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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좌명 | 강좌후기 | 글쓴이 | 날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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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애 첫 사법감시 - 판결문 함께 읽기 | [판결비평] 수면 위로 떠오른 '손정우 인도 송환 불허 결정'의 이면_국혜수 | 개똥이 | 2020.11.26 | |
광장에 나온 판결 : 182번째 이야기 수면 위로 떠오른 '손정우 인도 송환 거부 결정'의 이면아동 성착취물 공유 웹사이트 운영자에 대한 인도 송환 거부 결정 서울고등법원 형사20부 강영수 재판장 2020토1인도심사청구
글. 국혜수 (느티나무아카데미 <내 생애 첫 사법감시 - 판결문 읽기> 강좌 수강생)
참여연대 아카데미느티나무에서는 2020 가을 민주주의학교의 일환으로 '내 생애 첫 사법감시: 판결문 함께 읽기' 강좌를 진행한다. 이중 우리가 처음 읽은 판결문에서 대한민국 법원은 미국이 손정우에 대해 범죄인인도청구를 요청한 것을 거부한다. 이 판결문을 함께 읽고 토론하면서 다양한 쟁점들이 도출되었는데, 참여자들이 함께 논의한 쟁점들을 살펴보기 전 '손정우 사건'에 대해 요약하자면 아래와 같다.
특히 송환 거부 결정을 내린 데에는 단지 한국인 때문이어서도, 아동·청소년이용음란물의 중대함에 대한 인식이 부족해서도 아니었다. 오히려 판결문에서는 네트워크 기반 아동·청소년이용음란물 범죄를 발본색원하여 사법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한국에서 손정우를 활용하는 것이 좋다는 논리에 따라 송환 거부 결정에 다다른다.
송환 거부 결정을 뉴스에서만 접했을 때는 그 사실에 대해 분노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면, 판결문을 직접 읽어가면서 관련 쟁점들이 수면 위로 떠 올랐다.
이미 아동·청소년음란물에 대한 처벌이 이루어진 시점에서 미국으로 송환하는 것이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는가? 범죄인인도가 사법주권을 침해하지 않는가?
손정우 사건과 관련된 우리의 분노에는 아동·청소년이용음란물 범죄에 대해 충분한 처벌을 받지 못했다는 인식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송환이라는 사안 자체만을 봤을 때 송환하는 것이 우리의 사법주권을 침해할 여지가 있는 것이 아니냐는 의견이 제기되었다.
이와 관련해 또 다른 참여자는 혹시 자국민이 자국에서 저지른 범죄에 대해 인도를 하는 게 우리나라 사법부의 '무능함'을 보이는 것으로 여겨지는지, 사법부의 '자존심'이 달린 일인지에 대해 질문하기도 한다.
이는 비교적 쟁점이 크지는 않은 질문이다. 이전에는 국가 간 사법주권이 중요하게 강조되기도 했지만, 특히 손정우 인도 송환 거부 결정과 관련된 아동·청소년이용음란물은 전 세계적으로 인도주의에 반하는 범죄로 보편성이 인정되며, 특히 인터넷을 통해 음란물 공유가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한 국가만의 문제라고도 보기 어렵다.
이 사안과 관련해서 국제형사사법공조가 이루어지고 있기에 이러한 범죄에 대해 사법정의를 실현하고자 할 때는 주권의 개념이 약해진다. 실제로 판결문에서도 형사사법 관할 분할권을 언급하는 것은 이와 같은 이유 때문이다.
아동·청소년이용음란물 관련 사법정의가 실현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 손정우가 송환되지 않는 것인가? 네트워크 기반 아동·청소년이용음란물 처벌에 대한 사법정의는 무엇인가?
인도 송환 거부 결정의 핵심논리는 D사이트를 이용한 '소비자'에 대한 발본색원적인 수사를 위해 손정우가 한국에 남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과연 법원이 이러한 논리에 따라 인도 송환 거부 결정을 내린 것이 검찰에 대한 법원의 명령으로 여겨지는가?
그렇지 않다. 엄밀히 말하면 법원은 3권 분립의 원칙에 따라 검찰에게 명령할 수 없다. 또한 미국과 달리 한국은 법정모욕죄라는 명목 자체가 없다. 따라서 법원 판결에서 '소비자'에 대한 수사를 권고했지만, 검찰이 이를 따르지 않는다고 해도 이에 대해 제재가 가해질 수 없다.
이런 점을 고려했을 때 인도 송환 결정 거부가 절대적 사유에 해당되는 것도 아닌, 판사의 재량이 있는 부분인데 단지 '소비자'에 대한 수사가 진행되리라는 가능성 하에 자금세탁이라는 사실관계에 대한 송환 거부 결정을 한 것이 빈약한 근거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특이한 점은 인도 송환 여부를 결정하기 위한 판결이었지만, 미국이 송환을 요청한 항목인 자금세탁에 대해서만 판단하고 송환 여부를 결정하는 것이 아닌, 많은 분량을 할애해서 아동·청소년이용음란물을 근절해야 한다는 점을 명시하며 이를 위해 송환 거부를 했다는 점이다.
이처럼 인도 송환 여부 결정과 뗄 수 없는 포괄적인 사안들을 파악하려는 판사의 접근방식은 타당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송환하지 않아야 한다는 결정은 아동·청소년이용음란물에 대해 이미 손정우가 충분한 처벌을 받았고, 사법부가 관련 범죄를 철저히 수사하리라는 사법부에 대한 시민의 신뢰가 뒷받침될 때 타당하다고 여겨질 수 있다.
또한 역으로 아동·청소년이용음란물에 대한 사법정의를 이루기 위해서라도 손정우를 송환했어야 한다는 논리가 가능하다. 이미 아동·청소년이용음란물에 대해 처벌을 받았다 하더라도, 아직 처벌을 받지 않은, 아동·청소년이용음란물 사이트 운영과 뗄 수 없는 것이 바로 자금세탁 혐의다.
온라인을 통해 이루어지는 불법활동이 외국에 송환되어 처벌받을 수 있다는 점을 알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동·청소년이용음란물을 포함한 다양한 온라인 네트워크 기반 범죄에 경종을 울렸을 것으로 생각한다.
오히려 국내에서 D사이트의 '소비자'에 대한 수사를 '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만을 믿기보다 손정우를 미국에 송환하여 사회에 메시지를 던지는 것이 판결문에서 근거로 삼고 있는 아동·청소년이용음란물에 대한 사법정의를 더 효과적으로 실현하는 방법이 아니었을까?
덧붙여 말하면, 판결문에서는 D사이트 회원들을 '소비자'라고 지칭했지만, 엄밀히 말하면 이들은 아동·청소년이용음란물 제작 또는 유포에 대한 공범이다. 이미 손정우를 송환하지 않기로 했기에, 이에 대해 분노하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가 이러한 공범인 '소비자'들에 대한 수사가 진행되지 않는 현실에 대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아동·청소년이용음란물 '소비자' 처벌에 대해 목소리를 밝히고, 이들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는 쪽으로 관심을 환기하는 것이 현재로서 우리가 사법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할 수 있는 활동이다.
법과 판결 자체가 사법정의에 대한 대중의 기대와 어긋나는 점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참여자들 모두 아동·청소년이용음란물에 중죄라는 점에 동의하고 있었지만, 그게 두 측면에서 법이나 형량이 사법정의에 대한 대중의 기대와 어긋나고 있었다. 첫 번째는 아동·청소년이용음란물에 대한 처벌 자체가 미약하다는 여론이며, 두 번째는 범죄인인도법에 의거해 손정우를 미국으로 송환하지 않기로 결정한 것이 대중의 정서와 달랐다는 점이다.
두 번째 사안인 손정우 인도 송환 거부 결정에 대해 '비동의'를 선택하지 않고 중립적인 입장을 택한 이들은 현재 정해진 법규의 형량이 우리의 기대와 다르기 때문에 생겨난 충돌이었다는 점을 지적한다. 따라서 기존의 제도와 법에 따라서 내린 결정이라면 어느 정도 동의할 수 있지 않을까에 대한 고민이 담겨 있는 것이다.
법치주의의 기반은 여론에 따라 법이 집행되는 것이 아닌, 정해진 법규에 의거하여 결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현재 법과 제도가 한계가 있는 상황에서 이에 맞게 판결을 내렸다는 이유로 판결 자체를 비판하는 것이 어디까지 가능한가에 대한 질문이 가능하다.
다른 한편으로 법이라는 것이 답이 정해져 있는 체계라기보다는 판사의 재량이 작용되는 측면들이 많다는 점을 중요하게 고려해야 한다는 점이 지적된다. 판사의 성향에 따라 판결도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나타나며, 법에 의거한 판단이라 하더라도 상당히 높은 정도의 불안정성이 내재한다.
그런 점에서 손정우 인도 송환 거부 결정을 내린 판사들의 기본 논리는 국가중심주의의 또 다른 표현일 수 있다는 점이 제기된다. 이러한 해석이 반영되었다면 과연 보편적으로 인도주의에 어긋나는 범죄를 우리나라에서 수사하고 처벌하는 것이 가장 타당할까에 대한 쟁점이 제기될 수도 있다.
손정우 사건에 대한 상당수 분노는 아동·청소년이용음란물 관련 범죄에 대해 지극히 약한 처벌을 받았다는 데 있다. 손정우의 불법적 행동은 해당 범죄가 법체계의 틈으로 처벌을 면한 긴 역사의 누적된 결과다. 하지만 이러한 역사성을 고려할 때 손정우 사건으로 인해 아동·청소년이용음란물에 대한 비판적인 인식이 사회 전반적으로 공유되었다는 점은 고무적이다.
특히 해당 수업을 수강한 이들 모두 아동·청소년이용음란물 유포는 중죄이며, 현재 이를 처벌하는 한국의 법이 약하다는 인식을 공유하고 있다. 손정우 사건 이후로 네트워크형 성범죄에 대한 시민의 관심이 증폭되었고, 보다 높은 형벌을 선고받는 경향을 보인다는 점을 고려할 때 법은 결코 영구불변 고정된 것이 아닌, 사회 맥락에 따라 유동적으로 변해감이 나타난다.
국민 정서에 반하는 판결이 무조건 나쁘지도 않고, 판결이 무조건 국민 정서를 따라야 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법의 민주성이라는 측면에서 수많은 이들이 아동·청소년이용음란물에 대한 한국 법의 처벌이 약하다고 생각한다는 점을 고려할 때, 관련 법규를 사회 맥락에 맞춰 정비하는 것에 대한 시민과 전문가들의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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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루토크라시, 메리토크라시 그리고 공정성 | [강좌후기] 11/17 플루토크라시, 메리토크라시 그리고 공정성 (3주차) | 양종원 | 2020.11.20 | |
3주라는 시간이 너무나도 빠르게 흘러 어느덧 마지막 수업에 이르렀습니다. 첫 주차에는 금권정치의 개념과 영향에 대해 이해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두 번째 수업에서는 능력주의와 그 속에 담겨있는 모순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었습니다. 이번 주차에는 앞선 수업들을 바탕으로 과연 공정성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해 볼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롤스의 정의론을 공부하며 공정성과 정의를 연결해 ‘공정성으로서의 정의’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습니다.
롤스는 사회 제도의 제 1 덕목을 정의로 보았습니다. 그리고 정의는 정당성을 기반으로 형성되기에 정의가 보장하는 권리들은 절대적이라 여겼습니다. 이러한 전제를 바탕으로 롤스가 주장한 사회정의 원칙은 구성원의 권리와 의무를 할당하는 방식과 함께 자원의 분배방식을 결정합니다. 첫째, 권리와 의무의 할당은 정치적 원리로 이어집니다. 즉, 기본적인 권리와 의무의 할당에 있어 평등을 요구하는 권리를 의미합니다. 둘째, 자원의 분배는 사회·경제적 원리로 연결됩니다. 분배에 있어서의 불평등은 사회의 최소수혜자에게 그 불평등을 보상할만한 이득을 가져오는 경우에만 정당하다는 것이 그 내용입니다. 즉, 선천적 능력과 같은 우연적 요소들을 배제한 채 기회균등을 적용할 수 없으며, 이를 바탕으로 발생한 불평등은 최소수혜자의 기대치를 향상시킬 때에만 인정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롤스의 주장은 공정한 사회를 만드는데 있어 사회구성원이 동의해야하는 바가 무엇인지에 대해 성찰거리를 줍니다.
이번 수업을 들으며 크게 두 가지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습니다. 우선, 정의로운 사회를 만드는데 있어 제도의 역할입니다. 현대사회 속 자원의 차등적 분배는 불가피하며, 이는 우리 사회 발전의 원동력으로 작용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불평등은 능력이나 환경과 같은 우연적 요소로 결정되는 성향이 강하기에, 이에 대한 재조정이 필수적이라 생각했습니다. 즉, 불성실함, 노력의 부족과 같은 개인적 이유에만 집중해 사회적 구성원의 실패를 탓하는 것이 아니라 구조적 문제점에 주목해 공정한 사회를 만들어야한다 느꼈습니다. 그리고 이번 수업을 들으며 이 과정에서 제도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여기게 되었습니다. 제도는 사회구성원이 생활하는 방식에 영향을 미침과 더불어 사고방식에 역시 큰 영향을 미칩니다. 분배를 중시하고, 기회의 균등을 강조하는 제도가 사회의 근간이 된다면 사회구성원 역시 이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특정한 이유 없이, 단순히 사회의 일원이라는 이유만으로도 자원을 분배하고, 기회를 제공받을 수 있는 사회가 될 수 있도록 제도가 구성되어야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기초자산제, 기본소득과 같은 최근 우리사회의 정치적 이슈에 대해 필요성을 공감할 수 있었고, 공론장에서의 토론과 공동체의 적극적 의견 교류가 이뤄져야한다 느꼈습니다.
