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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권의 정치철학 - 고전으로 이해하는 정치사상 <당대편> | [김만권의 정치철학 - 고전으로 이해하는 정치사상 <당대편>] 5강-한나 아렌트, <인간의 조건> | 혠벗 | 2015.4.15 | |
3월부터 매주 목요일 저녁을 함께 했던 고전으로 이해하는 정치철학 <당대편>, 어느덧 반환점을 돌았네요. 다섯 번째 수업에서 다룬 고전은 한나 아렌트의 1958년 작 <인간의 조건>입니다. 한나 아렌트는 근대성의 병폐와 ‘악’을 다뤄내면서 명성을 얻었습니다. 급진적 악을 다룬 <전체주의의 기원>, 야스퍼스의 영향을 받아 일상의 악을 탐구한 <예루사람의 아이히만>, <혁명론>, <자유란 무엇인가> 등등 흥미를 끄는 제목의 저작이 많습니다. 또 스승이자 연인이었던 하이데거가 소멸과 맞닿은 사유를 중심으로 철학을 펼쳐나갔던 반면, 아렌트는 ‘인간의 본질을 이루는 것은 생각함이 아니라 행위함’이라며 새로운 시작, 탄생과 행위를 철학의 중심에 놓았습니다. 또한 유태인으로서 몇 번이나 끔찍한 상황에서 극적으로 탈출했던 경험은 그녀의 철학과 삶의 자세 곳곳에 매우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입니다.
<인간의 조건>은 얼핏 제목만 보면 인간으로서 갖추어야할 조건과 인간 본성을 탐구한 책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조건>은 인간이 이미 조건 지워졌다는 것, 즉 인간적 제약성 자체를 의미합니다. “인간의 삶과 지속적인 관계를 가지는 것은 무엇이든 인간의 실존조건이라는 성격”을 가지므로 “인간이 무엇을 하든 언제나 조건 지워진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조건>에서는 이러한 주어진 제약을 다루어가는 ‘활동’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실제로 아렌트는 이 책을 ‘Vita Activa(활동적인 삶)’, ‘Amor Mundi (love of the world)’라고 불러주길 원했다고 합니다. <인간의 조건>은 두 가지 트랙으로 구조화하면 이해하기 보다 쉬운데요, (수업 중 판서 참고) 첫째, 인간의 실존조건에 따른 ‘세 가지 활동적인 삶’으로서 ①노동 ②작업 ③행위, 둘째, 각각의 삶이 위치하고 있는 ①공론영역 ②사적영역이 있습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아렌트는 각각의 활동의 중요도가 뒤집히고 각각의 삶이 원래 위치해야할 곳에서 이탈하여, 공론영역과 사적영역의 경계가 흐려지면서 결국 두 영역 모두 사라지게 된 것이 근대사회의 문제라고 보았습니다. 강의록의 순서와 같이 노동부터 차례대로 살펴보겠습니다. 노동(Labor)은 생명 유지라는 필요성에서 나오는 동물적 특성입니다.(Homo Laborans)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인간들은 무언가를 끊임없이 소비해야하죠. 아렌트는 세 가지 활동 중에서 노동(과 소비)가 가장 파괴적이고 지속성이 짧으며, 그렇기 때문에 노동하는 동물은 “무세계성”을 띤다고 표현합니다. 노동하는 동물은 “자기 신체의 사적 성격 속에 갇혀서 누구와 함께할 수도 없고 온전하게 의사소통도 할 수 없는 충족에만 사로잡혀 세계로부터 추방”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세계란 사람들이 모여 같이 무언가를 하는 곳, 즉 공적영역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노동이 있어야 할 곳은 엄연히 사적영역입니다. 그러나 근대세계에서 노동하는 동물이 공론영역에 자리 잡게 되었고, 아렌트는 이를 두고 ‘근대세계가 필연성〔필요성〕에 거둔 승리’라고 표현했습니다. 필요성의 충족만을 위해 힘쓰는 자들이 공론영역을 차지하게 되어 결국 진정한 공론영역은 사라지고 “공개적으로 이루어지는 사적 활동”만이 존재하게 된 것이 근대의 문제입니다. 작업(Work)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는 유용성입니다. 노동과는 달리 “자연적 환경과 전적으로 구별되는 인공적 세계의 사물들을 제공”하여 “세계에 지속성과 견고성을 부여”합니다. 시장에서 거래되는 재화를 생산하는 것은 물론, 사회 제도를 만드는 것 역시 작업에 속합니다. 전자의 경우는 사적영역에, 후자의 경우는 공적영역에 위치합니다. 작업을 통해 인위적인 세계를 건설하는 인간은 자연에 대한 객관적인 태도를 취할 수 있으며, 이는 인간이 필요성과 탐욕이라는 자연적(동물적) 특성에 저항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합니다. 그러나 작업에는 공리주의의 문제가 내재되어 있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유용성의 가치에 사로잡힌 제작인(Homo Faber)에게는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 합니다. 따라서 작업을 위한 재료를 얻기 위해서 자연에 가하는 폭력은 모두 정당화됩니다. 뿐만 아니라 “모든 목적이 어떤 다른 맥락에서는 다시 수단이 되는 사슬”과 같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이해를 돕기 위해 의자 생산의 예를 들어주셨습니다. 의자를 만드는데, 사실은 의자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그 의자를 책상과 함께 두는 것이 목적이라고 하면, 의자는 목적에서 수단으로, 1차적 가치에서 2차적 가치로 전락하고 맙니다. 또 의자와 책상을 만들어 내는 게 목적이 아니라 그것들을 방에 놓는 게 목적이라면... 이런 식으로 끊임없이 목적이 다시 수단이 되는 일이 발생합니다. 제작자로서 인간은 도구화의 문제, 즉 “내재적이고 독자적인 가치를 상실”하는 문제에 봉착합니다. 행위(Action)는 “사물이나 물질의 매개 없이 인간 사이에 직접적으로 수행되는 유일한 활동”이고, 그 근본조건은 다원성입니다. 여기서 다원성은 “‘동등성’과 ‘차이성’이라는 이중의 성격”을 가집니다. 동등하게 다른 존재이기에 사람들 사이의 거리가 의미 있어지고, 비로소 말과 행위를 통한 ‘참여’, 즉 정치가 일어납니다. 따라서 행위는 공공영역에 위치합니다. 