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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과 사건으로 보는 한국근현대사Ⅱ | [한국근현대사] 9강, 금정굴과 철원평화전망대 답사 | 김혜수 | 2013.12.3 | ||||
1. 고양시 금정굴 답사 희생자에 대한 묵념으로 시작된 우리의 금정굴 답사. 금을 캐던 곳이 문을 닫아 폐광굴이 되고, 끔찍한 일이 벌어지는 장소로 사용되는 동안 그곳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단촐 하고 허름해 보이는 그 곳은 보이는 것보다 훨씬 크고 무거운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고양금정굴 사건 요약* 고양 금정굴 사건은 6ㆍ26전쟁 직후 북한군을 위해 부역했거나 부역자 가족이라는 이유로 1950년 10월 9일부터 31일까지 경찰이 고양ㆍ파주지역 주민을 일산서구 탄현동 황룡산의 금정굴에서 총살·암매장한 사건이다. 1993년 문제를 제기한 유족회와 시민단체가 1995년 9~10월 사건 현장에서 153구의 유해를 발굴했지만 안치할 곳이 없어 16년 간 서울대병원이 연구실 창고에 보관해 왔다. 서울대 의대의 1차 감정에서 희생자가 최소 153명이고, 약 10%는 여성에 10대의 유골도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현장에서 당시의 이야기를 들으니 불과 몇 십 년 전의 일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충격적이었다. 그들의 이야기는 책이나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과거였던 것이다. 그 시대의 사람들이라고해서 목숨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닌데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 싶은 생각이 계속 맴돌았다. 그리고 또 하나 “금정굴은 복 받은 곳 이예요” 라는 고양 금정굴 유족회 관계자분의 말씀도 기억에 남는데, 얼마나 많은 우리의 과거사가 밝혀지지 않고 보상을 받기가 힘들었으면, 무엇보다 우리의 관심을 받지 못했으면 그렇게 끔찍한 일이 일어난 곳을 복 받았다라고 까지 표현을 했을까 싶어 그저 먹먹하기만 하였다. 그래도 긍정적인 것은 고양시에서 이 사건에 계속적인 관심을 가지고 관련 조례안을 만드는 등의 노력을 하고 있으며, 희생자 유족들이 기금을 조성해 인권평화재단을 발족하려는 준비를 시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앞으로 겪어야할 어려움도 무수하겠지만, 금정굴이 더 이상 뒷산에 작고 허름한 굴이 아니라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알아주는 것만으로도 큰 위로가 되지 않을까. 2. 점심식사, 동두천 기지촌
금정굴에서의 일정이 길어져 조금 늦게 동두천 기치촌을 향하였다. 그 곳에서 아주 맛있는 부대찌개를 먹고 철원으로 Go Go~!!! 시간이 부족하여 거리를 돌아 볼 수는 없었지만, 버스 안에서도 이신철 교수님의 깨알 같은 설명은 계속되었다. 많은 이야기를 해주셨지만, 너무 강렬하여 잊을 수 없는 것은 바로, ‘윤금이 사건’ 휴, 인터넷으로 뒤늦게 찾아본 그 이야기는 정말, 표현하는 것을 피하고 싶을 만큼 끔찍하고 아픈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가 있는 곳이 바로 그곳이었다.
3. 철원 평화전망대 <군인 '동생'이 직접 버스에 타서 인원수를 확인하고 있는 모습> 강원도 철원군 중부전선의 비무장지대와 북한지역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곳, ‘철원 평화전망대’ 그 곳을 오르는 동안 많은 철새들을 보며 시원한 바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그곳은 여유를 즐길 수 있는 마냥 자유로운 곳이 아니기에 참 대조적이었던 것 같다. 나는 이곳을 고등학교 때에도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마냥 신나서 소풍처럼 왔다만 간 기억도 새록새록 떠올랐다. 똑같은 장소가 그저 ‘소풍갔던 곳’으로 기억되기도 하고 ‘우리의 역사가 고스란히 묻혀있는 곳 그리고 계속 되고 있는 곳’으로 기억될 수도 있는 것은 역사에 대한 관심과 감수성의 차이인 것 같다. ‘역사감수성’을 갖게 해준 이번 수업이 답사가 정말 좋았다!
4. 월정역
*월정역 소개* 서울에서 원산까지 이어졌던 경원선의 간이역이었다. 신탄리역 다음 역으로, 남방한계선에 근접한 최북단에 위치해 있다. 현재는 폐역 상태다. 6·25전쟁 당시 월정리역에서 마지막 기적을 울렸던 객차잔해 일부분과 유엔군의 폭격으로 부숴진 인민군의 화물열차 골격이 보존되어 있다. 작고 아담한 월정역, 월정역에서 북쪽을 바라보면 농지가 보이는데 그곳은 정해진 시간에만 들어가서 농사를 지을 수 있다고 한다. 담벽(?)이 사라지고 농지를 마음껏 이용하고 월정역에 다시 기차가 달리는 날이 올 수 있을까? ‘철마는 달리고 싶다’라는 팻말이 대답을 해주는 것 같다. 5. 노동당사, 도피안사, 백마고지 *노동당사 소개* 1946년 초 북한 땅이었을 때 철원군 조선노동당에서 시공하여 그해 말에 완공한 러시아식 건물이다(그래서 벽이 굉장히 두껍게 지어졌다고). 6·25전쟁의 참화로 검게 그을린 3층 건물의 앞뒤엔 포탄과 총탄 자국이 촘촘하다. 8·15광복 후부터 6·25전쟁이 일어나기까지 공산치하에서 반공활동을 하던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잡혀 와서 고문과 무자비한 학살을 당하였다. 당사 뒤편에 설치된 방공호에서 사람의 유골과 실탄, 철사줄 등이 발견된 것으로 미루어 그때의 참상을 알 수 있다. 금정굴에서는 북한을 위해 부역했다고 죽이고, 노동당사에서는 반공활동 하던 사람들이 학살당하고... 정말 힘들어서 어떻게 살았는지 모르겠다. ‘산’것이 아니라, ‘견뎌’온 것은 아니었을까.
서태지와 아이들이 발해를 꿈꾸며 뮤직비디오를 찍었던 곳에서 함께 한 친구들이 공연을 보여주었다. 서태지 시대가 아니어서(?) 그런지 친구들의 공연이 더 즐겁고 예뻤던 것 같다. 이렇게 후손들이 그들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지금 해결할 수 있는 문제를 처리하고(금정굴유가족 분께서 이 일은 우리 대에서 끝내야한다고 했던 것과 같이), 문제가 만들어지지 않도록 지금 할 수 있는 역할을 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6. 저녁식사, 고석정 저녁의 고석정 모습을 살펴본 뒤 순두부찌개를 먹고, (배부르다고 하시면서도 다들 잘 드셨던...!ㅎㅎㅎ) 우리의 답사는... 끝나지 않았다. 버스에서 마이크를 전달 전달하며 서로의 소감을 나누고서야 그 어떤 답사보다 뿌듯한 일정을 마칠 수 있었다. 이신철교수님, 전보임간사님, 함께했던 모든 분들! 덕분에 아주 재미있게 유익하게 잘~다녀왔습니다.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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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시민정치학교Ⅱ – 민주주의의 새로운 실험, 생활정치 | [나의 시민 정치학교Ⅱ] 7강, 이제 지방선거 준비해볼까 - 워크숍 | 장경환 | 2013.12.2 | ||||
[나의 시민정치학교Ⅱ] 7강(11/26), 이제 지방선거 준비해볼까 - 워크숍 강의소개 보기 >> 클릭 1강 후기 보기 >> 클릭 2강 후기 보기 >> 클릭 3강 후기 보기 >> 클릭 4강 후기 보기 >> 클릭 5강 후기 보기 >> 클릭 6강 후기 보기 >> 클릭 처음 10월에 강의 시작할 때가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마지막 강의를 듣게 됐다. 매주 화요일 저녁으로 먹던 김밥도, 뻥튀기 접시도, 이젠 없을 거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허전하기도 했고 아직 생활정치라는 것에 대해 뭔가 그림을 잡은 것도 아닌데 마지막 강의를 들으려니 아쉽기도 했다. 이런 아쉽고 허전한 마음을 다잡고 강의에 집중했다. 이번 마지막 강의는 첫 번째 강의에서 생활정치에 대한 개괄적인 강의를 해주신 하승우 선생님이 마무리 강의를 해주셨다. 강의 시작부터 모두에게 질문을 던지셨다. 생활정치란 어떤 것인지 알 것 같나요? 강의를 통해 배운 점은 뭔가요? 답은 이미 지난 6번의 강의 속에 있었다. “개인적 의제들을 같이 해결하는 것이 바로 정치이다“ 이 강좌를 통해 배운 가장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 주민들은 소박한 것을 바란다. 하지만 사실상 선거에 들어가면 예산이 많이 들어가는 하드웨어적인 것들이 이슈다 된다. 이런 시대에서 주민들이 바라는 소박한 필요들을 뭉쳐서 이슈로 만들어 내는 것이 생활정치라는 생각도 했다. 선생님께선 우리들이 누군가 의제를 주면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우리가 주체가 되어서 의제를 정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셨다. 최근에 있었던 녹생당의 정책콘서트를 예로 들어주셨다. 녹색도시, 일자리, 노동 등 각 분야에서 마인드 맵핑을 통해 의제들을 떠올리는 것이 의미있다고 생각했다. 이 설명들을 통해 ‘내가 뭘 원하는가?’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을 해봐야겠다는 과제를 받은 것 같았다. 하지만 시민이 주체가 돼서 의제를 만드는 게 끝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셨다. 생활의 의제들을 통해 만든 좋은 공약들도 막상 선거가 끝나면 외면당하는 게 현실이기 때문이다. 지난 대선 당시 새누리당의 피켓들을 보면 화려함의 극치였다. ‘등록금 부담 절반으로!’, ‘고교 무상의무교육 시대!’, ‘취업 스팩 타파!’, ‘어르신 임플란트도 건강보험으로!’ 