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를 시작하시면서 안병진 교수님의 유럽식 정치와 미국식 정치를 설명해 주시는 방식이 인상 깊었다.
그 전 강의와 강사님들(박상훈 도서출판 후마니타스 대표, 서복경 서강대학교 현대정치연구소 연구원)을 유럽식 정치를 지지한다고 안병진 교수님 자신은 미국식 정치를 지지한다고 설명하시면서 한국에서 학회에서 조차 미국식 정치를 지지하고 그 장점을 얘기할 때 엄청난 반대에 부딪친다는 얘기로 강의를 시작하셨다.
그 이후 미국 정치에 대해 미국 민주당, 빅 데이터, 무브온 등을 설명하셨다.
빅 데이터에 대해선 현재가 빅 데이터에 시대이며 미국 정치는 빅 데이터를 활용해 개인의 생각까지 예측하려고 하는 잘 잡힌 체계를 갖고 있으며 그것에 위험에 대해서도 얘기하셨다. 그 반면에 한국 정치는 지난 대선 예로 들면서 새누리당에 비해 민주당이 데이터를 예측하고 활용하는 것을 잘 못한다고 설명하셨다.
그리고 강의는 무브온 위주로 진행되었는데 정치와 시민운동의 결합 그리고 그 한계를 배울 수 있었다. 무브온의 성과와 엘리트 위주의 정치 캠페인이 아닌 시민들의 자발적인 움직임이라는 부분에서 굉장히 흥미 있는 부분이었지만 오바마 대통령 당선 이후의 정치를 바꿨는가 하는 부분에서 안 교수님의 회의적이 지적을 하셨고 오바마 대통령의 실정에 대해 설명하셨다. 이 부분이 참 아쉬웠다.
서두에 얘기했던 유럽식 정치와 미국식 정치를 한국에 도입한다 했을 때 안병진 교수님은 현실성에 주목했고 미국식 정치 도입의 한 방법으로 무브온을 설명하셨다. 그리고 한국에 실제로 무브온을 도입하기 위해 했던 활동들도 얘기하셨는데 이 부분도 흥미있었다.
강의를 듣다 내가 느낌점은 지금 시민정치에 대한 강의를 듣고 있지만 시민정치는 시민정치의 역활이 있고, 의회의 정치는 의회 정치의 역활이 있지 않나라는 생각이 든다. 솔직히 이 강의를 신청하면서 기대했던 건 '의회 정치를 움직일 수 있을만한 거대한 시민 정치' 뭐 이런 기대도 했었지만 강의를 들을 수록 오히려 시민정치의 한계와 역활이 분명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결국은 시민정치와 의회정치가 같이 움직이지 않으면 현재 정치 상황은 변하지 않는다. 권력을 잡은 사람은 혹은 정당은 바뀌겠지만 그 내용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이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정치라는 그 내용까지 바꾸기 위해선 시민정치도 의회정치도 같이 바뀌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여러 시민 정치에 형태에 대해 배워 보는 건 재미있었고 이 날 강의에서 들은 무브온도 역시 재밌었다. 시민정치의 가능성에 대해 공부할 수 있어 좋았다. 그리고 일반 시민인 나로써 시민 정치에 어떻게 참여할 것인가? 시민 정치에 참여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시민정치에 혹은 의회정치에 요구 할 수 있는가? 이런 고민들도 할 수 있는 시간이어서 좋았다. (끝)
[아카데미느티나무]인물과 사건으로 보는 한국근현대사 8강은 주진오 교수님의 뒤를 이어 박 찬 승 교수님께서
진행해 주셨습니다. (반갑습니다. 교수님 *^^*)
<총독의 일기 : 역대 조선총독과 지배정책>이라는 주제로 수업을 했었는데요, 일본의 식민지배에 대해 배울 때, 조선총독에 대해 이렇게 자세히 배운 건 처음인 것 같습니다. 조선총독에 연보와 지배정책, 또는 일기 등을 살펴보니 의외의 내용도 알게 되고 무척이나 흥미로웠습니다.
수업내용은 프린트에 자세히 나와 있으니 제가 인상 깊었던 부분과 Q&A 시간에 다뤄졌던 내용을 중심으로 정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무라이 정신 : 조선총독들은 대부분 사무라이 정신을 가지고 있던 일본인들이었는데요, 강압적이고 권력지향적인 특징을 뚜렷하게 보이고 있습니다. 더욱이 권력의 2인자였던 조선총독은 정경유착을 통해 더욱 막강한 힘을 가지고 조선을 억압하였다고 하니 더욱 안타깝네요.
일본의 식민지배는 잘못된 것이지만 근현대사 발전에 기여한 측면은 인정해야하는 것인지.
-> ‘특정대기업이 독점적으로 산업화하며, 다른 분야와의 연계성은 떨어진다. 수치가 아닌 내용면에서는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했다’ 라고 답변해 주시면서 수업시간에 더욱 자세히 설명하고 넘어가야겠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병합과정에 대한 유효성과 합법성에 대해.
-> 당시 조선은 저항할 수 없는 상황이었고 강요된 조약이었다.
1대총독 데라우치의 1910년 8월 22일 일기를 보면 ‘오후 4시 한국 병합의 조약을 통감 관저에서 조인을 마치다. 열석한 자는 이완용, 조중응, 부통감, 그리고 나였다. 또 오늘 29일에 발표하기로 결정하고 큰 뜻을 통지해 두었다. 합병문제는 이와 같이 용이하게 조인을 마쳤다. 라고 하며... ’하하.‘ 라고 글을 끝내고 있습니다. 저항 없이 합병이 이루어졌다는 상황을 뚜렷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아....‘
3, 5대 총독 사이토 마코토는 지방순시를 대단히 많이 다녔는데요, 만난 회수별로 정리해보니 이희간, 박영효, 민원식, 선우순, 김희선 등이 눈에 띄었습니다. 특히 김희선은 임시정부의 국무차장이었으며 독립운동훈장까지 받은 인물이었다는 것이 충격적이었습니다.
대만에 대한 일본의 식민지배에 대한 평가는 비교적 후하며, 2·6사건과 중일전쟁에 대한 이야기도 나왔습니다.
다음수업시간에는 더욱 열심히 들어 유익한 수업후기를 올릴 것을 되새기며 이만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2013 봄 민주주의학교, ‘톡톡 평화공부 - 탈안보와 반군사’ 두 번째 강의는 첫 번째 시간을 복습하는 것으로 시작했습니다. 자칭, 타칭 아름다운 사람이라는 한 분이 재미나게 요약해주셨습니다. 평화공부 첫 번째 강좌는 한국사회에 만연한 폭력에 대해서 엄중하고 세밀하게 분석해보는 시간이었다고 합니다.
거친 수염만큼이나 멋진 목소리를 가진 이대훈 선생님은 폭력은 무엇인지에 대해 정의를 내려주시면서 자연스럽게 강좌를 이어가셨습니다. 선생님 이야기에 따르면, 폭력은 파괴를 수반하는 힘이며, 인간 현상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폭력은 상대적 개념이 될 수 있다고 하네요.
