학적 에토스를 지속적으로 재활성화하는 일이 계몽이라고 주장합니다. 계몽의 관심은 어제도 미래도 아닌 우리가 살아가는 오늘 현재에 있다는 것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당대에 대한 비판적 태도를 끊임없이 견지하라는 뜻이겠지요. 나아가, 잘못된 지식이 생산하는 거짓된 권력을 비판하라는 것입니다. 이는 계보학을 통해 ‘유럽중심적인 사고’와 그 배후의 권력구조를 철저히 비판했던 그의 생애 연관이 깊습니다. 푸코는 우리가 미성숙의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한 시대를 살고 있다면, 우리 스스로 살아가고 있는 시대에 대한 비판적 의식을 결여한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미성숙한 시대는 동시대를 향해 질문하지 않는 우리 자신들의 책임입니다. 후기 구조주의자로 평가되는 푸코가 왜 비판을 강조했을까요? 진정한 저항의 가능성은 인간이 현재에 대한 비판적 태도를 견지하지 않는 한 생겨날 수 없다는데 그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무비판적 태도가 구조에 대한 저항의 가능성을 없앨 뿐 아니라 때로는 억압조차 자율성이라 믿게 만든다고 우려했던 것은 아닐까요? 푸코는 우리가 진정 변화를 원한다면,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에 대해 비판적 태도를 갖는 일에서부터 시작하라고 제안하고 있습니다. <질문>
글 : 자원활동가 이난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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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으로 이해하는 정치사상 - 근대편 | [고전으로 이해하는 정치사상-근대편] 4강, 인간 사회는 왜 불평등해졌을까? 루소 | 기라 | 2013.12.5 | ||||
[고전으로 이해하는 정치사상-근대편] 4강(12/02) 인간의 사회는 어떻게 불평등해졌을까? 루소 <사회불평등의 기원> 강의소개 보기 >> 클릭 1강 후기 보기 >>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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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2013년에도 12월이 찾아왔습니다. 12월은 한 해를 마무리 짓는 달인데다가 크리스마스까지 있어서 왠지 설레는 달이죠. 하지만 12월은 눈으로 하얗게 빛나는 만큼이나 추워서, 낮은 곳에 있는 이웃들에게는 더 힘든 때이기도 합니다. 성냥팔이 소녀가 화목한 가정의 푸짐한 저녁 만찬을 부러워하며 길거리에서 죽어갔던 것처럼 겨울의 낭만은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지지 않습니다.
오늘 공부할 루소도 12월의 성냥팔이 소녀들을 보며 많이 안타까워했을 인물입니다. 왜 인간 사회가 이토록 불평등하게 되었는지 학문적으로도 많은 연구를 했고요. 그런 루소의 이론은 결국 프랑스혁명의 도화선이 되기도 했습니다.
1. 장 자크 루소(Jean-jacques Rousseau)
루소는 스위스 제네바에서 가난한 시계 수리공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루소는 자신의 고향인 제네바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저서마다 ‘장 자크 루소, 제네바의 시민(citoyen de Geneve)’이라고 적었다고 합니다. 또 루소의 아버지는 가난했지만 근면하고 검소한 삶을 살았고, 책 읽기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고 해요. 루소 역시 그런 아버지를 존경하며 평생동안 가난에 연연하지 않은 채 학문에 열중하여 위대한 사상가가 될 수 있었죠.
김만권 선생님은 루소를 찌질이라고 지적하셨는데요, 정말로 루소는 자아도취가 대단한 나르시스트였습니다. 자서전을 정말 많이 썼고, 특히 <고백>이라는 저서에서는 ‘난 그 누구와도 다른 삶을 살고 있다’며 자신이 얼마나 특별한 존재인지를 장황하게 설명하죠. 그러나 알고 보면 이 책 내용의 ⅓이 거짓말이라는 거! 루소의 사상이 인간의 감정적인 면을 중시했던 것처럼 루소 그 자신도 참 인간적인 사람이었던 듯 합니다.
2. 자연에서 사회로: 불평등의 시작
자연은 인간을 행복하고 선하게 만들었으나
사회는 인간을 타락시키고 불행하게 만든다.
- <장 자크 심판자로서의 루소: 대화> 중에서
루소는 사회가 형성되기 이전의 자연 상태에서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였다고 말합니다. 루소가 말하는 자연 상태는 인간들이 뿔뿔이 흩어져 독립적으로 살아가는 상태입니다. 자연에서는 사회적 관계라는 것이 고작해야 가족으로 한정되고, 당연히 불평등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때의 인간이 갖는 자연적 감정은 자기 보존과 연민입니다. 특히 연민(compassion)은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으로, 루소는 당대의 많은 철학자들이 이성과 인간, 감성과 동물을 엮어 사고했던 것과는 대조적인 이론을 펼치고 있죠. 다른 동물, 다른 동포들이 고통을 당하는 것을 보지 못하는 연민의 감정은 자연 상태의 자유로운 인간을 선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인간들이 어떤 우연한 이유에 모여 살기 시작하면서 함께 여가를 즐기는 문화가 나타났고, 이것이 바로 불평등의 시작입니다. 참 특이하죠? 어떻게 여가가 불평등을 초래했다는 건지 이해가 되시나요?
루소는 여가활동에서 각자가 남에게 인정과 주목을 받고 싶어 하는 욕망을 갖게 되면서 자기애(amour propre)와 허영(vanity)이 탄생했다고 봅니다. 다른 이들과의 비교를 통해 자신의 존재감을 확립하면서 인간은 남들보다 우월하기를 바라고, 적어도 그런 척이라도 하게 됩니다. 루소는 이러한 욕망이 불평등의 씨앗이라고 말합니다.
3. 예술과 과학에 대한 혐오
방탕한 이여, 당신은 모른다 -<학문예술론>
예술과 과학은 우리에게 인류 문명의 꽃, 인간 진보의 극치로 여겨집니다. 루소가 살던 시대의 계몽주의자들에게도 이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술과 과학이 타락의 정수라고 주장하며 충격을 안겨준 이가 있었으니 바로 루소입니다. 여가에서 발생한 자기애가 불평등의 근원이라고 본 루소가 여가의 산물인 예술과 과학을 증오했던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합니다.
루소는 천문학은 미신에서, 물리학은 과도한 호기심에서, 기하학은 계산에 밝은 인간들의 탐욕에서 온 것이라며 비난합니다. 과학을 사랑하시거나 전공하신 분들은 발끈하실 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참 발칙하면서도 기발한 생각이 아닌가요?
사치와 연관이 있는 예술은 더 싫어했습니다. 나태와 허영심이 사치를 부르고, 사치는 도덕적 타락을 부른다고 생각해서, 사치하게 만드는 예술이란 공동체를 나약하게 만들 뿐이라고 주장했어요. 루소에게 예술은 공동체의 방어에 필요한 용기를 형성하는 데 아무런 기여를 하지 못하는 실속 없는 것일 뿐인 것이죠. 이런 맥락에서 루소는 아테네가 아닌, 강인한 공동체였던 스파르타를 이상적인 도시로 꼽기도 합니다.
이러니 볼테르가 제네바에 대규모 극장을 지었을 때 루소가 엄청난 비난을 퍼붓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개인적으로는 예술도, 과학도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이고 적정한 선에서 누린다면 큰 문제가 발생하지 않다고 생각했었는데 루소의 말을 들으니 과연 사치가 없는 예술이 가능했을까, (자연과 인간에 대한) 연민을 파괴하지 않는 과학이 가능했을까 의문이 듭니다.
4. 재산권: 불평등의 안정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으나 사슬에 묶여있다. -<사회계약론>
인간 능력이 발달하고, 인간 정신이 진보하여 불평등이 강화되었다면 재산권은 불평등을 최종적으로 안정시키는 역할을 했습니다.
인류의 자산은 모두가 공유해야만 할 것이지만 어느 순간 개인의 소유, 즉 재산권이 인정되기 시작했습니다. 남을 지배하는 즐거움을 맛본 사람들은 자신의 힘을 이용하여 폭력과 약탈을 일삼으며 강해지고, 부유해져갔습니다. 그렇게 자기애의 욕망과 재산권 분쟁이 휩쓸고 간 인간 사회에는 불평등 구조가 고착되었고, 이러한 구조가 인간의 악덕을 길러냅니다.
5. 정치공동체: 불평등의 치유
우리로 하여금 공평한 법을 만들게 하라 -<사회계약론>
그렇다면 불평등을 해결할 방법이 있을까요? 불평등한 사회 구조에 대안은 있는 걸까요?
루소는 '일반의지에 입각한 법이 있는 새로운 정치 공동체'를 제시합니다. 여기서 일반의지(general will)란 한 마디로 공동체의 공동선을 향한 의지입니다. 일반의지는 개개 의지들의 총합인 전체 의지와는 다른 것으로 일반의지가 법에 잘 표현될 수만 있다면 그 사회는 어느 정도의 사회·경제적 평등을 보장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입법자가 lawmaker가 아니라 lawgiver여야 한다는 점입니다. lawmaker는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의 법을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사익에 따라 법을 만드는 반면, lawgiver는 일반의지에 따라 법을 만들어주고 나면 그 사회를 떠나야 합니다. 많은 근대 국가들의 법은 전문적 lawmaker가 만든 것이어서 복잡하고, 시민들의 접근이 어려워 문제가 됩니다.
