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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를 향한 역사 : 근대로의 희망 여정 | [민주주의를 향한 역사] 4강, 문명과 도시 : 도시 문명의 꽃,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운동 | 박유하 | 2014.2.17 | ||||
[민주주의를 향한 역사: 근대로의 희망 여정] 4강(2/3), 문명과 도시 : 도시 문명의 꽃,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운동 강의 소개 보기 ☞ 클릭 1강 후기 보기 >> 클릭 2강 후기 보기 >> 클릭 3강 후기 보기 >> 클릭 오늘 강‘문명’은 18세기 계몽주의 사조가 유행하면서 프랑스에서 만들어진 신조어이다. 문명이 국가 발전의 징표라는 주장은 유럽 사회가 발전의 정점이라는 결론을 내렸고, 이는 곧 문명과 야만을 분류하는 제국주의의 논리가 되었다. 선교사와 함대를 앞세운 제국주의 열강과 맞닥뜨린 동아시아 국가들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서구 문물을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일본은 적극적으로 서구를 모방했으며, 당대 조선 사회에서도 인기 지식인이었던 청의 량치차오는 사회진화론 입장에서 강자를 추구하고 유학을 맹렬히 비판하였다. 후쿠자와 유키치가 문명 전환을 ‘한 몸으로 두 인생을 사는 체험’이라 일컬었듯, 19세기 조선 사회에서 유교적 어법과 근대적 사고방식이 민중의 의식에 혼재하고 있었다. 물질문명은 사회 전반에 걸쳐 광범위하게, 정신문명은 개인 일상생활에서 시민사회로 발전하였으며 그 사이에는 몇 가지 통로가 있었다. 문명의 전파 통로, 그 첫 번째: 신문 신문은 나라의 안과 밖, 그 넓은 세상 소식을 알려 주는 통로였다. 특히, 자국어로 된 신문은 인민의 문명화에 가장 효과적이며 민권을 깨우치는 데 있어 위력적인 병기였다. 최초의 근대적 신문은 1883년 10월 창간된 한성순보였다. 한글과 한자를 혼용하였고 외국 기사가 70%를 차지했던 이 신문은 1884년 갑신정변으로 중단되었지만, 이후 하층민과 부녀자를 대상으로 한 뎨국신문과 지식인과 상류층이 독자였던 황성신문처럼 특정 계층을 위한 신문이 등장했고, 외국인인 베델이 창간했기에 일제의 압력 없이 반일 논조를 펼칠 수 있었던 대한매일신보도 있었다. 그러나 조선 말기 신문 중에서 인민의 삶에 가장 큰 변화를 불러일으킨 것은 단연 독립신문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독립신문은 1896년 4월 창간된 최초의 순한글 민간신문이다. 정부 정책을 협조하고 독립협회 주장을 대변하며 국민을 계몽하였고, 보다 과격한 내용의 영문판을 통해 세계에 한국 입장을 소개하기도 했다. 가장 큰 역할은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를 지원한 것이다. 처음엔 주 3일 발간하다가 일간으로 전환한 독립신문은 시민들이 열광적으로 구독하여 80여명이 돌려본 기록이 있을 정도이다. 문명화에 관한 내용은 크게 개인, 관계, 제도의 세 영역으로 나눌 수 있다. 우선 개인적 측면에서는 매너의 생활화와 분수에 맞는 생활을 권장했다. 언뜻 보기엔 굉장히 서구화된 매너이지만 그 중엔 우리가 전통적으로 지켰던 예절도 상당 부분 들어있었다. 관계 면에서는 신뢰와 평등이라는 가치를 강조했다. 인종의 차등 분별은 사람 대접하는 도리가 아니라거나 남녀를 같은 학문으로 교육하고 동등권을 주는 것이 옳다는 대목 등에서 독립신문이 인종과 양성평등을 중요시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제도적으로는 교육을 강조하고 기독교를 수용하였는데, 이때의 기독교는 선진 문명의 한 요소로서 포교의 개념이 아니라 기독교가 가지는 우월적 문명성을 인정한 것이었다. 문명의 전파 통로, 그 두 번째: 학교 학교는 서구 문명으로의 전환에 있어 가장 효율적인 제도이자 수단이었다. 조선 정부가 국민 교육에 소극적인 가운데 인민이 주도하여 사립학교를 세워 근대 교육을 선도한 특징을 갖고 있다. 조선 말기의 교육은 위태로운 국가에 의존하지 않고 근대인으로서의 입신양명을 넘어 구국계몽을 실현하고자 했던 인민의, 시민의 국민적 역량이 발현된 근대화 운동으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초기 정부가 주도했던 동도서기론적 교육 개화 정책은 서양 기술의 수용에 필요한 교육기관을 설립하는 것이었다. 외국어, 농업, 군사 기술 등 실업교육 기관에 그쳤으며 국민교육에는 무관심하였다. 국민 교육 제도가 성립된 것은 갑오개혁 때에 이르러서였다. 우선 교육 전담 부서인 학무아문을 설치 후 학부로 개편하였다. 그리고 서울을 비롯한 각 지방 주요 도시에 소학교를 세웠다. 소학교는 1895년에서 1905년까지 전국 각처에 100여개가 설립되었다. 학무아문을 학부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고등교육이 누락되었는데 일제의 개입이라 추측하기도 하지만 정확한 이유는 불명이다.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은 고등교육을 선도한 것은 사학이었고, 이는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사학이 강세를 보이는 원인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최초의 사립학교인 원산학사는 개항장인 원산의 상인과 유지들이 1883년에 설립하였다. 이후 선교를 위한 기반 구축 차원에서 배재학당, 이화학당 등 기독교계 학교가 등장했다. 1908년 전국 사립학교 수는 5천여 개, 학생은 20만 명에 달해 사립학교 설립 붐이 일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라를 빼앗기기 직전에는 구국을 위해 학교를 설립하는 경우가 많이 늘어났다. 이승훈은 오산학교 개교사에서 “총을 드는 사람, 칼을 드는 사람도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도 더 귀중한 일은 백성들이 깨어 일어나는 일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이 시기 교육 계몽 운동 또한 민간이 주도하였다. 독립협회 제 1회 토론회 주제가 ‘조선의 급선무는 인민의 교육’이었던 것을 보면 교육 문제가 어느 정도로 화제가 되었는지 짐작할 만하다. 상동청년학원 취지서(1904)에서는 ‘빈곤이 날로 심해지고 재원이 해마다 고갈’되는 이유가 “학업을 먼저 힘쓰지 못하고 당장 생계만 구차히 도모한 데 있다.”라고 말하며 “지금 천하의 사람들이 모든 일에 학문으로 자본을 삼지 않는 자가 없다.”고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도시의 탄생 문명화의 공간적 변형은 바로 근대적 의미의 도시의 탄생을 가져왔다. 도시의 탄생은 물질적인 서구화의 척도인 동시에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서구화를 촉진하는 강력한 촉매제였다. 도시화의 첫 번째 대상은 개항도시 부산이다. 개항 직후 초량 왜관이 일본의 부산전관거류지로 개편되고 일본 영사관을 비롯하여 경부철도, 철도역사, 세관 등을 건설하여 대일무역의 거점이 되었다. 1910년에는 일본인이 조선인보다 더 많았다고 한다. 한성부(서울)는 “이 비상한 변화는 4개월 만에 이루어졌다. 서울 거리가 너무 변하여 1894년에 이 책을 쓰기 위해 찍은 대표적인 빈민촌의 모습이 쓸모없게 되었다.”라는 비숍의 글을 포함하여 단 몇 년 사이에 서울의 모습이 몰라보게 변했다는 회고가 여럿 보인다. 단기간 안에 도시화를 이룰 수 있었던 이유는 대한제국의 한성 개조 사업이었다. 경운궁 중심으로 개방적 근대 도시를 건설하기 위하여 산업 개발, 임시가옥 철폐 및 개천과 우물 정비, 공원 등 신설비 도입을 진행하였다. 3.1 운동이 일어났던 파고다 공원이 대한제국 때 조성된 인조 녹지 공간이다. 다만 도시로 부가 집중되고 지역 격차가 심해진다는 개발의 양면성도 이때부터 드러나고 있었다. “모든 사업도 서울에서 이루어진다. 모든 상점의 상품은 서울로부터 공급된다. 모든 조선 사람의 마음은 서울에 가 있다.”는 비숍의 서술이나 “서울 백성만 위할 것이 아니라 조선 전국 인민을 위하여 무슨 일이든지 대언하여 주려 함.”이라는 독립신문의 한 구절을 보면 이미 양극화가 상당 부분 진행되었으리라 유추할 수 있다. 사실 이러한 현상은 전 세계에서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도시화의 결과이다. 프랑스의 정치학자 토크빌은 <프랑스혁명의 문화적 기원>에서 “공권력이 집중된 중앙 정부의 소재지로서 모든 지적 활동을 독점하고 경제적 활동의 중심지이기 때문이다.”라고 수도와 지방 분열을 설명한 바 있다. 시민사회의 탄생: 도시 속의 자발적 결사체, 공론장, 집회와 시위 도시라는 공간에 모여든 인민은 시민으로서 자발적 결사체를 결성하고 공론장을 활용하고 집회와 시위를 통해 자유로운 의사를 표현했다. 이러한 시민사회의 탄생을 상징하는 것이 자발적 결사체 독립협회와 미디어 공론장 독립신문, 그리고 저항과 비판의 인민 자치의 장이었던 만민공동회이다. 독립협회는 공공성을 지향하며 집회를 통해 자율적이고 공개적인 토론을 펼치며 여론을 형성하는 자발적 결사체의 역할을 다했다. 안건마다 회원의 직접 선거로 총대위원을 선출하여 결정하도록 하는 직접 민주주의적인 방식으로 운영한 것도 주목된다. 독립신문은 스스로가 정부와 인민을 교통케 하는 공론장임을 자부했다. 만민공동회는 근대적 시위와 집회 문화의 원형으로서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독립신문의 민주주의 담론 또한 앞에서 이야기했던 문명화 담론처럼 개인, 관계, 제도의 세 가지 측면으로 나누어 분석할 수 있다. 개인 민주주의의 핵심은 자유권과 주권의식이다. “빈부귀천을 따지지 않고 사람마다 자기 신상에 자유권을 갖고 태어난다.”거나 “조선 백성들이 가진 권리가 있지만 그 권리를 쓰지 아니하니까 없는 것 같아 보이는 것이며 나라가 잘 되고 못 되는 것은 백성의 손에 달렸다.”는 문장들이 그 증거이다. “문을 열어놓고 만민이 보는 데서” 나라 일과 상회 일을 의논해야 한다는 대목은 공개적이고 계약적인 관계의 요구이며 “지혜를 연구하고 일심합력하면 그 가운데서 강한 힘이 생겨 도리어 힘 있는 사람을 압도하는” 연대의 필요성을 이 당시부터 느끼고 있었다. 제도 면에서는 인민권 보호, 대의제, 권력 감시, 법의 형평성, 무죄 추정의 원칙 등 현대 민주주의 제도의 구성요소를 모두 포함한다. 인민들이 받아들였던 서구의 민주주의 사상과 제도는 매우 높은 수준이었다. 그리고 인민들은 생활의 문명화와 언론에서 말하는 내용을 수용하는 정도에 그치지 않고 직접 행동에 나선다. 1898년 김홍륙이 고종과 태자가 마시는 커피에 독을 넣은 사건을 계기로 정부가 고문과 악형, 연좌제 부활을 시도하자 인민들은 생명과 재산의 자유권 침해에 항의하였다. 법에 근거한 처벌과 고문 금지를 주장하는 목소리는 법률과 규칙을 준수하지 않은 정권 퇴진 요구로 발전했다. 고종은 거부하였고 유생은 독립협회 비난 대자보를 붙였지만 결국 박정양 개혁 정부가 구성되는 결말을 맞았다. 미국 공사는 평화적 혁명이라고 평가하였다. 자발적 결사체에 대한 이해와 갈등 역시 팽팽한 긴장구도를 이뤘다. 정치 문제에 관한 토론과 제한된 장소에서의 집회만을 허락하는 고종의 입장에 독립협회는 정치 토론은 정부의 부정부패 때문에 반드시 필요하며 언론의 자유권은 양보할 수 없는 민권이라며 반박했다. “정법을 문란하게 하는 신하를 탄핵하고 성토하는 것은 백성의 권리”이기 때문이었다. 독립협회의 주장은 ‘법을 지키지 않은 우리를 잡아가라.’는 시민불복종운동으로 전개되었고, 고종은 ‘신하의 의무’라는 유교적 사고방식으로나마 언론의 자유를 허용하였다. 19세기의 민중운동의 마지막을 빛낸 만민공동회의 개최와 해산은 독립협회와 함께 추진했던 의회개설운동과 깊은 관련이 있다. 독립협회가 주장한 의회론은 입법과 행정을 분리시켜 전문화하면 국정을 능률적으로 집행할 수 있고, 공개적 찬반 토론을 통해 인민의 의사를 민주적으로 반영하는 동시에 정치의식을 높인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독립협회는 양원제를 지향하며 중추원을 개편하여 상원을 설립하였다. 헌의 6조는 의회의 조약비준권, 재정 일원화, 예결산제도 확립, 공개재판제도와 증거주의, 법률 준수 등 제반의 민주주의 정치로의 진전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독립협회가 군주제를 전복하고 공화제를 내세울 반역을 모의하고 있다.”는 내용의 익명서가 등장하였고, 정부는 독립협회 간부 17명을 긴급 체포하고 독립협회를 불법화한다. 처음 만민공동회를 개최한 것은 독립협회였다. 하지만 만민공동회가 연일 만여 명을 헤아리는 시민이 참여하는 집회와 시위의 장이 된 것은 독립협회가 폐쇄되고 간부들이 죄다 체포되었을 때였다. 또렷한 지도부와 운영 방침 없이 자발적인 시민들이 함께 머리를 맞대며 꾸려간 공동체가 바로 만민공동회였던 것이다. 당시 서울 인구 17만 명 중 매일 1~2만명이 모여 연일 철야농성을 했다는 소식에 전국에서 지지를 표하며 성금, 물품을 보내왔다. 만민공동회를 엄호하던 200여명의 군인이 지지를 표명하며 스스로 해산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1898년 10월부터 12월까지 이어온 만민공동회 운동은 정부의 폭력 진압에 의해 해산되었다. 하지만 일사분란한 지도부 없이 시민의 자발성에 의거해 몇 달 간 집회와 시위를 지속했다는 점, 그리고 전국에서 아낌없는 지지와 성원을 보내주면서 민주주의 가치 구현을 위한 연대의 전통이 수립되었다는 점에서 커다란 성과를 남겼다. “반대가 없으면 진보가 없나니” – 독립신문, 1898 강의 시작 전에 선생님께서는 질문을 하나 던지셨다. 1894년까지만 해도 전봉준과 동학농민군은 유교적인 화법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1898년 독립협회의 화법은 근대적이다. 어떻게 사람들의 주체의식 각성이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일까? 나는 후기를 쓰며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었다. 근대적 시민의식은 불과 4년 만에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고 한 세기 내내 지속되어온 투쟁의 역사 속에서 우리 민족이 서서히 형성해왔다. 이미 우리가 가지고 있던 시민의식이 서구 문명이 가져온 물리적 근대화 및 우리보다 한발 앞서 꽃피운 사회사상과 맞물려 폭발적인 발전이 일어난 것이다. 주목할만한 또 다른 지점은 19세기 말 민중들이 도달한 민주주의의 수준이 21세기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거나 오히려 더 급진적인 측면마저 보인다는 사실이다. 아래는 이날 강의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사료이다. “개화한 나라일수록 시비하는 공론이 많고 시비가 많을수록 개화가 점점 잘 된다. 백성이 정부에 반대하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나 반대가 없으면 진보가 없나니 대한 백성들은 어느 때든지 잘못하는 일이 있으면 꺼리지 말고 시비하고 반대하여 정부로 하여금 방심하는 폐단이 없도록 하자.” - 독립신문, 1898.11.7 116년 전에도 오늘날의 사회에도 이견은 존재해야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주류와 다른 의견은 존중 받지 못하고 억압당하고 있다. 그러나 권력 안과 밖의 엄청난 괴리가 존재하는 가운데 일제가 국권을 침탈한 데에서 우리나라의 불행이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일제와 독재정권이 역사의 시계바늘을 거꾸로 돌리려고 갖은 시도를 해왔음에도, 시민의 힘은 이른바 87년 체제라고 불리는 제도적 민주주의를 일구어냈다. 그러니 지금까지 배운 내용을 두고 우리의 시민의식이 19세기 말에 비해 별다른 발전이 없다고 좌절할 필요는 없다. 민주주의의 발전은 이제 막 다시 시작한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글: 자원활동가 박유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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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권의 정치철학 : 자유의 계보학 | [자유의 계보학] 4강, 왜 평등한 자유인가 | 장경환 | 2014.2.14 | ||||