아렌트가 “제2의 탄생”이라고 부른 참여는 “우리가 결합하기를 원하는 ‘타인의 현존’에 자극 받은”것입니다. “노동처럼 필연성〔필요성〕에 의해 강요된 것이 아니고 작업의 경우처럼 유용성 때문에 추진된 것도 아니”라는 점에서 아렌트는 행위만이 자유로운 활동이라고 보았습니다. 아렌트는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에서 다원성과 참여의 원형을 발견하고, 폴리스의 발생이 “인간이 사적생활 외에 일종의 두 번째 삶인 정치적 삶을 부여받았음을 의미한다.”고 말했습니다. 고대 도시국가에서부터 이미 사적영역과 공적영역의 분리가 일어났으며, (근대 이전까지) 뚜렷이 구분되는 실체로 존재해온 것입니다. 공론영역에서 ‘공’이란 누구나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다는 점에서 “가장 폭넓은 공공성을 가진다는 것”과 “세계가 공동의 소유”라는 것을 동시에 의미합니다. 세계에서 산다는 것, 즉 공론영역에서 행위하는 것은 마치 다양한 사람들이 탁자에 둘러 앉은 것과 같습니다. 다양성의 기반 위에서 다르지만 평등한 사람들 사이(in-between)에서 정치가 만들어지고, 정치는 사람들을 이어줍니다. 대중사회의 문제는 탁자의 부재, 즉 정치의 부재인 셈입니다. 아렌트는 아리스토텔레스를 인용하며 “행위(praxis)와 언어(lexis)”만이 ‘정치적 삶’을 구성한다고 했습니다. 힘과 폭력으로는 사람들을 이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한편 행위자가 모습을 드러내는 현상공간으로서 공론영역은 행위와 말의 방식으로 사람들이 함께 사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나 잠재적으로 존재하며, 공론영역을 존재‧보존 시키는 힘이 ‘권력’이라고 정의했습니다. 결국 자유와 권력 모두 공공의 장에 모습을 드러낼 때, 즉 행위 할 때만 구현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아렌트에 대한 해석이 갈립니다. 현실적으로 일반 사람들이 공공의 장에 모습을 드러내는 경우가 거의 없다는 점에서 엘리트주의‧보수주의라고 보는 시각도 있고, 혁명‧시민불복종의 순간에 집중하여 아주 급진적인 해석을 하는 견해도 있습니다.) 한편 사적(가정)영역은 필요와 욕구의 동인에 의해 이뤄지며, 타인과의 관계가 사라지면서 “삶 그 자체보다 더 영속적인 어떤 것을 성취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박탈당합니다. 그러나 그녀는 사적영역에서의 사적 소유(≠wealth)를 “삶의 필연성을 지배함으로써 잠재적으로 자유로운 사람, 즉 자신만의 삶을 초월하여 모든 사람이 공통적으로 참여하는 세계에 들어가는 사람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았습니다. 즉 사적 소유가 한 인간이 정치적 존재가 되기 위해 필요한 요소라고 보았습니다. 이러한 시각은 사적 소유를 문제로 보았던 맑스와도 다릅니다. 근대에 접어들어 ‘민족국가’를 세우면서 사적영역도 아니고 공적영역도 아닌 사회적 영역이 등장합니다. 원래 가정영역의 문제였던 것들이 공적영역으로 나와 이른바 ‘사회’를 형성할 때, 사람들은 부를 통해 정치적 인간이 되는 것, 즉 “공론영역에 접근하기보다, 보다 많은 부를 축적하여 공론영역이 자신들을 보호해줄 것을 요구”했고, 이것이 국가(commonwealth)가 되었습니다. 재산을 보호하는 것이 근대 국가의 본질인 것입니다. 결국 아렌트는 “공적인 것이 사적인 기능을 하는 까닭에 공적인 것이 사라지고, 사적인 것이 유일한 공동의 관심사로 남기 때문에 사적인 것이 사라짐으로써 결과적으로 이 두 영역이 사라진다.”고 합니다. 앞서 행위만이 자유로운 활동이라는 말을 했습니다. 아렌트는 <자유란 무엇인가>에서 행위와 자유는 동시에 발생한다고 했습니다. 행위가 있어야할 곳은 공론영역인 까닭에 자유 역시 공론영역에서만 구현됩니다. 또한 ‘행위하다’는 ‘시작하다(아르케인)’와 ‘누군가와 같이, 혹은 도움을 받아 완수하다(프리테인)’라는 두 가지 말에서 유래했다는 것에서, 자유는 본질적으로 타자와 세계 속에서 무엇인가를 할 때 발생함을 알 수 있습니다. 근대세계에서 결국 공론영역이 사라지면서, 근대의 인간은 자유를 잃어온 것입니다. 그러나 아렌트는 신학적 세계관에서 우리는 이미 탄생할 때 우주를 한 번 출발 시켜본 존재라는 점을 상기시킵니다. 역사는 하나의 덩어리 같아 보이고, 끊임없이 주욱 이어져온 것 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단절의 순간이 있었고, 새로운 시작의 순간이 있었습니다. 역사의 무거운 흐름 속에 나를 끼워 넣어 단절을 만들고 새롭게 시작 시켜야 합니다. 우주를 출발 시켜본 존재인 우리는 행위 할 수 있습니다. 아렌트는 이것이 자유이고, 자유의 본질은 행위라고 강조하였습니다. 어떤 철학자의 어떤 책을 읽어도 늘 첫 수업의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 같습니다. "세계의 문제와 함께할 것" 세월호 참사 1주기가 다가오고 있어서 그런지, 이 메세지가 참 절절하게 느껴집니다. (지난 주에 수업을 들으면서 많이 어려워서 여러번 다시 읽고 정리했는데도 유독 부족함은 많고, 길이는 긴 후기가 된 것 같아서 죄송합니다...ㅠ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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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나무 기자의 <사실을 다루는 글쓰기> | [사실을 다루는 글쓰기]6강 - 이야기 논픽션쓰기 | 피를로 | 2015.4.14 | |
