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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좌명 | 강좌후기 | 글쓴이 | 날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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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학교] 2012 한반도 평화구상 - 38선 아래 ‘레알’ 청춘들에게 | 2012 한반도 평화구상 2강 - 북한의 후계체제 이후 북중관계는 어디로 갈것인가 | 느티나무 | 2012.4.5 | ||||||
세력확장에 나선 미국과 중국,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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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학교] 2012 한반도 평화구상 - 38선 아래 ‘레알’ 청춘들에게 | 2012 한반도 평화구상 1강 - 21세기 동북아의 미래, 제국인가 공동체인가 | 느티나무 | 2012.4.5 | ||||||
미중경쟁 시대를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1. 중화 질서 속 동북아 주류적 국제정치이론이라 할 수 있는 현실주의에서는 힘의 균형이 이루어진 상태가 전쟁의 가능성을 줄인다고 보고 있다. 하지만 “세력전이이론(Power Transition Theory)"에 따르면 대국들 사이의 힘이 비슷해질 때 전쟁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주장하고 있다.
2. ‘G2시대와 한반도’
남한은 한국전쟁을 거치며 구축된 분단체제와 한미동맹이라는 프레임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북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중국을 바라보는 시각 역시 자유롭지 못하다. 안보적으로 미국과의 협력을, 경제적으로 중국과의 협력을 필요로 하는 상황에서 미국과 중국의 경쟁이 본격화된다면 남한은 심각한 딜레마에 빠질 것이다. 따라서 지구적 차원에서 미국과 중국의 경쟁이 본격적으로 진행되기 이전에 우리는 선제적으로 대응을 해야 한다. 만약 이러한 상황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면 미중경쟁은 한반도 내에서 남북의 대립을 격화시킬 것이며, 나아가 한반도를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이 충돌하는 무대로 전락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과거 농업을 중심으로 한 중국의 중화 질서가 상업을 중심으로 하는 서구의 제국주의적 질서보다 평화적이고 안정적이었다는 주장이 적극적으로 제기되고 있는 가운데, 중화 질서의 불안정은 한반도에 전쟁을 발생시켰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그리고 한국전쟁까지 동북아 패권교체 과정 속에서 한반도가 전장터가 되었던 역사적 경험이 그것이다. ‘G2시대’를 맞아 한반도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는 한미동맹과 한중협력 관계를 어떻게 조화롭게 유지, 변화시킬 것인지에 대한 전략이 매우 중요해졌다. 장기적으로 중미간 경쟁이 본격화되면 한반도를 비롯한 동북아나 동아시아의 다른 국가들은 중국과 미국, 양자 사이의 선택을 강요받을 것이다. 따라서 다자안보협력은 동북아에서 안보의 딜레마를 피할 수 있는 유력한 대안이다. 즉, 중국과 미국을 개별적으로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관련 국가가 합의하는 제도와 규범 내에서 동북아 안보와 관련된 문제를 처리하는 것이다. 다자안보로 가는 데 있어 지금의 6자회담 틀은 중요한 실험대가 될 수 있다. 다자안보협력을 논하기 위해서는 관련국들 사이의 신뢰를 강화시키는 것이 가장 우선시되어야 한다. 특정 국가를 견제하기 위한 군사동맹을 강화하거나 적대정책을 추구하기보다는 동북아에서 평화질서를 구축하겠다는 참가국들의 의지와 그를 뒷받침하는 정책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에 관한 논의가 진전된다면 동북아 평화체제 구축의 첫걸음이 될 것이다. 이는 곧 남북관계 복원과 이를 위한 정부의 대북정책이 다자안보협력의 토대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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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io정상회의, 이면과 진실 | Rio정상회의, 이면과 진실 1강 - 왜 브라질 리우를 주목해야하는가? | 느티나무 | 2012.4.5 | ||||||
왜 브라질 리우를 주목해야하는가?
3월 15일 늦은 7시 이대훈 강사와 함께한 강의였다. 참여연대 ‘RIO정상회의, 이면과 진실’의 첫 강의 ‘왜 브라질 리우를 주목해야하는가?’가 시작되었다. 먼저 유엔의 글로벌 의제 설정과 발전을 중심으로 국제정세의 변화를 알아보았다. 40년대에 유엔이 발족하였고 50, 60년대에는 핵경쟁, 냉전-군비경쟁 관련 의제가 중심이었다. 70, 80년대를 거쳐 의제가 인간중심으로 확대되었으며, 90년대에는 ‘인간안보’라는 의제가 새롭게 형성되었다. 이대훈 강사는 ‘인간안보’라는 개념을 상당히 강조했다. 90년에 인간개발보고서가 발간되었는데 나에겐 ‘인간’과 ‘개발’이 합쳐진 이 의제가 매우 색달랐다.
물론 의제 형성에는 현실주의적 장애물이 존재한다고 한다. 국제사회는 힘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다. 즉, 군사력, 경제력이 우위를 차지하고 인권과 평화는 부차적으로 따라온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실주의적 장애물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지만 대안으로 규범이 형성되고 국제법을 통해 각국을 제약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탄소배출제약, 4대강 사업 감시, 민간단체들의 참여 등의 활동이 가능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1992년 “지구 정상회의”로 불린 리우(유엔환경발전회의)회의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지속가능한 발전, 인간개발, 사회개발(고용, 빈곤, 성평등 문제를 중시하는)을 중심으로 '발전=경제개발' 등식에 종지부를 찍었기 때문이다. 예로 지속가능발전의 중심은 ‘인간’이다. 이를 이루기 위해 사회 내 격차 감소와 빈곤 퇴치가 중심이 된다. 반면, 전쟁과 무력 분쟁은 지속가능성을 파괴한다.
지속가능한 발전개념에는 평화, 발전, 환경보호가 상호의존적이며 불가분의 원칙을 가지고 있고 발전 개념은 경제개발이라는 등식을 깨고 발전과 인권을 접목하는 개념으로 발전하고 있다.
발전과 인권을 접목시킨다는 것은 내가 느끼기에 상당히 파격적인 개념이다. 보통 발전한다고 하면 더 나아지는 것을 의미하지만 현실은 개인의 희생을 요구하는 발전이 많은 것 같다. 가까이 4대강 사업이 그렇고, 도시발전으로 인해 쫓겨나는 실향민이 그렇고, 회사 구조조정으로 인한 실업자, 무한경쟁시대에서의 개개인이 그렇다. 발전이라는 개념이 현실주의적이고 이 시대에 무시할 수 없는 개념이지만, 발전만 외치는 것은 더 이상 이 시대의 흐름은 아니라고 본다. 그러므로 발전과 인권을 접목시킬 수 있는 것이고 이로써 멀리 내다볼 수 있는 ‘지속가능한 발전’이 대두된 것 같다.
어떻게 보면 지속가능한 발전, 인간개발, 사회개발 개념이 비현실적이고 이상적인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있듯이, 지금까지 이 개념이 개개인과 국가에게 영향을 미쳐왔다는 것을 고려해 본다면 불가능한 일만은 아닌 거 같다.
그래서 나는 앞으로 더욱더 국제 이슈에 관심을 기울일 것이다. 다른 나라에서 지지고 볶는 문제가 그 나라 사람들과 전 인류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유심히 살펴볼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번 강의의 주제인 ‘왜 브라질 리우를 주목해야 하는가?’에 대한 답은 바로 ‘인권’을 중시하는 움직임이 있기 때문이라고 정의하고 싶다. 후기 작성자: 이미리 (수강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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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io정상회의, 이면과 진실 | Rio정상회의, 이면과 진실 2강 - 위기의 환경, '그린이코노미'의 진실은? | 느티나무 | 2012.4.5 | ||||||
[강좌 후기] 위기의 지구환경, 그린이코노미의 진실은
3월 22일 저녁 참여연대 느티나무 홀에서 ‘위기의 지구환경, 그린이코노미의 진실은’ 이라는 조명래 교수님의 강좌가 열렸다. 평소 MB정부의 녹색성장에 대한 강한 의구심을 품고 있던 나는 이번에 개최될 리우+20정상회의와 한국의 녹색성장이 어떤 연관성을 띄는지, 현 정부의 녹색성장의 진정성에 대해 주의 깊게 살펴볼 기회라고 생각되어 설레는 마음으로 강좌에 임하였다.
우리는 2012년 6월 브라질 리우에서 유엔지속가능발전 정상회의 라는 이름으로 개최될 이번 리우+20정상회의에 앞서, ‘녹색경제’에 대한 전반적인 내용을 알아보고 한국의 녹색성장정책의 진정성을 살펴봤다.
녹색경제 vs 한국의 녹색성장
1992년 리우 정상회의에서 ‘지속가능발전’이 대안 발전모델로 채택됐다. 각국들은 2002년까지 국가정책으로 이를 추진했지만, 성과는 전 지구적 빈곤의 심화, 환경의 악화 등과 같이 환경적, 사회적, 경제적 지속가능성이 더욱 떨어진 것으로 나타났다. 지속가능발전이 추진되는 지난 10년간 전 세계는 이른바 ‘신자유주의 지구화’에 휩싸이게 되었기 때문이다. 승자독식의 시장만능주의 이념인 신자유주의의 발호는 지속가능성의 구현을 가로막았다.
이러한 상황에 대한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의 입장과 평가는 첨예하게 대립되었다. 지속가능성 악화에 대해 선진국들은 개도국의 자유교역, 개방화, 민주화 등의 부진에 원인을 돌린 반면, 개도국들은 선진국과 다국적 자본 주도로 세계시장이 개방되고 자본거래가 자유화되어 착취형 개발이 범지구화 된 것에 원인을 돌렸다. 마찬가지로 그 처방에서도 선진국은 자유교역확대, 개방화, 민주화 등을 요구하였으며, 개도국은 자본거래규제, 선진국의 기술이전 및 경제적 원조 확대 등을 요구하였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지구촌 시민사회는 인류 공멸을 초래할 수 있는 기후변화에 주의를 기울였고 각국 정부들은 물질적 부의 생산을 극대화하는데 관심을 기울였다. 20년 전의 지속가능발전이란 개념 대신 녹색경제라는 개념이 이번 리우+20정상회의 중심의제로 채택된 이유에는 신자유주의의 득세 속에 ‘환경과 상생’을 전제로 하는 경제 성장을 하겠다는 선진국들의 의도가 숨어 있다.
선진국에서는 녹색경제를 지속가능발전에 이르는 과정으로 간주한다. 즉, 녹색기술, 녹색산업, 녹색소비 등 환경을 이용해 경제적 고부가 가치를 생산하는 방식으로 경제성장을 추구하려는 것이다.
한국정부는 1992년 리우회의 이후 ‘2000년에 새천년 국가환경비전’을 발표하고, 그 후속조치로 대통령직속 자문기구로 정부, 산업계, 시민단체 등이 참여하는 ‘지속가능발전위원회’를 설치했다. 2007년에는 ‘지속가능발전기본법’을 제정했고 이를 통해 ‘지속가능발전’을 제도화하려는 노력이 이루어 졌다.
그러나 MB정부는 전 정부에서 추진되었던 이러한 노력과 성과를 의도적으로 폄하한 뒤 녹색성장의 하수로 전락시켰다. 대통령 직속 지속가능발전위원회를 환경부 산하 자문위원회로 전락시켰고, 녹색성장위원회는 시민환경전문가 혹은 활동가를 철저하게 배제한 채 시장주의의 환경전문가(환경경제전문가, 기업인 등)들로 구성한 뒤 폐쇄적이며 비민주적으로 운영됐다.
또한 토목 건설적 성장과 개발에 녹색을 덧씌우는 방식으로 녹색성장 정책이 구체화되고 조직화 되었다. 그 예로 ‘원자력에너지 중심 사업’ 이 있는데 이는 국제사회의 정책 방향과 반대의 정책이다. 따라서 무늬만 녹색 일뿐, 실제 기존의 경제중심 성장, 그것도 퇴행적인 토목건설 중심으로 추진되고 있는 MB정부의 녹색성장은 회색성장의 한 변형이라고 조명래 교수는 말했다.
이는 결국 한국정부가 녹색성장이란 이름으로 신기술을 개발하고 녹색산업을 일으키는 것처럼 보이지만, 전체적으로는 에너지 사용의 총량이 늘어나 환경오염과 환경파괴를 일으키고 있다는 것이다.
2012년 리우+20이 준비되는 과정에서 MB정부는 국내 녹색성장 정책의 교정이나 보완 없이 정권의 대외홍보 혹은 치적 쌓기 차원에서 한국이 마치 녹색경제와 녹색성장의 선구자인 양 나섰고, 나름의 의제형성자로 행세하였다. 그러나 한국의 녹색성장 이니셔티브에 대한 국제사회의 평가는 극과 극으로 나뉜다. 긍정적 평가는 일부 선진국을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는 반면, 부정적 평가는 일부 개도국을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다. 이러한 이중적 평가는 선진국이 주도하는 리우+20의 전체의제와 그 설정방식에 대한 선진국과 개도국간 입장 차이에서 나왔다.
MB정권의 입장에서 볼 때, 한국정부가 추진해온 녹색성장은 리우+20의 의제와 일치함으로서, 그 정당성을 대외적으로 확보하는 효과를 누려왔다. 이로 인해 MB정부는 시민사회가 문제제기해 온 녹색성장의 비정당성과 추진과정의 비민주성을 회피할 수 있었다.
위와 같이 리우+20의 중심의제인 녹색경제가 갖는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일국적이면서 동시에 범지구적인 시민운동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 한국시민사회는 토건중심의 한국의 녹색성장에 대해 녹색경제 차원에서 범지구촌 시민운동과 연대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리우+20에 대한 한국 시민사회의 감시와 참여가 지금부터 본격화 되어야 한다.
‘진정한 녹색’ 으로 가는 길
강좌가 끝난 뒤 많은 질문들이 나왔다. 질문자들 중에는 진정한 의미의 녹색에 대해 혼란이 온다고 하였다. 이에 대해 조명래 교수는 환경을 관리주의적 관점이 아닌 생태학적 관점으로 환경자체를 합목적인 대상으로 보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즉 인간만이 아닌 모든 생태계가 부활할 수 있는 환경이 ‘진정한 녹색’이라는 것이다.
다른 질문 중 내가 가장 인상 깊었던 질문은 ‘녹색을 국제적인 의제로 제시하고 국내에서도 이를 접목시켜 최우선 국가정책으로 추진하고 있는 것 또한 환경에 대한 노력이 아닌가?’ 라는 질문이었다. 정부가 환경에 대한 관심은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그러나 현 정부는 시민환경전문가를 철저하게 배제한 채 지속가능발전을 위한 실천적 수단인 거버넌스를 고려하지 않고 폐쇄적이고 비민주적으로 정책을 운영하고 있다는 점을 조명래 교수는 지적했다. 그러면서 1994년 녹색서울시민위원회의 운영 방식과 비교하기도 했다. 녹색서울시민위원회는 정부, 시민, 기업 등 각 분야에서 공동위원장을 선출해 여러 의제를 복합적으로 토론하여 결정하고 실천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물론 서로의 이해관계에 따라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이와 같은 노력으로 파트너십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각 국가 간의 시민사회단체와의 범세계적인 파트너십을 형성해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나는 이번강좌를 들으면서 ‘현 정부에서 시행하고 있는 녹색성장이 경제발전의 수단이 아닌가’라는 기존의 의문이 확신으로 바뀌게 되었다. 그렇다고 정부시스템이나 세계적 동향만을 비판할 일만은 아닌 것 같다. 결국 중요한 것은 하드웨어의 변화가 아닌 소프트웨어의 변화 즉, 우리들의 의식과 행동의 변화를 통해서 진정한 녹색의 의미가 나온다는 것을 느꼈다.
환경은 곧 생명과의 직접적인 상관관계를 가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조금 편하자고 여태껏 환경에 무관심하지 않았는가? 정부시스템의 잘못이라고 책임을 미루지는 않았는가? 우리의 의식이 변화해야 토건적 녹색성장을 막을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1992년 리우환경회의 당시 캐나다 출신 12살 소녀 세번 스즈키의 연설문 중 ‘여러분이 고칠 방법을 모른다면, 제발 그만 망가뜨리시기 바랍니다!’ 라는 말이 떠올랐다. 훗날 세대가 이런 말을 하지 않도록 현 세대가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을 남기는 강좌였다.
작성자: 조민지(수강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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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io정상회의, 이면과 진실 | Rio정상회의, 이면과 진실 3강 - 빈곤퇴치 약속 20년, 왜 세계는 여전히 굶주리고 있는가 | 느티나무 | 2012.4.5 | ||||||
[후기] 빈곤퇴치 약속 20년, 왜 세계는 여전히 굶주리고 있는가
‘Rio정상회의, 이면과 진실’의 마지막 강연은 이성훈 한국인권재단 상임이사와 2012년 6월에 열릴 리우+20정상회의의 전망과 시민사회의 역할을 이야기하고, 오랜 노력에도 불구하고 왜 여전히 10억 인구가 굶주리고 있는지에 대해 논의하였다.
이성훈 상임이사는 국제사회가 리우+20정상회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설명하면서 강의를 시작했다. 세계 시민사회 활동가들은 유엔이 리우+20정상회의의 의제를 해결할만한 리더십이 없고 인권과 책무성에 대한 논의가 의도적으로 빠졌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녹색경제 vs 그린워시 리우+20정상회의는 3가지 주요 쟁점을 가지고 있다. 첫 번째는 ‘녹색경제, 지속가능발전 및 가난퇴치의 관계’에 관한 정책 패러다임이다. 선진국들은 주로 지속가능발전과 녹색경제를 병렬적 관계로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개발도상국(이하 개도국)은 반대로 녹색경제가 현재의 세계 위기를 악화시키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지속가능발전모델'을 지지하고 있다. 이에 대해 국제시민사회는 녹색경제는 경제발전에 ‘녹색’이라는 단어만 붙이고 마치 환경을 위한 정책인양 하는 그린워시(Green Wash) 일뿐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두 번째는 녹색경제에 관한 제도를 구축하는 일이다. 1972년 스톡홀름 ‘유엔환경회의’의 결정에 따라 만들어진 유엔환경계획(UNEP)을 강화하거나 유엔전문기구로 조직을 확대해야 한다는 논쟁이 진행 중이다.
1992 년 탈냉전 직후 국제사회의 많은 아젠다는 기존 제도에 흡수되어 더 이상 논의를 할 필요가 없는 의제들이 생겼다. 그러나 유독 리우에서 논의되고 있는 ‘환경’만은 제도화되지 못했다. 물론 2002년 리우+10회의에서 세계환경기구를 만들자는 제안도 있었지만 9.11테러 직후 침체된 분위기 속에서 그러한 제안은 쉽게 통과되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 리우+20회의에서는 이 논의가 본격화 될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으로, 리우정상회의에서는 합의된 내용에 대한 이행목표와 지표가 마련될 것이다. 현재 논의는 MDGs(밀레니엄개발목표)의 한계를 극복하기위해 SDG(지속가능발전목표)를 채택하자는 내용까지 왔다. MDGs는 개도국 중심의 편향적인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고 ‘환경’에 관한 목표가 없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면, SDG는 경제, 사회, 환경을 통합적으로 담고 있어 개도국뿐만 아니라 선진국에서도 SDG 채택에 무게를 싣고 있다. 그러나 SDG 역시 보완해야할 점이 있다. 그 내용은 인권적 접근이 부재하고 이행목표에 대한 모니터와 보고가 자발적으로 이루어지게 때문에 책무성이 없다는 것이다.
1990년대 탈냉전이라는 고무적인 분위기속에서 국제사회는 연대와 협력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2001년 9.11테러와 2008년 전 세계적으로 시작된 금융위기로 국제사회의 공조와 협조는 어려움을 맞게 되었다. 그 와중에 리우+20정상회의가 개최되는 것이라 기대만큼 성과를 기대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 이다.
리우+20과 빈곤퇴치 약속 개도국은 '지속가능발전모델'를, 한국과 주요 선진국은 '녹색경제모델'를 지지하고 있다. 다른 것 같지만 이 두 국가들간의 공통점은 ‘빈곤퇴치’를 가장 우선순위에 둔다는 것이다.
1960 년대 UN에서 빈곤에 대한 회의가 시작된 이래, 50년이 넘은 지금에도 세계는 빈곤의 늪에 빠져 있다. 분명 일부국가에서는 빈곤이란 문제가 해결되었지만 아프리카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빈곤문제는 점점 심각해지고 있다. 빈곤은 단순한 생사의 문제를 넘어 사회불안으로 이어져 폭동까지 일으키고 있다. 또한 식량, 에너지, 금융의 위기와 더불어 기후변화까지 세계는 한마디로 총체적 위기 상황이다.
우리는 이러한 원인을 국제적 자본주의 시스템이나, 정치경제적 민주주의 프레임, 국가·시장경제·시민사회의 책임 등으로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성훈 이사는 하나의 틀만 가지고 분석한다면 환원주의의 오류에 빠지기 쉽다고 했다. 한가지의 틀을 심층적으로 분석하기 보다는 이미 실행되고 있는 빈곤퇴치에 대한 진단과 처방에 대한 논의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리우의 핵심 키워드. 개발! 리우회의의 핵심 키워드는 ‘개발’, 즉 ‘빈곤’의 문제였다. 특히 리우회의는 ‘개발(빈곤)’의 문제를 환경과 연관시킨 회의로 그 중요도가 매우 크다. 국제회의마다 ‘개발’ 아젠다를 제시하고 있지만 문제는 그 다음 단계라고 이성훈 이사는 말했다.
