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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좌명 | 강좌후기 | 글쓴이 | 날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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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종교의 이해Ⅰ | [세계 종교의 이해] <이웃종교체험> | 느티나무 | 2013.5.12 | ||||
지난 주말(5/4~5/5) 2013봄강좌 인문학교<세계 종교의 이해Ⅰ> 종강 후 프로그램으로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면 위치)으로 <이웃종교체험>을 다녀왔습니다.
요셉수도원은 수사님들이 직접 배 농사를 짓는 것으로도 유명한데요.
마침 배꽃이 만발하여 너무 아름다웠습니다.
만개한 배밭에서의 산책, 2차례의 기도회 참석, 원장신부님과의 대화, 오강남선생님과의 대화시간까지
너무너무 행복하고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물론 천주교에 대해서도 수도원에 대해서도 잘 알고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되는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하반기 예정되어있는 <세계 종교의 이해2>강좌에서도 이와 같은 프로그램을 준비할 예정입니다.
그때도 많은 참여와 관심 부탁드리겠습니다.
<세계 종교의 이해 Ⅰ>강좌 소개 페이지 >> 클릭
<진행 일정>
○ 첫째날
- 3:00 수도원 도착 (배꽃이 만발한 배밭 산책 등 자유시간)
- 5:00 저녁기도
- 6:00 저녁식사
- 8:00 수도원장님과의 대화
- 9:30 오강남 선생님과 대화
- 12:00 취침
○ 둘째날
- 5:50 아침기도(자유선택) / 묵상
- 8:00 아침식사
- 10:00 미사
- 12:00 출발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은 1987년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의 분원으로 현 남양주시 별내면 화접리(불암동)에 설립되었습니다. 우리 수도원은 봉쇄구역 내에서 기도와 단순한 노동 그리고 렉씨오 디비나(聖讀)를 통해서 오로지 ‘하느님을 찾는’ 삶을 사는 수도승 공동체입니다.
우리 공동체는 기도생활의 심화를 추구하며, 수도원을 찾는 손님들에게 고요한 기도의 공간을 제공하는 것을 선교적인 임무로 삼고 있습니다. 또한 한국문화에 맞는 수도승생활의 토착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홈페이지 >> http://benedict.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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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과 사건으로 보는 한국근현대사 | [스케치]5/4 인천 개항장 조계지 답사 - 인물과 사건으로 보는 근현대사 강좌 6강 | 느티나무 | 2013.5.7 | ||||
2013년 5월 4일 토 참여연대 아카데미 느티나무 인천 개항장 조계지 답사
일정 10:00 인천 중구 차이나타운 입구 한중문화원 주차장 집결 11:30까지 대불호텔 터, 제일은행, 제18은행(인천 개항장 근대건축 전시관), 일본영사관 (현 중구청) 11:30 점심 (차이나타운 내 태림봉) 15:00까지 청국영사관 터, 청일 조계지 경계 계단, 제물포 구락부, 한미수교 백주년 기념탑, 자유공원 15:00 인천 출발
제물포 개항장 조계지의 역사 개관
개항장 인천에 생겨난 최초의 조계는 1883년 9월 30일 일본과 체결한 조선국인천항구조계약서(朝鮮國仁川港口租界約書)에 의해 설정된 일본지계였다. 이듬해인 1884년 4월에 청국지계가 생기고 이어 10월에 각국지계가 설정되었다. 각국지계는 청·일 두 나라의 열배가 넘는 대지로 청국과 일본지계를 에워싸고 있었다.
이사벨 리 버드 비숍 여사가 1894년 우리나라를 방문한 후 쓴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에 따르면 당시에는 청국 조계가 일본 조계보다 훨씬 활발했고 중국인들이 무역에서 일본인들을 앞지르고 있었다고 한다. 대부분의 청국인들은 채소밭을 소유했는데 산동 지역에서 온 농사꾼들은 봄에 이곳에 건너와서 일을 하고 겨울에는 본국으로 돌아갔다. 1882년 수교통상조약을 맺은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는 각기 서울에 공사관을 개설하고 곧 서양 사람들이 개항한 제물포를 통해 입국하기 시작했다. 일본에 뒤이어 그들은 그들 이 공동으로 사용할 각국지계를 책정했다. 제일 먼저 온 것은 이화양행이었으나 곧 철수하고 독일계 세창양행과 미국 상사 타운센드상회가 뒤를 이었다. 자유공원 광장일대에 세워졌던 세창양행의 사원 숙소는 독일 성곽을 연상시키는 멋진 건물로서 인천의 랜드마크로 이름이 높았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건물로 기록되어 있다. 미국인 타운센드상회는 일본에서 김옥균과 친분을 맺고 입국한 무역회사로 화약, 광산기계, 토목용구, 석유 등을 수입하여 크게 치부했다. 특히 타운센드는 인천 최초의 증기동력기 정미소를 차려 선구자가 되기도 했다. 이때 각국조계 안에 러시아인 사바틴이 설계해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공원을 조성했는데, 이 역시 한국 최초의 공원이 되었다.
1) 대불호텔 터
서양인을 상대로 하는 근대적 숙박 시설의 필요성이 커지면서 1888년 대불(大佛)호텔이 세워졌다. 이 호텔은 1902년 서울 중구 정동에 들어선 ‘손탁호텔’보다 14년이나 앞선 것이었다. 이 호텔은 유럽인이나 미국인들을 대상으로 했기에 서양식으로 설계됐다. 대불호텔은 일본어가 아닌 영어로 손님을 맞았으며 외국인들의 입에 맞는 서양요리도 제공했다고 한다. 대불호텔은 일제 강점기에 중국요리집인 ‘중화루’로 바뀌었다. 이 건물은 1978년 헐린 뒤 나대지로 방치되었다가 현재는 주차장으로 이용되고 있다.
대불호텔 건너편에 중국인 이태호(怡泰號)라는 사람이 외국인 상대의 여관업을 시작하였는데 1층에는 잡화상점을 하면서 2층에 스튜워드 호텔(Steward Hotel)을 개업하여 서로 치열한 경쟁을 하였다고 한다.
참고로 커피가 처음 판매된 곳이 대불호텔이라고도 하나 언제부터 판매되었는지 정확한 기록을 찾기 어렵다. 미국, 영국 등 외국 사신들과 선교사, 상인들을 통해 널리 보급된 커피는 구수하고 향긋한 맛으로 곧 조선 왕족들과 대신들을 사로잡으며 기호품으로 자리잡았다. ‘가배차’나‘가비차’는 영어 발음을 따서 붙여진 이름이다. ‘양탕국’은 일반 민가에서 불렸던 이름이다. 커피의 색이 검고 쓴맛이 나는 것이 마치 한약 탕국과 같다고 해서 붙여졌다
2) 일본 제1은행
인천이 개항한 1883년에는 개설되어 대표적 은행으로 활동하였다. 1894년 갑오 정권이 「신식화폐발행장정」으로 일본화폐의 통용을 인정하여 급속하게 성장했다. 1905년 이후 제1은행이 화폐개혁을 전담하면서부터 우리나라의 중앙은행과 같은 역할을 하게 되었다. 1909년 한국은행이 창립되면서 한국은행 인천지점으로 변경되고, 1911년 한국은행이 조선은행으로 바뀜에 따라 조선은행 인천지점이 되었다.
3) 일본 제 18은행
1890년 나가사키 상인들의 업무가 번창하여 감에 따라 최초의 해외 지점으로 인천에 설치하게 되었다. 이후 약 47년간 영업하다가 1936년에 조선식산은행으로 양도하였다.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다가 현재는 ‘인천 개항장근대건축 전시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4) 일본 영사관 인천 개항 후 일본은 1883년에 전형적인 일본의 양풍 2층 목조건물로 영사관을 완성하였다. 1906년 2월에 일제가 통감부를 설치하면서 이사청(理事廳) 청사로 사용되었고, 1910년 조선총독부 설치 이후에는 인천부 청사로 사용되었다. 해방 후 인천시청으로 사용되다가 1985년 인천시청이 이전하여 현재는 중구청으로 사용되고 있다.
5) 청국 영사관
청국은 1884년 인천에 조계를 설치하고, 그 해 10월 영사관을 설치하였다. 그 후 영사관을 변리청, 이사서, 이사부 혹은 청관이라 칭하였다. 청일전쟁 중 일시 폐쇄되었다가 1898년 청국영사관으로 재발족하였으나 일제 말엽에 다시 폐쇄 되었다. 영사관 건물은 소실되었고 현재는 청국영사관 터에 화교중산학교가 들어서 있다.
6) 청일 조계지 경계 계단
이곳은 청국조계와 일본조계의 경계지역으로 만국공원(현 자유공원)으로 연결되는 계단과 조경이 마련된 공간이다. 자유공원 서남쪽 가파른 언덕에 자리 잡고 있는 계단을 중심으로
청국과 일본의 건물들이 확연하게 서로 다른 양식들로 번화하게 들어서 있던 곳이기도 하였다. 중앙에 돌계단을 배치하고, 계단 양쪽에 조경 식재 공간을 두었다. 경사가 급한 점을 감안하여 계단 사이를 여유있게 두는 등 조경디자인 측면에서의 공간 이용을 강조하였다. 또 경관 측면에서 인천항을 계단 중간에서 머물면서 즐길 수 있도록 여유롭게 설계되어 있는 것이 특징적이다.
7) 제물포 구락부
1901년 건축된 제물포구락부는 인천에 거주하던 독일, 미국, 러시아, 영국 등 각국조계 내 외국인들의 친목을 위한 사교장으로 이용되던 곳이다. 당시 일본인들은 자기들의 사교장을 따로 가지고 있었으므로 이 시설은 주로 서양인 전용의 시설이었다.
1913년경 일본 재향군인회 인천연합회에 이관되어 정방각으로 불렸으며, 1934년 일본여인회관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광복 후에는 미군에게 점유되어 장교클럽으로 사용되었다. 최근까지 중구문화원에서 사용하였으나 지금은 이전하였다.
8) 한미수교 100주년 기념탑 (자유공원 내)
1900년대 인천 개항장에 지어진 양관 중에 가장 아름다웠다고 전해지는 서양식 건축물로, 상해에서 항만시설공사로 치부한 존스턴이 개항장의 가장 높고 경관이 수려한 곳에 별장으로 사
용하기 위해 건축한 것이다. 해방 후 미 군정청에 접수되어 독신자 고급 장교 주택으로 이용되었다. 6.25전쟁 중 소실되어, 현재는 1982년에 건립된 한미수교 100주년기념탑이 자리하고 있다. 이 탑은 바로 1882년 제물포에서 체결되었던 한국 최초의 서양 국가와의 조약이었던 한미수호조약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것이다.
한편 인천에 세워진 최초의 양관은 세창양행 숙사 건물이다. 이 건물은 1883년 세창양행을 개점하기 위해 독일 함부르크에서 인천으로 온 세 사람의 사원 주택이다. 이 건물은 현 자유공원 광장 일대에 있었는데 1922년 인천부가 매입하여 인천부립도서관으로 시민에게 개방하기도 했는데 인천상륙작전 때 전소되었다.