지금도 이런 화려한 것들이 현재는 정부가 앞장서서 막아서는 아이러니한 현실이지 않은가. 기업이라면 상품을 환불하겠지만, 정치에선 현실적으로 환불이 안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의제만 만들고 끝나는 게 아니라 현실적으로 어떻게 의제들을 실현시킬 수 있는지에 대한 생각을 더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씀하셨다. 현재 미국에서 정치인의 공약을 추적하는 ‘폴리티 팩트’라는 사이트와 ‘투명사회를 위한 정보공개센터’라는 사이트를 소개해주셨다. 강의는 30분정도 진행되었다. 나머지 시간은 조별로 생활의제를 정하는 시간을 가졌다. 조별로 전지에 생활의제등을 정리하고 발표했다. 마을, 보육, 골목상권, 청년모임 등 다양한 분야의 의제들을 정리했다. 그리고 이런 의제들을 어떻게 실현시킬지에 대해서 토의했고 마무리로 하승우 선생님께서 이런 의제들에 대한 현실에 대한 설명을 더해주셨다. 오늘의 강의는 정말 뚜렷한 결론을 가졌다. “의제도 중요하지만 의제를 실현할 방법을 생각해야 한다. 원하는 걸 얘기하는 게 아니라 내가 그 과정의 주체가 되는 것이 중요하다.” 강의는 여기서 끝났고 수강생 각자의 소감을 나누고 시민정치학교는 종강을 했다. 나는 개인적으로 아무 것도 모른 채 막연하게 배우고 싶은 마음에 강의를 듣게 됐는데 한 주도 빠지지 않고 나온 7주의 시간동안 생활정치의 힘, 공동체, 마을, 예산 등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었고 현재 현실에서 많이 적용해보기도 했기에 나에겐 더 유익한 시간이었던 것 같다. <참여자들의 강의 소감>
글 : 자원활동가 장경환 / 편집 : 아카데미느티나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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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과 사건으로 보는 한국근현대사Ⅱ | [한국근현대사] 8강, 재벌의 탄생과 근로기준법 : 전태일과 정주영, 이병철 | 김혜수 | 2013.11.30 | ||||
1. 1960년대의 이해 - 1961 학생회담 등 통일운동 고양 1963.1.3. 민정당 결성(민주당 신·구파) 1964 제 1차 인혁당 사건 1965.6.22. 한일협정 1964.9. 베트남 파병 ◆ 베트남전과 한국군 파병 1954.1.28. 이승만, 주한 유엔군 사령관 존 헐에게 한국군 1개 사단 파병 제안 1956.10.23. 남베트남 국민투표실시, 베트남공화국 수립, 남베트남 무장 봉기(베트콩)와 북의 지원 1964.5.9. 미국, 25개국에 남베트남 지원 호소 서한 발송 1964.9.11. 1차 파병 1965.3.16. 2차 파병, 건설지원단(비둘기부대) 1965.10.9. 3차 파병, 전투병력 파병 시작 1966.2 <미국대사 브라운 국무부에 서한> ‘…유일한 참전국인 우리 미국보다 인구 비율로 따지면 2~3배 더 많은 것이다. ’ 1966.2.23. 한미합의의사록 서명, 브라운 각서 발송 군사부문 지원 : 한국국 현대화를 위한 장비 제공, 파병 장비와 일체의 경비 부담, 베트남 주둔 한국군 지원을 위해 C-54 수송기 넉 대 한국 공군에 제공 경제부문 지원 : 미군과 남베트남군의 물자 중 결정된 품목과 기타 소요되는 품목을 최대한 한국에서 구매, 한국 기업의 남베트남 진출 기회와 용역사업에 참가할 기회를 제공, 한국의 경제 개발을 위한 차관 추가 제공-> 경제발전 1966.4.11. 백마부대 부산 출발 1968.2.12. 청룡 1중대, 퐁니·퐁넛 마을 민간인 70여명 학살 1968.3.16. 미라이 학살 -> 여기서 한국정부의 이중성을 보여주고 있다. 1971. 라오스 영토 내 호치민 통로 봉쇄 작전 개시, 라오스 중립 선언했지만 호치민 통로 묵인, 남베트남군 작전 실패. 미군 비밀 폭격 1973.3.23. 한국군 미군과 함께 철수 1975.4.30. 사이공 함락. 남베트남 패망 파병누계 : 약 8년 간 31만 2853명 참전 전과 : 사살 4만 1401명, 포로 4633명, 귀순 2482명 피해 : 4960명, 부상 1만 962명 <무엇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자유우방 수호(도미노 방지) 경제성장 동력(미국 한국군 병사에게 2억3천6백만 달러 지불, 군수물자 판매 등 GDP 5배 성장) 군사적 이익 : 한미 동맹관계 강화, 한국군 현대화 베트남 민간인 학살 2. 위와 같은 시대상황을 바탕으로 지금의 ‘재벌’이 ‘정당한 방식’으로 성장 할 수 없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정경유착’과 ‘노동착취’ 그 양 끝에 있던 사람이 전태일과 정주영, 이병철 이었던 것이다. 당시 경제성장 주요/동력 이슈는 원조경제, 경제개발계획, 한일협정, 베트남전쟁, 인력수출, 전태일, 경부고속도로(수출주도형 경제성장)로 설명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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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으로 이해하는 정치사상 - 근대편 | [고전으로 이해하는 정치사상-근대편] 3강, 어떻게 재산의 사적 소유는 정당화됐을까? 로크의 <통치론> | 이나단 | 2013.11.29 | ||||
[고전으로 이해하는 정치사상-근대편] 3강(11/25) 어떻게 재산의 사적 소유는 정당화됐을까? 로크의 <통치론> 강의소개 보기 >> 클릭 1강 후기 보기 >>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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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아카데미느티나무 수강생 여러분~ 고전으로 이해하는 근대정치사상 세 번째 강의 후기를 맡은 이나단입니다. 김만권 선생님께서는 로크의 저작 <통치론>을 설명해주시면서 강의를 열었습니다. <통치론>에는 시민 저항권과 더불어 또 하나의 과격한 사상을 담겨 있다고 합니다. 바로 국왕살해(Regicide)에 관한 것입니다. 이는 법위에 존재하는 전제군주를 살해하라는 메시지입니다. 로크는 법의 테두리 밖에 있는 자(=왕)를 죽이는 것은 불법이 아니라는 논리로 국왕살해를 정당화하고 있습니다. 입헌군주국인 영국에서 국왕살해를 내세우는 <통치론>이 당시 얼마나 파격적이었는지를 가늠해볼 수 있겠지요? 로크는 영국 내전과 네덜란드 망명생활 등 여러 우여곡절을 겪은 후, 1689년 <통치론>을 정식으로 발간하였습니다.
▲ 존 로크 (John Locke, 1632~ 1704)
1. 로크가 말한 '신뢰' 김만권 선생님은 근대정치학의 기반을 두 가지로 대별하였습니다. 하나는 로크의 전통을 따른 ‘신뢰(trust)’이고, 다른 하나는 홉스의 전통 아래에 있는 ‘두려움(fear)’입니다. 홉스는 자연상태에서 정치사회로 넘어올 때, 평판(이성)에 기초한 신약과 폭력이 요구된다고 주장했습니다. 반면, 로크는 자연 상태에서 사람들이 모두 합리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서로를 신뢰한다고 가정합니다. 로크에 따르면, 폭력없이도 사회를 성립할 수 있게 됩니다. 게임이론의 대표적인 사례, ‘죄수의 딜레마’ 상황도 서로를 신뢰할 때 상호이득이 되는 결과를 얻습니다. 어떤 학자는 서로 신뢰하는 사람들의 모임을 사회적 자본이라고 표현했다고 합니다. 신뢰를 기반으로 한 시민문화가 더 나은 사회, 정치, 문화를 만들어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인간과 인간사이의 신뢰를 가장 중요한 기초로 놓은 최초의 정치학자는 바로 로크이다. 사회적 자본으로서 ‘신뢰’를 강조하는 것도 로크의 흐름에서 등장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함께 감상한 마종기님의 ‘우화의 강’ 한 구절이 떠오릅니다. ‘큰 강의 시작과 끝은 어차피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물결을 항상 맑게 고집하는 사람과 친하고 싶다...
2. '사유재산'을 강조한 로크 로크 사상 중 ‘소유(所有)’ 또는 ‘사유(私有)’에 대해 집중하는 본 강의가 최근의 경향을 따른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 인간이 어떻게 소유하게 되었는가, 우리가 무엇을 사유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파고들다보면 ‘우리가 어떻게 이 시스템을 구축하게 되었는가’ 라는 또 다른 질문과 만나게 됩니다. 애초에 공유되던 자연 상태의 여러 자원을 어떻게 사유할 수 있게 되었는지를 파악해보고는 것이 근대국가의 성립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겠지요? 소유에 관한 이론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그것은 로크에서 출발하여 아담스미스와 마르크스에 의해 일반화된 노동가치설과 집단의지동의설(사회동의설)입니다. 먼저, 집단의지동의설에 의하면, 나의 소유와 타인의 소유가 정당하게 양립될 수 있을 때에 사적 소유가 가능하다고 보는 입장입니다. 타자들이 집단의 의지로 나의 소유를 인정해주는 것이지요. 나 자신도 집단의 일원으로서 타인의 소유를 인정해줍니다. 타인의 인정이 소유에 있어 핵심입니다. ‘사적 소유는 한 집단의 정치적 승인을 요구하는 사항’이라는 칸트의 입장과 일맥상통합니다.
한편, 로크는 사유재산의 근거로 ‘노동’을 지목했습니다. 노동이야말로 사유물과 공유물 간의 구별을 낳는다는 것이지요. 인간의 몸에서 나온 노동, 그 손에서 나온 작업은 당연히 그 자신만의 것이라 할 수 있다는 논리입니다. 이에 따르면, 자연의 대상물에 노동을 가한 주체인 내가 그 노동의 결과물도 소유할 수 있습니다. 즉, 소유권은 나의 노동으로부터 나오는 것이지, 사회적 인정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정치 사회가 존재하기 전부터 가질 수 있는 권리, 전정치적(前-, pre-political) 권리가 사적 소유권이라는 것입니다.