1992년 리우회의 이후 1997년 리우+5회의부터 문제점들이 확연히 들어났다. 먼저 정치적 비전과 리더십이 부족했다. UN은 각 국가들의 합의점을 끌어내기에는 리더십이 부족했다. 더 큰 문제점은 경제위기의 가장 큰 주범인 IMF나 월드뱅크등 은 개혁대상논의에서 빠졌다는 것이다.
이성훈 이사는 빈곤퇴치 노력에 대한 철저한 진단과 처방만이 10억 인구의 굶주림을 해소할 수 있는 첫 발걸음이 될 것이라고 강조하고, 기업구조와 IMF, 월드뱅크 등의 개혁 없이는 환율위기와 금융위기가 올 때마다 빈곤은 심화될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최근 빈곤의 모순에는 투기자본과 기업이 있고 그 핵심은 Wall Street에 있다는 인식으로 ‘Occupy Wall Street’라고 외치고 있는 것도 이러한 맥락일 것이라는 진단이다.
이처럼 빈곤문제와 대안은 단순하지 않기 때문에 개발 패러다임이 진화해도 별효과가 없었다는 것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환경과 문명, 민주주의, 빈곤 등을 통합적으로 다룰 수 있는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통합적 비전을 가진 후에야 구체적인 전략이 효과를 가질 것이라는 말과 함께 이성훈 이사는 강좌를 마쳤다.
국내 환경단체의 역할에 대한 질문에 대해, 이성훈 이사는 한국의 시민사회는 4대강사업이나, 토건적 녹색성장을 비판하기 바빠, 리우+20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환경단체는 환경 이외의 다른 시민단체와 연대하면서 국제연대 활동을 펼쳐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번 강좌는 나에게 리우회의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들을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여전히 문제가 되고 있는 환경과 빈곤에 대한 원인과 해결책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2007년 말 전 세계 금융위기가 과도하게 특정 분야를 중심으로 성장한대서 시작된 것과 같이 특정 분야를 집중해서 성장(개발)하는 것에 대한 평가가 다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작성 : 조민지 (수강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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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세상을 향해 묻다 | 청년아카데미 1기 잘 마쳤습니다~ | 느티나무 | 2012.1.26 | ||||||
안녕하세요. 참여연대 시민참여팀 간사 이진선입니다.
지난 12월 27일부터 시작한 참여연대 청년아카데미 1기가 1월 19일까지 총 8회 강좌로 잘 마무리했습니다.
이번 청년아카데미는 '청년, 세상을 향해 묻다'라는 주제로 진행되었고,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청년들, 무엇을 보지 못하고 살고 있는지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에 대해 질문을 던져보는 시간을 마련했었습니다. 이번 청년아카데미를 들은 수강생 여러분께서는 다음과 같은 단어를 키워드로 선정해 주셨어요. 함께 공유합니다. 칼슘/ '나'의 자리(정체성)에 대해서 돌아보는 시간... / 번쩍 / 확장 / 트임 / 고민 / 저녁에 보는 거울(많은 생각과 반성을 할 수 있어서)/ 희망/ 새로운 사실들을 알려주는 자극! / 틀깨기 / 뜻깊음 / 한걸음 / 청년이여 쫄지마! 청춘 마지막 8회째에는 강연 이후 1시간 가량 청년아카데미 수강생들과 함께 '청년, 상상 워크숍'을 진행했습니다. 청년아카데미에서 나왔던 강연 주제인 평화/ 동북아/ 노동/ 복지/ 법/ 정의/ 핵/ 시민참여 등을 중심으로 청년들이 꿈꾸는 세상에 대해 마음껏 상상해 보고, 전지에다 그림을 그려가면서 같이 이야기를 꽃피웠는데요. 참 재미난 '상상'을 할 수 있었어요. 한미 FTA가 폐기되고, 핵없는 대한민국이 되고, 최저임금이 2만 5천으로 책정되고... 이런 것들이 현재는 '상상'이지만 우리들 모두가 함께 꿈을 꾸면 '현실'이 될 수 있다는 것도 함께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죠. 아래 워크숍때 나왔던 모습들 사진으로 몇 장 공유합니다. 참 즐거워 보이죠? ^^
청년아카데미 강좌 후기는 아래 링크를 통해 들어가시면 보실 수 있습니다.
1강(12/27 화) 김남훈(레슬링 선수, <청춘 매뉴얼 제작소>저자) 열정 없는 청춘, 어떡하죠? : 쫄면 지는거야! >> http://www.peoplepower21.org/860914
>> http://www.peoplepower21.org/861236
4강(1/5 목) 정태인(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원장) >> http://www.peoplepower21.org/864907 5강(1/10 화) 김익중(경주환경련 상임의장, 동국대의대 교수) >> http://www.peoplepower21.org/864931 6강(1/12 목) 이남주(성공회대 중국학과 교수) >> http://www.peoplepower21.org/866826 7강(1/17 화) 하종강(한울노동문제연구소 소장) >> http://www.peoplepower21.org/866611 8강(1/19 목) 김혜정(환경운동연합 대간사) >> http://www.peoplepower21.org/866618
이번 1기에 이어 다음 2기 개강도 많이 기대해 주세요. ^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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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서로 읽는 한국 근현대사 | 복잡했던 해방공간 누가, 어디로 | 느티나무 | 2011.11.9 | ||||||
어제(8일) 교과부에서 ‘중학교 새 역사 교과서 집필 기준’을 발표했습니다. 논란이 되고 있는 "국사편찬위원회가 제시한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 문구는 그대로 유지" 됐다고 합니다. 아래 김도형(인턴), 최혜진(자원활동가)가 작성한 역사교과서 6강 "복잡한 해방공간 누가 어디로"의 글을 보시면 어디에
문제가 있는지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힌트는 "제3차 유엔 총회의 정식 정부 승인 문건"에 있습니다. 원문출처 : http://bit.ly/rXdnab해방공간의 쟁점들 1945년 8월 15일, 36년간에 걸친 일본 제국의 지배는 끝을 맺었다. 그리고 3년 간 이 땅에는 정부가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미군정만이 존재했다. 하지만 미군정은 미국정부도 한국정부도 아니었다. 그래서 그때 이 땅에 제대로 된 정부가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이야기하기 쉽지 않다. 아무튼 우리는 그 3년을 해방공간이라 부른다. 역사에서도 해방 3년사라 하여 따로 다루고 있다. 고작 3년에 불과한 시간이었지만, 참으로 많은 것들이 생겨나고, 사라지고, 또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민족국가 수립의 열망과 좌우익 간의 정치 투쟁이 뒤엉켰고, 시위와 폭력, 암살과 실종이 혼재했다. 한편, 미국과 소련에 의해 한반도는 남쪽과 북쪽으로 찢어졌고, 남북 인민의 뜻과 아무 상관없이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분단의 첫걸음을 딛게 되었다. 그래서 해방공간의 역사를 아는 것은 독립과 민족의 시간이었던 근대를 넘어 극단의 이념대립과 폭력으로 상징되는 현대사를 이해하기 위한 필수 과정이다. 교과 과정에서 한국 근현대사를 따로 떼어 가르쳤던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참여연대 아카데미 느티나무에 서 9월 7일부터 진행 중인 <교과서로 읽는 한국 근현대사> 강좌 중 다섯 번째 강의에서는 '해방 공간'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다. 천재교육의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를 교재로 하는 이 강좌는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의 서술 방향과 역사 인식에 대한 전문가들의 담론을 시민들과 나누고 있다. 다음의 내용은 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역사연구소 이신철 교수의 첫 번째 강의 <복잡했던 해방공간, 누가? 어디로??>를 토대로 재구성 및 정리한 것이다. 광복은 도둑처럼 왔다 알다시피 모든 것은 1945년 8월 15일에 시작되었다. 같은 날이지만, 한반도와 일본열도의 분위기는 전혀 달랐다. 한국은 독립을 맞았고, 일본은 패전국으로 전락했다. 하지만, 정말 우리는 그때 독립할 수 있었을까? 사실 그건 당시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일본은 패전국이었고 식민지 조선은 그 일부였다. 당시 한국인들은 일본식 이름을 갖고 일본어를 국어로 사용해야 했다. 더욱이 당시 일제는 전쟁 중이었고 그만큼 폭압적이었다. 독립운동은 중국 등지에서 어렵사리 이루어졌을 뿐, 한반도나 만주에서는 거의 불가능했다. 36년에 이르는 식민지 시기는 짧은 기간이 아니었다. 식민지 조선에서 '천황의 신민'으로 나고 자란 아이가 이미 성인이 되었을 시점이다. 한국을 독립국으로 보는 인식은 국내외적으로 미약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당시 우리가 결정할 수 있는 건 분명히 말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니 그 상황에서 한반도의 남쪽과 북쪽을 점령한 두 열강, 즉 미국과 소련이 한국에 미친 영향은 결코 작지 않았던 것도 당연하다. 우리나라는 결국 분단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는 숙명론이 그나마 일리가 있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하지만, 그게 해방이자 광복이자 독립이라 불리던 그 순간의 전부를 설명해 주는 건 아니다. 해방공간에는 더 많은 무언가가 존재했다. 그 무언가를 알기 위해서는 우선, 광복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 오늘날 광복절이 언제인지 모르는 한국인은 없다. 하지만 정작 우리나라가 해방이 되던 그 순간, 대일본제국이 패망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이는 거의 없었다. 물론, 15일에 일본 천황의 항복방송이 나오기는 했지만, 라디오 자체가 흔치 않았던 시대다. 일본인들이 패색이 짙어가는 전황을 친절하게 알려 줄 리도 없었다. 그러니 당대 지식인들도 별 수 없었다. 서정주, 이광수 같은 이들은 열렬히 귀축영미를 저주하고 천황폐하만세를 부르짖으며 젊은이들을 죽음의 전선으로 떠밀었다. 오직 여운형을 비롯한 소수만이 국제정세를 면밀히 살피며 해방과 건국을 준비하고 있었다. '광복이 도둑처럼 왔다'는 표현은 그래서 크게 틀린 말이 아니다. 그만큼 갑작스럽게 우리나라는 일제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그걸로 '식민지'가 끝난 건 아니었다. 일제 총독 아베 노부유키는 여운형과 교섭을 통해 전권을 건준의 조선인민공화국에 넘기고 일본인들의 생명과 재산의 안전을 약속 받았다. 하지만 동시에 미국과도 항복을 위한 교섭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결과 일본군은 패전 후에도 미군에게 무장해제 당하기 전까지 한반도의 치안을 담당할 수 있었다. 심지어 9월 8일 미군정이 들어올 때 환영인사를 하지 말라는 명령을 어긴 시민들에게 발포해 무고한 3명의 목숨을 앗아간 것도 일본군이었다. 해방이라지만, 그 시작은 착잡하기 짝이 없었다. 해방 직후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도 온건하지는 않았다. 미소 양군이 한반도에 들어오는 과정도 어딘가 어긋난 부분이 많다. 일단 한반도 북쪽에는 소련군이, 남쪽에는 미군이 들어왔다. 다만 양국 군대가 들어온 시기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소련은 8월에 일본에 선전 포고를 하고 만주를 거쳐 한반도로 진격했고 미국은 9월 8일에야 인천을 통해 들어왔다. 하지만 소련은 미국이 들어오기 전에 먼저 남쪽까지 접수하려 하지는 않았다. 길게는 한 달에 이르는 이 기간에 소련이 아무 행동도 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는 당시부터 의견이 분분했다. 소련으로서는 미군이 들어오기 전에 38선 이남까지 내려오기에 충분한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한반도 분할 점령을 제안한 미국의 요청이 있기는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석연치 않은 구석이 많다. 그보다는 향후 미국과의 협상을 통해 일본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싶었던 소련의 정치적 포석으로 해석하는 편이 더 타당하다. 물론, 진실은 알 수 없다. 국내 상황 역시 안정과는 거리가 멀었다. 해방은 갑작스러웠고 권력을 갖고 있던 일본인들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그리고 그 정치적 공백을 채운 것은 혼돈이었다. 수많은 정치 세력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고, 이들은 대부분 자치 기구를 만들고자 했다. 중도 좌파 민족주의자이자 당시 국내에서 가장 명망 있는 인물이던 여운형은 건국준비위원회를 거쳐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했다. 박헌영을 비롯한 공산주의자들도 조선 공산당을 결성해 정치 활동을 펼쳤다. 한국의 독립을 국제적으로 인정받기 위해, 그리고 자파의 정치적 우위를 확립하기 위해 그들은 필사적이었다. 분명 무정부상태였던 해방공간에서 헤게모니의 선점은 매우 중요했다. 하지만 당시 국제정세는 그들의 편이 되어주지 않았다. 연합국은 한국인들의 뜻과 관계없이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둘러싸고 대립각을 세우고 있었다. 한반도 내의 어떠한 정치 세력도 인정하지 않겠다는 합의 역시 이미 이루어져 있었다. 한국의 민족주의자들이 거기까지 꿰뚫어 보는 것은 사실 무리였다. 어쨋거나 그들은 국제정세를 입체적으로 보고 대처하지는 못 했다. 그렇기에 오늘날 해방공간의 정치활동과 국제정세를 함께 바라보면 허망한 기분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다만 패전국 일본은 한반도에서 철수하는 과정에서도 미국과 소련에 각각 항복하는 등 정치적 공작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결과 일본은 해방공간의 치안권을 얻었음은 물론 분단의 운명마저도 한반도에 떠넘길 수 있었다. 점령군인가 해방군인가 일본은 물러갔고 한반도에는 미군과 소련군이 진주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제일 먼저 논란이 되는 부분은 그들이 어떤 이름을 달고 이 땅에 들어왔는가에 관한 문제이다. 7차 교육과정의 금성교과서에 소련을 '해방군'으로 서술한 부분이 격론을 불러온 이유도 그 이름의 무게 때문이다. 하지만 한번쯤 고민해 봐야 하는 일임도 분명하다. 과연 미군은, 그리고 소련군은 점령군이었는가? 아니면 해방군이었는가? 그 실마리는 양군이 어떤 식으로 한반도와 한국인을 대했는가를 통해 풀어갈 수 있다. 먼저 소련은 공식적으로 소련 '군정'이라할 만한 직할 통치기구를 두지 않았다. 한국인들로 이루어진 인민위원회를 인정했고, 소련군 휘하 특정 부서에서 민정사업을 담당하는 형태로 한국인에게 접근했다. 민족 감정을 자극하기 쉬운 직접 통치 대신 자문역할을 자처하는 것이 소련이 한반도 북부를 지배하는 방식이었다. 적어도 표면적으로 소련은 스스로 해방군으로 왔음을 자임했고, 46년 2월부터는 선거를 시행해 한국인 대표를 선출하도록 했다. 물론 이런 통치방식이 순전히 소련정부의 선의는 아니었다. 소련 역시 한반도 내에 그들의 이익에 부합하는 정부가 수립되기를 바랐다. 한반도의 정치지형도가 소련의 뜻에 부합하지 않았던 것이다. 남한지역에는 여운형, 박헌영 등 좌익으로 분류되는 이들이 세력을 갖고 있었지만 정작 소련군이 주둔한 북쪽은 조만식 등의 민족주의자가 주도권을 잡고 있었다. 당시 서북지방은 보수적 민족주의자들의 터전이었기 때문이다. 황해도는 한반도에서 가장 먼저 기독교가 들어온 곳이고 자본가, 지주들의 세력도 강했다. 소련입장에서도 이들을 무시하고 북한지역을 통치할 수는 없었다. 따라서 소련은 한반도의 새로운 국가건설에 있어서 사회주의계열과 민족주의계열의 합작체제를 주장했고 모든 기구를 성립할 때도 양측의 인원이 반수가 되도록 조정했다. 다만 기본적으로 중재는 언제나 소련의 몫이었다. 당연히 사회주의 계열에 유리한 상황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상당수의 북쪽 지주 자본가들은 월남을 선택하게 된다. 반면, 미군은 맥아더 포고령을 통해 자신들이 '점령군'으로 들어오는 것임을 분명히 했다. 또한 서울에 미군정청을 설립하고 사령관이 전권을 행사하는, 전형적인 직접 통치 형태로 남한을 접수했다. 미군의 통치는 상당히 고압적이었다. 우선 한반도 내에 자생적으로 수립되어가던 모든 정치조직을 인정하지 않았다. 임시정부도 인정하지 않았고, 인민위원회는 물리적으로 해산시켰다. 그리고 영어가 가능하며 행정경험이 있는 이들-거의 일제의 관리 출신인-위주로 미군정을 보좌할 한국인 행정조직을 재구성했다. 이는 사실상 일제의 행정조직을 복원한 셈이다. 그리고 남한지역의 유일한 합법정부는 미군정임을 천명했다. 각지를 떠돌며 독립운동을 하던 임시정부요인들은 개인자격이라는 조건을 달고서야 해방된 조국을 다시 밟을 수 있었다. 신탁통치의 진실 혹은 거짓 1차 세계 대전 이후 승전국이 패전국들의 식민지를 독립 역량을 키울 때 까지 대신 지배하는 위임통치론이 등장했다. 하지만 몇몇 위임통치령은 사실상 식민지였다. 이들 중 2차 세계대전 이후까지 존재하던 위임통치령이 국제연합 소속의 신탁통치령이 되었다. 그런데 한국 정치인 중에도 이 위임통치론을 주장했던 이가 있다. 바로 이승만이다. 그는 미국 의회에 "조선은 독립할 의지가 있으나 아직 능력이 부족하다. 지금 일본이 그것을 가로 막고 있으니 우리가 독립할 능력을 키울 때 까지 미국이 일본을 대신해서 우리를 위임통치 해 달라" 며 청원서를 낸 바 있다. 그리고 그는 이 일 때문에 1925년에 임시정부 대통령직에서 탄핵 당했다. 그리고 20여년 후, 해방 공간에서 다시 신탁통치론이 등장한다. 바로 1945년 12월 27일자 동아일보. 1면 기사에 쓰인 내용이다. '외상회의에 논의된 조선독립문제- 소련은 신탁통치주장, 소련의 구실은 38선 분할 점령, 미국은 즉시독립주장' 36년 만에 맞게 된 해방, 그리고 미국과 소련의 진주,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불안한 정국이었다. 간신히 독립한 조국이 다시 강대국의 사실상 식민지가 될 위기에 처했다는 불안감은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사람들은 분노했고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이승만과 한민당을 비롯한 우익들은 미국을 지지하며 이 움직임에 편승했다. 하지만 문제가 하나 있었다. 동아일보 기사는 오보였기 때문이다. 미국과 소련은 분명히 1945년 12월 16일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에서 한반도의 정부 수립 방안을 논의했다. 그 내용은 한반도에 민주적인 임시정부를 수립한다는 것, 임시 정부 수립을 위해 미, 소 공동 위원회를 설치한다는 것, 임시 정부와 협의를 거쳐, 미국, 영국, 중국, 소련의 4개국이 한반도에 대해 최고 5년을 기한으로 신탁 통치를 실시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이때의 회의 결과는 12월 28일 발표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동아일보는 예정보다 하루 전에 미리 회의 결과를 기사로 내버렸다. 그것도 잘못된 형태로. 이는 명백한 왜곡 보도였다. 게다가 신탁통치를 주장한 것은 소련이 아니라 미국이었다. 미국은 당초 20년 정도의 신탁통치가 필요하다고 주장했지만 소련은 이에 반대했다. 결국, 그 합의점으로 나온 5년간의 신탁통치안이다. 당시 우익의 뜻을 대변하던 동아일보의 의도적 왜곡 보도라는 의심을 거두기 어려운 이 사건은 거국적인 민족적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이 저항은 좋은 결과로 끝나지 않았다. 