첫 번째 강좌에서 다루었던 내용을 간단히 돌이켜 보았습니다. 일상적인 언어 표현 속에 숨겨진 폭력을 따져보는 일부터 시작했습니다. ‘평화를 원하거든 전쟁을 길러라’는 말 속에는 ‘힘을 통한 평화론’이... ‘오빠가 지켜줄게’라는 그럴듯한 멘트 속에는 ‘젠더가 개입되어 더욱 효과적으로 위장된 보호의 폭력성’이 바탕에 깔려있다고 들었습니다. 여자친구나 저보다 어린 여자 친구들에게 저 자신을 나타내는 주어로 ‘오빠’라는 말을 가급적이면 쓰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밖에 공포의 정치학, 죽은자에 대한 산자의 폭력, 악의 평범성-폭력의 일상성-비가시성-불가지성, 이분법성, 문화로서 군사주의, 구원의 폭력성 등 다양한 양상으로 나타나는 언어 속에 내재된 폭력을 꼼꼼히 살펴보았습니다.
소위 ‘윤창중 성범죄 사건’으로 알려진 ‘그 사건’을 이름 짓고, 원인과 관련된 것을 찾는 시간이 오늘 강좌의 핵심이었습니다. 여러 참여자들이 의견을 내주셔서 장문의 사건명이 만들어졌습니다.
* 그 사건의 이름
남양유업을 살려낸, 계급에 의한, 청와대 대변인 그 X의 그날 밤, 어린 미녀 성추행의 진실을 은폐하려 하고, 해외로 도피한 미국 순방 스캔들
* 원인과 관련된 것 모두 찾기
1) 문화적 폭력 : 개인의 의식적인 차원에서 일어나는 폭력
고위공직자의 오만, 성범죄에 대한 인식 차이, 중년 남성의 외로움(폭력을 정당화하거나 자기 스스로 합리화하는 표현으로 ‘외로움’ 사용, 모성본능 자극), 어린(나이) 미녀(예쁨-여리고 약한, 보호본능), 진실 은폐 – 해외공관에서 더 극심한 공무원 조직의 위계문화 등
2) 구조적 폭력 : 고정된 권력구조에서 발생하는 폭력
갑의 폭력, 한국에서는 묻힐 사건, 외국가면 조심하자, 국격 추락, 박근혜 정부의 인사, 두 여성의 용기어린 신고-용기
사진 출처 : www.etoday.com.kr / 미시USA 화면 캡쳐
이렇게 그 사건의 이름을 짓고, 원인과 관련된 것을 찾다 보니, 이번 사건의 1차 행위자 이외에 2차 가해자가 있음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문화원장, 비서실장, 홍보수석, 대통령, 대사관 관계자, 대변인의 운전기사, 수행원, 기자들, 미국 경찰, 미시USA 등 과 더불어 이 사건을 해석-지지-비판하는 대중들까지... 한 사건에 다수의 주체가 관련되어 있더군요. 이러한 구조를 면밀히 살펴보니 사건을 명명하는 행위가 가질 수 있는 배제의 힘, 정치성을 새삼 깨달았습니다.
이대훈 선생님은 구조적 폭력, 문화적 폭력, 직접적인 폭력, 이렇게 세 가지를 으로 나타낼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참여자들은 일상에서 겪었던 사건에 대해 폭력세제곱의 틀로 분석해보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1. 교사수업권 침해
- 문화적 폭력 : 이념적 작동(잣대), 교사중립성 이념
- 구조적 폭력 : 반인권적 법의 폭력, 공권력의 행사방식(관행)
2. 여성 자아실현 박탈
- 문화적 폭력 : 시댁위주, 출산-여성
- 구조적 폭력 :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관계, 직장에서 유리천장
3. 문화교류빙자 문화강요 폭력(이주여성)
- 문화적 폭력 : 한국 동화, 인종주의(백인/비백인)
- 구조적 폭력 : 국가간 수혜 관계(도움을 받았으나 돌려줌), 시장의 규모, 소득수준의 차이
4. 학생 두발 및 복장, 개성의 표준화
- 문화적 폭력 : 어림(나이)=미성숙(교화), 학력 지상
- 구조적 폭력 : 교사-학생의 수직적 위계, 고용-학벌(학교서열화, 학력서열화), 교사의 지위도 서열화된다.(교수, 교사, 유치원 선생님) → 서열적 지식 구조
5. 차인표 효과 사건 / 기부
- 문화적 폭력 : 아프리카 이미지/시각, 기부=선...기독교/물질로만-우월감, 모-아동-가련
- 구조적 폭력 : 아프리카 역사, 국제적인 불평등 구조, 모금 조직의 국제적 구조, 국제 기독교 구조(구호, 구휼의 관행) - 서구중심주의
이렇게 다섯 가지 사건에 나타난 폭력의 양상을 문화적 폭력과 구조적 폭력으로 나누어 생각해보면서, 화이트보드에 작은 폭력지도를 그려보았습니다. 안타깝게도 시간이 허락되지 않아 각 참여자마다 5개 사건을 모두 분석하고 큰 폭력지도를 그려보는 활동은 다음으로 미루게 되었습니다.
△ 갈퉁의 폭력론
- 직접적 폭력 : 물리적, 육체적 폭력이 직접적으로 가해지는 폭력
- 구조적 폭력 : 사회구조, 국제질서와 결부되어 있는 폭력
- 문화적 폭력 : 직접적, 구조적 폭력을 용인, 합법화, 정당화 시키는 상징, 문화/도덕(이념, 종교, 언어, 예술 등)
△ 세 가지 폭력의 작용
직접적 폭력 : 사건발생 → 구조적 폭력 : 과정 → 문화적 폭력 : 문화의 변형과 고착
천웅소 간사님의 추천으로 톡톡 평화공부 강좌에 참여하게 된 저는 비록 2시간 남짓한 짧은 시간이었지만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각종 ‘힐링’이 범람하는 요즘, 치유보다 근본적으로 우선되어야 할 게 다른 존재에게 폭력을 삼가야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타인뿐 만 아니라 제 자신에게도 지나치게 폭력적이진 않았는지 반성해보는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은 1987년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의 분원으로 현 남양주시 별내면 화접리(불암동)에 설립되었습니다. 우리 수도원은 봉쇄구역 내에서 기도와 단순한 노동 그리고 렉씨오 디비나(聖讀)를 통해서 오로지 ‘하느님을 찾는’ 삶을 사는 수도승 공동체입니다.
우리 공동체는 기도생활의 심화를 추구하며, 수도원을 찾는 손님들에게 고요한 기도의 공간을 제공하는 것을 선교적인 임무로 삼고 있습니다. 또한 한국문화에 맞는 수도승생활의 토착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개항장 인천에 생겨난 최초의 조계는 1883년 9월 30일 일본과 체결한 조선국인천항구조계약서(朝鮮國仁川港口租界約書)에 의해 설정된 일본지계였다. 이듬해인 1884년 4월에 청국지계가 생기고 이어 10월에 각국지계가 설정되었다. 각국지계는 청·일 두 나라의 열배가 넘는 대지로 청국과 일본지계를 에워싸고 있었다.