어느덧 종강까지 1강 만을 남겨두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번 시간에 고 기자님께서 강조하신 부분을 한 번 더 언급하겠습니다. <Guardian>지의 과학담당 에디터 Tim Radford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방금 전, 전 당신이 인터뷰한 과학자를 감동시키려고 글을 쓰는 것도 아니요, 당신의 지도교수를 위해서 쓰는 것도 아니며 당신을 어리석게 실망시키는 에디터나 "당신은 작가님이시군요"라고 말해주는 섹시한 여자를 위해서 쓰는 것도 아니다. 당신은 기회만 주어진다면 0.2초만에 읽기를 중단하고 티비 드라마<파슨스 그린>이나 <푸트니>로 가버릴 수 있는 그런 독자를 상대로 글을 쓴다." 그의 말대로 우리 주변에는 책 말고도 너무나 재미있는 것들이 많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치열한 경쟁 상품을 제치고 당신의 책이 읽히려면 어떡해야 할까요? 핵심은 첫 문장과 첫 문단에 있습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소설 중 하나인 까뮈의 <이방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첫 문장을 읽는 순간 드는 알수없는 의문과 함께 저는 이 소설에 빠져들 수 밖에 없었습니다. 사람의 첫인상이 중요하듯 글도 첫 문장이 아주 중요합니다. 일단 주로 독자들이 예상하지 못했던 내용으로 시작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통념을 비판하는 식으로 출발한다던지, 재밌는 발언을 인용한다던지 눈길을 끄는 통계를 이용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이은희 씨의 <하리하라 생물학카페> 중 12편 '심장이 왼쪽에 있는 이유'를 예시로 들겠습니다. 12편은 주제와 관련 있는 오디세우스의 외눈박이 거인과 조우하는 신화를 소개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외눈박이 거인의 눈은 어디있을까 라는 질문을 던지고, 인체의 대칭과 비대칭에 관한 본론으로 들어가는 방식을 사용합니다. 신화라는 흥미로운 소재와 연관시켜 독자의 관심을 끄는 좋은 글쓰기 도입입니다. 또 주제와 무관해 보이는 소재 언급으로 출발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남종영 기자의 '돌고래 연구의 윤리 논란'을 다룬 기사가 예로 있습니다. 링크 : http://www.hani.co.kr/arti/society/environment/685361.html '사람과 돌고래의 러브스토리? 그녀가 떠나자 피터는 자살했다.'는 돌고래와 관련한 흥미로운 제목과는 다르게 기사는 1960년대에 대한 소개로 시작합니다. 게다가 무려 3번째 문단부터 돌고래에 관한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이렇게 문단이 자연스럽게만 연결된다면 독자가 전혀 예상할 수 없는, 관련 없어 보이는 정보로 문장을 시작하는 것도 첫문장쓰기의 좋은 방법입니다. 그리고 묘사로 글을 시작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고 기자님의 김종필 전 총리 부인 별세기사를 예로 들겠습니다. 링크 : http://www.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680148.html 기사는 장례식장과 늘어선 화환을 묘사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또 하나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홀컴 마을은 캔자스 서부, 밀을 경작하는 높은 평원 지대에 있다. 캔자스의 다른 지역 사람은 거기 바깥이라고 부르는 외딴 지역이다. 콜라라도 주 경계에서 동쪽으로 110킬로미터 떨어진 시골인데 굳건한 푸른 하늘과 사막같이 맑은 공기 때문에 중서부라기보다는 극서부라고 하는 것이 어울릴 분위기를 자아낸다. 사투리에는 초원 지방 특유의 코맹맹이 소리, 목장 일꾼들의 비음이 섞여있고 남자들 대부분이 통이 좁은 카우보이 바지에 스테트슨 모자를 쓰고 앞코가 뾰족하고 굽이 높은 부츠를 신고 다닌다. 트루먼 카포티, <인 콜드 블러드> 중 주의하셔야 할 점은 원고지 30매(A4 3쪽 정도)가 넘어가는 글을 쓸 경우에는 이야기 형식으로 내용을 풀어나가야 합니다. 글의 내용이 30매 미만이라면, 단순히 글의 논리나 설명만으로도 쓸 수 있지만, 글의 내용이 30매가 넘어가면 이야기로 이야기를 풀어나가야 합니다. 한 권의 논픽션을 쓰기 위해서는 네 개의 장치를 기억해야 합니다. "논픽션은 소설문학의 기술적 장치를 사용한다."<Telling true stories> 장면을 통한 글구성(Scene by scene construction). 일련의 장면으로 서사를 보여주며 보통의 설명적 나레이션은 되도록 사용하지 않는다. 대화의 풍부한 사용, 대화는 모든 산문 중에 가장 읽기 쉬우며 주인공의 성격(캐릭터)을 드러내는 가장 빠른 방법이다. 하지만 논픽션이 일반 소설에 비해 어려움이 있다면, 소설은 허구로 작가가 대화를 지어낼 수 있지만, 논픽션의 경우 사실에 기반해 쓰는 글이기 때문에 인터뷰를 직접 따야 한다는 점이 있다. 인물의 사회적 위치에 대한 디테일. 사회적 위치를 드러내거나 야망을 보여주는 모든 종류의 디테일. 옷, 가구, 말버릇, 상급자, 하급자에게 대하는 어투 등. 안드레이 즈비아긴체프 감독의 영화 <리바이어던>에서 탐욕적인 시장 바딤의 책상엔 그의 탐욕을 대변하는 지구본 모형이 있고, 그위 머리 위에는 푸틴사진이 걸려있다. 즉 단순히 인물을 설명하기보다는 구체적 상황을 묘사해 인물의 성격을 드러나게끔 해야한다. 시점. 독자들을 저자가 아닌 기사 속 인물들의 마음속으로 데려갈 시점에 대한 고려를 해야한다. 1주차 강의 후기 : http://academy.peoplepower21.org/index.php?mid=lecture_board&document_srl=1177350 2주차 강의 후기 : http://academy.peoplepower21.org/index.php?mid=lecture_board&document_srl=1205289 3주차 강의 후기 : http://academy.peoplepower21.org/index.php?mid=lecture_board&document_srl=1235767 4주차 강의 후기 : http://academy.peoplepower21.org/index.php?mid=lecture_board&document_srl=1256395 5주차 강의 후기 : http://academy.peoplepower21.org/index.php?mid=lecture_board&document_srl=12768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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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산전문가와 함께하는 나라살림 흥망사 - 국가와 문명의 흥망성쇠, 나라살림의 비밀 | [예산전문가와 함께하는 나라살림 흥망사] 1강 고대문명의 흥망은 어떻게 달랐을까. | 아비 | 2015.4.13 | |
[예산전문가와 함께하는 나라살림 흥망사] 1강 고대문명의 흥망은 어떻게 달랐을까.