3. 소유의 단서 두 가지 인간이 공동체를 결성하고 스스로 정부의 지배를 받아들이는 가장 중요한 목적은 그들의 재산을 보존하기 위함이다. 이렇듯 로크는 정치사회 성립의 이유 중 가장 주요한 것으로 재산의 보호를 꼽습니다. 노동가치설에 따라 노동이 순수하게 내 몸에서 나오고, 이를 통해 재산이 형성되므로 각자의 몸이 결국 재산입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신체적 자유를 침해받지 않는 것이 곧 사유재산을 보장받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재산이 자신의 몸이나 다름없다는 점에서 재산권은 정치사회가 보호해야 할 중요한 개인의 권리가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크는 ‘사적소유’의 권리에 두 가지 단서를 제시합니다. 먼저, 다른 사람들이 소유하기에 충분한 공유물이 남아있는 한, 노동한 자가 그의 노동이 부여된 것에 대한 권리를 갖는다는 것입니다. 유럽인들이 아메리카 대륙에 진출하던 당시, 로크는 신이 무한한 토지를 인간에게 주었다고 생각했습니다. 타인들이 소유하기에 충분한 양의 토지(공유물)이 있기에 무한한 사적 소유가 가능하리라 믿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천연자원이 유한하다는 사실을 누구나 알고있는 현재 상황에서 이러한 단서조항은 혁명적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소유할 수 있는 충분한 자원이 남아있지 않는다면, 사유재산권은 조건부 권리라는 의미입니다. 둘째로, 로크가 사적소유를 제한했다고 보는 또 하나의 근거는 ‘부패의 단서’입니다. 고기나 곡물을 창고에 쌓아두고 오랜 시간이 지나면 썩습니다. 이와 달리, 화폐는 장기적으로 혹은 반영구적으로 보관할 수 있습니다. 로크는 토지에서 생겨난 생산물을 영구적으로 보관할 수 없다면 인간들이 토지개간을 적극적으로 할 유인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땅에서 얻은 이익을부패하지 않는 형태로 보관할 수 있을 때, 토지생산성이 향상된다고 보았습니다. 저는 이런 상상을 해보았습니다. 우리나라 최고의 갑부가, 그가 가진 모든 재산을 쌀가마니로 가지고 있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창고의 규모는 어떨지... 쌀은 얼마나 오래 보관할지... ‘화폐가 생겨나서 어마어마한 것들을 감추어주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4. 재산과 정치참여 공식석상에서 쓰이는 ‘신사, 숙녀 여러분~ Ladies and Gentlemen.’이라는 표현은 일정 수준의 재산과 이에 따른 제반 권리를 가진 이들을 지칭하는 것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로크가 개인의 사적소유권을 정당화시키려한 목적은 어느 정도 자신의 재산을 가진 인민의 정치참여에 정당성을 부여하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로크가 주장한 사유재산권은 정치적으로 자유로운 인간이 가져야 할 필수조건이었고, 이 때문에 어떤 외부의 침해나 간섭으로부터 사유재산을 보호해야 한다고 강조한 것입니다. 그러나 로크 이후로, 그가 강조한 재산권의 의미가 퇴색되었습니다. 정치적 의사표현의 목적이 아니라, 경제적 권리로서 재산권이 지나치게 중시되었습니다. 또, 근대이후의 자유주의 흐름속에서 정치적 무관심마저도 개인의 선택으로 존중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습니다. 로크를 위시한 근대 초기의 학자들이 왜 그리도 재산권 보호를 강조했는지에 대한 이유를 현대사회에서 잊은 것이지요. 개인의 정치참여라는 역할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사유재산의 보호라는 일차적인 권리에만 집중하는 듯합니다. 마지막으로 김만권 선생님은 복지와 경제민주화에 대한 이야기를 간단히 나눠주었습니다. 동시에 소유는 단순히 무엇을 가지냐의 문제를 넘어서 우리를 얼마나 더 자유롭고 평등한 존재로 만드느냐의 문제라는 말씀을 전해주셨습니다. 소유, 재산권을 경제적인 관점이 아니라 정치적인 관점으로 바라보자는 것입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정치참여의 밑바탕이 되는 소유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배우는 시간이었습니다. (끝)
<마음에 와 닿았던 글>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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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과 사건으로 보는 한국근현대사Ⅱ | [한국근현대사] 7강, 대통령과 재야의 대통령 : 박정희와 장준하 | 김혜수 | 2013.11.2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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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과 재야의 대통령 : 박정희와 장준하
최근 다시금 주목 받고 있는(?) 박정희와 그와 반대편에 서있었던 장준하에 대한 연혁을 살펴보며, 그들의 삶과 그 시대에 대해 배울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
1. 박정희 '박정희'에 대해서는 이미 많이 알고 계실텐데요~ 3개국에서 군사훈련을 받았던것, 쿠데타를 모의하던 과정 등 제가 새롭게 알게된 내용위주로 간단하게 정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문경/만주군관학교 -> 일본육사 3학년에 편입 -> 만주군 보병에 소위로 부임 1946 5.6 조선경비사관학교 제 2기생 재학 중 “10월 인민 항쟁” 발발 남노당 이재복이 박정희를 주목, 군사훈련경험/인맥/경상도출신/능력이 돋보였기 때문. 1949 박정희 무기징역(국방경비법 위반)-> 현역복귀, 육군8기생을 만나게 됨. 1952.5.29. 장면, 이종찬 -> 미대사관에 쿠테타 계획을 타진 1959.2 송요찬 – 부정선거를 명령 1960 박정희 – 쿠데타를 도모했으나 4.19로 인해 무산 1961 4.15 해병대 단독 쿠데타 모의 이후 몇 차례 준비했고 결국 5.16일에 실행하게 된다. - 박정희의 연혁을 통해 살펴 본 내용 외의 것 (전 왜 이런 내용이 더 기억에 남을까요....?) 정인숙 사건, 한일협정, 베트남 전쟁, 문익환
2. 장준하
- 독립운동가, 언론인, 정치가 - <사상계>를 출판 * 이는 당시 자유당 정권을 신랄하게 규탄하며 4·19 혁명의 단초가 되었으며, 대학생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통일운동의 중심세력=학생)
중요 연혁 (+ 수업시간에 다뤘던) 1944 학병 자원입대 1945 광복군에 편입 1963 이후 야당의 길을 걷게 됨 -> 제 7대 신민당 소속 국회의원당선 제 3공화국 당시, 한일회담 반대와 박정희 비판 내용(출처 : 위키백과) 대선에서 장준하는 일본 제국주의 군대에 있었던 사람이 대통령이 되는 것을 참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장준하는 박정희 정권의 한일 협정을 일본 제국주의 군인 출신이 침략자이며 전범자 집단인 일본 자민당과 매국협상을 하는 것으로 판단하고, 1964년 4월호를 긴급 임시증간호로 내놓았다. '한일회담의 제문제'는 한일회담을 반대하는 이 나라 지식층의 의사를 비판적으로 담아낸 한일회담 반대진영의 교과서가 됐다. 이어서 1965년 7월에 '신(新) 을사조약의 해부' 를 또다시 긴급 증간호로 발행해 한일회담 반대진영의 이론적 교두보가 됐다. 1966년 사카린 밀수 사건이 일어났다. 이 과정에서 집권층과 삼성의 이병철 사이에 유착이 있었다는 정보가 새어 나왔고, 야당과 대학생들이 전국적인 규탄대회를 열었다. 1966년 10월26일 민중당 주최 '특정재벌 밀수진상 폭로 및 규탄 국민대회' 에 연사로 참석했다. 장준하는 규탄대회에서 재벌총수와 정부 고위층 사이에 오간 내용을 폭로하면서 “우리나라 밀수 왕초는 바로 박정희”라고 비판하였다. 이어 "존슨 대통령이 방한하는 것은 박정희 씨가 잘났다고 보러 오는 것이 아니라 한국청년의 피가 더 필요해서 오는 것" 이라는 발언도 주목을 받게 됐다. 장준하는 박정희와 재벌들을 신랄하게 비판하다가, 박정희 밀수왕초 발언 등이 문제되어 구속, 한 달간 수감됐다가 1966년 12월 보석으로 석방되었다. 그 뒤 1967년 2월의 공판에서는 징역 6월을 선고받았다.
- 박정희의 반대편에 서있던 인물에 대한 탐구와 함께 더 생각해 볼 문제 1965 한일협정 이후 동아시아에 대한 개념 : 한·중·일+미국 중심으로 바뀌게 되었고 북한은 제외된 점
이상으로 후기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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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시민정치학교Ⅱ – 민주주의의 새로운 실험, 생활정치 | [나의 시민 정치학교Ⅱ] 6강, 나는 마을에서 논다 –마을공동체와 협동조합의 가능성 | 미요이 | 2013.11.23 | ||||
[나의 시민정치학교Ⅱ] 6강(11/19), 나는 마을에서 논다 - 마을공동체와 협동조합의 가능성 강의소개 보기 >> 클릭 1강 후기 보기 >> 클릭 2강 후기 보기 >> 클릭 3강 후기 보기 >> 클릭 4강 후기 보기 >> 클릭 5강 후기 보기 >> 클릭 1. 성미산마을에 대한 소개 성미산은 서울시 마포구에 위치한 작은 야산이다. 성미산은 해발 70미터밖에 되지 않는 비교적 작은 산으로, 마을 어디에서 출발하든 어른 걸음으로 5분, 아이 걸음으로 십여 분이면 오를 수 있는 곳이다. 이 성미산 자락에는 성산동, 망원동, 합정동, 연남동, 그리고 서교동이라는 행정구역상의 동네들이 있다. 우리가 ‘성미산 마을’이라고 부르는 공간은 이 성미산 자락에 위치해 있다. 하지만 ‘마을’이라는 단어는 현대 도시인들에게 낯설다. 우리의 기억에 마을 하면 떠오르는 것들은 한적한 농촌이나 영화 속에만 머무르는 골목길 사람들뿐이 없기 때문이다. 마하트마 간디는 그의 저서 <마을이 세계를 구한다>에서 이런 말을 했다. “현재 세계에는 두 부류의 사상이 있다. 하나는 세계를 도시로 나누려는 것이고, 하나는 마을들로 나누려는 것이다. 마을문명과 도시문명은 전적으로 다르다. 하나는 기계와 산업화에 의존하고, 다른 하나는 수공업에 의존한다. 우리는 후자를 택하고자 한다.” 그에 따르면 도시와 마을은 서로 반대되는 개념이기 때문에 공존할 수 없다. 그리고 지난 역사 속에서 한국의 서울은 자본을 가진 사람들의 이해관계에 의해 철저하게 도시화되어왔다. 90년대를 전후해서 도시에서 태어난 학생들이 마을을 기억할 수 없는 이유이다. 성미산마을은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공동체이다. 사람들은 아이들을 행복하게 키우고 싶었고, ‘이웃사촌’이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을 만큼의 관계를 만들고 싶었고, 체벌이나 과잉 경쟁으로부터 안전한 학교를 원했고, 하고 싶은 문화생활을 생활공간에서 누리고 싶었고, 문화를 소비하는 사람이 아니라 만들어내는 ‘주인공’이 되고 싶었고, 의식주와 관련된 소비생활을 좀 더 윤리적으로 하고 싶었다. 자신이 배운 바를 실천하는 삶을 나 혼자가 아닌 이웃들과 함께 하고 싶었던 것이다. 성미산마을은 이러한 정체성을 가진 ‘관계’에 기반을 둔 공간이다. 이는 마을 사람들이, 그리고 이 마을을 보는 마을 바깥의 사람들이 부여한 정체성이다. 성미산마을의 시작은 생각보다 거창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마을 운동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모이자!’라고 해서 모인 주민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1994년, 아이들에게 한글과 영어를 일방적으로 가르치기 보다는 자연 속에서 마음껏 뛰어놀게 해주고 싶었던 부모들이 의기투합해 공동육아 협동조합 ‘우리 어린이집’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듬해 추가로 ‘날으는 어린이집’이 만들어지면서 입소문이 났고, 공동육아에 뜻을 둔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모이게 되었다. 이후 공동육아운동은 꾸준히 발전하여 2002년 ‘참나무 어린이집’이, 2005년에는 ‘성미산 어린이집’이 추가로 설립되었다. 공동육아로 시작한 공동체는 아이들이 크면서 대안교육에까지 관심을 넓혀가기 시작했고, 이후 부모들이 확장된 ‘마을 공동체 형성’의 필요성을 느끼면서 마을극장, 두레생협, 공동주거 등의 새로운 시도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현재 이 공동체에 소속감을 가지고 있는 가구 수는 500~700여개에 달하고, 그 안에서 약 70여개의 커뮤니티들이 운영되고 있다. 