특히 좌파들에게는 비극이었다. 소련의 발표를 통해 회의 결과를 정확히 인지한 좌파들은 모스크바 3상회의 결과 지지운동을 전개했지만, 이미 반탁으로 기운 대중들은 이들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김구가 이끄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 측은 곧바로 신탁 통치 반대 국민 총동원 위원회를 조직하여 대대적인 반탁운동에 돌입했다. 게다가 이승만, 한민당, 동아일보로 대표되는 우익세력은 박헌영을 비롯한 좌익을 찬탁론자로, 나아가 매국노로 몰아갔다. 신탁통치를 반대하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애국자가 될 수 있었다. 그 결과 이 시기에 우익의 상당수를 점하던 친일경력자들은 애국자라는 옷으로 갈아입을 기회를 잡았다. 한편 김구의 국민 총동원 위원회는 반탁을 위한 총파업을 지시했고 당시 서울시 공무원의 70%이상이 파업에 동참했다. 이에 놀란 미군정 사령관 하지는 김구를 불러 협박했고 결국 총파업은 끝났지만, 김구는 이 짧은 쿠데타를 통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영향력과 법통성을 선포하고자 한 셈이다. 모스크바 3상회의상의 혼란에 대해서는 두 국가의 신탁통치 개념이 가지는 차이 때문이었다는 의견도 있다. 말하자면, 영어와 러시아어의 어감 차이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신탁'을 의미하는 영어 trustship은 권력을 맡기는 의미였지만 러시아어인 oneka의 경우는 일종의 후견이라는 뜻이 더 강했다. 당시 남쪽에서 회의 결과를 '신탁통치'로, 북쪽에서는 '후견제'로 보도한 것도 이런 문화적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 정부의 정통성, 그리고 정당성 김구를 비롯한 많은 이들의 노력에도, 결과적으로 한반도에는 각각 남한과 북조선이라고 불러야 할 두 개의 정부가 수립되었다. 그리고 이들 두 정부는 상대방이 아닌 바로 자신이 정통성과 정당성을 가진 정부라고 주장해 오고 있다. 도대체 정통성은 무엇이며 정당성은 또 무엇일까? 뉴라이트 측의 주장처럼 경제력으로 이겼으니 정통성은 우리가 가져온 것일까? 정통성의 근거는 기존 정치 공동체의 적통 계승여부에 달려있다. 때문에 왕조국가에서는 왕가의 혈통이 흔히 정통성으로 기능한다. 이와 달리 정당성은 민족공동체 구성원들에게 지지받고 인정받은 권력에게 부여될 수 있는 부가가치를 말한다. 그렇다면 남북한이 가진 정통성과 정당성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주장하는 이들은 '임시정부의 적통을 계승'한다는 제헌 헌법과 유엔에서 인정한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 정부라는 말을 근거로 즐겨 내세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두 근거는 모두 설득력이 약하다. 우선 임시정부의 정통성에 대한 부분을 살펴보자. 이승만을 비롯한 임정인사들이 당시 건국정부에 참여 했으니 이는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한반도의 해방공간 정치 지형도에는 적지 않은 세력이 난립하고 있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우익인 한민당에서 극좌파 조선 공산당에 이르는 다종다양한 정당과 정치세력이 해방공간에는 존재했다. 문제는 이들 모두가 임시정부와 연대하는 세력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임시정부가 해방된 대한민국의 정치권을 대표한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물론 임시정부의 정치적 위상과 가치에 대해서는 더 많은 논의가 필요하다. 다만, 대표성과 규모라는 측면에서 당시 임정이 하나의 정치세력 이상이 아니었음은 부인하기 어렵다. 유엔이 인정한 유일한 합법정부라는 부분도 심각한 오류가 있다. 아니, 사실상 날조에 가깝다. 그 근거의 원문인, 제3차 유엔 총회의 정식 정부 승인 문건에는 '선거가 가능하였던 38도선 이남에서 정통성을 가지는 유일정부임을 인정'한다고 명시되어 있을 뿐이다.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는 제헌 헌법과는 정면으로 부딪힌다. 세계 어느 나라도 인정한 적 없는 한반도 이북 지역의 통치권을 우리만 되뇌고 있는 셈이다. 게다가 우리의 정통성이 유엔을 비롯한 승인에서 나온다는 발상이 과연 건전한지도 의문이다. 그 생각 자체가 이미 비자주성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왜 우리는 정통성을 타국의 인정에서 찾을 수 밖에 없었는지에 대해서도 한번쯤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북한의 경우를 보자. 일단 북한은 무엇보다도 최고지도자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 경력을 십분 활용할 수 있었다. 또한, 건국 초기에 친일경력자 숙청을 완료했다. 북한은 정통성을 주장하기에 남한보다 조건이 좋았던 셈이다. 물론 김일성의 항일 무장 투쟁 경력은 거짓말이 아니다. 하지만 유일한 최고지도자의 대표성을 담보해 줄 수 있을 만큼 절대적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리고 숙청당한 이들 중에는 친일파 외에도 반김일성 세력이 적지 않았다. 민족적 과제를 정치적으로 활용했다고 해야 할까. 아무튼 북한의 정통성도 생각만큼 공고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북한은 정치적 정당성을 '무상몰수 무상분배'로 이루어졌던 토지개혁과 남북한 총 선거에서 찾았다. 인민에게 지지받고 인민의 손으로 뽑은 정부임을 내세우기 위해서였다. 다만 토지분배는 차치하고서라도 선거에는 문제가 있었다. 실제로 북한은 그들이 주장하는 총선거를 통해 남북한 지역 대의원(최고 인민회의 국회의원)을 선출했다. 그렇게 1000명이 해주에 모여 남측 대표 210명, 북측 대표 360명을 선출하고 김일성을 최고주석으로 삼아 내각을 구성했다. 하지만 당시 북한에서는 이승만 정부를 인정하지 않았고, 남한 내에서 남로당은 불법단체였다. 정상적인 선거는 애초에 가능할 수 없었다. 그러니 북한에서 말하는 남북 총선거란 사실 북에서만 이루어진 반쪽짜리 선거였다. 남한 지역에서는 지하에서 활동하던 남로당원 등에 의한 비밀선거가 이루어졌지만 대표성도 실효성도 없었다. 이렇듯 허점투성이였던 선거는 결국 북한 정부의 정당성에도 한계로 작용했다. 결국 비판의 여지는 양쪽 모두에게 충분히 있었던 셈이다. 남북한 양국 정부의 정통성-정당성의 근거와 그 한계를 통해 우리는 해방공간에서 독립 정부가 반드시 가져야 했던 적통의 이상적 형태를 어렴풋이나마 그려볼 수 있다. 한반도 인민의 열망을 대표할 수 있는 정부는 민족 독립운동의 정신과 그 정치적 대표성을 이어받아야 했다. 또한 전 국민의 합법적이고 폭넓은 선거를 통해 선출된 정치 공동체임을 떳떳이 자임할 수 있어야 했다. 당시의 남북한 정부 모두 자신들이 바로 그런 정부임을 주장했었고, 이는 지금도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둘 중 이런 이상에 좀 더 합당한 정부는 어디였을까? 쉽게 답할 수 있는 문제는 분명 아닐 것이다. 독립정부 수립을 위하여 앞서 말했듯이 해방공간은 수많은 정치세력이 난립하는 형국이었다. 크게 보아 좌우익 세력은 비등했지만, 그 안에는 조금씩 노선이 다른 무수히 많은 조직들이 존재했다. 그들의 이해관계와 방향성에서 같은 구석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었지만 1차적 목표만은 공유하고 있었다. 한반도의 독립이었다. 이는 당대 민중들이 그것을 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반탁운동 과정에서 당시까지 열세였던 우익세력이 정국 장악의 결정적 계기를 잡을 수 있었던 이유도 당시 민중에게 널리 퍼져있던 독립의 열망을 공략했기 때문이다. 물론 각 세력 간 노선은 분명히 달랐다. 특히, 좌우익간의 대립은 격렬했다. 여운형, 송진우, 장덕수 등 좌.우.중도를 가리지 않고 수많은 중요인사가 암살로 목숨을 잃었다. 미소 공동 위원회 중단 이후 좌우 정치세력이 각자 독자 노선을 모색하기 시작한 것도 사실이다. 이승만은 정읍발언과 함께 남한 단독선거를 통한 독립정부 구성 쪽으로 방향을 잡고, 친일경력자가 대거 포함된 반탁 운동 세력은 이승만 쪽으로 합류했다. 결과적으로 반탁운동은 남한단독정부 수립운동으로 이어지게 된 셈이다. 김구, 김규식을 필두로 하는 중도파는 남북 분단을 막고 통합정부 수립으로 가는 방향을 꾸준히 모색했다. 김구가 이미 단독정부를 수립한 북측에 협상을 제의하고 북한행을 택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이다. 이 때 이루어졌던 남북 협상에서는 김일성, 김두봉, 김구, 김규식이 참석했고 외국군대 철수와 통일 정부 수립을 논의했지만 실질적 성과는 없었다. 김일성측도 이미 단독정부 수립을 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구의 행보는 결코 가볍게 이루어진 일이 아니었다. 김구가 서울로 돌아온 날은 5월 6일이다. 남한의 단독선거일은 5월 10일이었다. 그리고 여운형이 죽고 없는 남한에서 김구는 이승만을 위협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일생의 영광이 될 대통령 선거 출마를 사실상 포기하면서, 거의 승산 없는 회담을 위해 북으로 향했다. 그의 이런 의지는 오늘날 우리가 김구를 그저 무모한 민족주의자라는 식으로 함부로 평가할 수 없는 분명한 이유이다. 현재 뉴라이트 역사학파에서는 이승만을 건국의 아버지로 추앙하는 반면, 김구는 정치적으로 실패한 인물이자 테러리스트로 평가한다. 어찌되었건 남한의 초대 대통령 이승만과 일개 야인으로 암살당한 김구의 명암이 엇갈리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역사적 인물의 행보를 정치적 결과론으로 해석하는 것은 위험하다. 자신의 정치적 영달을 최우선 목표로 삼았던 이승만과 정치생명을 포기해 가며 좌우 합심의 민족국가를 건설하고자 했던 김구를 정치적 성패만으로 동일 선상에서 비교할 수 있을까. 테러리스트라는 용어도 그렇다. 물론, 김구의 의혈 투쟁을 영어로 번역하면 테러리즘이다. 사실 정확히 의혈 투쟁을 표현할 단어를 영어에서는 찾기 어렵다. 하지만 폭력 투쟁에 의존해야만 할 만큼 억압에 직면했던 당시 상황과 조국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의사들의 결의를 담기에 테러리스트라는 용어는 너무 얄팍하다. 또한 김구의 독립운동이 현대의 테러리즘와 같은 형태도 이루어진 것도 아니다. 주로 일본 제국 정부 요인을 대상으로 한 의혈투쟁을 불특정 다수의 민간인을 대상으로 하는 오늘날의 테러와 함께 취급하는 것은 다소 무리수가 아닐까. 역사를 바라보는 자세, 애국자의 자세 2011년인 지금, 남북 분단의 역사도 어느덧 60여 년을 넘기고 있다. 그 60년 동안 남한은 경제발전을 통해 현대국가의 면모를 확립했고, 북조선은 폐쇄적이고 배고픈 사실상의 왕조국가로 전락해가고 있다. 그리고 뉴라이트를 위시한 신자유주의 지향 역사학계 일부에서는 북한의 역사를 실패한 역사로 단정하고 그 존재도 부정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사회주의의 실패와 "자유 대한"의 영광스러운 역사를 부각시키기 위해서다. 물론 오늘날의 북한은 이미 사회주의국가라고 보기 어렵다. 정치적, 경제적으로 위기에 봉착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북한을 부정하는 것은 한반도 현대사 자체에서 사회주의의 영향력을 부정하는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은 의미한다. 이는 생각보다 위험할 수 있다. 동구권의 몰락으로 상징되는 현실사회주의의 실패를 감안하고서라도 오늘날 자본주의 체제가 지속될 수 있는 건 역설적으로 사회주의의 역할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회주의는 최소한 초기 자본주의의 폭주와 비인간성에 제동을 걸고 꾸준히 이의를 제기하는 기능을 했다. 소위 수정자본주의가 그것이다. '자유민주주의국가' 대한민국의 제헌 헌법에도 사회민주주의 적인 구석이 적지 않다. 이는 임시정부에 남은 좌우합작적 성과의 흔적이다. 그 어떤 정치체제도 완벽할 수는 없다. 사회주의도 자본주의도 각각의 잠재력과 한계가 분명히 있다. 인간이 양쪽의 균형을 잡아야만 그 장점을 제대로 살릴 수 있다. 또한 지금 여기의 애국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생각해 봐야 한다. 애국의 의미도 시대에 따라 달라진다. 제국주의 시대의 애국은 자국의 조상을 찬양하고 민족적 우월성을 과시하는 행위였다. 피식민지 민중들의 애국도 본질적으로 이와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그런 행동은 애국일 수 없다. 인간이 과거를 기록하고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는 앞서 살던 이들의 행적에서 무언가를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역사에는 자랑만 있을 수 있는게 아니다. 부끄러움도, 잘못도, 실수도, 악행도 얼마든지 있다. 물론, 그 모두가 우리 역사의 한 부분이다. 러시아인들은 스탈린 시대에 이루어진 대학살을 숨기거나 피하지 않고 그대로 가르친다. 이유도 명쾌하다. 그런 악행들도 그들 자신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역사에서 덮어야 할 내용을 다투는 오늘날의 우리가 곱씹어 봐야 할 부분이다. 레드컴플렉스는 현대사 전반에 걸쳐 뿌리 깊게 우리의 의식을 지배해 왔다. 오늘날도 다르지 않다. 역사를 두고 덮네 마네 하는 생각을 할 수 있는 것도 결국은 이런 인식 때문이다. 하지만 사회주의 일반에 대한 막연한 거부감은 장기적으로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친다. 편견이 낳을 수 있는 건 또 다른 편견 뿐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보다 객관적으로 역사를 평가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런 시각의 전환을 거쳐 우리 역사교과서가 그토록 혼란스러웠던 해방공간을 어떻게 기술했는지 꼼꼼히 읽어보고 의문을 제기해야 한다. 문제가 있다면 어떻게 해방공간을 인식할 것인가에 대해서 재차 물어야 할 의무도 있다. 해방공간은 분명 혼란스러웠다. 죽음과 배신과 음모가 소용돌이 쳤고 오늘날 까지 이어지는 수많은 갈등과 가능성의 씨앗이 뿌려졌다. 그리고 그 씨앗들 중 열매를 맺은 이들은 열매를 맺지 못하거나 뿌리 뽑혀진 이들의 역사를 지우려 한다. 지금 역사교과서를 둘러싼 논쟁도 해방공간에서 시작한 갈등의 연장선상에 있는 셈이다. 하지만 적어도 역사를 공부한 이라면 그렇게 접근해서는 안 된다. 역사는 덮거나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후세에게 과거를 가감 없이 가르쳐 직접 성찰할 기회를 주는 것이 바로 역사교육이다. 그런 의미에서 해방공간을 둘러싼 쟁점들을 배우는 일은 중요하다. 그리고 역사를 넘어 오늘날의 문제를 바라볼 수 있는 중요한 척도로서 여전히 가치를 지니는 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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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사회학 : 먹거리 대안 찾기 | 희망의사회학 먹거리 대안찾기 1강 | 인혜최 | 2011.11.4 | ||||||
참여연대 아카데미 느티나무는 10월 24일부터 매주 월요일 6회에 걸쳐 '희망의 사회학 -먹거리 대안찾기'를 주제로 연속
강연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10월 24일 열린 첫번째 강좌에 "먹거리에 대한 한국인의 인식, 왜?" 를 주제로 원광대 김흥주 교수님이 강의해주셨습니다. 아래는 강좌를 녹취한 내용입니다. 먹거리에 대한 전체적인 이해에 도움이 되길 기대합니다.(자원활동가 최혜인님이 작성해 주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개인적 차원에서 먹거리를 생각하며, 개인적 차원의 행동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강의를 통해 사회적인 먹거리 문제를 이해하고, 실천하는 food citizen이 되어야 합니다.” 일상에서 먹거리를 선택하는 행위는 나 자신에 의한 일입니다. 수입산 육류를 구입하는 것도, 내가 채식을 하지 못하는 것도 개인적인 실천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수입산 육류는 저렴한 가격을 내세우며 선택을 강요하였고, 육식 위주의 문화는 채식을 별난 것으로 바라봅니다. 뿐만 아니라, 먹거리의 생산, 분배 등 보다 넓은 차원에서의 문제들은 사회 구조를 돌아보게 합니다. 이렇듯 지극히 개인적인 줄로 알았던 먹거리 문제를, 사회적 차원의 먹거리 문제로 새롭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먹거리 사회학 ‘먹거리사회학’ 이란 먹거리를 대상으로 한 사회학적 연구를 말합니다. 이 연구에서 먹거리는 다양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영양학에서는 ‘식품’, 우리의 일상에서는 ‘음식’, 국가차원에서는 ‘식량’, 생협에서는 ‘먹거리’.. 이처럼 자신들의 공간에서 먹거리는 각각 다르게 해석되고 있습니다. 먹거리 속에 녹아 있는 ‘사회적 관계’를 살펴보면, 생태성, 관계성, 복지성, 지역성, 교육성, 이 다섯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1. 생태성 자연과 인간, 인간과 인간은 서로 소통하며 더불어 살아야 하지만, 근대사회는 이를 해체시켜 놓았습니다. 근대사회가 분리시켜 좋은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재구조화 하는 것을 ‘생태성’이라고 합니다. 2. 관계성 근대사회 이후 과학기술의 횡포로 분리된, 생산자와 소비자의 관계는 공동체를 파괴하고 우리를 소회시키고 개별화하였습니다. 새로운 패러다임을 통해 우리는 ‘관계성’을 재구성해야 합니다. 3. 복지성 지구에는 전세계인이 먹고 남을 만큼의 식량이 존재하지만, 지구의 3분의 2는 기아에 허덕이는 삶에 놓여 있습니다. 이는 식량 생산의 문제가 아니라, 식량분배의 문제입니다. ‘복지’차원에서 불공평한 분배구조를 개선하고 먹거리 정의를 구축해야 합니다. 4. 지역성 거대 곡물회사가 대다수 나라의 먹거리를 지배하여 국가의 식량자급률이 점점 떨어지고 있습니다. 세계가 하나되는 것이 세계화라지만, 세계화는 오히려 모든 관계를 해체시키고 있습니다. 공간적 거리와 사회적 거리가 중시되는 지역성의 개념이 필요합니다. 5. 교육성 먹거리를 둘러싼 사회적 관계를 알고 food citizen을 양성하는 교육이 중요합니다. 먹거리 사회학을 세분화하면 지역차원에서 이루어지는 local scale, 국가차원에서 이루어지는 national scale, 초국적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global scale이 있습니다. 이는 거시이론, 일상사례, 신천전략으로 나눠 생각해볼 수 있는데, 우선 거시이론은 다음 강의에서 배우기로 하였습니다. 지역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일상사례연구는 거대자본에 종속되지 않은 농민과 농민간의 연대로 이루어지는 local food, 마을 만들기 운동인 커뮤니티비즈니스사업 등이 있습니다. 이는 지역에서 이루어져야 하고, 생태적 가치를 지향해야 합니다. 국가차원에서 이루어지는 대안먹거리사례로는 식생활교육, 참여와 운동, 공공급식이 있습니다. 친환경무상급식을 통해 국가차원의 일상 교육이 실천되길 희망해봅니다. 초국적차원으로는 공정무역이나 global NGO를 통해 대안먹거리를 위한 행동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먹거리 위험사회 먹거리 위험사회란 광우병, 구제역처럼 개인 차원을 넘어 사회적, 전지구적으로 먹거리 위험이 확산된 것을 말합니다. 먹거리 위험사회는 먹거리 안전에서의 위험, 먹거리 보장에서의 위험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여기서 가장 안전한 먹거리는 내가 직접 길러 먹는 것, 신뢰하는 사람이 직접 길러 나에게 주는 것입니다. 이는 같은 지역에서 이웃 간에 가능한 일입니다(local food). 또 먹거리를 보장하는 것은 정부의 몫입니다. 먹거리는 단순히 양적 보장이 아닌, 질적 보장이어야 합니다. 누구에게나 지속적으로 제공해야 하고(접근성), 선택의 여지가 있는 양질의 먹거리를 제공해야 합니다(적절성). 또 생태적이고 지역사회에 기반한 먹거리를 보장해야 합니다(지속가능성).