다음으로, 자원 분배의 공정한 기준입니다. 수업을 듣기 전에는 능력주의가 자원 분배에 있어 가장 공정한 기준이라 생각했었습니다. 노력이 곧 능력으로 들어난다고 여겼고, 이에 대한 보상은 정당하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수업을 들으며 능력주의 이면에 담긴 모순에 대해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평소 생각하던 능력의 대부분은 결국 우연성에 의해 결정되는 요소였습니다. 지능, 성실성, 더 나아가 노력을 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받는 것 모두 하나같이 선택사항이 아닌 선천적으로 주어지는 사항입니다. 더 나아가 이러한 우연성은 세대가 지날수록 체계적인 교육과 상속을 통해 세습화되고 있는 모습을 보입니다. 즉, 능력주의라는 포장 아래 오히려, 부의 세습화가 정당화되고 다른 이들의 실패는 오로지 개인의 탓으로 돌리고 있다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능력주의의 폐해를 이해하며 우리 사회 속 자원 분배의 공정한 기준은 무엇인가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자원의 차등적 분배가 불가피해 능력주의가 도입될 수밖에 없다면, 우연성에 의해 좌우되는 요소를 최대한 줄여야한다 생각했습니다. 교육과 같은 사회적 제도를 통해 사회구성원들 모두가 일정 수준의 기회를 제공받는 것이 그 해결책 중 하나라 생각합니다.
현대 사회는 ‘외로움 사회’로 일컬어지기도 합니다. 많은 이들이 공감과 인정을 갈망하고 있지만, 이들에게 비판이 가해지는 것도 일쑤입니다. 이들에게는 단순히 자신을 표현하고 사회와 함께할 수 있는 ‘기회’가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이는 제공되지 않고 있으며, 모든 것은 단순히 개인의 탓으로 돌려지고 있습니다. 사회적 인정도 결국 자원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자원의 공정한 분배가 이뤄지는 사회를 형성하는데 우리 모두가 함께한다면, 모두에게 ‘기회’가 제공되는 정의로운 사회가 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이번 수업을 통해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신 김만권 교수님, 함께 수업을 들은 수강생들 모두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자원활동가 양종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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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루토크라시, 메리토크라시 그리고 공정성 | [강좌후기] 11/10 플루토크라시, 메리토크라시 그리고 공정성 (2주차 - 메리토크라시) | 양종원 | 2020.11.15 | |
공정성은 현대사회를 관통하는 중요한 가치입니다. 이에 대한 관심은 결국 ‘누구에게 어떤 경로로 무슨 기회가 제공되는가?’에 대한 집중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공정성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우리 사회 속 경쟁이 치열해지며 공정성 논란은 더더욱 심화되고 있습니다. 2020년 올해만하더라도 인천공항공사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 갈등, 교통공사 비정규직 전환 논란 등 수많은 공정성 관련 갈등들이 있었습니다. 이에 따라 근본적으로 공정한 기준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의문은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이번 주차 수업은 공정성 있는 기준은 무엇인지, 능력주의가 과연 공정한지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분배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살펴보며 이번 수업이 시작되었습니다. 한국 사회는 능력과 노력에 따른 차등적 분배가 공정하다고 여기며, 필요에 의한 분배에 대해서는 공감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또한 경쟁의 부작용을 인정하지만, 경쟁의 효과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성향을 보였습니다. 하지만 우리 사회가 이러한 분배 형식을 띠고 있는가는 또 다른 문제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우리 사회 속 경쟁의 기회가 공정하지 않다고 여깁니다. 개인의 노력보다 가정환경, 인맥 등의 외적 요인이 성공에 더 큰 영향을 미친다고 인식하며, 외적 요인으로부터 자유로운 평가 기준을 열망합니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메리토크라시가 우리 사회에 대두되었습니다.
메리토크라시(혹은 능력주의)는 사회적 재화를 능력에 따라 사람들에게 할당하자는 발상에서 비롯됩니다. 이러한 사상은 개인의 실패에 대한 책임을 사회가 아닌 전적으로 개인에게 돌림으로써 능력에 따른 사회적 불평등에 대해 정당화합니다. 메리토크라시를 처음 언급한 마이클 영(Michael Young)은 이를 비판과 경계의 대상으로 설정하였지만, 현대사회에서는 오히려 찬사 혹은 분배에 있어 공정한 기준으로써 이해되고 있습니다.
개인이 가진 능력에 따라 재화를 분배한다는 명제는 얼핏 들었을 때 굉장히 설득력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오히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합리적인 기준이라는 생각 역시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번 수업을 들으며 능력주의 이면에 담긴 불평등성에 대해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현대 사회의 엘리트들이 인적 자본을 축적하고, 이를 자녀들에게 대물림함으로써, 엘리트들은 소위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엘리트들의 자녀들은 어린 나이부터 다양한 고품질의 교육을 접하고, 부모들의 뛰어난 재능을 물려받음으로써 경쟁에서의 우위를 점합니다. 이들이 미래의 엘리트가 됨으로써 현대사회의 불평등을 더욱 고착화됩니다. 즉, 공정성의 잣대로 등장한 메리토크라시의 능력 역시 사회경제적 선에 있어 불공정하게 시작되었으며, 분배에 있어 공정한 기준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수업 중 김만권 교수님께서 말씀한 것처럼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능력이 떨어진다고 해서 재화나 권력을 받을 자격이 다른 이들에 비해 덜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능력에 따른 차등분배는 너무나도 당연한 일로 받아들여집니다. 분배에 있어 충돌하는 주요 두 명제에 대해 고민하며 우리 사회의 발전 동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떤 분배 기준이 요구되는지, 메리토크라시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인지에 대해 고민해보게 되는 수업이었습니다.
모두 함께 분배의 공정한 기준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성찰한다면 더욱 더 뜻깊은 수업이 될 수 있으리라 기대됩니다.
자원활동가 양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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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루토크라시, 메리토크라시 그리고 공정성 | [강좌후기] 11/3 플루토크라시, 메리토크라시 그리고 공정성 (제1주차 - 플루토크라시) | 개똥이 | 2020.11.9 | |
지난 연말 중국 우한에서 알 수 없는 괴질이 유행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만 해도 비위생적인 중국의 식문화가 초래한 일시적인 해프닝으로 그칠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2020년이 저물어가고 있는 지금 여전히 코로나 19는 우리를 비롯한 전세계인들의 일상을 옥죄고 있고 많은 것을 바꿔놓았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의 세계적 대유행 사태를 맞은 지구촌 사회는 코로나 19이전과 이후의 세계를 가르는 여러 가지 담론들을 쏟아냈습니다. 경희대 김재영 선생님은 언택트 시대를 대표하는 뉴노멀로 기후위기, 인공지능, 대규모 감염병을 강조하기도 했습니다. 이번 강의는 현재 한국사회의 담론을 지배하고 있는 공정성과 그를 뒷받침하고 있는 능력주의, 능력주의를 태동시킨 사회적 배경으로 꼽히는 금권주의를 정치철학적 측면에서 살펴보자는 취지에서 개설되었습니다. 강의를 맡아주신 김만권 선생님은 본격적인 강의에 들어가기 앞서 코로나 19 팬데믹이 가져온 가장 큰 폐해로 사회적 연대의 훼손과 그로 인한 민주주의의 약화를 강조하셨습니다. 감염병 확산 방지를 위한 사회적 거리두기와 이에 따른 디지털기술 활용의 확대 속에서 접촉과 만남이 중시되는 사회적 연대의식이 퇴색하고 있다는 우려가 바탕에 깔려 있었습니다. 이런 만질 수 없는 시대를 맞아 사회적 연대를 어떻게 살려나갈 수 있을까가 새로운 과제라는 점이 화두로 제시되면서 오늘 강의 주제인 플루토크라시의 이야기로 넘어갔습니다.
오랜만에 이루어진 현장 강의였지만 다양한 연령대에서 남녀 모두 골고루 참여해주셔서 다들 뜻깊은 시간을 보내셨을거라 생각합니다. 다음 시간(11.10일<화> 저녁 7시~9시 30분)에는 우리 사회에서 하나의 신화로 자리잡고 있는 능력주의에 대해 배워보고 서로의 생각을 나눠보는 시간을 갖습니다. 배우고자 하는 의지는 충만한데 ZOOM 이나 네이버 밴드를 통한 온라인 강의가 지겨우셨던 분들...모두 관심을 갖고 꼭 참여해보세요.
자원활동가 민동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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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하는 리더십 워크숍 - 존중과 협력이 있는 소모임 만들기 | <소통하는 리더십 워크숍 -존중과 협력이 있는 소모임 만들기> 후기 | 생기있는소윤 | 2020.10.29 | |
올해부터 네살 아이를 공동육아 어린이집에 보내며 협동조합 생활에 대한 기대로 한껏 부풀어 있었다. 비슷한 뜻을 가진 부모들과 크고 작은 다양한 행사를 통해 깊이 소통하고 두터운 친분을 쌓을 수 있으리라는 그 기대는 코로나시대가 열리면서 무참히 깨지고 말았다. 전체가 다 모이는 행사는 도무지 기약이 없고,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서로의 마음에 가 닿을 수 있을까. 그 답은 소모임이었다. 비슷한 관심사를 공유하는 사람들끼리 열명 남짓하게 모이는 소모임을 다양하게 갖는 것. 이를 추진하면서 내 눈에 들어온 이 강의의 제목은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였다. 소통, 리더십, 소모임. 이거면 끝난거 아닌가! 첫 활동. 상대방의 말을 끊지 않고 들은 뒤 그대로 다시 말해보기. 둘씩 짝지어 상대의 말을 ‘상대방이 쓴 단어’를 이용하여 다시 말하는 것이었는데 미처 예상치 못했던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해야 했다. 이렇게까지 에너지를 들여가며 다른 사람의 말을 들어준 적이 있던가. 말 끝나면 내가 할 말만 생각하고 있었지. 놀라운 것은 상대의 얘기를 열심히 암기하듯 들은 뒤 그대로 반복하려고 해도 나도 모르게 ‘상대의 언어’가 아닌 ‘나의 언어’로 자꾸 바꿔서 얘기를 하더라는 것이다. 딱히 어떤 의도가 있다기보다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내 나름대로 소화시키려는 것이었는데, 그러지 않으려고 꽤나 의식적으로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상대방의 말을 ‘판단 없이 끝까지’ 듣는것 뿐만 아니라, 들은 ‘그대로’ 얘기하는것도 사실 평소에 거의 못하고 있다는 점을 자각할 수 있었다. ‘즐겁고 유익한 모임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것들’ 살펴보기. 모두가 말하는 것을 큰 전지에 적어본 뒤 가장 공감 가는 것에 스티커를 붙여보았다. 가장 많은 공감을 얻은 것은 ‘모임 끝날때, 불편한 것 있으면 쌓아놓지 말고 얘기하기’, 그 다음으로 ‘관계에 대한 걱정으로 할 말 못하면 안돼요’, ‘스트레칭’이 이어졌다. 앞의 두가지가 생각이나 마음의 불편함 해소라면 세번째 것은 몸의 불편함 해소. 모임에서 몸과 마음 모두 편안해야 한다는 바램이 읽혔다. 모임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 마음에 맺힌 말에 홀로 고뇌에 빠지고 끙끙대며 곪아본 경험이 누구나 있을 것이다. 그것을 일단 툭 털어야 모임에서 즐겁고 유익함을 느낄 수 있다는 것에 많은 사람들이 공감을 했다.
두번째 시간. 소모임 내에서의 질문법. 1) 서로 다른 의견들이 충돌할 때, 우리가 지금 이 논의를 하는 ‘의미’가 무엇인지 한번 되돌아본다. 각자 자기 의견만 내세울 때에는 시야가 좁아져 상대의 의견이 들리지 않고, 그렇게 평행선을 그리며 맹렬히 돌진하다가 서로 감정을 다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럴때 잠깐 논쟁을 멈추고 이 논의를 하게 된 처음의 ‘의미’로 되돌아가 우리가 왜 이것을 하려하는지 넓은 시야로 다시 한번 짚다 보면 합의점을 찾기도 하고, 새로운 방법이 떠오르기도 하며, 생각지 않게 다른 길이 열리기도 한단다. 2) 모임 속에서 나 자신을 돌봄과 동시에 전체도 돌보고 살핀다. 구성원 모두가 각자의 심정을 살핌과 동시에 전체를 돌본다면 모임을 이끌어 가는 역할과 힘을 자연스레 나눠가지게 될 것이다. 내가 모임의 리더가 아닐 때 전체를 돌본다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는데 모임 구성원들에게 꼭 전하고 싶은 말이었다. 3) “이 사람도 서툴구나.” 이 강의 전체에서 얻은 단 한 문장을 말하라면 나는 이 것을 말할 것이다. 모임에서 누군가가 상처되는 말을 할때(의도했든 하지 않았든간에) 그것을 바로 상처로 받아들이기 전에 나, 또는 모임을 보호함과 동시에 그 사람도 품을 수 있는 말. ‘이 사람도 서툴구나, 내가 그렇듯.’ 상호작용의 연속인 삶 속에서 새롭게 반응하는 법을 배웠다. 다른 사람을 넓게 품을 수 있는 실마리를 얻었다. 가상의 모임 ‘행복 품앗이’ 활동. 처음엔 이게 뭐지?하는 느낌으로 따라가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가상임을 잊고 모두가 몰입해서 열띤 논의를 벌였다. 우리 진짜 다음에 행복 품앗이 시작해야 되는 것 아니냐는 우스개소리를 할 정도였다. 가상의 모임에서 각자가 하고 싶은 각양각색의 활동들 중 한가지를 도출해내는 과정은, 모두의 의견을 녹여내 합의를 이끌어내는것이 정말 힘들지만 대단한 과정이구나 새삼 체감한 값진 시간이었다.