참고로 루소가 <에밀>에서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한 것은 인간 본연의 감성에 충실하란 의미로, 사회계약론과 상호보완적인 개념이라고 합니다. 일반의지에 따른 법이 연민을 품은 개인들을 이끌고 가는 사회가 바로 루소가 생각한 이상사회인가 봅니다.
글 : 자원활동가 김슬기라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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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과 사건으로 보는 한국근현대사Ⅱ | [한국근현대사] 9강, 금정굴과 철원평화전망대 답사 | 김혜수 | 2013.12.3 | ||||
1. 고양시 금정굴 답사 희생자에 대한 묵념으로 시작된 우리의 금정굴 답사. 금을 캐던 곳이 문을 닫아 폐광굴이 되고, 끔찍한 일이 벌어지는 장소로 사용되는 동안 그곳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단촐 하고 허름해 보이는 그 곳은 보이는 것보다 훨씬 크고 무거운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고양금정굴 사건 요약* 고양 금정굴 사건은 6ㆍ26전쟁 직후 북한군을 위해 부역했거나 부역자 가족이라는 이유로 1950년 10월 9일부터 31일까지 경찰이 고양ㆍ파주지역 주민을 일산서구 탄현동 황룡산의 금정굴에서 총살·암매장한 사건이다. 1993년 문제를 제기한 유족회와 시민단체가 1995년 9~10월 사건 현장에서 153구의 유해를 발굴했지만 안치할 곳이 없어 16년 간 서울대병원이 연구실 창고에 보관해 왔다. 서울대 의대의 1차 감정에서 희생자가 최소 153명이고, 약 10%는 여성에 10대의 유골도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현장에서 당시의 이야기를 들으니 불과 몇 십 년 전의 일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충격적이었다. 그들의 이야기는 책이나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과거였던 것이다. 그 시대의 사람들이라고해서 목숨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닌데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 싶은 생각이 계속 맴돌았다. 그리고 또 하나 “금정굴은 복 받은 곳 이예요” 라는 고양 금정굴 유족회 관계자분의 말씀도 기억에 남는데, 얼마나 많은 우리의 과거사가 밝혀지지 않고 보상을 받기가 힘들었으면, 무엇보다 우리의 관심을 받지 못했으면 그렇게 끔찍한 일이 일어난 곳을 복 받았다라고 까지 표현을 했을까 싶어 그저 먹먹하기만 하였다. 그래도 긍정적인 것은 고양시에서 이 사건에 계속적인 관심을 가지고 관련 조례안을 만드는 등의 노력을 하고 있으며, 희생자 유족들이 기금을 조성해 인권평화재단을 발족하려는 준비를 시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앞으로 겪어야할 어려움도 무수하겠지만, 금정굴이 더 이상 뒷산에 작고 허름한 굴이 아니라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알아주는 것만으로도 큰 위로가 되지 않을까. 2. 점심식사, 동두천 기지촌
금정굴에서의 일정이 길어져 조금 늦게 동두천 기치촌을 향하였다. 그 곳에서 아주 맛있는 부대찌개를 먹고 철원으로 Go Go~!!! 시간이 부족하여 거리를 돌아 볼 수는 없었지만, 버스 안에서도 이신철 교수님의 깨알 같은 설명은 계속되었다. 많은 이야기를 해주셨지만, 너무 강렬하여 잊을 수 없는 것은 바로, ‘윤금이 사건’ 휴, 인터넷으로 뒤늦게 찾아본 그 이야기는 정말, 표현하는 것을 피하고 싶을 만큼 끔찍하고 아픈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가 있는 곳이 바로 그곳이었다.
3. 철원 평화전망대
<군인 '동생'이 직접 버스에 타서 인원수를 확인하고 있는 모습> 강원도 철원군 중부전선의 비무장지대와 북한지역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곳, ‘철원 평화전망대’ 그 곳을 오르는 동안 많은 철새들을 보며 시원한 바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그곳은 여유를 즐길 수 있는 마냥 자유로운 곳이 아니기에 참 대조적이었던 것 같다. 나는 이곳을 고등학교 때에도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마냥 신나서 소풍처럼 왔다만 간 기억도 새록새록 떠올랐다. 똑같은 장소가 그저 ‘소풍갔던 곳’으로 기억되기도 하고 ‘우리의 역사가 고스란히 묻혀있는 곳 그리고 계속 되고 있는 곳’으로 기억될 수도 있는 것은 역사에 대한 관심과 감수성의 차이인 것 같다. ‘역사감수성’을 갖게 해준 이번 수업이 답사가 정말 좋았다!
4. 월정역
*월정역 소개* 서울에서 원산까지 이어졌던 경원선의 간이역이었다. 신탄리역 다음 역으로, 남방한계선에 근접한 최북단에 위치해 있다. 현재는 폐역 상태다. 6·25전쟁 당시 월정리역에서 마지막 기적을 울렸던 객차잔해 일부분과 유엔군의 폭격으로 부숴진 인민군의 화물열차 골격이 보존되어 있다. 작고 아담한 월정역, 월정역에서 북쪽을 바라보면 농지가 보이는데 그곳은 정해진 시간에만 들어가서 농사를 지을 수 있다고 한다. 담벽(?)이 사라지고 농지를 마음껏 이용하고 월정역에 다시 기차가 달리는 날이 올 수 있을까? ‘철마는 달리고 싶다’라는 팻말이 대답을 해주는 것 같다. 5. 노동당사, 도피안사, 백마고지 *노동당사 소개* 1946년 초 북한 땅이었을 때 철원군 조선노동당에서 시공하여 그해 말에 완공한 러시아식 건물이다(그래서 벽이 굉장히 두껍게 지어졌다고). 6·25전쟁의 참화로 검게 그을린 3층 건물의 앞뒤엔 포탄과 총탄 자국이 촘촘하다. 8·15광복 후부터 6·25전쟁이 일어나기까지 공산치하에서 반공활동을 하던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잡혀 와서 고문과 무자비한 학살을 당하였다. 당사 뒤편에 설치된 방공호에서 사람의 유골과 실탄, 철사줄 등이 발견된 것으로 미루어 그때의 참상을 알 수 있다. 금정굴에서는 북한을 위해 부역했다고 죽이고, 노동당사에서는 반공활동 하던 사람들이 학살당하고... 정말 힘들어서 어떻게 살았는지 모르겠다. ‘산’것이 아니라, ‘견뎌’온 것은 아니었을까.