안녕하세요. 이번 학기 정창수 선생님의 흥망사 수업 후기를 맡게 된 오상윤이라고 합니다. 저는 평소에 나라 살림에 대해 관심이 많았는데 이 수업은 단순히 경제적인 부분만으로 살림을 읽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과 맥락 속에서 살림을 읽는 것이기에 더더욱 앞으로의 수업이 기대됩니다. 1강에서 선생님께서는 먼저 흥망사를 배우는 의미와 이론에 대해서 설명해주시고 우리나라 및 고대 문명들의 역사에 대해 강의를 해주셨는데요. 생각보다 많은 분들이 추가로 신청해주시고 와주셔서 열띤 강의가 진행되었던 것 같습니다. 역사와 경제가 만나니 전혀 지루할 틈이 없었어요. 먼저 흥망사를 시작하기 앞서 간단한 개념에 대해서 살펴보아야 할 텐데요. 가장 먼저 설명할 것은 조세입니다. 조세란 토지의 경작자가 수확의 일부를 토지의 소유자에게 내는 ‘조’와 토지의 소유주가 토지 경작자에게 받는 조 중에서 국가에 내는 ‘세’를 뜻하는 말인데요. 이는 고려시대부터 구분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역사적으로 주나라의 정전법이 그 시초인데 사각형의 토지의 가운데 부분을 공동 경작하여 세금을 내는 제도라고 합니다. 후에는 토지가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세금이 걷히는데 어떻게, 얼마나 세금을 걷느냐, 그리고 이렇게 걷힌 세금이 어떤 식으로 사용되었는지 아는 것이 나라살림에 가장 핵심적인 요소일 것입니다. 흥망사 강의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에 앞서 우리나라의 사례를 먼저 살펴보았는데요. 그 첫 번째 대상은 고조선이었습니다. 우리 역사의 최초 국가인 고조선 역시 세금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결국 이는 국가를 운영하는 데에는 세금이 필수적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같습니다. 게다가 오랫동안 나라가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을 보아 이러한 조세와 재정지출이 효율적으로 이루어졌다고 추측해볼 수 있겠죠? 우리의 두 번째 논의 대상은 조선의 고종 시대였는데요. 여기에서 나라살림 운용의 중요성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국가 예산은 결국 조세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 쓰임이 누구를 위해 쓰였냐가 중요할 것입니다. 가령 국가 예산에 황실만을 위한 예산의 비중이 크다면 그만큼 다른 필요한 곳에 세금이 쓰이지 않을 것은 분명합니다. 고종시대에 바로 이런 문제점이 이루어졌는데요. 황실비 중 제사를 위해 쓰인 비용이 꾸준히 증가하는 추세를 보였습니다. 요즘 이야기로 쉽게 예를 들면 300조 가량에 국가 예산 중에 30조원을 황실을 위해 쓰며 그 중 6조원 가량을 제사를 위해 썼으며 이 비중이 점차 늘어난다는 것입니다.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작을지 모르나 국민들이 낸 세금이니만큼 쓸데없는 곳에 쓰였다는 인상을 지울 수는 없을 것입니다. 물론 국가 세금이 황실비로만 사용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대한제국 전체 중 40%의 예산은 국방비로 들어갔는데요. 당시 나라 상황을 생각할 때 이 비용이 과도한 것은 아니었을지도 모르나 얼마나 효과적으로 쓰였냐고 묻는다면 글쎄요. 비용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 이해관계로 국방비를 사용하다보니 여러 가지 문제점들이 드러났고 결국 이는 나라살림을 잘 못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를 보여준 가장 큰 예는 양무호 사건입니다. 고종 즉위 40주년 일본에서 들여온 군함, 양무호가 모습을 드러내는데요. 일본이 영국 상선이던 이 배를 25만원 주고 사온 것을 우리나라에 55만원에 판 것입니다. 당시 국방 예산의 30%가 이 고물 배에 사용되었습니다만 여기에 25만원을 더 들여 수리하고 나중에 일본군에 의해 징발되어 뺏기기까지 했습니다. 결국 소중한 나랏돈을 낭비한 셈이었던 것이지요. 조선 말기의 안타까운 상황만 보자니 가슴이 아픈데요. 다음으로는 다행히도 세종에 대해 배웠습니다. 세종은 관청에 있는 계집종만의 경우겠지만 무려 출산휴가를 주었습니다. 여기에다가 남편들에게도 같이 휴가를 주었다는 점이 놀라운데요. 단지 어진 임금이어서가 아니라 인구가 늘어야 국가의 부가 늘어난다는 필요성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게다가 이러한 복지가 가능했던 것은 재정이 그만큼 튼튼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튼튼한 재정은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바로 공평한 조세제도 덕분이었습니다. 공법이라고 일정한 땅을 농민에게 나누어주고 10분의 1의 땅에서 나온 수확을 세금으로 바치게 하는 고정비율의 조세였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여론조사를 시행했다는 기록을 보아 나라 살림에 대한 훌륭한 고민과 생각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다음으로는 선생님과 함께 공부했던 흥망사의 이론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흥망사를 보는데에는 여러 가지 관점이 있을 수 있는데 먼저 공공정책의 역할을 통해 나라 살림을 살펴보겠습니다. 콜럼버스의 발견도 의도하지 않는 공공정책의 결과였습니다. 그 덕분에 어마어마한 발견이 이루어졌지만 이를 유지 관리하지 않았기에 결국 나라살림이 성공적이지는 않았다고 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추가로 조세를 어떤 식으로 걷고 관리하는지 역시 나라살림에 굉장히 중요한데 영국의 경우 징수관, 지출관, 재무관의 분리로 조세 수취를 효율적이고 체계적으로 관리하여 성공적인 나라살림을 가능케 했습니다. 