[자유의 계보학] 4강(2/11), 왜 자유는 평등해야 하는가? 존 롤스, 『정의론』 강의소개 보기 >> 클릭 1강 후기 보기 >> 클릭 2강 후기 보기 >> 클릭 3강 후기 보기 >> 클릭 오늘 강의는 어떤 사상가를 이해하려면 철학사 공부가 필요하다는 설명과 함께 시작됐다. 선생님께선 깊이 있는 것도 좋지만 넓고 얇게 공부하다보면 깊어질 수 있다는 말씀을 해주셨다. 이어 지난 시간 못한 설명들을 해주셨고 동인도회사에서 35년간 일했었던 밀이 제국주의를 옹호했는가에 대한 설명을 해주셨다. 오늘 강의의 주제는 롤스의 [정의론]을 바탕으로 한 ‘왜 평등한 자유인가?’라는 주제였다. [정의론]은 20년 이상 축적된 연구결과의 총합이다. 선생님께선 이 책이 나올 당시 ‘역사를 뒤집을 책’이 나올 것이라며 학계가 기대감에 부풀어있었다는 설명을 해주셨다. 이어 롤스의 삶에 대한 설명을 해주셨다. 그는 인터뷰 같은 것도 잘 하지 않고 연구실에 박혀 있었던 사람이라고 한다. 또한 그의 많은 제자들이 롤스를 비판하면서 성공했을 정도로 온화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롤스는 글을 잘 못쓴다고 하셨다. 롤스의 철학을 아내가 독해해서 세상에 알렸다는 설명을 해주시며 아내의 독해 능력 때문에 세상에 롤스의 철학이 알려질 수 있었다고 하셨다. [정의론]이 쓰여진 시기는 1950~60년대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그 시기는 흑인민권운동, 신좌파운동, 시민권리운동같은 투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권리를 위한 투쟁이후에도 여전한 차별의 시대였다. 빈민과 유색인종들은 끊임없이 차별로 생존 자체를 위협받고 있었다고 한다. 선생님께선 바로 이 때가 [정의론]의 핵심사상이 형성된 시기라고 하셨다. 이어 [정의론]의 주제가 ‘정당화될 수 있는 불평등은 있는가’에 대한 것이라는 설명을 해주셨다. “기업가 계층에서 인생을 시작하는 사회 구성원은 비숙련 노동자 계층에서 인생을 시작하는 구성원보다 더 나은 삶의 전망을 가질 것이다. 인생 전망에서 이런 최초 불평등을 어떻게 정당화할 수 있겠는가?”라는 롤스의 말이 [정의론]의 주제를 가장 잘 드러냈다고 할 수 있다. 롤스는 사회제도의 제 1덕목이 정의라고 말하면서 공정성으로서의 정의관을 말했다. 우리가 다 받아들일 수 있기에 공정한 것이라는 말이다. 절차의 공정성이 결과의 공정성을 보장할 수 있다고 롤스는 생각했다고 한다. 이 공정이라는 것의 핵심은 절대평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적절하게 나누어졌는가를 말한다. 그러기 위해선 사회 기본적인 제도들이 필요하다고 했다. 선생님께선 여기서 제도세팅의 중요성, 즉 제도가 사람을 만든다는 ‘밀’이 주장했던 포인트와 공통점이 있다고 하셨다. 선생님께선 롤스가 당대의 지배적인 공리주의 이론이 효용에만 치중하고 정당한 분배에는 무관심하다고 생각했다고 말씀하셨다. 그는 공리주의의 모순점을 지적하면서 일상의 가치판단은 직관적이기에 분배문제에 있어서 가치의 우선성을 가려줄 단일한 기준이 필요하다고 했다, 다시 말해 롤스는 사회를 상호간의 편익을 위한 상호 체계로 인식하며 구성원들 간에 적정한 사회적 배분이 이루어지는 정의가 실현되기 위해서는 전체적 합의에 기초한 일련의 선택 원리가 필요하다고 봤다. 바로 이 선택원리가 롤스가 추구하는 사회 정의의 원리이다. 그래서 롤스는 정의의 원칙을 주겠다고 했다고 한다. 먼저 롤스는 사회 구성원들 간에 이러한 합의를 도출해낼 수 있는 선택의 원리를 발견하기 위해 모든 이성적 행위자가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포함하여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 ‘무지의 베일’에 가려 있는 상태를 가정한다. 롤스는 개개인을 위한 합리적 선택은 정보가 개방되어야 하는데 사회의 공익을 위한 합리적 선택은 정보가 제한되어 있어야 한다고 봤다. 이 상황에 놓인 개인들은 정의의 원칙에 관한 여러 가지 대안들을 놓고 그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게 된다. 불확실한 미래 상황에서 합리적인 개인은 자신이 가장 혜택을 받지 못하는 최하층에 속할 수도 있다는 가정을 하게 된다. 따라서 개개인은 어떤 대안을 선택하였을 때 자신이 가장 불리한 상황에 놓일 수도 있다는 가정 하에서 최소 수혜자의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성향을 지닌다는 심리학적 사실에 근거한 최소 극대화의 원리인 것이다. 바로 이 최소 극대화의 원리는 다수를 위한 소수의 희생을 강요하는 공리주의적 사회에서 소수의 기본적 인권과 권익을 보호할 수 있는 원리가 되는 것이다. 선생님께선 롤스가 이런 최소수혜자의 권익을 보장하기 위해 사회적 안전망이 세팅되어야 하고 이런 원리가 적용되면 사람들이 사회적 안전망을 세팅하는데 동의할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말씀하셨다. 즉, 사회적 자언의 분배되는 것을 고려해서 하나의 사회 구성원이 제 몫을 할 수 있게 우연성을 버리고 제도세팅을 해야 한다고 하셨다. 이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최저임금제 문제’와 ‘비정규직에서 정규직 전환 문제’를 말씀해주셨다. 자유에 대한 일반서술의 형식은 제한(공공규칙)으로부터의 자유를 말한다. 그리고 자유의 가치는 일반적으로 다른 가치들을 명시함에 달려있다. 양심의 자유, 출판의 자유 등 이 많은 자유들이 다 하나의 쳬계라는 뜻이다. 그리고 롤스는 모든 자유는 이를 보장할 수 있도록 자유를 정의하는 길이 존재한다고 말했다. 선생님께선 평등한 자유의 원칙을 위배하는 방식이 두 가지 있다고 하셨다. 바로 한 계층의 사람들이 다른 계층의 사람들보다 더 큰 자유를 가지는 경우와 자유가 당연히 그래야 할 것보다 덜 광범위한 경우이다. 롤스는 이럴 때 자유는 평등하지 못하기 때문에 평등한 시민들이 갖는 모든 자유는 사회의 모든 성원에게 동등해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자유의 가치는 빈곤과 무지 등으로 인해 누구에게나 평등하진 않다. 그러나 롤스는 자유의 가치에 대한 보상이 불평등한 자유를 정당화하지는 못한다고 했다. 이어 선생님께선 최초로 합의한 평등과 자유의 원칙은 최종적인 것이라는 것을 설명해주시면서 롤스의 평등한 자유와 미래세대에 대한 관심에 관해 설명해주셨다. 마지막으로 선생님께선 ‘충성스런 반대(loyal opposition)’라는 개념을 설명해주시면서 반대할 수 있는 권리의중요성을 설명해주셨다. 이 부분에 대해선 롤스의 말보다 더 잘 표현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충성스런 반대라는 관념이 없이는, 그리고 그것을 표현하고 보장하는 헌법상의 규칙들을 고수하지 않고는 민주정치가 제대로 시행될 수 없으며 오래 지속될 수도 없다.“ 우리나라가 산업화하면서 늘 하던 표현이 있다. ‘선성장후분배’. 특히 군부독재 시절엔 성장한 후에 그것을 분배하겠다는 생각으로 각종 대기업에 대한 법을 초월한 지원이 있었다. 강의를 들으면서 아직까지도 성장만을 추구하고 분배에 관해선 거들떠보지도 않는 대한민국의 현실이 떠올랐다. 선생님께선 강의 중에 미국은 분배문제가 정치적 문제가 되면서 동력을 얻었고 분배문제가 정치발전의 원동력이었다고 하셨다. 강의를 들으면서 국가차원에서 분배나 정의에 대한 성숙한 접근이 필요한 것 같다는 생각과 언젠가 ‘그린몬스터’라 불리는 [정의론]을 한 번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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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권의 정치철학 : 자유의 계보학 | [자유의 계보학] 3강, 왜 정치적 자유일까 | 장경환 | 2014.2.9 | ||||
[자유의 계보학] 3강(2/04), 왜 정치적 자유일까? 존 스튜어트 밀, 『자유론』과 『대의정부제』 강의 소개 보기 ☞ 클릭 1강 후기 보기 >> 클릭 2강 후기 보기 >> 클릭 오늘은 황지우의 ‘뼈아픈 후회’라는 시를 읽고 개인만을 생각했던 선생님의 과거에 관한 이야기로 강의가 시작됐다. 타자의 고통이 인간의 한 부분임에도 불구하고 ‘나’만을 위한 사고방식으로 자기 안에 갇혀있는 게 큰 사회적 문제인 것 같다는 말씀도 해주셨다. 이어서 지난 강의 복습, 질문과 그에 대한 대답이 이어졌다. 질문 중에 성경에는 이자를 받지 말라는 말이 있는데 이 부분에 대해서 애덤스미스는 어떻게 생각했을 것 같냐는 질문이 있었다. 선생님께선 이에 대해 자본축적과정과 금융자본주의에 대한 설명을 통해 이자가 자본증식에 기여하지 않기 때문에 스미스도 이자를 싫어하지 않았을까 하는 대답을 해주셨다. 이어 ‘밀’은 어떤 사람인가라는 얘기로 밀의 생애에 대한 얘기를 해주셨다. 밀은 처음으로 정치적 자유를 체계화한 사람이라고 하셨다. 밀은 [자유론]을 통해 아렌트의 개인의 자유라는 Freedom과 달리 Liberty(어떻게 권력을 제한할 것인가)를 다뤘다고 한다. [대의정부론]에선 어떻게 자유를 지켜낼 것인가에 대한 주제를 다뤘다고 한다. 이 책에선 올바른 제도가 올바른 대중을 만든다는 생각이 바탕이 되어 제도 세팅에 관핸 책이라고 한다. 다음으로 밀은 샤갈처럼 철학적 영감을 아내로부터 받았다고 하는데 아내에 대한 사랑이 엄청났던 것 같았다. [자유론]의 원제목은 [On Liberty]이다. 책을 보면 밀도 아렌트처럼 자유의지를 자유로 착각하지 않았단 것을 알 수 있다. 정부가 행사할 수 있는 권력의 한계가 어디까진가에 대한 얘기부터 Liberty의 개념을 다룬다. 선생님께선 Liberty란 권력에 대해 제한을 가하는 것이라고 설명해주셨다. 이어 Freedom과 Libery의 차이를 설명해주셨다. 밀은 인민의 의지는 곧 다수파의 의지이고 이것은 전체 인민의 의지가 아니기 때문에 다수파의 횡포를 견재해야 한다고 말한다. 선생님께선 다수파의 횡포는 ‘Tyranny of majority’라는 표현을 번역한 것이라고 하시면서 ‘Tyranny’와 ‘Dictatorship’의 차이를 설명해주셨다. ‘Tyranny’는 법 위에 존재하는 통치자, 즉 참주에 의한 독재라고 한다. 선생님께선 역사를 보면 참주를 암살하라는 말이 많은데, 참주는 법위에 존재하기 때문에 법의 보호를 못받는다고 하셨다. 그래서 참주는 암살해도 법의 적용을 받지 않는다는 말씀을 해주셨다. 반면에 ‘Dictatorship’은 일정기간만 통치자에게 권력을 준 경우를 의미한다. 법의 보호 아래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지지만 기간이 되면 자리에서 물러나야 한다. 이런 표현의 의미를 볼 때, 다수의 횡포는 말 그대로 법을 넘어서는 것이라고 하셨다. 선생님께선 다수의 횡포 중에서도 여론의 횡포가 비제도적인 가장 나쁜 횡포라고 설명해주셨다. 밀은 사회 동선과 다른 생활 습관을 가진 사람들에게 법률적 제제 이외의 방법으로써 윽박지르고 통설을 행동지침으로 받아들이도록 강요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강요에 순응하지 않는 사람들이 중요하다고 했다. 밀은 또한 이런 횡포에 순응하지 않는 사람들이 변화를 이끌어내기 때문에 억압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한편 이성도 없고 개성도 없고 개인만을 선호하는 순응현상은 확장돼서 권력자의 의지를 따르는 노예근성에 까지 이르게 된다고 하셨다. 하지만 권력자들의 관점은 다른 생각을 조작하는데 골몰하는데 있다. 그래서 밀이 제안한 자유의 제 1원칙은 타인에게 해를 끼치는 것을 막기 위해서만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 정당하다는 것이다. 이것을 ‘무위해성의 원칙’이라고 한다. 자유의 원리는 두 가지가 의미를 지니는데, 첫 째로는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는 행위는 당사자가 책임을 져야 하고, 두 번째로는 행위가 자신에게만 영향을 줄 때 행위자가 사회에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어서 밀이 자유를 구분했다는 설명과 함께 의견과 표현의 자유가 중요한 이유에 대해서 말씀해주셨다. 그리고 밀은 의견과 표현의 자유를 위해 토론이 필요하고 토론을 잘못된 생각과 관행을 바로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하셨다. 강의 때 나눠주신 프린트에 토론의 중요성에 대해 잘 표현한 문장이 있다. “밀이 가장 먼저 강조하는 것은, 어떤 사람의 견해를 듣지 않은 채 자신의 견해가 옳다고 믿는 것은 자신의 이성에는 전혀 오류가 없다는 것을 가정하고 있는 어리석은 행위라는 것이다. 토론과 논쟁이 전혀 없이 다수 자신들의 견해가 옳다고 믿을 수 있을 만큼 인간의 이성은 완벽하지 않다.” 이 부분을 들으면서 밀의 주장은 이상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선생님께서도 토론 프로그램에 나오는 논객들이 신에 가깝다며 현실에선 토론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말씀해주셨다. 쇼펜하우어의 ‘토론의 법칙’이란 책에서 “토론술은 진리를 찾는 데는 관심이 없다. 이것은 검객이 결투를 초래한 언쟁에서 누가 옳은가에 대해 전혀 생각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라는 말을 할 정도로 현실세계에서의 토론은 그저 ‘싸움’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다. 이어서 선생님께선 개별성에 대한 설명을 하다가 시간이 부족해서 다음 강의에서 설명해주신다고 하시면서 강의를 마치셨다. 강의를 마치고 돌아보니 지금까지 1,2,3강을 통해 서로 다른 시대를 살았던 철학자들이 자유에 대해 공통적으로 생각했던 것이 있다고 느겼다. 자유로운 상태라는 것은 결코 홀로 만들 수 없다는 것. 사회가 있어야, 공동체가 존재해야 자유가 있을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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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를 향한 역사 : 근대로의 희망 여정 | [민주주의를 향한 역사] 동학 추천도서 | 레드펭귄 | 2014.2.7 | ||||
김정인입니다 ^^ 어제 올린다는 것이 그만 깜빡!!했네요. 죄송해요. 질문 주신지 무려 2주만에 답변 드린 점 다시한번 사과드리구요. 1. 표영삼, 동학1-수운의 삶과 생각, 통나무 ; 동학2-해월의 고난, 통나무 표영삼 선생님은 평북 구성 출신으로 월남한 천도교인이셨습니다. 제가 "천도교 근대 민족 운동 연구"(한울)로 박사학위를 받았을 때 고령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자료를 소개해 주시고 알고 있는 지식을 모두 알려 주려 애쓰셨던 분이시지요. 특히, 수운 최제우보다는 해월 최시형을 무척 좋아하셨지요. 천도교인 중 유일하게 천도교사를 연구하던 분이셨구요. 역사 전문가가 쓴 것은 아니지만, 신뢰가 듬뿍 가는 책들이지요. 문득, 천도교 관련 자료를 쉬지 않고 복사하다가 정신을 잃고 쓰러졌던 청춘의 그 시절이 생각나네요^^ 2. 김용휘, 우리 학문으로서의 동학, 책세상 책세상 문고라 얇고 과학도였다가 철학도로 돌아선 이력을 가진 전문가가 풀어낸 동학 책이라 추천합니다. 근대사에서의 유토피아, 대안공동체에 관한 연구는 아쉽지만, 없네요....아님, 제가 찾아보긴 했으나, 잘 모르는 걸 수도 있구요. 언제든 찾게 되면 이 게시판에 올릴께요... 다른 두분의 질문, 서양인 신부의 한국인을 보는 눈과 천도교와 증산교의 관계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에 꼭 설명드릴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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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권의 정치철학 : 자유의 계보학 | [자유의 계보학] 2강, 왜 시장의 자유일까 | 장경환 | 2014.2.3 | ||||
[자유의 계보학] 2강(1/28), 왜 시장의 자유일까? - 아담 스미스, 『국부론』과 『도덕감정론』 강의 소개 보기 ☞ 클릭 1강 후기 보기 > 클릭
오늘은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해결방법’이라는 시를 읽고 그의 인생에 대한 설명으로 강의가 시작됐다. 시의 표현대로 ‘인민을 다시 뽑고 싶은 그들’은 역사 어디에나 존재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시였다. 시인의 인생에 대한 설명과 함게 지난 강의 복습, 질문과 그에 대한 대답이 이어졌다. 이후 본론으로 들어가 애덤스미스에 대한 강의가 이어졌다. 선생님께선 애덤스미스가 자유주의 역사에서 왜곡이 가장 큰 케이스라고 하셨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애덤스미스가 살았던 18세기 당시의 영국의 상황, [국부론]에서 [도덕감정론]으로 이어지는 설명을 하셨다. 애덤스미스가 살았던 18세기의 영국은 정치민주화가 시작되고, 산업혁명이 시작되던 시기로 경제가 성장하고 기술혁신이 이루어지던 시기였다. 한편 이렇게 밝은 면과 함께 빈부격차가 심해졌고, 극심한 재정난과 식민지 전쟁이라는 어두운 면도 있었다. 선생님께선 윌리엄 호가스의 'Beer Street'과 ‘Gin street'이라는 그림을 보여주면서 당시의 빈부격차를 설명해주셨고 그 시대를 살앗던 애덤스미스의 과제는 ’왜 국부는 늘어나는데 빈익빈 부익부가 일어나는가‘에 대한 대답을 찾아내는 것이었다고 하셨다. 먼저, 선생님의 [국부론]에 대한 설명으로 시작했다. 애덤스미스는 분업을 강조했고 분업이 국부의 원천이라고 했다. 애덤스미스는 개인의 삶의 장은 공동체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한편, 베버는 분업엔 물건을 만든 사람의 정체성이 들어있지 않았다고 여겨 분업을 비판했다고 한다. 하지만 애덤스미스의 생각은 달랐다. 애덤스미스는 분업을 통한 결과로써의 상품을 사회성의 결집체라고 봤다. 애덤스미스가 분업을 위해선 경제적 자유가 필요하고 국가의 간섭이 옳다고 생각하지 않은 것은 맞다. 이런 최적의 경제체제를 ‘자연적 자유의 체제’라고 하는데 애덤스미스는 이 자유의 체제 안에서 자유로운 경쟁시장을 지향한다. 이 부분에서 자기 이익을 추고하는 이기심과 행위는 사회 전체의 이익과 조화를 이루는 방향으로 간다. 이러한 맥락에서 흔히 알려진 것이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표현이다. 하지만 선생님께선 이 ‘보이지 않는 손’이 이 맥락에서 사용되지 않았다고 하셨다. 그리고 애덤스미스는 보통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이기심(selfishness)를 써서 표현한 적이 없고 자기애(self-love)라는 표현을 썼다고 한다.
△ 영국의 빈부격차를 풍자한 그림 (Beet Street)
애덤 스미스는 개인이 부와 지위를 추구함으로써 사회가 번영한다고 주장했지만, 그것들에 대한 무절제한 추구는 오히려 개인의 행복을 저해하고 사회질서를 어지럽힌다고까지 했다. 이런 생각은 도덕철학자였던 애덤스미스의 다른 저서인 [도덕감정론]에서 드러난다. 인간은 사회 속에서만 살 수 있다. 즉, 인간은 타인의 존재와 행복을 필요로 한다. 그 사회에선 동감이 필수적이다. 동감은 합리적인 역지사지의 태도 정도로 이해할 수 있는데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제 3자의 위치와 관점이라는 ‘공정한 관찰자의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동감이 무절제한 이기심을 절제해주는 것이다. 지금까지 애덤 스미스 하면 ‘이기심’의 중요성을 알려준 사람이라고만 알고 있었는데, 이번 강의를 통해 기존에 알고 있었던 애덤 스미스에 대해 이전과는 다른 관점으로 보게 되었다. 그리고 인간에 대한 이해가 철학이나 사상의 기반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무엇이든 이론이나 생각을 가지기에 앞서 인간에 대한 이해가 얼마나 중요한지 느낄 수 있었다. 1강에서의 아렌트가 말했던 자유와 비슷한 점이 많았던 것 같다. 개인의 자유는 타자의 현존을 필요로 한다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혼자서는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 프린트에서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두 번의 강의의 공통점을 보여주신 것 같다. “개인의 권리를 지독히 옹호하는 자유주의의 주장은 개인이 결국에는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삶을 영위해야하고 유한한 삶 동안 공동체와 끊임없이 상호작용하고 있음을 역설적으로 증명한다.”