이사벨 리 버드 비숍 여사가 1894년 우리나라를 방문한 후 쓴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에 따르면 당시에는 청국 조계가 일본 조계보다 훨씬 활발했고 중국인들이 무역에서 일본인들을 앞지르고 있었다고 한다. 대부분의 청국인들은 채소밭을 소유했는데 산동 지역에서 온 농사꾼들은 봄에 이곳에 건너와서 일을 하고 겨울에는 본국으로 돌아갔다.
1882년 수교통상조약을 맺은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는 각기 서울에 공사관을 개설하고 곧 서양 사람들이 개항한 제물포를 통해 입국하기 시작했다. 일본에 뒤이어 그들은 그들
이 공동으로 사용할 각국지계를 책정했다. 제일 먼저 온 것은 이화양행이었으나 곧 철수하고 독일계 세창양행과 미국 상사 타운센드상회가 뒤를 이었다. 자유공원 광장일대에 세워졌던 세창양행의 사원 숙소는 독일 성곽을 연상시키는 멋진 건물로서 인천의 랜드마크로 이름이 높았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건물로 기록되어 있다. 미국인 타운센드상회는 일본에서 김옥균과 친분을 맺고 입국한 무역회사로 화약, 광산기계, 토목용구, 석유 등을 수입하여 크게 치부했다. 특히 타운센드는 인천 최초의 증기동력기 정미소를 차려 선구자가 되기도 했다.
이때 각국조계 안에 러시아인 사바틴이 설계해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공원을 조성했는데, 이 역시 한국 최초의 공원이 되었다.
1) 대불호텔 터
서양인을 상대로 하는 근대적 숙박 시설의 필요성이 커지면서 1888년 대불(大佛)호텔이 세워졌다. 이 호텔은 1902년 서울 중구 정동에 들어선 ‘손탁호텔’보다 14년이나 앞선 것이었다. 이 호텔은 유럽인이나 미국인들을 대상으로 했기에 서양식으로 설계됐다. 대불호텔은 일본어가 아닌 영어로 손님을 맞았으며 외국인들의 입에 맞는 서양요리도 제공했다고 한다. 대불호텔은 일제 강점기에 중국요리집인 ‘중화루’로 바뀌었다. 이 건물은 1978년 헐린 뒤 나대지로 방치되었다가 현재는 주차장으로 이용되고 있다.
대불호텔 건너편에 중국인 이태호(怡泰號)라는 사람이 외국인 상대의 여관업을 시작하였는데 1층에는 잡화상점을 하면서 2층에 스튜워드 호텔(Steward Hotel)을 개업하여 서로 치열한 경쟁을 하였다고 한다.
참고로 커피가 처음 판매된 곳이 대불호텔이라고도 하나 언제부터 판매되었는지 정확한 기록을 찾기 어렵다. 미국, 영국 등 외국 사신들과 선교사, 상인들을 통해 널리 보급된 커피는 구수하고 향긋한 맛으로 곧 조선 왕족들과 대신들을 사로잡으며 기호품으로 자리잡았다. ‘가배차’나‘가비차’는 영어 발음을 따서 붙여진 이름이다. ‘양탕국’은 일반 민가에서 불렸던 이름이다. 커피의 색이 검고 쓴맛이 나는 것이 마치 한약 탕국과 같다고 해서 붙여졌다
2) 일본 제1은행
인천이 개항한 1883년에는 개설되어 대표적 은행으로 활동하였다. 1894년 갑오 정권이 「신식화폐발행장정」으로 일본화폐의 통용을 인정하여 급속하게 성장했다. 1905년 이후 제1은행이 화폐개혁을 전담하면서부터 우리나라의 중앙은행과 같은 역할을 하게 되었다. 1909년 한국은행이 창립되면서 한국은행 인천지점으로 변경되고, 1911년 한국은행이 조선은행으로 바뀜에 따라 조선은행 인천지점이 되었다.
3) 일본 제 18은행
1890년 나가사키 상인들의 업무가 번창하여 감에 따라 최초의 해외 지점으로 인천에 설치하게 되었다. 이후 약 47년간 영업하다가 1936년에 조선식산은행으로 양도하였다.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다가 현재는 ‘인천 개항장근대건축 전시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4) 일본 영사관
인천 개항 후 일본은 1883년에 전형적인 일본의 양풍 2층 목조건물로 영사관을 완성하였다. 1906년 2월에 일제가 통감부를 설치하면서 이사청(理事廳) 청사로 사용되었고, 1910년 조선총독부 설치 이후에는 인천부 청사로 사용되었다. 해방 후 인천시청으로 사용되다가 1985년 인천시청이 이전하여 현재는 중구청으로 사용되고 있다.
5) 청국 영사관
청국은 1884년 인천에 조계를 설치하고, 그 해 10월 영사관을 설치하였다. 그 후 영사관을 변리청, 이사서, 이사부 혹은 청관이라 칭하였다. 청일전쟁 중 일시 폐쇄되었다가 1898년 청국영사관으로 재발족하였으나 일제 말엽에 다시 폐쇄 되었다. 영사관 건물은 소실되었고 현재는 청국영사관 터에 화교중산학교가 들어서 있다.
6) 청일 조계지 경계 계단
이곳은 청국조계와 일본조계의 경계지역으로 만국공원(현 자유공원)으로 연결되는 계단과 조경이 마련된 공간이다. 자유공원 서남쪽 가파른 언덕에 자리 잡고 있는 계단을 중심으로
청국과 일본의 건물들이 확연하게 서로 다른 양식들로 번화하게 들어서 있던 곳이기도 하였다. 중앙에 돌계단을 배치하고, 계단 양쪽에 조경 식재 공간을 두었다. 경사가 급한 점을 감안하여 계단 사이를 여유있게 두는 등 조경디자인 측면에서의 공간 이용을 강조하였다. 또 경관 측면에서 인천항을 계단 중간에서 머물면서 즐길 수 있도록 여유롭게 설계되어 있는 것이 특징적이다.
7) 제물포 구락부
1901년 건축된 제물포구락부는 인천에 거주하던 독일, 미국, 러시아, 영국 등 각국조계 내 외국인들의 친목을 위한 사교장으로 이용되던 곳이다. 당시 일본인들은 자기들의 사교장을 따로 가지고 있었으므로 이 시설은 주로 서양인 전용의 시설이었다.
1913년경 일본 재향군인회 인천연합회에 이관되어 정방각으로 불렸으며, 1934년 일본여인회관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광복 후에는 미군에게 점유되어 장교클럽으로 사용되었다. 최근까지 중구문화원에서 사용하였으나 지금은 이전하였다.