아담 스미스의 유명한 국부론에서도 이런 나라살림에 대한 부분이 나오는데 비싼 마차에 고율의 세금을 물리는 누진세 같은 조세의 방향성 문제, 공공교육, 무상급식에 대한 조세 지출의 문제들을 다룹니다. 이러한 문제제기와 논의들이 의미하는 것은 결국 국가에는 나라 살림이 가장 커다란 부분을 이룬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고대문명에 살림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가장 재미있었던 부분은 문자가 세금을 관리하기 만들어졌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누가 세금을 냈는지를 기억하기 어려웠던 그들은 점토판에 약속기호를 그리기 시작했고 이를 문자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결국 문자는 세금을 걷고 관리하며 사용하기 위해서 지배층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지금은 손쉽게 사용하는 문자도 세금을 위해 만들어진 셈입니다. 그러면 이제 이집트 문명을 시작으로 문명들의 흥망사를 직접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집트의 나일 강은 홍수를 가져오기도 하지만 함께 내려오는 토사들이 땅을 비옥하게 만들어주기도 했습니다. 나라 살림을 잘 하지 못한 한 예가 나일강에 있습니다. 이 홍수를 막기 위해 지은 나세르 댐이 농업과 어업을 망쳤기 때문입니다. 또한 피라미드와 같은 기념물의 건립을 통해 많은 자원을 낭비했습니다. 이것은 우리나라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전시행정의 예입니다. 이런 것들로 인해 이집트가 망으로 향했다고 귀결 지을 수는 없겠지만 분명히 많은 영향을 주었던 것 사실일 것입니다. 또한 이는 한 나라의 흥망이 어떤 식으로 나라 살림을 하느냐에 달렸다는 것을 보여준 한 예입니다. 두 번째로는 그리스를 살펴보았는데 그리스 문명을 통해 먼저 볼 수 있는 것은 숲에 대한, 즉 환경에 대한 문제입니다. 초기에 많은 함대를 가진 아테네가 스파르타를 압도했지만 산림이 너무 많이 파괴돼서 나무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로 인해 결국 패하게 되는데 이러한 나무 역시 나라의 재산으로 볼 때 과도한 낭비가 가져오는 영향이 지대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인구에 대한 관리입니다. 스파르타를 몰락시킨 가장 큰 원인은 인구 감소였습니다. 그러나 이 인구 감소는 어떤 것 때문이었을까요? 바로 부의 집중 문제였습니다. 부유층은 재산유지를 위해 출산을 의도적으로 회피했습니다. 이들이 토지를 독점했던 것만이 문제가 아니라 새로운 이가 부유층으로 진입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다는 문제도 있었습니다. 이렇듯 나라를 망하게 한 것을 보려면 나라 살림에 대한 문제 인식이 있어야 합니다. 최근에 우리나라의 출산감소 역시 단순히 독신주의를 지향하는 문화 때문만은 아닐 것입니다. 이는 총체적인 경제문제이며 여러 가지 정책들이 동원 되어 해결해야하는 중요한 문제임이 분명할 것입니다.
이번 강의에서 이외에도 다양한 역사적 사실들과 맥락들에 대해서 살펴보기도 했습니다. 이 강의에서 얻은 가장 중요한 깨달음은 역사가 저절로 이루어지거나 표면적인 이유들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었습니다. 많은 역사들이 국가와 떨어질 수 없는 관계라고 할 때 나라 살림이라는 것이 역사를 움직이고 발전시키고 몰락시키는 가장 중요한 동력이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앞으로 우리는 흥망사 강의를 통해 더 많은 국가의 역사의 이들의 흥망을 경제와 연관하여 배울 것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가 더 효과적인 조세정책들과 나라 살림에 대해 생각할 수 있고 결국에는 보다 더 나은 나라를 꿈꿀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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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권의 정치철학 - 고전으로 이해하는 정치사상 <당대편> | [김만권의 정치철학] 4강 자크데리다 "왜 해체가 정의인가"<법의힘> | 박윤채영 | 2015.4.8 | |
2015년 4월 2일 강의 자크 데리다 <법의 힘> 지난 시간 미셸 푸코에 의해 멘붕(?)과 깊은 우울을 겪으셨나요? 저 같은 경우엔 푸코가 충격적이거나 우울하진 않았습니다만 내가 살고 있는 21세기라 하는 사회 또한 중세와 다를 바 없는 권력의 감시와 규범에 의한 사회구나 하는 생각에, 그리고 “모든 게 구조라면 다시 구조화 하면 된다.”는 희망의 말에 ‘그럼 무엇부터 해야 하는 것일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번 강의에서 그 ‘시작 할 무엇’-제가 받아들이기로는 살아가는 태도와 방식-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이번에 저희가 만나게 된 철학자는 ‘자크 데리다’입니다. (이하 줄여서 ‘데리다’라고 하겠습니다.) 데리다가 말하는 해체란 뭘까요? 사실 해체라는 개념은 하이데거가 먼저 제시했던 개념입니다. 하이데거는 일상 속에서 각 존재들은 자신에 대한 의심과 질문을 통해 근대적 사고방식을 깨는 방법으로 ‘해체’를 말했습니다. 하이데거에게 해체란 일상 속에서 현존재의 일상적 본질을 탐구하는 수단이었습니다. 데리다의 해체는 하이데거의 것에서 영향을 받았지만 같지 않습니다. 데리다는 자신의 ‘해체’라는 용어는 하이데거의 ‘(존재의)해체’라는 용어와 그 의미를 전달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데리다와 하이데거의 차이점은 해체하는 대상에 있습니다. 