9) 자유공원
우리나라에서 서구식 근대공원이 처음 들어선 곳이 인천이고, 그곳이 바로 자유공원이다. 1888년 만들어진 이 공원은 서울의 파고다공원(현 탑골공원)이 1897년에 세워졌으니, 이보다 9년이 앞선다. 이 공원은 처음 만들어질 당시 각국공원이라 불렸다. 인천항 개항 이후 인천으로 몰려든 서양 사람들이 한데 모여 살던 각국조계 안에 공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1945년 이후 한동안 만국공원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6·25전쟁을 겪고 난 1957년
개천절에 이곳에 맥아더 동상의 제막식을 가지면서 공원의 이름을 자유공원으로 바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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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과 사건으로 보는 한국근현대사 | [인물과 사건으로 보는 한국근현대사] 5강 (5.02) 서재필과 윤치호 | 김혜수 | 2013.5.7 | ||||
주진오 교수님의 수업을 들으며 가장 기억에 남는 명제 중 하나는 한 인물을 어떻게 하나의 수식어로만 규정할 수 있겠냐는 것이다. 그런데 주입식 교육에 익숙해진 우리들 대부분은 ‘무슨 사건이나 단체하면 누구’ 이렇게 단편적으로만 생각하기 쉽다. 나 역시 그렇기 때문에 단순했던 인물들에 대해 새로운 사실들을 알아가는 것은 평면그림이 입체로 변하듯 무척이나 흥미로운 것이었다. 특히나 ‘독립운동가’로 내 머릿속에 자리 잡혀 있던 서재필이 ‘필립 제이슨’이 되어 살아간 삶은 너무 놀라웠다. 갑신정병에서 행동파를 맡았던 그는 정변실패 후 일본으로 건너갔지만 냉대를 받았고 미국으로 떠나 홀로 서기를 감행하였다. 또한 미국에서 의학 공부를 하며 미국 주류사회에 완전히 편입되어 살아가는 아메리칸 드림의 원조가 되었다. 그러던 중 그는 김홍집 정권의 요청에 따라 중추원 고문으로 취임되었고 철저하게 미국인으로 행세를 하게 된다, 더욱이 모든 비용과 건물을 조선정부가 부담했음에도 불구하고 독립 신문사를 자신의 개인 소유로 등록하였으며 자신의 주택구입비까지 받았다. 독립운동을 정치활동보다는 경제활동으로 생각하며 행동하는 등 민족지도자가 지닌 희생적 자세는 찾아보기 힘들었던 것이다. 또한 미국인으로 산 서재필은 식민지배에 대해 순응하기를 권유 하였으며 식민지배의 책임은 대한제국 지배층의 무능과 민중의 무지 때문이라고 하였다. 3·1운동 후에는 태평양군축회의에 조선 문제 상정을 위해 노력했으나 실패로 끝나고 만다. 이러한 그를 역사상 위대한 지도자로 추앙하고 있다는 것은 생각해 볼 문제가 아닐까 싶다. 윤치호에 대해서도 살펴보자, 그는 개화파의 막내로써 미 공사관 통역관을 맡았으며 일본과 상하이, 그리고 미국에서 유학생활을 하였다. 일본의 식민 지배를 받을 때에는 관직에 나가지 않고 교육과 종교 활동을 통해 민족의 역량을 기르고 민족성을 개조하기 위한 계몽운동에 힘썼다. 조선인들이 독립을 쟁취할 능력이 없다고 생각했으며, 열강이 조선을 도울 의사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독립을 위한 활동의사는 없었다. 그는 모든 판단을 함에 있어 지나치게 신중했고, 근대 시민윤리를 실천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그는 민족주의자가 되는 길보다는 친일 활동을 통해 결과적으로 친일파를 대표하는 인물이 되고 말았다.
역사적 인물을 통해 나는 어떤 사람으로 기억될지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는다면, 2시간 반 수업 이상의 가치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수업 후기를 마친다. 참고자료 선택역사를 갈랐다. 서재필과 윤치호 편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210220220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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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종교의 이해Ⅰ | [세계종교의이해] 마지막시간 포스트잇 정리 | 느티나무 | 2013.4.27 | ||||
세계 종교의 이해 : 마지막시간 포스트잇 정리 강의소개 보기 > 클릭 1강 후기 보기 > 클릭 ○ 매주 무엇이 여러분들을 이리로 데려왔나요? - 버스를 타고 1시간을 넘게 올 때마나다 흔들린 적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강남 교수님의 이야기가 듣고 싶어져 왔습니다. 종교에 대해 학자적(?)으로 접근해서 알려주셔서 좋았어요! - 오강남 선생님의 편안하고 즐거운 목소리, 표정 - 1.오강남 선생님께 얻어듣는 지식, 아니 어쩌면 지혜. 2.그리고 그 덕분에 갖게되는 생각의 기회 =영어로 inspiration?ㅋㅋ때문이었습니다. 잘 배웠습니다. - 동양 종교의 이해도 듣고 싶네요. 어려울 것 같았던 종교시가 쉬워졌어요. - 매주 새로운 종교에 대해 배우는 즐거음. 미지의 세계를 둘러보는 느낌? - 오강남 교수님의 푸근한 미소. 새로운 세계에 눈뜨게 해주시는 명쾌한 강의!! 시간 가는 줄 몰랐어요! - A1.선생님의 맑은...유머? A2.'믿음'의 태도 마음가짐. A3.계속 좋은 강의를 마련해 주십시오. 감사! 감사! - 새로운 지식보다. 종교와 삶의 태도를 생각해 보는 시간이기 때문에. 오강남샘의 캐릭터 - 교수님의 알찬 강의. 공짜 저녁. 배우는 즐거움. - 물론 지하철타고 왔습니다. 장장 1시간. 내 안에 있는 질문이 느티나무 그늘로 나를 이끌었겠지만, 그 질문이 너무나 자연스럽고 편하게 해결되는 것을 느끼지 못했다면 불가능했겠죠. 오강남 선생님의 정말 쉽고 그러나 깊이있는 강의가 정답입니다. *올드패션의 농담을 진지하게 하시는 유머! - 그동안 가졌던 나의 의구심에 대한 확신 - "다양함 속의 하나됨"이라는 오강남 선생님의 말씀이 어러모로 생각꺼리를 제게 준 것 같습니다. 힐링됐어요^^ - 새로 알게된다는 것의 기쁨 풍요로워지는 정신세계(?) - 종교생활하면서 무언가 잘못 만난 단추와 단추구멍같은 마음의 갈등을 해소? 위로? 해방구가 되는 시간 ○ 이 강좌를 통해 새로 알게된, 발견한 것은? -'심층 종교'에 관한 쉽고 재미있는 해석 -자주 듣지만 정체를 알 기회가 없었던 유대교에 대해... 매우 흥미로웠다. - 편견을 가진 종교관도 문제이지만 종교에 대한 무조건적인 편견도 옳지 않다는 사실 ^^ 이제 더 느끼고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 모태 신앙인으로서 냉담하면서 그동안 가졌던 막연한 찜찜함을 털어버릴 수 있었다. - 주변의 근본주의적인 기독교인들을 꿰뜷어보고 싶어짐요. - 여전히 풀리지 않지만 종교와 철학과 삶의 태도... 이런 문제들이 훨씬 명확해진 것 같아요. 내안에 있는 선한 의지를 잘 키워서 이제라도 좀 더 괜찮은 이웃이 되고 싶다는 다짐을 하게 되었습니다. 매우 FM이어서 부끄럽네요^^ - 종교를 가짐으로 나를 변화시키는 것에 이유를 두자. - 심층 종교는 모두 통한다. 표층종교는 서로를 적대한다. - 진리와 비폭력에 대한 이중적 헌신 - 종교는 하나. 잘 믿고 잘 행하고 평안을! - 한국개신교가 문제라고 생각해 왔는데, 사실은 생각보다도 더 큰 문젯덩어리다. 답이 있을까. - 많은 부족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기쁘다. ○ 느티나무에 바라는 점 - 주구장창 올 수 있도록 부디 망하지 말고 날로 번창하세요. 그 밖에 바라는 건 엄쓔. - 가을의 <종교 둘러보기 동양편>도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 계속 있는 것. - 토의하는 시간이 많았으면 좋겠어요. - 시간을 30분만 늦게 시작하면 덜 바쁠 것 같아요 :) 좋은 주제로 사람들의 고민과 열린 사고를 할 수 있는 '길벗'이 (오강남선생님 말이에요)되어주세요. - 매회 느끼는 것처럼 알찬 열매를 바라지만 싹트임을 돕는 단비 역할을 해주셨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 느티나무 계속 계속 좋은 강좌를! - 강의 시간대가 다양하길 바랍니다. 7시는 좀 늦어요. 6시만 되어도 좋겠어요. - 좀더 작은 규모의 소그룹이 활성화되면 좋겠습니다. 강의에 끝난지 않는 지속적인. - 참여연대 오랜 회원입니다. 존재 자체만으로도 늘 고맙고 힘이 됩니다. 게다가 이렇게 좋은 회원님들과 훌륭한 강의까지 ~~~넘 고맙습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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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시민정치학교Ⅰ- 다시 정치를 향하여 | [시민정치학교] 3강(4/22), 정치성향 자가진단 결과 | 느티나무 | 2013.4.27 | ||||
[시민정치학교] 3강, 정치성향 자가진단 결과 강좌소개 보러가기 > 클릭 아카데미느티나무 2013 봄 강좌 [민주주의학교] '나'의 시민정치학교 3강은 김동춘(성공회대학교 사회과학부)교수님과 함께 했습니다. 시작 전, 메일로 안내해드렸던 <정치성향 자가진단>결과를 가지고 조별로 이야기 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참여해주신 결과를 아래와 같이 공유합니다. 이 수업에는 대부분 비슷한 지향의 분들이 모이셨네요~ 이날 수업에 못 오신 분들도 한 번 해보시고 비교해보세요! ![]() ![]() 출처 : P&C정책개발원 (http://www.pncreport.com/) 아래 주소로 들어가 참여해보세요! >> http://www.pncreport.com/series/poll.html?lm=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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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과 사건으로 보는 한국근현대사 | [인물과사건으로보는한국근현대사] 3강(4.18) 절친에서 제거대상 1호로 : 김옥균과 민영익 | 김혜수 | 2013.4.25 | ||||
김옥균과 민영익 - 절친에서 제거대상 1호로
저는 학교에서는 휴강이 되면 마냥 좋아하던 학생이었는데요, 4월 2째주 수업이 휴강되었다는 말은 참으로 섭섭하였습니다. 그런데 다행히도 교수님이 쾌차하고 계셔서 지난주에는 유익하고 재미있는 수업을 이어나갈 수 있었네요. 공부도 중요하지만 우리 모두 건강하게 꽃피는 봄을 환영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