8) 한미수교 100주년 기념탑 (자유공원 내)
1900년대 인천 개항장에 지어진 양관 중에 가장 아름다웠다고 전해지는 서양식 건축물로, 상해에서 항만시설공사로 치부한 존스턴이 개항장의 가장 높고 경관이 수려한 곳에 별장으로 사
용하기 위해 건축한 것이다. 해방 후 미 군정청에 접수되어 독신자 고급 장교 주택으로 이용되었다. 6.25전쟁 중 소실되어, 현재는 1982년에 건립된 한미수교 100주년기념탑이 자리하고 있다. 이 탑은 바로 1882년 제물포에서 체결되었던 한국 최초의 서양 국가와의 조약이었던 한미수호조약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것이다.
한편 인천에 세워진 최초의 양관은 세창양행 숙사 건물이다. 이 건물은 1883년 세창양행을 개점하기 위해 독일 함부르크에서 인천으로 온 세 사람의 사원 주택이다. 이 건물은 현 자유공원 광장 일대에 있었는데 1922년 인천부가 매입하여 인천부립도서관으로 시민에게 개방하기도 했는데 인천상륙작전 때 전소되었다.
9) 자유공원
우리나라에서 서구식 근대공원이 처음 들어선 곳이 인천이고, 그곳이 바로 자유공원이다. 1888년 만들어진 이 공원은 서울의 파고다공원(현 탑골공원)이 1897년에 세워졌으니, 이보다 9년이 앞선다. 이 공원은 처음 만들어질 당시 각국공원이라 불렸다. 인천항 개항 이후 인천으로 몰려든 서양 사람들이 한데 모여 살던 각국조계 안에 공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1945년 이후 한동안 만국공원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6·25전쟁을 겪고 난 1957년
주진오 교수님의 수업을 들으며 가장 기억에 남는 명제 중 하나는 한 인물을 어떻게 하나의 수식어로만 규정할 수 있겠냐는 것이다. 그런데 주입식 교육에 익숙해진 우리들 대부분은 ‘무슨 사건이나 단체하면 누구’ 이렇게 단편적으로만 생각하기 쉽다. 나 역시 그렇기 때문에 단순했던 인물들에 대해 새로운 사실들을 알아가는 것은 평면그림이 입체로 변하듯 무척이나 흥미로운 것이었다.
특히나 ‘독립운동가’로 내 머릿속에 자리 잡혀 있던 서재필이 ‘필립 제이슨’이 되어 살아간 삶은 너무 놀라웠다. 갑신정병에서 행동파를 맡았던 그는 정변실패 후 일본으로 건너갔지만 냉대를 받았고 미국으로 떠나 홀로 서기를 감행하였다. 또한 미국에서 의학 공부를 하며 미국 주류사회에 완전히 편입되어 살아가는 아메리칸 드림의 원조가 되었다. 그러던 중 그는 김홍집 정권의 요청에 따라 중추원 고문으로 취임되었고 철저하게 미국인으로 행세를 하게 된다, 더욱이 모든 비용과 건물을 조선정부가 부담했음에도 불구하고 독립 신문사를 자신의 개인 소유로 등록하였으며 자신의 주택구입비까지 받았다. 독립운동을 정치활동보다는 경제활동으로 생각하며 행동하는 등 민족지도자가 지닌 희생적 자세는 찾아보기 힘들었던 것이다. 또한 미국인으로 산 서재필은 식민지배에 대해 순응하기를 권유 하였으며 식민지배의 책임은 대한제국 지배층의 무능과 민중의 무지 때문이라고 하였다. 3·1운동 후에는 태평양군축회의에 조선 문제 상정을 위해 노력했으나 실패로 끝나고 만다. 이러한 그를 역사상 위대한 지도자로 추앙하고 있다는 것은 생각해 볼 문제가 아닐까 싶다.
윤치호에 대해서도 살펴보자, 그는 개화파의 막내로써 미 공사관 통역관을 맡았으며 일본과 상하이, 그리고 미국에서 유학생활을 하였다. 일본의 식민 지배를 받을 때에는 관직에 나가지 않고 교육과 종교 활동을 통해 민족의 역량을 기르고 민족성을 개조하기 위한 계몽운동에 힘썼다. 조선인들이 독립을 쟁취할 능력이 없다고 생각했으며, 열강이 조선을 도울 의사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독립을 위한 활동의사는 없었다. 그는 모든 판단을 함에 있어 지나치게 신중했고, 근대 시민윤리를 실천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그는 민족주의자가 되는 길보다는 친일 활동을 통해 결과적으로 친일파를 대표하는 인물이 되고 말았다.
역사적 인물을 통해 나는 어떤 사람으로 기억될지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는다면, 2시간 반 수업 이상의 가치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수업 후기를 마친다.
- 버스를 타고 1시간을 넘게 올 때마나다 흔들린 적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강남 교수님의 이야기가 듣고 싶어져 왔습니다. 종교에 대해 학자적(?)으로 접근해서 알려주셔서 좋았어요!
- 오강남 선생님의 편안하고 즐거운 목소리, 표정
- 1.오강남 선생님께 얻어듣는 지식, 아니 어쩌면 지혜. 2.그리고 그 덕분에 갖게되는 생각의 기회 =영어로 inspiration?ㅋㅋ때문이었습니다. 잘 배웠습니다.
- 동양 종교의 이해도 듣고 싶네요. 어려울 것 같았던 종교시가 쉬워졌어요.
- 매주 새로운 종교에 대해 배우는 즐거음. 미지의 세계를 둘러보는 느낌?
- 오강남 교수님의 푸근한 미소. 새로운 세계에 눈뜨게 해주시는 명쾌한 강의!! 시간 가는 줄 몰랐어요!
- A1.선생님의 맑은...유머? A2.'믿음'의 태도 마음가짐. A3.계속 좋은 강의를 마련해 주십시오. 감사! 감사!
- 새로운 지식보다. 종교와 삶의 태도를 생각해 보는 시간이기 때문에. 오강남샘의 캐릭터
- 교수님의 알찬 강의. 공짜 저녁. 배우는 즐거움.
- 물론 지하철타고 왔습니다. 장장 1시간. 내 안에 있는 질문이 느티나무 그늘로 나를 이끌었겠지만, 그 질문이 너무나 자연스럽고 편하게 해결되는 것을 느끼지 못했다면 불가능했겠죠. 오강남 선생님의 정말 쉽고 그러나 깊이있는 강의가 정답입니다. *올드패션의 농담을 진지하게 하시는 유머!
- 그동안 가졌던 나의 의구심에 대한 확신
- "다양함 속의 하나됨"이라는 오강남 선생님의 말씀이 어러모로 생각꺼리를 제게 준 것 같습니다. 힐링됐어요^^
- 새로 알게된다는 것의 기쁨 풍요로워지는 정신세계(?)
- 종교생활하면서 무언가 잘못 만난 단추와 단추구멍같은 마음의 갈등을 해소? 위로? 해방구가 되는 시간
○ 이 강좌를 통해 새로 알게된, 발견한 것은?
-'심층 종교'에 관한 쉽고 재미있는 해석
-자주 듣지만 정체를 알 기회가 없었던 유대교에 대해... 매우 흥미로웠다.
- 편견을 가진 종교관도 문제이지만 종교에 대한 무조건적인 편견도 옳지 않다는 사실 ^^ 이제 더 느끼고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 모태 신앙인으로서 냉담하면서 그동안 가졌던 막연한 찜찜함을 털어버릴 수 있었다.