하이데거의 해체는 세계 안에 있는 ‘나’를 확인하고 그 의미와 본질을 찾는다면 데리다가 말하는 해체는 ‘존재하는 모든 권위에 대한 허물기’입니다. 즉 세계 안에 있는 내가 아닌 내가 살고 있는 세계를 해체하는 것이지요. 때문에 데리다는 하이데거와 달리 ‘언어’를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언어야 말로 일상성이 가장 강한 영역이며 때문에 가장 중요한 해체의 대상이 됩니다. 특히 언어로 구성되는 담론은 사용자들이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을 드러내주며 생활양식에서 사고방식까지 영향을 미칩니다. 아주 가볍게 예를 들면 ‘초콜릿 복근’ ‘꿀벅지’ ‘검둥이’와 같은 단어들이 그 사회가 갖고 있는 편견과 시선을 반영한다고 보는 거죠. 때문에 “누구를 위해 여자의 허벅지는 ‘꿀’같아야 하며 남자의 복근은 ‘초콜릿’ 같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 아무것도 아니어 보이지만 중요한 해체의 시작이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데리다는 책‘법의 힘’으로 유명해졌습니다. 이 책은 데리다가 자신의 ‘해체’라는 개념에 대해강의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 강의는 당시 데리다를 비판하던 비판법학자들이 데리다에게 질문하고 데리다가 대답하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는데 비판하는 자와 답하는 자의 모습이 마치 소크라테스가 섰던 법정을 떠올리게 했다고 합니다. 비판법학자들은 해체가 옳은 이유를 증명할 것을 요구했고 데리다는 계속 해체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그러니까 ‘법의 힘’이라는 책은 데리다의 “왜 해체하는 삶을 살려고 하는가.”에 대한 해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비판법학자들은 ‘해체는 무책임하다.’고 비판했습니다. 권위의 붕괴는 사회 혼란을 야기할 것이며 기존의 질서가 해체될 때 부득이하게 피해 받게 되는 존재들에 대해 책임감이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해체하면 뭐가 남느냐! 이것이 그들의 비판이었습니다. 그러나 해체는 파괴가 아닙니다. 데리다가 말하는 해체는 일종의 ‘분해’입니다. 당연하다고 생각한 것을 분해하여 구성 성분과 본질을 보고 낡은 것은 버리고 틀린 것은 고쳐서 재조립하는 과정. 그것이 데리다의 '해체Deconstruction'입니다. 부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재구축이 목적인 것입니다. 때문에 해체를 무책임한 것으로 보는 것은 틀린 지적입니다. 해체는 기존 질서를 붕괴하고 파괴하는 작업이 아니라 ‘아무런 질문 없이 받아들이는 것들’에 대한 탐구입니다. 구축되어 있는 것은 모두 해체의 대상이 되며 단단한 것일수록 더더욱 해체해야 할 대상입니다. “만약 정의 그 자체라는 것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법 바깥에 또는 법 너머에 있는 정의 그 자체는 해체 불가능하다. ” 데리다는 강의에서 최초로 “해체가 정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정의의 근거이면서 정의 실현의 수단이며 국가를 유지시켜주는 가장 단단한 구조물인 ‘법’의 이중성을 보여주며 해체 가능성을 말합니다. 데리다에게 해체될 수 있다는 것은 그 안에 이중성을 갖고 있다는 것을 뜻하며 배제성을 갖고 있다는 의미이고 이러한 이중성과 배제성은 부정의와 연관되어 있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정의 그 자체는 해체되지 않는 다고 말 한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법의 해체는 “해체가 정의이다”라는 데리다의 말에 대한 증명의 과정이기도 합니다. 정의의 근거를 해체함으로써 정의를 증명했던 것입니다. 데리다가 보여준 법의 이중성은 ‘폭력성’입니다. 법은 폭력을 막기 위해 폭력(강제성)을 사용한다는 것이지요. 이때 우리가 견제해야 할 것은 ‘폭력이 잘 사용되고 있는가’입니다. 데리다는 발터 벤야민의 이론을 끌어와 법이 가진 폭력의 정당성을 어떻게 판별할 것인가에 대해 얘기합니다. 벤야민은 수단으로서 정당한 폭력은 법제정적이거나 법수호적인 성격 중 하나를 갖는다고 말했습니다. 법 제정적 폭력은 법의 기초를 설립하는 데 사용되는 폭력으로 혁명이 그 예입니다. 반대로 법에는 법을 보존하기 위한 폭력도 작동하는데 법에 복종, 법의 작동에 사용되는 폭력입니다. 이 두 가지 폭력은 서로 긴장관계에 놓여있으며 그 긴장관계는 힘의 조화를 가질 때 그 역할을 충분히 수행합니다. 힘의 조화, 그것은 정의 실현을 위해 중요합니다. 법 보존적 폭력의 힘이 과도한 곳에서 혁명은 어려우며 법은 점점 법을 위한 법이 될 수 있습니다. “정의 없는 힘은 비난을 받는다. 따라서 정의와 힘을 결합해야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정당한 것이 강해지거나 강한 것이 정당해져야 한다. 정의로운 것을 정당한 것으로 만들 수 없었던 우리는 힘 있는 것을 정당하게 만들어 왔다.” -파스칼- 결국 우리는 법이 갖는 폭력성을 배제하고 법을 보아서는 안 됩니다. 법이 갖는 폭력성을 인정하고 그 폭력성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지 견제하는 것이 우리의 역할이며 중요한 해체작업입니다. 해체는 한 번 하면 끝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해체는 ‘계속 되어지는 것’입니다. 해체는 기존의 것을 비판하여 정의롭게 만드는 일이 아니라 기존의 것들에서 부조리를 없애는 과정입니다. 물이 고이지 않도록 새 물을 계속 흘려보내는 일 같은 것입니다. 