<참여자 질문> - 아담스미스의 '타인의 고통에 대한 공감'과 공자의 '측은지심'은 어떻게 다른가요? - Giulty는 부와 권력을 갖고 난 후에 생기는 과정인가요? 부와 권력에의 '동경'하는 단계에서도 생길 수 있는 것인가요? - "내 마음 속의 공정한 관찰자'를 얘기하면서 내가 속일 수 없는 유일한 존재가 나 자신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자신의 거짓말에 도취되어 스스로를 속이게 되지 않습니까? 정말, 그 거짓말이 정말이라고 믿어버리는 거죠. 이경우 공정한 관찰자는 힘을 잃지 않을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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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를 향한 역사 : 근대로의 희망 여정 | [민주주의를 향한 역사] 3강, 정의: 공평한 세상을 향한 농민항쟁 | 박유하 | 2014.2.3 | ||||
[민주주의를 향한 역사: 근대로의 희망 여정] 3강(1/27), 정의: 공평한 세상을 향한 농민항쟁 강의 소개 보기 ☞ 클릭 1강후기 보기 > 클릭 2강후기 보기 > 클릭 19세기는 농민항쟁의 시대였다. 한 세기 내내 전국적으로 농민항쟁이 계속되었고 변란(1811년 평안도농민전쟁), 민란(1862년 농민항쟁)을 거쳐 전쟁(1894년 동학농민전쟁)으로 진화해 나갔다. 지금까지 농민항쟁을 다룬 연구들을 살펴보면 개별 봉기의 파편에만 범위가 한정되어 있으며 연속성에 주목한 논문은 거의 없다고 한다. 농민항쟁에 대한 평가도 상당히 박한데, 이는 지금의 눈으로 과거를 보는 오류를 범하기가 쉽기 때문이다. 이날 강의에서는 농민항쟁의 근본적 원인과 변화 양상을 전체적으로 공부해보았다. 아울러 시민의식을 지니고 근대로 나아가던 민중들, 그들이 아무리 저항해도 바뀌지 않는 조선 정부를 나란히 보며 권력 안팎의 세계가 이토록 달랐다는 것을 실감하기도 했다. 세도정치와 삼정의 문란, 농민들을 벼랑 끝으로 내몰다 시아버지 삼년상 벌써 지났고 갓난아이 배냇물도 안 말랐는데 - 정약용 <哀絶陽(애절양: 남근을 자른 일을 슬퍼함)> 中 - 농민의 저항 방식은 국가의 부역 의무에 응하나 고의로 일을 방해하는 일상적 투쟁과 족보를 사서 신분상승을 꾀하는 개별투쟁 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었다. 관`리들의 비리를 소문으로 퍼뜨리거나 산에 올라가서 큰 소리로 폭로하기, 집회, 상소 등 온건한 방법이 통하지 않을 때 선택하는 최후의 수단이 봉기였다. 농민항쟁의 원인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신분해방 등 평등 의식의 고조와 부정의하고 불공정한 국가권력의 부정부패다. 이중 실질적으로 민중의 삶을 고달프게 했던 것은 후자였다. 세도정치는 몇몇 가문이 중앙 관직을 독점하는 기형적인 정치 형태였다. 실력이 있어도 이들에게 잘 보이지 않으면 관직에 진출할 수가 없기에 좌절한 지식인들이 봉기에 가담하거나 지도자가 되는 일이 많았다. 삼정의 문란은 매관매직이 성행하고 지방 수령들이 백성을 가혹하게 수탈하던 시대상과 직결되어 있다. 삼정이란 전정(토지세), 군정(군포), 환곡을 일컫는다. 위에 인용한 정약용의 시는 16세부터 60세까지의 남성들이 병역의무 대신 내던 세금 군정의 문란을 짐작케 하는 작품이다. 또한 삼정 중 가장 악질적이고 19세기를 뒤흔든 주범으로 지목받는 것이 환곡이다. 본래는 춘궁기에 곡식을 꾸어주고 가을 추수 후에 갚게 하던 구휼제도마저 탐관오리들의 이자놀이로 변질된 것이다. 일찍이 18세기에 정약용은 “만일의 상황이 발생하여 백성들이 작당하여 변란을 일으키면 그 누가 막을 것인가?”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로부터 100년이 지나도 정부는 변화하지 않았고 상황은 악화일로를 걸었다. 오지영에 따르면 1894년에는 백성들이 이 나라는 망해야 한다며 날마다 망국가를 불렀다고 했다. 사회를 재구성할 길이 전혀 보이지 않았던, 극단으로 치달은 사회상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백성들의 불만이 최초로 폭발한 지점은 1800년 안동 관아 습격 사건과 1801년 하동 괘서 사건이었다. 뒤이어 서북지방(함경도, 황해도, 평안도)에서 변란들이 하나 둘 일어나기 시작했다. 무역, 수공업, 광산 등으로 새로운 부민의 등장과 이들에 대한 수령의 수탈이 배경이었다. ‘홍경래의 난’으로 유명한 평안도 농민전쟁(1811)은 비록 패배했지만 4개월 넘게 정주성에서 저항하며 버텼다. 재조명이 필요한 임술농민항쟁 1862년, 단성민란과 진주민란을 도화선 삼아 전국 72개 군현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농민봉기가 일어났다. 합법적인 등소운동(等訴運動)을 통한 요구사항이 관철되지 못하면 전면 봉기하여 관청을 공격하고 읍권을 장악한 후, 진압을 피해 자진 해산하는 전개방식이 공통적으로 나타났다. 참가 계층은 몰락양반과 농촌 지식인, 그리고 대다수를 차지하는 소빈농이었다. 이때 권력과 부를 가진 사람들도 함께 일어났는데, 불공정한 조세제도는 부민에게도 적용되었기 때문이다. 이 시기 정부는 강경대응으로 일관하였으며 권력자들이 민생을 위해 한 일은 거의 없다. 일례로 삼정의 문란을 시정하겠다며 삼정이정청을 설치했으나 결국 없던 일로 만들고 말았다. “백성은 수령에 대해 부모를 받들 듯 해야 하거늘 구타하고 짓밟기를 이에 이르렀는가.”라는 철종의 발언에서 알 수 있는 권력자들의 가치관은 굉장히 전통적인 유교 사상이다. 백성은 근대화를 향해 나아가는데 권력은 여전히 봉건적 세계라는 자기들만의 성 안에 갇혀 바깥세상과 단절되어 있었던 것이다. 임술농민항쟁에 대한 통설적 평가는 상당히 비판적이다. 계급적 연대를 바탕으로 지역을 초월하여 정치권력에 대해 투쟁하지 못하였고, 봉건적 토지제도나 신분제를 전면적으로 부정하지 않는 조건적 경제투쟁에 머물렀다는 지적이 가장 먼저 나온다. 상위 공권력에 호소하는 청원적인 모습과 국왕의 효유문에 스스로 엎드려 죄받기를 청하는 투항적인 모습 또한 나타나고 있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이에 대해 반박하자면, 산발적으로 일어나던 봉기는 1894년 동학농민전쟁에서 마침내 전국적 연대를 통한 정치적 투쟁으로 진보한 점을 근거로 들 수 있다. 청원적이고 투항적으로 보이는 의사표현 방식은 민중들이 추구하던 이념의 근대성과 그들 사유의 전통성이 혼재해있던 결과라 해석할 수도 있다. 이처럼 역사에서 한계를 설정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지금의 잣대로 우리가 살지 않았던 시대를 평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동학농민전쟁, 봉건 체제를 타파하려 했던 민중운동 개항 이후 1894년까지 농민항쟁 100여건 발생하였고, 1893년에는 한 해에만 무려 65건이나 일어나 “민란이 없는 고을이 없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1893년 3월 보은집회에서 백성들의 발언을 보면 지배층에 대한 저항, 서양의 의회제도와 민주주의 이해, 구조적 부패에 대한 비판 등 이들에게 이미 근대적 의식이 갖추어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보은, 금구 집회 이후 전라도 일대에서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 등이 주도하여 지역적 연계를 시도하였다. 1차 봉기의 시발점인 고부민란은 조병갑의 학정에 들고 일어난 농민들이 전봉준을 지도자로 추대한 것이다. 봉기의 4대 강령, 특히 네 번째 강령인 “군대를 몰고 서울로 쳐들어가 권세가와 귀족을 모두 없앤다.”는 이전에 마을 단위로 일어났다 사그라들던 농민봉기에 비해 뚜렷한 목표와 혁명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집강소를 설치해 폐정개혁에 힘쓰던 동학농민군은 청군과 일본군이 들어온 것을 계기로 재봉기하였다. 근본 목표는 더 철저한 폐정개혁이었지만 대의는 항일로써, 충청도 의병을 집결하여 봉기의 전국화를 가능케 했다. 흔히 동학농민운동에는 반제국반봉건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지만 항일 의식의 실체는 폐정개혁을 방해하는 일본에 대한 적대감에 가까웠다. 개화파와 대원군의 중간쯤에 해당하는 근대성을 가졌지만, 그보다는 구체제를 파괴하고자 하는 열망이 더 강했다. 여흥 민씨 세도정치로 돌아가던 정부는 동학군 진압에 외세를 끌어들여 내정 간섭의 여지를 주는 최악의 선택을 하고 말았다. 동학농민전쟁 후에도 지배층은 이전과 다를 바 없이 새로운 조세항목을 만들어가며 나라가 망할 때까지 부정부패를 일삼았다. 역사에서 가정을 한다는 건 부질없는 일이지만 권력자들이 조금이라도 개혁의지를 보이고 실천했다면 아래로부터의 변혁과 맞물려 조선 말기 역사가 크게 달라질 수도 있었을 거라는 미련을 버릴 수가 없다. 19세기 농민이 요구한 정의와 전통 속에서 찾은 근대화의 길 19세기 농민항쟁이 요구한 정의는 차별없는 공평과세였다. 봉기를 거듭하며 민주주의를 구성하는 이념들이 추가되지만 어떤 봉기의 원인에서도 조세 관련 사항은 빠지지 않았다. 그러나 어떻게 해야 공평과세를 실현할 수 있을지 정부에서 논의가 없었으며, 결국 일제가 나라를 빼앗고 나서야 그들의 손에 의해 근대적 조세 제도가 만들어졌다. 원래는 관민의 합의에 따라 우리 손으로 만들었어야 했을 제도이다. 농민항쟁의 또 다른 의의는 전통 속에서 근대화의 길을 찾았다는 것이다. 중국 태평천국운동은 비자본주의적인 중국적 근대화의 길을 모색, 다시말해 전통 속에서 근대 세계로의 가능성을 발견해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중국을 조선으로, 태평천국운동을 동학농민운동으로 바꾸어도 틀리지 않는 이야기다. 마지막으로 농민항쟁을 실패한 계급투쟁으로 보는 것은 편향된 시각이라는 점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다. 한국 민주주의 발전의 역사를 전근대와 단절시킨 주범은 사회를 재구성할 의지가 없던 봉건지배층과, 한창 무르익고 있던 시민의식을 짓밟은 제국주의 열강인 것이다. 글 : 자원활동가 박유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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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를 향한 역사 : 근대로의 희망 여정 | [민주주의를 향한 역사] 2강, 자치: 서학의 정착, 동학의 탄생 그리고 공동체 | 박유하 | 2014.1.27 | ||||
[민주주의를 향한 역사: 근대로의 희망 여정] 2강(1/20), 자치: 서학의 정착, 동학의 탄생 그리고 공동체 강의 소개 보기 ☞ 클릭 1강후기 보기 > 클릭 서학은 천주교, 동학은 토착종교. 둘 다 조선 말기에 민중의 공감에 힘입어 널리 전파되었고 극심한 박해와 탄압의 역사가 있었음. 우리가 고등학교 근현대사 수업을 통해 알고 있는 정보는 대부분 여기까지다. 종교는 종교일 뿐 사회변화와 무관하다는 인식은 작년 말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시국선언에 쏟아진 비난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권력이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공격할 수 있는 아주 위험한 말, “중립성을 지켜라!” 그러나 그 종교도 역사의 도도한 흐름에서 이탈하여 오로지 자기 길만을 가지는 않는다. 신분 해방이 대세였지만 권력이 개혁을 시도하지 않을 때, 평등의 욕망을 수용하고 이를 분출할 기회를 제공한 것이 바로 서학이고 동학이었다. 그리고 일제가 권력을 잡고 전제를 선포하자, 토착종교는 대안공동체로서 식민지 권력의 바깥에서 조선인 자치 권력을 생산하고 꾸려나가는 저력을 발휘했다. 서학의 정착 서학은 17세기 초에 <천주실의>와 같은 한역서학서를 통해 학문으로 처음 들어왔다. 사료를 통해 초기의 서학은 하느님을 중국의 ‘상제’로 해석하고 유교윤리를 거부하지 않는 등 동아시아 문화에 맞게 현지화 된 형태였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1790년대에 예수회의 입장이 그 나라 실정을 고려치 않고 원칙대로 선교하자고 바뀌면서 충돌이 시작되었다. 천주교가 박해받은 이유는 유교 의례와 신분질서를 파괴한다는 데에 있었다. 신앙이 가져오는 문화적 변화는 권력뿐만 아니라 당대 사회에서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었다. 조상숭배와 제사를 우상숭배라 배격하고 전혀 지금과 차이 없는 결혼관에 따라 부부간 동정서약을 하는 광경은 어마어마한 문화적 충격이었다. 천주교인이 되는 것 자체가 유교적 통치 체제의 기반을 침식하는 잠재적 저항인 시대였다. 지식인들이 박해 중에 죽어나감에 따라, 그리고 수평적 우애와 보편적 인간관에 힘입어 천주교는 평민화 되어갔다. 박해를 피해 산골로 은신한 신자들이 건설한 교우촌은 신앙공동체이자 생활공동체였다. 늘 떠돌아다니며 빈궁에 허덕였던 이들은 옹기장수가 되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박해를 받아 공동체가 흩어졌을 때 사람을 찾기도 쉽고 옮겨 다니는 상황에서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일각에선 박해 받은 양반들이 상인이 되면서 신분제 해체에도 간접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분석하기도 한다. 동학의 탄생 서학은 조선에 들어와 정착했고, 동학은 토착 종교로서 탄생했다. 1860년 최제우가 동학을 창도하고 2대 교주 최시형이 본격적으로 포교를 시작하고 교세를 확장했다. 유교에서의 천(天)이 왕권의 통치 근원이라면 동학의 천은 모든 사람이 몸에 모신 한울님이다. 각 개인은 한울님을 모신 존재이고 존엄성, 즉 개인으로서의 권리가 있으니 사람을 대하기를 하늘처럼 하라는 뜻이다. 하느님 아래 모두가 평등하다는 서학보다 한발 앞서간 진보 사상인 셈이다. 또한 동학은 생활도덕운동으로서 바르게 살기를 강조하며 민중의 삶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갔다. 동학 공동체 규범은 새로운 삶을 꿈꾸고 변화를 지향하지만 기존 삶의 방식에서는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굉장히 유교적이었던 ‘통유문’과 사람에 대한 존중감의 극치를 보여주는 ‘십무천’을 나란히 놓고 보면 어렵잖게 알 수 있는 사실이다. 동학공동체는 다양한 유형으로 분화되었고 저마다 의미와 역할이 달랐다. 먼저 영적 생활 공동체였던 접주제와 자율적 사회 운동 조직이었던 포제가 있다. 전자는 인맥에 따라 형성되었으며 후자는 인맥보다는 지역적 관련성을 강조하였다. 조직 내에서는 반상, 남녀노소, 양천, 빈부구분이 없었다. 이재민이 발생하면 도왔고 가난한 자에겐 밥을 주었다. “비록 문벌이 천하고 미미하더라도 두령 될 자격이 있으면 두령이 되는 것이다.”(최시형) 집강소는 한때 뉴라이트 학자들에 의해 허구라는 논란에 휘말리기도 한 기관이다. 교과서에서 폐정개혁안을 빼라는 뉴라이트의 요구에 대해 이날 수업에서는 “역사적 맥락 없이 폐정 개혁안 하나만 보고 있다.”라는 비판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도소는 군정과 민정 양 기능을 동시에 수행하는 농민군의 개혁 사령부로서 동학농민전쟁기 등장한 최초의 자율적 민중조직이었다. 종교적 자유를 갈망하는 자각 인민이 각 지역을 연계하는 종교 조직을 가동하여 국가권력에 대항하던 자율적 공간으로서 이후 자발적 결사체가 도시 중심으로 전국적으로 출현하는 계기가 되었다. (주: 2006년, 뉴라이트 인사인 유영익 연세대 석좌교수는 계간 <시대정신> 대담에서 현행 역사교과서의 동학농민운동에 관한 서술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동학농민군이 집강소를 통해 실현하려고 했다는 12조 폐정개혁안이 오지영의 1940년 작 <역사소설 동학사>에만 실려있는 '믿을 수 없는 사료'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동학농민운동사를 전공한 원광대 박맹수 교수는 <역사소설 동학사>는 픽션이 아닌 회고록 성격의 글이고, 동학농민운동 당시 이미 27개 조항의 요구안이 있었고 오지영은 12개조로 그것을 재정리한 것이라며 유 교수의 의견을 정면 반박했다. 12조 토지균분 조항에 오지영 개인의 의견이 반영됐을 수 있으나, "12개조 자체가 허구라는 비판은 무리"라는 반론이다. - 연합뉴스 "동학농민군 '12개조 폐정개혁안'은 허구" 논란..", 2006-05-29) 일제 치하 ‘대안’의 자치공동체: 천도교와 상제교의 경우 1905년 손병희가 창도한 천도교는 1910년 신도 수 100만의 최대 종교로 성장하였다. 탈권력에서 자치권력으로 전환한 자치공동체로서 3.1운동을 주도하고 1920년대 혁신, 즉 민주화운동을 지향했다. 1924년 김연국은 상제교 본부를 중심으로 계룡산 신도안에서 교인들이 자급자족적인 삶이 가능한 탈정치화된 종교 중심지를 건설하였다. 일제 당국은 천도교의 교주는 왕이고 중앙총부는 정부형태를 모방한 유민구락부(遊民俱樂部. 俱樂部: club의 일본식 음역어)라 비난하였다. 지난 시간에 배웠던 형평운동을 비롯한 모든 형태의 사회운동이 용납되지 않던 시대였다. 식민권력이 볼 때는 모두 독립운동이고 저항이기에 극심하게 탄압하였고 천도교와 상제교도 예외는 아니었다. 국가, 자치. 강의가 끝난 후에도 머릿속을 맴도는 두 개의 질문 종교가 근대화되는 과정에서 평등을 내세운 종교가 등장하는 것은 조선에서만 일어난 일이 아니다. 1851년 배상제교가 중국에서 일으킨 태평천국의 난은 동학농민운동과 매우 유사한 모습으로 전개되었고, 유럽에서도 평등주의적 공유제를 실현하려는 천년왕국운동이 종교개혁시대에 일어났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 없다.’는 말이 적어도 역사에서는 진리임을 보여주는 사례가 아닐 수 없다. 수업이 끝나갈 즈음 국가 ‘밖’의 자치를 추구했던 두 사회를 비교분석하는 표가 눈앞에 펼쳐졌다. 선생님은 북미 인디언 사회와 조선의 토착 종교 공동체. 국가와 권력에 대항하였고 무수한 박해에 시달렸던 19세기의 두 사회를 이야기하며 질문 두 개를 우리에게 던지셨고, 그 질문들은 뇌리에 박혀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았다. 국가는 자치를 파괴하는 존재인가? 국가와 사회의 관계는 무엇인가? + 더하기 몇가지 질문들 - 숨을 멎게 하는 흥미진진한 강의였습니다^^ 동학, 최시형 그리고 유토피아 대안 공동체와 관련한 추천도서가 궁금합니다! - 1) 마테오리치가 천주실의를 펴낸 해가 1603년이면 중국 명 왕조대입니다. 명을 숭상하던 조선이 천주교를 승인하지 않은 다른 이유가 있겠지요? 2) Americad의 마야, 잉카 제국 멸망을 보면, Apa'on 성직자들도 현진의 이교도를 사람이 아닌 동물로 취급하는 사례를 보이는데, 조선에 온 서구 신부들은 어떠했나요? - 천도교와 증산교의 관계를 구체적으로 알고 싶습니다. 글 : 자원활동가 박유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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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권의 정치철학 : 자유의 계보학 | [자유의 계보학] 1강, 자유주의 이전의 자유 | 장경환 | 2014.1.24 | ||||