서태지와 아이들이 발해를 꿈꾸며 뮤직비디오를 찍었던 곳에서 함께 한 친구들이 공연을 보여주었다. 서태지 시대가 아니어서(?) 그런지 친구들의 공연이 더 즐겁고 예뻤던 것 같다. 이렇게 후손들이 그들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지금 해결할 수 있는 문제를 처리하고(금정굴유가족 분께서 이 일은 우리 대에서 끝내야한다고 했던 것과 같이), 문제가 만들어지지 않도록 지금 할 수 있는 역할을 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6. 저녁식사, 고석정 저녁의 고석정 모습을 살펴본 뒤 순두부찌개를 먹고, (배부르다고 하시면서도 다들 잘 드셨던...!ㅎㅎㅎ) 우리의 답사는... 끝나지 않았다. 버스에서 마이크를 전달 전달하며 서로의 소감을 나누고서야 그 어떤 답사보다 뿌듯한 일정을 마칠 수 있었다. 이신철교수님, 전보임간사님, 함께했던 모든 분들! 덕분에 아주 재미있게 유익하게 잘~다녀왔습니다.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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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시민정치학교Ⅱ – 민주주의의 새로운 실험, 생활정치 | [나의 시민 정치학교Ⅱ] 7강, 이제 지방선거 준비해볼까 - 워크숍 | 장경환 | 2013.12.2 | ||||
[나의 시민정치학교Ⅱ] 7강(11/26), 이제 지방선거 준비해볼까 - 워크숍 강의소개 보기 >> 클릭 1강 후기 보기 >> 클릭 2강 후기 보기 >> 클릭 3강 후기 보기 >> 클릭 4강 후기 보기 >> 클릭 5강 후기 보기 >> 클릭 6강 후기 보기 >> 클릭 처음 10월에 강의 시작할 때가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마지막 강의를 듣게 됐다. 매주 화요일 저녁으로 먹던 김밥도, 뻥튀기 접시도, 이젠 없을 거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허전하기도 했고 아직 생활정치라는 것에 대해 뭔가 그림을 잡은 것도 아닌데 마지막 강의를 들으려니 아쉽기도 했다. 이런 아쉽고 허전한 마음을 다잡고 강의에 집중했다. 이번 마지막 강의는 첫 번째 강의에서 생활정치에 대한 개괄적인 강의를 해주신 하승우 선생님이 마무리 강의를 해주셨다. 강의 시작부터 모두에게 질문을 던지셨다. 생활정치란 어떤 것인지 알 것 같나요? 강의를 통해 배운 점은 뭔가요? 답은 이미 지난 6번의 강의 속에 있었다. “개인적 의제들을 같이 해결하는 것이 바로 정치이다“ 이 강좌를 통해 배운 가장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 주민들은 소박한 것을 바란다. 하지만 사실상 선거에 들어가면 예산이 많이 들어가는 하드웨어적인 것들이 이슈다 된다. 이런 시대에서 주민들이 바라는 소박한 필요들을 뭉쳐서 이슈로 만들어 내는 것이 생활정치라는 생각도 했다. 선생님께선 우리들이 누군가 의제를 주면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우리가 주체가 되어서 의제를 정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셨다. 최근에 있었던 녹생당의 정책콘서트를 예로 들어주셨다. 녹색도시, 일자리, 노동 등 각 분야에서 마인드 맵핑을 통해 의제들을 떠올리는 것이 의미있다고 생각했다. 이 설명들을 통해 ‘내가 뭘 원하는가?’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을 해봐야겠다는 과제를 받은 것 같았다. 하지만 시민이 주체가 돼서 의제를 만드는 게 끝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셨다. 생활의 의제들을 통해 만든 좋은 공약들도 막상 선거가 끝나면 외면당하는 게 현실이기 때문이다. 지난 대선 당시 새누리당의 피켓들을 보면 화려함의 극치였다. ‘등록금 부담 절반으로!’, ‘고교 무상의무교육 시대!’, ‘취업 스팩 타파!’, ‘어르신 임플란트도 건강보험으로!’ 지금도 이런 화려한 것들이 현재는 정부가 앞장서서 막아서는 아이러니한 현실이지 않은가. 기업이라면 상품을 환불하겠지만, 정치에선 현실적으로 환불이 안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의제만 만들고 끝나는 게 아니라 현실적으로 어떻게 의제들을 실현시킬 수 있는지에 대한 생각을 더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씀하셨다. 현재 미국에서 정치인의 공약을 추적하는 ‘폴리티 팩트’라는 사이트와 ‘투명사회를 위한 정보공개센터’라는 사이트를 소개해주셨다. 강의는 30분정도 진행되었다. 나머지 시간은 조별로 생활의제를 정하는 시간을 가졌다. 조별로 전지에 생활의제등을 정리하고 발표했다. 마을, 보육, 골목상권, 청년모임 등 다양한 분야의 의제들을 정리했다. 그리고 이런 의제들을 어떻게 실현시킬지에 대해서 토의했고 마무리로 하승우 선생님께서 이런 의제들에 대한 현실에 대한 설명을 더해주셨다. 오늘의 강의는 정말 뚜렷한 결론을 가졌다. “의제도 중요하지만 의제를 실현할 방법을 생각해야 한다. 원하는 걸 얘기하는 게 아니라 내가 그 과정의 주체가 되는 것이 중요하다.” 강의는 여기서 끝났고 수강생 각자의 소감을 나누고 시민정치학교는 종강을 했다. 나는 개인적으로 아무 것도 모른 채 막연하게 배우고 싶은 마음에 강의를 듣게 됐는데 한 주도 빠지지 않고 나온 7주의 시간동안 생활정치의 힘, 공동체, 마을, 예산 등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었고 현재 현실에서 많이 적용해보기도 했기에 나에겐 더 유익한 시간이었던 것 같다. <참여자들의 강의 소감>
글 : 자원활동가 장경환 / 편집 : 아카데미느티나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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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과 사건으로 보는 한국근현대사Ⅱ | [한국근현대사] 8강, 재벌의 탄생과 근로기준법 : 전태일과 정주영, 이병철 | 김혜수 | 2013.11.30 | ||||
1. 1960년대의 이해 - 1961 학생회담 등 통일운동 고양 1963.1.3. 민정당 결성(민주당 신·구파) 1964 제 1차 인혁당 사건 1965.6.22. 한일협정 1964.9. 베트남 파병 ◆ 베트남전과 한국군 파병 1954.1.28. 이승만, 주한 유엔군 사령관 존 헐에게 한국군 1개 사단 파병 제안 1956.10.23. 남베트남 국민투표실시, 베트남공화국 수립, 남베트남 무장 봉기(베트콩)와 북의 지원 1964.5.9. 미국, 25개국에 남베트남 지원 호소 서한 발송 1964.9.11. 1차 파병 1965.3.16. 2차 파병, 건설지원단(비둘기부대) 1965.10.9. 3차 파병, 전투병력 파병 시작 1966.2 <미국대사 브라운 국무부에 서한> ‘…유일한 참전국인 우리 미국보다 인구 비율로 따지면 2~3배 더 많은 것이다. ’ 1966.2.23. 한미합의의사록 서명, 브라운 각서 발송 군사부문 지원 : 한국국 현대화를 위한 장비 제공, 파병 장비와 일체의 경비 부담, 베트남 주둔 한국군 지원을 위해 C-54 수송기 넉 대 한국 공군에 제공 경제부문 지원 : 미군과 남베트남군의 물자 중 결정된 품목과 기타 소요되는 품목을 최대한 한국에서 구매, 한국 기업의 남베트남 진출 기회와 용역사업에 참가할 기회를 제공, 한국의 경제 개발을 위한 차관 추가 제공-> 경제발전 1966.4.11. 백마부대 부산 출발 1968.2.12. 청룡 1중대, 퐁니·퐁넛 마을 민간인 70여명 학살 1968.3.16. 미라이 학살 -> 여기서 한국정부의 이중성을 보여주고 있다. 1971. 라오스 영토 내 호치민 통로 봉쇄 작전 개시, 라오스 중립 선언했지만 호치민 통로 묵인, 남베트남군 작전 실패. 미군 비밀 폭격 1973.3.23. 한국군 미군과 함께 철수 1975.4.30. 사이공 함락. 남베트남 패망 파병누계 : 약 8년 간 31만 2853명 참전 전과 : 사살 4만 1401명, 포로 4633명, 귀순 2482명 피해 : 4960명, 부상 1만 962명 <무엇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자유우방 수호(도미노 방지) 경제성장 동력(미국 한국군 병사에게 2억3천6백만 달러 지불, 군수물자 판매 등 GDP 5배 성장) 군사적 이익 : 한미 동맹관계 강화, 한국군 현대화 베트남 민간인 학살 2. 위와 같은 시대상황을 바탕으로 지금의 ‘재벌’이 ‘정당한 방식’으로 성장 할 수 없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정경유착’과 ‘노동착취’ 그 양 끝에 있던 사람이 전태일과 정주영, 이병철 이었던 것이다. 당시 경제성장 주요/동력 이슈는 원조경제, 경제개발계획, 한일협정, 베트남전쟁, 인력수출, 전태일, 경부고속도로(수출주도형 경제성장)로 설명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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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으로 이해하는 정치사상 - 근대편 | [고전으로 이해하는 정치사상-근대편] 3강, 어떻게 재산의 사적 소유는 정당화됐을까? 로크의 <통치론> | 이나단 | 2013.11.29 | ||||
[고전으로 이해하는 정치사상-근대편] 3강(11/25) 어떻게 재산의 사적 소유는 정당화됐을까? 로크의 <통치론> 강의소개 보기 >> 클릭 1강 후기 보기 >>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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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아카데미느티나무 수강생 여러분~ 고전으로 이해하는 근대정치사상 세 번째 강의 후기를 맡은 이나단입니다. 김만권 선생님께서는 로크의 저작 <통치론>을 설명해주시면서 강의를 열었습니다. <통치론>에는 시민 저항권과 더불어 또 하나의 과격한 사상을 담겨 있다고 합니다. 바로 국왕살해(Regicide)에 관한 것입니다. 이는 법위에 존재하는 전제군주를 살해하라는 메시지입니다. 로크는 법의 테두리 밖에 있는 자(=왕)를 죽이는 것은 불법이 아니라는 논리로 국왕살해를 정당화하고 있습니다. 입헌군주국인 영국에서 국왕살해를 내세우는 <통치론>이 당시 얼마나 파격적이었는지를 가늠해볼 수 있겠지요? 로크는 영국 내전과 네덜란드 망명생활 등 여러 우여곡절을 겪은 후, 1689년 <통치론>을 정식으로 발간하였습니다.
▲ 존 로크 (John Locke, 1632~ 1704)
1. 로크가 말한 '신뢰' 김만권 선생님은 근대정치학의 기반을 두 가지로 대별하였습니다. 하나는 로크의 전통을 따른 ‘신뢰(trust)’이고, 다른 하나는 홉스의 전통 아래에 있는 ‘두려움(fear)’입니다. 홉스는 자연상태에서 정치사회로 넘어올 때, 평판(이성)에 기초한 신약과 폭력이 요구된다고 주장했습니다. 반면, 로크는 자연 상태에서 사람들이 모두 합리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서로를 신뢰한다고 가정합니다. 로크에 따르면, 폭력없이도 사회를 성립할 수 있게 됩니다. 게임이론의 대표적인 사례, ‘죄수의 딜레마’ 상황도 서로를 신뢰할 때 상호이득이 되는 결과를 얻습니다. 어떤 학자는 서로 신뢰하는 사람들의 모임을 사회적 자본이라고 표현했다고 합니다. 신뢰를 기반으로 한 시민문화가 더 나은 사회, 정치, 문화를 만들어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인간과 인간사이의 신뢰를 가장 중요한 기초로 놓은 최초의 정치학자는 바로 로크이다. 사회적 자본으로서 ‘신뢰’를 강조하는 것도 로크의 흐름에서 등장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함께 감상한 마종기님의 ‘우화의 강’ 한 구절이 떠오릅니다. ‘큰 강의 시작과 끝은 어차피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물결을 항상 맑게 고집하는 사람과 친하고 싶다...