산업사회에는 사회적 계급, 돈의 분배, 실업, 질병 등 ‘복지’를 통해 정책적으로, 기술적으로 제거 가능한 문제를 갖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위험사회에서는 개별화, 공포, 불확실성, 불신 등 궁극적인 위험 요소를 제거하기 어렵고, 보다 깊숙이 문제가 내제되어 있기 때문에 소통과 신뢰를 통해 풀어나가야 합니다. 예를 들어 산업사회의 기아 문제는 식품의 영양, 사회복지제도로 문제의 원인을 제거할 수 있었지만, 현재의 GMO문제는 예측 불가능하고 과학으로 통제하기 어렵기 때문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정부의 진정성 있는 정책으로 신뢰를 회복하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한국인의 먹거리 위험인식 다음은 전국 만19세 이상 성인 남녀를 대상으로 실시한 한국인의 먹거리 위험인식에 대한 설문 분석입니다. 한국인이 느끼는 피해가능성에서는 환경오염, 먹거리, 교통사고로 인한 위험인식이 가장 높았습니다. 먹거리 위험인식 중 각 항목별로는 비만, 음주, 방부제 색소 향료 등 식품첨가물로 인한 피해를 가장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식품안전 면에서는 국내산과 수입산 간의 인식 차이가 환연했습니다. 특히 중국산 김치에 대한 불신이 가장 컸고, 일본의 방사능 누출과 시기적으로 맞아떨어졌기 때문인지, 일본산 수산물에 대한 불신도 높았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나라 국민의 수입산 먹거리 구매율은 35%에 육박하고, 그 중 육류는 70%정도를 차지합니다. 이는 상대적으로 저렴한 수입산 먹거리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강요된 선택의 문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식당인식으로는 소규모 식당과 군대급식에 대한 신뢰도가 가장 낮았습니다. 애초에 관계 속의 먹거리에 대한 신뢰가 높을 것이라 예상했지만, 예상과는 정반대의 결과가 나왔습니다. 반면, 호텔식당과 패밀리레스토랑에 대한 신뢰도가 가장 높았는데, 이를 통해 ‘관계’보다는 ‘시스템’을 신뢰하는 경향을 알 수 있습니다. 생산유통 부분에서는 소규모로 생산을 하는 농민과, 대규모로 생산을 하는 농민에 대한 신뢰도가 가장 높았습니다. 반면 이 전의 식당에 대한 신뢰도에서는 소규모 식당에 대한 신뢰도가 가장 낮았는데, 이는 우리사회의 이중구조를 보여줍니다. 반대로 대규모 식품 가공 해외 식품업체와 소규모 식품 가공 식품업체에 대한 신뢰도는 가장 낮았습니다. 정보신뢰에서는 재밌는 결과를 볼 수 있었습니다. 국회의원, 정부 관료, 식품기업의 광고 순으로 정보신뢰도가 가장 낮았습니다. 반대로 가족과 농민에 대한 신뢰도는 가장 높았습니다. 식품 안전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것이 안전하다는 정보보다는 안전하지 않다는 정보를 믿는다는 비율이 75%에 달했는데, 이는 우리사회가 저신뢰 사회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정부정책에 대한 신뢰도 또한 압도적으로 낮았고, 미국산 소고기, 구제역에 관련한 정부의 발표를 신뢰하지 않는 비율도 70%로 높게 나타났습니다. 친환경 농산물에 관련해서는 안전도, 친환경 여부, 생산자에 대해 어느 정도 신뢰하는 반면, 가격에 대한 신뢰도는 낮게 나타났습니다. 친환경 농산물처럼 안전한 먹거리를 생산하는데 생산자의 노력이 배가 되는데, 이러한 노력에 대한 소비자의 인식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결과입니다. 따라서 인식부족 문제를 충족할 수 있는 대안적 가치가 필요합니다. 우리의 먹거리 의식으로는 상당히 진보적인 결과가 나왔습니다. GMO, 미국산 소고기 수입, 친환경 무상급식 부분에서 진보적인 입장을 취하는 비율이 높았습니다. 2008년의 촛불집회가 정당하다는 비율과 유기농업의 중요성을 알고 있다는 비율은 높게 나타났습니다. 반면 대안농업의 인지도는 대체적으로 낮은 편입니다. 이를 통해 먹거리 문제를 인식하기는 하지만, 행동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먹거리 행동 패턴으로, 패스트푸드와 미국산소고기는 먹지 않는다는 비율이 높았지만, 제철음식과 로컬푸드를 먹는 비율이 딱히 높지 않은 것을 볼 때, 명확한 행동 패턴이 존재하지 않다는 것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또 음식선택행위를 보면 갈비, 김치, 전통 한식의 선택 비율이 높고, 와인, 소시지의 비율이 낮았습니다. 이는 우리의 음식 성향이 서구화되지 않고, 아직까지 지극히 한국지향적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먹거리에 대한 정보 확인행동으로 원산지와 유통기한은 적극적으로 확인하지만, 성분과 첨가물은 거의 확인하지 않는 편으로 나타났습니다. 이 전의 먹거리 위험인식 중 각 항목별 심각성에서 방부제 색소 향료 등 식품첨가물에 대한 위험인식이 높은 것으로 나타난 것을 보아, 우리의 이중적 태도를 볼 수 있습니다. 반면 친환경 식품을 의식하는 정도는 다소 높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지금까지의 데이터를 종합했을 때, 1. 한국인의 먹거리 위험성을 인지하지만 적극적으로 행동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인식의 이중구조). 이러한 이중구조를 해소하기 위해, 먹거리 교육을 통한 먹거리시민, food citizen 양성이 필요합니다. 2. 먹거리 속의 관계를 지향하면서도 호텔에 대한 신뢰도가 높았듯이, 결과적으로 시스템을 신뢰하고 있습니다(신뢰의 다층구조). 또 친환경 식품에 대해 만족하지만 가격을 신뢰하지 못하고, 수입한 식품을 불신하면서도 이를 구매하는 것처럼, 시장합리적 선택, 혹은 강요된 선택을 하는 양상입니다. 따라서 생산자와 소비자의 연대가 강화되어 대안먹거리체계가 구축되어야 합니다. 또한 먹거리 정의 실현을 위한 관계와 소통에 바탕을 둔 새로운 패러다임의 먹거리 정책이 필요합니다. 3. 2008년의 광우병 파동과 2010년의 구제역, 무상급식에 대한 사회적 논의는 학습효과를 불러 일으켰고, 정부 정책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을 가져왔습니다(저신뢰 사회). 이처럼 앞으로는 먹거리 지위와 불신으로 인한 사회적 연대성이 강해질 것으로 예상됩니다. 이러한 세력은 정치세력으로 발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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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의 인문학 : 아파트 공화국에서 다시 집을 생각한다 | 집의 인문학 7강 집, 누구와 함께 살 것인가 | 느티나무 | 2011.11.1 | ||||||
8월 30일부터 가을학기 강좌 [집의 인문학 : 아파트 공화국에서 다시 집을 생각한다] 강좌가 시작되었습니다.
가격 대신 ‘가치’가 넘치는 집을 만들자 사람 말고 집을 짓는 동물로는 무엇이 있을까? 개미나 벌은 사람보다 더 정교하게 집을 짓는다. 곤충 다음으로는 조류다. 새가 집을 지을 때 제일 중요한 게 통풍이라고 한다. 까치는 바람이 많이 부는 날 집을 짓는데, 미리 안전점검을 하는 거다. 사람은 처음에 동굴 생활을 했는데 그 때의 생활습관이 언어에도 남아 있다. ‘드러눕다’에서 ‘드러’는 (동굴로) 들어간다는 뜻이다. ‘일어나다’에서 ‘나다’는 (동굴에서) 나온다는 뜻이다. 두 발로 걷고 정착을 하면서 사람에게 거주 공간이 중요하게 됐다. 정착을 하면서 인구도 증가하게 된다.
우리나라는 OECD 자살률 1위이다. 1인가구가 급증하고 있는데, ‘사별’이 큰 원인이다. 사별하면서 독거노인이 늘어나고 있다. 혼자 사는 노인이 많은데 자살이 증가하는 이유 중 하나이다. 다른 국가에 비해 한국과 일본은 유독 고령화가 심하다. 인구 고령화에는 출생, 사망, 이동이라는 문제가 있는데 이동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며느리만 받는다. 베이붐 세대가 고령화되면서 인구 고령화 속도도 빠르다. 지난 2년간 노인 자살이 5배나 늘었다. 옛날에는 자식이 노후대비였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 <생활의 얼개> 재개발, 뉴타운으로 골목이 사라지고 마을이 없어졌다. 집은 ‘사는 곳’으로 심미성, 공동체성, 역사성이 있다. 조용하게 혼자서 하늘을 볼 수 있는 시간을 집에서 가질 수 있어야 한다. 명심보감에 “손님이 오지 않으면 집안이 저속해지고, 시서(詩書)를 가르치지 않으면 자손이 어리석어지느니라”라는 말이 있다. 예전에는 집들이, 돌잔치, 장례, 함들이 등 집이 거점이 되는 행사가 많았다. 지금은 그렇지 않다. 집에 손님이 오지 않으면서 부모를 통한 인맥도 형성되지 않는다. 부모가 아이에게 줄 수 있는 큰 재산 중에 하나가 다양한 인맥이지 않을까?
1인 가구가 늘면서 사회가 위험해지고 있다. 무연사(無緣死)는 죽었는데 시체를 거둘 사람이 없는 것이고, 고독사는 죽는 순간에 혼자 있는 것이다. 1인 가구가 급격하게 증가하면서 무연사도 느는 추세다. 일본은 셰어링 하우스(sharing house), 노인홈 등이 있다. 혈연을 넘어선 대안가족 형태이다.
● 집의 인문학 강좌 후기 전편 보기 <2강> 안창모 "우리는 어떤 집에서 어떻게 살아왔나" <3강> 박철수 "집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 소설을 통해 본 우리들의 집" <4강> 김재영 "집 살live것인가, 살buy 것인가" <6강> 박인석 "내 집 한번 지어볼까 : 내 집 짓기의 경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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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서로 읽는 한국 근현대사 | 교과서를 통해 본 한국근현대사 4강 | 느티나무 | 2011.10.27 | ||||||
오마이뉴스에 게재된 <교과서를 통해 본 한국근현대사 4강 후기>를 함께 공유합니다. 글은 김도형 인턴이 작성해 주셨습니다. 원문 출처 :http://bit.ly/tzzyD1 역사에서 공간의 의의 '국학'이라는 말이 있다. 자기 나라의 정체성을 이루는 요소를 연구하는 학문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오늘날의 '국학'은 보통 국문학과 국사학을 일컫는다. 하지만 조선후기 실학자들의 국학은 '지리학'을 포함하는 개념이었다. 사람이 나고 자란 땅을 아는 일이 그 사람과 나라를 이해하는 데에 필수 불가결함을 그들은 모르지 않았다. 물론 오늘날의 우리도 공간에 발을 딛고 흐르는 시간을 느끼며 살아간다. 그리고 그런 개인의 시간이 쌓이면 역사가 된다. 즉, 역사도 결국 각각의 공간에서 이루어진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배우는 역사에는 종종 공간이 결여되어 있다. 한번 질문을 던져 보자. 3.1 운동은 언제 일어났을까? 그리고 한국전쟁은 언제 시작했을까? 이 정도 질문은 누구나 대답할 수
있다. 하지만 두 사건이 진행된 공간을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인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이승만, 김구,
여운형의 차이를 말하는 이는 많지만 그들이 활동한 시대의 미국과 중국, 그리고 한반도의 상황에 대해 정확히 논할 수 있는 이는
드물다. 인간의 행동은 대개 공간과 조응한다. 동학농민운동에서도 남접과 북접의 활동은 전혀 달랐다. 서울과 평양의 독립운동
스타일도 차이가 있었다. 같은 시대에도 공간의 개성은 분명히 있었고 그 차이는 사람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특히 역사의
흐름을 움직일 수 있는 비범한 인물에게는 더욱 그러했다. 히틀러와 함께 근대 최악의 학살자였던 소련의 독재자, 스탈린의 경우를 보자. 역사에서는 그가 자행한 대량 살인의 원인을 잔혹한 성격으로 본다. 그리고 생부의 폭력으로 얼룩진 유년기와 개인적 결핍을 그 이유로 든다. 하지만 스탈린이라는 '인간'의 성격을 만들고 발현시킨, 그를 둘러싼 공간에 대한 언급은 거의 없다. 김정인 교수(춘천교육대학교 사회교육과)는 이런 식의 단순한 접근이 얼마나 무책임할 수 있는가를 지적한다. 한 사람이 나고 자란 '공간'에 대한 충분한 고찰 없이 그를 역사적 인물로 이해하기는 어렵다. 학생들을 위한 역사 교육에서 공간에 대한 이야기를 빼놓아서는 안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참여연대 아카데미 느티나무에서 9월 7일부터 진행 중인 <교과서로 읽는 한국 근현대사> 강좌 중 네 번째 강의는 바로 '역사적 공간'에 대한 이야기이다. 천재교육의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를 교재로 하는 이 강좌는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의 서술 방향과 역사 인식에 대한 전문가들의 담론을 시민들과 나누고 있다. 다음의 내용은 김정인 교수의 강의 <민족운동의 공간 탐사: 서울 평양 찍고 만주 미주까지>를 토대로 재구성 및 정리한 것이다. 교과서 안의 역사공간 현행 역사 교과서에도 한반도 외에 각지에서 독립운동이 존재했다는 언급이 있다. 하지만 그 내용이 충실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게다가 그 각각의 공간을 동등한 비중으로 다루지도 않는다. 우선 식민 모국이었던 일본을 보자. 일본에서의 독립운동, 언뜻 듣기에도 쉬웠을 거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다. 물론 우리는 2.8 독립 선언을 기억한다. 해방 후 일본에 세워진 조선인학교도, 한인 거류민단과 조총련의 존재도 알고 있다. 그런데, 그 정도 규모의 조선인 조직이 존재하려면 일본 내에서 민족운동의 맥이 면면히 이어졌어야 한다는 사실은 깊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교과서에서의 일본 내 민족운동은 2.8 독립선언과 함께 증발해 버린다. 물론 남한 정부의 반공 강박증이 낳은 결과다. 일본 내 민족운동세력은 사회주의 및 무정부주의운동의 영향하에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식민 모국 본토에서의, 아마도 가장 강한 탄압에 직면해야 했을 독립운동의 기록을 그런 이유로 외면해서는 안 된다고 김교수는 강조한다. 이런 식의 무시나 왜곡은 일본 외의 공간에서도 빈번히 이루어진다. 러시아가 대표적이다. 두 번의 혁명을 거쳐 소비에트 연방 성립으로 이어지는 러시아 혁명은 공간의 이름 뿐 아니라 성격 자체를 완전히 바꾸어 버린다. 사실 러시아 혁명은 20세기의 가장 충격적인 사건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럽에서 가장 크고 가장 낙후된 나라의 최하층 노동자, 농민이 들고 일어나 짜르를 죽이고 자신들의 정부를 만든 것이다. 카리스마적인 지도자 레닌이 이끄는 이 신생 정치집단은 기존체제를 유지하던 각국 지배층에게 공포의 대상이 아닐 수 없었다. 당시 소련은 계급해방은 물론 제국주의적 세계질서로부터 피압박 민족의 해방 역시 주창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레닌은 민족자결주의를 말하고 식민지독립을 통해 이를 실행했다. 김교수는 그 충격과 공포를 50년대 미국 중산층들이 원자폭탄에 품었던 두려움에 비견한다. 아마 실제로도 그러했을 것이다. 세계질서가 뒤바뀌는 일도 당시에는 가능해 보였다. 물론 그 공포는 식민지 피지배층에게는 희망이기도 했다. 일제하의 조선민중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하지만 교과서의 러시아-소련 관련 서술은 이런 분위기를 충분히 담아내고 있지 못하다. 이유도 일본의 경우와 같다.
구체적으로는 자유시 참변 같은 부정적 사건만을 강조하고, 레닌의 지원금으로 국민대표회의를 개최한 사실 등은 제대로 언급하지
않는다. 역사적 시각에서 이는 매우 곤란하다. 반공이라는 색안경을 통해 역사를 제대로 바라보는 일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제정러시아나 냉전시대와 달리, 당시의 소련은 전혀 우리의 가상적국이 아니었다. 더욱이 레닌은 3.1운동에 대한 적극적인 호감을 표한 바 있다. 말하자면, 당시 소련은 국제적 연대세력으로서 광범위한 계층에게 기대감을 줄 수 있었다. 자치론자인 최린마저 소련에서 개최한 극동인민대표회의를 찾았고, 임정개혁을 부르짖던 창조파는 새로운 임시정부 수도로 블라디보스톡을 내정했다. 일본을 제외하면, 당시 민족운동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국가는 분명 소련이었다. 그러니 박헌영 같은 조선 사회주의자들의 활동은 당연히 소련의 영향력 하에 있었다. 이들의 행적은 오늘날 남북한 양쪽에서 모두
무시된다. 남쪽은 철저한 반공주의로, 북한은 김일성 항일무장투쟁 중심으로 역사교육의 방향을 잡은 까닭이다. 역시
극동인민대표회의에 참석했던, 레닌이 인정한 조선의 대표적 사회주의자 이동휘도 교과서에서는 거의 외면당한다. 교과서의 러시아 서술은
그 어느 지역보다도 반공주의에 의해 큰 타격을 받은 셈이다. 이렇듯 일본과 러시아가 교과서에서 거의 주목받지 못하는 것에 비하면 중국 지역에 대한 서술은 양적으로 매우 풍부하다. 중국
관내와 만주의 운동을 구분해서 언급할 정도다. 이는 물론 양 지역에서 독립운동 양상이 크게 달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질적으로는
이들 공간에 대한 서술도 충분하다고 하기 어렵다. 중국 지역에서의 독립운동은 만주와 관내를 막론하고 매우 복잡하다. 우선 중국 관내에서의 독립운동은 국민당-공산당 간의 역학관계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중국관내의 조선인 민족운동 세력은 좌우 모두 국민당 정부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받았다. 한편 한인 공산주의자들은 조국 해방을 위해 중국 혁명이 필요하다고 인식했고, 그에 따라 팔로군과 연합해 항일 투쟁을 벌였다. 이런 이유로 중국 공산당이 조직한 동북항일연군의 주요 지휘관 중에는 한인들이 많았다. 무정을 비롯한 팔로군 출신의
사회주의자들은 북한 정권 수립 후 인민군에 편입되기도 한다. 이런 정치적 면면을 파악하려면 당대의 중국사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다. 하지만 교과서는 군벌들의 할거와 국공합작, 국공내전 같은 복잡한 정치상황을 충분히 설명해 주지 않는다. 만주 서술 문제도 간단하지 않다. 만주는 중국보다 일본과 함께 언급되는 경우가 많고, 우리의 국외 독립운동 근거지라는 인식도 기본적으로 깔려있다. 일본의 괴뢰국가 만주국이 존재했고, 주변 민족들이 섞여 사는 지역이었기에 이는 어느 정도 사실이다. 하지만 분명히 중국 영토인 만주에서 그토록 자유로운 민족운동이 어떻게 가능했는지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나 문제의식은 필요하다. 물론, 교과서에는 그런 건 없다. 실제로는 만주국 성립 이후 독립운동은 불가능했다. 만주군관학교출신 장교들인 박정희, 백선엽 등이 독립군 사냥을 시작한 것도 이 때 부터이지만 이에 대한 언급도 없다. 말하자면, 민족운동 공간으로서 만주에 대한 서술도 깊이 면에서는 매우 미흡하다. 교과서의 부실한 서술과는 달리 국내외를 막론하고 각각의 민족운동은 그 무대가 되는 공간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조선어학회 사건은 함흥지역의 높은 교육열을 배경으로 일어났다. 광주의 학생운동과 격렬한 소작쟁의는 빈부갈등과 사회주의의 영향력이
강했던 전라도의 지역적 특성이 배경이었다. 안동 지역은 조선조 이래 유림의 전통 때문인지 민족주의자든 사회주의자든 독립운동가를
유독 많이 배출했다. 서울과 평양은 당시에도 최고의 대도시였고, 따라서 모든 분야의 민족 운동이 존재했다. 중국과 만주에서의 독립운동도 한결
같지는 않았다. 상하이는 임시정부의 터전이었지만 30년대 상하이 사변으로 일본군에게 점령된 이후 독립운동이 어려워진다. 한편
베이징은 북경 군사통일촉성회,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 등이 자리해, 반 임정 세력의 집결지가 된다. 일본과 미국에서도
마찬가지다. 2.8 독립선언이후에도, 이승만이 탄핵된 후에도 독립운동의 맥은 끊어지지 않았다. 역전된 남북-역사적 공간, 정치적 공간 한편, 한반도 안에서 민족운동의 공간이라는 개념은 조금 더 복합적으로 봐야 할 필요가 있다. 같은 공간이라도 시대에 따라
전혀 다른 성격과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의병운동 지역과 동학농민운동 지역은 겹치지 않았다. 두 운동이 계급적-정치적으로
지향하던 방향성의 차이가 공간에 반영된 결과다. 그런가 하면 3.1운동이 확산되는 지역은 이전의 동학농민운동, 의병운동과 또
달랐다. 기존의 두 운동이 발원 지역을 시작으로 퍼져나갔다면 3.1운동은 서울과 평양으로 대표되는 근대 도시 중심의 시민 대중운동
형태로 전개되었다. 오늘날의 분단현실에서 역사적 공간 인식은 매우 중요하다. 일제시대의 남북공간은 정치적으로 지금과 정 반대였기 때문이다. 좀 더 자세히 이해하기 위해, 오늘날 남북한 지역의 당시 상황을 살펴보자. 먼저 평양 중심의 서북지방은 전반적으로 빈부-신분의 격차가 적었다. 특히 함남지역은 반상의 구별도 없다시피 했고 그 중 북청은 '공산국'이라 불렸다고 한다. 지주 소작인간 갈등도 드물고 자산가, 중소지주, 자작농의 비율도 높았다. 평북지역도 자작농 비율이 반을 넘었다. 토지가 척박해 수확량은 적었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지조를 대신 부담해 주는 등 지주의 마음 씀씀이가 박하지 않았다. 그래서
지주를 큰집이라고 부를 만큼 관계가 좋았다. 이는 천도교와 기독교 세력이 매우 강하고 상대적으로 유교가 큰 힘을 발휘하지 못했던
지역색과도 무관하지 않다. 평안도에 대해서는 자유평등의식은 높지만 3.1운동 이후 관권, 금권과 타협해 생활문제에 치중하는
경향이 짙어졌다는 평도 있다. 다만 지역주의는 강고했다. 한마디로 보수적이고 자유주의 내지는 민족주의적인 성향이 강한 지역이었다.