아는 사람들끼리의 친목 모임정도의 성격을 가졌던 공동체가 ‘마을’이라는 정체성을 갖게 되는 과정에는 수많은 걸림돌과 사람들을 모이게 하는 계기들이 있었다. 2001년 서울시는 성미산에 배수지를 만든다는 계획을 발표하였다. 하지만 이 지역의 유일한 녹지인 성미산은 주민들의 휴식, 산책, 운동 공간이며, 어린이집 아이들이 매일같이 오르는 놀이터이자 교육장이었다. 생태론에 기반을 둔 공동육아협동조합이나 두레생활협동조합은 당연히 이에 반대하였고, 환경단체의 도움을 받아 ‘성미산개발 저지를 위한 대책위원회’를 조직하여 본격적인 반대운동을 펼쳤다. 마침내 서울시가 기습적인 벌목을 시작하자 사람들은 사수대를 결성하여 물리적으로 개발을 저지하였고, 촛불집회나 음악축제 등 다양한 문화활동과 항의 전화 걸기, 시청 앞 집회, 공청회 등을 조직하여 2003년 서울시의 공사 유보 결정을 이끌어내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를 기념하는 마을축제를 열었다. 함께 어려움을 이겨냈던 ‘공유된 경험’을 바탕으로 사람들은 본격적으로 목적의식을 가지고 ‘마을 만들기’를 추진하기 시작했다. 2004년에는 이러한 주민자치운동의 필요성을 자각하면서 이를 주도할 단체로 ‘참여와 자치를 위한 마포연대’가 결성되었고, 2005년에는 정부의 시범사업으로 소출력 마을 방송국 ‘마포FM’이 만들어졌다. 생협 조합원이 만든 유기농 반찬가게 ‘동네 부엌’, 협동조합으로 운영되는 자동차 정비소 ‘차병원’등도 이 때 만들어졌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2004년 9월 마을학교를 표방한 ‘성미산학교’가 개교하였고, 이듬해 건물이 완공되어 초·중·고등학교 신입생을 받았다. 2. 마을기업에 대한 이해 선생님은 마을기업을 ‘출자와 자원조달’, ‘운영과 마을고용’, ‘이용과 확보된 시장’, 이 세가지로 나누어 설명해주셨다. 우선 마을기업은 주민들이 십시일반으로 출자한 돈에서부터 시작한다. 관심이 많은 사람은 많은 구좌를 신청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조금만 신청해 돈을 출자하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돈을 주고 끝나는 기부와는 다르다. (투자의 개념이기 때문에) 조합원이 곧 출자자이고, 출자자가 곧 주인이 되는 구조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두 번째로 마을기업은 ‘하고 싶은 사람’이 운영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자기가 사는 마을 안에서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아이를 키우는 엄마나 노인들에게는 큰 메리트일 것이다. 한국의 열악한 노동환경 때문에 일을 하지 않고 가정을 돌보는 주부들이나 은퇴자분들이 활동적으로 일할 수 있는 마을기업의 역할에 사람들이 주목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마을기업은 ‘확보된 시장’을 가지고 있다. 조합원들이 곧 소비자이고, 마을에 사는 이웃들이다. 그들은 또한 가게에 어느 정도 출자를 한 주인이기도 하기 때문에, 깐깐한 소비자가 되기보다는 너그러운 마음으로 기업의 발전을 바라는 고정적이고 안정적인 소비자층이 된다. 등가교환과 경쟁, 마케팅 공략 등이 떠오르는 일반 기업의 이미지와는 다른 점이다. 3. 수업에서 나온 질문들 서울시는 과연 지속적인 마을 만들기 사업을 펼칠 수 있을 것인가? 지금 시행되고 있는 서울시의 마을 만들기 지원 사업은 어떻게 운영되고 있으며, 그 안에서의 어려움은 없을까? 시간과 자원이 풍부한 중산층 이상 사람들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소외된 사람들까지도 마을 만들기 사업에 참여할 수 있게 하는 아이디어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성미산마을이 가진 특수성과 보편성에는 무엇이 있을까? 4. 간단한 소감 변화를 만들어내려는 시도는 거창하지도, 화려하지도 않았다. ‘세계평화’나 ‘사회개혁’과 같은 거창한 구호로부터 출발하지도 않았다. 그저 자신의 아이를 자신의 가치관에 따라 합리적인 조건에서 기르고자 한 노력으로부터 모든 것이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공간이 공권력에 의해 불합리하게 침해당할 위기에 처하자 온몸을 다해 지켜내었다. 이러한 시도와 행동은 지금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주류적 문화와 방식이 옳지 않다는 문제의식으로부터 나왔다. 누군가가 기존의 틀을 깨고 새로운 상상을 할 때 이미 변화는 시작되었다. 어쩌면 사회 변화는 항상 가장 가까운 곳으로부터, 가장 기본적인 원칙을 세우려고 할 때 시작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사회학도로서 항상 큰 그림과 구조를 보려고 하고, 책으로부터 익힌 일상적이지 않은 개념들을 쓰려다보니 글에는 거품이 끼어있다. 이 단계를 넘어서면 나도 ‘지켜보고 감상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몸을 직접 움직여 행동을 할 수 있을까? 내가 몸담은 학교, 학과에서조차 작게나마 변화를 만들어내는 것은 망설여진다. 내가 망설이는 이유는 ‘아직 살만하기 때문’일 것이다. 세상의 부조리함과 직접적으로 마주하기에 내 주변에는 생각보다 많은 보호막과 핑계들이 있다. 선생님은 분명 희망찬 마을 만들기에 대해서 말씀하셨지만, 내 상황이 상황인지라 주저리주저리 개인적으로 했던 생각들을 몇 자 적어보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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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으로 이해하는 정치사상 - 근대편 | [고전정치사상] 2강, 보충자료 | 느티나무 | 2013.11.23 | ||||
김만권 선생님께서 2강 보충자료로 보내주신 내용을 올립니다. -------------------- 지난 참여연대 강의에서 로크는 정치권력에서 자연권에서 행사하는 권리를 양도하는 게 아니라 권리행사에서 빚어지는 불편을 없애기 위해 일정 정도의 권위와 권력을 부여하여 문제를 해결한다고 설명했었지요. 그랬더니 고등학교에서 법과 윤리를 가르치시는 선생님께서 교과서엔 홉스 모든 권리 양도, 로크 부분 양도, 루소는 그런 거 없음이라고 나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 역시도 고등학교 다닐 때 그렇게 배운 듯 한데요, 홉스에서는 "모든 사적 판단의 권리"는 포기하고 주권에게 객관적 3자로서 모든 판단권리를 넘겨주지만 "자기 보존의 권리" 그 자체는 양도되지 않습니다. 다만 모든 사적 판단을 포기함으로써 자기보존의 권리가 자연스럽게 행사되지 않다가 국가가 이 자기보존의 권리를 직접적으로 위반하면(예를 들어, "네 목숨을 끊어라"라고 명령하는 행위) 즉각적으로 이 권리가 행사되며 나아가 사적 판단의 권리까지 회수됩니다. 특히 여기서 '자기보존'은 계약을 맺게 되는 이유라 '자기보존의 권리'는 정치권위에게도 양도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적판단을 행사하여' 실행하는 '자기보존의 권리'는 '자연권'이라 저항은 항상 시민권이 아닌 자연권으로서 행사됩니다. 이로 인해 시민혁명, 시민저항 따위는 홉스의 체계 내에서는 존재하지 않지요. 로크에선 자연 상태에서 개인들이 다른 개인들에게 right to judge and punish를 갖는데요, 이 때 개인적으로 행사되는 이 권리로 인해 생겨나는 불편함(로크는 불편함이라고 표현한다)으로 인해 이 불편을 해소하기 정부에 power to judge and punish를 줘서 해결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원문을 읽어보시면 아시겠지만 정치권력과 관련된 부분에서 right to punish란 식의 표현을 거의 쓰지 않습니다. 심지어 개인들과 관련된 부분에서도 right to punish만큼 power to punish란 표현을 자주 씁니다.(아래 웹사이트는 스탠포드에서 로크 이론을 소개해놓은 곳인데요 개괄적으로 보기에 괜찮습니다. 이 소개문에서도 정부의 punishment와 관련하여 right이란 표현이 거의 등장하지 않고 오히려 power란 단어가 자주 쓰이고 있답니다. http://plato.stanford.edu/entries/locke-political/#LocPun.) 자연상태에서 갖는 개인들이 타자에 대해 갖는 권리는 right으로 쓰지만, 정부가 무슨 right을 양도받아 갖는다는 표현은 거의 없고 이 불편을 해소하기 위해 정부가 개인 대신 power를 지닌다는 식으로 표현하지요. (여기서 right과 power의 차이를 물으신다면, 로크가 지지하는 천부적 권리는 반드시 보호되고 지켜져야 할 것이지만, power, 특히 정치권력은 상황에 따라 그 모습이 달라질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하시면 됩니다). 이 부분은 사실 해석의 여지가 있습니다. 주로 옛날 문헌이기는 하지만 일부 학자들은 로크가 right to judge and punish를 넘겨준다고 실제로 해석하기도 하고, 반면 또다른 일부 학자들은 권리가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정치권위에게 이를 해결할 power를 부여하여 정치적으로 개인이 갖는 이 천부적 자연권이 행사될 필요가 없게 만든다고 봅니다. 사실상 양도되는 권리란 없다는 것으로 특히 이 입장은" 천부적 자연권은 계약상에서 시민의 권리 일부분이라 시민들은 계약을 위반한 왕을 암살하거나 정부를 전복시킬 수 있는 권리를 갖는다"라는 해석과 일치하는데요,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사실상 개인이 개인에 대한 right to judge and punish는 유보되어 있지만, 개인이 자신의 정부나 왕을 향한 right to judge and punish는 전혀 유보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로크에겐 혁명과 저항권이 시민의 권리가 됩니다. 이런 복잡한 논리를 도식적으로 전부 양도, 일부 양도 식으로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하는 선생님들의 고충을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습니다. 더불어 저와 함께 수업하고 계시는 많은 학교 선생님들이 "아이들에게 오히려 혼란을 줄 수 있는 이 내용을 어떻게 절충시키라 말씀드릴까?" 저도 고민이 됩니다. 아이들에게 "교과서가 잘못된 거야 혹은 논란이 될만해"라고 말하면 오히려 부작용만 일으키는 것은 아닌지...선생님들께 속시원한 해답을 못드리는 것은 해석이 분분한 내용을 이것이다라고 찍어 말할 수 없는 학자의 입장 때문이고, 제가 교과서와는 다른 해석(제 입장에서는 오히려 더 영향력이 있다고 판단하는 최근의 해석)을 지지하기 때문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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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으로 이해하는 정치사상 - 근대편 | [고전으로 이해하는 정치사상-근대편] 2강, 근대 국가주권은 어떻게 탄생했을까? 홉스 | 이나단 | 2013.11.22 | ||||
[고전으로 이해하는 정치사상-근대편] 2강(11/18), 근대 국가주권은 어떻게 탄생했을까? 홉스 강의소개 보기 >> 클릭 1강 후기 보기 >> 클릭
△ <리바이어던>표지, '폭력을 독점하고 있는 가장 이성적인 집단'인 국가를 그림으로 보여주고 있다
0. 강의시작 2013년 11월 18일 첫눈이 내린 날, 느티나무 강의실에는 40여 명의 학생이 모였습니다. 김만권 선생님이 강의하는 ‘고전으로 이해하는 근대정치사상’ 두 번째 시간이었기 때문입니다. 김만권 선생님은 지난 시간에 수강생이 남긴 쪽지질문에 답을 해주면서 강의를 시작했습니다. 흥미로운 질문이 많았습니다. 이번 강좌에서 다루는 책을 모두 읽으셨는지, 또 그 책을 ‘고전’이라 할 수 있는지 등등. 김만권 선생님은 당황하지 않고(?), 답변을 해주었습니다. 선생님 말씀에 따르면, 홉스의 주저 [리바이어던]에는 근대국가주권은 어떻게 탄생하였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있다고 합니다. 실제로 [리바이어던] 원본은 4부로 이루어져 있는데, 보통 한국어 번역서는 1부와 2부까지 내용만 다루고 있답니다. 1부 ‘인간에 대하여’, 2부 ‘국가에 대하여’라는 타이틀이 달린 것을 보면, 홉스는 인간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국가를 설명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참고로 3부와 4부는 기독교국가와 신학적 해석에 대한 인간의 무지(암흑)을 다룬 내용이라고 합니다.