- 주변의 근본주의적인 기독교인들을 꿰뜷어보고 싶어짐요.
- 여전히 풀리지 않지만 종교와 철학과 삶의 태도... 이런 문제들이 훨씬 명확해진 것 같아요. 내안에 있는 선한 의지를 잘 키워서 이제라도 좀 더 괜찮은 이웃이 되고 싶다는 다짐을 하게 되었습니다. 매우 FM이어서 부끄럽네요^^
- 종교를 가짐으로 나를 변화시키는 것에 이유를 두자.
- 심층 종교는 모두 통한다. 표층종교는 서로를 적대한다.
- 진리와 비폭력에 대한 이중적 헌신
- 종교는 하나. 잘 믿고 잘 행하고 평안을!
- 한국개신교가 문제라고 생각해 왔는데, 사실은 생각보다도 더 큰 문젯덩어리다. 답이 있을까.
- 많은 부족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기쁘다.
○ 느티나무에 바라는 점
- 주구장창 올 수 있도록 부디 망하지 말고 날로 번창하세요. 그 밖에 바라는 건 엄쓔.
- 가을의 <종교 둘러보기 동양편>도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 계속 있는 것.
- 토의하는 시간이 많았으면 좋겠어요.
- 시간을 30분만 늦게 시작하면 덜 바쁠 것 같아요 :) 좋은 주제로 사람들의 고민과 열린 사고를 할 수 있는 '길벗'이 (오강남선생님 말이에요)되어주세요.
- 매회 느끼는 것처럼 알찬 열매를 바라지만 싹트임을 돕는 단비 역할을 해주셨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 느티나무 계속 계속 좋은 강좌를!
- 강의 시간대가 다양하길 바랍니다. 7시는 좀 늦어요. 6시만 되어도 좋겠어요.
- 좀더 작은 규모의 소그룹이 활성화되면 좋겠습니다. 강의에 끝난지 않는 지속적인.
- 참여연대 오랜 회원입니다. 존재 자체만으로도 늘 고맙고 힘이 됩니다. 게다가 이렇게 좋은 회원님들과 훌륭한 강의까지 ~~~넘 고맙습니다.
저는 학교에서는 휴강이 되면 마냥 좋아하던 학생이었는데요, 4월 2째주 수업이 휴강되었다는 말은 참으로 섭섭하였습니다. 그런데 다행히도 교수님이 쾌차하고 계셔서 지난주에는 유익하고 재미있는 수업을 이어나갈 수 있었네요. 공부도 중요하지만 우리 모두 건강하게 꽃피는 봄을 환영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
그럼 지난 수업을 한 번 정리해 볼까요?
민영익은 민승호의 양자로 들어가면서 명성왕후의 총애를 받았고, 18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요직을 맡는 등 민씨 척족의 새로운 간판으로 등장하였습니다. 또한 민영익은 고종이 진행하고 있었던 친정체제의 핵심인물로써 동도서기론을 기반으로 한 다양한 활동들을 하게 됩니다. 김옥균도 21살에 장원에 급제하며 안동 김씨의 청년스타로써 민영익의 집에는 자주 드나드는 8명의 학사들 중 한명이기도 하였습니다.
민영익은 주요 외교업무의 책임을 지고 있었는데요, 가장 대표적인 일은 보빙사를 꾸려 미국을 방문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김옥균의 추천으로 이루어진 일이라고 합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둘은 절친한 동지였습니다. 인식과 정책이 수구, 친청사대적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 둘은 왜 갈라서게 되었을까요?
청에 대한 생각과 입장의 차이가 둘을 갈라놓는 가장 큰 계기가 되었습니다.
민영익은 미국에 대해 굉장히 호의적이었고, 러시아를 이용하여 청을 견제할 수 있을 것 이라고 생각하며 점진적인 방향으로 개화를 추진하였습니다. 일본은 믿을 만하지 못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반면 김옥균은 청의 개입에 대해 일본이 많은 도움을 줄 것으로 생각하였고, 청으로부터의 독립을 하는데 민영익이 도움이 되지 못하다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갑오개혁이 발생했고, 민영익의 척족들은 급진개화파에 의해 살해당하고, 급진개화파는 일본으로 망명하게 됩니다. 결국 둘 다 근대화 역사에 중요한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만약 둘이 힘을 합쳐 개화를 이끌었다면 조선말기의 모습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특히 지난 주 수업에서는 학교에서 빡빡하게 공부를 할 때에는 듣지 못했던 뒷이야기(?)들을 듣는 것 같아재미있었는데요, 명왕성을 발견한 퍼시벌로웰이라는 사람이 보빙사의 일행이었고 고종의 사진을 최초로 찍어주었다는 말은 ☆까지 치며 들었답니다.
수강생분들과 오강남 교수님의 세계 종교에 대해 배우는 일곱 번째 시간이 되었네요. 오늘은 세계에서 기독교 다음으로 신도가 많은 이슬람에 대해서 공부했습니다. 이슬람 인구는 약 12억 명 정도로 추산된다고 합니다. 유대교나 기독교에 비해 젊지만, 빠르게 성장하는 종교라고 합니다. 이슬람교도는 중동(아랍국가)뿐만 아니라 아프리카, 파키스탄, 인도 방그라데시, 필리핀, 중국에도 많고 최근에는 미국에도 늘고 있다고 합니다. 한국에도 서울 한남동과 부산 등지에 이슬람교인들을 위한 성원이 있습니다.
1. 무함마드를 소개합니다~
이슬람의 창시자는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알려지 무함마드입니다. 이슬람 전통에 의하면, 아브라함과 하갈(사라의 여종)이 낳은 이스마엘이 메카로 왔고, 이 모자의 후손이 무함마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교, 기독교와 더불어 아브라함을 공통의 조상으로 여기는 이슬람교까지 아브라함의 종교라고 부릅니다.
무함마드는 570년 메카에서 유복자로 태어나, 6세 때 모친을 여의고 숙부의 도움으로 성장합니다. 그에 대한 유소년 시절 기록은 없지만, 낙타상인들을 도우며 여러 도시와 문화를 만났으리라 추측해봅니다. 특히 유대교, 기독교를 직간접적으로 만나고 느끼는 시기였던 것이죠.
25세가 된 무함마드는 부유한 상인 카디자와 결혼한 이후, 명상과 기도에 전념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던 610년 어느날, 무함마드에게 기적과 같은 일이 생깁니다. 비몽사몽간에 ‘읽어라’, ‘읽어라’, ‘읽어라’,‘너는 하느님의 메신저다’라는 가브리엘 천사의 음성을 듣게 된 것입니다. 그가 40세가 되던 해에 있었던 영광스러운 체험입니다.
* 여기서 잠깐!!!
‘이슬람’은 무슨 뜻일까요? ‘복종’입니다. 그럼 이슬람 신도들을 가리키는 ‘무슬림’ 무슨 뜻일까요? 복종하는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알라 하나님에 대한 순종이 이미 그 명칭에 배어있는 것 같습니다.