그렇다고 이 지역이 중앙정부로부터 소외되었다는 뜻은 아니다. 조선총독부를 평양으로 옮기자는 주장도 있었을 정도로 평양은 당시에도
중요한 도시였다. 어쨋거나 흔히 생각하는 '북한지역'의 이미지와는 전혀 상관없는 모습이다. 반면 서울 중심의 기호-호남지방은 여러 의미로 계급갈등이 첨예한 곳이었다. 이쪽은 그나마 소설 등을 통해 익숙한 모습이지만, 서북지역과 비교해 보면 또 느낌이 미묘하다. 충남 지역은 양반의 근거지로 계급사상과 빈부차별이 모두 강했고, 경기도는 아예 반촌과 민촌이 따로 살았다. 전라도는 토지가 비옥하고 물산도 풍부했지만 빈부차가 크고 지주의 횡포가 심했다. 1910년 이후 부터는 동양척식회사와 일본인 자본가의 수탈이 더해졌다. 그 결과 많은 자작농들이 소작을 거쳐 파산과 유랑의 길로 떨어졌다. 그러니 이 지역의 소작쟁의는 격렬할 수밖에 없었다. 동학농민전쟁과 의병전쟁, 사회주의운동이 활발했던 것도 당연하다. 심지어
일제 경찰당국은 호남지역을 '사상의 제일선'이라 불렀다. 말하자면, 사회적-경제적으로 사회주의사상이 자라기 딱 좋은 토양이었다.
김교수는 한국사회에서 호남지역을 소위 '빨갱이 땅'으로 인식하기 시작하는 시점을 이 때로 잡는다. 훗날 김대중이 박정희에 의해
용공분자로 쉽게 몰릴 수 있었던 것도 이시기에 형성된 전라도에 대한 인식 때문이었다. 이런 지역성 자체는 문제가 아니었다. 문제는 이들 지역이 가진 정치성향과 정 반대인 두 개의 정부가 남북에 각각 수립 되었다는데 있었다. 물론, 이는 미-소의 이해관계와 알력의 결과물이었지만, 바로 그 어긋남 때문에 한국전쟁 후까지 남북한 모두 결코 적지 않은 피를 흘려야 했음을 김교수는 지적한다. 괴리를 공유하게 된 남북 정부로서는, 그 이상의 마찰과 갈등도 공유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초기 남북한의 사회문제는 거울에 비춘 듯 닮은 부분이 많다. 흔히 남한 초기 좌익의 준동이라는 식으로 설명되는 반체제 운동은 우익민족주의자들에 의해 북한에서 똑같이 벌어졌다. 소설 <태백산맥>을 통해 친숙한 빨치산 역시 북한에도 존재했다. 구월산 부대로 대표되는 이들 '반공 빨치산'은
전쟁 전후 북한 지도부의 골칫거리였다. 김일성 본인도 민족주의자들의 암살시도와 반대시위를 수차례 겪어야 했다. 정치적 기반과
정반대의 정부가 들어섰으니 유혈사태는 예견된 거나 다름없었다. 6.25전쟁이 그토록 모질고 잔인한 비극일 수밖에 없었던 데에는
이런 배경이 숨어 있다. 이후 후퇴와 수복을 반복하면서 막대한 희생을 치룬 이유도 여기에 있다. 휴전 후에도 남북은 각각 반정부
세력을 무자비하게 토벌하고 나서야 정국 안정을 꾀할 수 있었다. 한국현대사의 가장 큰 비극은 사상적. 정치적 남북 공간과
어긋나버린 정부수립에서 잉태된 셈이다. 타자의 공간과 역사인식 우리에게는 이런 사실들이 새롭다. 이유가 있다. 그동안 우리는 무대와 조연이 없는 1인 활극의 독립 운동을 상정하며 역사를
배우고 또 가르쳤기 때문이다. 그 결과는 물론 역사적 상상력의 빈곤이다. 게다가 우리는 과거사 청산을 완수하지도 못했다. 그러니
남는 것은 여유와 배려가 아닌 피해의식과 콤플렉스 뿐이다. 우리는 '우리'의 독립운동에만 천착한다. 그 무대인 공간과 그 안의
타자에 대한 고민은 없으며,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김교수는 이런 콤플렉스와 빈곤한 역사인식이 반영된 결과물로 남한의 화폐를
꼽는다. 식민지 경험이 있는 국가의 화폐에는 일반적으로 독립운동가의 초상이 들어간다. 일본의 경우는 후쿠자와 유키치 등 근대화의 주역들이 그려져 있다. 하지만 우리 화폐에는 온통 조선시대 인물 뿐이다. 친일논란과 좌우논란에서 모두 자유로울 수 있는 근대 인물이 흔치 않기 때문이다. 해방 60여년 만인 이제야 간신히 10만원권에 김구 초상이 들어갈 예정이라니 늦어도 보통 늦은게 아니다. 정치적인 제약 외에도 역사인식을 바탕으로 한 공감대 형성이 쉽지 않다는 이야기이다. 그렇기 때문에 타자에 대한 이해는 반드시 필요하다. 다른 이의 역사를 아는 것은 곧 역사공간의 이해를 뜻한다. 그리고 그
공간의 또 다른 '인물'인 우리를 더 면밀히 이해할 수 있는 길이기도 하다. 이는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대표적 인물, 김구와
이승만이 활동한 공간의 예를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다. 알다시피 이승만은 전투적인 반공주의자이자 북진 통일론자였다. 보도연맹사건
등을 통해 공산주의자로 추정되는 사람이라면 가리지 않고 죽였다. 그에게 공산주의자는 민족도 동포도 아니었다. 이런 이승만을
이해하려면 당시 미국 사회의 분위기를 알 필요가 있다. 1921년부터 12년간 미국 대통령과 의회는 공화당이 장악했었다. 즉, 미국의 20년대는 경제적 풍요와 보수주의의 시대였다는 뜻이다. 헐리우드 영화, 메이저 리그, 포드 자동차 등 우리가 아는 미국 대중문화의 원형이 형성된 시기이기도 하다. 하지만 대공황과 함께 미국은 심각하고 장기적인 경기침체를 겪는다. 그리고 정치적-문화적으로 강력한 급진주의와 저항의 조류가 대두된다. 실제로 미국사회가 무너지지는 않았지만, 많은 중산층들은 혁명과 체제전복에 대한 공포에 시달렸다. 이들의 불안감은 러시아 혁명으로 실체를 갖게 된 부분도 있다. 훗날 매카시즘 광풍의 전조인 '적색공포' 현상이 이 때 처음 일어난 것도 우연이 아니다. 이승만은 바로 이 시기를 미국에서 보냈다. 완벽한 이상 국가의 전복을 꾀하는 공산주의자에게 그가 발작적인 증오를 갖게 된 건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게다가 미국은 9.11 전까지 한 번도 본토를 공격 받은 일이 없다. 이승만은 공포의 실체를 직접 겪지 않았기 때문에 타협의 여지도 망설임도 없는 맹목성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부분에서 드러나는 공간 경험의 바탕이 김구와 이승만의 결정적인 차이를 만들었다는 것이 김정인 교수의 주장이기도 하다. 김구가 활약했던 중국대륙, 그 중에서도 만주는 매우 독특한 땅이었다. 만주족은 중원을 정복한 후 만주 지역을 조상의 성지라 하여 민간인의 출입을 막았다. 하지만 이 조치는 결과적으로 러시아의 남하를 쉽게 했고 청 왕조가 약해지면서 조선, 일본 등 주변 지역에서 밀려난 이들이 만주로 모여들었다. 그리고 만주는 중국의 온전한 영토가 아니라는 주변국가의 인식도 이 때 생겼다. 만주국 성립 전까지 비교적 자유로운 독립운동이 가능했던 것은 이런 이유다. 그리고 현재 중국이 만주 대신 동북지구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이유도 주변국의 '만주 인식' 때문이다. 어쨌거나, 당시의 만주는 동아시아 유랑민들에게는 새로운 삶의 안식처이자 민족간, 문화간 교류의 매개지역이었다. 반면 만주는
동아시아 세계의 모순이 중첩되는, 변동의 진원지이기도 했다. 또한 모순의 돌파구로서 민족국가 간 이해관계가 상충될 때면 물리적
충돌의 각축장이었다. 실제로 국공내전 당시 격전지는 중국본토보다 만주지역에 더 많았다. 이런 지역에서 직접 전쟁과 합작을 보고
겪은 김구의 역사인식은 이승만과 또 달랐다. 김구는 기본적으로 민족주의 노선을 견지하면서도 끝까지 좌우합작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았다. 남북총선거 관철을 위해서는 스스로의 정치생명을 거의 포기해 가면서 김일성을 만나러 갔다. 그럴 수 있었던 이유를 김교수는 김구의 이런 경험에서 형성된 역사인식에서 찾는다. 반면 이승만의 정치행보와 언행에서 드러나는 역사인식은 당대 미국의 강력한 고립주의를 연상시키는 부분이 많다. 그렇기에 지도자의 역사인식은 생각보다 훨씬 중요하다. 듣기에 따라서는 오싹한 이야기이다. 역사인식의 형성은 '공간'이자 '타자'인 인문환경에 대한 이해에서 시작한다. 환경은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고, 그 사람이
기록한 역사에도 반영된다. 그리고 그 역사를 배운 이들은 역사인식을 공유할 수 있다. 독립운동가도 결국 사람이었다. 따라서 그들이
어떤 역사인식을 가지고 어떤 공간에서 어떤 맥락으로 활동했는가는 역사를 이해하는 근간이다. 하지만 교과서의 틀은 언제나 경직성과 완고함을 특징으로 하기에, 그 틀에 '인간'을 오롯이 반영 하기란 쉬운 작업이 아니다. 그렇더라도, 이는 꼭 필요한 일이다. 그리고 그 결과로 역사를 배우는 이들이 껍질을 깨고 역사적 공간을 바라볼 수 있다면, 우리 역사교육 현장에서 상상력과 여유가 부활하는 일도 꿈만은 아닐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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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의 인문학 : 아파트 공화국에서 다시 집을 생각한다 | 집의 인문학 6강 내 집 한번 지어볼까 : 내 집 짓기의 경험 | 느티나무 | 2011.10.25 | ||||||
8월 30일부터 가을학기 강좌 [집의 인문학 : 아파트 공화국에서 다시 집을 생각한다] 강좌가 시작되었습니다. 찾아라, 아파트 경쟁상대를! 2011 참여연대 느티나무 아카데미 가을강좌 ‘집의 인문학’은 작년부터 기획되었다고 한다. 의, 식, 주. 입고, 먹고, 거처하고.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꼭 필요한 것들이다. 이 중에서 주, 즉 집은 대한민국에서 ‘자산증식’의 수단으로 인식되는 경향이 여전하게 강하다. “주거문화, 부동산 문화를 변화시키는 씨앗이 되면 좋겠다”는 느티나무의 바람에 100% 동의하며 집의 인문학 강좌를 소개한다. 6강은 경기도 용인 죽전동에 두 필지를 매입해 직접 집을 지어 살고 있는 박인석 교수(명지대학교 건축대학)가 ‘내 집 짓기’의 경험을 들려주었다. # 설계 5개월, 건축 8개월
직업에 ‘가’자가 붙으면 그 분야에서 전문성을 인정받는 것이다. 진지하게 설계작업을 하는 사람이다. 건축가는 1만 건축사 중 약 1~2백명 정도다. # 녹지를 돈 주고 사야하는 단지 공화국 건축가들은 집을 설계할 때 집은 내 존재의 근거라고 생각하며 각별한 의미를 부여하는데, 그건 의미 없는 관념이라고 생각한다. 매일의 삶과 소망들이 내 존재의 근거이고 이를 채워주는 것이 집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단독주택이 매일의 삶과 소망을 실현시켜줄 가능성이 높다.
한국은 아파트 공화국이라기보다는 ‘단지 공화국’이다. 단지화 전략인데, 이것은 국가가 마땅히 해야 할 공원, 하천 같은 공공환경에 투자를 안 해도 되게 만들었다. 주변에 공공환경이 얼마나 없으면 청계천을 와서 거닐까? 선진국 도시는 거의 예외없이 걸어서 5분 안에 하천과 공원이 있다. 우리는 녹지에 대한 욕구를 해소하기 위해서 주말마다 버스타고 청계천도 가고 북한산도 간다. 단지화는 이런 욕구를 시민 각자가 돈을 내서 구입하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한다. 돈 주고 산 녹지다. 대신 정부는 돈 한 푼 안 쓴다. 아파트이던 단독이던 ‘단지’여야 평판이 좋다. 큰 단지일수록 녹지가 있고 주차장이 있다. 단지는 내 돈 주고 산 사막의 오아시스다. 우리나라의 공공영역은 삭막하기 이를 데 없다. 단지화 전략은 정부입장에서는 영민한 전략이다. 돈 안들이고 주거문제를 해결하고 건축산업까지 부양시켰다. 이와 비슷한 게 사교육이다. 정부는 교육에 투자를 안 한다. 대신 중산층이 지출하는 사교육비가 사교육 산업을 담당하고 있다. 아파트 단지와 경쟁할 주택모델이 나타나야 한다. 이 주택은 공공공간과 맞닿는 건축으로 지어야 한다. 마당있는 집이 소망인 나는 아파트를 살 때도 ‘땅 찾기’를 했다. 아파트에서는 1층이나 최상층이 가능하다. 홍제동에서 마당을 쓸 수 있는 아파트 1층에서 6년을 거주했다. 즐겁게 살았다. 그런데, 누가 침입하면 어떡하느냐며 민원이 들어왔다. 속내는 “왜 마당을 즐기는 행위를 하느냐”였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땅의 조건은 집 가까이에 녹지가 있고 제1종전용주거지역이며 지구단위계획이 있는 곳이다. 단독주택 지을 땅을 찾으러 판교신도시, 죽전지구, 동백지구 등을 돌아다녔다. 살구나무집은 바로 뒤가 녹지이고 제1종전용주거지역이었다. 땅을 살 때 제1종전용주거지역인지 아닌지 유심히 봐야 한다. 구분 표시는 지역마다 다를 수도 있는데 죽전동은 제1종전용주거지역이 R1이었다. R1은 밀도가 낮아 주로 외곽에 배치된다. 이것은 자연과 가까워진다는 뜻이다. 녹지가 가깝고 용적률이 낮아서 땅값도 싸다. R1은 층수도 2층 이하이고 1층에 점포를 놓을 수 없다. 허용용도도 다중주택을 제외한 단독주택이거나 2가구 이하의 다가구주택이다. R1, R2 용도를 살펴봐야 한다.
# 제안과 도전으로 평당 5백에 집을 짓다 단독주택 하면, 집장사가 짓는 집이거나 ○○사장님 댁 집이다. 집짓기의 양극화다. 건축비는 다가구 주택을 지으면 평당 3백만원대이고 ○○사장님 댁 집처럼 작품주택을 만들면 7백만원 대이다. 나는 건축가에게 평당 “470에 맞춰 달라. 최대 5백이다”라고 말했다. 참고로 국토해양부가 고시한 아파트 기본형건축비는 평당 460~480만원이다. 건축가라면 일반시민의 욕구도 충족시킬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고 건축가가 이에 동의했다. 살구나무집은 공사비 조정과정과 건축가의 제안과 도전을 거쳐 최종 시공비가 평당 505만원이 나왔다. 5백만원 선이면 중산층용 단독주택을 지을 수 있을 것 같다. 재견적을 3번이나 받았다. 조남호 씨는 시공업체에 다가구 건축 시공비인 평당 300~350으로 견적을 내라고 하고 거기에서 필요한 항목만 올렸다. 싼 것도 중요하지만 꼭 필요한 곳은 좋은 자재를 썼다. 건축가에게 맡겼을 때 시공비가 많이 나오는 이유는 다시 하는 게 많아서다. 건축가는 디테일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유명한 어느 건축가에게 “얼마에 집을 짓냐?”고 물었더니 “평당 750만원, 싸면 650만원”이라고 했다. 왜 이렇게 비싸냐고 물으니 “박 교수님, 거기서 평생 사실 거 아닙니까? 아파트는 끽해야 10년입니다. 30년 가도 괜찮으려면 비싸질 수밖에 없어요.”라고 하더라. 실용적인 집은, 단열은 기본이고 겨울에 춥지 않고 여름에 덥지 않은 집이다. 그래서 되도록 겹집이어야 하고 창호는 좁은 게 좋다. 막 지었어도 3년 된 듯한, 10년이 지나도 3년 된 듯한 집이어야 한다. 이런 느낌을 주기 위해 살구나무집 외벽은 벽돌로 했고 지붕은 징크로 했다. 외벽에 돌을 붙이는 집도 있는데, 돌은 내장재지 외벽에 쓰일 자재가 아니다. 평지붕은 10년 지나면 문제가 생긴다. 품격있는 집은 솔직한 재료를 쓰는 것이다. 솔직한 재료는 자기 재료를 드러내 싸도 질박한 느낌을 준다. 집의 형태나 담장이 동네 풍경에 보탬이 되도록 담장을 올리되 흙을 두기도 했다.
# 아파트 한 채로 단독주택 지을 수 있어야 아파트의 동선을 도식화하면 나무구조이다. 아파트는 사람이 다니는 루트가 한 가지이다. 공용 공간에서 만날 사람이 한정돼 있다. 아파트 몇 동 몇 호를 찾아가는 길이 정해져있다. 반면, 그물망 구조는 선택경로가 다양하다. 이 골목에서 들어가고 저 골목에서 들어간다. 만날 사람이 열려있다. 그물망이 소속감을 북돋는 구조라면 나무는 소집단을 만드는 구조이다. 그래서 단지성을 해체하는 것이 주거건축의 큰 과제이다. 단독주택에 살면 청소, 택배, 방범, 난방 등이 불편하다고 생각한다. 청소를 불편하다고 생각해야 할까? 아파트에 사니까 시민이 공공서비스 수혜의 일부를 담당하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시민의식이 없어지는 게 아닐까싶다. 아파트에 살면서 공용공간은 책임지지 않고 개인공간만 책임지려고 한다. 두 번째 쟁점은 집짓기를 중산층이 감당할 수 있느냐이다. 올해 4월 이정희 의원이 발표한 ‘각 지자체별 종부세 부과 주택 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전국 1418만채의 공동주택 및 단독주택 중 1세대 1주택 종부세 과세 대상인 12억원 이상인 주택은 전국에 총 37,461채(전체주택의 0.26%)였다. 살구나무집을 지을 때 10억 정도 들었는데, 그럼 내가 상위 2~3%에 해당하는 사람인가? 그렇지는 않다. 분당 있을 때 살던 47평 아파트가 제일 비쌀 때 11억이었고 쌀 때가 8억5천이었다. 그 아파트의 대지지분은 23평이었고 땅값은 평당 2850이었다. 말도 안 되게 아파트 땅값이 비싼 거다. 아파트 한 채를 단독주택과 바꿀 수 있다면, 중산층이 감당할 수 있다. 그러면 아파트와 바꾼 집이 훨씬 많아 질 수 있다. 땅콩집도 좋은 본보기다. 아직 우리나라는 허용되지 않지만 외국의 타운하우스도 좋은 예다. ▲ 외국의 타운하우스 모습. 사진=http://www.mountaingetawaysinfo.com/the-confusing-parts-of-townhouse-insurance/ 쟁점 세 번째는 설계비와 건축가의 가치이다. 보통 사람들은 설계비를 많이 주는 것을 이해를 못 한다. 건축설계 기준은 공사비의 설계비(7%) 더하기 감리비(1.5%)다. 공사비를 3억~5억이라고 보면 3천~4천만원이다. 설계는 짓고 싶은 집과 예산 사이의 갈등을 조율하는 과정이다. 건축가는 시공현장에서 빛나는 지혜를 발휘한다. 건축가가 시공현장에서 일하는 거 보면, 나는 저렇게 못하겠다 싶더라. 마지막으로 유지관리비이다. 살구나무집(난방면적 70평)과 분당 아파트(전용면적 40평)의 유지관리비(도시가스․전기․ 상하수도 요금, 보안업체 관리비)를 비교했다. 2월에 도시가스 요금이 백만원이 넘어 깜짝 놀랐는데, 베이크 아웃(bake out) 때문이었다. 이후에는 많이 내려갔다. 1년을 비교하면 유지관리비는 살구나무집이 1만원 정도 더 나올 것 같다. 보안업체 관리비까지 포함한 비용이다. 아파트가 바뀌려면 경쟁상대가 있어야 한다. 아파트와 바꿀 수 있는 집, 아파트만큼 경제성이 있는 집이어야 한다. 살구나무집은 어느 정도 성공했다고 생각한다. 굉장히 만족하며 산다. Q&A 2. 단독주택지 보존은 불가능한가? 참고 ② 이정희 의원의 ‘각 지자체별 종부세 부과 주택 조사 보고서’ 보러가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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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1 이후 10년, 세계는 어디로 가는가 | "이명박식 '원교근공'은 틀렸다" [9.11강좌 5강] | 느티나무 | 2011.10.20 | ||||||
참여연대 아카데미 느티나무와 프레시안은 9.11 10년을 맞아 9월 5일부터 매주 월요일 5회에 걸쳐 '9.11 이후 10년, 세계는 어디로 가는가'를 주제로 연속 강연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10월 17일 열린 마지막 강좌에서는 이남주 성공회대 교수님이'G2 시대의 세계질서와 한반도'라는 제목으로 강연해 주셨습니다. 아래는 프레시안 김봉규 기자가 요약 재구성한 이남주 교수 강연의 주요 내용입니다. ☞강연 상세 안내 보기 ▲ 이남주 성공회대 교수 ⓒ프레시안(최형락) G2 시대를 논하기에 앞서 과거 중국의 위상에서부터 출발해보자. 근대화 이전 시기 세계 차원에서 힘의 분포를 보면 가장 중요한 기준은 인구의 규모와 경제력이었다. 인구 규모를 보면 중국이 압도적 1위였다. 당시 경제력에 관한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경제사가들이 합의한 바로는 전 세계 경제의 약 3분의 1의 비중을 차지한 것으로 보인다. ▲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과 원자바오 중국 총리 ⓒAP=연합뉴스 중국이 대외적 팽장을 할 수 없는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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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ODA의 길을 묻는다 | 한국ODA의 길을 묻는다 5강 | 느티나무 | 2011.10.19 | ||||||
참여연대 국제연대위원회는 9월 8일부터 5회에 걸쳐 '한국 ODA의 길을 묻는다' 시민강좌를 진행합니다. 마지막 강연 '여성, 개발현장에서 소외되다' 중 김현정 글로벌발전연구원 평가컨설팅 실장의 강연을 간단하게 소개합니다. 강의 정리는 자원활동가 송유림 님께서 맡아 주셨습니다. 강좌소개 보기> 여성, 개발현장에서 소외되다
빈곤의 여성화
Women In Development 접근 (WID) 쌀을 나눠줄 때도, 밭일하느라 바쁜 여성들을 한데 모아서 주는 것이 오히려 그들의 일상을 방해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게다가 나눠준 쌀을 남자들이 팔아서 유흥비로 사용하기도 한다. 교육 사업을 할 때도 여자 아이들은 교육을 받아서 쓸 때가 있는 것도 아닌데 왜 학교에 보내야 하냐고 되물었다. 이렇게 개발사업이 실질적인 효과를 거둘 수 없는 상황들이 발생하는 것을 교훈삼아 다시 한 번 ‘빈곤의 여성화는 왜 발생할까’ 그 원인에 대해 연구했다. 수입원도 부재하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여성의 수입에 대한 컨트롤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기회의 불평등이 아니라 권리의 불평등이라는 것이다. 격리, 조혼, 신부지참금, 여성할례 등도 역시 여성이 권력을 갖지 못하기 때문에 생기는 일로 보고 여성에게 뭘 준다고 바뀔 문제가 아니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생물학적 성별이 여성이라는 이유로 사회적 역할을 규제받게 되는 상황을 극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Gender And Development’적 접근이 이루어졌다.