[자유의 계보학] 1강(1/21), 자유주의 이전의 ‘자유’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 한나 아렌트, “자유란 무엇인가?” 강의 소개 보기 ☞ 클릭 우리가 한국 근현대사를 배울 때 가장 오해하고 있는 부분이 민주주의의 발전 과정이다. ‘자유’라는 개념은 나에게 익숙하면서도 익숙하지 않은 개념이었다. 그리고 정치철학 강의 또한 생소한 분야였다. 하지만, 매 강의마다 같은 생각, 막연하지만 배워보겠다는 마음으로 이번 강의도 신청하게 됐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이 강의는 질문을 쌓아주는 강의인 것 같다. 하이데거는 “인간은 어지간하면 생각하려 하지 않는다”고 했고 그래서 “죽음 앞에서만 생각한다”고 했다. 선생님께선 그런 방법이 아니더라도 질문이 쌓이게 되면 생각하기 마련이기에 어느 부분에서도 명확한 답은 내려주지 않지만 생각할 여지를 많이 준다는 점에서 이번 강의는 의미가 있는 것 같다. 강의는 1부와 2부로 나눠져 있었다. 강의를 시작하고 1부 한 시간 동안은 자유주의에 대한 개괄적인 설명과 강의 커리큘럼을 훑어봤고 나머지 한 시간 동안 준비해주신 자료와 함께 아렌트의 이론을 살펴봤다. 자유주의 정치철학의 시작인 ‘존 롤스’에 대한 설명을 시작으로 강의는 시작됐다. 동시에 정치철학이라는 말의 모순을 설명해주셨는데 정치는 행동(act)이고 철학은 사유(thinking), 즉 움직임 + 멈춤이라는 말인데 그 자체로 모순이라고 설명하셨다. 그래서 Action in Thinking, Thinking in Acting, 행동과 이론의 결합이 필요하다고 하셨다. 다음으로 ‘한나 아렌트’라는 이론가(철학하는 사람이라 불리기 싫어했다)에 대한 설명을 해주셨다. 그녀의 살아왔던 삶과 그녀의 저작들에 대한 설명들, 그녀의 이론 등을 설명해주셨다. 그 가운데 학문적 일관성에 집착하지 않았던 아렌트의 모습들이 인상적이었다. 책의 제목과 내용의 불일치함에도 제안 받은 매력적인 책 제목을 용인한 아렌트, 독자로 하여금 빠져들게 했던 글쓰기 방법, 자신을 반대하는 사람까지도 설득시켰던 아렌트의 인생 등을 말씀하시며 정치의 본질은 설득이라고 하셨다. 자기 생각과 조금이라도 다르면 눈에 불을 키고 싸우려 들고 자기 생각이 옳다고 주장만하는 요즘 사람들에게 큰 교훈이 될 내용이었다. 2부에서는 본격적으로 텍스트에 대한 설명을 해주셨다. 먼저 1절에서는 근대 자유주의, ‘정치는 선택이다’라는 정치적 자유에 대한 언급부터 시작한다. 이것은 ‘자유는 정치가 끝난 지점에서 시작된다고 믿는 경향’으로 구체화됐다. 하지만 아렌트가 인식한 정치란 ‘유서 없이 남겨진 유산’과도 같은 것이었다. 정치적 자유라는 이유로 가지는 정치에 대한 무관심에 대해서 아렌트는 ‘자아가 세계를 등지고 숨어 있는 내적 공간’이라고 말한다. 즉, 그냥 도망치는 것일 뿐 그것이 양심의 공간인 ‘마음’이나 사유의 공간인 ‘정신’으로 오해해서는 안된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사회적 분배의 문제는 언급하지 않은 점은 아렌트가 가지는 약점인데 그녀는 ‘인간은 자유롭기 위해서 삶의 필요로부터 자신을 해방시켜야만 한다’고 했다. 즉, 모든 것을 다 지키면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말이다. 그리고 자유는 해방과 함께 자동적으로 따라오는 것이 아닌 함께하는 타자들의 무리와 공적 영역이 필요하다고 했다. 우리가 자유롭기 위해서는 공공영역이 필요하다. 하지만 우리가 다 사적 영역에서 사유하니까 ‘공유된 세계’(the common world)를 상실하게 됐고 자동적으로 자유를 상실하게 됐다. 즉, ‘공유된 세계’를 잃어버린데 근대의 문제가 있다고 했다. 또한 아렌트는 자유의지를 자유로 착각하는데서 문제가 생긴다고 판단해서 자유와 의지를 구별한다. 의지의 본질은 변덕인데 선과 악을 향한 의지를 동시에 갖고 있다고 한다. 한 방향으로 움직이려할 때 반대 방향이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이다. 의지는 끊임없이 하고 싶은데 할 수 없을 때 의지하고 자유는 행위와 동시에 발생한다. 그리고 그리스의 폴리스를 언급하면서 공연예술가와 같이 자유도 타자의 현존을 필요로 하는 특징을 갖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후 왜 의지와 자유를 동일시하게 되었는지와 그리스어와 라틴어의 “to act”라는 뜻의 단어들을 설명해주셨다. 또한 인간이 새로운 시작이기에 새로이 시작할 수 있고 시작이라는 기능을 가진 것이 바로 자유라고 하셨다. 이와 함께 아렌트의 말들을 인용하면서 어둡고 결코 변하지 않을 것 같은 세상이 변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셨다. “인간이 행위하는 존재인 한 그는 시작이다. 그러므로 예견할 수 없고 예측할 수 없는 것을 바라는 일, 정치 영역에서 ‘기적’을 준비하고 기대하는 일은 결코 미신적인 것이 아니며 오히려 현실주의적 태도일 것이다. 저울의 눈금이 재앙 쪽으로 기울면 기울수록 자유 속에 수행된 행위는 더 기적적으로 보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선생님께선 바뀔 것 같지 않은 역사의 체인 속으로 자신을 던질 때 진정한 자유가 시작된다고 하셨다. 점점 더 재앙 쪽으로 기울어지는 대한민국 정치현실이 우리의 자유 속에 수행된 행위를 기적적으로 만들 것이라는 기대감을 가지고 강의를 마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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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를 향한 역사 : 근대로의 희망 여정 | [민주주의를 향한 역사] 1강, 인민 : 신분해방, 여성해방 | 박유하 | 2014.1.16 | ||||
[민주주의를 향한 역사: 근대로의 희망 여정] 1강(1/13), 인민: 신분 해방, 여성 해방 강의 소개 보기 ☞ 클릭 우리가 한국 근현대사를 배울 때 가장 오해하고 있는 부분이 민주주의의 발전 과정이다. 해방 후 1948년 미군정이 신탁통치를 시작하면서 민주주의가 한국 사회에 이식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신분해방의 물결이 일고 만민평등 사회로의 진입이 시작된 시기는 그보다 훨씬 전인 19세기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18세기와 19세기는 세계사적으로 신분 해방의 격변이 혁명으로, 민란과 변란으로 요구되던 시대였고 조선 역시 서구나 중국, 일본 등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1896년에 상하귀천이 없는 만민평등의 주체인 인민을 위한 신문이 창간되었다는 선언은 서재필이 미국의 영향을 받고 쓴 것이 아니라 당대 민중들이 요구하던 내용이었다. 일제에 항거하는 독립운동이 지향하는 체제는 독재의 안티테제인 민주주의일 수밖에 없었다. <민주주의를 향한 역사: 근대로의 희망 여정>는 이처럼 민족주의를 넘어 민주주의 관점에서 역사를 보며 인민, 자치, 개인도덕 등의 근대적 가치가 우리 사회의 특수성과 맞물려 어떻게 나타났는지 돌이켜보고자 하는 강좌이다. 노비 해방의 길 1894년은 가히 노비해방의 해라 부를만하다. 동학농민운동이라는 아래로부터의 개혁과 갑오개혁이라는 위로부터의 개혁이 일어난 해이기 때문이다. 동학농민군의 폐정개혁안은 노비문서를 불태워 노비를 해방하자는 강력한 주장이었다. 농민군 내 천민부대의 공로를 인정받아 지위가 점점 올라갔으며 노비 출신의 지도자가 등장하기도 했다. 갑오개혁에서는 공식적으로 공사노비의 제도를 모두 없애고 인신의 판매를 금하였다. 이후 독립협회가 인권을 강조하며 불법적 노비 매매 등 노비제 잔재를 청산하는 데에 앞장섰다. 양반들의 반발과 저항이 지속되었으나 역사의 흐름을 막을 수는 없었다. 여성 해방의 길 동시대 서양, 중국과 일본과 비교했을 때에는 아쉬운 점이 여럿 보인다. 애초에 여성을 계몽하던 주체는 박영효 등 남성 지식인이었고 여성교육도 사회인이 아닌 가정에서의 여성의 역할을 강조하는 데에 그쳤다. 그리고 여성들이 남성의 영역이었던 곳으로 정치적 진출을 했던 경우가 많은 대신 여성에 의한 여권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나지는 못하였다는 점을 지적하기도 한다. 백정 해방의 길 발단은 백정 자녀의 학교입학 거부 문제였다. 계급타파, 모욕적 칭호 폐지, 교육 권장, 상호 친목 등을 추구하였다. 비슷한 시기에 일어나던 일본 특수부락민 수평운동의 영향을 받았고 그와 비교되기도 한다. 그러나 현재 우리나라에선 백정에 대한 차별대우가 거의 남아있지 않은 반면 일본의 부락민의 차별은 지금도 여전히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는 결정적인 차이점이 있다. 이후 형평사는 계급 해방을 지향하는 사회주의 운동과 연계해 발전해나갔으나 1930년대 들어 극악해진 일제의 탄압 아래 다른 사회운동단체와 함께 해체되고 말았다. 민주주의 관점으로 바라보는 역사: 우리 역사에서 희망을 찾는 올바른 방법 "대한민국의 인민은 남녀, 귀천 및 빈부의 계급이 없고 평등함"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헌장 제3조다. 신분해방운동의 최종적인 지향점을 이토록 간단명료하게 서술하기도 힘들 것이다. 노비와 백정, 여성이 차별과 배제의 대상에서 평등의 주체로 거듭나기까지 100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제도 개혁과 자발적 결사체를 통한 운동이 맞물려 이루어낸 결과였다. 전근대와 근대는 칼로 자르듯 나눌 수 있는 개념이 아니고 민주주의와 평등은 외부에서 주어진다고 해서 이식되는 가치가 아니다. 일제와 독재정권 아래에서 억압당하고 후퇴하였다 해도 민주주의에 대한 민중의 열망에는 깊은 뿌리가 있다. 이제 첫 강을 들었을 뿐이지만 외세 개입이 없었어도 자발적인 근대화가 가능했을 거라는 생각에 확신을 얻을 수 있었다. ‘긍정적 역사관’을 갖는 일은 일제 식민통치와 독재정권을 미화하는 이들에게 동조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믿는다. 이에 대한 근거는 앞으로 이 강좌를 들으며 하나하나 배워가고 싶다. 글 : 자원활동가 박유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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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으로 이해하는 정치사상 - 근대편 | [고전으로 이해하는 정치사상-근대편] 7강, 자본주의 합리성은 진정 합리적인가? - 마르크스 | 기라 | 2014.1.4 | ||||
[고전으로 이해하는 정치사상-근대편] 7강(12/23), 자본주의 합리성은 진정 합리적인가? - 마르크스 강의소개 보기 >> 클릭 1강 후기 보기 >> 클릭 2강 후기 보기 >> 클릭 3강 후기 보기 >> 클릭 4강 후기 보기 >> 클릭 5강 후기 보기 >> 클릭 6강 후기 보기 >> 클릭 보강 후기 보기 >> 클릭 후기가 많이 늦어서 죄송합니다. 종강 11일 만에 올리는 ‘고전으로 이해하는 정치사상- 근대편’의 마지막 강의 후기입니다. 특별히 마지막 강의 자료는 김만권 선생님께서 수강생들의 개인 이메일 계정을 통해 공유해주셨습니다. 제 계정으로는 베버 파트만 메일이 와있긴 하던데 다른 분들은 마르크스 ppt까지 다 받으신 거죠? 오늘은 자세한 내용보다는 수업 진행과 소감 위주로 간략하게 후기를 마무리 짓겠습니다. 강의의 마지막 주인공은 칼 마르크스였습니다. 지난 보강에서 마르크스 공부를 위해 베버를 다루었었고요. 강의 초반부에는 보강을 함께하지 못한 분들을 위해 베버와 마르크스를 다시 한 번 비교해보았습니다. 동시대를 살았던 둘은 근대에 벌어지고 있는 비극의 주범으로 자본주의적 합리성을 지목하고 어떻게 이 운명을 극복할 수 있을까에 대해 고민했지만 제시한 대응 방이 달랐죠. 이에 대해서는 김만권 선생님께서 결론을 내리며 더 명확하게 설명해주시니 저도 후기를 마무리 지으며 자세히 적겠습니다. 선생님께서 계속 베버처럼 멋있게 늙어야 한다고 해서 재밌었어요. 베버는 실제로 젊은 시절의 모습보다 나이 든 모습이 중후하고 근엄해 보이죠. 반면 마르크스는 젊은 시절의 모습이 정말 꽃미남이 따로 없어서 여성 수강생 분들의 마음을 흔들었으나 중년의 모습은...ㅎ 제 생각엔 목적과 수단의 일치를 통해 개개인의 진정한 합리성을 구축할 것을 주장한 베버는 자신의 목적과 수단을 합리화해서 편한 인생을 살아서 외모가 멋있어진 반면, 마르크스는 프롤레타리아적 합리성을 위해 온갖 고생을 해서 외모가 쇠퇴하지 않았을까 해요...ㅎㅎ 물론 농담. ^^; 그러고 나서 김만권 선생님께서 마르크스라는 인물에 대해, 그의 생애에 대해 말씀해주셨어요. 마르크스의 집안과 청년시절의 이야기부터 각국을 떠돌다 런던에 정착하기까지의 파란만장한 마르크스의 삶이 한 편의 영화처럼 펼쳐지는 듯 했습니다. 학자로서 마르크스는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됩니다. 바로 경제학자로서의 마르크스와 철학자로서의 마르크스지요. 많은 사람들이 이 두 마르크스 사이에 모순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룬트 리세>라는 작품을 읽으면 그 오해가 풀린다고 하네요. 우리나라에 번역되어 있는 책은 아닌데 김만권 선생님께서는 수강생들에게 설명해주셨답니다. 요약하자면 ‘인간 소외(마르크스 철학) 때문에 구조 변동(마르크스 정치경제학)이 시작 된다’ 라고 할 수 있겠네요. 그리고 본격적으로 마르크스의 <1884년 경제-철학수고>에 담긴 내용을 배웠습니다. 마르크스는 “국민경제학은 사적소유라는 사실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그렇지만 국민경제학은 우리에게 그 사실을 설명하지 않는다.”며 고전 경제학파를 비판했습니다. 마르크스는 경제모델들의 전제가 되는 사적소유가 애초에 왜 그런 것인지조차 고전 경제학자들은 생각해보지 않았다고 지적합니다. 실제로 극단적인 사적소유까지 인정하는 자본주의는 인간의 노동을 왜곡합니다. 원래 노동은 인간이 자연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가장 창조적일 수 있도록 하는 활동인데 자본주의에서는 노동을 하는 이와 이윤을 얻는 이가 다릅니다. 따라서 노동자는 이윤의 부스러기만 가져가고, 그 부스러기를 두고 또 서로가 경쟁함으로써 더 가난하고 피폐해집니다. 마르크스는 이를 ‘노동 소외’라고 명하고 구체적으로 네 가지 현상을 지적합니다. 후기에서는 생략. ^^ 이런 현실을 타파하려면 자본주의 체제 자체를 붕괴시키고 그에 대항적인 합리성을 지닌 사회체제로 전환해야 합니다. 마르크스는 그 변화의 주체가 자본주의에서 가장 고통 받고 있는 노동자들이며, 이 때 이들이 갖추어야 할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합리성이 프롤레타리아 합리성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는 보편적 역사 발전 법칙에 따라 자본의 축적이 극대화되면 필연적으로 일어나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일어나지 않은 것은 ‘계급의식’의 부재 때문입니다. 프롤레타리아들이 스스로 자본주의의 피해 당사자가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계급의식에 따라 사고하지 못하는 것이죠. 따라서 마르크스는 정말 이 세계가 변화하려면 노동자들이 정치 교육을 통해 프롤레타리아 합리성으로 무장하고 하나의 계급으로 확실히 연대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물론 2014년의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공산주의 실험은 시작도 전에 끝나버렸고, 오늘날 우리는 단순히 계급을 두 부류로 나누기엔 너무도 분화된 사회 속에서 각자의 가치를 가진 채 살아갑니다. 특히 우리나라는 자본가들의 헤게모니에 장악된 채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계급을 배반하는 의식과 행위에 동조하죠. 오늘 강의의 결론은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 베버와 마르크스입니다. 두 사상가 모두 자본주의라는 운명에 저항하고자 했으나 한 사람은 자본주의라는 주어진 운명 내에서 생각했고 한 사람은 그 운명 자체를 깨부수고자 했습니다. 또, 한 사람은 운명에 맞서는 일을 개인의 책임으로 넘겼기 때문에 개개인을 통합할 수 있는 더 강력한 지도자, 카리스마적 지도자를 생각해냈다면 한 사람은 노동자들이 하나의 민주적 집단으로서 프롤레타리아적 합리성을 갖추길 바랐습니다. 이러한 철학의 차이는 실제로 두 인물의 삶에서도 차이를 낳았습니다. 한 사람은 의회정치가로서의 삶을 살았고, 한 사람은 스스로 인터내셔널을 창설했죠. 실제로 마르크스보다 조금 더 늦게 태어나고 죽은 베버는 ‘마르크스가 과학이라는 이름 아래 독단적이며 책임질 수 없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고 마르크스를 비난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후대에 칼 뢰비트는 둘을 비교한 자신의 저서에서 ‘베버는 자신의 신념 때문에 자본주의의 병폐를 진단만 할 수 있었지만, 마르크스는 현실에 존재하는 모순을 우리가 정확하게 파악할 수만 있다면 그것을 전복시킬 수 있다는 신념하에 하나의 해결책을 내놓을 수 있었다’고 평가합니다.