2. '사유재산'을 강조한 로크 로크 사상 중 ‘소유(所有)’ 또는 ‘사유(私有)’에 대해 집중하는 본 강의가 최근의 경향을 따른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 인간이 어떻게 소유하게 되었는가, 우리가 무엇을 사유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파고들다보면 ‘우리가 어떻게 이 시스템을 구축하게 되었는가’ 라는 또 다른 질문과 만나게 됩니다. 애초에 공유되던 자연 상태의 여러 자원을 어떻게 사유할 수 있게 되었는지를 파악해보고는 것이 근대국가의 성립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겠지요? 소유에 관한 이론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그것은 로크에서 출발하여 아담스미스와 마르크스에 의해 일반화된 노동가치설과 집단의지동의설(사회동의설)입니다. 먼저, 집단의지동의설에 의하면, 나의 소유와 타인의 소유가 정당하게 양립될 수 있을 때에 사적 소유가 가능하다고 보는 입장입니다. 타자들이 집단의 의지로 나의 소유를 인정해주는 것이지요. 나 자신도 집단의 일원으로서 타인의 소유를 인정해줍니다. 타인의 인정이 소유에 있어 핵심입니다. ‘사적 소유는 한 집단의 정치적 승인을 요구하는 사항’이라는 칸트의 입장과 일맥상통합니다.
한편, 로크는 사유재산의 근거로 ‘노동’을 지목했습니다. 노동이야말로 사유물과 공유물 간의 구별을 낳는다는 것이지요. 인간의 몸에서 나온 노동, 그 손에서 나온 작업은 당연히 그 자신만의 것이라 할 수 있다는 논리입니다. 이에 따르면, 자연의 대상물에 노동을 가한 주체인 내가 그 노동의 결과물도 소유할 수 있습니다. 즉, 소유권은 나의 노동으로부터 나오는 것이지, 사회적 인정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정치 사회가 존재하기 전부터 가질 수 있는 권리, 전정치적(前-, pre-political) 권리가 사적 소유권이라는 것입니다.
3. 소유의 단서 두 가지 인간이 공동체를 결성하고 스스로 정부의 지배를 받아들이는 가장 중요한 목적은 그들의 재산을 보존하기 위함이다. 이렇듯 로크는 정치사회 성립의 이유 중 가장 주요한 것으로 재산의 보호를 꼽습니다. 노동가치설에 따라 노동이 순수하게 내 몸에서 나오고, 이를 통해 재산이 형성되므로 각자의 몸이 결국 재산입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신체적 자유를 침해받지 않는 것이 곧 사유재산을 보장받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재산이 자신의 몸이나 다름없다는 점에서 재산권은 정치사회가 보호해야 할 중요한 개인의 권리가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크는 ‘사적소유’의 권리에 두 가지 단서를 제시합니다. 먼저, 다른 사람들이 소유하기에 충분한 공유물이 남아있는 한, 노동한 자가 그의 노동이 부여된 것에 대한 권리를 갖는다는 것입니다. 유럽인들이 아메리카 대륙에 진출하던 당시, 로크는 신이 무한한 토지를 인간에게 주었다고 생각했습니다. 타인들이 소유하기에 충분한 양의 토지(공유물)이 있기에 무한한 사적 소유가 가능하리라 믿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천연자원이 유한하다는 사실을 누구나 알고있는 현재 상황에서 이러한 단서조항은 혁명적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소유할 수 있는 충분한 자원이 남아있지 않는다면, 사유재산권은 조건부 권리라는 의미입니다. 둘째로, 로크가 사적소유를 제한했다고 보는 또 하나의 근거는 ‘부패의 단서’입니다. 고기나 곡물을 창고에 쌓아두고 오랜 시간이 지나면 썩습니다. 이와 달리, 화폐는 장기적으로 혹은 반영구적으로 보관할 수 있습니다. 로크는 토지에서 생겨난 생산물을 영구적으로 보관할 수 없다면 인간들이 토지개간을 적극적으로 할 유인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땅에서 얻은 이익을부패하지 않는 형태로 보관할 수 있을 때, 토지생산성이 향상된다고 보았습니다. 저는 이런 상상을 해보았습니다. 우리나라 최고의 갑부가, 그가 가진 모든 재산을 쌀가마니로 가지고 있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창고의 규모는 어떨지... 쌀은 얼마나 오래 보관할지... ‘화폐가 생겨나서 어마어마한 것들을 감추어주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4. 재산과 정치참여 공식석상에서 쓰이는 ‘신사, 숙녀 여러분~ Ladies and Gentlemen.’이라는 표현은 일정 수준의 재산과 이에 따른 제반 권리를 가진 이들을 지칭하는 것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로크가 개인의 사적소유권을 정당화시키려한 목적은 어느 정도 자신의 재산을 가진 인민의 정치참여에 정당성을 부여하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로크가 주장한 사유재산권은 정치적으로 자유로운 인간이 가져야 할 필수조건이었고, 이 때문에 어떤 외부의 침해나 간섭으로부터 사유재산을 보호해야 한다고 강조한 것입니다. 그러나 로크 이후로, 그가 강조한 재산권의 의미가 퇴색되었습니다. 정치적 의사표현의 목적이 아니라, 경제적 권리로서 재산권이 지나치게 중시되었습니다. 또, 근대이후의 자유주의 흐름속에서 정치적 무관심마저도 개인의 선택으로 존중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습니다. 로크를 위시한 근대 초기의 학자들이 왜 그리도 재산권 보호를 강조했는지에 대한 이유를 현대사회에서 잊은 것이지요. 개인의 정치참여라는 역할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사유재산의 보호라는 일차적인 권리에만 집중하는 듯합니다. 마지막으로 김만권 선생님은 복지와 경제민주화에 대한 이야기를 간단히 나눠주었습니다. 동시에 소유는 단순히 무엇을 가지냐의 문제를 넘어서 우리를 얼마나 더 자유롭고 평등한 존재로 만드느냐의 문제라는 말씀을 전해주셨습니다. 소유, 재산권을 경제적인 관점이 아니라 정치적인 관점으로 바라보자는 것입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정치참여의 밑바탕이 되는 소유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배우는 시간이었습니다. (끝)
<마음에 와 닿았던 글>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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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과 사건으로 보는 한국근현대사Ⅱ | [한국근현대사] 7강, 대통령과 재야의 대통령 : 박정희와 장준하 | 김혜수 | 2013.11.2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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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과 재야의 대통령 : 박정희와 장준하
최근 다시금 주목 받고 있는(?) 박정희와 그와 반대편에 서있었던 장준하에 대한 연혁을 살펴보며, 그들의 삶과 그 시대에 대해 배울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
1. 박정희 '박정희'에 대해서는 이미 많이 알고 계실텐데요~ 3개국에서 군사훈련을 받았던것, 쿠데타를 모의하던 과정 등 제가 새롭게 알게된 내용위주로 간단하게 정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문경/만주군관학교 -> 일본육사 3학년에 편입 -> 만주군 보병에 소위로 부임 1946 5.6 조선경비사관학교 제 2기생 재학 중 “10월 인민 항쟁” 발발 남노당 이재복이 박정희를 주목, 군사훈련경험/인맥/경상도출신/능력이 돋보였기 때문. 1949 박정희 무기징역(국방경비법 위반)-> 현역복귀, 육군8기생을 만나게 됨. 1952.5.29. 장면, 이종찬 -> 미대사관에 쿠테타 계획을 타진 1959.2 송요찬 – 부정선거를 명령 1960 박정희 – 쿠데타를 도모했으나 4.19로 인해 무산 1961 4.15 해병대 단독 쿠데타 모의 이후 몇 차례 준비했고 결국 5.16일에 실행하게 된다. - 박정희의 연혁을 통해 살펴 본 내용 외의 것 (전 왜 이런 내용이 더 기억에 남을까요....?) 정인숙 사건, 한일협정, 베트남 전쟁, 문익환
2. 장준하
- 독립운동가, 언론인, 정치가 - <사상계>를 출판 * 이는 당시 자유당 정권을 신랄하게 규탄하며 4·19 혁명의 단초가 되었으며, 대학생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통일운동의 중심세력=학생)
중요 연혁 (+ 수업시간에 다뤘던) 1944 학병 자원입대 1945 광복군에 편입 1963 이후 야당의 길을 걷게 됨 -> 제 7대 신민당 소속 국회의원당선 제 3공화국 당시, 한일회담 반대와 박정희 비판 내용(출처 : 위키백과) 대선에서 장준하는 일본 제국주의 군대에 있었던 사람이 대통령이 되는 것을 참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장준하는 박정희 정권의 한일 협정을 일본 제국주의 군인 출신이 침략자이며 전범자 집단인 일본 자민당과 매국협상을 하는 것으로 판단하고, 1964년 4월호를 긴급 임시증간호로 내놓았다. '한일회담의 제문제'는 한일회담을 반대하는 이 나라 지식층의 의사를 비판적으로 담아낸 한일회담 반대진영의 교과서가 됐다. 이어서 1965년 7월에 '신(新) 을사조약의 해부' 를 또다시 긴급 증간호로 발행해 한일회담 반대진영의 이론적 교두보가 됐다. 1966년 사카린 밀수 사건이 일어났다. 이 과정에서 집권층과 삼성의 이병철 사이에 유착이 있었다는 정보가 새어 나왔고, 야당과 대학생들이 전국적인 규탄대회를 열었다. 1966년 10월26일 민중당 주최 '특정재벌 밀수진상 폭로 및 규탄 국민대회' 에 연사로 참석했다. 장준하는 규탄대회에서 재벌총수와 정부 고위층 사이에 오간 내용을 폭로하면서 “우리나라 밀수 왕초는 바로 박정희”라고 비판하였다. 이어 "존슨 대통령이 방한하는 것은 박정희 씨가 잘났다고 보러 오는 것이 아니라 한국청년의 피가 더 필요해서 오는 것" 이라는 발언도 주목을 받게 됐다. 장준하는 박정희와 재벌들을 신랄하게 비판하다가, 박정희 밀수왕초 발언 등이 문제되어 구속, 한 달간 수감됐다가 1966년 12월 보석으로 석방되었다. 그 뒤 1967년 2월의 공판에서는 징역 6월을 선고받았다.