Gender And Development 접근 (GAD, 젠더와 개발)
WID와 GAD의 차이 여성이 개발현장에서 소외됐다고 하는데 진짜 소외됐나, 소외되는 근본적인 원인은 무엇인가. 그들은 무엇을 해야 하고,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고민해봐야 한다.
이번 강의는 ‘한국ODA의 길을 묻는다’의 마지막 강의로 개발현장에서 소외된 여성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여타의 이슈들과 더불어 이 문제도 사회적 인식과 고정관념, 구조의 문제인지라 쉽사리 해결방안을 강구하기 어려워 보였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문제들에 관심을 갖게 되면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더불어 수원국 뿐만 아니라 국내의 여성문제도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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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ODA의 길을 묻는다 | 한국ODA의 길을 묻는다 4강 | 느티나무 | 2011.10.18 | ||||||
참여연대 국제연대위원회는 9월 8일부터 5회에 걸쳐 '한국 ODA의 길을 묻는다' 시민강좌를 진행합니다. 네번째 강연 '분쟁국 원조와 원조의 군사화, 새로운 갈등' 중 배재현 경제인문사회연구회 평가팀 전문위원과 박정은 참여연대 평화국제팀장의 강연을 강의 순으로 간단하게 소개합니다. 강의 정리는 자원활동가 송유림 님께서 맡아 주셨습니다. 강좌소개 보기> 1부 분쟁 및 취약국의 정의와 취약국지원 방안 강사 : 배재현 경제인문사회연구원 평가팀 전문위원 9.11 테러 이후 취약국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다. 하지만 ODA를 하는 사람들도 취약국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아직까지 국제사회에서 합의된 취약국의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다. 한편 아프간에서 취약국가를 담당하는 기구인 INCAF가 취약국 이해에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니 이에 대해 알아보겠다.
분쟁 및 취약국의 정의 취약국을 정확한 명칭은 ‘분쟁 및 취약국가’이다. 이유는 분쟁지역에서 취약국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취약국에 대한 정의는 국가가 시민들의 안보와 복지를 위한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는 경우, 빈곤, 테러, 질병 등이 발생될 것이 예상되는 경우, 국가들간의 상호관계가 어려운 국가라고 한다. 예를 들어 아프가니스탄은 도와주고 싶어도 도울 수 없을 정도로 접근이 어려운 나라이다. 취약국을 선정할 때에는 정치, 정부, 안보 세가지 요인을 고려한다. 국가의 권위. 국민들이 부여하는 국가 정당성. 행정서비스를 제공할 능력과 의지. 외부적 안보 위기. 내부의 쿠데타 등등을 따져본다. 월드뱅크나 다양한 국제 기구가 이를 고려하는데 취약국에 대한 개념에 근거해서 지정한다기보다 정치적 관계를 우선적으로 고려하고 있다.
INCAF와 취약국가원칙 원조를 담당하는 월드뱅크, UNDP같은 선진원조기관등이 있지만 차별화된 지원방식이 있어야 원조효과성이 높아지기 때문에 INCAF를 만들었다. 이 기관은 공여국과 분쟁국의 파트너쉽을 조정하고 취약국가에 대한 대응을 향상시키기 위해 만들어졌다. Whole of Government 시스템에 의해 원조가 어느 한 쪽에 치우치는 것을 방지하고 개발협력을 담당하는 부처, 경제, 국방부 세 부처가 이상적으로 조화되어 활동할 수 있도록 하는 곳이 INCAF이다. 주요업무는 주로 연구이지만 이 기구가 생긴 가장 큰 목적은 취약국가원조 원칙 10가지에 의거한 국제대화를 하기 위함이다. 핵심은 복수 이해관계자가 협의하는 구조인데 한국은 참여하지 않고 있다. 한국정부는 국제 사회가 한국과 얘기하길 원하는 만큼, DAC가입 국가답게 함께 참여해서 끊임없이 얘기해야 한다. 한국은 세계흐름과 원칙이 어떤 건지 알아야 취약국가를 지원할 수 있을 것이다.
취약국인 아프가니스탄 아프가니스탄은 911 테러 이 후 많은 원조를 받고 있고 한국도 많은 지원을 하고 있다. 하지만 ODA는 단순히 도와주는 게 아니라 정치적 개입을 수반하기 때문에 신중히 고려해야만 한다. 취약국가에 원조를 실시함에 있어서 파트너 국가에 해를 입히지 않고 원조효과성을 높일 수 있게 해야 한다. 아프간 원조를 할 때 미국이 본 프로세스를 만들었는데 탈레반을 배제했다. 이렇게 되니 정당성과 안보에 문제가 생겼다. 또한 원조 사업은 NGO가 주로 진행한다. 따라서 아프간 주민은 정부보다 NGO를 더 신뢰하게 된다. 그러나 NGO를 통한 원조규모는 기대치만 높여놓고 실제는 턱없이 부족하다. 대부분 수원국 정부는 중앙집권적이고 국제 사회에 의존하다보니 주민 기반이 취약하다. 따라서 수원국 정부가 주인의식을 갖고 합법성을 가질 수 있게 정부 거버넌스를 향상시키는 것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한국은 INCAF나 국제 사회 취약국 지원 원칙을 바탕으로 ODA전략을 수립하고 지원해야 한다. 공식적으로 취약국으로 명명하는 것은 국제사회에서 무례를 범할 수 있기 때문에 지양해야 한다. 또한 INCAF국제대화에 일원으로 참여하고 선진원조기관과 소통해야 할 것이다.
2부 분쟁국 원조와 원조의 군사화 강사 : 박정은 참여연대 평화국제팀장 분쟁국가에 원조를 할 때는 ‘왜’ 하느냐에 대한 물음을 재고해봐야 한다. 원조에는 ODA를 통해서 나가는 원조가 많지만 군을 통해 나가는 원조가 더 많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ODA가 매우 중요하다고들 하지만 “왜 이들의 삶이 파괴됐을까. 왜 원조를 해야될까” 라는 얘기는 지금껏 하지 않은 것 같다. 또한 한국이 어떻게 기여할 것이냐에 대한 원칙에 대해 질문하고 싶다. 국격제고는 결과이지 ODA원칙이 될 수 없다. 국제관계와 강대국의 이해관계를 벗어난 취약국가는 거의 없다. 대표적인 분쟁국인 아프간, 이라크도 국제정치와 매우 큰 연관이 있기 때문에 그 문제를 벗어나서 원조만을 논하는 것은 공허한 일이다.
분쟁국가 아프간, 이라크 이라크와 아프간을 빼놓고 분쟁국을 이야기할 수 없다. 정치분야, 안전분야가 가장 취약한 나라이다. 군사적 행동을 하고 있는 많은 나라들이 재건에도 나서고 있지만 전쟁비용에 비해 훨씬 부족하다. 전쟁비용은 원조비용보다 언제나 많다. 한 쪽에서는 언제나 파괴하고 있는데 한 쪽에서는 도와주고 있는 것이다. 아프간에 파견된 미군은 10만명을 육박하는데 이 말은 아프간의 분쟁이 더 심화되고 있다는 뜻이다. 군사적 갈등이 계속되고 있는 상황에서 원조의 효과성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분쟁부터 평화롭게 해결되어야 한다.
한국의 이라크, 아프간 지원 한국이 분쟁국에 지원하는 원조의 상당부분이 재건지원이 아닌 파병부대 주둔비용으로 사용되고 있다. 아프간, 이라크에 대한 지원은 안보문제로 우선 접근하고, 한미동맹 차원에서 군대파병 방식을 주로 취한다. 그러다보니 평화재건 활동이라는 주된 활동내역은 외부에 잘 알려지지 않고 비공개되기 일쑤이다. 전쟁 직후에 무상원조가 집중적으로 이루어졌지만, 이 원조도 군대파병 비용에는 훨씬 못미친다.
원조의 군사화, 이라크 한국 정부는 이라크 재건지원을 위해 파병을 한다고 주장해왔는데, 일례로 이라크 재건지원예산은 자이툰 파병예산의 10분의 1도 되지 않았다. 게다가 재건지원예산의 반도 치안유지비용이었다. 한국군은 전쟁이 전혀 일어나지 않았던 쿠르드 지역에 주둔하면서 쿠르드 정보국을 지원하고 쿠르드 민병대 훈련을 지원하기도 했는데, 이것은 정치적으로 굉장히 민감한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 일이었다. 이게 이라크의 평화재건을 위한 지원일까.
ODA와 아프간 지방재건팀(PRT) 미국의 점령정책의 일환으로 고안된 지역재검팀(PRT)은 대부분 군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반군퇴치부터 인도적 지원 활동까지 한다. PRT는 국제안전군(ISAF)의 지휘를 받고 있다. 2003년부터 소수인원만 PRT로 파견한 정부는 지난해 본격적으로 460여명의 PRT를 아프간에 파견했다. 이 중 군 병력이 321명이다. 한국 정부는 아프간 PRT 파견을 아프간의 인도적 재건 사업을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PRT는 원조로 책정된 ODA예산을 쓰고 있다. 지난해만 하더라도 ODA 예산의 80% 이상이 군부대 건설에 쓰였다. 하지만 치안이 점점 더 안 좋아지고 있기 때문에 현재 바깥활동이 불가능한 것은 물론, 애초 계획했던 재건사업들도 제대로 이행되지 못하고 있다.
재건활동 실패! 왜? 왜 실패할 수밖에 없을까? 원조를 하는 주체가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고비용 저효율일 수밖에 없다. 또한 정치적 이해관계 때문에 단기적인 프로젝트 중심으로 재건 활동을 진행할 수 밖에 없고 지역개발보다는 군사적 목적에 따라 가시적 사업에 치중하고 있다. 또한 원조가 나라별 PRT예산과 규모가 다 다르게 책정되고 현지정책, 현지인과는 무관하게 진행되고 전략적 가치에 따라서만 진행된다. 큰 규모의 원조자금에 대한 사전 조율과 평가가 없는 것도 문제이다. 게다가 PRT는 군에 의한 원조활동이기 때문에 다른 국제구호단체의 활동을 위축시키고 있다. 이 같은 개입은 오히려 부정적인 효과를 낳고 있다. 안보문제에 집중하느라 장기적 통합 구축은 무시하고 정부는 부패해서 국가를 재건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우리가 숫자에 무감각해지고 있지만 하루에 죽어가는 사람들의 숫자를 보면 분쟁국은 도저히 정상적인 사회라고 볼 수가 없다. 밑 빠진 독에 물 붓는다고 얘기하기 전에 왜 밑이 빠졌나를 생각해보자. 혹시 우리가 독을 깨고 있는 건 아닐까. 한국이 군사력으로 원조를 하고 있다는 사실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이번 강연은 ‘원조의 군사화’라는, ODA의 여러 섹터 중에서도 다소 생소한 주제를 다루었다. 군사적 개입과 원조는 별개의 영역이라고 여겼었는데 자금의 통로, 이루어지는 방식, 절차와 평가 등 많은 부분에서 문제점들을 같이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또한 전쟁과 재건이 동시에 이루어지고 있는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와 같은 일이 취약국에서 일어나고 있음을 상기했고 이에 앞서 왜 그런 일이 일어나는가에 대한 성찰을 할 수 있었다. 국제 사회가 이를 방지하기 위해 INCAF라는 기구를 만들어 소통하려는 모습은 고무적이다. 세심한 연구와 합당한 ODA를 통해 취약국의 분쟁 상황이 개선되었으면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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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의 인문학 : 아파트 공화국에서 다시 집을 생각한다 | 집의 인문학 5강 어떤 주택정책이어야 하는가 | 느티나무 | 2011.10.18 | ||||||
8월 30일부터 가을학기 강좌 [집의 인문학 : 아파트 공화국에서 다시 집을 생각한다] 강좌가 시작되었습니다. 헌법이 담은 토지공개념을 정책으로 실현하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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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1 이후 10년, 세계는 어디로 가는가 | "9.11의 시대, 월스트리트에서 종언을 고했다" [9.11강좌 4강] | 느티나무 | 2011.10.13 | ||||||
참여연대 아카데미 느티나무와 프레시안은 9.11 10년을 맞아 9월 5일부터 매주 월요일 5회에 걸쳐 '9.11 이후 10년, 세계는 어디로 가는가'를 주제로 연속 강연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10월 10일 열린 네 번째 강좌에서는 안병진 경희사이버대 교수님이 '사라져 가는 아메리칸 드림과 새로운 체제로의 이행의 시각'이라는 제목으로 강연해 주셨습니다. 아래는 프레시안 곽재훈 기자가 정리한 안 교수님의 4강 강의소개 기사입니다. ☞강연 상세 안내 보기 오는 17일 열리는 마지막 강좌는 이남주 성공회대 교수님의 강의로 'G2 시대의 세계질서와 한반도'라는 주제로 테러와의 전쟁이 거시적 국제정세에 미친 영향 등을 조망해 봅니다.
"9.11 테러, 미국이라는 비행기를 떨어트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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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의 인문학 : 아파트 공화국에서 다시 집을 생각한다 | 집의 인문학 4강 집 살live 것인가, 살buy 것인가 | 느티나무 | 2011.10.10 | ||||||
8월 30일부터 가을학기 강좌 [집의 인문학 : 아파트 공화국에서 다시 집을 생각한다] 강좌가 시작되었습니다.
부동산 시장에 민주주의 통제는 가능한가 2011 참여연대 느티나무 아카데미 가을강좌 ‘집의 인문학’은 작년부터 기획되었다고 한다. 의, 식, 주. 입고, 먹고, 거처하고.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꼭 필요한 것들이다. 이 중에서 주, 즉 집은 대한민국에서 ‘자산증식’의 수단으로 인식되는 경향이 여전하게 강하다. “주거문화, 부동산 문화를 변화시키는 씨앗이 되면 좋겠다”는 느티나무의 바람에 100% 동의하며 집의 인문학 강좌를 소개한다. 4강은 MBC 김재형 피디가 강의했다. 김재영 피디는 PD수첩에서 부동산 문제를 심도 있게 다뤘으며 책『하우스 푸어』의 저자이다. # ‘하우스 푸어’를 왜 썼나
▲책 ‘하우스 푸어’ 『하우스 푸어』는 2006년 판교 취재과정에서 생긴 ‘우리는 올바른 (부동산) 정보를 갖고 있는가?’라는 질문에서 시작됐다. 부동산 유통정보의 실체를 알리고 싶었다. 취재당시 판교는 비닐하우스가 있는 그냥 땅이었다. 집을 사야하는 입장에서 정보를 유심히 지켜봤다. 2008년 미국은 하우스 푸어(House Poor)가 유행이었다. 하우스 푸어는 집 때문에 가난한 사람이다. 또한 전 세계가 정점을 찍은 집값이 떨어지는 추세였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지 않았다. 당시 강남 재건축을 상징하는 말로 ‘은마가 금마가 된다’는 게 유행이었다. 이런 유의 담론이 지속되고 있었다. “아파트는 계속 황금알을 낳는 거윈가?”라는 시각으로 강남 재건축 시장을 바라보게 됐다. DJ정부는 재건축 규제를 모두 풀었다. 이 재건축을 시작으로 PD수첩 프로그램을 제작해 2009년부터 다섯 번에 걸쳐 방송했다. 강남 재건축의 상징인 은마아파트, 도곡동 K아파트, 가락 시영아파트를 다뤘다. 도곡동 K아파트는 인터넷에 (아파트 때문에) 집주인이 자살했다는 소문이 있었다. 가락 시영아파트는 6천 세대가 넘는 아파트로 가장 큰 재건축 단지였다. 그렇지만 당시 실제 사는 세대는 1천 세대정도였다. 현장을 갔더니 현실은 달랐다. 2009년, 우리나라도 하우스 푸어가 시작되고 있었다. K아파트는 실제 자살한 사람이 있었고, 2백세대 중 70세대가 하우스 푸어였다. 가락 시영아파트에는 재건축에 필요한 분담금을 내도 깡통이고, 분담금을 안 내려고 아파트를 팔아도 깡통인 하우스 푸어들이 있었다. 도곡동과 가락동을 보고 얼마나 많은 하우스 푸어가 있는지 궁금해졌다.
# 욕망의 땅, 강남의 재건축(2009년 10월27일 방송) 2000년부터 입법․사법․행정부 1급 고위 공직자들의 재산신고가 시작됐다. 이들 3천5백명 중 340명 정도가 재건축 아파트를 소유했다. 사법부가 제일 많았고 행정부, 입법부 순이었다. 1급 고위 공직자들은 고급정보를 접하는 파워엘리트들이다. 2006년 이후 재산신고자 중 재건축 아파트를 산 사람이 없었다. 2006년 말은 단군 이래 가장 높게 아파트 가격이 올랐던 시기다. 그런데도 방송과 신문은 재건축을 사두면 값이 오른다며 중산층을 유혹했다.
▲ 2009년 10월 27일 방송된 ‘욕망의 땅, 강남의 재건축’, PD수첩 캡처 DJ가 규제를 풀자 파워엘리트들이 재건축 아파트를 많이 샀다. 은마아파트 442세대 등기부 등본을 다 떼어 분석을 했다. 집 주인이 실제 사는 곳은 많아도 40%였다. 60%는 다 전세를 줬다. 2001년 이후에 집을 산 사람은 평균 빚이 3억이었다. 가락 시영아파트에 사는 상당수는 하우스 푸어였다. 하우스 푸어끼리 싸우고 있었다. 시영아파트로 취재 가기 전날 고등법원에서 재건축 무효판결이 났다. 재건축을 추진하는 측과 반대하는 측이 낫을 들고 상대방 플랭카드를 찢고 그랬다. 카메라를 들이대면 사람들이 더 흥분하더라. (청중 웃음) 2006년 말에 17평짜리 아파트를 8~9억에 샀는데 분담금을 더 내라고 했으니….
# 재건축 덧에 걸린 사람들(2009년 11월 17일 방송) 한국사람은 ‘기회비용’이란 개념이 없다. 10억을 은행에 연리 5%에 1년을 넣어두면 5천만원이 생긴다. 10억짜리 아파트에 사는 것은 그냥 월세 5천을 내고 사는 것이다. 2006년 말에서 2007년까지는 (아파트에서) 기회비용 이상을 뽑았다. 그렇지만 그 이후 아파트 값이 빠졌다.
▲ 2009년 11월17일 방송된 ‘재건축 덧에 걸린 사람들’, PD수첩 캡처 우리나라 부동산 시장은 재건축 분양시장인데, 신도시 분양과 도심 분양이 있다. 2009년 말에서 2010년의 분양시장은 굉장히 재미있는 시장이었다. 보통 아파트는 분양 후 3년 뒤에 입주한다. 앞에서 말했듯이 2006년 말에서 2007년은 단군 이래 최고로 아파트 값이 올랐던 해이다. 분양가도 폭등했던 시기다. 분양받고 3년 뒤인 2009년은 이미 집값이 떨어지고 있었다. “여의도와 목동의 프리미엄을 다 가져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달았던 B아파트의 분양가는 평당 2천4백이었다. 2009년 말 할인분양을 했는데, 11억 하던 50평대가 9억5천이었다. 재건축은 투기성이 짙다. 분양받은 사람 대부분이 하우스 푸어였다. 광교의 33평 아파트 프리미엄이 5천이었다. 이 아파트를 4억5천에 사는데 3억을 대출받았다고 치자. 3년에 연 6% 이자면 5천4백만원이 이자다. 프리미엄은 기회비용이라고 볼 수 없다. 2009년에 제보가 엄청 많이 들어왔다. 버블 세븐 지역인 용인, 인천자유지역, 판교, 김포, 일산, 서울의 시내를 다녀봤다.