2. 이슬람교의 기틀이 마련되기까지
무함마드의 신비한 체험 이야기에 부인은 매우 기뻐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첫 이슬람 신도가 되었습니다. 히브리 성경이 조예가 깊은 친척에게도 무함마드는 인정을 받고, 큰 용기를 얻었습니다. 위대한 종교지도자가 탄생되는 과정에서 주변의 가깝고 친밀한 사람들의 반응이 중요하겠구나하고 느껴졌습니다.
무함마드는 하느님이 오직 한 분이시며, 심판이 임박했다는 것과 더불어, 평등, 박애, 윤리적인 삶을 강조하는 이슬람교의 기초를 세웠습니다. 특별히 그는 다양한 신을 섬기던 당시 사람들에게 우상숭배를 금하고, 영아살해를 멈출 것을 주장하였습니다. 이러한 무함마드의 가르침이 메카의 기득권 세력에게는 눈엣가시였고, 이슬람교를 증오하고 박해하였습니다. 자신들의 돈벌이에 방해가 된다는 것이죠.
3. 메디나로 피난, 그리고 다시 메카로
종교탄압을 피해 무함마드는 메카로부터 400Km 떨어진 메디나로 피신합니다(662년). 이슬람교인들은 메디나에서 ‘기도하는 집’이라는 뜻의 모스크를 최초로 세웠습니다. 금요일에 모여 예배를 드리고, 신도 개인적으로 개인적으로 하루 5번 기도하는 전통이 생기게 됩니다.
이슬람교 성립 초기의 이슬람교인들은 유대인과 기독교인을 ‘책(경전)이 있는 사람들’이라고 대우하며,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연유로, 특별히 유대인은 오랜기간 핍박받았던 유럽을 떠나 이슬람국가로 상당수가 이주하였습니다.
메디나에서 경제적, 군사적으로 강성해진 무함마드-이슬람교 세력은 630년에 메카를 점령하게 되었습니다. 무함마드의 나이 60세 때, 그는 종교와 정치의 실질적인 최고 권력자가 된 것입니다. 한 종교의 창시자로서 무함마드는 예수, 석가모니와 달리 넓은 지역에 실력을 행사하는 지도자가 되었다는 점에서 특별합니다.
계시받는 무함마드 (이슬람미술에서는 무함마드의 얼굴을 그리는 것이 금기시되어있다고 하네요)
4. 쿠란을 쿠란!(읽어라!)
마지막으로 이슬람교의 경전인 쿠란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읽다, 외치다’라는 뜻의 쿠란은 무함마드가 직접 기술한 책은 아닙니다. 무함마드가 내용을 읊으면 옆에서 이를 기억하고 옮겨 적는 이가 있었던 것이죠. 사실 무함마드는 문맹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쿠란은 기적입니다. 문맹이 외우고 있던 것으로 보기에 쿠란의 내용이 문법적으로 완벽하고, 시적으로 매우 아름다우니 말입니다! 할렐루야~ 기독교의 신약성서보다 분량이 적은 쿠란은 이슬람교 3대 지도자 시절 114장으로 최종 확정되었습니다. 이후, 쿠란은 아랍문화의 모델이 되었으며, 무슬림의 삶과 죽음에 깊은 연관을 맺게 되었습니다.
쿠란은 종교의 경전이면서 동시에 세속국가의 법으로 역할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경향이 지금까지도 이어져 오기 때문에, 간혹 안타까운 소식들을 전해듣기도 합니다. 이슬람교인 중 압도적인 다수가 쿠란을 문자주의적으로 받아들이는 현실에서 종교의 이름으로 살해와 폭력을 정당화하는 일들이 왕왕 있어 가슴이 아픕니다.
5. 아름다운 종교, 이슬람!
부패한 기독교로부터 해방되는 통로로서 이슬람의 이미지는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러한 이슬람의 성격은 교리의 단순성과 더불어 이슬람 포교가 잘 이루어졌던 이유라고 오강남 교수님은 말씀해주셨지요. 다른 인종, 종교, 문화에 대해서 포용했던 이슬람의 전통을 잘 살리면서, 이슬람교도 내부적으로도 생명과 평화를 중시하는 분위기를 더욱 강화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오강남 선생님의 종교 강의를 들은 것도 벌써 여섯번 째! 이제 겨우 두 번의 수업만을 남겨두고 있다. 이번 주는 기독교의 마지막 시간이었다. 중세 기독교에서부터 현대 기독교에 이르기까지, 중요 사상가들의 철학과 기독교 신관의 변화 과정을 살펴보았다. 예정된 시간이 훨씬 넘어서 끝났을만큼 수강생들의 참여도가 유독 높았다^~^/
1. 하나님의 시대, 중세 기독교
중세 유럽은 기독교의 지배 아래에 있었다. '카노사의 굴욕'이라는 유명한 일화만 보아도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한 나라의 황제가 교황의 승인을 받기 위해 삼일을 무릎 꿇어야 했던 시절이 당시의 유럽이었다. 자연스럽게 신학이 발달했고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신학자이자 철학자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사람은 안셀무스와 토마스 아퀴나스. 이들은 신의 존재를 논리적으로 증명하고자 했으며 스콜라 철학의 지평을 열었다.
사실 두 신학자의 논리는 지금에 와서 다소 엉뚱해 보이기도 한다. 안셀무스의 존재론적 논증을 보자. 인간은 스스로를 불완전한 존재로 여긴다. 그런데 불완전이라는 개념은 완전이라는 개념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따라서 우리의 세계에는 인간을 초월하는 완전한 존재가 있고, 그가 바로 신이라는 것이 안셀무스의 주장이다. 말장난 같지만 쉽게 반박하지도 못하겠고 철썩같이 믿기에는 찝찝한 구석이 있는 게 사실이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우주론적 증명은 어떨까. 여기에 A라는 대상이 있다. A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A를 있게하는 B가 있어야한다. 마찬가지로 B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C가 있어야한다. 이렇게 존재의 근원을 거슬러 거슬러 올라가다보면 가장 최초의 존재가 나타나지 않을까? 맞다. 그래서 제1의 원인이 하나님이다.
아마 이 글을 읽는 모두는 비슷한 반론을 떠올렸을 것이다. 도대체 하나님은 어디에서 왔다는 말이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유럽인들에게 이들의 한마디가 어마어마한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이 무섭기만 하다.
오강남 교수님께서는 기독교와 하나님에 대한 해석이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시대 순으로 알려주셨다. 지금부터는 이를 재구성해서 기독교를 둘러싼 다양한 해석을 정리하려고 한다. 우리가 알고있는 근본주의적 기독교의 원형을 살펴보는 한편, 기존의 신학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되돌아보며 오늘날에 필요한 종교가 무엇일지 고민해보면 좋을 것 같다.