1. 홉스의 시대적 배경과 사상적 위치 홉스의 정치사상을 깊이 공부해보기 앞서, 자연인으로서 그가 살았던 시대배경을 알아보는 것도 중요하리라고 생각합니다. 마키아벨리와 유사하게, 신의 시대를 벗어나는 과도기로서 가치다원주의, 신념의 사유화 문제는 당시의 큰 이슈였습니다. 게다가 홉스는 내전(영국 시민전쟁)을 겪고 프랑스로 망명하는 등 역사적인 격동기를 보냈습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최초로 영역한 홉스는 ‘전쟁을 두려움, 공포에서 비롯된 것’ 이라고 지적하면서 자신의 탄생 역시 두려움과 관련짓습니다. 홉스의 사상을 이해할 때, 두려움 또는 공포는 중요한 단어인 것 같습니다. 영국의 시민전쟁 당시 의회파와 대립한 왕당파임에도 불구하고, 홉스는 로크, 루소와 더불어 대표적인 사회계약론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모든 권력의 유일한 정당성은 인민(the people)으로부터 나온다는 주장은 마키아벨리와 홉스가 가진 공통점입니다. 근대국가에서 오로지 인민만이 정당한 권력의 원천이 된다는 이야기는 ‘불안과 공포에 기반한 인민의 동의’를 전제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김만권 선생님은 ‘인민주권의 이론적 탄생’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습니다. 홉스의 이러한 발상은 로크의 시민정부, 루소의 인민주권이라는 이름으로 뻗어나간다고 합니다. 2. 사회계약론과 레비아탄 다시 말해, 홉스는 사회계약론으로 근대국가를 이론적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사회계약은 자연상태로부터 정치사회(국가)로 이행해 가는 과정을 정당화하는 일종의 이론적 도구인 것입니다. 여기서 자연의 상태란, 정치권위가 없는 아비규환의 상태를 의미하는데 홉스가 가설로서 만들어낸 상태입니다.(사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사회계약’이라는 것도 특정 시간, 장소에서 실제로 이루어진 ‘계약’은 아니지요.) 홉스가 이해한 인간의 모습을 따라가다보면, 자연상태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분쟁이 발생하였을 경우 이를 공정하게 해결하면서도 안정된 질서속에서 불안감없이 활동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국가와 계약을 맺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권리를 일부 양도합니다. 홉스는 국가를 상징하는 이미지로 ‘리바이어던’ 또는 ‘레비아탄’을 사용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바다괴물인 레비아탄은 고래, 용과 닮은 동물입니다. 왜 국가와 용의 이미지를 연결했을까요? 김만권 선생님은 홉스의 또다른 저작, [비히모스 – 1640~1660년 영국시민전쟁에 관한 대화]를 소개해주시면서, 근대정치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두 상징물을 알려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질서, 법의 지배’를 상징하는 바다괴물 ‘레비아탄’과 ‘아나키, 혼란, 혁명, 혁명에 가담한 인민’을 나타내는 육지괴물 ‘비히모스’입니다. 유대인 성경에 나오는 두 짐승의 싸움 이야기는 레비아탄의 승리로 끝이 납니다. 아무래도 혁명, 아나키에 상태에서 법의 지배 상태로 바꾸는... 즉, 혼란을 잠재우고, 질서를 잡아주는 국가(레비아탄)의 승리를 암시하는 듯합니다. 3. 시민의 권리없이 인간의 권리도 없다. 강의 후반부에 김만권 선생님은 ‘정치권위가 없는 상태(자연의 상태)’에서의 인간이 갖는 권리에 대해 이야기하셨습니다. 먼저 아래 지문을 살펴보시지요. 새로운 세계적 상황 때문에 수백만 명의 인간이 권리를 잃고 다시는 회복할 수 없어졌을 때, 우리는 권리를 가질 권리가 존재한다는 것과... 이 권리가 어떤 조직화된 공동체에 속할 권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평등하게 태어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동등한 권리를 상호보장하는 우리의 결정이 강력한 힘을 갖는 집단의 구성원으로서만 평등하게 된다. 우리의 정치적 삶은 우리가 조직을 통해 평등을 만들어낸다는 가정에 기대고 있다. - 한나 아렌트 권리를 가질 권리가 있다는 것, 그리고 그 권리는 특정한 공동체 내부에 속할 권리라는 아렌트의 말이 처음에는 쉽게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선생님은 정치권위가 있을 때, 비로소 권리가 존재한다는 말로 풀어주었습니다. 시민의 권리가 없다면 인간의 권리도 없다는 의미입니다. 난민, 미등록노동자, 재일동포 등 속해있는 국가가 없는 사람에게 ‘평등, 정의, 인권’이 주어지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국가없는 이들이 갖는 권리와 한 국가, 공동체, 정치적 권위 아래서 누리는 시민권은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시민권 없이는 인간으로서 어떤 보호도 받기 어려운 ‘현실’을 홉스의 정치사상 수업에서 절실하게 느꼈습니다. <질문>
<마음에 와 닿았던 문장>
글 : 자원활동가 이나단 / 편집 아카데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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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과 사건으로 보는 한국근현대사Ⅱ | [한국근현대사] 답사① 현대 정치의 뿌리를 찾아서 : 북촌 일원 | 느티나무 | 2013.11.16 | ||||
2013년 11월 9일 토요일 오전10시, 인물과 사건으로 보는 한국근현대사Ⅱ (현대 정치의 뿌리를 찾아서 : 북촌 일원)을 답사했습니다. 서울에서 볼 수 있는 가장 단풍이 아름다운 시기에 답사를 하게 되었는데요. 이신철교수님의 강의를 들으면서 <휘문고등학교 옛터> <송진우 집터> <김성수 고거> <여운형 집터> <홍증식 집터: 계동열성자대회> <건국준비위원회 터> <한규설 집터> <헌번재판소:박규수 집터> <수운회관> <건국빌딩>까지를 돌아보니 그 궤적을 이해하는데 수월했던것 같습니다. 답사에 함께 못하신 분들 참고하시라고, 아주 압축적으로 정리된 자료를 공유합니다^^ 지난 수업에서 잠시 공유했던 사진 구경도 제대로 하시라고 앨범도 공유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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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시민정치학교Ⅱ – 민주주의의 새로운 실험, 생활정치 | [나의 시민 정치학교Ⅱ] 5강, 우리 마을은 얼마인가 - 생활정치와 예산 | 장경환 | 2013.11.16 | ||||
강의를 처음 시작할 때 어떤 강의에 가장 흥미가 있는지에 대해서 얘기를 나눴던 기억이 있다. 그 때 나는 이번 강의인 예산에 대한 강의를 꼽았었다. 그리고 많은 수강생분들 또한 예산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최근 주민참여예산제도에 대한 소식을 여기저기서 듣고 있었지만 사실 예산에 대해서는 잘 몰랐었다. 그냥 정부에서 쓰는 돈 정도로만 생각했고 주민참여예산제도는 그냥 잘 아는 사람들만 하는 그런 건가 싶었다. 이번 강의는 좋은예산센터의 최인욱 사무국장님께서 강의를 해주셨는데, 전문가의 느낌이 물씬 풍기는 강의였다. 먼저 예산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셔서 ‘예산이란 무엇인가’를 주제로 강의를 해주셨다. 대학 수업에 온 것 같은 이론적인 강의였지만 예산에 대해 배우고 싶은 마음덕에 흥미있게 강의를 들을 수 있었다. 예산의 정의, 절차, 구성부터 시작해서 정부재정, 지방재정의 규모와 구조, 그리고 예산서 보는 방법같은 것들을 강의해주셨다. 이러한 예산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를 토대로 ‘지방재정의 위기’에 대해서 말씀해주셨다. 한 가지 사례로 일본의 ‘유바리 시’를 들어주셨는데 이 사례가 너무 웃겨서 집에 가는 길에서도 생각나서 웃었다. 탄광도시로 발전했으나 폐광 이후 쇠락한 도시인 ‘유바리 시’는 ‘탄광에서 관광으로’라는 슬로건을 걸고 개발사업 등에 몰입했다. 세입이 감소함에도 빚을 내고 민간사업을 인수하며 무리한 투자를 지속했고 재정 악화를 감추려 분식회계를 하기도 했다. 점점 재정상태는 악화되어 갔고 2006년 6월 파산을 선언하게 되었다. 이러한 ‘유바리 시’ 파산의 원인으로는 24년간 시장의 권력 독점, 지역의 견제역량 부족, 장기적 안목의 부재 등이 있었다고 하셨다. 중앙정부는 이렇게 파산한 ‘유바리 시’에 개입하게 되었고 공무원 감봉, 인력 감축, 공공서비스 축소, 세금인상 등으로 시의 파산의 부담을 주민들이 지게 되었다. 이 부분이 엄청 재밌었는데, 유바리 파산 후 유바리 다큐멘터리 투어라는 것이 생겼다. ‘이렇게 하면 파산한다’라는 걸 주제로 세계 여기저기서 견학을 온다고 한다. 정말 아이디어 하나는 놀라웠다. 그리고 ‘유바리 후사이’라는 캐릭터로 ‘돈은 없어도 사랑이 있다’는 메시지로 대회에서 수상도 했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사례로는 태백시가 있다. 태백시가 유바리 시와 많이 닮았다는 점이다. 과거 탄광도시다가 관광으로 부흥을 시도한 것도 같고 오투리조트 같은 대형 여가 시설을 만들기도 했다. 그로 인해 어마어마한 부채를 짊어지게 됐고 현재도 미래가 불투명 하다는 것이다. 재정 악화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는 도시는 태백 뿐만이 아니다. 2010 성남시는 ‘모라토리엄’을 선언하기도 했고 2012년엔 인천, 화성, 천안이 분식회계 지자체로 적발되기도 했다. 근데 이런 예산과 재정에 관련된 것은 구조적인 문제를 띄고 있다. 첫 번째로 수입을 늘릴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지자체가 지출을 조절할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또 설상가상으로 감세정책을 통해 세수가 크게 줄었고 세계 금융위기의 영향도 받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지방재정 개선을 국가 차원에서, 지방정부 차원에서 해법에 대해서 설명해주셨다. 그리고 최근에 시행된 주민참여예산제도에 대한 설명과 더불어 모범사례로써 2011년 총리상을 받은 서대문구의 사례, 2012년 대통령상을 받은 은평구의 사례, 광역차원에서 최초로 적극 시행한 서울시의 사례를 보여주셨다. 이러한 제도들을 통해 재정민주주의를 실현해야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납세자로써 개인적인 공부를 통해 예산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균형잡힌 시각, 그리고 적극적인 참여의지가 중요하다고 말씀하셨다 개인적으로 이번 강의는 강력한 메시지라기보단 예산에 대해서 많은 걸 배울 수 있어서 좋았다. 막연하게 생각했던 예산에 대해 쉽게 이해할 수 있었고 다양한 사례들을 접하면서 나 스스로도 좋은 사례가 될 수 있게 지역에서 노력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후에 기회가 된다면 살고있는 구에서 주민참여예산 위원에 신청해볼 생각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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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으로 이해하는 정치사상 - 근대편 | [고전으로 이해하는 정치사상-근대편] 1강, 마키아벨리-왜 도덕과 정치가 분리되었을까? | 기라 | 2013.11.14 | ||||
[고전으로 이해하는 정치사상-근대편] 1강(11/11), 마키아벨리-왜 도덕과 정치가 분리되었을까? 강의소개 > 클릭 ![]() 쌀쌀한 날씨가 무색하게 오늘 느티나무홀에는 뜨거운 기운이 돌았습니다. 김만권 선생님의 열정적인 강의는 물론, 홀을 꽉꽉 채우다 못해 의자만 놓고 앉은 수강생들의 공부 열기도 한 몫 단단히 했죠. <여러분들이 자신을 소개해 준 키워드입니다> 1. 이름(별칭), 2. 나를 오늘 웃음짓게 한 일, 3. 강의에 대한 기대(목표)