서클로 둘러앉아 한 명도 빠짐없는 적극적인 참여를 끌어내며 다섯시간 동안 이어지는 강의를 두번에 걸쳐 이끌어주신 이은주 선생님, 발언자와 따뜻하게 눈을 맞춰주며 공감의 눈빛을 끊임없이 발사해주신 간사님들, 열정적으로 의견을 내고 또 열린 마음으로 귀기울여주신 참여자들 모두가 더없이 소중하게 느껴진 귀한 시간이었다. 모두에게 감사드리고 박수보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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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하는 리더십 워크숍 - 존중과 협력이 있는 소모임 만들기 | <소통하는 리더십 워크숍 -존중과 협력이 있는 소모임 만들기> 후기 | 생기있는소윤 | 2020.10.29 | |
올해부터 네살 아이를 공동육아 어린이집에 보내며 협동조합 생활에 대한 기대로 한껏 부풀어 있었다. 비슷한 뜻을 가진 부모들과 크고 작은 다양한 행사를 통해 깊이 소통하고 두터운 친분을 쌓을 수 있으리라는 그 기대는 코로나시대가 열리면서 무참히 깨지고 말았다. 전체가 다 모이는 행사는 도무지 기약이 없고,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서로의 마음에 가 닿을 수 있을까. 그 답은 소모임이었다. 비슷한 관심사를 공유하는 사람들끼리 열명 남짓하게 모이는 소모임을 다양하게 갖는 것. 이를 추진하면서 내 눈에 들어온 이 강의의 제목은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였다. 소통, 리더십, 소모임. 이거면 끝난 것 아닌가! 첫 활동. 상대방의 말을 끊지 않고 끝까지 들은 뒤 그대로 다시 말해주기. 둘씩 짝지어 상대의 말을 ‘상대방이 쓴 단어’를 이용하여 다시 말하는 것이었는데 미처 예상치 못했던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해야 했다. 이렇게까지 에너지를 들여가며 다른 사람의 말을 들어준 적이 있던가. 말 끝나면 내가 할 말만 생각하고 있었지. 놀라운 것은 상대의 얘기를 열심히 암기하듯 들은 뒤 그대로 반복하려고 해도 나도 모르게 ‘상대의 언어’가 아닌 ‘나의 언어’로 자꾸 바꿔서 얘기를 하더라는 것이다. 딱히 어떤 의도가 있다기보다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내 나름대로 소화시키려는 것이었는데, 그러지 않으려고 의식적으로 꽤나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상대방의 말을 ‘판단 없이 끝까지’ 듣는것 뿐만 아니라, 들은 ‘그대로’ 얘기하는것도 사실 평소에 거의 못하고 있다는 점을 자각할 수 있었다. ‘즐겁고 유익한 모임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것들’ 살펴보기. 모두가 말하는 것을 큰 전지에 적어본 뒤 가장 공감 가는 것에 스티커를 붙여보았다. 가장 많은 공감을 얻은 것은 ‘모임 끝날때, 불편한 것 있으면 쌓아놓지 말고 얘기하기’, 그 다음으로 ‘관계에 대한 걱정으로 할 말 못하면 안돼요’, ‘스트레칭’이 이어졌다. 앞의 두가지가 생각이나 마음의 불편함 해소라면 세번째 것은 몸의 불편함 해소. 모임에서 몸과 마음 모두 편안해야 한다는 바램이 읽혔다. 모임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 마음에 맺힌 말에 홀로 고뇌에 빠지고 끙끙대며 곪아본 경험은 누구나 있을 것이다. 그것을 일단 툭 털어야 모임에서 즐겁고 유익함을 느낄 수 있다는 것에 많은 사람들이 공감을 했다. 두번째 시간. 소모임 내에서의 질문법. 1) 서로 다른 의견들이 충돌할 때, 우리가 지금 이 논의를 하는 ‘의미’가 무엇인지 한번 숨고르며 되돌아본다. 각자 자기 의견만 내세울 때에는 시야가 좁아져 상대의 의견이 들리지 않고, 그렇게 평행선을 그리며 맹렬히 돌진하다가 서로 감정을 다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럴때 잠깐 논쟁을 멈추고 이 논의를 하게 된 처음의 ‘의미’로 되돌아가 우리가 왜 이것을 하려하는지 넓은 시야로 다시 한번 짚다 보면 합의점을 찾기도 하고, 새로운 방법이 떠오르기도 하며, 생각지 않게 다른 길이 열리기도 한단다. 2) 모임 속에서 나 자신을 돌봄과 동시에 전체도 돌보고 살핀다. 구성원 모두가 각자의 심정을 살핌과 동시에 전체를 돌본다면 모임을 이끌어 가는 역할과 힘을 자연스레 나눠가지게 될 것이다. 내가 모임의 리더가 아닐 때 전체를 돌본다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는데 모임 구성원들에게 꼭 전하고 싶은 말이었다. 3) “이 사람도 서툴구나.” 이 강의 전체에서 얻은 단 한 문장을 말하라면 나는 이 것을 말할 것이다. 모임에서 누군가가 상처되는 말을 할때(의도했든 하지 않았든간에) 그것을 바로 상처로 받아들이기 전에 나, 또는 모임을 보호함과 동시에 그 사람도 품을 수 있는 말. ‘이 사람도 서툴구나, 내가 그렇듯.’ 상호작용의 연속인 삶 속에서 새롭게 반응하는 법을 배웠다. 다른 사람을 넓게 품을 수 있는 실마리를 얻었다. 가상의 모임 ‘행복 품앗이’ 활동. 처음엔 이게 뭐지?하는 느낌으로 따라가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가상임을 잊고 모두가 몰입해서 열띤 논의를 벌였다. 우리 진짜 다음에 행복 품앗이 시작해야 되는 것 아니냐는 우스개소리를 할 정도였다. 가상의 모임에서 각자가 하고 싶은 각양각색의 활동들 중 한가지를 도출해내는 과정은, 모두의 의견을 녹여내 합의를 이끌어내는것이 정말 힘들지만 대단한 과정이구나 새삼 체감한 값진 시간이었다. 서클로 둘러앉아 한 명도 빠짐없는 적극적인 참여를 끌어내며 다섯시간 동안 이어지는 강의를 두번에 걸쳐 이끌어주신 이은주 선생님, 발언자와 따뜻하게 눈을 맞춰주며 공감의 눈빛을 끊임없이 발사해주신 간사님들, 열정적으로 의견을 내고 또 열린 마음으로 귀기울여주신 참여자들 모두가 더없이 소중하게 느껴진 귀한 시간이었다. 모두에게 감사드리고 박수보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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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금맥톡] 비독점 다자연애 - 폴리아모리에 대하여 | 내 삶의 편견의 한 조각이 떨어졌다 - 폴리아모리 토크쇼 후기 | 환2 | 2020.10.22 | |
지난 16일 저녁 참여연대 1층 카페통인에서는 <불금맥톡 - 비독점다자연애 폴리아모리에 대하여> 토크행사가 열렸다. 사전에 신청하지 않았지만, 한번 와보라는 담당자의 말에 불쑥 찾아온 호경(아카데미느티나무 미술학교 참가자)을 붙잡고 그날의 경험을 들어보았다. 폴리아모리라는 말을 처음접했을때 어땠나. "관심없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관심도 없고 반대한다는 생각도 있었고 불가능한 관계라는 생각을 했다. 조금더 극단적으로 생각하자면 소위 '바람'을 정당화 시키기 위한 우아한 용어라고 생각했다." 불금맥톡에서 승은 지민 우주를 봤을때 느낌 궁금하다. "운동권 학생들인가? 싶었다. 세명이 앞자리에 앉아서 가족이라고 소개할때 오늘 초대손님인걸 알았고, 이번행사가 당사자들이 직접 말하는 컨셉이란걸 알았다." 폴리아모리 토크 내용을 들으면서 전반적인 느낌은 어땠나. "점점 빠져들었다. 그리고 폴리아모리가 특수한 관계인데, 단순히 우리가 연애 소설에서 보는 사랑 질투가 아니라, 이 세사람이 관계 전반에 대해 깊이 고민하고 있다는 걸 알았고, '굉장히 건강하다'라고 생각했다" 인상적이었던 이야기 한 두가지 나누어 달라. "이 토크쇼에 참여할때 가장 궁금했던 것이 질투를 어떻게 다루었는지, 가족들이 어떻게 바라보는지가 궁금했는데 그부분이 인상적이었다. 질투에서는 지민의 말처럼 '자신의 열등감의 발로가 질투가 아닌가 한다'라는 부분이 인상적이었고, 서로가 느낀는 감정적인 어려움들을 서로가 솔직하게 나누고 합의점을 찾아가는게 인상적이었다. 당사자들끼리 논의하면서 합의해나가는 것이 좋았다. " "부모님들의 반응을 내놓았을때 - 예상되는 부모님들의 반응이 있었지만 부모에게 지지않고, 부모와 독립된 존재로 살아가는게 멋있었다." 이번 행사에서 남아있는 키워드가 있다면 "토론 사회자가 '결국은 민주주의네요'라고 말한 것 처럼, <합의의 갱신 가능성>이라는 말이 되게 멋있었다. 바운더리가 없는 서로가 각자가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게 좋았다. 우리가 어릴때 '너는 무엇이든 될 수 있어'라고 희망을 주는데 크면 사실은 현실에서 불가능한 것들이 보이는데 이 세사람은 그 한계들을 확장시키며 삶을 만들어 가는 것 - 사회의 정상성에 저항하며 살아가는 '전사들' 같았다." "혁명적이었다. 사회전반적인 통념에 대해 혁명을 일으키는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남기고 싶은말. 내 삶에 남아있는 연결지점들이 있다면 "나는 사랑에 대한 로맨틱한 생각으로 사랑은 영원하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이 세사람이 서로가 지속적으로 협의하고대화나누며 사랑을 지속하는 것이 무엇인지 다시금 확인하게 되었다. 결혼제도 같은 법적 제도를 새롭게 전환하는 것뿐 아니라 추상적인 관념들까지도 깨뜨려나가야 한다는 사실을 배우게 되었다. " "마지막으로 나의 편견에 대한 반성을 하게 되었다." 인터뷰를 하는내내 미소를 머금은 호경의 얼굴이 기억에 남는다. 누군가 그랬다. 폴리아모리라는 개념을 통해 삶의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한것 같아서 좋았다고. 지민 승은 우주 이 세사람이 처음엔 뭔가 특별해 보였지만. 실은 일상에서 끊임없이 조율하고 소통하며 평등한 관계를 위해 애쓰는 보통의 사람들이었다. 나 또한 세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며 지난 날의 인간관계들을 돌아보게 되었다. 거창한 말로 들릴 수 있지만 일상의 민주주의를 치열하게 실천하는 실천가로 느껴졌다. 편견을 드러내면 서로가 함께 공유하고 배울 수 있는 점들이 얼마나 많은지. 갑작스러운 인터뷰 요청에 응해준 호경샘에게 감사를 드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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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투사워크숍] 꿈 거울로 참 나를 만나다(온라인) | [꿈투사워크숍] 오늘밤 좋은 꿈 꾸세요! | 개똥이 | 2020.10.22 | |