그럼 지난 수업을 한 번 정리해 볼까요? 민영익은 민승호의 양자로 들어가면서 명성왕후의 총애를 받았고, 18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요직을 맡는 등 민씨 척족의 새로운 간판으로 등장하였습니다. 또한 민영익은 고종이 진행하고 있었던 친정체제의 핵심인물로써 동도서기론을 기반으로 한 다양한 활동들을 하게 됩니다. 김옥균도 21살에 장원에 급제하며 안동 김씨의 청년스타로써 민영익의 집에는 자주 드나드는 8명의 학사들 중 한명이기도 하였습니다. 민영익은 주요 외교업무의 책임을 지고 있었는데요, 가장 대표적인 일은 보빙사를 꾸려 미국을 방문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김옥균의 추천으로 이루어진 일이라고 합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둘은 절친한 동지였습니다. 인식과 정책이 수구, 친청사대적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 둘은 왜 갈라서게 되었을까요? 청에 대한 생각과 입장의 차이가 둘을 갈라놓는 가장 큰 계기가 되었습니다. 민영익은 미국에 대해 굉장히 호의적이었고, 러시아를 이용하여 청을 견제할 수 있을 것 이라고 생각하며 점진적인 방향으로 개화를 추진하였습니다. 일본은 믿을 만하지 못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반면 김옥균은 청의 개입에 대해 일본이 많은 도움을 줄 것으로 생각하였고, 청으로부터의 독립을 하는데 민영익이 도움이 되지 못하다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갑오개혁이 발생했고, 민영익의 척족들은 급진개화파에 의해 살해당하고, 급진개화파는 일본으로 망명하게 됩니다. 결국 둘 다 근대화 역사에 중요한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만약 둘이 힘을 합쳐 개화를 이끌었다면 조선말기의 모습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특히 지난 주 수업에서는 학교에서 빡빡하게 공부를 할 때에는 듣지 못했던 뒷이야기(?)들을 듣는 것 같아재미있었는데요, 명왕성을 발견한 퍼시벌로웰이라는 사람이 보빙사의 일행이었고 고종의 사진을 최초로 찍어주었다는 말은 ☆까지 치며 들었답니다. 아래에는 교수님께서 말씀하신 참고자료들을 링크하였습니다. - 문화콘텐츠닷컴 : http://www.culturecontent.com/main.do - 선택!역사를갈랐다(서울신문연재) :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20910021001
이번 주에는 수업내용과 관련하여 느낀 점이나 배운 점들을 함께 나누는 시간을 많이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수업시간에 뵐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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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시민정치학교Ⅰ- 다시 정치를 향하여 | [과제안내] '나'의 시민정치학교 3강 수업 | 느티나무 | 2013.4.23 | ||||
안녕하세요? 참여연대 아카데미느티나무 천웅소 간사입니다. 이제 완연한 봄날씨네요~ 벌써 다음 주 월요일 3강(우리 사회의 진보 보수 갈등의 본질은 무엇인가 / 김동춘)수업이 있는데요. 주말을 이용하여 P&C정책개발원에서 하는 <정치성향자가진단>에 참여 하시고 결과물을 출력해 오면 어떨까요? 당일 수업 전에 출력해온 결과물을 가지고 이야기해보는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그럼 모두들 월요일에 뵐께요~ 많은 참여부탁드려요 :) 아래 질문항목이 안 보이시면, 아래 주소로 들어가 참여하셔도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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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종교의 이해Ⅰ | [세계 종교의 이해] 7강 - 이슬람교 ① 후기 | 이나단 | 2013.4.18 | ||||
세계 종교의 이해 : 6강 (4/09) 그리스도교 ③ 강의소개 보기 > 클릭 1강 후기 보기 > 클릭 세계 종교의 이해 : 7강 (4/16) 이슬람교 ① 안녕하세요, 여러분~ 수강생분들과 오강남 교수님의 세계 종교에 대해 배우는 일곱 번째 시간이 되었네요. 오늘은 세계에서 기독교 다음으로 신도가 많은 이슬람에 대해서 공부했습니다. 이슬람 인구는 약 12억 명 정도로 추산된다고 합니다. 유대교나 기독교에 비해 젊지만, 빠르게 성장하는 종교라고 합니다. 이슬람교도는 중동(아랍국가)뿐만 아니라 아프리카, 파키스탄, 인도 방그라데시, 필리핀, 중국에도 많고 최근에는 미국에도 늘고 있다고 합니다. 한국에도 서울 한남동과 부산 등지에 이슬람교인들을 위한 성원이 있습니다.
이슬람의 창시자는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알려지 무함마드입니다. 이슬람 전통에 의하면, 아브라함과 하갈(사라의 여종)이 낳은 이스마엘이 메카로 왔고, 이 모자의 후손이 무함마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교, 기독교와 더불어 아브라함을 공통의 조상으로 여기는 이슬람교까지 아브라함의 종교라고 부릅니다. * 여기서 잠깐!!!
무함마드의 신비한 체험 이야기에 부인은 매우 기뻐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첫 이슬람 신도가 되었습니다. 히브리 성경이 조예가 깊은 친척에게도 무함마드는 인정을 받고, 큰 용기를 얻었습니다. 위대한 종교지도자가 탄생되는 과정에서 주변의 가깝고 친밀한 사람들의 반응이 중요하겠구나하고 느껴졌습니다.
종교탄압을 피해 무함마드는 메카로부터 400Km 떨어진 메디나로 피신합니다(662년). 이슬람교인들은 메디나에서 ‘기도하는 집’이라는 뜻의 모스크를 최초로 세웠습니다. 금요일에 모여 예배를 드리고, 신도 개인적으로 개인적으로 하루 5번 기도하는 전통이 생기게 됩니다. 계시받는 무함마드 (이슬람미술에서는 무함마드의 얼굴을 그리는 것이 금기시되어있다고 하네요)
4. 쿠란을 쿠란!(읽어라!) 마지막으로 이슬람교의 경전인 쿠란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읽다, 외치다’라는 뜻의 쿠란은 무함마드가 직접 기술한 책은 아닙니다. 무함마드가 내용을 읊으면 옆에서 이를 기억하고 옮겨 적는 이가 있었던 것이죠. 사실 무함마드는 문맹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쿠란은 기적입니다. 문맹이 외우고 있던 것으로 보기에 쿠란의 내용이 문법적으로 완벽하고, 시적으로 매우 아름다우니 말입니다! 할렐루야~ 기독교의 신약성서보다 분량이 적은 쿠란은 이슬람교 3대 지도자 시절 114장으로 최종 확정되었습니다. 이후, 쿠란은 아랍문화의 모델이 되었으며, 무슬림의 삶과 죽음에 깊은 연관을 맺게 되었습니다.
부패한 기독교로부터 해방되는 통로로서 이슬람의 이미지는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러한 이슬람의 성격은 교리의 단순성과 더불어 이슬람 포교가 잘 이루어졌던 이유라고 오강남 교수님은 말씀해주셨지요. 다른 인종, 종교, 문화에 대해서 포용했던 이슬람의 전통을 잘 살리면서, 이슬람교도 내부적으로도 생명과 평화를 중시하는 분위기를 더욱 강화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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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시민정치학교Ⅰ- 다시 정치를 향하여 | [시민정치학교] 2강(4/15), 18대 대선이 남긴과제는 무엇인가? | 느티나무 | 2013.4.18 | ||||
[시민정치학교] 2강, 참여자 질문 정리 강좌소개 보러가기 > 클릭 안녕하세요? 2강 수업은 서복경 서강대학교 현대정치연구소 연구원님이 수업을 진행해주셨는데요. 당일 수업 스케치 사진과 질문을 정리해 올립니다.
▣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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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시민정치학교Ⅰ- 다시 정치를 향하여 | [시민정치학교] 1강(4/08), 나는 어떤 정치를 원하는가? | 느티나무 | 2013.4.18 | ||||
참여자 여러분 안녕하세요?
아카데미 느티나무 2013 봄 강좌
[민주주의학교] '나'의 시민정치학교 : 다시 정치를 향하여 를 담당하고 있는 천웅소 간사입니다.
매 시간 마다 나왔던 질문과 의견 등을 정리해서 올릴 예정입니다.
수업시간에 질의응답시간이 있지만
미처 하지 못 한 말, 함께 읽고 싶은 좋은 글, 문장 등을 댓글로 남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강좌소개 보러가기 >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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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의 참여 목표
- 나를 더 잘 알기 위해서
- 그람시 정치시민
- 더 정치적인 남자?
- 이번 선거 이후에 나의 일상과 정치가 매우 가깝다는 걸 깨달아서
- 깨어있는 시민이 되고 싶다
- 필요해서, 잘 몰라서, 나의 행동과 언어들에 영향을 미치는 내 행동이 사회에 미칠 영향이 궁금해서 / 시민으로서 나의 책임 이랄까?
- 내가 바라는 사회는 어떤 사회일까?
- 정치에 대해 좀더 폭넓고 예술적인 시야를 갖고 싶다.
- 전달, 정리, 관심, 고민
- 다른 민주 정치 모습에 대한 기대/궁금
- 1+1, 한표 더하기 한표
- 새 정치! 참 정치!
- 뉴스를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 민주주의에 대한 기본적인 역사, 뜻
- 막연한 구호가 아닌 작은 일이라도 실천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 도덕성이 결여된 결과는 평가받을 수 없다.
- 좋은 강좌라고 추천받아 수강하게 되었습니다.
- 민주정치의 부활을 위해서 생활속 실천을 그려볼 수 있기를!
- 지속적인 관심, 참여의 연결선상, 시작
▣ 셀프 자가진단 : 정치적인 시민으로서 나의 점수는? / 평균 50.9점 (100점 만점)
총 20분이 참여해주셨는데, 자가진단 점수를 공개해주신 분(12명)만을 대상으로 한 평균값을 공개합니다.
<질문>
① 지난 선거에서 투표 했는가? (1점~10점) / 평균 7.9점
- 지난 4번의 선거 (2012/12 대선, 2012/4 총선, 2011/11 서울시장 보궐선거, 2010/6 지방선거) 중
- 모두 투표했으면 10점, 3개만 했으면 7.5점, 2개 5점, 1개 2.5점, 0개 0점. - 단, 서울외 거주자는 2011년 보궐선거를 제외하고 2008년 총선 포함.
② 직장, 가정에서 정치적견해가 다른 사람과의 대화를 회피하지 않는가? (1점~10점) / 평균 9.0점
- 10점 : 오히려 내가 먼저 의견을 밝히고 상대방을 설득한다.
- 7.5점 : 먼저 의견을 밝히진 않지만, 피하진 않는다.
- 5점 : 가급적 피하지만 어쩔 수 없는 경우에만 한다.
- 2.5점 : 의견을 얘기하지 않는다.
- 0점 : 내 생각과 다르더라도 상대방의 기분에 맞춰 맞장구친다.
③ 집회 또는 행사 등의 시민직적행동에 참여한 적이 있는가? (1점~20점) / 평균 10.4점
- 20점 : 월 1회 이상은 참여한다.
- 15점 : 분기에 1회 이상은 참여한다.
- 10점 : 연 1회 이상은 참여한다.
- 05점 : 최근 2~3년에 한 번 이상은 참여한 적이 있다.
- 0점 : 한 번도 참여한 적이 없다.
④ 정치후원금을 낸 적이 있는가? (1점~20점) / 평균 7.1점
- 20점 : 매년 낸다.