이렇게 마지막 강의 후기까지 쓰고 나니 비로소 종강이 실감납니다. 종강 당일에는 더 이상 강의가 없다는 생각에 슬프더니 해가 바뀌고 후기를 쓰면서는 개운한 기분도 드네요. 이 강의에 자원활동가로 참여할 수 있었던 건 정말 굉장한 행운이었어요. 다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또 뵙겠습니다. ^^ 글: 자원활동가 김슬기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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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으로 이해하는 정치사상 - 근대편 | [고전으로 이해하는 정치사상-근대편] 보강, 자본주의 합리성은 진정 합리적인가? - 베버 | 기라 | 2013.12.2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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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막스 베버 (Max Weber 1864.4.21.-1920.6.14.) 느티나무에서 이례적으로 강의 보충이 있던 날이었습니다. 온갖 연말 모임을 뒤로 한, 또는 게으름을 툭툭 털고 집에서 나선 열정적인 수강생들이 스무 명 가까이 모였어요. 게다가 보강과 불금이 주는 특별한 느낌 덕인지 박주련 선생님께서는 뜨끈뜨근한 붕어빵을 두 봉지 가득, 구문숙 선생님께서는 샛노란 군고구마를 한 아름 간식으로 들고 오셨답니다. 절로 마음이 훈훈해지는 보강이 아닐 수 없지요? 오늘의 사상가는 막스 베버(Max Weber, 1864-1920)입니다. 7강으로 준비되어있는 칼 마르크스를 공부하기 전에 꼭 비교하며 공부해야 할 사상가라서 보강으로라도 베버를 준비하셨다는 김만권 선생님의 말씀. 저는 보강이니 만큼 간단하게 후기를 써야겠다고 생각했으나 그 게 마음처럼 되지 않아서 슬픔. 마르크스와 베버는 공통적으로 둘 다 자본주의가 낳은 근대의 비극을 지적했던 사상가입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적 합리성 안에 모순이 있다면 그 걸 깨고 새로운 합리성을 만들어서 사회를 바꿀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반면, 베버는 자본주의적 합리성을 ‘철장(iron cage)’에 비유하며 결코 우리가 떨쳐낼 수 없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1.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그리고 ‘섹터’ 아마 많은 분들이 이 책에 대해서는 잘 알고 계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김만권 선생님이 강조하신 것은 책의 내용보다 베버가 책을 썼던 이유입니다. 베버의 질문은 ‘왜 유독 서구 사회에서만 근대적 자본주의가 나타났는가?’, ‘어떻게 무한한 이윤추구 행위가 도덕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었는가?’입니다. 정리하자면 왜 굳이 서구에서 끝없는 이윤추구가 인간의 덕인 양 하는 자본주의가 탄생할 수 있었냐는 것이죠. 책의 내용은 간단합니다. 청교도의 구원예정설로 인해 청교도인들은 열심히 일하면서도 검소한 삶을 꾸리며 부를 축적하는 방식으로 자신이 구원받을 수 있는 가능성을 확인하려고 했다는 겁니다. 특히 신을 위해 행하는 지속적인 노동과 부의 추구는 하나의 소명으로서도 받아들여졌습니다. 이렇게 근대적 자본주의는 서구에서 도덕적인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었습니다. 사실 아직까지는 큰 문제가 없습니다. 베버는 이윤추구 행위 자체는 사회적 병폐를 만들어내지도 않고 자본주의의 특징도 아니라고 설명합니다. 사실 이윤추구는 언제나 인간의 역사와 함께했죠. 자본주의가 문제가 되는 건 그 이윤추구가 무절제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절제한 이윤추구는 바로 그 프로테스탄트 윤리 정신이 사라졌기 때문이라고 베버는 지적합니다. 자본주의가 처음 시작되었을 때에는 종교적 공동체인 섹트가 있었습니다. 섹트는 사람들이 모여서 신앙생활을 하는 중심적 터전이었고, 개인은 섹트로써 자신의 신용을 대외적으로 증명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고도화, 개인주의, 도시화 등으로 인해 섹트는 급속도로 없어졌습니다. 자본주의가 자기 스스로를 제어하던 윤리적 터전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종교적 윤리로 발전한 자본주의는 섹트의 쇠퇴와 함께 계산만이 남으며 급속히 타락하게 되었습니다. 베버는 종교윤리가 상실된 자본주의는 끝없는 타락의 길로 빠질 것이며 “영혼 없는 전문가”를 양산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2. 세계의 합리화 베버는 근대 사회가 무엇보다도 탈주술화로 특징지어진다고 말했습니다. 근대의 탈주술화란 근대세계가 이성을 초월하여 중세를 지배하던 신의 원리에서 벗어나 이성의 힘으로 합리화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베버가 볼 때 근대세계의 합리화는 두 가지 차원에서 진행되었는데 첫째가 가치의 영역들이 구분된 것, 둘째가 자본주의의 발전과 맞물려 사회가 관료적·제도적으로 발전한 것입니다. 첫째, 가치 영역의 구분이란 모든 가치를 통합하던 신의 권위가 사라지고 과학, 도덕, 법, 종교, 예술 등이 모두 각자의 영역에서 각자의 가치를 추구하게 된 상태를 말합니다. 베버는 이를 문화적 분화(cultural differentiation)라고 말하며 더 이상 이러한 가치들은 화해 불가능하므로 근대는 가치다원주의에 이를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둘째, 탈주술화가 낳은 합리화는 자본주의의 합리화를 낳았습니다. 우리는 자본주의가 이윤 극대화를 하는 데에 정확한 계산을 적용하면서 조직을 체계화시키고 노동 효율을 극대화시킨 것을 자본주의적 합리성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이익을 극대화하는 데 기여했을 뿐만 아니라, 근대 국가의 행정 조직에도 파고들었고, 이내 사회 곳곳으로 침투하였습니다. 더불어 베버는 이러한 극단적 합리화가 오히려 비인간화를 초래하면서 운명적으로 비합리성을 길러낸다고 말합니다. 이윤추구가 목적이 되고, 이를 위해 이성을 도구화시키는 삶의 방식이 오히려 비합리적이라는 뜻입니다.
3. 목적과 수단이 일치하는 합리성 베버는 이미 사회의 가치가 너무 분화된 버린 탓에 자본주의적 합리성에 물든 근대를 돌이킬 수 없을 것이며 이를 우리의 운명, 즉 빠져나올 수 없는 ‘철장’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고 자유를 박탈당한 채 절망하고 있자는 뜻이 아닙니다. 베버가 볼 때 철장에 갇힌 우리의 현실을 직시하고, 새로운 삶의 방식을 찾는 것이 자유를 되찾는 길이었습니다. 곧, 우리의 자유는 철장을 벗어나려는 비현실적인 소망을 버리고 합리적인 목적과 이에 부합하는 합리적인 수단을 찾을 때 얻어진다는 것이죠. 그러므로 베버는 개인들이 자신이 설정한 목적과 수단에 대해 스스로 책임지는 책임윤리를 말하기도 했던 것입니다. 자본주의가 초래한 비극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개인이 더 강력한 합리성으로 무장하여 자유를 찾으라고 말한 베버. 현실의 문제를 해결할 책임을 구조나 집단이 아닌 개인에게 돌림으로써 많은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베버는 개인이 집단에게 책임을 전가해버릴 위험성을 인지했기 때문에 자유를 쟁취할 합리성의 주체로서 개인을 지목했던 것입니다.
4. 카리스마적 지도자와 바이마르 헌법 제 48조 개인의 주체성을 강조한 것에서도 알 수 있듯 베버는 니체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베버의 카리스마적 지도자 개념도 상당 부분 니체의 위버멘쉬와 맞닿아 있죠, 가치가 분화된 사회에서 각각 다른 개인들을 통합하여 국가가 지향할 점을 결단하고 이끌어갈 수 있는 이가 카리스마적 지도자입니다. 베버는 카리스마적 리더십을 ‘전통주의, 공식적인 법적-합리적 권위와 관료적 규칙들과 단절할 수 있는 상징적 변화 및 제도와 법을 만들 수 있는 초일상적인(extraordinary) 힘’으로 정의합니다. 카리스마적 지도자는 그냥 어디선가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의회 정치라는 시스템에서 길러진다는 것이 베버의 생각입니다. 각각 신념이 다른 수많은 군소정당들을 적절하게 규합하고 그 속에서 자기 권력을 쟁취해내어 지도자가 된 이는 카리스마적 리더십을 갖추고 있을 가능성이 크니까요. 이렇게 보면 베버가 바이마르 헌법 초안 위원회의 고문으로 있으면서 바이마르 헌법 제48조를 매우 강조했던 것도 이해가 됩니다. 이 문제의 조항은 다음과 같습니다. “대통령은 국가의 평화를 위해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할 수 있고 공공의 안전과 질서를 위해 필요한 수단을 동원할 수 있었다.” 독일에서는 히틀러가 이 조항을 악용해 권력을 잡아 논란이 되었고, 우리나라 또한 이 조항을 따와서 문제가 되었었죠. 김만권 선생님께서 영화 ‘변호인’을 적극 추천해주셔서 저도 어젯밤에 보고 왔습니다. 영화가 끝나고도 여운이 한참 동안 가시질 않았었는데 송강호의 외침이 특히 머릿속을 맴도네요. ‘국가란 국민입니다!’ 카리스마적 지도자가 독재자로 변질되었던 역사, 독재자의 딸이 그 자신 역시 독재자가 되어 자기의 입으로 약속했던 국민 행복을 가장 거스르고 있는 오늘을 생각하니 베버의 카리스마적 지도자에 대한 의심이 생깁니다. 카리스마적 지도자가 국가가 국민이라는 것을 잊지 않는다면 괜찮은 문제일까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글: 자원활동가 김슬기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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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으로 이해하는 정치사상 - 근대편 | [고전으로 이해하는 정치사상-근대편] 6강, 근대의 개인은 진정 주체적인가? - 니체 | 기라 | 2013.12.2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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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강, 한 강 지나오다 보니 벌써 여섯 번째 시간이네요. 김만권 선생님의 강의를 들을수록 정치사상을 더 넓고, 깊게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마 어렵고 멀게만 느꼈던 정치철학을 선생님께서 쉽고 재밌게 가르쳐주셔서 흥미가 붙은 거겠죠. 김만권 선생님은 느티나무에 혜성처럼 등장한 인기강사라고 불리시는데, 저도 이제 선생님의 그 타이틀 앞에 겸허히 고개를 숙이고 박수를 보내게 돼요. 매 수업의 첫머리에는 지난 시간의 내용을 잠깐 짚어봅니다. 원래는 수강생들이 써냈던 질문을 선생님께서 답변해주시는 방식으로 진행되는데, 오늘은 근래 큰 화제가 되고 있는 ‘안녕들 하십니까’로 칸트를 생각해보았습니다. 우리들의 안녕을 묻는 대자보 행렬들이 바로 칸트가 말했던 ‘이성의 공적 사용’이죠. 덕분에 최근 들어 깊은 회의감에 빠져 있던 선생님께서는 한 주 동안 즐거우셨다고 합니다.^^
1.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 1844-1900) 선생님께서는 니체를 기분 나쁜 사람이라고 소개하셨습니다. ‘너네 바보지? 생각도 없지? 내가 하는 말도 못 알아듣겠지?’라고 말하는 사람이라고요. 실제로 니체는 천재였습니다. 24살에 이미 교수로 채용되었고, ‘아포리아’라고 하는 새로운 글쓰기의 형태와 ‘계보학’이라는 새로운 연구방법론을 개발하였습니다. 그것도 대충 만든 게 아니어서 ‘아포리아’는 누구든 한 번 쯤은 시도해보고 싶게 하는 매력적인 글쓰기이고, ‘계보학’ 역시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진리에 대해 다시 되돌아볼 수 있게 하는 뛰어난 방법론이라 합니다. 이쯤 되면 우리 같은 범인들은 열등감과 질투가 샘솟지 않나요? 게다가 저는 니체가 교수가 되었다는 바로 그 스물 네 살의 마지막 한 달을 보내고 있거든요. ‘니체는 벌써 이 때 교수를 하고 있었구나... 난 뭐하고 산 걸까...’라는 생각이 절로 들더라고요. 그러나 천재는 불행하다고 하던가요? 니체는 평생을 편두통과 안질환에 시달렸고, 매독에 걸리기도 하고, 심지어 마지막 10년 동안엔 심각한 정신병을 앓았다고 합니다. 게다가 언제나 유명해지기를 바랐으나 딱 죽는 그 날부터 유명해졌다죠. 생전에는 학계로부터 무시당하고, 종교계와 도덕주의자들로부터 혹독한 비판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물론 니체는 이후 철학계와 문학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지금은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철학자로서 평가받고 있습니다.
2. 자신을 망각한 근대의 개인 우리는 원자의, 원자적 혼돈의 시대에 살고 있다. (...) 모든 인간질서의 목적은 인간의 생각을 혼란스럽게 만들어 삶을 깨닫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반시대적 고찰> 계몽, 이성, 자율성으로 상징되는 근대를 살았던 사상가들은 두 가지 전제를 놓고 ‘개인’을 가정합니다. 첫째는 모든 개인이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이 있고, 그 결정에 따라 행위하고 책임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외부의 제약 없이 자유롭다면 개인은 창조적으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해 자아를 실현하고 궁극적으로 사회 발전에 기여할 것이라는 것이고요. 그러나 니체는 그 가정을 반박합니다. 니체는 어릴 적부터 ‘개인이 진정 주체적인가’라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10대에 벌써 자서전을 몇 편씩 썼던 니체는 ‘나는 내가 어떻게 내가 되었나,’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많은 고민하기도 했고요. 그런 니체가 확신을 가진 하나가 있다면 바로 스스로의 힘으로 자기 삶을 결정하는 활력 있는 삶이야말로 진정한 삶이라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니체가 보기에 근대의 인간들은 공동체와의 깊은 관계 속에서 살아가던 고대인들과 달리 파편화되어 있었습니다. 이는 기독교를 필두로 모든 사회적 구조나 제도들이 진리라는 이름 아래 개인들이 진정할 삶을 영위하지 못하도록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절망적인 근대의 상황은 물론, 그 상황으로 인해 자기 자신이 되는 법을 자기가 잊어버렸다는 사실조차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3. 기독교 비판 신은 죽었다. 신은 죽은 채로 남아있다. 그리고 우리가 그를 죽였다. 그러나 그의 그림자는 여전히 어둠 속에 드리워져 있다. -<즐거운 학문> 개신교 목사의 아들이었던 니체는 신의 죽음을 선언하고야 맙니다. 앞서 말했듯이 니체는 기독교가 개인이 진정한 삶을 깨닫는 것을 막고 근대를 혼탁하게 하는 일등공신이라 생각했습니다. 기독교는 육체는 영혼보다, 본능과 열정은 이성과 합리성보다 열등한 것으로 여기도록 가르칩니다. 니체가 볼 때 인간에는 디오니소스적인 면과 플라톤적인 면이 있어 이것이 조화롭게 맞물려 돌아가야 하는데 기독교는 오로지 플라톤적인 면만을 강조하였던 것이죠. 또한 신의 진리라는 이름 아래 기독교는 이 지상의 삶이 피상적이고 가공적이고 환상적이며 오류로 가득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오늘은 찰나일 뿐이고 현실 세계는 너무 사소하니 영원의 세계인 내세를 중시해야 한다고요. 이러한 세계관은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세상을 열등한 것으로 만들어버립니다. 니체는 ‘그리스도교가 인간 스스로 지상의 삶을 가치 없는 것이라고 여기게 하는 노예의 도덕을 만들어내고 있다’고 말합니다. 4. 너 자신이 되어라 비록 우리의 미래가 희망을 위한 어떤 근거를 주지 않는다 할지라도, 우리가 확연히 이곳에 지금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 우리가 우리의 법과 기준을 따라 살아가는 가장 강력한 동기가 되어야 한다. (...) 우리는 우리의 존재에 대하여 우리 자신에게 책임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반시대적 고찰> 근대의 개인들은 기독교와 개인을 기만하는 각종 사회적 장치들에 의해 짜여진 삶을 살고 있습니다. 니체는 지금 당신이 행하고, 생각하고, 바라는 것 모두가 당신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우린 모두 속고 있는 것이고, 세상이 시킨 대로 행하고, 생각하고, 바라고 있을 뿐인 것이지요. 그러니까 정신을 차리고 진정한 나를 찾아 ‘다른 시간이 아닌 오늘을 살라’는 것이 니체의 주장입니다. 오히려 삶의 유한성을 원동력으로 삼고 자신만의 도덕, 자신만의 정의, 자신만의 삶의 기준을 찾을 것을 요구하는 것이죠. '너 자신이 되어라!' 음, 니체가 말하는 삶의 태도가 자기계발서의 한 구절 같은 것은 제 기분 탓인가요...^^; 삶은 위대한 중요성을 가진 드물고 고립된 순간들과 수없이 많은 쉼표(자신의 삶과 사회에 책임 없이 살아가려는 수많은 대중)로 이루어진다. (...) 사랑, 봄, 모든 아름다운 멜로디, 산, 달, 바다, 이 모든 것들이 한 번은 우리에게 말을 건다. 한 번이라도 자신들을 말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면 말이다. 대개의 사람들은 전혀 그런 순간을 갖지 못하는데, 대부분의 이들에게 실제 삶이란 심포니에서 쉼표이고 막간이기 때문이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그러나 니체는 또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러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죠. 오로지 소수의 인간만이 진정한 삶을 깨달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오늘에 책임을 지고, 자신만의 기준으로 삶을 실천하는 극소수의 천재들만이 자기 삶의 주인이 되고, 교향곡에서 의미 있는 소리를 낼 수 있습니다. 저는 극소수의 천재는 아닌 것 같아요, 니체가 저를 봤다면 '야, 이 쉼표야!'라고 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러나 저와 같이 평범한 대중에 속해있다고 생각되시는 분들, 기분 나쁠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결국 니체는 자기 자신만의 기준을 세우라고 했잖아요. 저는 니체에게 이렇게 대답해주겠습니다. '쉼표 없이 교향곡이 가능할 거 같아?'
5. 초인(Übermensch) 차라투스트라의 몰락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 나는 사랑하노라. 몰락하는 자로서가 아니라면 달리 살줄을 모르는 사람들을. 그런 자들이야 말로 저기 저 편으로 건너가고 있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니체는 도덕을 지배자들이 민중, 피지배자를 통제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보고, 여기에 머무르지 않고 인간 본연의 모습을 찾은 이상적인 사람을 '초인'이라고 말했습니다. 초인은 첫째로 기존의 형이상학을 믿지 않으며, 둘째로 인간으로서 삶의 몰락을 두려워하지 않고, 셋째로 ‘너희는 마땅히 해야 한다’와 맞서는 사람입니다. 여기에 맞서기 위해서는 정신이 3단계를 통해 변하는 과정이 필요한데, 니체는 이를 무거운 짐을 지고 사막을 달려야 하는 낙타(1단계), 왜 사막을 힘들게 가야하는지에 의문을 품고 자신의 자유를 쟁취한 사자(2단계), 그리고 마지막으로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는, 순진무구한 놀이하는 어린 아이(3단계)에 비유합니다. 그리고 니체는 이러한 초인의 모습을 차라투스트라를 통해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차라투스트라는 10년 동안 자신의 기준을 찾기 위해 수련한 뒤 마침내 사회의 형이상학을 거부하는 선지자가 되어 ‘나 너희들에게 위버멘쉬를 가르치노라’고 기존의 행복, 이성, 덕, 정의, 연민에 대한 경멸을 연설합니다. 대중들은 차라투스트라를 비웃지만 그는 초인답게, 굴하지 않고 자신을 비웃는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 다시 자신의 깨달음을 이야기합니다.