- 박정희의 반대편에 서있던 인물에 대한 탐구와 함께 더 생각해 볼 문제 1965 한일협정 이후 동아시아에 대한 개념 : 한·중·일+미국 중심으로 바뀌게 되었고 북한은 제외된 점
이상으로 후기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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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시민정치학교Ⅱ – 민주주의의 새로운 실험, 생활정치 | [나의 시민 정치학교Ⅱ] 6강, 나는 마을에서 논다 –마을공동체와 협동조합의 가능성 | 미요이 | 2013.11.23 | ||||
[나의 시민정치학교Ⅱ] 6강(11/19), 나는 마을에서 논다 - 마을공동체와 협동조합의 가능성 강의소개 보기 >> 클릭 1강 후기 보기 >> 클릭 2강 후기 보기 >> 클릭 3강 후기 보기 >> 클릭 4강 후기 보기 >> 클릭 5강 후기 보기 >> 클릭 1. 성미산마을에 대한 소개 성미산은 서울시 마포구에 위치한 작은 야산이다. 성미산은 해발 70미터밖에 되지 않는 비교적 작은 산으로, 마을 어디에서 출발하든 어른 걸음으로 5분, 아이 걸음으로 십여 분이면 오를 수 있는 곳이다. 이 성미산 자락에는 성산동, 망원동, 합정동, 연남동, 그리고 서교동이라는 행정구역상의 동네들이 있다. 우리가 ‘성미산 마을’이라고 부르는 공간은 이 성미산 자락에 위치해 있다.
하지만 ‘마을’이라는 단어는 현대 도시인들에게 낯설다. 우리의 기억에 마을 하면 떠오르는 것들은 한적한 농촌이나 영화 속에만 머무르는 골목길 사람들뿐이 없기 때문이다. 마하트마 간디는 그의 저서 <마을이 세계를 구한다>에서 이런 말을 했다. “현재 세계에는 두 부류의 사상이 있다. 하나는 세계를 도시로 나누려는 것이고, 하나는 마을들로 나누려는 것이다. 마을문명과 도시문명은 전적으로 다르다. 하나는 기계와 산업화에 의존하고, 다른 하나는 수공업에 의존한다. 우리는 후자를 택하고자 한다.” 그에 따르면 도시와 마을은 서로 반대되는 개념이기 때문에 공존할 수 없다. 그리고 지난 역사 속에서 한국의 서울은 자본을 가진 사람들의 이해관계에 의해 철저하게 도시화되어왔다. 90년대를 전후해서 도시에서 태어난 학생들이 마을을 기억할 수 없는 이유이다. 성미산마을은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공동체이다. 사람들은 아이들을 행복하게 키우고 싶었고, ‘이웃사촌’이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을 만큼의 관계를 만들고 싶었고, 체벌이나 과잉 경쟁으로부터 안전한 학교를 원했고, 하고 싶은 문화생활을 생활공간에서 누리고 싶었고, 문화를 소비하는 사람이 아니라 만들어내는 ‘주인공’이 되고 싶었고, 의식주와 관련된 소비생활을 좀 더 윤리적으로 하고 싶었다. 자신이 배운 바를 실천하는 삶을 나 혼자가 아닌 이웃들과 함께 하고 싶었던 것이다. 성미산마을은 이러한 정체성을 가진 ‘관계’에 기반을 둔 공간이다. 이는 마을 사람들이, 그리고 이 마을을 보는 마을 바깥의 사람들이 부여한 정체성이다. 성미산마을의 시작은 생각보다 거창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마을 운동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모이자!’라고 해서 모인 주민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1994년, 아이들에게 한글과 영어를 일방적으로 가르치기 보다는 자연 속에서 마음껏 뛰어놀게 해주고 싶었던 부모들이 의기투합해 공동육아 협동조합 ‘우리 어린이집’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듬해 추가로 ‘날으는 어린이집’이 만들어지면서 입소문이 났고, 공동육아에 뜻을 둔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모이게 되었다. 이후 공동육아운동은 꾸준히 발전하여 2002년 ‘참나무 어린이집’이, 2005년에는 ‘성미산 어린이집’이 추가로 설립되었다. 공동육아로 시작한 공동체는 아이들이 크면서 대안교육에까지 관심을 넓혀가기 시작했고, 이후 부모들이 확장된 ‘마을 공동체 형성’의 필요성을 느끼면서 마을극장, 두레생협, 공동주거 등의 새로운 시도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현재 이 공동체에 소속감을 가지고 있는 가구 수는 500~700여개에 달하고, 그 안에서 약 70여개의 커뮤니티들이 운영되고 있다.
아는 사람들끼리의 친목 모임정도의 성격을 가졌던 공동체가 ‘마을’이라는 정체성을 갖게 되는 과정에는 수많은 걸림돌과 사람들을 모이게 하는 계기들이 있었다. 2001년 서울시는 성미산에 배수지를 만든다는 계획을 발표하였다. 하지만 이 지역의 유일한 녹지인 성미산은 주민들의 휴식, 산책, 운동 공간이며, 어린이집 아이들이 매일같이 오르는 놀이터이자 교육장이었다. 생태론에 기반을 둔 공동육아협동조합이나 두레생활협동조합은 당연히 이에 반대하였고, 환경단체의 도움을 받아 ‘성미산개발 저지를 위한 대책위원회’를 조직하여 본격적인 반대운동을 펼쳤다. 마침내 서울시가 기습적인 벌목을 시작하자 사람들은 사수대를 결성하여 물리적으로 개발을 저지하였고, 촛불집회나 음악축제 등 다양한 문화활동과 항의 전화 걸기, 시청 앞 집회, 공청회 등을 조직하여 2003년 서울시의 공사 유보 결정을 이끌어내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를 기념하는 마을축제를 열었다. 함께 어려움을 이겨냈던 ‘공유된 경험’을 바탕으로 사람들은 본격적으로 목적의식을 가지고 ‘마을 만들기’를 추진하기 시작했다. 2004년에는 이러한 주민자치운동의 필요성을 자각하면서 이를 주도할 단체로 ‘참여와 자치를 위한 마포연대’가 결성되었고, 2005년에는 정부의 시범사업으로 소출력 마을 방송국 ‘마포FM’이 만들어졌다. 생협 조합원이 만든 유기농 반찬가게 ‘동네 부엌’, 협동조합으로 운영되는 자동차 정비소 ‘차병원’등도 이 때 만들어졌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2004년 9월 마을학교를 표방한 ‘성미산학교’가 개교하였고, 이듬해 건물이 완공되어 초·중·고등학교 신입생을 받았다. 2. 마을기업에 대한 이해 선생님은 마을기업을 ‘출자와 자원조달’, ‘운영과 마을고용’, ‘이용과 확보된 시장’, 이 세가지로 나누어 설명해주셨다. 우선 마을기업은 주민들이 십시일반으로 출자한 돈에서부터 시작한다. 관심이 많은 사람은 많은 구좌를 신청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조금만 신청해 돈을 출자하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돈을 주고 끝나는 기부와는 다르다. (투자의 개념이기 때문에) 조합원이 곧 출자자이고, 출자자가 곧 주인이 되는 구조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두 번째로 마을기업은 ‘하고 싶은 사람’이 운영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자기가 사는 마을 안에서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아이를 키우는 엄마나 노인들에게는 큰 메리트일 것이다. 한국의 열악한 노동환경 때문에 일을 하지 않고 가정을 돌보는 주부들이나 은퇴자분들이 활동적으로 일할 수 있는 마을기업의 역할에 사람들이 주목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마을기업은 ‘확보된 시장’을 가지고 있다. 조합원들이 곧 소비자이고, 마을에 사는 이웃들이다. 그들은 또한 가게에 어느 정도 출자를 한 주인이기도 하기 때문에, 깐깐한 소비자가 되기보다는 너그러운 마음으로 기업의 발전을 바라는 고정적이고 안정적인 소비자층이 된다. 등가교환과 경쟁, 마케팅 공략 등이 떠오르는 일반 기업의 이미지와는 다른 점이다. 3. 수업에서 나온 질문들 서울시는 과연 지속적인 마을 만들기 사업을 펼칠 수 있을 것인가? 지금 시행되고 있는 서울시의 마을 만들기 지원 사업은 어떻게 운영되고 있으며, 그 안에서의 어려움은 없을까? 시간과 자원이 풍부한 중산층 이상 사람들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소외된 사람들까지도 마을 만들기 사업에 참여할 수 있게 하는 아이디어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성미산마을이 가진 특수성과 보편성에는 무엇이 있을까? 4. 간단한 소감 변화를 만들어내려는 시도는 거창하지도, 화려하지도 않았다. ‘세계평화’나 ‘사회개혁’과 같은 거창한 구호로부터 출발하지도 않았다. 그저 자신의 아이를 자신의 가치관에 따라 합리적인 조건에서 기르고자 한 노력으로부터 모든 것이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공간이 공권력에 의해 불합리하게 침해당할 위기에 처하자 온몸을 다해 지켜내었다. 