- 15점 : 4~5번 낸 적이 있다.
- 10점 : 2~3번 낸 적이 있다.
- 05점 : 한 번 낸 적이 있다.
- 0점 : 한 번도 낸 적이 없다.
⑤ 정당가입을 한 적이 있는가? (1점~20점) / 평균 9.2점
- 20점 : 현재 당원이다.
- 14점 : 과거에 가입한 적이 있다.
- 7점 : 한 번도 가입한 적이 없지만, 가입 할 의사가 있다.
- 0점 : 가입한 적도, 가입할 의사도 없다. ⑥ ‘정치적인 시민’에 대해 본인 스스로 질문과 항목을 만들고 답해주세요 (1점~20점) / 평균 7.3점
<스스로 만든 질문>
- 정치인들의 이야기에 관심을 갖는다.
- 정치적 성향에 맞춰 매체를 선택한다.
- 생활 속 정치 실현을 위한 고민을 하는가?
- 정치 참여에는 나이가 없다고 생각한다.
- 정치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지만 사회전반적인 정치문제에 대해 관심을 갖거나 고민한다.
- 하루에 얼마나 많은 정치 기사(혹은 정치 게시물을)를 찾아보는가?
▣ 질문
- 안녕하십니까? 저는 '청소년의 정치적 기본권 내놔라 운동본부'에서 활동하는 윤희라고 합니다. *^^* 정치엔 나이가 있는지? 우리는 왜 체험이고 배우는 과정이라 치부되는지요?? 우리는 피치차 일 수 밖에 없나요?
- 민주당이 왜 새누리당이랑 비슷해져간다는 생각이 들까요? 민주당이 나아가야 할 방향이 궁금합니다.
- 독일 사례 새롭고, 좋았고 부러웠습니다 / 오늘 강의 잘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미래는 현재보다 좋아하기 힘들다. 옛 어떤 좋은 기억으로 힘든 것도 살고, 이겨낸다. 하신 말씀도 제 현제 이겨내게 함.
- 민주주의 제도하에서 똑똑하지 못한 시민들이 투표했을때 나타나는 비극
- 참여수단의 다양화가 많은 사람들의 이익을 대변할 수 있을까요? <민주주의의 심화?> 참여의 수단발전이 오히려 소외를 불러 일으킬수 있지 않을까요?
- 누구는 하고 누구는 못하는 이유? ('룰라'는 하고 오바마, 노무현은 큰 성과를 못내는 이유는?) 선생님은 가입한 정당이 있으신지요?(어떤 정당의 당원이십니까?)
- 관심이 없는 우리가 후세대가 알았으면 하는 '노동(정치)의 가치'에 대한 이야기가 담긴 책 추천해주세요! 활동가(운동가)와 정치가의 차이? 많은 차이가 있나요?
- 부와 권력을 가지지 못한 사람이 자신에게 불리한 정당에게 투표하는 악순환(?)을 막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혹은 그 악순환도 인정하고 기다려야 하는 걸까요?
- 직접, 참여, 숙의, 대의, 정당 민주주의는 가능한가? How?
- 정치 불신, 정치 무관심, 반정치주의는 동양 혹은 한국의 전통과 관련된 것은 아닌가요?
- 정치는 우리가 행복하기 위한 건데 지금 우리사회에서 행복한(만족한) 사람은 누구인가요?
- 정당정치의 복원, 지금 진보정당이 해야 할 가장 시급한 과제는 무엇인가?
- 대선이후 패배감, 절망감, 무기력함 등... 젊은이들이 느끼는 부정적 감정을 어떻게 해소해야 할까요?
- 청소년의 정치적 기본권 내놔라!!! 운동본부에서 활동하고 있는 만 18세입니다. 올해 선거권 이하 운동을 통해 내년에는 반드시 꼭 지자체와 교육감 선거를 하고 싶습니다 *^^* 어떻게 여론화를 할 수 있을까요?
- 민주주의의 중요요소가 조직, 결사라면 어떤 조직에 대해 혹은 결사00는 행위에 대해 국정원이 종복 낙인을 찍고 비합리적인 수사를 통해 조직, 결사자체를 무력화 한다면 민주주의는 어떻게 이루어야 하나요?
- '정당' 현재 우리의 정당을 기준으로 대안적인 정당을 새로 만들어야 한다는 말씀이신가요? 아니면, 현재의 정당이 '체질변화'가 가능하다고 생각하시나요?
- 저는 개인적으로 그람시에 대한 생각이 많습니다. 진보정치, 노동운동이 아직 NL, PD로 나누는 일 이를 극보가고 대중정당으로 나가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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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종교의 이해Ⅰ | [세계 종교의 이해] 6강 - 그리스도교 ③ 강의후기 | 민해 | 2013.4.14 | ||||
세계 종교의 이해 : 6강 (4/09) 그리스도교 ③ 강의소개 보기 > 클릭 1강 후기 보기 > 클릭
오강남 선생님의 종교 강의를 들은 것도 벌써 여섯번 째! 이제 겨우 두 번의 수업만을 남겨두고 있다. 이번 주는 기독교의 마지막 시간이었다. 중세 기독교에서부터 현대 기독교에 이르기까지, 중요 사상가들의 철학과 기독교 신관의 변화 과정을 살펴보았다. 예정된 시간이 훨씬 넘어서 끝났을만큼 수강생들의 참여도가 유독 높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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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과 사건으로 보는 한국근현대사 | [인물과 사건으로 보는 한국근현대사] 2강 | 로아나 | 2013.4.12 | ||||
안녕하세요. 벚꽃들이 조금씩 움을 트고 있는 가운데 난데없이 눈이 내리는, 그런 기묘한 4월입니다. 저희 <한국근현대사> 수업은 두 번째 강의를 무사히 마쳤답니다. 이번 시간에는 ‘흥선 대원군’과 ‘고종’에 대해서 배웠는데요, 여러분 ‘흥선 대원군’ 하면 뭐가 가장 먼저 떠오르시나요. 아마 많은 분들이 명성황후를 가장 먼저 떠올리실 것 같아요. 시아버지인 대원군과 며느리인 명성황후의 대립은 이미 숱한 사담이나 드라마, 소설들을 통해 익숙한 내용이지요. 하지만 정작 대원군의 아들이자 조선의 왕이었던 ‘고종’은 왜 등장하지 않을까요. 고종은 정말 아버지와 아내 사이에서 기조차 펴지 못하는 유약한 왕이었을까요? 고종에 대한 가장 뿌리 깊은 오해는 그가 명성황후―또는 민씨 정권에 휘둘린 무능한 왕이라는 인식입니다. 고종에게 민씨들은 처가일 뿐만 아니라 외가이기도 합니다. 여흥 민씨 가문에서는 명성황후를 비롯해 인현황후와 원경황후 등 세 명의 정비를 배출했습니다. 또한 고종의 외할아버지인 남연군과 흥선 대원군 모두 여흥 민씨와 결혼합니다. 대원군에게 벗어나기 위해 자신의 세력을 찾던 고종에게는 민씨들이 더없이 믿음직하고 가까운 사람들이 아니었을까요. 즉 ‘민씨 정권’은 고종 스스로의 신임과 선택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고종은 12세에 왕위에 올라 10년이 넘도록 대원군의 그늘 밑에 있었습니다. 그는 신미양요가 일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의견충돌 없이 아버지의 뜻에 따랐습니다. 하지만 미국과의 전투 후, 고종의 생각은 변하기 시작합니다. 쇄국정치는 조선의 고립으로 가는 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후 고종은 친정을 결심하고 아버지와 완전히 뜻을 달리하게 됩니다. 이러한 그의 강단을 보여주는 하나의 사건이 있는데 바로 ‘영남만인소 사건’입니다. 면암 최익현은 대원군의 탄핵을 요구하게 되고 고종은 친정을 선언하며 대원군을 내쫓습니다. 이에 반발한 남인 유생들이 대원군의 복귀를 요청하며 쓴 만인보를 쓰게 됩니다. 고종은 크게 분노하여 만인보의 주동자를 참형에 처하라는 명령을 이르지요. 대원군은 결국 여러 번의 고종 암살계획을 세우며 갑오개혁과 임오군란에 참여합니다. 또한 명성황후 시해가 일어난 을미사변에도 직접적으로 참여하게 되지요. 결국 고종과 완전히 멀어지게 된 대원군은 쓸쓸한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대원군은 끊임없이 아들인 고종을 못미더워 한 것으로 보입니다. 또는 권력에서 자신이 멀어지는 것을 견디지 못했는지도 모릅니다. 만일 그가 적당한 때에 물러날 줄 아는 미덕을 아는 아버지였다면 역사는 어떻게 변했을지 궁금합니다. 저녁시간에 이루어지는 강의라 많이 피곤하실텐데도 조는 분 한분 없는 훌륭한 수업이었습니다^^ 저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준 주진오 교수님의 말씀을 옮겨 적으며 글을 마칩니다. “누군가가 평생 옳은 길을 걸어 완벽한 위인이 되거나, 평생 악인의 길을 걸어 완벽한 악인이 되는 일은 없습니다. 누구든 살면서 꼭 한번쯤은 나쁜 일을 하거나 좋은 일을 하기도 하니까요. 그래서 종종 무서울 때가 있습니다. 제가 혹시 한순간이라도 실수를 하지 않을까 반성하면서 겸허함을 배우게 되는데. 자신의 인생에 대해 겸허를 배우는 것, 그게 곧 역사학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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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보는 프랑스 혁명사 | [다시 보는 프랑스 혁명사] 3,4 강 후기! | 지은kd | 2013.4.10 | ||||
3강. 인물로 보는 프랑스 혁명 - 당통, 브리소, 로베스피에르, 루이16세, 브리소 프랑스 혁명 당시의 모습을 묘사한 혁명화를 함께 감상하며 수업을 시작했습니다. 치열한 전투, 학살, 국왕 재판, 삼부회의, 왕비의 모습 등 당시의 긴박함과 사람들의 모습이 잘 묘사되어 있었습니다. 3강의 주제는 ‘혁명의 향배와 의미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 20선’이었습니다. 혁명에서 개인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살펴보는 시간이었습니다! 루이 16세 국왕부터 혁명기 언론인으로 두각을 나타낸 에베르까지 다양한 인물을 살펴봤습니다. 다행히 당통, 로베스피에르 등 익숙한 이름을 가진 이들도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당통은 법률가 출신으로 파리코뮨의 실력자였습니다. 군주제의 몰락에 기여 했고, 법무장관에 올라 임시행정내각의 실세가 되기도 했습니다. 핵심적인 권력체였던 공안위원회를 주도하고 공포정치를 지원했지만 발병으로 고향에 머물렀습니다. 관용파로 몰려 체포, 사형됩니다. 로베프 피에르도 그랬지만, 과도한 업무로 당통과 같이 질병에 시달려 사망한 사람이 많다고 합니다. * 공안위원회: 사실 합법적 혁명권력체로는 국민공회(단원제)가 있었습니다. 21개 위원회를 통해 행정부를 지휘하는 권력체였습니다. 이 가운데 중요한 것이 공안위원회와 치안위원회였습니다. 특히 공안위원회는 정부 행위의 모든 분야를 관장해, 국민공회가 해산할 때까지 사실상의 정부 기구 그 자체 였습니다 1973년 여름에서 열월의 반동에 이르는 공포정치의 절정기(1년 여간)에 영웅적인 활동을 펼쳤습니다. 이어 로베스 피에르 역시 법률가 출신입니다. 엘리트로서 봉기코뮨을 거쳐 국민공회 의원이 됩니다.아까 말씀드렸던 공안위원회 위원이 되면서 죽을 때까지 혁명 정부 및 공포정치의 최고 지도자로 남습니다. 혁명의 상승기인 5년을 통째로 겪은 몇 안되는 인물 중 하나였습니다. 이러한 급격한 시류 속에서 로베스 피에르 역시 몰락직전 과로로 병사합니다. 흡혈귀, 부패시킬 수 없는 자와 같은 별명을 갖고 있다고 합니다. 그의 결벽증적 성격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말과 행동을 일치시켜 살았던 혁명가였다고 합니다. 1974년 봄, 권력의 정점에 서면서 공포정치의 책임자로 간주되고 있습니다. 이 둘 외에도 착하지만 무능했다는 루이 16세(루이 15세의 손자)와 왕비, 방데 반란(귀족 반란)을 이끌었던 샤레트, 국왕재판에서 ‘왕이기 때문에 죽어야 한다’고 주장한 생쥐스트, 대표적 혁명 순교자인 마라 등 다양한 인물을 공부했습니다. 국왕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시세의 흐름에 민감한 자유주의 귀족이나 수재형 인재, 자유전문직업인들(법률가 등)이었습니다. 