그리고 김만권 선생님의 이야기가 시작되었습니다. 한 시간 동안은 근대에 대해 고찰하며 강좌 커리큘럼을 훑어보았고, 나머지 한 시간 동안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중심으로 정치에서 도덕이 분리되는 이유를 살폈습니다. 1. 근대, 신이 사라진 시대의 가치 모든 견고한 것들은 공기 속으로 녹아들고, 칼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에 있는 구절입니다. 김만권 선생님은 이 글귀가 근대의 본질을 명확하게 표현하고 있다고 설명하십니다. 2. 니콜로 마키아벨리(Niccolò Machiavelli) 15세기 말과 16세기 초의 어지러운 이탈리아에서 태어난 마키아벨리는 널리 오해받고 있는 근대사상가들 중 한 명입니다. 마키아벨리의 대표 저작 <군주론>에서 정치가의 속임수나 간계를 허용함으로써 부패와 폭력의 여지를 남기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후의 저작인 <로마사 논고>를 보면 실제로 마키아벨리는 공화주의자였다는 것이 여실히 드러납니다. 3. 왜 <군주론>을 썼을까 공화주의자인 마키아벨리가 1인의 절대군주를 지향하는 듯한 <군주론>을 쓴 이유는 크게 네 가지로 풀이되는데 꽤 흥미로워서 후기에도 남깁니다. 4. 포르투나(fortuna)와 비르투(virtú) 운명이 우리가 하는 일의 절반을 지배하고 있다면, 나머지 절반은 인간이 통제할 수 있다. 포르투나는 운명의 여신입니다. 고대 사람들은 운명을 통제할 수 없는 것으로 보았고, 대신 그를 당당하게 받아들임으로써 인간이 위대해질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호메로스의 <일리아드>나 <오디세이>를 보면 운명을 알면서도 피하지 않은 채 위험에 뛰어든 용기 있는 자들의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5. 마키아벨리 군주론의 본질 예측할 수 없으나 저항하라, 그것이 인간의 자유다 포르투나가 지배하는 세상 속에서는 나쁜 운명이 닥쳐와도 이를 잘 파악하고 대처할 수 있는 사람이 훌륭한 군주일 것입니다. 절반의 가능성을 자기편으로 만드는 군주 말입니다. 곧 '변화하는 환경을 끊임없이 살피고 적응'하는 것이 좋은 정부 또는 지도자의 비르투입니다. 6. 진보와 도덕주의 마키아벨리가 말한 정치의 목적은 ‘영광의 달성’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 즉 변화에 대응하는 과정에 거짓말이라던가 속임수라던가 엄한 형벌이라던가 하는 것들이 들어가도 괜찮습니다. 이 지점에서 정치와 도덕이 분리됩니다. 후기 마무리로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시인 '임시야간숙소'를 떠올려 봅니다. 우리가 읽은 것처럼 임시야간숙소는 도덕적인 방편이긴 하나 근본적으로 문제를 해결하지는 않습니다. <마음에 와 닿았던 질문>
<강의에서 들었던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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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과 사건으로 보는 한국근현대사Ⅱ | [한국근현대사] 5강, 권력을 향한 돌멩이질 : 이기붕과 김주열 | 김혜수 | 2013.11.14 | ||||
3강 후기 보기 >> 클릭 4강 후기 보기 >> 클릭 6강에서는 1950년대 이후 시대상황에 대해 배울 수 있었습니다. 비교적 최근과 가까운 시점의 사건과 인물에 대한 것이어서 더욱 재미있었던 것 같은데요~!(그나마 조금 이해하기 쉬운 부분이 나와서 좋았어요!!!^^) 먼저, 격동의 시대에 대해 정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958년 경향신문 폐간, 보안법 파동 1959년 자유당 선거자금 모금 1960년 민주당, 부정선거 반대 운동(마산에서 시위를 시작) 3.15 부정선거(“부정선거무효”라는 시위 구문이 “이승만하야”로 바뀜) 4.18 고대생시위 4.19 비상계엄선포 4.25 교수단 데모 4.26 이승만하야 4.28 이강석(이승만의 양자), 이기붕, 박마리아, 이강옥 가족이 모두 자살 5.29 하와이 망명 여기서 이기붕(1896~1960)에 대해 좀 더 살펴보면, 그는 해방이후 이승만의 비서를 지냈으며, 자유당을 창단하였다. 1956년에는 자유당 공천으로 부통령에 입후보하였으나 낙선하고, 1960년 대통령선거 때 공개·부정 선거로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4·19혁명이 일어나 결국 부통령을 사임하고, 경무대에 피신에 있다가 장남이 권총을 쏘아 전 가족이 자살하고 만다. 권력을 향했던 돌맹이질이 결국 자신에게로 되돌아간 것 같네요...! 수업의 주제가 이기붕과 김주열이니, 김주열에 대해서도 알아봐야겠죠? 그는(1943~1960) 1960년 마산상고 1학년의 몸으로 3.15 부정선거에 항거하는 데모에 참가했다가 행방불명, 4월 11일 왼쪽 눈에 최루탄이 박힌 시체로 마산 앞바다에서 발견됩니다. 이 사건이 불씨가 되어 민중의 분노가 다시 터졌고 결국 자유당 정권이 무너지게 된 것이죠. 저는 이렇게 안타까운 사건을 마주하게 될 때면 항상 ‘나라면 어땠을까, 데모에 참가했을까?’ 라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글로 읽기는 쉽지만 정말 그 상황 속에 처해있다면 그저 당연한 것이 아니기에 한 번 상상해 보는 것이겠지요. 그래서 그렇게 어려운 결정을 한 사람이 처한 상황이, 그 시대가 더욱 안타깝게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부정선거로 인한 국민의 분노는 당시의 시대상황인 것 같지만은 않기에 우리는(특히 저는) 역사를 배우고 그들을 기억해야만 할 것입니다. 이렇게 힘들고 고통스럽게 수많은 희생으로 지켜낸 민주주의를 우리는 왜 또다시 위협받아야 하는 것일까요? . . . 다시 지켜낼 수도 있으리라 믿습니다. Q&A 시간에는 전교조 불법화의 영향에 대한 것과 독립운동/민주화운동이 근현대사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는 내용을 언급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럼 다음주에 만나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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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시민정치학교Ⅱ – 민주주의의 새로운 실험, 생활정치 | ['나'의 시민 정치학교Ⅱ] 4강, 지역 생활정치의 현실 | 미요이 | 2013.11.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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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과 사건으로 보는 한국근현대사Ⅱ | [한국근현대사] 4강, 전장의 민중 : 금순이는 어데로 가고 | 김혜수 | 2013.11.7 | ||||
3강 후기 보기 >> 클릭 굳세어라 금순아 - 월남과 피난 : 전쟁폭격을 피해서 내려간 사람들, 피난민/이산가족 - 월북과 납붑 : 단장의 미아리고개 - 국군포로 죽어간 민중들 - 평화에 대한 개념 -> 군대를 자연스럽게 생각하는 문화 - 보도연맹원 학살 ◆ 보도연맹 사건 :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때, 대한민국 대통령 이승만은 초기 후퇴 과정 중 ‘보도연맹에 가입된 사람들이 조선 인민군이 점령한 지역에서 협조할 것.’이라는 의심을 했다. 보도연맹원이나 양심수가 북한과 내응하고 뒤에서 배신할 수 있는 존재라고 생각하고 우려한 대한민국 정부와 대한민국 국군(주로 헌병대), 경찰 또는 교도소 교도관들은 '북한군에 아직 점령되지 않고, 확보해두고 있는 남부 지역'의 보도연맹원들을 무차별 검속하고 즉별 처분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경찰과 서북청년단같은 반공주의 성격의 극단적인 우파단체가 보조적인 역할을 담당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볼 때에 보도연맹 학살사건은 우발적인 학살이 아닌 철저히 일관된 명령체계에 의해 자행된 조직적인 학살이었다. ※ 위키백과 참고
- 진주외공리 ‘사라진 사람들-1951년 외공리’ 는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에 관한 진상규명의 유형 속에 철저히 예외적 사건에 속하며, 국가차원의 그 어떤 조사자체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산청군 외공리 사건에 대한 전말을 밝히고자 하였다. 좀 더 생각해봐야 할 문제(키워드) 국가보안법, 빨갱이콤플렉스, 과거청산, 월북 살아있는 것이 역사, 살아남아야 하는 것이 전쟁 이라는 말로 마무리 하도록 하겠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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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과 사건으로 보는 한국근현대사Ⅱ | [한국근현대사] 3강, 계급과 민족, 그리고 좌우합작 :박현영, 김일성, 여운형 | 김혜수 | 2013.11.7 | ||||
안녕하세요. 인물과 사건으로 보는 한국근현대사∥ 의 자원활동가입니다. 인사가 늦어져서 너무나 죄송합니다. 앞으로 강의 후기를 부지런히! 열심히!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 10.24(3강)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하도록 하겠습니다. <계급과 민족, 그리고 좌우합작 :박현영, 김일성, 여운형>이라는 주제로 수업이 진행되었습니다. 수업내용을 다시 한 번 살펴보기 전에, 근현대사 강의를 2학기 째 수강하고 있는 저를 항상 따라다니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바로 수업내용이 항상 새롭다는 것인데요, 좋게 말하면 새로워서 흥미롭다는 것이고 다른 쪽으로 생각해보면 몰라도 너무 모른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름 사회과목을 제일 좋아하고 역사도 잘했던 것 같은데...저는 왜 수업시간 마다 처음 듣는 얘기로 가득한 걸까요? 혼자서 곰곰이 생각해보니, 고등학교1학년 이후로는 역사를 접한 기억이 없던 것이었습니다. 수능을 볼 때 역사를 선택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이렇게 모를 수 있나 싶기도 하지만, 지금이라도 하나하나 알아갈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이고 기쁜일인지요! 서론을 이렇게 길게 말하는 이유는, 그래서, 제가 아는 것이 너무 없어서 수업내용을 충실히 정리하여 옮기지는 못하겠고 저에게 있어 인상 깊었던 것, 중요한 것, 앞으로 생각해 볼 점 등을 위주로 후기를 작성하겠다는 말을 조심스레 전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럼 정말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
1. 김일성(1912~1994) 과 조선인민혁명군 김일성의 연혁을 살펴보며, 그가 어떤 생애를 살았는지, 어떻게 신화가 제작 되었는지 등 배울 수 있었습니다. 민족주의와 기독교의 영향, 중학생 때부터 중국에서 활동 1931년 중국공산당에 가입 1936년 조국광복회 조직 1937년 보천보 전투 ◆ 보천보 전투 : 중일전쟁 직전 함경남도 갑산군 혜산진 보천보에서 동북항일연군 항일군이 일제 관공서를 공격 후, 포고문과 격문 살포한 사건 -> 김일성의 존재를 알리고 신화가 만들어지는 계기가 됨, 중국공산당 내 새로운 부대 대장 1945년 조선공작단 ◆ 조선공작단 : 동북항일연군에서 활동하던 세력 가운데 일본군의 공세로 1930년대 말부터 1940년대 초에 소련 지역으로 피신한 이들로 88여단이 구성되었다. 소련은 1945년 독일이 패배하고 일본제국의 패망이 임박하자 88여단 내에 있던 조선인들로 ‘조선공작단(단장: 최용건)’을 결성 하고 유사시 입북을 준비하게 하였다. 이때 김일성은 동북항일연군교도려단 조선공작단 정치군사 책임자였으며, 뒤에 소련군 소좌로 승진했다. /소련군과의 연합작전
◆ 민생단 사건 : 1930년대 간도 지역에서 수많은 조선인 항일운동가들이 민생단과 관련된 일본 첩자라는 혐의를 쓰고 중국공산당에 의해 체포, 살해된 사건이다.