이러한 시도와 행동은 지금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주류적 문화와 방식이 옳지 않다는 문제의식으로부터 나왔다. 누군가가 기존의 틀을 깨고 새로운 상상을 할 때 이미 변화는 시작되었다. 어쩌면 사회 변화는 항상 가장 가까운 곳으로부터, 가장 기본적인 원칙을 세우려고 할 때 시작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사회학도로서 항상 큰 그림과 구조를 보려고 하고, 책으로부터 익힌 일상적이지 않은 개념들을 쓰려다보니 글에는 거품이 끼어있다. 이 단계를 넘어서면 나도 ‘지켜보고 감상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몸을 직접 움직여 행동을 할 수 있을까? 내가 몸담은 학교, 학과에서조차 작게나마 변화를 만들어내는 것은 망설여진다. 내가 망설이는 이유는 ‘아직 살만하기 때문’일 것이다. 세상의 부조리함과 직접적으로 마주하기에 내 주변에는 생각보다 많은 보호막과 핑계들이 있다. 선생님은 분명 희망찬 마을 만들기에 대해서 말씀하셨지만, 내 상황이 상황인지라 주저리주저리 개인적으로 했던 생각들을 몇 자 적어보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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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으로 이해하는 정치사상 - 근대편 | [고전정치사상] 2강, 보충자료 | 느티나무 | 2013.11.23 | ||||
김만권 선생님께서 2강 보충자료로 보내주신 내용을 올립니다. -------------------- 지난 참여연대 강의에서 로크는 정치권력에서 자연권에서 행사하는 권리를 양도하는 게 아니라 권리행사에서 빚어지는 불편을 없애기 위해 일정 정도의 권위와 권력을 부여하여 문제를 해결한다고 설명했었지요. 그랬더니 고등학교에서 법과 윤리를 가르치시는 선생님께서 교과서엔 홉스 모든 권리 양도, 로크 부분 양도, 루소는 그런 거 없음이라고 나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 역시도 고등학교 다닐 때 그렇게 배운 듯 한데요, 홉스에서는 "모든 사적 판단의 권리"는 포기하고 주권에게 객관적 3자로서 모든 판단권리를 넘겨주지만 "자기 보존의 권리" 그 자체는 양도되지 않습니다. 다만 모든 사적 판단을 포기함으로써 자기보존의 권리가 자연스럽게 행사되지 않다가 국가가 이 자기보존의 권리를 직접적으로 위반하면(예를 들어, "네 목숨을 끊어라"라고 명령하는 행위) 즉각적으로 이 권리가 행사되며 나아가 사적 판단의 권리까지 회수됩니다. 특히 여기서 '자기보존'은 계약을 맺게 되는 이유라 '자기보존의 권리'는 정치권위에게도 양도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적판단을 행사하여' 실행하는 '자기보존의 권리'는 '자연권'이라 저항은 항상 시민권이 아닌 자연권으로서 행사됩니다. 이로 인해 시민혁명, 시민저항 따위는 홉스의 체계 내에서는 존재하지 않지요. 로크에선 자연 상태에서 개인들이 다른 개인들에게 right to judge and punish를 갖는데요, 이 때 개인적으로 행사되는 이 권리로 인해 생겨나는 불편함(로크는 불편함이라고 표현한다)으로 인해 이 불편을 해소하기 정부에 power to judge and punish를 줘서 해결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원문을 읽어보시면 아시겠지만 정치권력과 관련된 부분에서 right to punish란 식의 표현을 거의 쓰지 않습니다. 심지어 개인들과 관련된 부분에서도 right to punish만큼 power to punish란 표현을 자주 씁니다.(아래 웹사이트는 스탠포드에서 로크 이론을 소개해놓은 곳인데요 개괄적으로 보기에 괜찮습니다. 이 소개문에서도 정부의 punishment와 관련하여 right이란 표현이 거의 등장하지 않고 오히려 power란 단어가 자주 쓰이고 있답니다. http://plato.stanford.edu/entries/locke-political/#LocPun.) 자연상태에서 갖는 개인들이 타자에 대해 갖는 권리는 right으로 쓰지만, 정부가 무슨 right을 양도받아 갖는다는 표현은 거의 없고 이 불편을 해소하기 위해 정부가 개인 대신 power를 지닌다는 식으로 표현하지요. (여기서 right과 power의 차이를 물으신다면, 로크가 지지하는 천부적 권리는 반드시 보호되고 지켜져야 할 것이지만, power, 특히 정치권력은 상황에 따라 그 모습이 달라질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하시면 됩니다). 이 부분은 사실 해석의 여지가 있습니다. 주로 옛날 문헌이기는 하지만 일부 학자들은 로크가 right to judge and punish를 넘겨준다고 실제로 해석하기도 하고, 반면 또다른 일부 학자들은 권리가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정치권위에게 이를 해결할 power를 부여하여 정치적으로 개인이 갖는 이 천부적 자연권이 행사될 필요가 없게 만든다고 봅니다. 사실상 양도되는 권리란 없다는 것으로 특히 이 입장은" 천부적 자연권은 계약상에서 시민의 권리 일부분이라 시민들은 계약을 위반한 왕을 암살하거나 정부를 전복시킬 수 있는 권리를 갖는다"라는 해석과 일치하는데요,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사실상 개인이 개인에 대한 right to judge and punish는 유보되어 있지만, 개인이 자신의 정부나 왕을 향한 right to judge and punish는 전혀 유보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로크에겐 혁명과 저항권이 시민의 권리가 됩니다. 이런 복잡한 논리를 도식적으로 전부 양도, 일부 양도 식으로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하는 선생님들의 고충을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습니다. 더불어 저와 함께 수업하고 계시는 많은 학교 선생님들이 "아이들에게 오히려 혼란을 줄 수 있는 이 내용을 어떻게 절충시키라 말씀드릴까?" 저도 고민이 됩니다. 아이들에게 "교과서가 잘못된 거야 혹은 논란이 될만해"라고 말하면 오히려 부작용만 일으키는 것은 아닌지...선생님들께 속시원한 해답을 못드리는 것은 해석이 분분한 내용을 이것이다라고 찍어 말할 수 없는 학자의 입장 때문이고, 제가 교과서와는 다른 해석(제 입장에서는 오히려 더 영향력이 있다고 판단하는 최근의 해석)을 지지하기 때문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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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으로 이해하는 정치사상 - 근대편 | [고전으로 이해하는 정치사상-근대편] 2강, 근대 국가주권은 어떻게 탄생했을까? 홉스 | 이나단 | 2013.11.22 | ||||
[고전으로 이해하는 정치사상-근대편] 2강(11/18), 근대 국가주권은 어떻게 탄생했을까? 홉스 강의소개 보기 >> 클릭 1강 후기 보기 >> 클릭
△ <리바이어던>표지, '폭력을 독점하고 있는 가장 이성적인 집단'인 국가를 그림으로 보여주고 있다
0. 강의시작 2013년 11월 18일 첫눈이 내린 날, 느티나무 강의실에는 40여 명의 학생이 모였습니다. 김만권 선생님이 강의하는 ‘고전으로 이해하는 근대정치사상’ 두 번째 시간이었기 때문입니다. 김만권 선생님은 지난 시간에 수강생이 남긴 쪽지질문에 답을 해주면서 강의를 시작했습니다. 흥미로운 질문이 많았습니다. 이번 강좌에서 다루는 책을 모두 읽으셨는지, 또 그 책을 ‘고전’이라 할 수 있는지 등등. 김만권 선생님은 당황하지 않고(?), 답변을 해주었습니다. 선생님 말씀에 따르면, 홉스의 주저 [리바이어던]에는 근대국가주권은 어떻게 탄생하였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있다고 합니다. 실제로 [리바이어던] 원본은 4부로 이루어져 있는데, 보통 한국어 번역서는 1부와 2부까지 내용만 다루고 있답니다. 1부 ‘인간에 대하여’, 2부 ‘국가에 대하여’라는 타이틀이 달린 것을 보면, 홉스는 인간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국가를 설명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참고로 3부와 4부는 기독교국가와 신학적 해석에 대한 인간의 무지(암흑)을 다룬 내용이라고 합니다.