니체는 세상이 바뀌지 않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대중들이 차라투스트라를 비웃어댔다는 대목에서 알 수 있듯 대중과 그 대중들이 구성하고 있는 세계는 늘 그대로 반복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신이 되는 법을 찾은 소수의 인간에 속한다면, 우리는 '나'의 가치와 실제로 세상이 돌아가는 모습 사이에 늘 존재하는 괴리로부터 좌절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또한 그것을 긍정하고 다시 삶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말한 것도 니체였습니다. 개인이 진정한 주체가 되고자 한다면 엄청난 용기와 도전으로 최선을 다해 오늘을 살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그 도전과 용기를 희생이라 생각하지 말고, 그 자체로서 삶의 의미로 삼으라는 것이 니체의 가르침입니다.
니체 강의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생각에 휩싸여 까만 창밖을 바라보았습니다.
글 : 자원활동가 김슬기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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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으로 이해하는 정치사상 - 근대편 | [고전으로 이해하는 정치사상-근대편] 5강, 계몽이란 무엇인가? 칸트, 푸코 | 이나단 | 2013.12.12 | ||||
[고전으로 이해하는 정치사상-근대편] 5강(12/09) 계몽이란 무엇인가? 칸트, 푸코 강의소개 보기 >> 클릭 1강 후기 보기 >>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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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임마누엘 칸트(1724~1804) 내가 여러 차례 또 오랜 시간 성찰하면 할수록 더욱 새롭고 더욱 높아지는 경탄과 경외심으로 나의 마음을 가득 채우는 두 가지가 있다. 이 두가지란, 내 머리 위에 있는 별이 빛나는 하늘과 내 마음 안에 있는 도덕 법칙이다. - 칸트의 묘비명에 새겨진 말 늦은 시간까지 겨울비가 그치지 않았던 월요일 저녁. 느티나무 강의실은 칸트와 푸코의 사상에 대해 배우고자 하는 학생들로 가득찼습니다. 김만권 선생님은 칸트의 묘비명에 새겨져 있다는 유명한 문장으로 강의를 시작했습니다. 칸트는 모든 도덕을 나의 내부로부터 비롯된다고 보았습니다. 이러한 칸트 도덕의 특이성을 ‘자기입법’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도덕원칙은 자기 자신이 세운다는 것입니다. 칸트의 도덕은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헤겔이 강조하는 인륜과 비슷한) 도덕과 다릅니다. 칸트가 말하는 도덕은 영어로 morals 로 표현되는데, 이는 개인이 세운 도덕원칙에 따른 행위를 의미합니다. 이런 점에서 칸트는 헤겔과 대비하여 형이상학적 도덕주의자로 불리기도 합니다. 칸트의 계몽에 관한 신념은 당대에 대한 비판적 태도로 이해되어 푸코를 비롯한 일부 후기 구조주의 철학과 데리다 등에 스며들었습니다. 프랑스 지식인 전통으로 이어진 것이지요. 또한, 도덕에 대한 그의 신념은 독일의 프랑크푸르트학파와 영미계열의 롤스주의자들이 이어받았다고 합니다. 전해듣기만 해도, 당대 철학에 미친 칸트의 영향력이 얼마나 강력했는지 느껴질 정도입니다.
<임마누엘 칸트 / 출처: wikipedia> 2.계몽이란 무엇인가?(1784년) 계몽주의를 어떤 학문적인 조류보다는 정치적인 철학 사조로 하나의 사회운동이라 이해하는 편이 낫습니다. 이성이 삶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사회운동입니다. ‘계몽이란 무엇인가’를 발간하고 5년이 지나, 프랑스혁명이 일어납니다. 칸트는 자신이 진정으로 믿었던 계몽의 힘이 혁명으로 나타난 것에 만족했을까요? 그 답은 ‘아니다.’입니다. 칸트가 말하는 계몽이란 스스로 타자에게 이성적 숙고와 판단을 대신 부탁하는 미성숙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타자의 도움 없이 자기 자신이 이해한 것들을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것을 미성숙하다고 말합니다. 만약 이런 미성숙의 원인이 이해의 결핍이 아니라, 타자의 안내 없이 그것을 사용할 해결책과 용기의 결핍에서 온 것이라면, 미성숙은 자기책임이라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사람들이 자신의 삶에 미성숙한 채로 남아있는 것은 게으름과 용기부족 때문입니다. 칸트는 이렇게 주문합니다. Sapere aude!! (Dare to be wise!!) 너 스스로 이해한 것을 사용할 수 있는 용기를 가져라 흥미롭게도, 칸트는 미성숙을 해결하기 위한 계몽 - 정신 성숙은 집단적으로 진행될 때 실현가능하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이성의 사적사용과 구별되는 이성의 공적사용을 강조하고 더불어 이를 위한 토대로서 자유의 필요성을 역설합니다. 이성의 공적 사용이란, 한 사람이 지식인으로서 독자 대중 앞에서 이성을 사용하는 경우를 말합니다. 인간이 이성을 위해 이성을 사용할 때, 이런 이성의 사용은 자유롭고 공적인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이성의 보편적이고, 자유로운, 공적 사용이 겹쳐질 때 계몽이 존재합니다. 이 조건은 집단적 계몽에 필요한 조건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반대로 왜 계몽이 집단적으로 오는가를 이해할 수 있는 근거가 됩니다. 이성의 사용은 나를 위해서만 쓰는 것이 아니고, 타인과의 공존을 위해서 사용하는 이성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치 이성의 본질은 도덕적 측면에 있다고 강조하며, 상호이해, 의사소통을 위한 이성을 제시했던 하버마스의 도덕적 이성과 상통하는 듯합니다. 효율을 따지고, 자기 이익을 계산하는 도구적 이성과는 다른 것이지요. ‘과감하게 도덕적이 되어라. 남과 공존할 수 있는 길이고, 공동체 안에서 살 수 있는 길이다 싶으면 과감하게 행동하라.’라고 외치는 칸트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기존의 계몽은 과학화 내지 계산에 치중했다면, 칸트는 도덕에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성의 공적사용은 현실에서 어떻게 드러날까요? 칸트는 [계몽이란 무엇인가?]에서 공적사안에 대해서 지식인들이 글을 쓸 것을 주문합니다. 왜, 글쓰기일까요? 글쓰기가 자신의 직책을 떠나 공공사에 대해 객관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 때문입니다. 또, 글이 공개되면 그 일관성을 지키기 위해서 투쟁하게 된다. 이러한 글쓰기는 논의, 토론의 객관적인 기초가 된다. 따라서, 법과 지도자의 역할로서 이성의 공적사용이 항상 자유롭도록 노력하는 것을 강조합니다. 사상의 자유와 더불어 출판의 자유 모두를 보장해주는 것이지요. 실제로 공중에게 자유가 허용된다면 계몽은 거의 확실하게 이루어질 수 잇다. 거대한 대중의 지도자로 선출된 자들내에서도 그들 전체를 위해 사고하는 몇몇 사람들이 항상 있다. 미성숙의 굴레를 한번에 벗어버린 지도자들은 개인의 가치에 대해 합리적으로 존중하는 정신과 모든 인간이 그들 스스로 생각할 의무에 대해 존중하는 정신을 퍼뜨릴 것이기 때문이다.
3. 칸트의 문제점? 칸트는 어느 시기에 이르면 미성숙에서 벗어난 계몽된 지도자가 나올 것이고, 그 지도자가 합리성이 지배하는 권력을 구축해낼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때까지 지식인들이 해야할 일은 묵묵히 세상의 잘못된 일을 글을 쓰며 비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출판의 자유, 혹은 시민의 자유가 제한될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칸트는 ‘모든 것을 자유롭게 하면, 오히려 떠드는 이가 없다.’ ‘억압되어야 자유의 소중함을 안다’는 식의 논리를 폅니다. 어둠의 시대의 자유는 더 빛난다는 이야기입니다. 인간에게 자유롭게 생각할 수 있는 시민적 자유가 주어졌을 때, 때로는 이런 자유가 인간이 생각하는 일에 장애가 되기도 한다고 봅니다. 이것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시민의 자유가 넘쳐날 때, 오히려 시민은 공공사에 무관심하게 되는 현상이 일어난다는 토크빌의 지적과 유사합니다. 생각하는 일에 대한 억압이 강할수록 인간은 더욱더 생각하려는 의지를 강하게 키웁니다. 칸트의 ‘문제점’이라고까지 말하는데 무리가 있겠습니다만, 칸트는 혁명으로는 계몽을 달성할 수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에 따르면, 공중은 계몽을 아주 서서히 달성할 수 잇을 뿐이고, 혁명은 생각하는 것에 있어 진정한 개혁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즉, 칸트는 계몽이 정신의 점진적 성숙이지 혁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혁명이 할 수 있는 일은 물리적으로 존재하던 억압적인 권력을 대체하는 새로운 편견의 등장이며 새로운 속박일 뿐이라고 지적합니다. 칸트의 입장에서 보자면, 사회의 모든 문제는 대중이 생각하지 않을 때 생겨납니다. 진정으로 사회를 바꾸고자 할 때, 우리가 해야할 첫 번째 일은 대중이 생각하도록 만드는 일이며, 계몽이란 생각하는 대중을 형성하는 일이라는 의미입니다.
4. 푸코가 말하는 계몽이란? 칸트는 계몽을 인간성이 어떠한 권위에도 복종하지 않고 자신의 이성을 사용하게 될 순간으로 묘사합니다. 바로, 비판이 필요한 순간입니다. 무엇을 알 수 있는지 무엇을 행해야 하는지, 무엇을 바라야 하는지를 결정하기 위해서 이성을 정당하게 사용할 수 있는 조건을 정의해주는 것이 비판의 역할이기 때문이다. 정당하지 않은 이성의 사용은 허상을 따라 교조주의와 타율성을 불러일으킵니다. 반면 이성의 자율성이 보장되는 것은 이성의 원리 내에서 이성의 정당한 사용이 분명하게 정의될 때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비판은 계몽 속에서 성숙된 이성의 안내서이다. 뒤집어 말하면, 계몽이란 비판의 시대이다. 이러한 비판은 파괴를 위한 비판이 아니라, 현재 우리를 위해 존재합니다. 푸코에 따르면, 계몽은 어떤 교조적 요소에 충실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시대를 끝없이 비판하려는 철학적 에토스를 지속적으로 재활성화하는 일이 계몽이라고 주장합니다. 계몽의 관심은 어제도 미래도 아닌 우리가 살아가는 오늘 현재에 있다는 것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당대에 대한 비판적 태도를 끊임없이 견지하라는 뜻이겠지요. 나아가, 잘못된 지식이 생산하는 거짓된 권력을 비판하라는 것입니다. 이는 계보학을 통해 ‘유럽중심적인 사고’와 그 배후의 권력구조를 철저히 비판했던 그의 생애 연관이 깊습니다. 푸코는 우리가 미성숙의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한 시대를 살고 있다면, 우리 스스로 살아가고 있는 시대에 대한 비판적 의식을 결여한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미성숙한 시대는 동시대를 향해 질문하지 않는 우리 자신들의 책임입니다. 후기 구조주의자로 평가되는 푸코가 왜 비판을 강조했을까요? 진정한 저항의 가능성은 인간이 현재에 대한 비판적 태도를 견지하지 않는 한 생겨날 수 없다는데 그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무비판적 태도가 구조에 대한 저항의 가능성을 없앨 뿐 아니라 때로는 억압조차 자율성이라 믿게 만든다고 우려했던 것은 아닐까요? 푸코는 우리가 진정 변화를 원한다면,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에 대해 비판적 태도를 갖는 일에서부터 시작하라고 제안하고 있습니다. <질문>
글 : 자원활동가 이난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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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으로 이해하는 정치사상 - 근대편 | [고전으로 이해하는 정치사상-근대편] 4강, 인간 사회는 왜 불평등해졌을까? 루소 | 기라 | 2013.12.5 | ||||
[고전으로 이해하는 정치사상-근대편] 4강(12/02) 인간의 사회는 어떻게 불평등해졌을까? 루소 <사회불평등의 기원> 강의소개 보기 >> 클릭 1강 후기 보기 >>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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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2013년에도 12월이 찾아왔습니다. 12월은 한 해를 마무리 짓는 달인데다가 크리스마스까지 있어서 왠지 설레는 달이죠. 하지만 12월은 눈으로 하얗게 빛나는 만큼이나 추워서, 낮은 곳에 있는 이웃들에게는 더 힘든 때이기도 합니다. 성냥팔이 소녀가 화목한 가정의 푸짐한 저녁 만찬을 부러워하며 길거리에서 죽어갔던 것처럼 겨울의 낭만은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지지 않습니다.
오늘 공부할 루소도 12월의 성냥팔이 소녀들을 보며 많이 안타까워했을 인물입니다. 왜 인간 사회가 이토록 불평등하게 되었는지 학문적으로도 많은 연구를 했고요. 그런 루소의 이론은 결국 프랑스혁명의 도화선이 되기도 했습니다.
1. 장 자크 루소(Jean-jacques Rousseau)
루소는 스위스 제네바에서 가난한 시계 수리공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루소는 자신의 고향인 제네바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저서마다 ‘장 자크 루소, 제네바의 시민(citoyen de Geneve)’이라고 적었다고 합니다. 또 루소의 아버지는 가난했지만 근면하고 검소한 삶을 살았고, 책 읽기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고 해요. 루소 역시 그런 아버지를 존경하며 평생동안 가난에 연연하지 않은 채 학문에 열중하여 위대한 사상가가 될 수 있었죠.
김만권 선생님은 루소를 찌질이라고 지적하셨는데요, 정말로 루소는 자아도취가 대단한 나르시스트였습니다. 자서전을 정말 많이 썼고, 특히 <고백>이라는 저서에서는 ‘난 그 누구와도 다른 삶을 살고 있다’며 자신이 얼마나 특별한 존재인지를 장황하게 설명하죠. 그러나 알고 보면 이 책 내용의 ⅓이 거짓말이라는 거! 루소의 사상이 인간의 감정적인 면을 중시했던 것처럼 루소 그 자신도 참 인간적인 사람이었던 듯 합니다.
2. 자연에서 사회로: 불평등의 시작
자연은 인간을 행복하고 선하게 만들었으나
사회는 인간을 타락시키고 불행하게 만든다.
- <장 자크 심판자로서의 루소: 대화> 중에서
루소는 사회가 형성되기 이전의 자연 상태에서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였다고 말합니다. 루소가 말하는 자연 상태는 인간들이 뿔뿔이 흩어져 독립적으로 살아가는 상태입니다. 자연에서는 사회적 관계라는 것이 고작해야 가족으로 한정되고, 당연히 불평등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때의 인간이 갖는 자연적 감정은 자기 보존과 연민입니다. 특히 연민(compassion)은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으로, 루소는 당대의 많은 철학자들이 이성과 인간, 감성과 동물을 엮어 사고했던 것과는 대조적인 이론을 펼치고 있죠. 다른 동물, 다른 동포들이 고통을 당하는 것을 보지 못하는 연민의 감정은 자연 상태의 자유로운 인간을 선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인간들이 어떤 우연한 이유에 모여 살기 시작하면서 함께 여가를 즐기는 문화가 나타났고, 이것이 바로 불평등의 시작입니다. 참 특이하죠? 어떻게 여가가 불평등을 초래했다는 건지 이해가 되시나요?
루소는 여가활동에서 각자가 남에게 인정과 주목을 받고 싶어 하는 욕망을 갖게 되면서 자기애(amour propre)와 허영(vanity)이 탄생했다고 봅니다. 다른 이들과의 비교를 통해 자신의 존재감을 확립하면서 인간은 남들보다 우월하기를 바라고, 적어도 그런 척이라도 하게 됩니다. 루소는 이러한 욕망이 불평등의 씨앗이라고 말합니다.
3. 예술과 과학에 대한 혐오
방탕한 이여, 당신은 모른다 -<학문예술론>
예술과 과학은 우리에게 인류 문명의 꽃, 인간 진보의 극치로 여겨집니다. 루소가 살던 시대의 계몽주의자들에게도 이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술과 과학이 타락의 정수라고 주장하며 충격을 안겨준 이가 있었으니 바로 루소입니다. 여가에서 발생한 자기애가 불평등의 근원이라고 본 루소가 여가의 산물인 예술과 과학을 증오했던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합니다.
루소는 천문학은 미신에서, 물리학은 과도한 호기심에서, 기하학은 계산에 밝은 인간들의 탐욕에서 온 것이라며 비난합니다. 과학을 사랑하시거나 전공하신 분들은 발끈하실 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참 발칙하면서도 기발한 생각이 아닌가요?
사치와 연관이 있는 예술은 더 싫어했습니다. 나태와 허영심이 사치를 부르고, 사치는 도덕적 타락을 부른다고 생각해서, 사치하게 만드는 예술이란 공동체를 나약하게 만들 뿐이라고 주장했어요. 루소에게 예술은 공동체의 방어에 필요한 용기를 형성하는 데 아무런 기여를 하지 못하는 실속 없는 것일 뿐인 것이죠. 이런 맥락에서 루소는 아테네가 아닌, 강인한 공동체였던 스파르타를 이상적인 도시로 꼽기도 합니다.
이러니 볼테르가 제네바에 대규모 극장을 지었을 때 루소가 엄청난 비난을 퍼붓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개인적으로는 예술도, 과학도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이고 적정한 선에서 누린다면 큰 문제가 발생하지 않다고 생각했었는데 루소의 말을 들으니 과연 사치가 없는 예술이 가능했을까, (자연과 인간에 대한) 연민을 파괴하지 않는 과학이 가능했을까 의문이 듭니다.
4. 재산권: 불평등의 안정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으나 사슬에 묶여있다. -<사회계약론>
인간 능력이 발달하고, 인간 정신이 진보하여 불평등이 강화되었다면 재산권은 불평등을 최종적으로 안정시키는 역할을 했습니다.
인류의 자산은 모두가 공유해야만 할 것이지만 어느 순간 개인의 소유, 즉 재산권이 인정되기 시작했습니다. 남을 지배하는 즐거움을 맛본 사람들은 자신의 힘을 이용하여 폭력과 약탈을 일삼으며 강해지고, 부유해져갔습니다. 그렇게 자기애의 욕망과 재산권 분쟁이 휩쓸고 간 인간 사회에는 불평등 구조가 고착되었고, 이러한 구조가 인간의 악덕을 길러냅니다.
5. 정치공동체: 불평등의 치유
우리로 하여금 공평한 법을 만들게 하라 -<사회계약론>
그렇다면 불평등을 해결할 방법이 있을까요? 불평등한 사회 구조에 대안은 있는 걸까요?
루소는 '일반의지에 입각한 법이 있는 새로운 정치 공동체'를 제시합니다. 여기서 일반의지(general will)란 한 마디로 공동체의 공동선을 향한 의지입니다. 일반의지는 개개 의지들의 총합인 전체 의지와는 다른 것으로 일반의지가 법에 잘 표현될 수만 있다면 그 사회는 어느 정도의 사회·경제적 평등을 보장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입법자가 lawmaker가 아니라 lawgiver여야 한다는 점입니다. lawmaker는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의 법을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사익에 따라 법을 만드는 반면, lawgiver는 일반의지에 따라 법을 만들어주고 나면 그 사회를 떠나야 합니다. 많은 근대 국가들의 법은 전문적 lawmaker가 만든 것이어서 복잡하고, 시민들의 접근이 어려워 문제가 됩니다.