# 2010 부동산, 아파트의 그늘(2010년 1월 12일 방송) 판교 아파트 1천 세대 등기부 등본을 조사했다. 1천 세대의 평균 빚이 3억이었다. 많은 중산층이 빚에 허덕인다는 것이다. 지금은 수익이라도 아파트 가격이 떨어지면 어떻게 되겠는가? 일산의 한 아파트 역시 위험했다. 김광수경제연구소 선대인 부소장이랑 함께 작업을 해봤는데, 약 1백만 가구를 하우스 푸어로 보더라. 소득대비 집값 비율(PIR, Price to Income Ratio)이 너무 높은 것이다.
▲ 2010년 1월 12일 방송된 ‘2010 부동산, 아파트의 그늘’, PD수첩 캡처 ‘모델하우스’ 얘기를 해야겠다. 아파트를 사면 부자가 된다는 맹신이 왜 생겼을까? 우리는 불안과 희망을 심어주는 사회다. 아파트를 지금 사지 않으면 뒤쳐진다는 불안이 있고, 또 한편에서는 지금 아파트를 사면 부자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준다. 그런데, 모델하우스를 가면 아파트가 으리으리하다. 조명발, 고급가구에 호수가 꼭 있는 조감도까지. 신도시는 중감도가 중요한데 호수 조망이 꼭 있더라. (청중 웃음) 사람들이 모델하우스를 돌아보며 “내 집이 되면 행복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그런데 돈이 모자란다. 모델하우스를 나서면 은행이 대기해 있다. ‘내 집 마련의 꿈’을 극대화 시킨 것이 바로 모델하우스다. 모델하우스도 분양가에 다 포함된 거다. 내 집 마련의 꿈을 위해 거액을 들여야 할까? 주택 자가비율이 높다고 선진국이 되는 게 아닌데, 사회가 부추긴다. 부동산 가격이 폭락해도 건설사는 손해 보지 않는다. 언론사의 많은 주요 보직 간부가 아파트에 산다. 가격이 폭락한다는 얘기를 하는 게 쉽지 않다. 많은 신문사 광고가 부동산이다. 구조적으로 언론이 부동산을 제대로 보도할 수 없다. 내 집 마련의 꿈은 신화다.
# 인천은 세일 중(2010년 2월 9일 방송) 신도시를 다녀보니 문제가 많았다. 하우스 푸어가 많았다. 다녀보니, 눈에 띄는 지역이 있더라. 우리나라가 얼마나 거대한 사기집단인지는 송도 국제도시를 보면 알 수 있다. 분양당시 대학교가 들어오고, 초고층 건물이 들어서고…
▲ 2010년 2월9일 방송된 ‘인천은 세일 중’, PD수첩 캡처 인천자유구역은 국가가 땅만 댔다. SPC(Special Purpose Company)라는 특수목적법인이 있다. 연세대SPC가 아파트를 분양해서 나온 이익의 일부를 연세대에 줘서 건물을 짓는 것이다. 아파트를 판 돈으로 학교 짓고, 공원 만들고…. 그래서 아파트 분양이 안 되면 짓지 못한다. 대표적인 예가 인천자유구역 청라지구다. 청라지구는 토지공사가 사기분양을 한 거다. 분양 당시 장담했던 개발계획이 무산, 연기되면서 1천4백만원 했던 분양가가 1천 이하로까지 떨어졌다. 지하철이 들어온다고 했지만, 없다. 그래서 인천의 구도심 인프라를 신도심으로 이전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인천대가 있던 제물포는 슬럼화 됐다.
# 자본주의 욕망만 작동한 시장 앞으로 어떻게 될까? 아파트 가격, 시장이 어떻게 변할까? 변화의 조짐은 있다. 현재 PIR이 너무 높다. 저소득 대 고소득, 20대 대 40대 등 세대간 소득격차도 너무 크다. 여론시장도 변하고 있다. 아파트 가격에 현혹되지 않는다. 살(buy) 것이냐? 살(live) 것이냐의 정치적 상황도 바뀌고 있다. 2008년 총선은 뉴타운 놀이였다. 서울 48석 중 40석을 한나라당이 가져갔는데, 절반 이상이 뉴타운 바람이었다. 왕십리 뉴타운 쪽에서 자살 직전까지 갔다는 제보를 많이 받았다. 세입자가 아니라, 15평 정도의 지분을 가진 집 주인들이 뉴타운을 막아 달라고 제보했다. 당장 집은 부순다는데 돈이 없어 갈 곳도 없는 사람들이었다. 빚을 져야 그나마 이사가 가능했고 그것도 의정부까지 나가는 상황이었다. 지분 확보를 위해서는 돈을 더 내야한다는 불안감, 이사를 위해 져야 하는 빚, 들어올 때 다시 1~2억을 빚져야 했다. 다음 국회의원을 뽑을 때, 이들은 어떤 선택을 할까? 뉴타운 정책 결과를 보면, 변화가 도래할 시기가 오지 않을까 싶다. 지난 분당 재보선에서 민주당 손학규 후보가 당선됐다. 그때, 분당 리모델링론으로 이겼다는 분석이 있었는데 올바른 분석이 아니다. 민주당은 전셋값 안정을 바라는 많은 젊은층, 집을 가졌어도 빚이 많아 허덕이는 하우스 푸어들을 대변해야 했다. 분당 리모델링론은 한나라당이 만들어 놓은 뉴타운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거다. 우리나라 부동산 시장은 자본주의 욕망만 작동했지, 민주주의는 작동하지 않았다. 인천 청라지구, 서울의 뉴타운, 재건축 등은 민주적 통제가 작동하지 않았다. 예전에는 대법원이 부동산 판결에서 사업이 진행되는 쪽의 손을 들어줬다. 그런데 최근에는 민주적 통제가 없는 곳은 제재를 가하기도 한다. 지금 부동산 시장이 균형을 찾아가는 과정에 있다고 본다. 그 과정에 우여곡절이 있을 것이다. 주거시장 변화를 위해서는 정책이 바뀌어야 한다.
참고 ① 기회비용(機會費用) : 하나의 재화를 선택했을 때, 그로 인해 포기한 다른 재화의 가치를 말한다. 즉 포기된 재화의 대체(代替) 기회 평가량을 의미한다. 어떤 생산물의 비용을, 그 생산으로 단념한 다른 생산기회의 희생으로 보는 개념이다(위키백과). 예를 들어 내가 100만원을 가지고 있다고 치자. 국채를 매입하면 10만원의 연이자를 얻고, 친구를 빌려주면 11만원의 연이자를 얻고, 정기예금을 하게 되면 12만원의 연이자를 얻을 수 있는 상황이다. 이 때 정기예금을 하기로 결정했다면 기회비용은 11만원이 되는 것이다. 기회비용을 계산할 때는 포기한 것의 가치 중 가장 높은 것 하나만을 인정한다(다음 지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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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ODA의 길을 묻는다 | 한국 ODA의 길을 묻는다 2강 | 느티나무 | 2011.10.5 | ||||||
참여연대 국제연대위원회는 9월 8일부터 5회에 걸쳐 '한국 ODA의 길을 묻는다' 시민강좌를 진행합니다. 두번째 시간으로 '개발원조가 부른 환경파괴와 기후변화의 역설' 이진우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상임연구원의 강연을 간단하게 소개합니다. 강의 정리는 자원활동가 송유림 님께서 맡아 주셨습니다. 강좌소개 보기> 개발원조가 부른 환경파괴와 기후변화의 역설 강사: 이진우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상임연구원 기후변화는 ODA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이슈이다. 때문에 최근 환경문제는 ODA보다 더 비중있게 다뤄지고 있지만 두 분야를 아우르는 전문가가 부족한 현실이다. ‘한국 ODA의 길을 묻다’ 두번째 시간은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의 이진우 상임연구원과 함께 ‘개발원조가 부른 환경파괴와 기후변화의 역설’이라는 주제로 ODA와 환경문제의 상관관계에 대해 알아보았다.
다섯 가지 기후변화의 특성을 살펴보다 기후변화는 시차를 두고 발생하는 문제이다. 지금 온실가스를 배출해도 20~30년 후에나 피해가 나타나기 때문에 당장 노력해야 한다는 사실을 인지하기 어렵다. 때문에 빈곤타파만을 추구하는 개발협력현장에서도 에너지 사용량, 온실가스배출량 등등에 대해 철저하지 못하다. 기후변화의 특성을 다섯가지로 나눠서 볼 수 있다.
1. 복합성: 기후변화는 경제성장을 위한 자원의 감소, 음식문제, 환경문제가 유기적인 관계를 가진다. 이렇게 지구의 위기는 복합적이기 때문에 단편적으로 접근하면 근본적인 해결이 어렵다. 기후변화를 단순하게 환경문제로만 접근하는 것은 쟁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2. 확장성: 환경파괴는 생태계에만 국한되어 있지 않다. 토지 및 산림을 과도하게 개발하면 자원이 줄어들고 이에 따라 석유의 고갈과 같은 자원 위기에 봉착한다. 이는 물가인상으로 이어져 장기 스태그플레이션을 불러와 경제 상황을 악화시킨다. 이 같은 에너지문제는 사회 혹은 국가 간 양극화 현상을 초래할 수 있다.
3. 단계성: 기후변화는 단계적으로 일어난다. 때문에 어느 단계에 얼마만큼 지원할 것인가를 제대로 결정하지 못하면 미봉책으로 접근할 수 밖에 없다.
4. 가속성: 지난 140년간의 기온변화를 살펴보면, 1700년대 산업혁명 이 후 꾸준히 변화가 일어났고 최근에 더욱 급격히 변하고 있다. 환경문제는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
5. 국제 사회의 인식: WEF(World Economic Forum)는 2007년 기후변화를 가장 중요한 이슈로 선정했다. 단순히 환경론자들의 문제제기를 넘어서 정치인, 기업인들까지도 금세기 최대 이슈로 기후변화를 뽑았다는 것은 그 복합적인 파괴력을 방증하는 것이다.
이상기후가 일상기후가 되다. 현재 지구의 평균 기온은 산업화 이전에 비해 0.8도 정도 올라가 이상기후가 일상기후가 되어버렸다. 이로 인해 질병의 확산, 수자원 문제, 농업생산량의 감소 등의 문제가 생겨나고 있으며 빈번한 홍수, 폭염, 사막화, 해안지역 침식 등도 발생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기후변화로 인해 이주를 하게 되는 환경난민이 등장하기 시작하는데 법적으로 이들을 보호할만한 장치가 마련되지 않아 사회문제로 확장되고 있다. 이러한 취약성은 제3세계에서 더 두드러지기 때문에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개발해야 한다.
지금의 양상대로라면 식량난이 찾아와 2080년까지 기아인구가 60%이상 증가하고 아프리카 경작면적의 3분의1이 축소될 것이며 10억명의 인구가 물부족, 폭풍, 산불 등등에 시달리게 될 것이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 UN은 새천년개발목표를 만들었다. 이 8가지 목표는 모두 기후변화와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다. 통념적인 개념으로 보더라도 기후변화는 모든 면에서 영향을 주고 받는다.
기후변화는 인간답게 살기 위한 기본권이다. 기후변화에 적응할 수 있는 능력에 있어서 선진국과 저개발국 그리고 부유층과 저소득층간의 차이가 크다. 때문에 기후변화에 대한 책임을 차별화할 필요가 있다. 에너지를 사용하는 건 기본권이나 다름없다. 라오스에 있는 아이들이 저녁에 책을 못본다고 하여 소형 태양광발전소를 지원했는데 결국 아동들의 학습권이 보장됐다. 효율적인 에너지ODA를 통해 인간의 소중한 권리가 실현된 셈이다.
또한 기후변화는 세대 간 불평등 문제도 낳는다. 현 기성세대는 에너지의 풍요를 누리고 그 책임은 다음 세대가 지게 될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핵 발전이다. 핵 폐기장 유지를 위해 엄청난 유지비를 들이고 있지만 이는 불평등을 야기하는 핵심기제이다. 기후변화로 인한 가뭄 때문에 국제분쟁이 생긴 예도 있다. 수단의 북쪽에 있던 아랍계 민족이 가뭄으로 힘들어지자 농경생활을 하며 석유를 채취할 수 있는 남쪽으로 이주하며 아프리카계 민족들과 싸우기 시작했다. 그것을 시작으로 인종과 종교문제까지 결부되면서 인종 말살분쟁으로 번졌다. 에너지를 공동체적으로 사용하는 노하우를 쌓아야 한다. 당장은 불편하고 어렵겠지만 해야만 한다.
에너지 불평등과 기후부정의(불의)를 확산하다 나사에서 밤에 찍은 사진을 보면 북미와 유럽, 동북아시아가 전기를 많이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반대로 불타는 숲이 있는 곳을 찍은 사진을 보면 제3세계가 많다. 지구의 두 얼굴이다. 주요국 1인당 에너지 배출량을 보면 호주가 제일 많은데 호주인 한 명이 쓰는 에너지는 챠드에서 600명이 쓰는 에너지와 같다. 태국 짜오프라야강에 도시에서 쓸 물을 공급하기 위해 다섯 개의 다목적댐이 지어져서 해안가 지역에 강물이 공급되지 않고 오히려 바닷물이 해안가쪽으로 범람하여 인근어업 주민들이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이러한 에너지 불평등 문제로 인해 지역 주민들은 생업과 터전을 위협받는다. ODA가 동반하는 환경문제는 쉽게 줄여지지 않는다. 사회구조가 고착화 돼 있고 인류의 개발에는 지구의 지속가능성을 고려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계속 이렇게 진행이면 제3세계의 에너지사용량도 늘어날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빈곤퇴치를 위해서 저개발국을 현대화하는 것이 과연 옳은 방향인지생각해보게 된다. 저개발국에 도시의 모양새를 갖추기 위한 인프라를 구축하는 것이 능사인지 의문점을 가지게 된다.
ODA사업의 실패 사례로 인도네시아 자바섬의 까리안 댐을 들 수 있는데 여기에는 세가지 부정적인 영향이 있다. 우선 수몰지역이 넓기 때문에 생태계가 아예 바뀌어버리는 것. 썩은 물 때문에 생겨난 모기에 의한 질병 확산, 유량부족으로 인한 토양염류 현상 등이 그것이다. 무엇보다 지역주민들의 강제퇴거문제가 가장 심각했다. 이 같은 일이 일어나는 원인은 ODA사업 수행시 환경영향평가를 제대로 진행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OECD DAC가이드라인을 보면 전략환경평가를 하고 국가전략을 세움에 있어서 환경전략을 어떻게 세울 것인지를 논의하도록 권유하고 있다. 환경에 대한 고질적인 무관심이 원인이다. 우물을 하나 지어도 지속가능하게 관리, 유지할 수 있는 기술전수나 교육을 진행하지 않으면 나중에 문제가 된다. 경제성장 지상주의적 개발방식을 답습하는 것이 모두 환경, 기후부정의 문제를 양산하기 시작했다.
평화를 원한다면 정의를 위해 행동해라 기후정의는 윤리적인 차원이 아니라 사회구조적인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 현지인에게 단순히 베푸는 것이 아니라 그 지역에서 필요한 것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주민과 상의해야 하고 모든 영향이 공평하게 돌아가게끔 해야 한다.
요즘 국제개발협력의 화두는 개발효과성이다. 이는 원조를 넘어서 개발에 직접적으로 관련되는 중요한 영역인 무역, 정책, 농업, 노동과 이주, 인구와 여성, 환경 등 다양한 정책들간의 일관성과 연계성을 중요하게 고려한 접근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즉 크로스커팅이슈들이 ODA를 통해 실행되는 과정과 결과를 종합적으로 논하는 지표인 셈인데 이를 기준으로 21세기 지구에 닥친 가장 큰 위기인 환경문제를 평가한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아직은 부족하지만 풀잎 하나, 꼬마 아이 하나도 세심하게 배려하는 정성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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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ODA의 길을 묻는다 | 한국ODA의 길을 묻는다 1강 | 느티나무 | 2011.9.30 | ||||||
참여연대 국제연대위원회는 9월 8일부터 5회에 걸쳐 '한국 ODA의 길을 묻는다' 시민강좌를 진행합니다. 첫번째 강연 '국제사회가 말하는 ODA의 허와 실' 중 양영미 참여연대 국제연대위원회 위원장과 이태주 ODA 위치 대표의 강연을 강의 순으로 간단하게 소개합니다. 강의 정리는 자원활동가 송유림 님께서 맡아 주셨습니다. 강좌소개 보기> 1부 국제개발협력논의의 국제적 흐름을 논하다 강사 : 양영미 참여연대 국제연대위원회 위원장 ODA라는 것이 우리나라에 대중적으로 알려진 것은 2005년 즈음이고 세계개발원조총회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이다. 올 11월
부산에서 제4차 세계개발원조총회(The 4th High Level Forum on Aid Effectiveness, 이하
HLF-4)를 개최한다. 이 공식행사를 하기 일주일 전쯤 병행회의로 시민사회 회의(이하 NGO 회의)가 열린다. 이처럼
국제회의에서는 시민사회의 의견을 듣는 관례가 있다. 이번 부산HLF-4에도 NGO 회의가 바로 앞서 열린다. 이 회의의 참여를 준비하는 단위로 국제개발시민사회포럼(Korea Civil Society Forum on International Development Cooperation, KoFID)가 2009년부터 조직되어 활동하고 있다. KoFID는 한국ODA 및 개발정책을 모니터링하며 제언하는 국내 시민사회단체와 개발NGO들의 네트워크이다.
한국, 유일한 원조 성공사례 ?
원조피로 Vs 원조효과성 원조효과성 논의는 주로 “공여국의 자세”로 불린다. ODA에서 ‘원조효과성’이란 단어가 나오기 전에 ‘원조 피로’라는 단어가 먼저 있었다. 아프리카에 20년 동안 원조를 줬는데 이들 나라가 발전이 없었다 하여 공여국들이 지치기 시작한 것을 원조 피로라 칭한다. 1973년, 공여국들은 오일쇼크탓에 지원할 돈이 없자 이들은 빈곤국에 도와줘도 나아지지가 않는다고 핑계를 대며 원조를 줄여갔다. 이후 UN, OECD가 만들어졌을 때 국제사회는 책무성을 논하며 좀 더 효과적으로 원조를 해보자는 취지로 ‘원조 효과성’을 논하게 됐다. 그 맥락으로 2000년, UN은 세계의 빈곤을 없애고 살기 좋은 지구를 만들어보겠다고 선언하고 그 목표를 8개로 정했다.(Millennium Development Goals, 새천년개발목표 ) MDG 8번은 앞에 있는 것들을 하기 위해 GNI 0.7%씩 재원을 마련하자는 파트너쉽이다. 2002년 몬트레이에서 재원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회의가 처음 열렸고 2003년, 로마에서 HLF-1이 열렸다. 이어 2005년에는 파리선언, 2008년에는 아크라 행동 의제가 발표됐고 2011년 부산에서 4차로 열리게 된다. 환경, 인권과 개발의 만남 개발을 하다 보면 물리적 환경파괴뿐만 아니라 사회적 환경파괴까지 일어난다. 이러한 상황이다 보니 국제사회는 개발과 사회환경 보존을
동시에 할 수 있는 지속가능한 발전에 대해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1992년 리우에서 환경을 생각하는 지속가능한 개발에 관한
회의가 열렸고 요하네스버그에서도 회의가 있었다. 이들 회의에서 공여국들은 ODA를 할 때 환경문제 이외에도 사회환경문제를 통틀어
전반적인 환경파괴의 현황에 대해 논했다. 내년에 다시 기후변화에 대한 문제를 점검하는 회의가 있을 예정이다.
인권이라는 것은 포괄적인 개념이기 때문에 설명하기 쉽지 않다. 개발과 관련된 것은 사회권이고 이 권리는 대체로 노동권,
건강권 등 집단권에 속한다. 예를 들면, 거주권은 사람이 사는 전체적인 환경에 대한 것으로 ‘웰빙’에 대한 조건을 이야기 한다.
해비타트나 사랑의 집짓기와 같은 거주환경 개선에 대한 개발협력이 폭넓게 인권과 만나는 것 ‘지속가능’이라는 단어가 나오기까지 몇 십 년이 걸렸는데 어느 새 ‘지속가능한 성장’이라고 이야기한다. 성장, 발전… 과연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좋은가? 느린 것은 못난 건가? G-20에서 논의됐던 ‘성장’이라는 의제가 HLF-4에서 다시 재현되는 게 아닌가 하는 불안함이 있다. 2부 한국 ODA의 현 수준 진단과 평가 강사 : 이태주 ODA 위치 대표 한국의 ODA는 도대체 어떤 수준인가. ODA라는 용어가 우리 사회에서 유행하는 모습은 한 때 NGO열풍이 분 것과 비슷해
보인다. 상식적으로 출발하도록 하자. TV를 틀면 공익광고가 많다. 정부가 우리의 ODA를 자랑하려고 하는 것이다. 한국 정부가
국제사회에서 얘기하는 레퍼토리는 똑같다. 우리는 50년 전에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였지만 효율적인 정부, 유능한 관료 그리고
국제사회의 도움으로 선진국이 되었다고 사방에 선포하는 것. 정말 그렇게 세계에 자랑할 만큼 한국의 ODA는 진정성과 효과가
있는가?