2. 기독교의 변화를 이야기하다
이분법적 사고의 근원은 조로아스터교에서 시작되었다. 세상에 선과 악이 전재하는 이유는 선신과 악신이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조로아스터의 해석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다만 조로아스터교의 사상은 기독교에만 해당하는 내용이 아니다. 기독교의 근본주의적 성향이 본격적으로 심화된 것은 과학의 발달과 관련이 깊다. 과학의 발전은 성경과의 충돌을 의미했고, 이에 초조함을 느낀 사람들이 성경에 대한 절대적 믿음을 강요했던 것이다.
이에 대한 최초의 반란은 루터의 종교개혁일 것이다. 교회가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면죄부를 판매하자 이에 경멸을 느끼고 95개조 반박문을 붙였다. 영국의 헨리 8세는 직접 영국 교회를 설립하고 우두머리가 되었다. 지금까지도 영국 교회의 지도자는 영국의 왕으로 계승되고 있으며, 영국 교회는 우리나라에서 성공회로 불리고 있다. 세계 1차 대전 이후에는 기독교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고민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평화를 이야기하는 종교가 오히려 분열의 소지가 되고 있는 현실을 우려하는 종교인들이 생겨났다. 이 과정에서 기독교인들의 협력을 도모하고자 탄생한 운동이 바로 세계교회협의회, 즉 WCC(World Council of Churches)이다. 이들은 하나님은 화해의 신이라는 믿음을 공유하며 동성애나 공산주의마저도 포용의 대상임을 강조하고 있다. 20세기에 주목할만한 이는 디트리이 본 회퍼이다. 세계 2차대전 당시 히틀러의 만행을 목격한 그는 히틀러 암살단을 조직했다. 그는 도로를 마구잡이로 질주하며 사람들을 치는 버스가 있다면, 기독교가 할 일은 죽은 자의 장례를 치르는 것이 아니라 버스에 올라타 운전수를 끌어내려야 한다고 자신의 본분을 이야기했다. 종교인으로서 뿐만 아니라 한 나라의 국민으로서 자신의 역할을 고민하고 행동으로 실천한 위대한 인물이었다:->
3. 특별한 시선으로 기독교를 말하다
이전까지 신학은 백인 중년 남자의 것이었다. 백인과 중년, 그리고 남자라는 키워드를 잠시 주목해보자. 어딘가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20세기 중반부터 기독교 신학에 새로운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대표적으로는 흑인신학, 남미해방신학, 여성신학이 있다. 흑인신학은 억압받은 이들의 해방자에 주목하여 출애굽을 이야기한다. 남미해방신학은 다국적 기업의 횡포에 대한 반발로써 시작되었으며 막스의 이론을 인용하여 사회를 부정하기도 한다. 여성신학은 성경에서 여성을 위한 메시지를 찾는 데 주목하는 운동이다. 개인적으로는 이 새로운 신학들에 대한 이야기가 가장 흥미로웠다. 사회의 다원화가 어떤 형태로 종교의 발전에 기여하는지, 종교는 결코 사회와 분리될 수 없다는 점에서 정치적인 것은 아닐지, 신은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달리 해석될 수 있고, 결국 종교란 절대적인 형태가 없는 실체로서 각자의 마음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여러가지 물음이 머릿속에서 떠올랐다.
다음주부터는 오강남 선생님의 이슬람교 강의가 시작된다. 나에게는 미지의 종교, 신비의 종교라는 이미지가 강한 종교이기에 더욱 기대가 된다. 자원 활동과 함께 오강남 선생님의 종교 강의를 들으면서 매주 화요일이 아주 즐거워졌다. 지금까지는 전혀 하지 않았던 질문을 던지게 되고, 생각하게 되고, 스스로 답을 내리는 과정이 재미있다. 나 뿐만 아니라 수강하시는 모든 분들이 강의를 통해 새로운 활력을 얻으시기를 바란다.
안녕하세요. 벚꽃들이 조금씩 움을 트고 있는 가운데 난데없이 눈이 내리는, 그런 기묘한 4월입니다. 저희 <한국근현대사> 수업은 두 번째 강의를 무사히 마쳤답니다.
이번 시간에는 ‘흥선 대원군’과 ‘고종’에 대해서 배웠는데요, 여러분 ‘흥선 대원군’ 하면 뭐가 가장 먼저 떠오르시나요. 아마 많은 분들이 명성황후를 가장 먼저 떠올리실 것 같아요. 시아버지인 대원군과 며느리인 명성황후의 대립은 이미 숱한 사담이나 드라마, 소설들을 통해 익숙한 내용이지요. 하지만 정작 대원군의 아들이자 조선의 왕이었던 ‘고종’은 왜 등장하지 않을까요. 고종은 정말 아버지와 아내 사이에서 기조차 펴지 못하는 유약한 왕이었을까요?
고종에 대한 가장 뿌리 깊은 오해는 그가 명성황후―또는 민씨 정권에 휘둘린 무능한 왕이라는 인식입니다. 고종에게 민씨들은 처가일 뿐만 아니라 외가이기도 합니다. 여흥 민씨 가문에서는 명성황후를 비롯해 인현황후와 원경황후 등 세 명의 정비를 배출했습니다. 또한 고종의 외할아버지인 남연군과 흥선 대원군 모두 여흥 민씨와 결혼합니다. 대원군에게 벗어나기 위해 자신의 세력을 찾던 고종에게는 민씨들이 더없이 믿음직하고 가까운 사람들이 아니었을까요. 즉 ‘민씨 정권’은 고종 스스로의 신임과 선택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고종은 12세에 왕위에 올라 10년이 넘도록 대원군의 그늘 밑에 있었습니다. 그는 신미양요가 일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의견충돌 없이 아버지의 뜻에 따랐습니다. 하지만 미국과의 전투 후, 고종의 생각은 변하기 시작합니다. 쇄국정치는 조선의 고립으로 가는 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후 고종은 친정을 결심하고 아버지와 완전히 뜻을 달리하게 됩니다. 이러한 그의 강단을 보여주는 하나의 사건이 있는데 바로 ‘영남만인소 사건’입니다. 면암 최익현은 대원군의 탄핵을 요구하게 되고 고종은 친정을 선언하며 대원군을 내쫓습니다. 이에 반발한 남인 유생들이 대원군의 복귀를 요청하며 쓴 만인보를 쓰게 됩니다. 고종은 크게 분노하여 만인보의 주동자를 참형에 처하라는 명령을 이르지요.
대원군은 결국 여러 번의 고종 암살계획을 세우며 갑오개혁과 임오군란에 참여합니다. 또한 명성황후 시해가 일어난 을미사변에도 직접적으로 참여하게 되지요. 결국 고종과 완전히 멀어지게 된 대원군은 쓸쓸한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대원군은 끊임없이 아들인 고종을 못미더워 한 것으로 보입니다. 또는 권력에서 자신이 멀어지는 것을 견디지 못했는지도 모릅니다. 만일 그가 적당한 때에 물러날 줄 아는 미덕을 아는 아버지였다면 역사는 어떻게 변했을지 궁금합니다.
저녁시간에 이루어지는 강의라 많이 피곤하실텐데도 조는 분 한분 없는 훌륭한 수업이었습니다^^ 저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준 주진오 교수님의 말씀을 옮겨 적으며 글을 마칩니다.