참고로 루소가 <에밀>에서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한 것은 인간 본연의 감성에 충실하란 의미로, 사회계약론과 상호보완적인 개념이라고 합니다. 일반의지에 따른 법이 연민을 품은 개인들을 이끌고 가는 사회가 바로 루소가 생각한 이상사회인가 봅니다.
글 : 자원활동가 김슬기라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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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과 사건으로 보는 한국근현대사Ⅱ | [한국근현대사] 9강, 금정굴과 철원평화전망대 답사 | 김혜수 | 2013.12.3 | ||||
1. 고양시 금정굴 답사 희생자에 대한 묵념으로 시작된 우리의 금정굴 답사. 금을 캐던 곳이 문을 닫아 폐광굴이 되고, 끔찍한 일이 벌어지는 장소로 사용되는 동안 그곳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단촐 하고 허름해 보이는 그 곳은 보이는 것보다 훨씬 크고 무거운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고양금정굴 사건 요약* 고양 금정굴 사건은 6ㆍ26전쟁 직후 북한군을 위해 부역했거나 부역자 가족이라는 이유로 1950년 10월 9일부터 31일까지 경찰이 고양ㆍ파주지역 주민을 일산서구 탄현동 황룡산의 금정굴에서 총살·암매장한 사건이다. 1993년 문제를 제기한 유족회와 시민단체가 1995년 9~10월 사건 현장에서 153구의 유해를 발굴했지만 안치할 곳이 없어 16년 간 서울대병원이 연구실 창고에 보관해 왔다. 서울대 의대의 1차 감정에서 희생자가 최소 153명이고, 약 10%는 여성에 10대의 유골도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현장에서 당시의 이야기를 들으니 불과 몇 십 년 전의 일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충격적이었다. 그들의 이야기는 책이나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과거였던 것이다. 그 시대의 사람들이라고해서 목숨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닌데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 싶은 생각이 계속 맴돌았다. 그리고 또 하나 “금정굴은 복 받은 곳 이예요” 라는 고양 금정굴 유족회 관계자분의 말씀도 기억에 남는데, 얼마나 많은 우리의 과거사가 밝혀지지 않고 보상을 받기가 힘들었으면, 무엇보다 우리의 관심을 받지 못했으면 그렇게 끔찍한 일이 일어난 곳을 복 받았다라고 까지 표현을 했을까 싶어 그저 먹먹하기만 하였다. 그래도 긍정적인 것은 고양시에서 이 사건에 계속적인 관심을 가지고 관련 조례안을 만드는 등의 노력을 하고 있으며, 희생자 유족들이 기금을 조성해 인권평화재단을 발족하려는 준비를 시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앞으로 겪어야할 어려움도 무수하겠지만, 금정굴이 더 이상 뒷산에 작고 허름한 굴이 아니라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알아주는 것만으로도 큰 위로가 되지 않을까. 2. 점심식사, 동두천 기지촌
금정굴에서의 일정이 길어져 조금 늦게 동두천 기치촌을 향하였다. 그 곳에서 아주 맛있는 부대찌개를 먹고 철원으로 Go Go~!!! 시간이 부족하여 거리를 돌아 볼 수는 없었지만, 버스 안에서도 이신철 교수님의 깨알 같은 설명은 계속되었다. 많은 이야기를 해주셨지만, 너무 강렬하여 잊을 수 없는 것은 바로, ‘윤금이 사건’ 휴, 인터넷으로 뒤늦게 찾아본 그 이야기는 정말, 표현하는 것을 피하고 싶을 만큼 끔찍하고 아픈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가 있는 곳이 바로 그곳이었다.
3. 철원 평화전망대
<군인 '동생'이 직접 버스에 타서 인원수를 확인하고 있는 모습> 강원도 철원군 중부전선의 비무장지대와 북한지역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곳, ‘철원 평화전망대’ 그 곳을 오르는 동안 많은 철새들을 보며 시원한 바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그곳은 여유를 즐길 수 있는 마냥 자유로운 곳이 아니기에 참 대조적이었던 것 같다. 나는 이곳을 고등학교 때에도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마냥 신나서 소풍처럼 왔다만 간 기억도 새록새록 떠올랐다. 똑같은 장소가 그저 ‘소풍갔던 곳’으로 기억되기도 하고 ‘우리의 역사가 고스란히 묻혀있는 곳 그리고 계속 되고 있는 곳’으로 기억될 수도 있는 것은 역사에 대한 관심과 감수성의 차이인 것 같다. ‘역사감수성’을 갖게 해준 이번 수업이 답사가 정말 좋았다!
4. 월정역
*월정역 소개* 서울에서 원산까지 이어졌던 경원선의 간이역이었다. 신탄리역 다음 역으로, 남방한계선에 근접한 최북단에 위치해 있다. 현재는 폐역 상태다. 6·25전쟁 당시 월정리역에서 마지막 기적을 울렸던 객차잔해 일부분과 유엔군의 폭격으로 부숴진 인민군의 화물열차 골격이 보존되어 있다. 작고 아담한 월정역, 월정역에서 북쪽을 바라보면 농지가 보이는데 그곳은 정해진 시간에만 들어가서 농사를 지을 수 있다고 한다. 담벽(?)이 사라지고 농지를 마음껏 이용하고 월정역에 다시 기차가 달리는 날이 올 수 있을까? ‘철마는 달리고 싶다’라는 팻말이 대답을 해주는 것 같다. 5. 노동당사, 도피안사, 백마고지 *노동당사 소개* 1946년 초 북한 땅이었을 때 철원군 조선노동당에서 시공하여 그해 말에 완공한 러시아식 건물이다(그래서 벽이 굉장히 두껍게 지어졌다고). 6·25전쟁의 참화로 검게 그을린 3층 건물의 앞뒤엔 포탄과 총탄 자국이 촘촘하다. 8·15광복 후부터 6·25전쟁이 일어나기까지 공산치하에서 반공활동을 하던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잡혀 와서 고문과 무자비한 학살을 당하였다. 당사 뒤편에 설치된 방공호에서 사람의 유골과 실탄, 철사줄 등이 발견된 것으로 미루어 그때의 참상을 알 수 있다. 금정굴에서는 북한을 위해 부역했다고 죽이고, 노동당사에서는 반공활동 하던 사람들이 학살당하고... 정말 힘들어서 어떻게 살았는지 모르겠다. ‘산’것이 아니라, ‘견뎌’온 것은 아니었을까.
서태지와 아이들이 발해를 꿈꾸며 뮤직비디오를 찍었던 곳에서 함께 한 친구들이 공연을 보여주었다. 서태지 시대가 아니어서(?) 그런지 친구들의 공연이 더 즐겁고 예뻤던 것 같다. 이렇게 후손들이 그들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지금 해결할 수 있는 문제를 처리하고(금정굴유가족 분께서 이 일은 우리 대에서 끝내야한다고 했던 것과 같이), 문제가 만들어지지 않도록 지금 할 수 있는 역할을 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6. 저녁식사, 고석정 저녁의 고석정 모습을 살펴본 뒤 순두부찌개를 먹고, (배부르다고 하시면서도 다들 잘 드셨던...!ㅎㅎㅎ) 우리의 답사는... 끝나지 않았다. 버스에서 마이크를 전달 전달하며 서로의 소감을 나누고서야 그 어떤 답사보다 뿌듯한 일정을 마칠 수 있었다. 이신철교수님, 전보임간사님, 함께했던 모든 분들! 덕분에 아주 재미있게 유익하게 잘~다녀왔습니다.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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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시민정치학교Ⅱ – 민주주의의 새로운 실험, 생활정치 | [나의 시민 정치학교Ⅱ] 7강, 이제 지방선거 준비해볼까 - 워크숍 | 장경환 | 2013.12.2 | ||||
[나의 시민정치학교Ⅱ] 7강(11/26), 이제 지방선거 준비해볼까 - 워크숍 강의소개 보기 >> 클릭 1강 후기 보기 >> 클릭 2강 후기 보기 >> 클릭 3강 후기 보기 >> 클릭 4강 후기 보기 >> 클릭 5강 후기 보기 >> 클릭 6강 후기 보기 >> 클릭 처음 10월에 강의 시작할 때가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마지막 강의를 듣게 됐다. 매주 화요일 저녁으로 먹던 김밥도, 뻥튀기 접시도, 이젠 없을 거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허전하기도 했고 아직 생활정치라는 것에 대해 뭔가 그림을 잡은 것도 아닌데 마지막 강의를 들으려니 아쉽기도 했다. 이런 아쉽고 허전한 마음을 다잡고 강의에 집중했다. 이번 마지막 강의는 첫 번째 강의에서 생활정치에 대한 개괄적인 강의를 해주신 하승우 선생님이 마무리 강의를 해주셨다. 강의 시작부터 모두에게 질문을 던지셨다. 생활정치란 어떤 것인지 알 것 같나요? 강의를 통해 배운 점은 뭔가요? 답은 이미 지난 6번의 강의 속에 있었다. “개인적 의제들을 같이 해결하는 것이 바로 정치이다“ 이 강좌를 통해 배운 가장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 주민들은 소박한 것을 바란다. 하지만 사실상 선거에 들어가면 예산이 많이 들어가는 하드웨어적인 것들이 이슈다 된다. 이런 시대에서 주민들이 바라는 소박한 필요들을 뭉쳐서 이슈로 만들어 내는 것이 생활정치라는 생각도 했다. 선생님께선 우리들이 누군가 의제를 주면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우리가 주체가 되어서 의제를 정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셨다. 최근에 있었던 녹생당의 정책콘서트를 예로 들어주셨다. 녹색도시, 일자리, 노동 등 각 분야에서 마인드 맵핑을 통해 의제들을 떠올리는 것이 의미있다고 생각했다. 이 설명들을 통해 ‘내가 뭘 원하는가?’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을 해봐야겠다는 과제를 받은 것 같았다. 하지만 시민이 주체가 돼서 의제를 만드는 게 끝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셨다. 생활의 의제들을 통해 만든 좋은 공약들도 막상 선거가 끝나면 외면당하는 게 현실이기 때문이다. 지난 대선 당시 새누리당의 피켓들을 보면 화려함의 극치였다. ‘등록금 부담 절반으로!’, ‘고교 무상의무교육 시대!’, ‘취업 스팩 타파!’, ‘어르신 임플란트도 건강보험으로!’ 지금도 이런 화려한 것들이 현재는 정부가 앞장서서 막아서는 아이러니한 현실이지 않은가. 기업이라면 상품을 환불하겠지만, 정치에선 현실적으로 환불이 안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의제만 만들고 끝나는 게 아니라 현실적으로 어떻게 의제들을 실현시킬 수 있는지에 대한 생각을 더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씀하셨다. 현재 미국에서 정치인의 공약을 추적하는 ‘폴리티 팩트’라는 사이트와 ‘투명사회를 위한 정보공개센터’라는 사이트를 소개해주셨다. 강의는 30분정도 진행되었다. 나머지 시간은 조별로 생활의제를 정하는 시간을 가졌다. 조별로 전지에 생활의제등을 정리하고 발표했다. 마을, 보육, 골목상권, 청년모임 등 다양한 분야의 의제들을 정리했다. 그리고 이런 의제들을 어떻게 실현시킬지에 대해서 토의했고 마무리로 하승우 선생님께서 이런 의제들에 대한 현실에 대한 설명을 더해주셨다. 오늘의 강의는 정말 뚜렷한 결론을 가졌다. “의제도 중요하지만 의제를 실현할 방법을 생각해야 한다. 원하는 걸 얘기하는 게 아니라 내가 그 과정의 주체가 되는 것이 중요하다.” 강의는 여기서 끝났고 수강생 각자의 소감을 나누고 시민정치학교는 종강을 했다. 나는 개인적으로 아무 것도 모른 채 막연하게 배우고 싶은 마음에 강의를 듣게 됐는데 한 주도 빠지지 않고 나온 7주의 시간동안 생활정치의 힘, 공동체, 마을, 예산 등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었고 현재 현실에서 많이 적용해보기도 했기에 나에겐 더 유익한 시간이었던 것 같다. <참여자들의 강의 소감>
글 : 자원활동가 장경환 / 편집 : 아카데미느티나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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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과 사건으로 보는 한국근현대사Ⅱ | [한국근현대사] 8강, 재벌의 탄생과 근로기준법 : 전태일과 정주영, 이병철 | 김혜수 | 2013.11.30 | ||||
1. 1960년대의 이해 - 1961 학생회담 등 통일운동 고양 1963.1.3. 민정당 결성(민주당 신·구파) 1964 제 1차 인혁당 사건 1965.6.22. 한일협정 1964.9. 베트남 파병 ◆ 베트남전과 한국군 파병 1954.1.28. 이승만, 주한 유엔군 사령관 존 헐에게 한국군 1개 사단 파병 제안 1956.10.23. 남베트남 국민투표실시, 베트남공화국 수립, 남베트남 무장 봉기(베트콩)와 북의 지원 1964.5.9. 미국, 25개국에 남베트남 지원 호소 서한 발송 1964.9.11. 1차 파병 1965.3.16. 2차 파병, 건설지원단(비둘기부대) 1965.10.9. 3차 파병, 전투병력 파병 시작 1966.2 <미국대사 브라운 국무부에 서한> ‘…유일한 참전국인 우리 미국보다 인구 비율로 따지면 2~3배 더 많은 것이다. ’ 1966.2.23. 한미합의의사록 서명, 브라운 각서 발송 군사부문 지원 : 한국국 현대화를 위한 장비 제공, 파병 장비와 일체의 경비 부담, 베트남 주둔 한국군 지원을 위해 C-54 수송기 넉 대 한국 공군에 제공 경제부문 지원 : 미군과 남베트남군의 물자 중 결정된 품목과 기타 소요되는 품목을 최대한 한국에서 구매, 한국 기업의 남베트남 진출 기회와 용역사업에 참가할 기회를 제공, 한국의 경제 개발을 위한 차관 추가 제공-> 경제발전 1966.4.11. 백마부대 부산 출발 1968.2.12. 청룡 1중대, 퐁니·퐁넛 마을 민간인 70여명 학살 1968.3.16. 미라이 학살 -> 여기서 한국정부의 이중성을 보여주고 있다. 1971. 라오스 영토 내 호치민 통로 봉쇄 작전 개시, 라오스 중립 선언했지만 호치민 통로 묵인, 남베트남군 작전 실패. 미군 비밀 폭격 1973.3.23. 한국군 미군과 함께 철수 1975.4.30. 사이공 함락. 남베트남 패망 파병누계 : 약 8년 간 31만 2853명 참전 전과 : 사살 4만 1401명, 포로 4633명, 귀순 2482명 피해 : 4960명, 부상 1만 962명 <무엇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자유우방 수호(도미노 방지) 경제성장 동력(미국 한국군 병사에게 2억3천6백만 달러 지불, 군수물자 판매 등 GDP 5배 성장) 군사적 이익 : 한미 동맹관계 강화, 한국군 현대화 베트남 민간인 학살 2. 위와 같은 시대상황을 바탕으로 지금의 ‘재벌’이 ‘정당한 방식’으로 성장 할 수 없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정경유착’과 ‘노동착취’ 그 양 끝에 있던 사람이 전태일과 정주영, 이병철 이었던 것이다. 당시 경제성장 주요/동력 이슈는 원조경제, 경제개발계획, 한일협정, 베트남전쟁, 인력수출, 전태일, 경부고속도로(수출주도형 경제성장)로 설명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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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으로 이해하는 정치사상 - 근대편 | [고전으로 이해하는 정치사상-근대편] 3강, 어떻게 재산의 사적 소유는 정당화됐을까? 로크의 <통치론> | 이나단 | 2013.11.29 | ||||
[고전으로 이해하는 정치사상-근대편] 3강(11/25) 어떻게 재산의 사적 소유는 정당화됐을까? 로크의 <통치론> 강의소개 보기 >> 클릭 1강 후기 보기 >>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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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아카데미느티나무 수강생 여러분~ 고전으로 이해하는 근대정치사상 세 번째 강의 후기를 맡은 이나단입니다. 김만권 선생님께서는 로크의 저작 <통치론>을 설명해주시면서 강의를 열었습니다. <통치론>에는 시민 저항권과 더불어 또 하나의 과격한 사상을 담겨 있다고 합니다. 바로 국왕살해(Regicide)에 관한 것입니다. 이는 법위에 존재하는 전제군주를 살해하라는 메시지입니다. 로크는 법의 테두리 밖에 있는 자(=왕)를 죽이는 것은 불법이 아니라는 논리로 국왕살해를 정당화하고 있습니다. 입헌군주국인 영국에서 국왕살해를 내세우는 <통치론>이 당시 얼마나 파격적이었는지를 가늠해볼 수 있겠지요? 로크는 영국 내전과 네덜란드 망명생활 등 여러 우여곡절을 겪은 후, 1689년 <통치론>을 정식으로 발간하였습니다.
▲ 존 로크 (John Locke, 1632~ 1704)
1. 로크가 말한 '신뢰' 김만권 선생님은 근대정치학의 기반을 두 가지로 대별하였습니다. 하나는 로크의 전통을 따른 ‘신뢰(trust)’이고, 다른 하나는 홉스의 전통 아래에 있는 ‘두려움(fear)’입니다. 홉스는 자연상태에서 정치사회로 넘어올 때, 평판(이성)에 기초한 신약과 폭력이 요구된다고 주장했습니다. 반면, 로크는 자연 상태에서 사람들이 모두 합리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서로를 신뢰한다고 가정합니다. 로크에 따르면, 폭력없이도 사회를 성립할 수 있게 됩니다. 게임이론의 대표적인 사례, ‘죄수의 딜레마’ 상황도 서로를 신뢰할 때 상호이득이 되는 결과를 얻습니다. 어떤 학자는 서로 신뢰하는 사람들의 모임을 사회적 자본이라고 표현했다고 합니다. 신뢰를 기반으로 한 시민문화가 더 나은 사회, 정치, 문화를 만들어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인간과 인간사이의 신뢰를 가장 중요한 기초로 놓은 최초의 정치학자는 바로 로크이다. 사회적 자본으로서 ‘신뢰’를 강조하는 것도 로크의 흐름에서 등장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함께 감상한 마종기님의 ‘우화의 강’ 한 구절이 떠오릅니다. ‘큰 강의 시작과 끝은 어차피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물결을 항상 맑게 고집하는 사람과 친하고 싶다...
2. '사유재산'을 강조한 로크 로크 사상 중 ‘소유(所有)’ 또는 ‘사유(私有)’에 대해 집중하는 본 강의가 최근의 경향을 따른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 인간이 어떻게 소유하게 되었는가, 우리가 무엇을 사유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파고들다보면 ‘우리가 어떻게 이 시스템을 구축하게 되었는가’ 라는 또 다른 질문과 만나게 됩니다. 애초에 공유되던 자연 상태의 여러 자원을 어떻게 사유할 수 있게 되었는지를 파악해보고는 것이 근대국가의 성립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겠지요? 소유에 관한 이론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그것은 로크에서 출발하여 아담스미스와 마르크스에 의해 일반화된 노동가치설과 집단의지동의설(사회동의설)입니다. 먼저, 집단의지동의설에 의하면, 나의 소유와 타인의 소유가 정당하게 양립될 수 있을 때에 사적 소유가 가능하다고 보는 입장입니다. 타자들이 집단의 의지로 나의 소유를 인정해주는 것이지요. 나 자신도 집단의 일원으로서 타인의 소유를 인정해줍니다. 타인의 인정이 소유에 있어 핵심입니다. ‘사적 소유는 한 집단의 정치적 승인을 요구하는 사항’이라는 칸트의 입장과 일맥상통합니다.