눈에 띠는 점은 이들의 연령이 비교적 짧다는 점입니다. 이들의 평균연령이 36.7세 임을 고려할 때 그들과 함께 혁명을 주도했던 이들은 이보다 더 어리다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혁명가들이 권력의 정점에 있던 시기는 보통 우리 생각보다 짧습니다. 혁명이 급격하게 진화하면서 대부분 사태에 추월당했기 때문입니다. 극좌가 어느새 보수가 되는 이념 정치 변형이 일어났던 셈입니다.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혁명에 가담하면서 누구도 통제할 수 없는 흐름을 만들었습니다. 당통의 몰락이나 로베스 피에르의 몰락도 그런 흐름 속에 있기에 볼 수 있는 사건입니다 4강. 레 미제라블을 통해본 혁명과 반동의 역사 레미제라블을 통해 프랑스 혁명을 살펴보는 시간이었습니다. 최갑수 교수님이 직접 발췌한 부분들을 함께 읽으며 다양한 사건의 성격, 혁명 철학, 혁명 등에 대해 서술한 부분을 읽었습니다. 빅토르 위고는 공화주의자가 된 이후 이 책을 집필하기 시작했습니다. 공화주의가 대안이라는 메시지를 부르주아에게 주기 위해서입니다. 나폴레옹 3세에 반대해 망명생활을 하면서도 집필을 이어갔습니다. 제2제정이 몰락하고서야 망명생활을 끝내고 파리에 옵니다. 이후 하원·상원 의원으로 선출되기도 합니다. 빅토르 위고가 민중에 대한 애정을 이 책에서 보여줬다면 찰스 디킨스는 군중에 대한 공포를 녹여 두도시 이야기를 썼습니다. 레미제라블은 최남선이 1910년에 소설의 극히 일부분을 중역해 알린 것을 시작으로 최근 민음사 등에서 원전>>우리말로 옮긴 완역판이 처음 나왔습니다. 1권의....100페이지를 채 읽지 못하고 접어두었는데 다시 시도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습니다! 방대한 양의 책 발췌부분을 함께 읽고 대선 이후 화제가 된 영화 레미제라블의 열풍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대선 직후 개봉하자마자 보신 분도, 저처럼 아직 보지 않으신 분들도 있었습니다. 최갑수 교수님의 자료를 보면 보편적 휴머니즘과 함께, 7월 혁명 이후와 오늘날의 우리와 ‘역사적 유사성’의 존재, 빈부의 엄청난 차이, 법의 공정성 문제, 민주화의 역사적 성과 한계 등이 레미제라블 현상을 가져온 게 아닌지 추측하고 계십니다. 프랑스 혁명 이후에도 프랑스가 오늘날의 복지국가로 탄생하기까지 수많은 시간이, 그리고 희생이 있었습니다. 1세기에 달하는 치열한 계급투쟁 끝에 2차 세계대전 이후에야 복지국가적, 사회민주주의적 합의의 기본틀이 만들어졌습니다. 자본주의 철폐를 주장하는 노동자 세력에게 그들의 요구를 일정 부분 수용한 체제가 안착한 셈입니다. 여전히 끊임없는 권리를 요구하는 프랑스 시민의 모습을 종종 국제뉴스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수 세기에 걸쳐 이뤄낸 성과와 더 나은 미래가 가능하다는 믿음이 그 원동력이 아닌지 생각해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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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종교의 이해Ⅰ | [세계 종교의 이해] 5강 - 그리스도교 ② 강좌 후기 | 이나단 | 2013.4.5 | ||||
세계 종교의 이해 : 5강 (4/02) 그리스도교 ② 강의소개 보기 > 클릭 1강 후기 보기 > 클릭
안녕하세요, 여러분! ‘세계종교의 이해’ 오강남 교수님의 특강 다섯 번째 시간은 특수필기능력을 갖춘 한 분의 발표를 듣는 것으로 시작했습니다. 깜찍하고 귀여운 서체와 일러스트,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내용들이 감탄을 금할 수 없었지요. 정말 대단하십니다.^.^ 짝짝짝~
1. 정결이냐 자비냐? ‘정결’을 중시한 당시 유대사회와 달리 ‘자비’를 강조한 예수에 대한 이야기로 강의는 시작되었습니다. 레위기에 근거한 ‘하나님이 거룩한 것처럼 너희도 거룩하라(깨끗하라)’라는 구호를 예수는 거부했던 것입니다. 대신 예수는 ‘하나님이 자비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자비스러워라’라고 주장합니다. 다른 사람의 고통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그 아픔을 함께 겪는다는 의미의 자비 정신을 강조한 것이겠지요. 그래서인지 예수는 당시 천대받던 걸인, 장애인, 병자 뿐만 아니라 불결하다며 상종조차 하기를 꺼려한 사마리아인, 창녀, 세리 등과 어울렸는지도 모릅니다. 마음에 중심에 자비를 지닌 사람은 원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 존재의 아픔이 보일 뿐, 자신이 뭘 도와줄 수 있는지를 고민하겠지요. 저는 상대의 아픔에 공감하기보다 나와 관련이 있는 사람인지 확인하려고 했고, 모든 행위에 옳고 그름을 먼저 따져보려고 합니다. 사랑하는 이웃의 범위가 없었던 예수의 삶과 비교해보니... 정말 부끄러웠습니다.
2. 비유의 맛! 예수는 이 자비를 여러 가지 비유로 가르쳐주었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자비가 무엇인지, 누가 우리의 이웃인지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가장 대표적인 비유입니다. 먼저 사마리아인에 대해 알아볼까요? 유대 지역 중에서 갈릴리 출신이 특히 천시받았듯이, 사마리아인은 모든 유대인들에게 소위 개무시당했습니다. 왜냐고요? 슬픈 역사적 배경이 있습니다. 솔로몬 왕국이 분열되고 주변제국의 침략을 받은 북이스라엘 민족들은 다른 민족과 혼인하는 융합정책에 따르게 되었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유대인들은 정결예법에 따라 혼혈민족이 된 사마리아인들을 불결한 부류로 여기고 있었던 것이지요. 다시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로 돌아가서, 이 비유의 의미를 새겨보고자 합니다. ‘진정한 이웃이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이다’라는 것이 아닐까요? 피흘리는 사람이 부정한지 아닌지 따지기 전에 치료해주고, 살려주는 사람이야말로 이웃이고, 참된 자비를 실천하는 것이라 느꼈습니다. 심지어 사마리아인이라 할지언정, 자비와는 거리가 먼 레위인, 제사장보다 더 좋은 이웃이라는 의미인 것 같습니다. 당시 인습적 가치관인 “정결-율법”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발칵 뒤엎는 예수의 파격성이 생생하게 전해지는 듯합니다. 현재 대한민국의 인습적인 가치관을 ‘돈’ 또는 ‘경제적 가치’라고 할 때, 이에 거부하며 새로운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이 정신적 영웅이 되는 첫걸음이 아닐까 합니다. 3. 자기를 부인하라 일명 변화산 사건 이후, 예수는 제자들에게 자신이 예루살렘으로 가서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절대로 그럴 수는 없다는 베드로의 반응에 예수는 가장 심한 욕설을 내뱉어 버립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인간의 일을 생각하는구나!’ 예수는 현세에 집착하는 또는 자기중심적인 삶의 태도를 베드로에게서 보았던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구현하는 또는 신중심적인 삶을 강조해온 자신의 가르침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지요.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말은 각자 자신의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말로 줄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교훈은 모든 종교에서 공통적으로 가르치는 가장 기본입니다. 자기를 버릴 때, 진정한 자기 자신을 찾을 수 있다는 진리를 바울은 옛사람을 버리고 새사람을 입으라는 표현을 활용했습니다. 진정한 변화를 갈구하는 심층종교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4. 부활, 그 의미 저는 지난 3월 31일 여자친구를 따라 개신교 교회에서 드리는 부활절예배를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목사님은 예수가 3일만에 육체적으로 다시 살아났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라는 요지로 설교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려니 하며 들었습니다. (목사님의 설교가 빨갱이 운운하는 시국연설로 변해갈 때 쯤, 여자친구의 동의를 얻어 결국 예배 중간에 나와버렸습니다.) 사설이 길었습니다만, 부활이 기독교안에서 매우 중요한 개념임은 확실 한 것 같습니다. 사실 영웅적 존재의 부활은 여러 종교와 신화에서 발견되는 래퍼토리입니다. 3일은 큰 변화가 일어나는 기간에 대한 은유적인 표현으로 생각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교수님께서는 육체적 부활을 억지로 믿기보다 자기 안에 예수님이 살아있는지를 먼저 살펴보자고 제안하셨습니다. 예수의 자비, 사랑의 메시지 - 이웃을 위해 피를 흘린다. 자기를 부인한다 - 라는 정신이 살아있는 것이 바로 부활을 믿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5. 마무리 기독교에 공헌한 바울, 니케아공의회에서 결정된 정경, 도마복음서의 깨침, 영지주의-마르시온 이단논쟁, 기독교 초기의 교부들 등등 많은 이야기가 오고갔습니다. 기독교 파트가 마무리될 다음 시간이 더욱 기대됩니다. 참!! 마지막에 은주씨가 소개해준 시를 읽고 과거 어린 시절에 나를 만나보는 체험, 정말 대단했습니다. 행복해졌습니다, 덕분에!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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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과 사건으로 보는 한국근현대사 | [인물과 사건으로 보는 한국근현대사] 1강(3.38) "과거를 지배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한다" | 김혜수 | 2013.4.3 | ||||
2013 봄 학기
안녕하세요. [인물과 사건으로 보는 한국근현대사]수업에 자원활동가로 함께 하게 된 김혜수 라고 합니다. 지난주에 저는 ‘자원활동가’라는 처음 얻는 이름에 설레임과 기대감을 가득 안고 수업에 임했는데요, 많은 수강생 분들도 저와 비슷한 느낌 이지 않으셨을까 생각해봅니다. 앞으로 이곳에 수업 중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나 생각해 볼 것들, 느낀 점을 올릴 예정이니 함께 공유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
왜 역사교과서인가 첫 시간인 만큼 주진오 교수님과 함께 앞으로의 수업에 대한 전반적인 사항들을 살펴보았습니다. 많고 많은 역사책들 중에 왜 역사교과서를 통해 공부하려는 것일까요? 우리는 보통 학창시절 암기위주의 역사교육을 통해 매우 단편적인 사건들만 기억하고 있는데요, 교수님께서는 검인정의 과정을 통해 사실의 오류와 편향성을 최대한 줄이고 풍부한 자료를 담고 있는 교과서를 집필자와 함께 공부하면 그 행간의 의미를 정확하고 풍부하게 읽고 공부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특히 개화파에 대한 일방적 미화, 집권 세력에 대한 악의적 비판, 민중의 저항 운동 등에 대해 자세히 공부할 수 있을 것 같으니 기대해 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