'아, 이렇구나!‘ 인생 5학년이 되면서 몸뿐만 아니라 마음도 조금씩 달라지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4학년 때만 해도 '고민'이나 '감안', '고려'보다는 원하면 또는 필요하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생각속에 현장 돌파를 통해 일의 성과를 내면서 일종의 자신감을 확인하는 삶이었다면, 5학년이 되면서부터는 다른 사람의 생각이나 입장을 먼저 생각하는 변화를 실감하게 됩니다. 아직은 이것이 소위 여성호르몬이 더 많이 나온다는 신체의 변화 때문인지, 아니면 사회적인 위치의 변화 때문인지 명확하지는 않습니다. 아니, 사실은 아마도 두 가지 다 변화하고 있는 것이겠지요. 다시 말하면, 시각과 청각, 미각 등 육체의 감각들을 기반으로 한 이성과 논리, 객관성, 전략 등을 중심으로 나는 판단하고 행동한다는 생각이 감정이나 직관, 영감 등 정신적인 감각에 더 의존하는 것으로 변하는 겁니다. 다만, 아내나 딸과 이야기를 하다보면 이미 예전부터 감정이나 직관을 더 우선시 했다는 것을 문득문득 느낍니다. 드라마를 볼 때 스토리의 전개나 플롯(구성)도 있지만, 배우들이 움직이는 배경의 감정들을 더 재미있게 보는 거지요. 한마디로 남성들은 보통 '아주 단순'합니다. 물론 그렇지 않은 남성들도, 일찍 변화한 남성들도 있습니다만. 이 같은 변화 속에서 '꿈투사워크숍' 프로그램 소개 글을 보면서, '아, 이건 뭔가, 어떻게든 꼭 참여해 봐야겠다'는 결심이 섰습니다. 내가 잘 모르는 세계가 있는 것만은 분명했으니까요. 그리고 바로 손에 잡은 책이 꿈투사워크숍을 이끄는 고혜경 박사님의 '나의 꿈 사용법'(한겨레출판, 2014)입니다. 의식보다 훨씬 더 큰 분량의 무의식을 사람들 각자 다 갖고 있고, 이 무의식 속에는 각 개인 삶의 역사와 가족의 역사, 민족의 역사, 종의 역사까지도 들어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 무의식을 보고 느끼고,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는 방법이 바로 '각자의 꿈을 통해서'입니다. 그리고, 각자의 꿈은 여러 사람이 함께 나눌 때에야 그 의미를 쉽게 알 수 있다는 겁니다. 혼자서는 파악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지요. 그리고, 맞이한 첫 시간. 첫 참가자의 꿈투사를 14분의 친우(親友)들과 함께 나누면서, 바로 알게 됐습니다. '아, 이거구나' 군에 다녀와서 허리가 좋지 않아 기(氣)치료를 위해 '태극권'을 배우면서 느끼게 된 '氣의 감각', 인생 3학년 때 읽은 '자신을 멀리 하늘 위에서 바라볼 때 괴로움과 슬픔을 치유할 수 있다'는 내용의 책 '왓칭'(김상운, 정신세계사, 2011), 동물권 책읽기에 참여하면서 우연히 보게 된 '말하지 않고 동물과 대화하는 법'(피 호슬리, 김영사, 2018)에서 과학적으로 설명하는 '텔레파시', 타로카드를 배우고 나서 알게 된 '사람들은 타로카드 78장의 이야기들을 모두 품고 살아가고 있고, 이를 계속 확인하고 정리하고 싶어한다는 것' 등이 같은 묶음의 세계라는 것을. 더 큰 감동은 나의 꿈을 이야기하고 친우들이 꿈투사를 해줄 때였습니다. 모든 참가자들이 내 꿈을 집중해서 듣고, 내 꿈을 열심히 이해하려 하고, 그 의미를 해석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고 느끼면서, 한마디로 '아! 이런 거구나'라는 감탄과 함께 무척 행복했습니다. 누군가 나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괜히 쑥스럽고, 부담스럽고, 낯선 것이 아니라 꿈을 매개로 참가자들은 각자 자신의 경험과 이야기를 통해 그 꿈을 이해하고, 나누면서 함께 힐링을 하는 겁니다. 세상은 나 혼자가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곳이라는 것을 온 몸으로 체험하는 것이죠. 자존감과 자신감이 높아지는 것도 꿈투사워크샵의 큰 장점입니다. 꿈은 의식과 무의식이 섞여 매일밤 빚어내는 자신만의 이야기와 영상입니다. 누구의 책을 본 것도, 드라마를 본 것이 아닌 자신만의 영화가 나타나는 것이죠. 이 스토리를 매일 기록해 놓고, 그 의미를 찾다보면 그건 가장 독창적인 예술작품이 되는 겁니다. 그래선지, 꿈을 적다보면 무언가 계속 채워지는 만족감을 느끼게 됩니다. 나만의 작업을 할 수 있는 토대가 만들어지는 겁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코로나로 인해 온라인을 통해서만 교류한다는 겁니다. 14분의 친우들을 PC의 작은 한 화면을 통해 보다보면 뭔가 비현실적이라는 느낌입니다. 물론, 온라인영상 프로그램의 일부 기능을 이용하면 바로 옆에서 얘기하는 것처럼 가깝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한계가 있습니다. 한바탕 수다를 떨고, 스트레스를 푸는 듯한 느낌이 쉽지 않은 거지요. 마지막으로 책 한권을 소개합니다. 매일 아침 모여 꿈투사를 통해 하루를 시작하는 말레이시아 산악지대에 사는 원시부족 '세노이족'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잠'(열린책들, 2017) 입니다. 꿈에 대한 과학적인 해석과 그 의미, 꿈투사법 등이 상세하게 소설형식으로 꾸며져 아주 재미있습니다. 그리고, 아래 인사의 의미를 좀더 깊이있게 이해하게 됩니다. '오늘밤 좋은 꿈 꾸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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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격 분석! 코로나 예산 감시학교 | 코로나 시대의 시민강좌 - 예산 감시학교 후기_수빈 | 수빈 | 2020.10.21 | |
코로나로 시작한 2020년이 어느덧 끝을 향해 가네요. 봄만 해도 '조금 지나면 상황이 나아지겠지, 이번 학기만 교육 취소하면 다음 학기부터는 정상운영할 수 있겠지'라는 희망을 가졌는데, 어느새 코로나가 우리 곁을 쉽게 떠나지 않을 것임을 받아들이게 된 것 같습니다. 그래서 봄/여름학기의 혼란을 이겨내고 9월엔 예년의 개강 분위기를 회복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며 강좌를 신청했어요. 이번 학기 9~10월 4주간 진행된 예산감시학교를 수강했는데요. <나라살림연구소> 이상민 선생님의 예산 분석 2강, 참여연대 간사님들께서 직접 진행하시는 예산감시 활동 2강을 듣고 나니, 뉴스에서 언급되는 예산 규모를 들을 때 최소한 '저게 뭐구나' 정도는 알 수 있게 된 것 같아요. 이상민 선생님의 강의는 정말 손꼽을 만한 명강의였고요, 직접 발품발아 얻은 정보와 경험을 토대로 한 강의가 얼마나 생명력이 있는지를 체감하게 되었어요. 참여연대 간사님들의 강의를 들으면서는 참여연대가 곳곳에서 얼마나 애쓰고 있는지를 새삼 느끼게 되었고요. 매 회차 성실히 참여하며 다양한 질문과 의견 주신 동료시민들도 대단하시다고 생각했습니다. 간사님의 자연스럽고 세심한 진행도 느티나무 강좌의 자랑거리인 것 같아요. 온라인으로 진행하면 아무래도 교육공간의 보이지 않는 '공기'같은 걸 느낄 수 없기 때문에 참여자들의 상태을 훨씬 더 민감하게 살피고 반응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간사님께서 그런 것들을 고려하신 듯한 진행을 하고 계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강의 자체의 질뿐 아니라 환경의 질까지 잘 챙겨주신 간사님께 박수를!! 4강 진행해주신 모든 강사님과 수강하신 시민들께도 감사드립니다. 요즘 많은 강좌를 온라인으로 진행하고 있는데 이에 대한 의견이 분분한 것 같아요. 온라인이라 불편/불안하기도, 온라인이라 더 편하기도 하다는 의견을 주변에서 접하는데요. 개인적으로는 온라인이 효과적인 것 같아요. 오가는 시간을 절약하여 그 에너지로 강의에 더 집중할 수 있고, 예전같으면 너무 피곤해서 출석하지 않았을 법한 날에도 침대에 누워 강의를 들었는데 이렇게라도 들을 수 있어 좋더라고요. 반면 온라인의 전달력이 약하다거나, 얼굴이나 환경을 타인에게 비추는 것이 불안하다거나, 물리적으로 온라인으로 참여할 수 없다거나(데이터 문제, 공간 문제 등)하는 의견도 적지 않은 것 같아요. 시대가 이미 변해서 과거로 돌아가긴 어려울 텐데.. 그렇다면 앞으로는 전략적으로 오프라인과 온라인 개강을 반반 시도해야 하나 라는 생각을 해보기도 했어요. 아마 느티나무 운영진께서도 많이 고민하고 계실 것 같네요. 마지막으로, 느티나무에 좋은 강좌가 많은데 기존 회원이 아니더라도 많은 시민이 접근할 수 있게 하는 방안을 더 고민하면 어떨까 하는 의견 드립니다. 보다 더 다양하고 많은 시민들이 참여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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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연극워크숍 15기] 낭독연극 워크숍 | "그날도 연극하기 좋은 날씨였다." 낭독연극 워크숍 후기. 우정현 | 메링링 | 2020.8.21 | |
6.20.(토) 11:00 왜 연극을 하려고 하나요? 낭독연극 워크숍 발표날이다. 느지막이 일어나 커피를 마시며 워크숍의 첫 날을 떠올린다. 5월 13일, 참여연대 지하 1층 느티나무 홀에 열일곱 명의 사람들이 모였다. “나를 더 잘 표현하고 싶어서” “나를 더 잘 알고 싶어서” “타인의 삶에 공감하고 싶어서” “실용적인 목적으로” 등등, 저마다 이유는 다르지만, 공통점은 하나, 연극을 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란 것. 나는 “즐거움을 찾아서” 워크숍에 참여했다. 어릴 적 학교 수업시간에 교과서에 실린 희곡을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연기하듯 읽던 순간의 짜릿했던 기억이 어렴풋하게 남아 있다. 그 순간의 느낌을 세월이 훌쩍 지난 지금 다시 경험할 수 있으리란 생각에 신청했고, 열일곱 명의 낯선 사람들과 함께 자리에 앉았다. 앞쪽에는 워크숍을 진행하는 남동훈 연출님이 있다. 시민들이 주축이 되어 연극을 꾸리는 시민 연극단을 이끈 경험이 여러 번 있는 분이라고 한다. 연출님은 내내 웃음 띤 얼굴과 여유 넘치는 표정으로 앞으로 워크숍이 어떻게 진행될지 안내했다. 그동안 많은 일이 벌어져서 그런가. 불과 한 달 전의 일인데 오래 전처럼 느껴진다.
6.20.(토) 12:00 민중의 연속극 워크숍에 참석하기 위해 집밖으로 나설 채비를 한다. 가방 안에 헨릭 입센의 ‘민중의 적’과 김은성 작가의 ‘달나라 연속극’ 책을 넣었다. 낭독연극 워크숍의 교재들이다. 첫 수업시간이 끝나고, 연출님이 알려준 대로 한 자리에서 멈추지 않고 마지막까지 대본을 읽어나갔다. 연극 대본을 읽는 게 얼마만일까. 생각만큼 장면이 잘 그려지지 않았다. 다음 시간부터 참가자들끼리 돌아가면서 대본을 읽어나갔다. 등장인물의 대사를 읽는 게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점점 익숙해졌다. 짧은 대사에 감정을 싣는 연습을 했다. 연출님은 대사 표현, 행동, 전사(前史) 파악 등 연기이론을 설명하며 초보 연기자들을 이끌었다. 두 대본 중 연기하고 싶은 배역과 장면을 선택해야 한다. 나는 ‘민중의 적’ 중 ‘시장’ 역할을 골랐다. 정의감 넘치는 주인공 ‘스토크만’ 대신 노회하고 야심 가득한 시장 역할을 선택한 데는, 세상에서 내게 주어진 배역과 다른 역할을 맡아보고 싶었던 마음이 컸다. 나의 파트너는 시장 역할을 담당한 00쌤. 우리는 ‘민중의 적’ 4막에서 형과 동생이 대립하는 장면을 연기했다. 처음에는 겨우 대본을 따라 읽는 데 그쳤지만 차차 상대방의 연기에 감응하며 몸을 움직였다. 나는 “그 짓을 하고서도 나한테 원칙을 들먹여”란 대사를 할 때 가장 통쾌했고, 00쌤은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마시오”라는 대사를 진정성(?)이 느껴지도록 읊었다. 열일곱 명의 참가자 중에는 ‘시장’ ‘스토크만’ 외에 ‘홉스타드’ ‘아스락슨’ ‘카트린’ ‘만자’ ‘은창’ ‘은영’ ‘미영’이 있었다. 연습 시간 동안 이들이 벌이는 ‘민중의 연속극’이 참여연대 건물에서 수도 없이 상연되고 끝마치고 다시 막이 올랐다. 6.20.(토) 12:20 마스크를 쓴 사람들 지하철에 탔다. 사람들이 죄다 마스크를 쓰고 있다. 올 초에는 상상하지 못하던 모습이다. 코로나19 때문에 워크숍이 중간에 위기(?)를 맞았다. 5월 말 코로나19가 다시 확산될 기미를 보이자, 정부에서 2주간 행사 및 모임 참가 자제를 권고한 것. 덕분에 워크숍도 1주일 이상 뒤로 미뤄졌다. 발표를 앞두고 한창 분위기를 탈 때쯤에 일어난 일이라 아쉬웠다. 그럼에도 모든 것이 불확실한 코로나19 시대에 적응할 수밖에 없는 법. 잠시 쉬는 기간 동안 대본 읽기를 연습한 후 2주 뒤 다시 모였다. 더 넓은 공간에서 참가자끼리 거리를 두고, 마스크를 꼭 착용한 채 연습에 임했다. 코로나19 감염 위험이 없는 집에서도 대사를 완전히 외우는 걸 목표로 대본을 읽으며 연습했다. 연극이나 영화에서 배우들이 긴 대사를 다 외워 연기하는 걸 보고 신기했는데, 나도 어느 정도는 그럴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이 생긴다. 비록 한 장면이지만 말이다. 이 대사를 할 때 인물의 감정은 어떨까. 이러한 행동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조금씩 인물의 마음에 가까워진다.