한편, 로크는 사유재산의 근거로 ‘노동’을 지목했습니다. 노동이야말로 사유물과 공유물 간의 구별을 낳는다는 것이지요. 인간의 몸에서 나온 노동, 그 손에서 나온 작업은 당연히 그 자신만의 것이라 할 수 있다는 논리입니다. 이에 따르면, 자연의 대상물에 노동을 가한 주체인 내가 그 노동의 결과물도 소유할 수 있습니다. 즉, 소유권은 나의 노동으로부터 나오는 것이지, 사회적 인정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정치 사회가 존재하기 전부터 가질 수 있는 권리, 전정치적(前-, pre-political) 권리가 사적 소유권이라는 것입니다.
3. 소유의 단서 두 가지 인간이 공동체를 결성하고 스스로 정부의 지배를 받아들이는 가장 중요한 목적은 그들의 재산을 보존하기 위함이다. 이렇듯 로크는 정치사회 성립의 이유 중 가장 주요한 것으로 재산의 보호를 꼽습니다. 노동가치설에 따라 노동이 순수하게 내 몸에서 나오고, 이를 통해 재산이 형성되므로 각자의 몸이 결국 재산입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신체적 자유를 침해받지 않는 것이 곧 사유재산을 보장받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재산이 자신의 몸이나 다름없다는 점에서 재산권은 정치사회가 보호해야 할 중요한 개인의 권리가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크는 ‘사적소유’의 권리에 두 가지 단서를 제시합니다. 먼저, 다른 사람들이 소유하기에 충분한 공유물이 남아있는 한, 노동한 자가 그의 노동이 부여된 것에 대한 권리를 갖는다는 것입니다. 유럽인들이 아메리카 대륙에 진출하던 당시, 로크는 신이 무한한 토지를 인간에게 주었다고 생각했습니다. 타인들이 소유하기에 충분한 양의 토지(공유물)이 있기에 무한한 사적 소유가 가능하리라 믿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천연자원이 유한하다는 사실을 누구나 알고있는 현재 상황에서 이러한 단서조항은 혁명적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소유할 수 있는 충분한 자원이 남아있지 않는다면, 사유재산권은 조건부 권리라는 의미입니다. 둘째로, 로크가 사적소유를 제한했다고 보는 또 하나의 근거는 ‘부패의 단서’입니다. 고기나 곡물을 창고에 쌓아두고 오랜 시간이 지나면 썩습니다. 이와 달리, 화폐는 장기적으로 혹은 반영구적으로 보관할 수 있습니다. 로크는 토지에서 생겨난 생산물을 영구적으로 보관할 수 없다면 인간들이 토지개간을 적극적으로 할 유인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땅에서 얻은 이익을부패하지 않는 형태로 보관할 수 있을 때, 토지생산성이 향상된다고 보았습니다. 저는 이런 상상을 해보았습니다. 우리나라 최고의 갑부가, 그가 가진 모든 재산을 쌀가마니로 가지고 있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창고의 규모는 어떨지... 쌀은 얼마나 오래 보관할지... ‘화폐가 생겨나서 어마어마한 것들을 감추어주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4. 재산과 정치참여 공식석상에서 쓰이는 ‘신사, 숙녀 여러분~ Ladies and Gentlemen.’이라는 표현은 일정 수준의 재산과 이에 따른 제반 권리를 가진 이들을 지칭하는 것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로크가 개인의 사적소유권을 정당화시키려한 목적은 어느 정도 자신의 재산을 가진 인민의 정치참여에 정당성을 부여하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로크가 주장한 사유재산권은 정치적으로 자유로운 인간이 가져야 할 필수조건이었고, 이 때문에 어떤 외부의 침해나 간섭으로부터 사유재산을 보호해야 한다고 강조한 것입니다. 그러나 로크 이후로, 그가 강조한 재산권의 의미가 퇴색되었습니다. 정치적 의사표현의 목적이 아니라, 경제적 권리로서 재산권이 지나치게 중시되었습니다. 또, 근대이후의 자유주의 흐름속에서 정치적 무관심마저도 개인의 선택으로 존중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습니다. 로크를 위시한 근대 초기의 학자들이 왜 그리도 재산권 보호를 강조했는지에 대한 이유를 현대사회에서 잊은 것이지요. 개인의 정치참여라는 역할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사유재산의 보호라는 일차적인 권리에만 집중하는 듯합니다. 마지막으로 김만권 선생님은 복지와 경제민주화에 대한 이야기를 간단히 나눠주었습니다. 동시에 소유는 단순히 무엇을 가지냐의 문제를 넘어서 우리를 얼마나 더 자유롭고 평등한 존재로 만드느냐의 문제라는 말씀을 전해주셨습니다. 소유, 재산권을 경제적인 관점이 아니라 정치적인 관점으로 바라보자는 것입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정치참여의 밑바탕이 되는 소유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배우는 시간이었습니다. (끝)
<마음에 와 닿았던 글>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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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과 사건으로 보는 한국근현대사Ⅱ | [한국근현대사] 7강, 대통령과 재야의 대통령 : 박정희와 장준하 | 김혜수 | 2013.11.2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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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과 재야의 대통령 : 박정희와 장준하
최근 다시금 주목 받고 있는(?) 박정희와 그와 반대편에 서있었던 장준하에 대한 연혁을 살펴보며, 그들의 삶과 그 시대에 대해 배울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
1. 박정희 '박정희'에 대해서는 이미 많이 알고 계실텐데요~ 3개국에서 군사훈련을 받았던것, 쿠데타를 모의하던 과정 등 제가 새롭게 알게된 내용위주로 간단하게 정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문경/만주군관학교 -> 일본육사 3학년에 편입 -> 만주군 보병에 소위로 부임 1946 5.6 조선경비사관학교 제 2기생 재학 중 “10월 인민 항쟁” 발발 남노당 이재복이 박정희를 주목, 군사훈련경험/인맥/경상도출신/능력이 돋보였기 때문. 1949 박정희 무기징역(국방경비법 위반)-> 현역복귀, 육군8기생을 만나게 됨. 1952.5.29. 장면, 이종찬 -> 미대사관에 쿠테타 계획을 타진 1959.2 송요찬 – 부정선거를 명령 1960 박정희 – 쿠데타를 도모했으나 4.19로 인해 무산 1961 4.15 해병대 단독 쿠데타 모의 이후 몇 차례 준비했고 결국 5.16일에 실행하게 된다. - 박정희의 연혁을 통해 살펴 본 내용 외의 것 (전 왜 이런 내용이 더 기억에 남을까요....?) 정인숙 사건, 한일협정, 베트남 전쟁, 문익환
2. 장준하
- 독립운동가, 언론인, 정치가 - <사상계>를 출판 * 이는 당시 자유당 정권을 신랄하게 규탄하며 4·19 혁명의 단초가 되었으며, 대학생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통일운동의 중심세력=학생)
중요 연혁 (+ 수업시간에 다뤘던) 1944 학병 자원입대 1945 광복군에 편입 1963 이후 야당의 길을 걷게 됨 -> 제 7대 신민당 소속 국회의원당선 제 3공화국 당시, 한일회담 반대와 박정희 비판 내용(출처 : 위키백과) 대선에서 장준하는 일본 제국주의 군대에 있었던 사람이 대통령이 되는 것을 참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장준하는 박정희 정권의 한일 협정을 일본 제국주의 군인 출신이 침략자이며 전범자 집단인 일본 자민당과 매국협상을 하는 것으로 판단하고, 1964년 4월호를 긴급 임시증간호로 내놓았다. '한일회담의 제문제'는 한일회담을 반대하는 이 나라 지식층의 의사를 비판적으로 담아낸 한일회담 반대진영의 교과서가 됐다. 이어서 1965년 7월에 '신(新) 을사조약의 해부' 를 또다시 긴급 증간호로 발행해 한일회담 반대진영의 이론적 교두보가 됐다. 1966년 사카린 밀수 사건이 일어났다. 이 과정에서 집권층과 삼성의 이병철 사이에 유착이 있었다는 정보가 새어 나왔고, 야당과 대학생들이 전국적인 규탄대회를 열었다. 1966년 10월26일 민중당 주최 '특정재벌 밀수진상 폭로 및 규탄 국민대회' 에 연사로 참석했다. 장준하는 규탄대회에서 재벌총수와 정부 고위층 사이에 오간 내용을 폭로하면서 “우리나라 밀수 왕초는 바로 박정희”라고 비판하였다. 이어 "존슨 대통령이 방한하는 것은 박정희 씨가 잘났다고 보러 오는 것이 아니라 한국청년의 피가 더 필요해서 오는 것" 이라는 발언도 주목을 받게 됐다. 장준하는 박정희와 재벌들을 신랄하게 비판하다가, 박정희 밀수왕초 발언 등이 문제되어 구속, 한 달간 수감됐다가 1966년 12월 보석으로 석방되었다. 그 뒤 1967년 2월의 공판에서는 징역 6월을 선고받았다.
- 박정희의 반대편에 서있던 인물에 대한 탐구와 함께 더 생각해 볼 문제 1965 한일협정 이후 동아시아에 대한 개념 : 한·중·일+미국 중심으로 바뀌게 되었고 북한은 제외된 점
이상으로 후기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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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시민정치학교Ⅱ – 민주주의의 새로운 실험, 생활정치 | [나의 시민 정치학교Ⅱ] 6강, 나는 마을에서 논다 –마을공동체와 협동조합의 가능성 | 미요이 | 2013.11.23 | ||||
[나의 시민정치학교Ⅱ] 6강(11/19), 나는 마을에서 논다 - 마을공동체와 협동조합의 가능성 강의소개 보기 >> 클릭 1강 후기 보기 >> 클릭 2강 후기 보기 >> 클릭 3강 후기 보기 >> 클릭 4강 후기 보기 >> 클릭 5강 후기 보기 >> 클릭 1. 성미산마을에 대한 소개 성미산은 서울시 마포구에 위치한 작은 야산이다. 성미산은 해발 70미터밖에 되지 않는 비교적 작은 산으로, 마을 어디에서 출발하든 어른 걸음으로 5분, 아이 걸음으로 십여 분이면 오를 수 있는 곳이다. 이 성미산 자락에는 성산동, 망원동, 합정동, 연남동, 그리고 서교동이라는 행정구역상의 동네들이 있다. 우리가 ‘성미산 마을’이라고 부르는 공간은 이 성미산 자락에 위치해 있다.
하지만 ‘마을’이라는 단어는 현대 도시인들에게 낯설다. 우리의 기억에 마을 하면 떠오르는 것들은 한적한 농촌이나 영화 속에만 머무르는 골목길 사람들뿐이 없기 때문이다. 마하트마 간디는 그의 저서 <마을이 세계를 구한다>에서 이런 말을 했다. “현재 세계에는 두 부류의 사상이 있다. 하나는 세계를 도시로 나누려는 것이고, 하나는 마을들로 나누려는 것이다. 마을문명과 도시문명은 전적으로 다르다. 하나는 기계와 산업화에 의존하고, 다른 하나는 수공업에 의존한다. 우리는 후자를 택하고자 한다.” 그에 따르면 도시와 마을은 서로 반대되는 개념이기 때문에 공존할 수 없다. 그리고 지난 역사 속에서 한국의 서울은 자본을 가진 사람들의 이해관계에 의해 철저하게 도시화되어왔다. 90년대를 전후해서 도시에서 태어난 학생들이 마을을 기억할 수 없는 이유이다. 성미산마을은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공동체이다. 사람들은 아이들을 행복하게 키우고 싶었고, ‘이웃사촌’이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을 만큼의 관계를 만들고 싶었고, 체벌이나 과잉 경쟁으로부터 안전한 학교를 원했고, 하고 싶은 문화생활을 생활공간에서 누리고 싶었고, 문화를 소비하는 사람이 아니라 만들어내는 ‘주인공’이 되고 싶었고, 의식주와 관련된 소비생활을 좀 더 윤리적으로 하고 싶었다. 자신이 배운 바를 실천하는 삶을 나 혼자가 아닌 이웃들과 함께 하고 싶었던 것이다. 성미산마을은 이러한 정체성을 가진 ‘관계’에 기반을 둔 공간이다. 이는 마을 사람들이, 그리고 이 마을을 보는 마을 바깥의 사람들이 부여한 정체성이다. 성미산마을의 시작은 생각보다 거창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마을 운동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모이자!’라고 해서 모인 주민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1994년, 아이들에게 한글과 영어를 일방적으로 가르치기 보다는 자연 속에서 마음껏 뛰어놀게 해주고 싶었던 부모들이 의기투합해 공동육아 협동조합 ‘우리 어린이집’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듬해 추가로 ‘날으는 어린이집’이 만들어지면서 입소문이 났고, 공동육아에 뜻을 둔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모이게 되었다. 이후 공동육아운동은 꾸준히 발전하여 2002년 ‘참나무 어린이집’이, 2005년에는 ‘성미산 어린이집’이 추가로 설립되었다. 공동육아로 시작한 공동체는 아이들이 크면서 대안교육에까지 관심을 넓혀가기 시작했고, 이후 부모들이 확장된 ‘마을 공동체 형성’의 필요성을 느끼면서 마을극장, 두레생협, 공동주거 등의 새로운 시도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현재 이 공동체에 소속감을 가지고 있는 가구 수는 500~700여개에 달하고, 그 안에서 약 70여개의 커뮤니티들이 운영되고 있다.
아는 사람들끼리의 친목 모임정도의 성격을 가졌던 공동체가 ‘마을’이라는 정체성을 갖게 되는 과정에는 수많은 걸림돌과 사람들을 모이게 하는 계기들이 있었다. 2001년 서울시는 성미산에 배수지를 만든다는 계획을 발표하였다. 하지만 이 지역의 유일한 녹지인 성미산은 주민들의 휴식, 산책, 운동 공간이며, 어린이집 아이들이 매일같이 오르는 놀이터이자 교육장이었다. 생태론에 기반을 둔 공동육아협동조합이나 두레생활협동조합은 당연히 이에 반대하였고, 환경단체의 도움을 받아 ‘성미산개발 저지를 위한 대책위원회’를 조직하여 본격적인 반대운동을 펼쳤다. 마침내 서울시가 기습적인 벌목을 시작하자 사람들은 사수대를 결성하여 물리적으로 개발을 저지하였고, 촛불집회나 음악축제 등 다양한 문화활동과 항의 전화 걸기, 시청 앞 집회, 공청회 등을 조직하여 2003년 서울시의 공사 유보 결정을 이끌어내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를 기념하는 마을축제를 열었다. 함께 어려움을 이겨냈던 ‘공유된 경험’을 바탕으로 사람들은 본격적으로 목적의식을 가지고 ‘마을 만들기’를 추진하기 시작했다. 2004년에는 이러한 주민자치운동의 필요성을 자각하면서 이를 주도할 단체로 ‘참여와 자치를 위한 마포연대’가 결성되었고, 2005년에는 정부의 시범사업으로 소출력 마을 방송국 ‘마포FM’이 만들어졌다. 생협 조합원이 만든 유기농 반찬가게 ‘동네 부엌’, 협동조합으로 운영되는 자동차 정비소 ‘차병원’등도 이 때 만들어졌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2004년 9월 마을학교를 표방한 ‘성미산학교’가 개교하였고, 이듬해 건물이 완공되어 초·중·고등학교 신입생을 받았다. 2. 마을기업에 대한 이해 선생님은 마을기업을 ‘출자와 자원조달’, ‘운영과 마을고용’, ‘이용과 확보된 시장’, 이 세가지로 나누어 설명해주셨다. 우선 마을기업은 주민들이 십시일반으로 출자한 돈에서부터 시작한다. 관심이 많은 사람은 많은 구좌를 신청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조금만 신청해 돈을 출자하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돈을 주고 끝나는 기부와는 다르다. (투자의 개념이기 때문에) 조합원이 곧 출자자이고, 출자자가 곧 주인이 되는 구조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두 번째로 마을기업은 ‘하고 싶은 사람’이 운영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자기가 사는 마을 안에서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아이를 키우는 엄마나 노인들에게는 큰 메리트일 것이다. 한국의 열악한 노동환경 때문에 일을 하지 않고 가정을 돌보는 주부들이나 은퇴자분들이 활동적으로 일할 수 있는 마을기업의 역할에 사람들이 주목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마을기업은 ‘확보된 시장’을 가지고 있다. 조합원들이 곧 소비자이고, 마을에 사는 이웃들이다. 그들은 또한 가게에 어느 정도 출자를 한 주인이기도 하기 때문에, 깐깐한 소비자가 되기보다는 너그러운 마음으로 기업의 발전을 바라는 고정적이고 안정적인 소비자층이 된다. 등가교환과 경쟁, 마케팅 공략 등이 떠오르는 일반 기업의 이미지와는 다른 점이다. 3. 수업에서 나온 질문들 서울시는 과연 지속적인 마을 만들기 사업을 펼칠 수 있을 것인가? 지금 시행되고 있는 서울시의 마을 만들기 지원 사업은 어떻게 운영되고 있으며, 그 안에서의 어려움은 없을까? 시간과 자원이 풍부한 중산층 이상 사람들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소외된 사람들까지도 마을 만들기 사업에 참여할 수 있게 하는 아이디어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성미산마을이 가진 특수성과 보편성에는 무엇이 있을까? 4. 간단한 소감 변화를 만들어내려는 시도는 거창하지도, 화려하지도 않았다. ‘세계평화’나 ‘사회개혁’과 같은 거창한 구호로부터 출발하지도 않았다. 그저 자신의 아이를 자신의 가치관에 따라 합리적인 조건에서 기르고자 한 노력으로부터 모든 것이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공간이 공권력에 의해 불합리하게 침해당할 위기에 처하자 온몸을 다해 지켜내었다. 이러한 시도와 행동은 지금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주류적 문화와 방식이 옳지 않다는 문제의식으로부터 나왔다. 누군가가 기존의 틀을 깨고 새로운 상상을 할 때 이미 변화는 시작되었다. 어쩌면 사회 변화는 항상 가장 가까운 곳으로부터, 가장 기본적인 원칙을 세우려고 할 때 시작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사회학도로서 항상 큰 그림과 구조를 보려고 하고, 책으로부터 익힌 일상적이지 않은 개념들을 쓰려다보니 글에는 거품이 끼어있다. 이 단계를 넘어서면 나도 ‘지켜보고 감상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몸을 직접 움직여 행동을 할 수 있을까? 내가 몸담은 학교, 학과에서조차 작게나마 변화를 만들어내는 것은 망설여진다. 내가 망설이는 이유는 ‘아직 살만하기 때문’일 것이다. 세상의 부조리함과 직접적으로 마주하기에 내 주변에는 생각보다 많은 보호막과 핑계들이 있다. 선생님은 분명 희망찬 마을 만들기에 대해서 말씀하셨지만, 내 상황이 상황인지라 주저리주저리 개인적으로 했던 생각들을 몇 자 적어보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