서로 배움 저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시간은 역사교과서에서 발췌한 문장들 중 맘에 드는 것을 하나 씩 가져온 뒤, 왜 그 문장을 선택했는지, 그리고 왜 근현대사를 공부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던 시간이었습니다. 발표를 부끄러워하시는 모습도 잠시, 다들 어찌나 말씀들을 잘하시는지 뒤에서 감탄하며 들었답니다. 현재의 모습이 과거를 답습하고 있는 것 같아서, 과거의 시대상황이 지금도 계속되는 것 같아서 근현대사에 대해 공부하고 싶다는 분들이 많이 계셨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나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갖고 싶어서,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물음에 대한 방향을 찾는데 도움이 될 것 같아서 라고 말씀해 주시기도 하였습니다. 자신의 늦둥이라고 소개하며 부모님세대의 역사를 알면 부모님과의 세대 차이를 좁힐 수 있을 것 같다고 발표해주신 내용도 기억에 남네요. 무엇보다 경청하며 한 분 한 분의 발표를 들어주시는 모습이 인상 깊었고, 꼭 수업내용 뿐만 아니라 서로에게 배울 수 도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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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운동, 유엔 인권 메커니즘 활용하기 | [4강] 유엔 인권 메커니즘 활용하기 - 강좌후기 | 헤세 | 2013.4.2 | ||||
4강. 유엔 인권 메커니즘 활용하기 작성: 정은주 (교육과정 참가자) 4강에서는 특별절차(Special Procedures)를 활용하는 법을 배웠다. 특별절차는 특정국가와 지역, 혹은 주제별 인권 상황에 대해 조사, 감시 및 권고 사항을 진행하는 일련의 절차이다. 특별절차의 사무국은 유엔 최고인권대표사무소(OHCHR)가 맡고 있다. 사안에 따라 결정되는 특별보고관, 독립 전문가, 실무 그룹은 36개의 주제별 이슈와 12개 인권취약국의 담당관으로 활동하고 있다. 특별절차의 개인청원 과정은 다음의 과정을 거친다. 먼저 6하 원칙에 따라 인권침해 사안을 해당 이슈와 관련된 특별절차 담당관에게 개인청원서를 보낸다. 특별절차담당관은 이 청원이 믿을만한 정보로 이뤄진 심각한 인권침해라고 생각할 경우 해당 정부에 사안에 대한 설명을 요구하는 서한을 발송한다. 정부는 의무사항은 아니지만 특별절차 담당관의 요구에 답변해야 한다. 최종적으로 특별절차 담당관이 채택한 인권침해 사건과 정부 답변들은 인권이사회에서 Communication Report로 발표된다. 2012년 통계에 따르면 전체 603개 커뮤니케이션이 정부에게 보내졌으며, 커뮤니케이션을 받은 127개 국가 중 40.1%가 답변하였다. 특별절차는 누구나 긴급한 사안에 신속하게 대응한다는 점에서 장점이 있다. 또한 특정 조약을 비준한 여부와 상관없이 인권침해에 관한 내용을 유엔에 전달할 수 있다는 점이 장점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 국내 구제절차를 완료할 필요가 없이 청원을 진행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개인이 인권침해 상황에 대해 신속하게 진행할 수 있다. 그러나 청원이 분야별 특정 주제에만 국한되어 있으며, 한 사람의 특별절차 담당관이 인권침해가 일어나는 모든 국가의 상황을 계속 모니터링하기에는 어렵다는 한계가 있다. 더불어 정부 답변 및 청원 채택 여부는 차기 인권이사회 회기(인권이사회는 1년에 3번, 3, 6, 9월에 열린다)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점에서 단점이 있다. 한국은 의사표현의 자유 특별보고관(1995년), 이주민 특별보고관(2006년), 의사표현의 자유 특별보고관(2010년)이 방문하였으며, 2013년 5월 인권옹호자 특별보고관이 방문할 예정이다. 한국은 상시초청(Standing invitation) 국가로 특별절차 담당관의 방문요청 시 언제나 초대할 수 있다. 사실 누구나 다 청원할 수 있다는 장점에도 불구하고 이 절차를 제대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나름의 전략이 필요하다. 우선, 제기하고 싶은 인권이슈가 어떤 특별 보고관에게 적합한지를 알아보고, 수많은 개인청원들 중 사무국 데스크 오피서(Desk Officer)가 관심을 기울일 수 있도록 방법을 고민해봐야 한다. 2010년 의사표현의 자유 특별보고관인 프랑크 라 뤼가 방문할 당시에는 보고관 공식 방문 결정 이전에 아시아 인권 시민사회단체들이 연대하여 인터넷상에서의 의사표현의 자유와 관련한 국제 심포지엄을 공동개최, 특별보고관의 국가공식방문을 이끈바 있다. 나는 이번 강의를 통해서 누구나 인권침해 상황에 대해 유엔 차원에서 청원하여 회원국들 간에 지지받고 있다는 점, 그리고 이 방법이 국내법의 현실과 국제인권기준 간의 격차를 메워주고 있다는 점에서 특별절차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되었다. 그러나 ‘유엔은 늘 거대하고 까다롭다’라고 생각하는 국내 엔지오들의 인식 수준이 바뀌어야 하며, 국제적인 대응과 동시에 국내 시민사회의 여론을 형성하는 것의 중요성을 느낄 수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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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운동, 유엔 인권 메커니즘 활용하기 | [유엔인권] 4강(3/25) 유엔 특별절차(Special Procedures) 활용하기 강의자료 | 느티나무 | 2013.3.29 | ||||
안녕하세요. 참여연대 국제연대위원회 백가윤 간사입니다. 지난 3/25(월)에는 유엔 특별절차(Special Procedures)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우리나라에 최근 방문한 유엔 특별보고관으로는 의사표현의 자유 특별보고관, 프랑크 라 뤼(Frank La Rue)씨가 있지요. 이번 5월 말에는 유엔 인권옹호자 특별보고관이 한국을 공식 방문할 예정이기도 합니다. 이에 특별절차가 도대체 무엇인지, 어떻게 활용할 수 있는지 등에 대해 알아보고 각 조별로 나뉘어 제기하고 싶은 인권 이슈를 특별절차를 통해 어떻게 제기할 수 있는지 전략을 고민해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첨부파일로 4강 강의자료 - 유엔 특별절차 활용하기 강의자료 올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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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종교의 이해Ⅰ | [세계 종교의 이해] 4강 - 그리스도교 ① | 이나단 | 2013.3.28 | ||||
세계 종교의 이해 : 4강 (3/26) 그리스도교 ① 강의소개 보기 > 클릭 1강 후기 보기 > 클릭 3/26 화 그리스도교 – 예수, 초대교회 이후 안녕하세요, 여러분~ 자원활동가 이나단입니다. 벌써 4번째 강의였다니, 이렇게도 시간이 금방금방 가는구나 한번더 놀랬습니다. 교수님의 훌륭한 강의내용에 제 느낌을 추가해서 두재료로 적어봤습니다^^ 세계 종교의 이해라는 강의의 취지에 따른다고 생각해서 '하느님으로, 복음서 제목은 마태, 마가, 누가, 요한으로 썼습니다. 불편하신 분들 계시다면 이해해주세요~ 세계 종교에 이해, 4번째 시간은 ‘기독교’에 대한 이미지를 두세 사람씩 모여 이야기하는 것으로 시작했습니다. 저희 모둠은 1인당 2분이라는 시간이 매우 짧게 느껴질 정도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겨울옷을 입은 분은 기독교인이 보이는 배타적인 태도, 특히 자기의 기독교 동아리 안에 한정된 사랑이 아쉽다고 하셨습니다. 또, 여름옷을 입은 것으로 추정되는(?) 분은 현재 당신이 출석하고 있는 교회가 좋은 취지의 일을 계획하고 있다는 것, 그 교회에서 안내봉사하면서 본인의 인상이 좋게 변화되었다는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봄옷을 입은 것으로 뽑힌 저는, 선교를 목적으로 아프가니스탄에 방문했던 몇몇 기독교인이 살해당했던 가슴 아픈 사건과, 영화로 만들어진 웹툰 이끼의 ‘유목형’이라는 캐릭터가 동양적 예수 이미지가 아닐까 하는 것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오강남 교수님은 강의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에 앞서 <예수는 없다>를 읽고 큰 변화를 겪은 한 인물에 대해 소개해주셨습니다. 지난 주말, 그 책을 선물하며 친누나와 한바탕 곤욕을 치른 저에게 큰 위로가 되는 이야기였습니다. 1. 그리스도교와 예수, 4복음서 그리스도교는 세계에서 가장 신도수가 가장 많은 종교라고 합니다. 한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OO교회, △△교회와 같은 개신교 인구만 헤아린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그리스도교란 개신교 이외에, 구교(천주교), 그리스 정교, 영국 성공회 등 매우 다양한 종파를 아우르고 있는 개념이라는 것입니다. 창시자는 나사렛 예수라고 할 수 있고, 예수의 삶과 가르침, 죽음, 부활에 기초한 종교입니다. 이제 예수에 삶에 대해 조금 더 깊이 알아보겠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예수의 행적을 기록한 유일한 문헌이라 할 수 있는 4복음서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여기서 잠깐!! 성서의 내용은 정확한 역사 기록으로 보기보다, 신앙을 위한, 신앙에 의한, 신앙의 고백서라는 점을 상기시켜드립니다. 4복음서는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 이렇게 4가지 책을 가리킵니다. 기원후 60년경에 쓰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마가복음, 이를 기초로 약 10년 뒤 쓰인 마태와 누가, 이 세 공관복음(共觀福音, 보는 시간이 공통된 복음서)과는 사뭇 성격이 다른 요한복음은 약 100년경에 쓰였다고 합니다. 이후 복음서는 여러 편집과정을 통해서 현재 우리가 보는 성서의 형태로 전해지게 되었는데, 최고(最古)의 사본은 약 3세기경의 문서라고 합니다. 사정이 이러하다보니, 복음서 앞에 마태, 마가 등의 제목은 저자를 지칭한다기 보다, 후세 사람들이 임의적으로 붙인 것이라는 주장이 무리한 것은 아닐껍니다. 일례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라는 예수님의 멘트는 3세기 이후에 덧붙여졌을 것으로 학자들은 보고 있는데, 그 까닭은 삼위일체에 대한 교리가 3세기경에 등장했기 때문입니다. 