어쩌면 돌을 부수고 다시 뭉쳐 돌로 만드는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때문에 해체는 이론이라기보다 삶의 철학이며 방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해체하는 삶이 계속되는 한 정의는 계속 미래 시제에 놓이게 됩니다. 데리다에게 정의는 도달할 지점이 아니라‘ 도래할 약속 To Come’이었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정의의 약속을 믿고 현재를 해체하기를 두려워 하지 말라고 얘기합니다. 현재를 부수고 과거를 반성하고 더 좋은 내일을 만드는 것. 그리고 그 내일이 다시 오늘이 되는 것. 그것이 데리다가 말하는 ‘해체의 정의’의 가능성입니다. “정의란 언제나 앞으로 찾아올 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정의는 언제 찾아올 것으로 남아있으며 찾아올 것을 지니고 있고 찾아오는 중인 하나의 약속이다.” “아마도 바로 이 때문에 정의는 그것이 그저 하나의 법적, 정치적 개념이 아닌 한에서 법과 정치의 변혁이나 개조 또는 재정초를 장래로 열어놓을 것이다.” *선생님이 공유하신 칼럼 정치의 무책임의 폐해: [정동칼럼]세월호법 정부 시행령안 당장 폐기하라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503312043085&code=9903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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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나무 기자의 <사실을 다루는 글쓰기> | [사실을 다루는 글쓰기]5강 - 유혹하는 문장쓰기 | 피를로 | 2015.4.7 | |
4강에서 글쓰기 워밍업을 했다면 이제 본격적으로 웨이트를 시작할 차례입니다. 초보자가 쓸 수 있는 문장 중 가장 좋은 문장인 무엇일까요? 바로 '간결한'문장입니다. 즉 불필요한 수사 없이 필수 성분들로만 이루어진 문장을 뜻합니다. 소설가 조지 오웰은 자신의 에세이 <Politics and the English language>에서 피해야할 표현들을 설명합니다. 먼저 사은유가 있습니다.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 비유의 참신한 가치를 잃은 표현으로, 쟁반같이 둥근 달, 바다같은 내 마음 등이 있습니다. 좋은 비유란 참신하면서도 독자에게 정확한 이미지를 전달해야 하기 때문에 사은유 표현이 삼가는게 좋습니다. 다음으로 무의미한 숙어와 허세떠는 말이 있습니다. 영어 표현으로는 쓸데업이 긴 단어(generate와 바꿔 쓸 수 있는 give rise to)가 있고, 한국어 표현으로는 어려운 한자말 표현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오웰은 의미 없는 말 삼가기를 강조했는데, 우리나라 말에서는 '정의'가 있습니다. '정의'란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 무수히 많은 뜻을 지닐 수 있기 때문에 독자로 하여금 뚜렷한 이미지를 전달하기 어렵습니다. 이 밖에도 좋은 문장을 쓰기 위한 조지 오웰의 말들이 있습니다. 단어를 칠 수 있을 땐 언제든지 짧게 칠 것 능동태를 사용할 수 있을 때는 절대 수동태를 사용하지 말 것. 수동태를 필연적으로 쓰는 경우는 4강에서 말씀한 대로 주어의 흐름에 맞게 쓰거나 행위를 당하는 대상을 강조할 때가 있습니다. 일상어 가운데 대응할 말을 생각할 수 있다면 절대 외국말, 구절, 과학용어는 피할 것 전문가 집단의 언어를 사용하지 말 것 등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쓸데없는 수사란 무엇일까요? 바로 우리가 습관적으로 쓰는 부사, 형용사 표현을 의미합니다. 예를들어, 개발사업은 천연기념물 거북이를 완전히 멸종시켰다. 라는 문장이 있습니다. 저 문장에서 '완전히'가 꼭 필요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흔히 강조를 위해 자주 쓰는 표현들 '너무, 좀, 어느 정도, 그냥, 정말, 아주, 갑자기, 굉장한, 어쩐지.' 등의 표현은 최대한 삼가시는게 좋습니다. 또 하나 형용사, 부사를 덜어내는 방법으로 무의미한 부사와 동사의 조합을 '더 강한 동사'로 바꾸는 방법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그들은 빨리 뛰었다.'를 '그들은 질주했다.' 로 바꿔 쓴다면 독자에게 더 강한 인상을 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씁쓸히 웃었다.' 와 같이 역설적인 표현이거나 동사의 이미지를 평소와 다른 느낌으로 표현할 때는 형용사,부사 표현이 효과적일 수 있습니다. 다음은 형용사,부사를 덜어낸 소설가 김훈의 문장입니다. '저녁에 나는 숙사를 나와 갯가 염전으로 갔다. 종사관과 당번 군관을 물리치고 나는 혼자서 갔다. 낡은 소금창고들이 노을에 잠겨있었다. 나는 소금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가마니 위에 엎드려 나는 겨우 숨죽여 울었다. 적들은 오지 않았다.' <칼의 노래> 중 위 문장에서 '슬프다.'는 단어는 어디에도 없지만 독자들은 엄청난 슬픔을 느낄 수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바로 형용사,부사 표현 대신 훌륭한 묘사를 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상황을 설명할 때 슬프다, 즐겁다 등의 개념어로 서술하기 보다 상황을 구체적으로 묘사하거나 비유, 대구의 표현법을 활용한다면 독자들에게 훨씬 더 강렬한 느낌을 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비유를 할 때 주의해야할 점이 몇가지 있습니다. 일단 정치적으로 올바른가를 확인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꿀 먹은 벙어리'라는 표현은 현시대에 쓰기에 장애인 차별적 성격을 나타내는 표현일 수 있습니다. 또 비유가 적절한 이미지를 환기하고 문맥의 흐름과도 어색하지 않아야 합니다. 