2. 박헌영(1900~1955) 1925년 조선공산당 창립 : 1925년 조직된 우리나라 최초의 공산당. 러시아혁명의 성공은 우리나라 독립운동에 큰 영향을 미쳐 사회주의 사상이 적극 유입되고, 윌슨 미국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와 파리 강화회의 결과에 실망한 독립운동세력의 일부는 약소 피압박민족의 해방투쟁에 적극적인 코민테른에 기대를 걸면서 그 지원 하에 독립을 쟁취하고자 했다. 1946년 남조선노동당 조직 : 1946년 박헌영(朴憲永)을 중심으로 11월 조선공산당, 조선인민당과 남조선신민당(여운형이 창단) 3당이 합동하여 남한에서 좌익정당들은 세력을 재정비하기 위해 결성했다. ◆ 1945년 북조선 노동당 창당 : 강령으로 민주주의적 조선자주독립국가 건설, 일본인 ·민족반역자 ·지주의 토지몰수와 토지 없는 농민에게 무상분배[토지개혁], 일본인 및 민족반역자 소유의 공장 ·광산 ·철도 ·운수 ·통신기관 등의 국유화, 8시간 노동제 실시, 여자들에게 남자와 동등한 임금 지급 등을 내걸었다. 위원장에 김두봉, 부위원장에 김일성, 허가이가 선출되었다. ※ [네이버 지식백과] 참고
김일성이란 인물과 당시 북과 남의 시대상에 대해 자세히 살펴 볼 수 있어 유익한 강의 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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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시민정치학교Ⅱ – 민주주의의 새로운 실험, 생활정치 | ['나'의 시민 정치학교Ⅱ] 3강, 나의 필요가 정치와 만나는 순간 | 장경환 | 2013.11.4 | ||||
[나의 시민정치학교Ⅱ] 3강(10/29), 나의 필요가 정치와 만나는 순간 강의소개 보기 >> 클릭 1강 후기 보기 >> 클릭
2강 후기 보기 >> 클릭
이번 3강에서는 ‘나의 필요가 정치와 만나는 순간’이라는 주제로 생활의제가 어떻게 정책으로 반영되고 결정되는지에 대해 서강대학교 현대정치연구소에 계신 서복경 선생님께서 강의를 해주셨다. 처음엔 수강생들의 관심사들에 관해서 정리해보는 시간을 가졌다. 1. 현재 내 생활에서 가장 시급한 문제는 무엇인지? 2. 이 문제는 어떤 정부정책이 바뀌면 해결될 수 있을까? 3. 정책변화를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어떤 과정이 필요할까? 4. 이 문제는 언제쯤 해결이 가능할까? 위 문제들에 대해서 각자 종이에 적어보면서 강의를 계속 들었다. 그리고 생활정치란 정의하기 나름이지만 우리의 필요가 정치화할 수 있는지에 대한 문제가 중요한 것이라고 말씀해주셨다. 지난 두 번의 강의가 생활에 관련된 내용이었다면 이번 강의는 중앙정치가 유권자들의 삶의 문제를 어떻게 다뤄왔는지, 어떻게 다루는지에 대한 내용이었다. 법의 개정과정이나 역사에 관한 강의형식이어서 평소에 역사에 관심이 많아서 재밌게 들을 수 있었다. 먼저 선생님께선 어르신들은 어떻게 “기초노령연금을 받게 됐는가“에 대한 역사적인 부분을 강의해주셨다. 기초노령연금은 현행제도이고 국가재정으로 지급하고, 65세 이상, 하위 70% 노인들에게 10만원을 지급하는 연금이다. 이 연금은 자신의 보험료로 연금을 받는 국민연금제도를 보완하는 연금제도이다. 기초노령연금의 제정과정은 1988년 첫 시행되었고 IMF를 거쳐 구조조정이 단행되고 2000년부터 우리나라의 노인인구가 7.1%를 넘어가면서 고령사회로 진입하게 되었다. 2002년엔 국민연금이 4-50년 뒤에 고갈될 것이라는 10대 의혹이 확산됐다. 그 후 2003년에 국민연금제도의 정상화를 위해 노무현 정부가 국민연금제도 개정안을 제안했다가 무산되었고 2004년에 한나라당이 국민연금제도를 보완하기 위한 기초노령연금제도의 도입을 제안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2007년 기초노령연금법과 국민연금법의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하게 되었고 그것이 이어져 현행제도가 되었다. 이러한 제정과정에 대한 설명 후 ‘한나라당이 기초연금제를 도입했던 이유’에 대해서 말씀해주셨다. 2002년 대선 토론 때 국민연금에 대한 고갈 의혹에 대해 당시 노무현 후보는 국민연금을 감액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반면 이회창 후보는 국민연금 감액은 불가피하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첨예한 대립 가운데 노무현 후보가 당선됐고 2004년 총선때 탄핵의 역풍으로 열린우리당이 제 1당이 됐다. 대선에서 패배하고 총선에서도 수세에 몰린 한나라당 측은 2002년 대선에서 65세 이상 국민들에 대해 잃어버린 100만 표를 절치부심하는 뜻으로 되찾기로 결심했다. 그 결과 2004년 12월 기초연금제도 도입을 주장했다. 이 기초노령연금의 사례는 사회집단의 선거 득표파워가 정책으로 연결된 사례라고 설명해주셨다. 보통 득표파워가 꼭 정책파워로 이어지지는 않는데 말이다. 65세 이상의 인구가 많아서 노령연금이 생긴게 아니다, 즉 머리수가 많다고 꼭 그것이 정책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그 머리수가 자발적이든 동원된 것이든 조직되어있어야 한다. 이 사례에서 65세 이상의 노인들은 자발적으로 조직됐다기 보단 동원된 집단이었다. 그리고 그 노인들을 하나의 집단으로 조직하는 데 큰 공을 세운 건 대한노인회였다. 생활의제가 정책으로 연결된 사례인 기초노령연금이 아쉬웠던 건 자발적으로 조직된 집단이 아니었다는 것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동원되지 않은 자발적으로 조직되어야되고 집단적으로 원하는 게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모인 머리수가 정책형성에 영향력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 강의내용의 중심이었다. 두 번째로는 전교조가 법 밖으로 쫒겨난 이유에 대해서 설명해주셨다. 1989년 결성되서 불법 노조형식으로 유지되었던 전교조는 김영삼 전 대통령이 OECD에 가입할 때 OECD가 교사/공무원의 결사의 자유를 요구한 것이 계기가 돼서 1999년 교원노조법으로 인해 합법화되었다. 그 후 이명박 정부 때 전교조 규약계정을 요구했고 박근혜 정부 때 대통령 령 9조 2항에 의해 설립 신고서가 반려되었다. 즉, 전교조를 법외단체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이에 대해 OECD가 왜 교사 공무원 결사의 자유를 요구했는지에 대해 설명해주셨다. 교사 공무원 결사의 자유는 사회결사의 자유의 바로미터가 되기 때문이고 결사의 자유는 그 사회 민주주의 질의 바로미터가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익/견해에 따른 결사체는 민주적 다수형성의 뿌리가 되기 때문에 이익집단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동원되지 않은 자발적 결사가 가능해야 민주적이고 안정적인 다수형성이 가능하다는 말씀도 해주셨다. 1,2강을 통해서 생활정치가 무엇인지에 대한 포괄적인 설명을 들었다면 이번 3강에서는 생활정치가 실제 중앙정치와 어떻게 연관될 수 있는지 그리고 결사체에 대한 의미와 자발적인 결사체가 어떤 의미에서 중요한지 배울 수 있는 시간이었다. 선생님의 강의를 마치고 위에서 얘기했던 1번부터 4번까지 내용을 토대로 테이블 별로 얘기를 나눴다. 개인적으로 테이블 토크를 하면서 과연 정책이 내 삶에 실질적으로 영향을 끼칠 수 있을까 라는 약간은 회의적인 생각도 해봤다. 글 : 자원활동가 장경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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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시민정치학교Ⅱ – 민주주의의 새로운 실험, 생활정치 | ['나'의 시민 정치학교Ⅱ] 2강, 생활정치의 쟁점과 과제 | 미요이 | 2013.10.31 | ||||
[나의 시민정치학교Ⅱ] 2강(10/22), 생활정치의 쟁점과 과제 강의소개 보기 >> 클릭 1강 후기 보기 >> 클릭 ![]() 오늘은 ‘생활정치의 쟁점과 과제’라는 주제로 서원대 사범대학의 정상호 교수님이 수업을 해주셨다. 나는 첫 수업 때 빠졌던 터라 생활 정치에 대해 어느 정도의 느낌만 가지고 있었는데, 저번 시간과 다르게 이번 시간에는 좀 더 학문적으로 주제에 대해 접근하는 것 같았다. 한국의 풀뿌리 민주주의와 관련된 여러 자료들을 제시하면서 선생님은 다음과 같은 설명을 하셨다. <지방정치, 생활 자치에 대하여> 1. 2004년 1월 법 시행 이후 현재까지 8번의 주민투표가 시행될 만큼 그동안 법적·제도적 측면에서의 지방자치제도의 진전이 있었다. 2. 브라질로부터 도입한 주민참여예산 설정에 있어서 주민들의 더 많은 참여가 필요하다. 3. 그러나 지방정치의 정당정치화, 미약한 지방분권, 여전한 무능과 부패는 아직도 해결해야 할 과제. 또한 실질적인 권한 부여보다는 단순한 의견수렴에 치중한 주민참여예산도 문제. 4. 생활정치는 노동계급이나 국민이 아닌 새로운 정치적 주체로서 ‘성찰적 시민’을 만들어낸다. 또한 기존에 간과되었던 정치적 의제와 영역을 새롭게 부각시키고 지역 공동체에 기반한 주민들 간의 수평적 네트워크를 형성한다. <생활정치 모델의 과제, 풀뿌리 생활경제와 2014년 지방선거> 1. 풀뿌리 생활경제는 비가격적 요소인 사회적 요소과 강화되는 생산과 소비를 통해 기존 시장에 대한 의미변화를 가져온다. 2. 자본 중심의 세계경제보다는 사람 중심의 지역경제가 더 나은 세계화의 토대라고 보는 관점. 3. 경제는 원래 ‘사회적’이었다는 개념적 접근 4. 내년이 선거인데도 불구하고 지방선거의 ‘정당공천제’ 논란이 아직도 해결되지 않고 있음. 5. 이제는 외국의 견학을 넘어 우리만의 자생적 마을 모델을 만들어야 함. ![]() 설명이 끝난 후 각 조는 수업내용을 주제로 토론을 하며 몇 가지 질문들을 준비했다. 10대와 고령화 인구가 서로를 상호보완하며 함께 소통할 수 있도록 하는 정책, 아파트 동 대표를 중심으로 구성되는 한국형 풀뿌리 민주주의, ‘생산’이 없는 도시로서의 서울에서 소비자로서의 서울 시민의 특성을 잡아보는 것, 대학교 안에서의 풀뿌리 민주주의, 사회적 기업들을 시민들에게 소개할 수 있는 축제, 지방선거제도 확립을 통한 생활정치의 한국화, 토착화 등 생활정치와 관련된 다양한 의견들이 나왔다. 이에 대해 답변하면서 선생님은 이 강좌를 수료하기 전 까지 ‘자신의 지역에 맞는 5대 생활정책’을 만들어 보내달라는 숙제를 남기시고 수업을 마무리 하셨다. 아직 대학생인 나에게 생활정치는 크게 와 닿는 무언가가 아니다. 선거 경험도 한 번밖에 없을뿐더러 꽉 채워진 학교 일정 때문인지 지역 중심의 활동에 관심을 둘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노원구에 거주하는 나는 동네 구석구석에 여러 가지 사회적 기업과 협동조합들에 관련된 홍보물이 붙어있는 것을 보면서 ‘이런 것들이 운영되고 있구나.’ 하고 뿌듯해할 뿐이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우리 과 과장오빠가 나에게 학과 행사에 동참해달라는 것도 문자를 보내는 것도, 아파트 동장 아저씨가 놀이터를 주차장으로 바꾸는 것에 대해서 주민투표를 받았던 것도 하나의 생활정치인 것 같다. 법안 발의 등의 손에 잡히지 않는 큰 차원의 정치보다 생활정치는 좀 더 우리의 일상과 맞닿아있고, 그렇기 때문에 더 깨끗하고 시민 중심적으로 운영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보았다. 오늘 강의를 들으면서 앞으로 듣게 될 수업들에 대해 더 많은 기대를 하게 되었다. 또 선생님이 던져주셨던 숙제(5대 생활정책)를 수업을 듣는 나머지 기간 동안 고민하게 될 것 같다. 글 : 자원활동가 전미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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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종교의 이해Ⅱ | 세계종교의 이해2를 듣고 | 오하나 | 2013.10.30 | ||||