6.20.(토) 12:40 연극하기 좋은 날씨 시청역 8번 출구. 이 곳에서 참여연대에 가는 마을버스를 타야 한다. 워크숍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 주말에도 참여해야 할 때가 있었는데, 왠지 모르게 토요일 점심 무렵 정류장에서 마을버스를 기다리며 바라본 풍경이 보기 좋았다. 오늘 또한 그렇다. 이 날의 햇살, 바람, 풍경이 마음에 든다. 핸드폰을 열고 연출님이 단체 카카오톡 채팅방에 남긴 메시지를 읽어 본다. 연출님의 말씀대로 “각자의 인생에서 단 한 번 밖에 없는 공연”이 시작되려 한다. 마침 “연극하기 좋은” 날씨다. 참. ‘낭독연극 워크숍’ 이후에는 ‘대본창작 과정’이 진행된다고 하던데, 어떤 내용이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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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투사워크숍] 꿈거울로 참 나를 만나다(온라인) | [꿈투사워크숍] 잃어버린 통증을 찾아서 | jusibel | 2020.8.8 | |
나에게로 데려다주는 꿈여행 꿈투사 워크숍에 참여하는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저는 문제가 많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제 안에 풀리지 않은 문제들이 아주 많습니다. 꿈투사는 그 문제의 미로에서 길을 잃지 않게 도와주는 아드리아네의 실꾸러미 같습니다. 고혜경 선생님은 꿈이 우리를 언제나 도와주고 지지해주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 말 한 마디가 어두운 밤의 등댓불 같이 마음을 밝혀줍니다. 신이 보낸 러브레트가 우리에게 꿈의 모습으로 전달되고 있다구요. 우리 모두에게 공평히, 그렇게 꿈은 주어집니다. 매번 꿈투사 수업에서 새로운 것을 배웁니다. 그렇다면 이번 수업에서 저는 무엇을 배웠을까요. 이번 학기에 저는 당연한 것들을 당연하게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배웠습니다. 상처가 나면 아픕니다. 아프면 쉬거나 병원에 가야겠지요. 당연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는 당연한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닌 일들이 많습니다. 영혼에 상처가 나도 아프지 않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영혼이 부서지고, 피가 나고, 심지어 죽기 일보 직전인데도 아무렇지도 않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무감각하다고 생각했는데, 고통에 마비된 것이었습니다. 이겨냈다고 생각했는데, 상처에 반창고만 갈아 붙인 것이었습니다. 씩씩하거나 용감했던 것이 아니라, 무지했고 마비된 것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마비된 사람들이 다른 마비된 사람들을 만들고, 마비된 사람들이 아직 마비되지 않은 사람들의 마음과 영혼을 헤집습니다. 이번 수업에서 다룬 꿈을 통해서 저는 제 아픔을 찾아냈습니다. 제 인생을 돌이켜 보면 당연히 아파야하는 상처였는데, 거짓말처럼 아픔을 제대로 느낀 적이 없는 자리였습니다. 제대로 눈길 주어 멈추어 본 적이 없는 지점이었습니다. 꿈을 통해 여전히 열린 채 피를 쏟아내는 상처를 찾았고, 저는 마음으로 앓고 있습니다. 아픈 걸 알아야, 애도할 수 있고, 애도할 수 있어야 반성할 수 있고, 반성할 수 있어야, 그 온당하고 당연한 행동을 취할 수 있다는 걸 깨닫습니다. 이렇게 쓰면 굉장히 힘든 과정인 것 같은데, 또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다룰 힘이 있을 때에만 꿈이 상처를 보여준다고 하거든요. 내 무의식이 나를 그토록 믿는다면, 나는 이겨나갈 힘이 있는 상태일 것입니다. 좋은 신발은 우리를 좋은 곳으로 데려가 주지만, 모든 꿈은 우리를 더욱더 더 내 자신으로 만들어 줍니다. 잠이 들기 전, 저의 영혼에 인사를 건냅니다. 오늘도 좋은 꿈 꾸길!! (꿈투사 수업을 듣고 있는 동료 수강생들과 신뢰할 수 있는 안전한 안내자가 되어주시는 고혜경 선생님께도 감사를 전합니다.)
2020년 봄학기 온라인으로 진행된 꿈투사 워크숍 캡처 화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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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데이클래스] 토요 보깅댄스 ‘Express yourself’ | [후기-토요보깅댄스] 천골의 통증이 사라지다 - 간증같은 보깅 후기 :) | 느림보바 | 2020.7.27 | |
어떤 일에 호기심을 느끼고 해보고 싶어졌을 때, 이리 재고 저리 재는 것은, 솔직히 말해 내 스타일은 아니다. 그런데 "토요보깅댄스" 강좌 공지를 앞에 두고는 망설임이 생겨났다. 분명 강좌 안내에는 이렇게 쓰여 있기는 했다. 이런분들 초대합니다.
※보깅은 누구나 할 수 있어요. 몸치, 박치, 남녀노소 모두 환영합니다. 그러나 "보깅 댄스"라는 것이 너무 젊어 보이는 느낌이라 반백년을 살아온 내 몸이 이걸 따라갈 수 있을까, 하는 염려가 컸다. 그래서 정말 나 답지 않게 아카데미 느티나무 간사님께 질문 문자를 보냈다. -질문. 보깅 댄스 저도 할 수 있는 걸까요? 젊은 사람들 틈에 끼어 분위기 망칠까봐 신청 전에 문의합니다. 솔직한 답변 부탁드립니다. -솔직하게 대환영합니다. 전 50대 중년분들이 오시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기획했습니다. "대환영"이라고, 50대 중년분들이 오시면 좋겠다고 생각한다는 대답이 돌아왔기에 덜컥 신청을 했다. 강좌가 열리는 토요일 아침, 컨디션이 영 별로다. 천골(여기가 어디냐 하면... 허리 아래 꼬리 바로 위 평평한 부분... 아파보지 않은 사람은 그 부분을 의식조차 하지 못한다.)부근이 꽤 아팠다. 펄펄 날 것 같은 컨디션이어도 빌빌 거릴텐데, 이대로 갔다간 민폐작렬 아닐까, 싶었지만 '노쇼'는 더 큰 민폐일 것 같아서 무거운 걸음을 참여연대로 옮겼다. 무슨 옷을 입고 가야 할지조차 막막하지만 지금 '드레스 코드'를 따질 처지는 아니지 않나. 강의실에 도착했을 때, 나는 '망했다'고 생각했다. 이런. 내가 예상한 것보다도 더 젊다. 이 젊은이들 사이에서 앞으로 두 시간 반 동안 보깅 댄스라는 낯선 춤을 추어야 하는가? 게다가 나는 춤알못인데. 어떤 춤을 추어도 체조로 만드는 탁월한 재능을 보유하고 있지 않은가. 왜 이 자리에 왔는가를 이야기하는 것으로 강의가 시작되었다. 나는 "참여연대가 안하던 짓을 하기에, 저도 안하던 짓을 해보기로 했습니다."라고 답했다. 100% 진심이다. 몸을 풀고, 보깅 댄스에 대한 간단한 안내를 받고, 그리고 춤을 추었다. Cat Walk, Duck Walk, Floor Performance, Hand Performance, Spin&Dip를 하나 하나 배웠다. 당.연.히 어렵다. 그런데, 이거 완전 재미있다. 선생님의 설명을 내 식대로 버무려서 표현하자면, 아주 과장되게, '나 예뻐' '나 멋져'라는 느낌을 팍팍 풍기며, 자뻑 가득한 동작을 해야 하는데, 이게 정말 재미있지 않은가. 근 10년은 움직여 본적이 없을 것 같은 골반을 이리 저리 움직이고, 한번도 해보지 않은 방식으로 움직이는 것이 이토록 재미있을 줄이야! 정신 건강에도 도움이 되는 것 같다. 내 안에 숨겨져 있는 '자뻑 본능'을 마음껏 드러낼 수 있다. 게다가 멋지지 않은가. 내가 조금은 힙해진 느낌? 완전 신문물을 접한 느낌? 중년분을 위해 기획했다고, 나를 낚기 위해 '뻥카'를 날린 간사님께 감사하는 마음이 절로 생겼다. 그가 '실은, 참가 신청을 해주신 분들은 대체로 2, 30대 분들이세요.'라고 솔직한 답변을 해주었다면 나는 이 자리에 오지 않았겠지? 때로 선의의 뻥카는 큰 도움이 된다. 천만 다행으로 참여연대 느티나무 홀에는 거울이 없고, 그래서 나는 나를 볼 수 없다. 선생님의 멋진 퍼포먼스를 반 정도는 따라가고 있을 것이라고 홀로 착각하며 두 시간 반을 함께 춤을 추었다. 아, 내 인생에 부족한 성분이 바로 '댄스'였구나! 못하더라도 자주자주 춤을 출 기회를 만들어 주기적으로 춤을 섭취해야지, 하고 야무진 다짐을 했다.(나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지난 주말에는 '훌라댄스' 원데이 워크숍'에 참가하기도 했다. 불행하게도 거기에는 거.울.이. 있.더.라. ㅠ.ㅠ) 혹시 다음 강좌가 개설되었을 때 참가를 망설이는 분을 위해 '춤알못'인 내가 알려주자면, 보깅은 정확히 4박자 리듬을 따르더라. 박자를 쪼개지 않아서 춤에 서툰 사람들도 일단 시작할 수는 있는 것 같았다. 보깅의 세계로 더 깊이 들어갔을 때도 그렇게 정직한 리듬을 타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허들이 높은 분야는 아니라는 것. 이름만 어려울 뿐이다. 그리고, 아주 아주 중요한 이야기. 즐겁게 춤추고 집에 돌아왔는데, 뭔가가 달라졌다는 것을 알았다. 이런! 지난 며칠 나를 괴롭히던 천골의 통증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그러니까 이건 강좌 후기이면서 동시에 '간증'이다. 허리나 골반 같은 곳이 아픈 반백살들에게 보깅 댄스를 권한다. 원데이였다는 것이 아쉽기만 하다. 나를 고통에서 건져주었으니 감사하는 마음으로 후기를 쓴다. 절대로 절대로 간사님의 '강요' 때문은 아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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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성놀이학교] 캠벨의 <여신들>과 함께 손작업을 하다 | 느티나무 창조성 놀이학교가 열리는 공간 ‘감우산방’... 그 곳에서 여신들의 광란의 축제가 열리다. | 예쁜여우 | 2020.6.17 | |
작년 가을에 우연히 잘못 배달된 참여연대 책자 ‘참여사회’에 소개된 “창조성 놀이학교” 강좌를 보고 바로 메일로 문의를 했다. 입모양을 보고 소통이 가능한 청각장애인인데 참여가 가능하냐?... 그에 대한 답은 말하기를 통해 이뤄지는 소통이 주인데 거기에서 내가 소외될까봐 걱정된다는 것이었다. 강좌에서 소외될 수 있는 부분은 나의 장애로 인해 생기는 어쩔수 없는 부분이고 대신 내가 미리 책을 읽고 따라갈 수 있는 만큼만 해도 괜찮으니 함께 하고 싶다고 했다. 그렇게 낯설지만 새로운 만남이 시작되었다. 김 혜련의 <밥하는 시간> 이라는 책을 함께 읽고 서로의 생각을 말하면서 아픔과 슬픔의 추억을 함께 공감하고, 정성껏 준비해온 건강하고 맛있는 먹거리를 먹는 시간도 있고, 조각천을 함께 맞추고 이어가며 이불도 만들었다. 내가 우왕좌왕하면 슬쩍 내미는 손길에 다시금 제자리로 와서 같이 시작하는 등...이런 과정을 통해서 새로운 사람들의 따뜻함을 온 몸으로 느끼며 보이지 않는 진정어린 지지와 힘을 얻었다. 올해 봄학기 강좌가 시작되길 손꼽아 기다렸다. 그러나 코로나로 인해 모든 일상이 멈춰지면서 입모양으로 소통하는 나에게는 마스크로 사람들과의 소통이 차단 되면서 본의 아니게 고립될 수 밖에 없었다. 들리지 않는 소리를 보지 못하는 상황에서 귀찮음, 짜증스러운 표정, 무시하고픈, 어디서나 환영받지 못함을 느껴질 때마다 말하는 법은 잊혀지고 눈치로 생존법을 찾아야 했다. 누군가를 원망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고 모두가 살고자 하는 것이려니 하고 이해하려고 했지만 지쳐가던 중이었다. 드디어 연기 되었던 느티나무의 “창조성 놀이학교”가 시작한다고 연락이 왔다. 그러나 코로나 상황이 악화되어 생활방역으로 마스크를 착용해야 하는 상황들은 몇날 며칠을 잠 못이루게 했다. 간단한 기본적인 소통조차도 애먹고 있는데, 서로의 생각을 주고 받는 소통으로 진행하는 감우산방 방식에 과연 내가 할 수 있을지, 얘기할 때 만이라도 잠깐 마스크를 내린다면... 그 또한 벗님들을 위험에 빠지게 할 수도 있다는 부담감에 결국 나 한사람만 빠지면 해결되니 포기하려던 참에 재미란 선생님의 카톡 답이 왔다. 감우산방의 진행은 서로 서로 지도하는 방식, 한 사람에게 집중해서 강의하는 것이 아니죠. 모두의 발언이 중한 서클방식에서 쌤과 소통을 위해서만 마스크를 벗게 되는 것은 아니죠.. 하하! 진짜 웃음이 나왔다. 나를 위한, 나를 위하여라는 말도 없었다. 나 때문에 감우산방 벗님들을 힘들게 할까 하는 생각은 오버하지 않았나 싶다. 감우산방의 벗님들의 “함께 하는 힘”의 위력을 잊고 있었다. 마스크때문에 벗님들을 못 따라간다 해도 내가 누구던가? 눈치밥으로 먹고 살아온 세월이 얼마인데... 이까짓꺼 못하겠어? 눈치껏 해보기로 결심했다. 감우산방의 여신들은 상상 외로 나에게 많은 것을 주었다. 한 줄의 완성된 문장이 아닌 단어 하나만으로도 내게는 충분했다. 책이 있고 프린터물이 있고 종이와 볼펜이 있고 애정어린 벗님들의 눈길 덕분에 나는 눈치도 안보고 여신들의 축제를 맘껏 즐겼다. 매주 수요일, 감우산방으로 가는 길은 즐거웠다. 사람들을 통해 새로운 관점들을 알아가고 시야가 넓어지는 듯했다. 조제프 캠벨의 < 여신들 >을 읽으며 잊혀진 여신들을 찾아 떠나는 여행에서 ‘죽음과 재생’이라는 주제로 밀랍 작업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함께 하는 시간이 지날수록 내 내면의 파장은 점점 퍼져갔다. 죽음은 그저 단순한 죽음이 아니었고 재생 역시 단순한 재생이 아니었다. 여신은 우물 안의 개구리인 나에게 자잘한 돌멩이를 마구 마구 던지더니, 기어코 커다란 바위덩어리를 던진다. 피할 틈도 주지 않았다. 결국 상처를 숨기며 괜찮아요, 괜찮아! 하던 내 입에서 결국 “아파요” 라는 말을 나오게 했다. 교착점, 충격, 잔인한 폭력과 파괴, 질문, 성배, 인간에 대한 연민, 물 위를 뛰어오르는 물고기.... 내 안에 숨어 있던 아픔들은 회오리치는 듯이 돌고 돌았다. 뭔가라도 잡고 있어야 해서 잡았던 철사는 뱀이 되고 메두사가 되어 다른 여신들과 광란의 축제를 즐겼다.