한국ODA의 근본문제 ”DONOR CENTRISM” 공여국 중심주의는 매우 위험하다. 실제 현장에 가보면 뼈저리게 느낀다. 우리나라는 우리 입장에서 줄 뿐 받는 사람이 뭐가 필요한지 대화하지 않는다. 친해져야 하고 신뢰관계가 중요한데 그런 최소한의 접근을 아직도 못하고 있다. 모든 정책과 의사결정방식이 공여국중심이다. 얼마 전에 한국의 국제개발선진화계획이 만들어 졌다. 계획을 보니 실제로는 한국화 계획이었다. 한국형으로 포장되어 있고 한국형컨텐츠를 파는데 주목한다. 개발사업이 컨텐츠사업으로 변하는 상황이 상당히 걱정된다. 현지수준에 맞고 그들의 필요를 우선적으로 고려하고 그 사회가 지속적으로 나아질 수 있는 프로그램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것을 어떻게 끼워 넣을까를 고민하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보면, 아프가니스탄 카불의 직업훈련센터는 전쟁 중에 만들어진 사업으로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 엄청나게 많은 돈을
들여 센터가 만들어 졌고 1년에 120명의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을 훈련시킨다. 하지만 매 달 훈련을 중단하는 사람들이 나오고 있다.
전쟁 중이니 1년 넘게 직업훈련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직업훈련사업은 한국이 여러 나라에서 하고 있는
사업이지만 정작 현지인에게 효과가 별로 없다. 마사이 마을에 한국수자원공사가 워터 탱크를 만들어 준 사업도 있다. 그러나 이 탱크에 물이 채워진 적은 아직까지 없다. 한국에서 원조 사업을 한다고 마시이족들이 부지와 노동을 제공했는데 주민들에게 돌아간 혜택은 없으니 이들이 한국원조를 반길 리가 없다. .
한국원조엔 오너쉽(Ownership)이 없다 다자기구들은 수원국의 오너쉽을 존중하지 않고 지나치게 정책에 간섭해서 실패했던 원조 경험들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실패를 줄이기 위해 지켜야 할 핵심 원칙들을 뽑고자 했던 것이 파리선언이다. 그 중 제일 중요한 원칙은 오너쉽이다. 원조는 받는 사람들에게 결정권을 주어야 한다. 하지만 아직도 이런 원칙들이 지켜지지 않는다. 12월말 HLF-4때 파리선언에 대한 한국 평가서가 공개될 것이다. 일본은 지금껏 경제관계만 고려해서 원조를 했기 때문에 원조한 것보다 훨씬 많은 경제적 이익을 얻었는데 한국이 그 전철을 밟고 있는 건 아닌지 우려된다.
한국원조엔 개발사업을 하는데 필요한 기본이 없다 개발사업에서는 지원 전략과 계획이 중요한데 한국은 20년 넘게 마스터플랜이 전혀 없다. 작년부터 국별 지원 전략을 만들고 있지만 국내의 지역연구자가 거의 없기 때문에 한계에 부딪치고 있다. 또한 방법론적인 고민없이 개발사업을 시행하는 경우가 많다. 현지에서는 식수가 부족한데 우리는 우리가 잘하는 IT사업을 지원한다. 또한 한국은 사업선정시 단기간에 가시적 효과를 거두는 사업에 우선순위를 두고 있다. 한국 개발NGO들도 반성해야 한다. 개발NGO들의 개발사업을 평가해 보면 정부사업보다 훨씬 더 문제가 많은 경우가 있다. 고위관료들만 살찌우고 영향력 없는 사업을 지속하면 안된다.
선의는 선행을 낳지 않는다 OECD
DAC에서도 파트너쉽을 강조하고 있다. 개발도상국의 오너쉽을 강조하고 공동의 개발목표와 전략, 책임, 역할 분담원칙과 협력방식을
고민해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참여적인 발전 즉, 주민이 주인이 되고 주민이 주도하는 개발이 필요하다. 농촌마을의 평범한
일꾼들이 세계 석학들보다 그 지역에 대해 훨씬 많은 정보와 경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염두 해 두어야 한다. 국제 사회에서 ODA담론을 다룰 때 우선적으로 다뤄야 하는 개념은 ‘사람들의 자립’ 이다. 재원마련을 위해 민간기업들의 참여를 이야기 하지만 사전에 원조에 대한 규범을 공유해야 한다. 사전준비 없이 민간기업들이 ODA사업을 주도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또한 아직까지 개발사업을 수행하는 기관들, NGO간의 연대의식이 부족한 부분도 극복해야 할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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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1 이후 10년, 세계는 어디로 가는가 | "위키리크스, 미국 정부 '막가파식' 전쟁몰이의 부메랑" [9.11강좌 3강] | 느티나무 | 2011.9.29 | ||||||
참여연대 아카데미 느티나무와 프레시안은 9.11 10년을 맞아 9월 5일부터 매주 월요일 5회에 걸쳐 '9.11 이후 10년, 세계는 어디로 가는가'를 주제로 연속 강연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26일 열린 세 번째 강좌에서는 이태호 참여연대 사무처장님이 '새로운 수퍼파워 : 초국적 시민운동과 민주화 도미노'라는 주제로 강연해 주셨습니다. 아래는 프레시안 곽재훈 기자가 정리한 이태호 처장의 3강 강의소개 기사입니다. ☞강연 상세 안내 보기
9.11 이후 조지 W. 부시 당시 미국 대통령의 일성은 '이것은 전쟁행위'라는 것이었다. 그전까지 테러는 경찰 소관인 치안 문제였다. 그러나 도널드 럼즈펠드 국방장관이나 딕 체니 부통령 등 공화당 군사전략통들은 '미국을 지키는데 국제법이 방해가 돼서는 곤란하다'며 기존의 규범에 대한 예외주의를 정당화했다. 이 때문에 '테러와의 전쟁'에 대한 두 가지 논리적 문제가 생겨났다. 첫째, 국제법과의 충돌이다. 쌍둥이 빌딩에 대한 공격을 수행한 자들은 제복을 입은 군인이 아니었고 국가의 공인된 명령체계에 따라 전쟁을 수행하는 정규전 세력도 아니었다. 따라서 비(非)국가 세력에 전쟁 선포가 가능한가 하는 문제가 발생했다. 비국가 세력과의 '전쟁'은 전쟁의 기본 사항을 정한 유엔 헌장과도 배치되고 제네바협정에도 맞지 않는다. 일단 부시가 전쟁을 선포하긴 했는데 상대방을 과연 뭐라고 규정할 것이냐도 문제였다. 군인? 미국은 그렇게 하긴 싫었다. 상대방이 군인이라면 제네바협정에 따라 생포했을 때 전쟁포로로 인정하고 제반 권리를 인정해야 한다. 테러범? 그렇게 하기도 싫었다. 반인륜범죄를 저지른 자에 대해서는 국제경찰(인터폴)이 수사해야 하고 국제형사재판소(ICC)를 통해 처벌해야 한다. 그래서 고안해 낸 것이 '적 전투원'(enemy combatant)이라는 개념이다. 둘째, 국내적으로 미국의 헌법 질서에 배치된다는 문제다. '적 전투원'으로 규정한 자들을 잡아서 미국으로 데려오면 미국 헌법에 의해 미국 법을 적용해 재판받아야 하고 변호사 선임권, 묵비권 인정, 고문받지 않을 권리, 3심제 적용 등 권리를 보장받게 된다. 이 때문에 미국 국외에 지어진 것이 쿠바의 관타나모 수용소다. 법률상으로 고문을 허용하는 다른 나라에 비밀 감옥도 지은 것으로 알려졌다. 비밀 감옥의 존재와 수 등은 공식 밝혀지지 않았지만 아랍권과 동유럽 등지에 여러 개가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송도 '특별이송'이라고 매우 비밀스럽게 했다. 미국 인권단체가 발간한 보고서를 보면 '사라진 수감자들'이라는 리스트가 있는데 이들이 비밀 감옥에 갇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미국은 일명 '강화된 심문기법'으로 이름붙여진 사실상의 고문 방안을 도입했다. 잠을 안 재우거나 종교적·인간적·성적 수치심을 주는 등 '스트레스를 주는 취조 방법'을 사용했고 물고문도 허용됐다. 또 아프간을 침공해 테러 용의자를 잡아들일 때 '저 사람이 탈레반이다'라는 증언만으로도 증거 효력을 인정해 체포할 수 있게 했다. 피의자는 증거의 효력을 다툴 권리도 박탈당했고 심문 기한도 '무기한'으로 정해졌다. 미국 헌법상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미국 시민의 권리도 제약받았다. 먼저 '애국자법'은 영장주의의 예외를 인정해 이주민을 무기한 구금할 수 있도록 했고 비밀리에 가택수색을 할 수 있게 했다. 애국자법은 또 연방수사국(FBI)이 통신업체나 도서관 사서들에게서 영장 없이도 통신기록, 도서 열람기록 등을 요구할 수 있게 했다. 다 음은 군사력 사용권한의 문제다. 미국 법에 따르면 전쟁 선포는 대통령이 아닌 의회의 권한이다. 의회의 전쟁 선포는 그 요건도 매우 까다롭다. 하지만 부시는 뭔가를 해야 했다. 그러니 군통수권자인 대통령에게 비상시 군사력을 사용할 권한이 있다는 개념을 빌려 전쟁을 치렀다.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이런 방식이었다. 의회는 부시의 군사력 사용을 추인해줬고 이로써 전쟁을 시작하는 방식이 의회의 선전포고에서 대통령의 군사력 사용을 의회가 승인하는 식으로 바뀌게 된다. 이라크전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상원의원이었던 버락 오바마 등 일부는 반대했지만 의회는 부시의 군사력 사용을 조건부로 승인했다. 부시는 의회가 내건 조건도 지키지 않았지만 말이다.
미국 내 반전운동은 9.11 테러 이후에는 거의 목소리를 내지 못했지만 2003년 이라크전 반대 운동은 거세게 일어났다. 이후 이라크 바그다드에 있는 아부그레이브 수용소의 인권 실태가 <CBS> 방송에 의해 폭로된 것이나, '다우닝 스트리트 메모'와 '매닝 메모'의 공개는 반전 운동에 동력을 공급했다. 2005년 공개된 이른바 '다우닝 스트리트 메모'는 영국 고위관리들이 2002년 7월 부시를 만난 후 작성한 것이다. 부시를 만난 영국 관리들은 "군사행동은 불가피한 것으로 보였다. 부시는 군사행동을 통해 사담 후세인을 제거하길 원하고 테러 연계와 대량살상무기(WMD)를 근거로 내걸고 싶어했다. 정보와 사실관계는 정책에 꿰맞춰지고 있었다"고 적었다. 2006년 <뉴욕타임스>에 공개된 '매닝 메모'는 토니 블레어 당시 영국 총리의 외교보좌관 데이비드 매닝이 작성한 것으로 부시와 블레어의 대화를 담고 있다. 부시는 침공을 앞두고 이라크의 적대행위를 촉발할 몇 가지 방안을 블레어 총리에게 제시했는데, 유엔의 비행기처럼 위장 페인트칠을 한 미국 정찰기를 이용해 공격을 유도하자는 제안도 있었다. 이라크에서 WMD가 발견되지 않자 미국은 후세인이 충분히 국제적인 의심을 받을 만한 행동을 했기 때문에 이는 '이해할 만한 실수'라고 설명했지만 이같은 메모들은 이라크전이 결코 '실수'가 아님을 보여줬다. 또 허리케인 '카트리나'도 반전 운동의 계기가 됐다. 허리케인 때문에 9.11 당시 보다 더 많은 사람이 죽었다. 문제는 이것이 충분히 예방할 수 있는 재해였는데 주방위군이나 구급대원들이 이라크로 차출돼 제대로 대응을 못했다는 것이다. 테 러와의 전쟁에 대해 반대 운동을 펼친 미국 단체는 여러 부류로 나뉜다. 첫째, 전국적인 반전운동 단체다. '앤서'(Act Now to Stop War and End Racism : ANSWER)나 '낫인아워네임'(Not In Our Name) 같은 단체들이 대표적이다. '낫인아워네임'은 일종의 연대체였는데 '평화로운 내일을 위한 9.11 희생자 가족 모임'도 포함하고 있었다. 9.11 희생자의 유가족들이 '우리 이름을 앞세워 전쟁하지 말라'고 한 것은 미국에 큰 충격과 감동을 줬다. 둘째, 군인 및 피해자 가족들의 단체다. 일종의 당사자 운동인데, 한국과는 달리 미국은 반전 운동에서 예비역 단체의 역할이 크다. 이라크나 아프간에 파견됐다가 전사해 훈장까지 받은 병사의 유가족도 반전 운동에 나섰다. 셋째, 시민권 단체다. 이들은 주로 변론이나 소송 등을 통해 활동했다. 넷째, 국제적 반전운동 단체다. 특히 2003년 2월 15일의 국제 반전 공동행동은 전세계 800개 도시에서 3600만 명이 참여한 최대 규모의 시위로 기네스북에도 올랐다. 같은해 5월에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열린 세계반전모임에서는 26개국 60여 명의 활동가들이 모여 '자카르타 평화 합의'를 열었고 2004년에는 터키 이스탄불에서 부시 등 전범들에 대한 '국제민중재판'을 열기도 했다. 이같은 국제적인 반전 운동은 세계 정세에도 영향을 미쳤다. 반전 운동을 통해 급격히 성장한 것이 세계사회포럼(WSF)이다. 2005년 브라질 WSF를 제안한 브라질의 노동자당(PT)는 나중에 급격히 성장해 룰라 대통령을 배출한다. 그러나 이슬람권의 상황은 사뭇 달랐다. 테러와의 전쟁은 이슬람권에서는 극단주의가 성장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전쟁 전에는 이라크의 알카에다 세력은 그리 강하지 않았지만 전후 오히려 급성장했다. 이란의 경우도 테러와의 전쟁 전 개혁파가 다수였고 심지어 의회에서 개헌선을 확보하고 있었다. 하지만 테러와의 전쟁이 일어나고 부시가 이란을 (이라크, 북한과 함께) '악의 축'으로 지목하자 개혁파들은 설 자리를 잃었고 미국에 맞서야 한다는 강경파의 입지가 넓어졌다.
법률적인 방법에 의지한 미국 내의 반전 운동 사례들 중 주목할 만한 것 몇 가지만 살펴보겠다. 첫째, 헌법권리센터(CCR)가 시작한 관타나모 수용소 수감자들의 권리 찾기 운동이다. 일련의 소송이 2002년부터 2008년까지 6년 간 계속됐는데, 2004년 6월 미국 대법원이 관타나모 수감자라 해도 영장에 의하지 않은 구속은 불법이며 구속영장 발행을 요구할 권리를 갖는다고 판결하면서 싱겁게 이기는 듯 했다. 그러나 미국이 국방부에 구속 여부를 심사하는 재심 위원회를 만들고 의회에서 '수감자처우법'을 통과시키면서, 관타나모 수감자는 자신의 구속을 국방부 소속 위원회에 다시 심사해 달라고 요구할 수 있고 학대로부터 법률적으로 보호받을 수 있게 됐지만 영장이 무제한 청구와 무기한 구금 또한 법으로 보장됐다. '법률에 의하지 않고 구속하면 안 된다고? 그럼 법을 만들지 뭐' 하는 식이었던 거다. CCR 은 또 국방부의 특수군사위원회가 '적 전투원'들에 대한 수사와 재판권을 갖는 것이 의회의 승인을 받지 않아 위법하며 제네바협정에도 위반된다는 소송을 제기했고 대법원은 2006년 9월 이들의 주장을 인정했다. 그러자 의회는 또다시 '군사위원회법'을 만들어 이를 합법화했다. CCR은 이에 다시 군사위원회법의 위헌 여부를 다투는 소송을 냈고 미 대법원은 2008년 6월 위헌 판결을 내렸다. 하지만 유사한 많은 사건들이 현재 각급 법원에 계류돼 있다. 둘째, 역시 CCR이 이끈 것으로 부시 행정부 고위관료들을 '전쟁범죄자'로 처벌하기 위한 소송이었다. CCR은 럼즈펠드를 고문 등 수감자 학대 혐의로 고발했지만 미국 국내에서는 모두 기각됐다. 전범은 국적에 관계없이 처벌할 수 있도록 한 여러 나라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2009년 3월 스페인 판사 한 명이 관심을 가지고 럼즈펠드를 조사할 용의를 밝혔지만 스페인 법무부의 만류로 좌절됐다. 셋째, 미국시민자유연맹(ACLU)이 제기한 불법 사찰 및 도청에 대한 소송이다. ACLU는 2006년 12월 <뉴욕타임스>에 폭로된 미 국가안보국(NSA)의 도청사건에 문제를 제기했다. NSA가 영장 없이 미국 시민들의 전화를 도청한 이 사건에 대해 디트로이트 지방법원은 ACLU 측의 승소를 선언했으나 항소심에서는 판결이 뒤집혔다. 또 2007년 미 의회가 기존의 '외국정보사찰법'을 개정해 '미국보호법'을 만들고 해외와 통화하는 미국 시민의 전화에 대해서도 영장 없는 감청을 가능케 하자 ACLU는 이 법률에 대한 위헌 소송을 제기했다. 이 소송은 현재 진행 중이다. 넷째, 역시 ACLU가 제기한 '국가기밀특권'에 대한 도전이다. 2003년 7월 ACLU는 다른 인권단체들과 공동으로 테러혐의 수감자들에 대한 정보공개 청구를 접수했으나 미국 정부는 거부했다. 그러자 ACLU는 2004년 6월 관련 자료의 공개를 요구하는 소송을 시작했고 같은해 9월 승소했다. 그러나 공개는 아직 실현되지 않았다. 또 ACLU는 이른바 '특별이송'에도 문제를 제기했다. 이들은 CIA의 항공기 운항을 대신해 주는 일종의 용역업체 '제퍼슨 데이터플랜' 사(社)에 대해 소송을 제기했다. 현재 진행중인 이 소송에서 ACLU는 해당 회사가 '특별이송'의 비인도적 실체를 알고도 영리를 위해 이를 돕는 조달 서비스를 제공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대의민주주의적 수단에 호소한 사례도 있다. 첫째, 대통령 탄핵 운동이었다. '다우닝 스트리트 메모'가 공개된 이후 2005년 결성된 '애프터 다우닝 스트리트'는 2007년과 2008년 각각 체니 부통령과 부시 대통령에 대한 탄핵을 추진하기 위해 100만 명 이상의 서명을 받아 민주당 데니스 쿠치니치 의원이 탄핵안을 발의할 수 있도록 도왔다. 둘째, 예산을 무기로 이라크 철군을 이끌어내기 위한 활동이었다. 1400개 반전단체의 연대체 '평화와 정의를 위한 연합체'(UFPJ)가 여론을 이끌었고 결국 이 문제를 의회로 가져왔다. 그러나 2005년 국방 예산을 빌미로 부시 행정부로부터 '철군 일정표'를 받아내려는 시도는 압도적 표차로 부결됐다. 2006년 중간선 거 후 다수당이 된 민주당은 이라크 철군을 이끌어내기 위해 국방예산을 승인하는 조건으로 이라크에서 철군을 시작하라고 부시 행정부를 압박했다. 그러나 2007년부터 철군을 시작할 것을 의무화한 '이라크책임법'은 부시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에 부딪혔다.
오바마 대통령은 취임식 이후 발표한 최초의 4개 대통령령에서 관타나모 수용소를 1년 안에 폐기하고 고문을 중단하며 CIA의 '비밀 감옥'을 포함한 구금정책 수단을 재검토하라고 지시했지만 이는 의회의 반대 등으로 실현되지 않았다. 또 오바마는 고문 관련 자료를 공개하겠다던 자신의 약속에 대해서도 말을 바꿨고 고문에 연루된 CIA 조사관들도 처벌하지 않겠다고 공언했다. 이라크, 아프간 철군도 어떻게 될지 불확실한 상태다. 아프간에서는 탈레반과의 평화협상을 시도하고 있지만 협상을 주도해온 부르하누딘 라바니 전 대통령이 암살되면서 앞날을 알 수 없게 됐다. 또 오바마는 파키스탄 남부 파슈툰족 거주 지역까지 공습 지역을 늘렸는데, 미국이 파키스탄과 개전 선언을 한 게 아니니 이는 불법이다. 이런 면에서 위키리크스 사태를 다시 볼 필요가 있다. 위키리크스 사태는 테러와의 전쟁이 일어나면서 사실상 (가능성이) 내재돼 있던 것이다. 테러를 막기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미국의 헌법 질서와 시민권, 국제 규범 등에 대해 온갖 예외를 인정한 것이 부시의 논리였다. 이것이 시민권 진영이 전쟁에 대항하는 운동에도 온갖 수단이 동원될 수 있다고 믿게 했을 수 있다. 국가가 지정한 1급비밀을 대중이 모두 알 수 있도록 공개하겠다는 것이다. 위키리크스는 테러와의 전쟁에 대응한 시민들의 자구적 대응과 시민 불복종 운동, 안보 민주화 운동의 아이콘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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