1. 홉스의 시대적 배경과 사상적 위치 홉스의 정치사상을 깊이 공부해보기 앞서, 자연인으로서 그가 살았던 시대배경을 알아보는 것도 중요하리라고 생각합니다. 마키아벨리와 유사하게, 신의 시대를 벗어나는 과도기로서 가치다원주의, 신념의 사유화 문제는 당시의 큰 이슈였습니다. 게다가 홉스는 내전(영국 시민전쟁)을 겪고 프랑스로 망명하는 등 역사적인 격동기를 보냈습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최초로 영역한 홉스는 ‘전쟁을 두려움, 공포에서 비롯된 것’ 이라고 지적하면서 자신의 탄생 역시 두려움과 관련짓습니다. 홉스의 사상을 이해할 때, 두려움 또는 공포는 중요한 단어인 것 같습니다. 영국의 시민전쟁 당시 의회파와 대립한 왕당파임에도 불구하고, 홉스는 로크, 루소와 더불어 대표적인 사회계약론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모든 권력의 유일한 정당성은 인민(the people)으로부터 나온다는 주장은 마키아벨리와 홉스가 가진 공통점입니다. 근대국가에서 오로지 인민만이 정당한 권력의 원천이 된다는 이야기는 ‘불안과 공포에 기반한 인민의 동의’를 전제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김만권 선생님은 ‘인민주권의 이론적 탄생’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습니다. 홉스의 이러한 발상은 로크의 시민정부, 루소의 인민주권이라는 이름으로 뻗어나간다고 합니다. 2. 사회계약론과 레비아탄 다시 말해, 홉스는 사회계약론으로 근대국가를 이론적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사회계약은 자연상태로부터 정치사회(국가)로 이행해 가는 과정을 정당화하는 일종의 이론적 도구인 것입니다. 여기서 자연의 상태란, 정치권위가 없는 아비규환의 상태를 의미하는데 홉스가 가설로서 만들어낸 상태입니다.(사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사회계약’이라는 것도 특정 시간, 장소에서 실제로 이루어진 ‘계약’은 아니지요.) 홉스가 이해한 인간의 모습을 따라가다보면, 자연상태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분쟁이 발생하였을 경우 이를 공정하게 해결하면서도 안정된 질서속에서 불안감없이 활동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국가와 계약을 맺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권리를 일부 양도합니다. 홉스는 국가를 상징하는 이미지로 ‘리바이어던’ 또는 ‘레비아탄’을 사용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바다괴물인 레비아탄은 고래, 용과 닮은 동물입니다. 왜 국가와 용의 이미지를 연결했을까요? 김만권 선생님은 홉스의 또다른 저작, [비히모스 – 1640~1660년 영국시민전쟁에 관한 대화]를 소개해주시면서, 근대정치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두 상징물을 알려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질서, 법의 지배’를 상징하는 바다괴물 ‘레비아탄’과 ‘아나키, 혼란, 혁명, 혁명에 가담한 인민’을 나타내는 육지괴물 ‘비히모스’입니다. 유대인 성경에 나오는 두 짐승의 싸움 이야기는 레비아탄의 승리로 끝이 납니다. 아무래도 혁명, 아나키에 상태에서 법의 지배 상태로 바꾸는... 즉, 혼란을 잠재우고, 질서를 잡아주는 국가(레비아탄)의 승리를 암시하는 듯합니다. 3. 시민의 권리없이 인간의 권리도 없다. 강의 후반부에 김만권 선생님은 ‘정치권위가 없는 상태(자연의 상태)’에서의 인간이 갖는 권리에 대해 이야기하셨습니다. 먼저 아래 지문을 살펴보시지요. 새로운 세계적 상황 때문에 수백만 명의 인간이 권리를 잃고 다시는 회복할 수 없어졌을 때, 우리는 권리를 가질 권리가 존재한다는 것과... 이 권리가 어떤 조직화된 공동체에 속할 권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평등하게 태어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동등한 권리를 상호보장하는 우리의 결정이 강력한 힘을 갖는 집단의 구성원으로서만 평등하게 된다. 우리의 정치적 삶은 우리가 조직을 통해 평등을 만들어낸다는 가정에 기대고 있다. - 한나 아렌트 권리를 가질 권리가 있다는 것, 그리고 그 권리는 특정한 공동체 내부에 속할 권리라는 아렌트의 말이 처음에는 쉽게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선생님은 정치권위가 있을 때, 비로소 권리가 존재한다는 말로 풀어주었습니다. 시민의 권리가 없다면 인간의 권리도 없다는 의미입니다. 난민, 미등록노동자, 재일동포 등 속해있는 국가가 없는 사람에게 ‘평등, 정의, 인권’이 주어지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국가없는 이들이 갖는 권리와 한 국가, 공동체, 정치적 권위 아래서 누리는 시민권은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시민권 없이는 인간으로서 어떤 보호도 받기 어려운 ‘현실’을 홉스의 정치사상 수업에서 절실하게 느꼈습니다. <질문>
<마음에 와 닿았던 문장>
글 : 자원활동가 이나단 / 편집 아카데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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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과 사건으로 보는 한국근현대사Ⅱ | [한국근현대사] 답사① 현대 정치의 뿌리를 찾아서 : 북촌 일원 | 느티나무 | 2013.11.16 | ||||
2013년 11월 9일 토요일 오전10시, 인물과 사건으로 보는 한국근현대사Ⅱ (현대 정치의 뿌리를 찾아서 : 북촌 일원)을 답사했습니다. 서울에서 볼 수 있는 가장 단풍이 아름다운 시기에 답사를 하게 되었는데요. 이신철교수님의 강의를 들으면서 <휘문고등학교 옛터> <송진우 집터> <김성수 고거> <여운형 집터> <홍증식 집터: 계동열성자대회> <건국준비위원회 터> <한규설 집터> <헌번재판소:박규수 집터> <수운회관> <건국빌딩>까지를 돌아보니 그 궤적을 이해하는데 수월했던것 같습니다. 답사에 함께 못하신 분들 참고하시라고, 아주 압축적으로 정리된 자료를 공유합니다^^ 지난 수업에서 잠시 공유했던 사진 구경도 제대로 하시라고 앨범도 공유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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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시민정치학교Ⅱ – 민주주의의 새로운 실험, 생활정치 | [나의 시민 정치학교Ⅱ] 5강, 우리 마을은 얼마인가 - 생활정치와 예산 | 장경환 | 2013.11.16 | ||||
강의를 처음 시작할 때 어떤 강의에 가장 흥미가 있는지에 대해서 얘기를 나눴던 기억이 있다. 그 때 나는 이번 강의인 예산에 대한 강의를 꼽았었다. 그리고 많은 수강생분들 또한 예산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최근 주민참여예산제도에 대한 소식을 여기저기서 듣고 있었지만 사실 예산에 대해서는 잘 몰랐었다. 그냥 정부에서 쓰는 돈 정도로만 생각했고 주민참여예산제도는 그냥 잘 아는 사람들만 하는 그런 건가 싶었다. 이번 강의는 좋은예산센터의 최인욱 사무국장님께서 강의를 해주셨는데, 전문가의 느낌이 물씬 풍기는 강의였다. 먼저 예산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셔서 ‘예산이란 무엇인가’를 주제로 강의를 해주셨다. 대학 수업에 온 것 같은 이론적인 강의였지만 예산에 대해 배우고 싶은 마음덕에 흥미있게 강의를 들을 수 있었다. 예산의 정의, 절차, 구성부터 시작해서 정부재정, 지방재정의 규모와 구조, 그리고 예산서 보는 방법같은 것들을 강의해주셨다. 이러한 예산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를 토대로 ‘지방재정의 위기’에 대해서 말씀해주셨다. 한 가지 사례로 일본의 ‘유바리 시’를 들어주셨는데 이 사례가 너무 웃겨서 집에 가는 길에서도 생각나서 웃었다. 탄광도시로 발전했으나 폐광 이후 쇠락한 도시인 ‘유바리 시’는 ‘탄광에서 관광으로’라는 슬로건을 걸고 개발사업 등에 몰입했다. 세입이 감소함에도 빚을 내고 민간사업을 인수하며 무리한 투자를 지속했고 재정 악화를 감추려 분식회계를 하기도 했다. 점점 재정상태는 악화되어 갔고 2006년 6월 파산을 선언하게 되었다. 이러한 ‘유바리 시’ 파산의 원인으로는 24년간 시장의 권력 독점, 지역의 견제역량 부족, 장기적 안목의 부재 등이 있었다고 하셨다. 중앙정부는 이렇게 파산한 ‘유바리 시’에 개입하게 되었고 공무원 감봉, 인력 감축, 공공서비스 축소, 세금인상 등으로 시의 파산의 부담을 주민들이 지게 되었다. 이 부분이 엄청 재밌었는데, 유바리 파산 후 유바리 다큐멘터리 투어라는 것이 생겼다. ‘이렇게 하면 파산한다’라는 걸 주제로 세계 여기저기서 견학을 온다고 한다. 정말 아이디어 하나는 놀라웠다. 그리고 ‘유바리 후사이’라는 캐릭터로 ‘돈은 없어도 사랑이 있다’는 메시지로 대회에서 수상도 했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사례로는 태백시가 있다. 태백시가 유바리 시와 많이 닮았다는 점이다. 과거 탄광도시다가 관광으로 부흥을 시도한 것도 같고 오투리조트 같은 대형 여가 시설을 만들기도 했다. 그로 인해 어마어마한 부채를 짊어지게 됐고 현재도 미래가 불투명 하다는 것이다. 