▲ 뱀이 되고 메두사가 되어... 나를 아프게 했지만 여전히 예쁜 여신, 행복한 단어인 내 짝, 내 짝이 되어준 여신과 함께 어울렸다. 생목소리로 들려주는 시 낭송과 떠나간 고인을 염원하는 소리에서 인간의 목소리도 감정을 담아낼 수 있음을 알게 해 준 여신들, 매 순간을 담아내려는 여신, 언제나 정정한 모습으로 모범을 보여 주는 여신, 멀리서 함께 즐기러 와 준 여신들, 함께 하지 못해 더욱 더 그리운 여신들, 그리고 메두사의 눈을 마주치면 슬그머니 마스크를 내리는 여신들의 모습에서 나는, 내가 그토록 부담스러워 했던 “배려”라는 단어를 기쁘게 받아들 수 있게 되었다. 그 많은 여신들은 어디로 갔을까? 그러나 여신들은 나에게 삶의 부조리를 온전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힘을 나눠주고 갔다. 마지막 남은 소원은 “처음”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라는 말이 있었다. 나의 처음은 무엇인가? 나의 처음은 어디일까? 여신들이 나에게 나눠 준 그 힘으로 그 의문에 대한 답을 찾으러 다시 긴 여정을 떠나련다. 감우산방의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여신들에게 감사의 마음으로 나의 시를 바친다.
▲ 희생과 봉사의 생을 마감한 <평화의 우리집 쉼터> 손영미 소장님을 기리는 제단을 함께 만들었다. 인간들아! 인간들아! 너희들은 왜 나를 싫어 하느냐? 내가 너희들에게 제물을 바치라고 했느냐? 꽃을 바치라고 했느냐? 그러나! 나는 뱀의 여신! 자타공인된 사랑의 여신이 아니더냐?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인간들아! 평화와 행복이 함께 하기를.. 나, 뱀의 여신... 모든 허물을 벗어버리고 억만겁의 시간을 뛰어넘어 또 다른 삶이 주어졌다. 나, 뱀의 여신.. 인간의 몸으로 이 따위에 다시 태어난다. 인간의 삶은 고되고, 고되고, 또 고되구나. 한 겁도 되지 않는 찰나. 그러나 얼마나 아름답고 생동감이 넘치는 삶인가..
▲ 뜨거운 밀랍을 손으로 조물조물거려 완성한 부엉이초를 선물 받아 참여연대 사무실 한 켠을 밝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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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티나무 미술학교] 풍경페인팅 - 일상의 이야기 | 풍경페인팅 - 일상의 이야기 후기 | 개똥이 | 2020.6.17 | |
느티나무 미술학교 풍경페인팅 수업을 갔다. 코로나 19로 인해 수업은 열체크, 손소독, 책상 간격도 넓게, 마스크를 쓰고 시작했으며 첫 날은 동그랗게 앉아서 서로 인사와 소개, 수업에 참여하는 소감 등을 이야기했다. 낯선 사람들, 공간, 시간 아. 역시 불편했다. 내가 이 낯선 곳을 찾아온 이유는 이상권 선생님이 이곳에서 수업을 하시는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선생님은 입시때 화실 선생님이었다. 29년이 지난 지금 우연히 알게되었고 이런 저런 걱정을 뒤로하고 무조건 찾아왔고 다행히 선생님이 내 얼굴을 기억해주셨다. 수업은 4번의 드로잉 수업, 3번의 아크릴수업으로 진행되었고 편안하고 안정적인 분위기에서 세심한 지도를 받을 수 있었다. 미술 전공을 했지만 처음 접해보는 아크릴물감이 뜻대로 되지않아 약간 멘붕이 왔을 때 누군가의 콧노래 소리가 들렸다., 그래. 그리는 즐거움을 그동안 잊고있었구나. 조급한 마음이 진정이되고 이런 시간과 공간에 내가 있을 수 있는것에 감사함을 느꼈다. 역시 무조건 오길 잘했어. 이번 봄학기 풍경페인팅의 주제는 <일상의 이야기>이다. 흔히들 그림은 멋진 풍경 완벽한주제를 생각하게 되는데 내 주변과 일상, 나에게 의미있는 것들을 나만의 표현방법으로 이루어냄으로써 그림의 주제를 폭넓게 생각할 수 있게 좀 더 다른 시선으로 익숙한 것들을 볼 수 있게 해준 수업이 되었다. 전시회 또한 코로나 19로 인해 많은 사람들과 함께하지 못한것이 아쉬울 정도로 즐겁고 행복한 분위기에서 준비되었다. 후기에서나마 작가들의 작품 설명을 소개하고싶다.
이번 봄학기는 새로운 주제의 방향성을 선생님 지도 하에 모든 회원이 차분하게 이루어낸 시간이었던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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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 막다른 전지구적 기후위기, 우리의 선택은? | [강좌 후기] 기후위기, 해답은 정치다.(하승우) | 누완다 | 2020.6.15 | |
먼저, 경찰의 과잉 진압으로 숨진 ‘조지 플로이드’로 인해 흑인 사회가 가진 절망감이 얼마나 크고 깊은지 보여주는 영상을 함께 보았습니다.(16세 아이들이 항의 시위에 나온 것을 보고, 31세 아저씨가 제발 다른 길을 찾으라고 하며 46세 아저씨와 말싸움하는 영상이었습니다.)
그리고, 지난 3번의 강의 내용을 다시 한 번 함께 떠올려 보았습니다. 일종의 복습 시간이었지요. 먼저 각 나라의 [CO2 누적배출량]에서는 ‘미국’이 가장 많이 배출하고 있는데, 그 증가속도만 놓고 본다면 ‘중국’도 만만치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전 세계 여러 나라가 지구 온난화에 일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책임을 누구도 지려고 하지 않고, 서로 계속 떠넘기기만 하고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정작 심각한 피해는 제3세계 국가들이 겪고 있지요. 기후위기를 이야기하면, 그 이미지는 항상 북극 빙하가 녹아 북극곰이 살 곳이 없어진다는 문제만 주로 보여줍니다. 하지만 “곡물생산 변화”도 심각한 문제이기에, 결국에는 큰 갈등이 분출될 위험이 있습니다. 또한 기후위기에 대한 대안으로, 흔히 ‘지속 가능한 발전’과 ‘그린 뉴딜’이라는 두 낱말을 사용합니다. 물론 두 낱말 뜻은 대개가 비슷합니다. 그러나 ‘지속 가능한 발전’이라는 낱말은 ‘발전’을 여전히 포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린 뉴딜’ 낱말은 생태위기를 더 심각하게 바라보고 있지요. 무심코 사용하는 낱말에서도 이러한 인식 차이를 볼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힘들게 겪고 있는 이 코로나 19 위기 이후에, 더 통제할 수 없는 지금보다 큰 위기가 올 수 있는데요, 코로나 19가 심화시킨 불평등과 생계위협에 놓인 이들은 야외노동자를 비롯한 사회적 약자들입니다.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코로나 19 위기 그 근본적인 바탕에는 사회구조적인 문제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위기에 연관된 다양한 이해관계들”에서는 1997년 IMF 사태를 다룬 영화 ‘국가 부도의 날’에 관하여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아직 영화를 보지 못하신 분이 계시다면, 영화를 한 번 보실 것을 추천하셨습니다.) 영화에서 위기를 대하는 고위 관료들, 공무원들, 소시민들 모습이 지금 기후위기를 대하는 우리 사회 모습과도 겹치는 부분이 많습니다. 정부는 왜 ‘기후위기’ 이야기를 잘 하지 않으려 들까요? 연합체들 이해관계를 깨기가 힘들고, 지금 사회가 바뀌기를 싫어하는 이들 세력이 강고합니다. 어쩌면 이러한 위기들이 토건 세력들에게는 새로운 사업기회가 되기도 합니다. 결국 이러한 개발연대 세력들과 맞먹을 수 있는 새로운 단체가 필요합니다. 그러한 과정에서 우리는 이 사회를 바꿀 수 있습니다. 부동산 개발업자들은 이 위기를 가속하기도 합니다. 물론 정부도 노력을 전혀 안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근본적 원인은 그대로 두고, 밖으로 보이는 모습만 신경 쓰는 듯한 인상을 줍니다. 우리가 정치변화의 동력을 만들기 위해서는 더 새로운 활동들이 필요합니다. 이번 4.15 총선에서도 드러났지만, 정치인 평균 연령은 여전히 50대입니다. 다가올 미래인 2050년과는 전혀 상관없는 이들이 정치를 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기업의 변화를 요구하기 위해서는 노동조합이 필수입니다. 내부목소리가 중요한 것이지요. 기후위기는 여전히 추상적이고 아직도 체감을 하지 못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열악한 노동조건에 있는 이들은 갈수록 더 비가시화되고 있는 현실이구요. 선거 공약은 어쩌면 지역개발이 필수 공약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야만 표를 얻습니다. 대안적인 그림이 필요합니다. 이에 더해 ‘선거제도 개혁’은 더 중요합니다. 이번 “위성 정당” 논란을 보며, 아직도 갈 길이 멀다는 생각을 합니다. 기후위기와 노동운동이 만나고, 그린뉴딜과 정의로운 전환을 요구하는 목소리에서 우리는 같이 갈 수 있는 접점을 찾아야 합니다. 코로나 19를 기점으로 더 나은 방법을 함께 찾아야 합니다. 이렇듯 다양한 싸움들이 모여 새로운 역사가 됩니다. 오랜 기간 이러한 활동들이 축적되어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 낼 것입니다. 끊임없이 함께 모여 이야기 나누고, 같이 고민하고, 공감해야 합니다. 다양한 형태의 플랫폼을 활용하는 것이 한 방법이 되겠네요. 기후위기를 정말 고민한다면, 먼저 ‘나에게 기후위기는 어떤 영향을 미치나?’ 진지하게 생각해 봅시다. 당장의 ‘폭염’보다도, 노동과 식량, 건강문제부터 올 것입니다. 내가 먼저 무엇인가를 시작하려 한다면 부담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옆에 있는 누군가의 힘을 믿고 다양한 역할을 할 많은 사람들과 함께 기후 정치력을 만듭시다. 리더보다 더 중요한 것은 첫 추종자입니다. 누군가가 나타나기를 기대하기는 현실 벽이 높습니다.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 지 스스로 질문해 봅시다.
마지막 시간은 강좌를 들은 분들이 함께 자유로운 소감을 나누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개인적으로 심각한 기후위기를 다시 한 번 알고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는데요, 앞으로 이러한 고민과 실천사항들을 공동체에서, 다른 동료들과 어떻게 함께 생활 안에서 알리고 행할 수 있을지 생각해 보아야겠습니다. 작성 : 양두승 자원활동가 * 더보기(클릭) 05. 19 기후위기로부터 대전환 - 과학으로 보는 기후위기_조천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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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 막다른 전지구적 기후위기, 우리의 선택은? | [강좌 후기] 기후위기와 그린뉴딜 (이유진) | 누완다 | 2020.6.5 | |
6.2. 강의는 녹색전환연구소 이유진 선생님께서 ‘기후위기와 그린 뉴딜’을 주제로 강의를 해 주셨습니다.
먼저 영국 히드로 공항 제3활주로 불법 판결에 대한 이야기로 강의를 시작하셨는데요. 온실가스 감축을 위한 파리 협정을 지켜야 하기에, 이 활주로는 불법 판결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우리나라는 곳곳에 공항을 설계할 계획을 갖고 있습니다. 제주 제2공항 건설 계획은 다들 들어보셨을 겁니다. 그만큼 우리사회가 환경과 기후위기에 둔감하다는 것을 보여주는데, ‘그린뉴딜’에 관해서도 논의한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이제야 그 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코로나 19 이후 세계에서는 지진과 폭염, 한파와 폭설 등 기후위기가 가져올 연속적인 재난이 비대면으로 대처가 어렵고 결국은 기본적인 인프라를 개선하여 지역사회의 회복력을 강화하는 데 중점을 두어야 합니다. 반면, 코로나 19가 우리에게 준 교훈은 정은경 본부장에게서 볼 수 있는 ‘상세한 설명이 주는 리더쉽’과 화상회의와 재택근무를 통한 ‘거품 빼기’입니다. 굳이 비행기를 타고 먼거리를 이동해서 회의를 했어야만 하는가 묻고 있습니다.
‘그린 뉴딜’은 기후위기 대응과 불평등 타파를 목표로 하는 탈탄소 경제사회로의 대전환입니다. 지구 평균 온도 상승은 1.5℃가 마지노선입니다. 만약 2℃만 되어도, 산호는 99% 이상 소멸하고, 북극 해빙 완전 소멸 빈도도 10년에 한 번이 되기에 복원이 어렵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2030년까지 2010년 대비 온실가스를 45% 감축해야 합니다. 우리는 2020년 현재를 살아가고 있으니, 10년 이내에 온실가스 배출을 절반으로 줄여야하는 것이지요. 결국 ‘정의로운 전환’이 필요합니다. 그 예로 프랑스와 독일, 스웨덴과 네덜란드를 비롯하여 비행세를 도입하는 국가들이 증가하고 있습니다. 항공유가 그만큼 CO2를 많이 배출하기 때문이지요. 독일은 육류세 도입도 검토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유럽은 교토 의정서를 시행하기 위해 정책적으로도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우리나라는 아직 논의조차 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린 뉴딜’은 거대한 전환으로 ‘온실가스 감축’과 ‘일자리 창출’, ‘사회불평등 해소’가 함께 접근하는 융합적 정책이 필요합니다. “그린”에는 ‘정의’ 개념이 포함되고, “뉴딜”은 낱말 그대로 ‘새로운 약속’이기에 사회제도들을 얼마나 개혁시켰는지 돌아봐야 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다음 우리나라 대선에서는 기후위기와 불평등에 대한 해법에 관한 공약을 제시해야 할 것입니다.