특히 Jesus Seminar라는 성서학자들의 학술모임에서는 ‘요한복음에는 직접적인 예수의 말을 적은 것은 전무하다’는 견해에 공감하고 있으며, 요한복음은 단지 초대교회의 신앙고백을 예수님의 말씀으로 기록한 책이라고 여겨진다네요. 2. 예수가 태어나다 예수의 출생에 대해서 정확히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합니다. 크리스마스는 예수의 탄생(세상에 오심)을 축하하는 날이지 아기 예수의 실제 출생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 하필이면, 12월 25일이 되었을까요? 그 즈음이면, 낮이 가장 짧은 날 동지이후 해가 기운을 차리는 시기였기 때문에 후대에 선택되었을 것이라는 게 중론인 것 같습니다. 원래는 태양신을 기리는 기념일이었던 것에서 따온 것이겠지요? 탄생년도 역시, 마태복음(기원전 4년)의 기록과 누가복음(기원후 6년)의 기록의 차이가 있습니다. 정말 예수님의 탄생을 정확히 알기 어렵군요~ 예수님이 태어난 곳 역시 명확하지 않습니다. 다만, 베들레헴에 태어났을 가능성이 매우 적다는 것이 학자들의 공통적인 견해라고 합니다. 미가서의 예언 전통을 따르기 위해 예수의 탄생지가 베들레헴으로 맞추어진 것이라고 봐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서 메시아가 된 것이 아니라, 메시야이기 때문에 베들레헴 출생으로 결정지어진 것입니다. (이즈음 되면, 우리 예수님... 십자가에 돌아가신 뒤로도 여러 오해와 억측으로 많이 시달리셨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불경한가요? 하하핫) 마찬가지로 동방박사의 방문, 시므온의 찬미, 동정녀 출생 등은 (물론 정도의 차이가 있겠습니다만) 예수님이 위대하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한 재료로 당시 신앙공동체가 사용한 문학적 장치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특별한 출생은 여러 종교에서 자신들의 영적 영웅을 추어올리는 보편적인 방법입니다. 예수의 동정녀 출생도, 예수가 보통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을 말해주기 위한 수단이었을 뿐이라는 겁니다. 이것이 역사적 사실인지 아닌지를 따지거나, 역사적 진위여부에 따라 믿음이 좌우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동정녀의 아들이라는 포장지보다 ‘예수님이 특별한 존재였다’는 깊은 의미를 보아야겠지요. 그래서 한스 큉은 동정녀 출생 사건을 생물학적 진리를 말해주는 것이 아니라, 종교적인 진리를 말해주는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3. 공생애의 시작 잃어버린 해(lost year)라고도 불리는 약 18년의 공백기간을 지나, 예수는 30세에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음으로 공적인 삶을 시작합니다. 예수가 침례를 받았을 때, '하늘이 갈라졌다(열렸다 / 물이 갈라졌다)'라는 성서의 기록은 예수가 하늘 너머에 하느님나라를 볼 수 있던 위대한 사람이라는 것, 또는 물을 가른 기적을 행했던 모세, 여호수아에 버금가는 권위가 있는 인물임을 표현하려는 의도에서 나왔다고 봅니다. <예수는 없다>에 자세히 나옵니다만, 예수님이 이후로 성령의 이끌림을 받아 광야에서 시험받은 이야기를 간단히 해드리겠습니다. 오강남 교수님은 예수님이 40일동안 단식하면서, 명상기도-관상기도를 하셨을 것이라고 이야기해주십니다. 예수님이 마귀에 시험에 대답한 내용을 살펴보면, “①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 아니요, 하느님 말씀으로 말미암아 산다”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말씀에 해당되는 원어는 로고스(Logos, 원리, 學)인데, ‘의미’라고 번역하면 가장 적절하다는 것입니다. 왜(why) 사는 가에 대한 답 - 삶의 의미를 찾으면, 어떻게(how) 사는지에 대한 답이 나온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떡’으로 상징되는 경제적인 유혹, 밥벌이로서 모든 행위를 이해하려는 알뜰한 유혹을 뿌리치고, 삶의 의미를 찾아 살아가라는 기별이겠지요. 또, “②성전꼭대기에서 뛰어내려라 – 하느님을 시험하지 말아라”라는 예수님의 대답에서는 초능력이 가능한지 아닌지가 종교를 판단하는 기준이 될 수 없다고 알려주는 예수님의 메시지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③정치적인 유혹 – 오직 하느님께만 경배드려라”라고 답변한 예수님은 궁극적인 것에 관심하는 종교의 본질에 대해 역설한 것입니다. 세속적인 권력을 추구하거나 정치적 세력에 야합하는 종교인들을 꾸짖으신 예수님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4. 글을 마치며.... “회개하라, 하느님의(하늘) 나라가 가까웠느니라.” 여기서 쓰인 회개의 원어는 메타노이아(Metanoia)로서 의식의 변화내지는 탈바꿈을 의미합니다. 어떤 범죄사실에 대해 사죄하고 다시는 반복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는 좁은 의미의 회개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윤리적인 의미에 국한되는 회개를 말했던 것이 아니라 특수인지능력을 활성화를 이루어라고 외쳤던 것입니다. 또, 예수님은 상당히 파격적인(subursive?) 인물이었습니다. 당시에 팽배하던 율법주의(정결예법)에 따른 구분법을 뛰어넘어 창녀, 나병환자, 세리,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나누었던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지요. 박총의 <욕쟁이예수>, 김규항의 <예수전>에 나타난 예수님의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졌습니다. 박순찬 화백의 만화 ‘장도리’ 아시나요? 작년 이 맘때 그 4컷만화에서 예수님 이야기가 실렸던 적이 있었습니다. 2012년 대한민국에 온 예수가 무상급식, 무상보육, 무상의료를 몸소 실천하자 종북좌빨로 매도당하는 상황을 그린 작품이었습니다. 지금, 여기에 예수님은 어떤 모습일까요?....
다음 시간 그리스도교 2편을 기대해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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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보는 프랑스 혁명사 | [다시 보는 프랑스혁명사] 1강, 2강 후기 | 지은kd | 2013.3.26 | ||||
1. 수요일 저녁, 프랑스 혁명사를 공부하는 사람들 대선 이후 영화 레 미제라블이 힐링 영화로 주목받았습니다. 첫 시간, 강의 수강 계기를 나누는 자리에서도 역시 영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통치의 대상에서 나라의 주인이된 프랑스 민중들의 이야기는 현대 민주주의 국가라는 한국에서도 '통치받음'이 되살아날 수 있다는 의심과 이미 세련된 모습으로 통치하고 있는 사람들을 경계하는 우리를 자극했나봅니다. 그래서 모였습니다, 프랑스 혁명사가 궁금한 사람들, 강의 해주시는 최갑수 교수님의 강의를 좋아하는 사람들, 참여연대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2. 다른 국가들보다 1세기이상 빠른 '현대'를 시작한 프랑스. 프랑스 혁명을 통해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사상과 제도 등이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수업을 통해서 혁명 시기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사건과 헌법을 집어가며 혁명의 의미를 되새겨봤습니다. 중요한 사건이 그 때마다 헌법에 반영되면서 17개 가량의 헌법이 탄생하는 계기가 됩니다. 3. 강의의 중심 질문은 프랑스 혁명 이후에도 계속된 불안정성입니다. 프랑스 혁명은 부르주아와 민중이 함께 일으킨 1789년 대혁명 이후에도 7월 혁명, 2월 혁명, 파리 코뮌 등 다양한 정치적 사건을 겪습니다. 왜 안정된 정치질서를 만드는 데 오래 걸렸을까요. 저는 혁명의 성과가 정치 체제에서 받아드려지는 과정에서의 왜곡, 부르주아와 기득권의 방해를 뚫고 민중들이 스스로 권리를 찾으려고 했던 에너지 등이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합니다. 3-1) 프랑스 대혁명(바스티유 감옥 함락) 이후 입법의회, 입헌군주제가 시작됩니다. 이 때 1791년 헌법이등장하고 그 다음해에 제1공화정이 들어섭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황제에 올라 제1제정이 시작되면서 공화정은 막을 내립니다. 혁명을 통해 탄생한 왕정인 셈입니다. 이어서 나폴레옹 폐위 이후 군주제가 복귀 합니다. 이 때 루이 18세가 즉위했지만, 그는 혁명기에 만들어진 제도적 장치를 거의 유지합니다. 혁명의 유산이 반영된 결과입니다. 입법권을 군주, 선거제(물론 일부 부르주아까지만 주어지는 선거권입니다)에 의한 하원, 국왕이 임명하는 상원이 공유합니다. 군주가 독식하던 때와 다르게 타협의 여지가 생긴 셈입니다. 혁명의 결과로 조금씩 권한이 분산되는 정치체제의 모습을 보였습니다. 3-2) 루이 18세에 이어 샤를 10세가 즉위하고1830년, 7월 혁명으로 폐위당합니다. 7월 혁명은 1827년 선거에서 야당이 승리하지만 결과를 무시하고 일부 언론의 폐지, 새 의회 해산, 새 선거 주문, 투표권의 제한 등 반동적인 왕령을 반포합니다. 결국 파리의 소생산자층이 궐기하면서 혁명으로 비화합니다. 이 때 바리케이드가 등장하고 군대가 발포명령을 거부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민중의 궐기가 있었지만 지배층은 공화정 대신 (반동적이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오를레앙가를 복귀시킵니다. 이 때 중산층의 가장 부유한 부류에게만 참정권을 확대합니다. 여전히 피 흘린 민중들에게는 정치권이 요원합니다. 3-3) 2월 혁명으로는 오를레앙가 복귀로 즉위한 루이 필립이 폐위 됩니다. 참정권 확대가 핵심적인 사안이었습니다. 이번에는 왕과 의회 다수파(앞서 선거에 승리한 야당)의 충돌이 아니라 의회의 지지를 받고 있던 정부와 의회개혁운동의 충돌이었습니다. 후자의 세력에는 프랑스 정치계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좌파 세력과 중간층이 합세해 참정권 확대를 요구하면서 시작됐습니다. 이들이 군중들에게 시위에 나설 것을 촉구하자 정부는 이들 세력이 모이는 연회 자체를 금지해버립니다. 결국 민중들의 시위가 시작되고 제2공화정이 선포되기에 이릅니다. 참정권이 확대되고 1848년 성년남성 보통선거권에 기반한 선거가 시행됩니다. 그러나.......! 다시 왕당파가 의회 선거에서 다수를 차지하는 결과가 나타납니다. 당시 농민들은 여전히 가톨릭의 헤게모니, 즉 기득권의 헤케모니 아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곧 혁명의 보수화를 의미합니다. 3-4) 12월의 대통령 선거에서는 공화파 후보를 제치고 나폴레옹의 조카가 당선됩니다. 이후 왕당파의 영향력이 확대되면서 제2공화정이 무력화됩니다. 대통령은 친위 쿠데타를 통해 제2제정을 세웁니다. 그러나 예전처럼 권위주의적 제정이 아닙니다. 제정의 자유화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제정이 꼭 권위주의와 만나는 것은 아닙니다. 