재정 악화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는 도시는 태백 뿐만이 아니다. 2010 성남시는 ‘모라토리엄’을 선언하기도 했고 2012년엔 인천, 화성, 천안이 분식회계 지자체로 적발되기도 했다. 근데 이런 예산과 재정에 관련된 것은 구조적인 문제를 띄고 있다. 첫 번째로 수입을 늘릴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지자체가 지출을 조절할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또 설상가상으로 감세정책을 통해 세수가 크게 줄었고 세계 금융위기의 영향도 받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지방재정 개선을 국가 차원에서, 지방정부 차원에서 해법에 대해서 설명해주셨다. 그리고 최근에 시행된 주민참여예산제도에 대한 설명과 더불어 모범사례로써 2011년 총리상을 받은 서대문구의 사례, 2012년 대통령상을 받은 은평구의 사례, 광역차원에서 최초로 적극 시행한 서울시의 사례를 보여주셨다. 이러한 제도들을 통해 재정민주주의를 실현해야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납세자로써 개인적인 공부를 통해 예산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균형잡힌 시각, 그리고 적극적인 참여의지가 중요하다고 말씀하셨다 개인적으로 이번 강의는 강력한 메시지라기보단 예산에 대해서 많은 걸 배울 수 있어서 좋았다. 막연하게 생각했던 예산에 대해 쉽게 이해할 수 있었고 다양한 사례들을 접하면서 나 스스로도 좋은 사례가 될 수 있게 지역에서 노력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후에 기회가 된다면 살고있는 구에서 주민참여예산 위원에 신청해볼 생각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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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으로 이해하는 정치사상 - 근대편 | [고전으로 이해하는 정치사상-근대편] 1강, 마키아벨리-왜 도덕과 정치가 분리되었을까? | 기라 | 2013.11.14 | ||||
[고전으로 이해하는 정치사상-근대편] 1강(11/11), 마키아벨리-왜 도덕과 정치가 분리되었을까? 강의소개 > 클릭 쌀쌀한 날씨가 무색하게 오늘 느티나무홀에는 뜨거운 기운이 돌았습니다. 김만권 선생님의 열정적인 강의는 물론, 홀을 꽉꽉 채우다 못해 의자만 놓고 앉은 수강생들의 공부 열기도 한 몫 단단히 했죠. <여러분들이 자신을 소개해 준 키워드입니다> 1. 이름(별칭), 2. 나를 오늘 웃음짓게 한 일, 3. 강의에 대한 기대(목표)
그리고 김만권 선생님의 이야기가 시작되었습니다. 한 시간 동안은 근대에 대해 고찰하며 강좌 커리큘럼을 훑어보았고, 나머지 한 시간 동안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중심으로 정치에서 도덕이 분리되는 이유를 살폈습니다. 1. 근대, 신이 사라진 시대의 가치 모든 견고한 것들은 공기 속으로 녹아들고, 칼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에 있는 구절입니다. 김만권 선생님은 이 글귀가 근대의 본질을 명확하게 표현하고 있다고 설명하십니다. 2. 니콜로 마키아벨리(Niccolò Machiavelli) 15세기 말과 16세기 초의 어지러운 이탈리아에서 태어난 마키아벨리는 널리 오해받고 있는 근대사상가들 중 한 명입니다. 마키아벨리의 대표 저작 <군주론>에서 정치가의 속임수나 간계를 허용함으로써 부패와 폭력의 여지를 남기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후의 저작인 <로마사 논고>를 보면 실제로 마키아벨리는 공화주의자였다는 것이 여실히 드러납니다. 3. 왜 <군주론>을 썼을까 공화주의자인 마키아벨리가 1인의 절대군주를 지향하는 듯한 <군주론>을 쓴 이유는 크게 네 가지로 풀이되는데 꽤 흥미로워서 후기에도 남깁니다. 4. 포르투나(fortuna)와 비르투(virtú) 운명이 우리가 하는 일의 절반을 지배하고 있다면, 나머지 절반은 인간이 통제할 수 있다. 포르투나는 운명의 여신입니다. 고대 사람들은 운명을 통제할 수 없는 것으로 보았고, 대신 그를 당당하게 받아들임으로써 인간이 위대해질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호메로스의 <일리아드>나 <오디세이>를 보면 운명을 알면서도 피하지 않은 채 위험에 뛰어든 용기 있는 자들의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5. 마키아벨리 군주론의 본질 예측할 수 없으나 저항하라, 그것이 인간의 자유다 포르투나가 지배하는 세상 속에서는 나쁜 운명이 닥쳐와도 이를 잘 파악하고 대처할 수 있는 사람이 훌륭한 군주일 것입니다. 절반의 가능성을 자기편으로 만드는 군주 말입니다. 곧 '변화하는 환경을 끊임없이 살피고 적응'하는 것이 좋은 정부 또는 지도자의 비르투입니다. 6. 진보와 도덕주의 마키아벨리가 말한 정치의 목적은 ‘영광의 달성’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 즉 변화에 대응하는 과정에 거짓말이라던가 속임수라던가 엄한 형벌이라던가 하는 것들이 들어가도 괜찮습니다. 이 지점에서 정치와 도덕이 분리됩니다. 후기 마무리로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시인 '임시야간숙소'를 떠올려 봅니다. 우리가 읽은 것처럼 임시야간숙소는 도덕적인 방편이긴 하나 근본적으로 문제를 해결하지는 않습니다. <마음에 와 닿았던 질문>
<강의에서 들었던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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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과 사건으로 보는 한국근현대사Ⅱ | [한국근현대사] 5강, 권력을 향한 돌멩이질 : 이기붕과 김주열 | 김혜수 | 2013.11.14 | ||||
3강 후기 보기 >> 클릭 4강 후기 보기 >> 클릭 6강에서는 1950년대 이후 시대상황에 대해 배울 수 있었습니다. 비교적 최근과 가까운 시점의 사건과 인물에 대한 것이어서 더욱 재미있었던 것 같은데요~!(그나마 조금 이해하기 쉬운 부분이 나와서 좋았어요!!!^^) 먼저, 격동의 시대에 대해 정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958년 경향신문 폐간, 보안법 파동 1959년 자유당 선거자금 모금 1960년 민주당, 부정선거 반대 운동(마산에서 시위를 시작) 3.15 부정선거(“부정선거무효”라는 시위 구문이 “이승만하야”로 바뀜) 4.18 고대생시위 4.19 비상계엄선포 4.25 교수단 데모 4.26 이승만하야 4.28 이강석(이승만의 양자), 이기붕, 박마리아, 이강옥 가족이 모두 자살 5.29 하와이 망명 여기서 이기붕(1896~1960)에 대해 좀 더 살펴보면, 그는 해방이후 이승만의 비서를 지냈으며, 자유당을 창단하였다. 1956년에는 자유당 공천으로 부통령에 입후보하였으나 낙선하고, 1960년 대통령선거 때 공개·부정 선거로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4·19혁명이 일어나 결국 부통령을 사임하고, 경무대에 피신에 있다가 장남이 권총을 쏘아 전 가족이 자살하고 만다. 권력을 향했던 돌맹이질이 결국 자신에게로 되돌아간 것 같네요...! 수업의 주제가 이기붕과 김주열이니, 김주열에 대해서도 알아봐야겠죠? 그는(1943~1960) 1960년 마산상고 1학년의 몸으로 3.15 부정선거에 항거하는 데모에 참가했다가 행방불명, 4월 11일 왼쪽 눈에 최루탄이 박힌 시체로 마산 앞바다에서 발견됩니다. 이 사건이 불씨가 되어 민중의 분노가 다시 터졌고 결국 자유당 정권이 무너지게 된 것이죠. 저는 이렇게 안타까운 사건을 마주하게 될 때면 항상 ‘나라면 어땠을까, 데모에 참가했을까?’ 라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글로 읽기는 쉽지만 정말 그 상황 속에 처해있다면 그저 당연한 것이 아니기에 한 번 상상해 보는 것이겠지요. 그래서 그렇게 어려운 결정을 한 사람이 처한 상황이, 그 시대가 더욱 안타깝게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부정선거로 인한 국민의 분노는 당시의 시대상황인 것 같지만은 않기에 우리는(특히 저는) 역사를 배우고 그들을 기억해야만 할 것입니다. 이렇게 힘들고 고통스럽게 수많은 희생으로 지켜낸 민주주의를 우리는 왜 또다시 위협받아야 하는 것일까요? . . . 다시 지켜낼 수도 있으리라 믿습니다. Q&A 시간에는 전교조 불법화의 영향에 대한 것과 독립운동/민주화운동이 근현대사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는 내용을 언급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럼 다음주에 만나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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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시민정치학교Ⅱ – 민주주의의 새로운 실험, 생활정치 | ['나'의 시민 정치학교Ⅱ] 4강, 지역 생활정치의 현실 | 미요이 | 2013.11.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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