지난 2019년 2월 7일 미국 민주당 그린 뉴딜 결의안은 IPCC 1.5도 특별보고서로 시작하며 미국사회 부의 불평들과 차별을 해결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그저 단순히 ‘재생 가능 에너지’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EU가 같은 해 11월에 발표한 기후 비상선언과 그린 딜 또한 전영역을 망라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경제 성장 전략 외에도 생물 다양성도 포함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또한 2021년 하반기 도입 예정인 ‘탄소국경세’에 관한 논의도 시작하고 있습니다.(수입품에 탄소배출에 비례하여 세금을 부과하는 것이지요.)
우리나라는 현재 7억톤에 가까운 온실가스를 배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2030년까지 2000년 수준인 5억3천6백만톤 정도로 감축해야 합니다. 시민들에게 인식도 되어있지 않은 상황에서, 과연 준비는 되어 있는지 의문입니다. 2000년 대비하여 영국과 EU, 미국과 일본은 온실가스 배출을 다들 줄이는 추세이지만, 우리나라만 47%가 증가했습니다. 한국은 아직까지도 핵발전과 석탄발전 비중이 높습니다. 그 과정에서 송전탑 갈등도 계속될 것입니다.(발전소는 지방에 있고, 전기를 수도권까지 끌어와야 하니까요.) 그만큼 우리는 2000년 수준으로 온실가스를 줄이기 위한 장기과제에 대응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재생에너지 기술과 관련하여, “RE 100”(재생가능 에너지원으로 생산된 전력을 100% 사용)에 따라 국내 기업도 영향을 받게 되었습니다. 한 예로, SK 하이닉스는 애플에서 납품 제품에 재생에너지 사용을 요구했습니다.
정의당과 녹색당, 더불어민주당 그린 뉴딜 정책 설계를 보면, 이 정부에서 에너지 정책은 더디게 진행됨을 알 수 있습니다. 지난 5월 12일 문재인 대통령의 그린 뉴딜 주문에서도 ‘배출 제로’와 ‘사회적 불평등 해결’에 관한 내용은 빠져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기후위기 관련 대응법과 제도는 많습니다. 감축목표와 그 계획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행도, 점검도 하지 않으며 총괄적 조정 기능은 부족합니다. 예산과 조직도 부족하여, 실행력은 떨어집니다. 가시적 효과도 미흡한 것이 우리 현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나라는 ‘기후 악당’으로 분류가 됩니다.
그렇다면, ‘그린 뉴딜’ 정책 과제와 대안은 무엇일까요? 1. 온실가스 감축을 최우선 정책으로 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새로운 정부 조직을 만들고, 모든 정부 부처 정책과 사업에 탄소예산과 회계시스템을 도입하여 기획재정부 주도하에 예산 25%가 온실가스 감축에 투입될 수 있어야 합니다.
2. 탈탄소 산업과 그에 따른 일자리 창출입니다. 이러한 제도적 기반은 결국 산업 전환을 가져옵니다. 물론 규제 타파나 인센티브가 모든 것을 해결할 수는 없지만, 또한 그러한 규제가 오히려 새로운 시장을 만들기도 합니다.
기후위기 시대를 돌파하기 위해서 먼저 ‘기후위기 비상행동’과 같은 “인식”을 “확산”시키고(운동이 살아있어야 합니다.), 구체적이고 정책적인 대안을 마련해야 합니다. 그리고 기득권을 해체시키고, 대안을 현실화할 수 있는 “정치세력화”를 해야 합니다.
지난 조천호 선생님 강의에서처럼, “우리가 같은 배를 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각자도생은 결코 해답이 될 수 없습니다. 주어진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지방 자치 분권, 에너지 분권과 그린 뉴딜 연계로 우리가 “그린 뉴딜”을 본격적으로 이야기 나눌 수 있는 판이 열렸습니다. 그 화두가 던져진 것입니다. 그린 뉴딜에 무엇을 녹여낼 것인지 계속 고민해야겠습니다. 환경 뿐만이 아니라, ‘불평등’도 중요한 의제가 될 것입니다. 이러한 ‘전환의 시대’에 따른 준비와 방향 설정, 조사와 파악도 중요합니다. 시민들이 주체가 되어 지속적으로 지켜보고 문의할 수 있도록 해야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질의응답 시간 중 그린뉴딜 정책 관련하여 교육부분이 빠져있는 데 대하여 지적하고 질문을 주신 분이 계셨습니다. 이에 대해, 물론 전방위적으로 모든 대상에 대하여 교육이 필요하지만, 특별히 고위 공무원(주요 장차관, 국장)과 정치인들부터 기후위기 심각성을 알 수 있는 교육이 필요하다고 하셨습니다. 정책을 연구하고 입안하는 이들이기에, 가장 시급한 대상이 아닐까 합니다.
코로나 19로 인해 많은 분들이 원격 강의를 청해주셔서 송희 간사님과 자원활동가 선생님께서 미리 리허설 시연을 해 보고 준비를 했습니다. 강의가 끝나고 질문을 받는 과정에서는 소음이 울려서 차질이 조금 있었지만, 대체로 매끄럽게 잘 진행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색다른 시도가 어쩌면 코로나 19 이후에는 자연스러운 일상이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번 강의 내용 뿐만이 아니라, 강의가 진행되는 모습을 보면서 다시 한 번 ‘기후 위기’에 대해서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작성 : 양두승 자원활동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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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클럽 - 와] 동물권 읽기 | [동물권 후기] 왜 나는 개까지 먹게 되었나 | 환2 | 2020.6.5 | |
나는 왜 돼지도 먹고 소도 먹고 개까지 먹게 되었을까 책을 주문하고 배송위치를 확인하며 3일을 꼬박 기다렸다. <우리는 왜 개는 사랑하고 돼지는 먹고 소는 신을까> 드디어 도착. 새옷을 입는 것 같은 설렘으로 책을 읽다 문득 오늘의 마지막 식사가 감자탕이었다는 것이 떠올랐다. 퇴근 후 동물권 책을 읽으러 가는 길에 돼지고기로 허기를 채운 이 아이러니. 그날 저녁은 이 책의 문제의식을 메타적으로 드러내주었다. 동물권에 관심이 있다고 하지만, 식탁에 돼지고기가 올라오는 모습에 단 일말의 불편함이 없었던, 아니 오늘따라 감자탕에 고기가 식어있다고 오히려 투덜대던 나. 작년 가을부터 동물권 독서클럽에 참여했다.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데, 동물권 반년만에 대충 동물권의 세부 챕터만 봐도 무슨 이야기할지 눈에 보인다. 도축과정에서 동물이 얼마나 끔찍한 고통을 겪는지, 육식이 얼마나 건강에 안좋은지, 동물이 어떻게 대상화 되고 있는지. 동물권 하면 나오는 3종 세트에 익숙해진 나는 이미 알고 있는(혹은 있다고 착각하는) 내용들을 재확인 하며 읽는다. 저자는 지금 당신이 먹고 있는 스튜에 들어있는 고기가 ‘개’였다고 한다면 지금의 느낌이 어떨지 물어본다. 이건 아마 우리가 반려동물과 식육동물을 분리하는 모순을 지적하기 위함이었으리라. 하지만 저자가 던진 질문은 나에게는 육식에 대한 모순을 직면하기는 커녕 과거에 내가 개고기를 먹을 수 있게한 논리이기도 했다. 저자가 던진 “개고기는 못먹으면서 소/돼지/닭고기는 어떻게 거리낌없이 먹을 수 있을까?” 이 질문은 거꾸로 “소/돼지/닭고기도 먹는데 개라고 못먹을 이유는 무엇일까?”로 둔갑했다. 태어나서 두번 개고기를 먹었다. 첫번째는 무엇인지 모른 채 먹었고, 두번째는 지인의 집에서 지인의 어머니가 내어주신 요리였다. 두번째로 개고기를 먹었던 날 나는 “다른 동물도 먹는데 뭐..”라는 생각으로 탕을 한숟가락 떠 입에 쑤욱 넣었다. 육식에 대한 인지부조화 조차 일어나지 않는 나에게도 책이 던져준 의미있는 이야기는 두가지.
먼저, 육식은 정상적이고(Nomal) 자연스러우며 (Natural) 필요한 것(Necessary)이라는 생각자체가 ‘이.데.올.로.기’라는 것. 이 말은 육식은 사실 자연스러운 행위이기 보다 어떠한 신념체계의 산물 언제든지 허물어지고 재구성될 수 있다는 걸 말한다. 나 같은 뿌리깊은 육식인에게도 변화의 가능성이 열려있다는 걸 의미했다. 두번째. 미각은 사회문화적으로 구성된다는 것. 예를 들어 캐비어의 경우 세련되고 품위있는 상징으로 인식한 이후에라야 사람들이 맛있게 먹기 시작한다는 사례는 내가 좋아하는 요리들이 실제로는 어떤 상징들로 구성되어있는지 돌아보게 했다. ‘난 언제부터 참치회를 먹게 되었을까’ ‘왜 장어를 먹을때는 몸이 든든해질 거라는 느낌을 받았을까?’ ‘어떻게 소고기는 명절 선물세트가 되었을까' ‘내가 한턱 쏠게의 코스는 왜 다 고기집일까?’ 어쩌면 우리의 음식 소비는 미각적인 욕구보다 특정한 문화소비적 측면이 더 클 수 있겠다. 책을 읽고 난 뒤 집에서 또띠아 피자를 만들어 먹었다. 이미 가지고 있는 음식을 버릴 순 없다는 핑계를 대며 토핑으로 베이컨을 구웠고, 어설프게 배운난 베이컨을 굽는 동안 이 너머에 존재했던 돼지를 상상해보려고 했다. 나에게도 어느 비건의 간증(?)처럼 고기를 씹는 행위가 불편해지는 순간이 오지 않을까. 큰 변화는 없다. 하지만 실패일까? 아니다. 고기를 씹으면서 반드시 먹어야할 꽤 좋은 이유를 발견하지 못했다. (이건 내가 요리를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조금씩 고기를 덜 먹을 수 있을 것 같다. 식당에 가서도 되도록 고기가 없는 메뉴를 찾아보는 연습 중이다. 매달 6,16,26일 육이 들어간 날에는 육식을 하지 않는 날로 정했다. 하지만 내가 우유와 요커트, 생크림, 계란말이(?)까지 포기할 수 있을까. 회는 또 어떤가. 고기 소비는 줄지만 그 만큼 다른 유제품과 해산물 소비가 늘어나는 풍선효과가 일어나진 않을까. 동물과 생태계에 가하는 모든 폭력들이 비가시화된 이 도시라는 시공간 안에서 나는 지구와의 관계라는 끈을 늘 인지 할 수 있을까. 질문에 질문이 일어난다. 비폭력. 나에겐 머나먼 길이나. 덜폭력이 되기 위한 관계망을 새롭게 연결하고 있다. 지금보다 더 나은 길에 접속할 수 있도록 함께 공부하는 이들의 지혜가 늘 구한다. 글_승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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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 막다른 전지구적 기후위기, 우리의 선택은? | [강좌후기] 기후정의와 배출제로(한재각) | 달라이 | 2020.6.1 | |
2강은 '기후위기'라는 단어를 들으면 연상되는 키워드를 이야기하는 것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녹고 있는 빙하', '북극곰' 등 우리가 그동안 많이 접했기에 조금은 익숙한 이미지들이 떠올랐는데요. "그렇다면, 여러분. 혹시 아는 북극곰이 있나요?" 한재각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소장님께서 그 다음으로 던지신 질문이었습니다. '기후위기'를 우리 일상과 조금 더 가까운 관계 안에서 이야기할 수 없을까, 중요한 질문을 던져주신 것이었습니다. 오늘 강의는 기후위기가 실제로 우리 삶에 어떻게 다가오고 있는지, 그래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영국 전 외무부 장관인 마거릿 배킷은 기후변화의 충격이 "환경에만 머무르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결과적으로는 "안보 문제의 핵심"이 될 수 있다는 점을 꼬집은 말입니다. 미국 국무부 장관인 존 케리 역시 오늘날의 난민사태를 극단주의가 아닌 기후위기로 인한 생존 문제로 비롯된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바로 '환경난민'입니다. 호주와 미국을 비롯하여 많은 국가에서는 분쟁의 양상을 이해하기 위해 기후위기를 자세히 들여다봐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많은 국가에서 기후위기를 중요한 안보문제라고 생각하는 것일까요? '파리 기후협약'의 주요 내용부터 알아보겠습니다. 본 협약의 주요 목표는 지구의 온도 상승을 1.5도 이하로 제한한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각 나라가 각자 감축 목표를 제출하도록 하였더니 그 총합이 겨우 "3도"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목표는 "1.5도" 인데 전 세계의 의지는 "3도"라는 것이지요. 더 과감한 목표가 필요합니다. 이후 IPCC에서는 '1.5도 특별보고서'를 통해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2050년까지 순 제로(net-zero) 배출 달성을 목표로 세웠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2050년까지 1차 에너지 공급의 50~60%, 전력 생산의 70~80%를 재생에너지로 공급해야 합니다. 과연, 세계는 목표달성이 가능할까요? 작년 타임지 <올해의 인물>로 선정된 그레타 툰베리는 2019년 프랑스 국민의회 연설에서 "지금처럼 배출한다면 남아있는 420기가 톤의 탄소예산이 대략 8년 반 안에 사라질 것입니다." 라고 말합니다. '탄소예산'은 전 세계가 설정한 목표(지구 온도 상승을 1.5도 이하로 제한)를 넘지 않기 위해 우리가 배출할 수 있는 탄소의 총량입니다. 어린 소녀도 이해하고 있던 이 개념을 우리는 지금까지 들어본 적도 없었다니 개인적으로는 너무 부끄러운 순간이었지요. 2011년까지 우리는 이미 너무 많은 이산화탄소를 배출하였습니다. (1870년부터 2011년까지 누적 이산화탄소상당량: 1,890) 우리에겐 이제 1,000 이산화탄소상당량만 배출 가능합니다. 현재 우리가 배출하고 있는 양을 고려했을 때, 겨우 "8년"이 남은 것입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가운데 <공동의 차별화된 책임>에 대한 논의가 있었습니다. 파리 기후협약 이전에 있었던 '교통의정서'에서는 선진국들에만 온실가스 감축의무가 있었습니다. 