민주주의가 꼭 자유와 만나는 것은 아닌 것 처럼!) 하지만 제2제정도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패배하면서 붕괴합니다. 이 때 제3공화국이 탄생합니다. 3-5) 제3공화국은 70여년 연속 공화정을 유지하며 계속됩니다. 독일이 세운 괴로 정부인 비씨 정부가 들어설 때까지~ 물론 안정된 공화국이 성립하기까지 10년의 세월이 걸립니다. 프로이센에 프랑스가 항복하면서 베르사유 강화조약을 체결하게 됩니다(막대한 배상금, 알자스 로렌 지방 넘김 등을 포함한 조약이었습니다) 국민의회를 구성하고 있던 왕당파 의원들이 일방적으로 독일에 유리한 조약을 체결하면서 동시에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왕정복고를 꾀합니다. 파리 시민들은 이러한 보수파의 움직임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결국 파리 코뮌이 나타나는 배경이지요. 이 때, 문명의 수도라는 파리에서 18,000여 명이 사망합니다. 많은 좌파들이 파리를 떠나면서 현 파리시장 이외의 모든 시장은 우파였다고 합니다. 4. 혁명 이후에도 공화정은 보수화되고 프랑스에서 여성이 참정권을 갖게되기까지는 또 오랜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혁명의 유산이 지워진 것은 아닙니다. 프랑스 정치사상이 좌 선회할 수 있었던 이유는 민중들이 언제나 궐기할 수 있는 가능성과 함께 실제로 혁명에 참여했기 때문입니다. 공화국이 당연시되고, 사회당과 공산당이 출현할 수 있었던 것은 혁명 속에 다양한 정치적 지평들이 잉태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4-1) 프랑스 혁명사를 들여다볼수록 힐링보다는 어떤 강렬한 에너지를 느낍니다. 보수 양당체제로 귀결되는 정당 문화를 생각케하고 또, 오늘의 이 선거결과를 막기위해 저는 무엇을 했는지 반성하게 됩니다. 수백 년에 걸쳐 변화를 이끌어온 이들의 이야기를 보며 좀 더 먼 호흡으로 지금 이 순간이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모두 에너지를 모아봤으면 좋겠습니다. 5. 세 번째 수업이 기대되는 이유는 물론 강의 내용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최갑수 교수님이 보여주시는 강의 열정때문입니다! 다른 분들에게도 강력 추!천!합니다^.^ 5-1) 빈 공간이 많은 후기입니다 ㅜㅜ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자원활동가 강지은작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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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종교의 이해Ⅰ | [세계 종교의 이해] 3강 - 유대교 ② | 민해 | 2013.3.23 | ||||
<세계 종교의 이해>의 세 번째 시간. 이번 주에는 중동사를 되돌아보며 유대교를 집중 조명하는 시간을 가졌다. 커리큘럼 상으로는 유대교를 공부하는 마지막 시간으로, 과거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유대교의 전반적인 발전 과정을 살펴보았다. 강의가 워낙 방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어서 그 중 일부만 소개하려고 한다.
1. 성전 시대에서 분열에 이르기까지
강의는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었던 사울의 이야기로부터 출발했다. 사울은 이스라엘의 독립을 성취할 왕으로 강력한 지지를 받았으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채 전쟁에서 죽음을 맞이했다고 한다. 사울의 실패는 사실상 왕정의 실패였으며, 자신들의 정체성을 공고화 하지 못한 당시 이스라엘인들의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사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것은 사울 일파가 죽기 전까지 끊임없이 견제의 대상으로 삼았던 다윗이었다. 다윗 치하의 이스라엘은 넓은 영토를 소유하며 번영을 누렸고, 솔로몬이 새로운 왕으로 등극하기 전까지 하나님이 선택한 가장 이상적인 왕으로서 이스라엘의 입지를 공고히 다졌다. 지혜로운 심판자로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솔로몬은 다윗을 이어 이스라엘의 새로운 왕이 된다. 솔로몬 치하의 이스라엘은 분명 평화와 번영을 누렸다. 그러나 왕이 국정을 소홀히 하고, 국가 재정을 자신의 사치에 이용하기 시작면서 분열과 타락의 길을 걷게 된다. 결국 이스라엘은 솔로몬의 실정으로 인해 남유대와 북이스라엘로 분열되었으며 이후 북이스라엘은 아시리아에, 남유대는 바빌론에게 각각 멸망을 당한다. 이 시기에 등장한 예언자들이 아모스, 호세아, 이사야 그리고 에스겔이다. 예언자 아모스는 정치 기득권의 부패한 현실을 타파하고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게 해야 한다는 예언을 내렸다. 호세아는 하나님의 사랑을 이야기했으며, 이사야는 보편 신관을 바탕으로 하나님이 온 우주를 다스리는 신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마지막으로 에스겔은 하나님을 멀리하면 망할 것이라며 신에 대한 헌신을 이야기했다. 2. 디아스포라의 유대인 그리고 시온주의
가히 유대교의 역사는 분열과 박해의 상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디아스포라는 본래 이산(離散)을 뜻하는 그리스어로 세계 각지에 거주하는 유대인과 그 공동체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러한 디아스포라의 역사는 솔로몬이 죽고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분열된 시점부터 시작한다고 볼 수 있다. 로마의 통치 아래에서 예루살렘은 식민지가 되었다.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해 저항을 계속했으나, 로마의 티투스가 군단을 이끌고 예루살렘에 들어오면서 멸망의 길을 걷는다. 티투스는 팔레스타인 지역의 모든 성전을 무너뜨리고 예루살렘을 함락시켰으며 이 시기부터 유대인들의 디아스포라가 본격화 된다. 중세 시대의 유대인들은 기독교와 이슬람 사이에서 고난과 박해를 받아야 했다. 경제적으로는 크게 성장하여 부를 축적하는 이들도 많았으나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사회적인 차별을 감수해야 했다. 이슬람 국가의 유대인들은 개종을 강요받기도 했는데, 이 과정에서 등장한 것이 유대와 이슬람 문화가 혼융된 사라센 문화이다. 십자군 전쟁은 중세 시대 유대인들에 대한 박해의 상징이다. 기독교인들은 유대교를 수치의 상징으로 간주했으며 수많은 유대인들이 기독교인들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유대인들은 차츰 사회에서 고립되어 그들만의 공동체를 형성하기 시작했고, 유대인들의 거주 지역인 게토 안에서 자신들의 영적 고향에 대한 열망을 키웠다. 유대인들만의 국가를 건설하고자 했던 그들의 소망이 반영된 사상이 바로 시온주의이다. 팔레스타인 땅에 유대인들의 성지를 회복하겠다는 이기적인 욕망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의 고질적인 분쟁을 낳았고, 중동이 세계의 화약고로 불리는 원인이 되었다. 지나친 민족주의로 인해 국경을 접하고 있는 두 국가가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누게 되었고, 국민들은 언제 시작될지 모르는 공습에 불안해하며 위태로운 생활을 이어가야 하는 것이다. 3. 오늘 날의 유대교 중세 봉건제 사회에서 땅을 소유하지 못함에 따라 고리대금이나 보석 상인으로 생계를 유지했던 이들은 숫자 놀음에 밝다는 이유로 오랜 시간 박해에 시달려야 했다. 이들이 게토 밖으로 발걸음을 옮긴 것은 1789년 프랑스 혁명이 큰 계기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신분 상승의 통로가 거의 막혀있는 상태에서 유대인들이 선택한 방법은 학문에 몰두하는 것 뿐이었고, 이는 자연스럽게 유대교 신자들의 높은 교육열로 연결되었다. 칼 마르크스, 프로이트, 멘델스 존, 아이슈타인 등 세계적으로 위대한 업적을 달성한 학자나 예술가들이 유대교 출신이라는 점이 이러한 상황을 잘 반영하고 있다. 실제로 노벨상 수상자들 중에는 유대인들이 많고, 세계 경제를 좌우하는 미국의 금융계는 유대인들이 주름잡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한다. 교수님께서는 유럽의 공식적인 자리에서 유대인에 대한 험담을 하면 비판이나 사직을 면하기 어렵다며 그들의 현재 위치를 빗대어 말씀하셨다. 현재 유대교 신자들은 약 1,300만명 정도로 파악되는데 이들은 지금까지도 고유의 관습을 지키며 살아간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안식일. 안식일은 금요일 저녁부터 토요일 저녁까지를 이르는 말로, 약 하루 동안은 오직 신을 경배하며 불필요한 언행을 삼가해야 한다. 교수님께서는 전쟁이 나도 안식일만은 지켰을 정도라는 유대인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시며 어쩌면 안식일이 유대인을 지킨 것인지도 모른다고 말씀하셨다. 유대교도에게 안식일은 그들의 전통과 정체성을 확인하는 시간이었기에, 분열을 거듭하면서도 자신들의 명맥을 이어올 수 있었다는 것이다. 강좌의 한 챕터를 마무리 했다는 의미에서 교수님과 함께하는 뒤풀이 자리가 마련되었다. 참여연대의 카페 통인에서 간식과 마실거리를 두고 교수님과 담소를 나누었는데, 뒤풀이라고 이름 붙였을 뿐 미니 강좌라고 해도 될 만큼 유익한 말씀을 많이 전해들었다. 미처 전하지 못한 질문에 대한 해답을 듣거나 강좌를 들으며 마음 속으로 느꼈던 깨달음을 고백하시는 분들이 많았다. 사실 강좌를 접하기 전까지만 해도 종교를 믿지 않는 입장에서 종교 강의를 잘 소화할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이 있었다. 물론 수강생의 대부분이 종교를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오강남 선생님께서 들려주는 종교 이야기는 나에게도 꽤 유익한 부분이 많다. 종교는 일상 속에 깊숙히 자리 잡고 있었고, 믿음의 형태가 아니더라도 충분히 깊게 탐구해 볼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어쩌면 내가 지금까지 종교를 불신했던 것은 믿음의 왜곡된 형태만을 보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뒤풀이가 끝나고 밤 공기를 마시며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유난히 상쾌했다. 이 강의가 아니었다면 평생 서로를 모른 채 살았을 사람들이 종교라는 연결 고리를 통해 깊은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점이 마음에 활력이 되었다. 강의를 마무리하는 4월 말 쯤에는 이미 봄이 깊숙히 자리잡고 있을 것이다. 봄이 만연한 그 때 쯤, 내 마음 속에는 어떤 깨달음이 자리잡고 있을지 새삼 기대가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