“누군가가 평생 옳은 길을 걸어 완벽한 위인이 되거나, 평생 악인의 길을 걸어 완벽한 악인이 되는 일은 없습니다. 누구든 살면서 꼭 한번쯤은 나쁜 일을 하거나 좋은 일을 하기도 하니까요. 그래서 종종 무서울 때가 있습니다. 제가 혹시 한순간이라도 실수를 하지 않을까 반성하면서 겸허함을 배우게 되는데. 자신의 인생에 대해 겸허를 배우는 것, 그게 곧 역사학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프랑스 혁명 당시의 모습을 묘사한 혁명화를 함께 감상하며 수업을 시작했습니다. 치열한 전투, 학살, 국왕 재판, 삼부회의, 왕비의 모습 등 당시의 긴박함과 사람들의 모습이 잘 묘사되어 있었습니다. 3강의 주제는 ‘혁명의 향배와 의미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 20선’이었습니다. 혁명에서 개인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살펴보는 시간이었습니다!
루이 16세 국왕부터 혁명기 언론인으로 두각을 나타낸 에베르까지 다양한 인물을 살펴봤습니다. 다행히 당통, 로베스피에르 등 익숙한 이름을 가진 이들도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당통은 법률가 출신으로 파리코뮨의 실력자였습니다. 군주제의 몰락에 기여 했고, 법무장관에 올라 임시행정내각의 실세가 되기도 했습니다. 핵심적인 권력체였던 공안위원회를 주도하고 공포정치를 지원했지만 발병으로 고향에 머물렀습니다. 관용파로 몰려 체포, 사형됩니다. 로베프 피에르도 그랬지만, 과도한 업무로 당통과 같이 질병에 시달려 사망한 사람이 많다고 합니다.
* 공안위원회: 사실 합법적 혁명권력체로는 국민공회(단원제)가 있었습니다. 21개 위원회를 통해 행정부를 지휘하는 권력체였습니다. 이 가운데 중요한 것이 공안위원회와 치안위원회였습니다. 특히 공안위원회는 정부 행위의 모든 분야를 관장해, 국민공회가 해산할 때까지 사실상의 정부 기구 그 자체 였습니다 1973년 여름에서 열월의 반동에 이르는 공포정치의 절정기(1년 여간)에 영웅적인 활동을 펼쳤습니다.
이어 로베스 피에르 역시 법률가 출신입니다. 엘리트로서 봉기코뮨을 거쳐 국민공회 의원이 됩니다.아까 말씀드렸던 공안위원회 위원이 되면서 죽을 때까지 혁명 정부 및 공포정치의 최고 지도자로 남습니다. 혁명의 상승기인 5년을 통째로 겪은 몇 안되는 인물 중 하나였습니다. 이러한 급격한 시류 속에서 로베스 피에르 역시 몰락직전 과로로 병사합니다. 흡혈귀, 부패시킬 수 없는 자와 같은 별명을 갖고 있다고 합니다. 그의 결벽증적 성격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말과 행동을 일치시켜 살았던 혁명가였다고 합니다. 1974년 봄, 권력의 정점에 서면서 공포정치의 책임자로 간주되고 있습니다.
이 둘 외에도 착하지만 무능했다는 루이 16세(루이 15세의 손자)와 왕비, 방데 반란(귀족 반란)을 이끌었던 샤레트, 국왕재판에서 ‘왕이기 때문에 죽어야 한다’고 주장한 생쥐스트, 대표적 혁명 순교자인 마라 등 다양한 인물을 공부했습니다. 국왕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시세의 흐름에 민감한 자유주의 귀족이나 수재형 인재, 자유전문직업인들(법률가 등)이었습니다. 눈에 띠는 점은 이들의 연령이 비교적 짧다는 점입니다. 이들의 평균연령이 36.7세 임을 고려할 때 그들과 함께 혁명을 주도했던 이들은 이보다 더 어리다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혁명가들이 권력의 정점에 있던 시기는 보통 우리 생각보다 짧습니다. 혁명이 급격하게 진화하면서 대부분 사태에 추월당했기 때문입니다. 극좌가 어느새 보수가 되는 이념 정치 변형이 일어났던 셈입니다.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혁명에 가담하면서 누구도 통제할 수 없는 흐름을 만들었습니다. 당통의 몰락이나 로베스 피에르의 몰락도 그런 흐름 속에 있기에 볼 수 있는 사건입니다
금강산도 식후경 ^^ 매 시간 참여자들의 간식준비로 먹거리를 나누고 있습니다.
4강. 레 미제라블을 통해본 혁명과 반동의 역사
레미제라블을 통해 프랑스 혁명을 살펴보는 시간이었습니다. 최갑수 교수님이 직접 발췌한 부분들을 함께 읽으며 다양한 사건의 성격, 혁명 철학, 혁명 등에 대해 서술한 부분을 읽었습니다. 빅토르 위고는 공화주의자가 된 이후 이 책을 집필하기 시작했습니다. 공화주의가 대안이라는 메시지를 부르주아에게 주기 위해서입니다. 나폴레옹 3세에 반대해 망명생활을 하면서도 집필을 이어갔습니다. 제2제정이 몰락하고서야 망명생활을 끝내고 파리에 옵니다. 이후 하원·상원 의원으로 선출되기도 합니다. 빅토르 위고가 민중에 대한 애정을 이 책에서 보여줬다면 찰스 디킨스는 군중에 대한 공포를 녹여 두도시 이야기를 썼습니다.
레미제라블은 최남선이 1910년에 소설의 극히 일부분을 중역해 알린 것을 시작으로 최근 민음사 등에서 원전>>우리말로 옮긴 완역판이 처음 나왔습니다. 1권의....100페이지를 채 읽지 못하고 접어두었는데 다시 시도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습니다!
방대한 양의 책 발췌부분을 함께 읽고 대선 이후 화제가 된 영화 레미제라블의 열풍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대선 직후 개봉하자마자 보신 분도, 저처럼 아직 보지 않으신 분들도 있었습니다. 최갑수 교수님의 자료를 보면 보편적 휴머니즘과 함께, 7월 혁명 이후와 오늘날의 우리와 ‘역사적 유사성’의 존재, 빈부의 엄청난 차이, 법의 공정성 문제, 민주화의 역사적 성과 한계 등이 레미제라블 현상을 가져온 게 아닌지 추측하고 계십니다.
프랑스 혁명 이후에도 프랑스가 오늘날의 복지국가로 탄생하기까지 수많은 시간이, 그리고 희생이 있었습니다. 1세기에 달하는 치열한 계급투쟁 끝에 2차 세계대전 이후에야 복지국가적, 사회민주주의적 합의의 기본틀이 만들어졌습니다. 자본주의 철폐를 주장하는 노동자 세력에게 그들의 요구를 일정 부분 수용한 체제가 안착한 셈입니다. 여전히 끊임없는 권리를 요구하는 프랑스 시민의 모습을 종종 국제뉴스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수 세기에 걸쳐 이뤄낸 성과와 더 나은 미래가 가능하다는 믿음이 그 원동력이 아닌지 생각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