개발도상국에는 어느정도 개발권을 인정해주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파리 기후협약에서는 보다 '공동의 책임'에 무게가 실렸습니다. 당사국 모두가 감축의무를 지닌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는 미국과 중국의 대립이 여전히 진행 중입니다. 2009년을 기준으로 '연간 배출량'을비교했을 때에는 매우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중국이 배출 1위입니다. 하지만 1751년부터 '누적 배출량'을 추적해본다면 미국이 압도적 1위를 차지합니다. 배출량도 중국의 2배 정도인데요. (미국: 399.38 billion ton / 중국: 200.14 billion ton)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1인당 배출량'을 살펴보겠습니다. 역시 미국이 1위, 그 다음 캐나다, 러시아, 영국, 프랑스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기후부정의(Climate Injustice)' 입니다. 개발도상국의 입장에서는 선진국들이 오래 전부터 개발을 위해 그렇게 많은 양의 탄소 배출을 해왔으면서 '인류 공동의 위기'라는 점을 내세워 그 책임을 모두에게 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재각 소장님께서는 "어떤 테이블에서는 2만원짜리 식사를 하고, 어떤 테이블에서는 3천원짜리 식사를 했는데 계산할 때에는 n분의 1로 하자는 것과 같다"고 비유하셨습니다. 실제로 기후변화로 인한 자연재난에 더욱 취약한 국가들도 개발도상국들입니다. 이런 논의들로 비롯된 대안이 '축소-수렴 모형'입니다. 전 세계 배출량을 전체적으로 감소하면서 동시에 국가별 배출량의 차이도 감소시키는 것입니다. 현재 배출량이 많은 국가들은 다른 국가들에 비해 더욱 많은 양을 줄이게 되는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이제 우리의 일상으로 보다 가깝게 돌아와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해봅니다. 먼저, 영국을 비롯하여 프랑스, 캐나다, 아일랜드는 벌써 '국가 기후위기 비상사태'를 선포하였습니다. 현재 우리는 기후위기를 맞이했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 순 배출 제로를 위한 입법 혹은 입법예고를 선언한 국가들이 있습니다. 수리남 공화국과 부탄을 비롯하여 많은 유럽 국가들과 남아메리카 국가들이 입법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화석연료 채굴을 중단하는 것도 매우 중요합니다. 앞으로 새로운 화석연료 채굴을 하지 않는 것이 중요한게 아닙니다. 현재 채굴 중에 있는 양만 사용하더라도 우리는 이미 목표달성을 실패하고 마는 것입니다. 석탄발전소 폐쇄, 내연기관 자동차 판매 금지도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갈 수 있냐고요? '재생에너지'와 '에너지 효율화'에 대한 고민과 발전이 매우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 것이 바로 그 때문입니다. 배출량 감소를 위해 재생에너지 산업에 더 많이 투자하면서 노동시장의 경제까지 확대하는 '그린뉴딜' 정책과 기존 중공업분야 종사자들이 재생에너지 산업으로 전환할 때 관련 생계지원과 필요한 교육 등을 지원하는 '정의로운 전환'까지 등장하였습니다. (이 부분은 다음 강의에서 더욱 자세하게 다룹니다!) 그렇다면 한국은 어떨까요? 한국의 온실가스 배출도 계속 증가해왔습니다. 영국과 한국의 온실가스 배출 추이를 비교할 때, 영국은 배출량을 계속 감소시키고 한국은 배출량이 계속 증가하면서 2016년쯤 교차점을 기준으로 두 나라가 뒤바뀌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누적 배출량은 영국이 많습니다. 다만 연간 배출량을 조금씩 줄여가고 있는 추세라는 것이지요.) 안타깝지만 한국정부의 온실가스 감축목표 시나리오를 보면 파리 기후협약은 물론 다른 나라 추세에 비해 훨씬 못 미치는 수준입니다. 이에 2019년 8월, 전국 330개 단체들과 여러 시민들이 모여 <기후위기 비상행동>을 결성하였습니다. 9월 21일에는 3대 요구사항을 내걸고 전국에서 6,500명이 거리에 모여서 집회에 행진을 가졌습니다. 3대 對정부 요구사항은 다음과 같습니다. 1) 기후위기를 인정하고, 비상선언을 실시하라. 2) 배출제로 계획을 수립하고, 대응방안을 마련하라. 3) 기후위기 대응을 위한 독립적인 범국가기구를 구성하라. 이 외 전 세계에서는 그레타 툰베리를 비롯한 많은 청소년들의 외침과 행동(예: 등교거부), 영국의 멸종저항시위(Extinction Rebellion), 독일 토지의종말(Ende Gelande!) 등 다양한 모습으로 목소리를 높이고 행동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지난해만해도 그레타 툰베리의 영상이 여기저기에서 보인 것을 감안하면 아주 조금씩이지만 전 세계는 공동의 목소리에 조금씩 귀를 기울이고 있고 앞으로는 더 그러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이 세상은 사람들이 사람들과 어울려 살기 위해서 만든 곳이니깐요. 참, 질의응답 시간에서도 재밌는 이야기들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아직 전기 혹은 수소자동차 가격이 내연 자동차보다 비싸다는 점과 관련하여 한재각 소장님께서는 내연자동차에 환경부채(사회적 비용)가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점을 이야기해주셨는데요. 탄소배출량이 그만큼 많은 산업(예: 내연자동차, 석탄발전소 등)에서 기준 배출량 이상에 대한 사회적 비용을 부담하는 것은 생각해보지 못한 부분이었기에 개인적으로는 굉장히 흥미로운 지점이었습니다.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동시에 '현재의'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를 함께 고민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작성 : 정다람 자원활동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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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 지금 다시, 젠더를 묻는다 | [지금 다시 젠더] 차이를 가진 존재들을 살리는 길 | 개똥이 | 2020.5.31 | |
<여성과 퀴어운동의 분리주의를 넘어>를 제목으로 하여 '누가 여성이고, 진짜와 가짜 구분- 뭣이 중한가'를 논하였다. 지금다시 젠더를 묻는다 3강 시리즈 중 두 번째 강의였다. 가족구성권연구소 소장 역할하시는 김순남님은 장애여성공감에서 오래 활동하셨다고 한다. 두 시간 반이 짧았다. 공감과 연결, 확장을 통해 해방으로 나아가자. 서로 다른 경험을 지녔더라도 같은 의제로 연대하자는 간곡한 메시지가 특히 와 닿았다. 여성의, 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 운동 혹은 정치 혹은 연구가 페미니즘이라는 작은 오해와 여남간 상호 적대, 혐오현상을 짚는다. 그러면 여자란 무엇인가. 누가 진짜 여성인가로 흘러가버리는 분리주의는 페미니즘의 본질과 닿는가. 강의는 이 질문으로 시작하여 다음과 같은 방향성을 확인한다. 페미니즘 운동이 만들 사회는 누구도 이성애 중심적인 가부장제에 의해 성별 규범에 맞춰 살도록 강요당하지 않는 사회, 자신의 성 정체성을 이해하고 존중할 기회와 자원이 동등하게 주어지는 사회 그러므로 부당하게 해고되거나 학교에서 내쫓기지 않는, 법제도와 공동체가 인권을 다수결로 저울질하지 않는 사회여야 한다.(2020-02-12 언니네네트워크/ 퀴어여성네트워크 성명 인용) 나라는 개인은 정말로 단일한 정체성으로 구성되어 있나 묻는다. 흑인, 여성, 레즈비언, 페미니스트, 시인, 엄마, 연인, 전사 등으로 자기를 정의한 오드리 로드(Audre Lorde, 1934~1992)처럼 한 사람을 이루는 정체성은 다양하고 복잡하며 한 마디로 정의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되새겼다. 진짜 여자인가 아닌가를 구분하고 누가 더 고통스러운가를 나누는 방식이 존재의 연결성을 차단하는 것에 주목한다. 내부를 분할하여 상대권력을 무력화한다. 페미니즘을 억압하는 사람들은 ‘나는 페미니스트가 싫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는 진짜 페미니스트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진짜 가짜 논쟁에 패대기치면 억압이 쉬워진다. 기존 권력이 작동하는 방식이다. 이 문법을 충실히 따라 가부장제 사회에서 받은 피해와 상처에서 벗어나기 위해 남성을 제거하고, 남성없는 공동체에서 살아가는 것이 대안이 될까. 우리(페미니즘 옹호자, 운동가)는 누구인가 성찰한다. 여성만의 공간, 안전지대 설치와 유지 보존의 도구로써 페미니즘이 작동한다는 주장은 본질적(radical)인가. 분리는 불안을 잠재울 수 있는가. 차이를 가진 존재들이 서로 살리는 길은 우리 삶의 복잡함을 자축하는 것에 있다. 긴장이 발생하는 그 장소로 들어가 머무르고 함께 흔들리고, 우리를 잡아당기는 다중적 관점을 받아들이자. 우리 삶과 세상의 모든 복잡다단함을 반영하는 정치를 건설하자. 이제까지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한계, 그 너머로 우리 욕망을 확장하자. 정체성의 범주로 구분되는 것보다 더 많은 사람과 함께 하자. 더 많은 공간을 만들자. 살아 있는 우리는 모두 섞이면서 변형되는 유기적 존재다. 마주하고, 연대하자. ※ 2강 참고도서 및 읽을거리 <우리는 자격 없는 여성들과 세상을 바꾼다> 트랜스젠더 여성 A씨를 향한 환대와 지지의 기록 (권김현영, A 외 23개 단체 지지성명을 묶음/와온) <시스터 아웃사이더> 갖가지 기준으로 서로 나누고 가르며 문제를 문제로만 남겨두려는 태도를 비판(오드리 로드/후마니타스) <망명과 자긍심> 교차하는 퀴어 장애 정치학(일라이 클레어/현실문화) <글로리아 안잘두아의 교차성 이론: 초기저작에서 「경계지대/경계선」까지 (2014)박미선/부산대여성연구소 글_김태정 자원활동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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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 지금 다시, 젠더를 묻는다 | 트랜스젠더 신입생 등록취소가 남긴 질문들 - 박수민 | 개똥이 | 2020.5.27 | |
트랜스젠더라는 단어는 더는 우리에게 낯설게 다가오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을 한 사람의 개인으로 바라보는 데는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이 아직 서툰 것 같다. 박한희 변호사님과 함께한 이번 강의는 내가 그들의 삶에 나름대로 공감해보고, 그들이 느낄 막연함을 상상해보는 기회가 되었다. 원하는 학교에 입학하고, 선거에 참여하고, 공중화장실을 이용하는, 나에게는 일상적이다 못해 당연한 일들이 누군가에게는 고민거리라니. 일각에서는 트랜스젠더 인권이 페미니즘과 대척점에 있다고 말한다. 사회가 규정한 성 역할을 고착시킨다는 이유에서다. 나는 생물학적 성별과 성별 정체성이 다른 기분은 알지 못하지만, 타고난 기질이 내 삶의 전제를 ‘희생’으로 만드는 상황이라면 숨도 쉬지 못할 만큼 갑갑할 것 같다. 사회가 개인에게 기대하는 여성상, 남성상을 타파할 필요가 있듯, 우리가 트랜스젠더에 갖는 전형적인 이미지에서 탈피해야 그들 또한 조금은 더 용기를 내어 개인으로서 자신을 보여주지 않을까. 이는 다양성의 문제로도 이어진다고 생각한다. 근력운동을 좋아하는 여성이 있고, 수공예를 즐기는 남성이 있듯, 그리고 누군가가 그 사람을 향해 ‘남자/여자가 되고 싶은 거 아냐?’라고 말하는 것이 무례한 일이듯, ‘근력운동을 좋아하는 트랜스젠더 여성’과 ‘수공예를 즐기는 트랜스젠더 남성’이라는 이 두 문장은 우리에게 더욱더 자연스러워져야 한다. 개인의 가치관, 사상, 취향 등을 온전히 존중하는 사회에는 여성과 남성, 트랜스젠더라는 구분이 무의미하고, 차별과 편견에서 한결 자유로울 것이다. 언젠가 올(것이라고 믿고 싶은) 이 사회에서는 성중립 화장실도 그저 개별 화장실이라고 불릴지 모른다. 사실 나는 성중립 화장실에 대해 잘 몰랐는데, 이번 강의를 통해 변기와 세면대가 한 칸에 있는 넓은 1인용 화장실과 다를 바 없음을 알게 되었다. 물론 몇 년 전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공용화장실이 성별로 분리되고 있고, 나를 비롯한 많은 여성이 불법 촬영을 두려워한다. 그러나 이는 공간의 분리보다는 범법 행위에 대한 처벌 강화, 올바른 성교육 등의 제도적 개선으로 근절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 사회가 지금부터라도 이러한 논의를 활발히 한다면, 언젠가는 트랜스젠더 여성의 입학 소식이 다른 학생에게 위협으로 생각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페미니스트로서 트랜스젠더 인권에 대한 논의를 늘 회피했던 입장에서, 나에게 이 강의는 내 관점을 정립하고 인권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아직 질서 있게 내 생각을 정리하지는 못했기 때문에 후기가 횡설수설한 듯하지만, 앞으로 남아있는 두 번의 강의까지 마치고 나면 한층 깊어진 논리로 내 의견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코로나19로 강의가 두 달 정도 미뤄졌지만, 따뜻한 공기와 색색의 꽃들이 아름다운 계절에 이 강의가 열리는 것이 더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세상에 갖가지 색깔이 피어오르는 것이 무지개와 닮았기 때문이다. 혹시 나의 부족한 감수성 때문에 이 후기를 읽던 누군가가 상처받았다면 진심으로 사과드린다. 글. 박수민 자원활동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