오강남 선생님께 선생님, 매주 월요일 저녁마다 좋은 이야기를 들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다양한 종교를 간략하게나마 소개받으면서 시공간적 태생이 서로 다른 종교 모두가 결국 어떤 '하나'에 가까워지기 위해 고뇌한 인간들의 정수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선생님의 유머와 유머 사이의 쉼표 같았던 순간들도 기분 좋았습니다. 소통할 수 있어서 기뻤습니다. 이 강의를 위해 힘써주신 관계자 여러분께도 감사드립니다. 끝으로 이 강의를 수강하진 못했지만 무척이나 듣고 싶어 했던 친구의 이야기를 남깁니다. ------------------------------------------------------------------ ㅎㄴ가 오강남 선생님의 강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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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종교의 이해Ⅱ | [세계종교의 이해Ⅱ] 8강<노장와 장자 그리고 신도와 동학> 종강후기 전합니다^^ | 느티나무 | 2013.10.3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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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수님께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어렸을 때 부터의 ‘의문’ ... 종교에 대한 모든 의문들이 많이 풀렸습니다. 건강하세요.
- 뜻깊은 시간이었습니다. 좋은 강의 감사합니다.
- 동학에 대한 새로운 발견. 동학 공부를 제대로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네요. 장자도 다시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도 많이 듭니다. 선생님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 여러 종교에 대한 깊이 있는 설명, 감사하게 잘 들었습니다.
- 감사합니다. 뭔가 정학하게 딱 집어서 말할 수는 없겠지만 뭔가 외연이 넓어진 느낌입니다. 다시 한번 만나 뵐 수 있는 강좌가 있기를 기대해 봅니다. 장자는 꼭 읽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 선생님 감사드립니다. 더 자유로워지는 그날까지 많이 이끌어주세요.
- 너무 좋았습니다. 많이 배웠습니다.
- 그 간 유연하고 유쾌한 명강의! 감사합니다. 넓어진 느낌 자축합니다!
- To. Sir ... With love & respect!
- 여러 종교에 대한 흥미와 자극을 환기시켜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의 사유를 확장시키는데 앞으로 도움이 많이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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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종교의 이해Ⅱ | [세계종교의 이해Ⅱ] 7강, 유교와 신유학 | 기라 | 2013.10.28 | ||||
1강 후기 보기 > 클릭 2강 후기 보기 > 클릭 3강 후기 보기 > 클릭 4강 후기 보기 > 클릭 5강 후기 보기 > 클릭 6강 후기 보기 > 클릭 오늘은 지난번의 유교 강의에 이어 공자를 마저 배우고, 차례로 맹자, 신유학까지 함께 공부했습니다. 1. 공자의 의(義)와 맹자의 사양지심(辭讓之心) 공자가 말한 ‘의’는 옳은 일이면 상관하지 않고 하는 태도입니다. 이득을 추구하는 태도인 ‘이’와 대조되는 개념이죠. 교수님께서는 요즘은 다들 ‘이’를 따져서 문제라고 하셨습니다. ‘이’를 요즘 말로 바꾸면 ‘경제’잖아요. 우리는 자본주의, 경제제일주의를 당연하게 여기고 ‘이’를 따지는 데 익숙한 나머지 그 폐해에 대해서는 간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를 생각하면 경우에 상관없이 자연히 ‘의’가 상하게 됩니다. 교수님께서는 그 이치를 나무 베는 것에 비유해서 풀어주셨는데 참 잘 와 닿더라고요. 맹자 또한 양혜왕이 나라에 무엇이 이로울지 말해 달라 하자 ‘왜 이를 말하느냐’고 꾸짖었습니다. 왕이 이를 말하면 신하도, 백성도 할 것 없이 이를 추구하게 될 것이고 나라가 어지러워질 것이라면서요. 이러한 유교 사상 때문에 전통적으로 우리나라는 사농공상이라 하여 상인을 가장 천하게 보았던 것이고, ‘이’를 추구하는 자는 도둑이라는 말까지 있었던 것이죠. 하지만 지금은 시민, 공무원, 대통령 할 것 없이 ‘이’를 말하지, ‘의’를 말하는 사람이 드뭅니다. 교수님께서는 각 나라의 지도자들은 남의 나라, 내 나라 할 것 없이 나라를 훔쳐 먹고, 성직자들은 사람의 마음을 훔쳐서 먹는다고 지적하셨습니다. 공자는 “언제나 사람의 인격을 목적으로 대하고 수단으로 대하지 말라” 했거늘 이 세상에는 물질을 갖기 위해 사람을 이용하는 일이 너무 비일비재합니다. 저는 오늘날의 사양지심이 드문 세태 또한 ‘이’를 추구하는 태도와 연결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양지심은 유교에서 중시되는 맹자의 '사단'의 세 번째 덕목입니다. 사양하고 양보할 줄 아는 마음이죠. 교수님께서는 우리나라에는 이제 사양지심이 없다며 아는 사람끼리만 양보하지 모르는 사람에게는 절대 양보하지 않는다고 비판하셨습니다. 남을 모르고, 내 인격은 뒷전으로 한 채 이익 챙기는 데 급급한 현대인들의 생활방식에서는 양보와 사양을 기대하기가 힘들겠죠. 2. 고래도 춤추게 하는 성선설, 노력하도록 채찍질해주는 성악설 맹자는 성선설을 말한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반대로 순자는 성악설을 가르치죠. 중학교 때 친구들과 성선설이냐 성악설이냐를 놓고 옥신각신했던 기억이 새록새록 나는데, 교수님께서는 이 둘이 궁극적으로는 같은 바를 지향하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바로 소인에서 군자, 성인으로 ‘변화’하는 것이지요. 단지 변화를 위한 성선설의 방법과 성악설의 방법이 다른 겁니다. 맹자의 성선설은 ‘너는 군자의 기질이 있으니 최선을 다해 성인으로 거듭나거라’하면서 칭찬을 통해 동기부여를 합니다. 순자의 성악설은 ‘우리 모두와 마찬가지로 너는 소인배에 불과하니 정신 차리고 열심히 노력해서 위대한 성인이 되거라’는 식으로 자극하여 변화를 유도합니다. 오강남 교수님께서는 요즘의 트렌드는 맹자의 성선설에 가깝다고 하시네요. 제가 보기에도 기왕이면 좋은 말로 격려를 해주는 편이 더 낫지 않을까 싶습니다. 3. 우리나라의 보배, 신유학 신유학은 유교 2탄이라기 보다는 불교, 도가 사상까지 아우르는 일종의 거대한 종합 사상체계입니다. 수, 당대를 지나 송대에 와서 일종의 유교 부흥 운동처럼 발전하기 시작한 것이 지금 우리가 신유학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성인이 되기 위한 가르침을 모았다고 하여 성학이라고도 부릅니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만주족의 청 왕조가 들어서면서 신유학의 계보가 거의 끊기다시피 했습니다. 대신 우리나라에서 주자학을 중심으로 계속해서 신유학이 발전할 수 있었고, 현재 한국은 유교의 종주국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생활 속에 유교 전통이 많이 남아있습니다. 어떤 학자는 ‘한국에 이렇게 기독교인이 많은 게 부끄러운 거다’라고 까지 말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좋은 우리의 유교를 놔두고 왜 남의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냐는 거죠. 다소 과장된 표현이긴 하지만 유교를 청산해야 할 악습처럼 생각하는 현대인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말이기도 합니다. 남녀, 스승과 제자, 부모, 형제 등의 관계 간에 서열을 만든 것은 유교의 잘못된 형식주의입니다. 사실 유교는 ‘의’를 비롯하여 마음에 새기고, 머리에 담아두었다가 계속해서 꺼내보아야 할 좋은 가르침을 듬뿍 담고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세계에 공헌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가 신유학을 연구하는 거라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다고 합니다. 저부터도 그동안은 ‘유교’하면 고리타분하다거나 딱딱하다는 인상부터 떠올렸으니 안타까운 일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마음을 열고 유교에 관심을 가질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오늘은 강의 내용 중에서도 몇 가지만 추려서 후기를 썼습니다. 맹자의 다른 가르침들이나 신유학의 구체적인 내용, 도교 이야기를 빠뜨려 성에 차지는 않지만 간결한 후기도 괜찮지요? 사실 이 게 저의 마지막 후기입니다. 부득이한 사정으로 다음 주에 있을 마지막 강의에는 갈 수가 없어서요. 성대한 뒷풀이도 있을 텐데...... 씁쓸합니다. 다음 시간에는 도교를 마저 배우고 동학에 대해서도 알아볼 수 있다고 하니 다른 분들이 잘 들으신 뒤에 저 대신 후기 좀 올려주세요.ㅎㅎ 저의 굴곡의 2013년을 세계종교 강의로 어루만져주신 오강남 교수님 감사드립니다! 강의를 위해 힘쓰신 참여연대 분들, 함께 수업을 들은 다른 수강생 분들도 모두 수고하셨어요. 또 만나요. 언젠가, 어딘가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