이번 강의 과제로 예시를 들어보겠습니다. 1. 휠체어를 타고 움직이는 것은 마치 ( )와/과 같다. 사실 이 문장을 처음 봤을 때 위에서 말한 '정치적으로 올바른가'에 생각을 해봤습니다. 아무리 공감능력이 높더라도 제가 휠체어타는 분들의 마음을 완전히 헤아리지는 못할 것 같고, 어떤 식으로 표현하느냐에 따라 그분들의 감정을 상하게 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 표현 중 가장 좋았던 표현은 '발가벗고 걷는 것과 같다.' 입니다. 휠체어로 움직이면 타지 않은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일단 이미지는 적절히 환기했고, '휠체어를 타고 움직이는 것'과 '걷는 것'의 표현이 맥락에 잘 맞아떨어져 좋은 비유라고 느꼈습니다. 저 같은 경우는 힘들지만 그래도 움직일 수 있다는 희망이 있다는 이미지를 환기하기 위해 '옥상에 핀 민들레꽃'이라는 비유를 했습니다만, 이는 '휠체어를 타고 움직이는 것'이 주는 역동적인 이미지와 맞지 않아 좋은 비유는 아니었습니다. 2. 취미를 직업으로 택하는 일은 마치 ( )와/과 같다. 비유를 하기 전엔 일단 자신이 환기할 이미지를 정해놓는 게 좋습니다. 위 문장을 예로 누군가는 '확률적으로 어려운 일이다.'를 또 누군가는 '재정적으로 안정적일 확률이 낮다.' '취미였을 땐 좋았지만, 직업이 됐을 땐 지루해 질 수 있다.'라는 이미지를 전달하고 싶을 수 있습니다. 일단 이미지를 정한 뒤 그에 맞는 적절한 비유를 찾는 방법이 논리적으로 수월합니다. 저는 이 문제에 대해서는 '오랜 친구와 결혼하는 것'이란 표현이 좋았습니다. '결혼 전에는 그 친구가 무척이나 좋았지만, 결혼한 후에는 질려버릴 수 있다.'는 표현이 취미와 직업의 관계와 잘 맞아떨어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위에서 개념어, 쓸데 없는 형용사,부사 표현을 삼가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예를 들어, '그는 키가 크다.' 보다는 '그는 키가 183cm이다.'란 표현이 '그는 칠칠치 않다.'보다는 '그는 소변을 보고 오면 종종 바지에 흘린 자국을 남긴다.'란 표현이 훨씬 우리에게 확실한 이미지를 각인시켜 줍니다. 이번 강의의 과제를 살펴보겠습니다. '그 남자는 속물이다.'란 표현을 어떻게 구체적으로 바꿔볼까요? 특정한 상황, 행동을 설정하면 됩니다. 오늘 본 표현 중 가장 좋았던 표현은 이렇습니다. '그의 책상은 정리정돈이 잘 돼있다. 신년 선물로 보내준 예술의 전당 다이어리는 책상의 잘 보이는 곳에 두었다. 그의 책상 왼쪽엔 후원하는 아프리카 어린이의 사진이 있다. 그런 그가 늘 입에 담고 다니는 말이 있다. '업소, 강남, 언니.' 문장에서 우리는 그가 예술에도 관심이 있고, 봉사도 하는 사람이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업소, 강남, 언니'라는 표현을 달고 달아 이중적이고 속물적인 모습을 아주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사실을 다룬다는 측면에서 논픽션과 다큐멘터리는 일맥상통합니다. 다큐 감독들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늘 영상이나 장면으로 구현합니다. 수강생들이 다큐 감독이라고 가정하고, 다음 예시를 참조해, 보여주고 싶은 장면을 제시해 봅시다. '한국에서 연애하는 것은 너무 힘들다.' 이번에도 오늘 본 표현 중 제게 가장 인상깊었던 표현을 쓰겠습니다. '소개팅자리, 저녁 7시 남녀. 스타벅스에서 즐겁게 대화를 나누며 웃고 눈빛도 교환한다. 둘은 9시쯤 헤어진다. 남자, 여자에게 안부 카톡을 남기고 여자, 화답해준다. 남자, 애프터 신청을 썻다 지우길 반복한다. 남자의 눈에 고지서가 들어온다. 남자, 카톡을 지우고 아르바이트 자리를 더 알아본다. 여자,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컴퓨터를 킨다. 내일 취업스터디에서 검사 받아야 할 자기소개서를 수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취업난에 시달리는, 연애를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20대의 비애가 묻어나 개인적으로 인상깊었습니다. 요즘 다큐멘터리는 나레이션 없이 시청자에게 구체적 상황만 제시하는 형식으로 만들어 지기 때문에, 다큐멘터리를 꾸준히 시청하신다면, 본인의 표현력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이번 강의는 여기까지 입니다. 1주차 강의 후기 : http://academy.peoplepower21.org/index.php?mid=lecture_board&document_srl=1177350 2주차 강의 후기 : http://academy.peoplepower21.org/index.php?mid=lecture_board&document_srl=1205289 3주차 강의 후기 : http://academy.peoplepower21.org/index.php?mid=lecture_board&document_srl=1235767 4주차 강의 후기 : http://academy.peoplepower21.org/index.php?mid=lecture_board&document_srl=125639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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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권의 정치철학 - 고전으로 이해하는 정치사상 <당대편> | [김만권의 정치철학-고전으로 이해하는 정치사상 <당대편>] 3강 미셸 푸코, <감시와 처벌> | 혠벗 | 2015.3.31 | |
고전으로 이해하는 정치철학 <당대편>에서 세 번째로 다룬 고전은 미셸 푸코의 1975년 작 <감시와 처벌>이다. <감시와 처벌>은 그의 대표작이자 동시에 전환점이다. <감시와 처벌> 전, 그러니까 1975년까지 그의 철학이 ‘지식의 고고학’이라면, <감시와 처벌> 이후에는 ‘권력의 계보학’이라고 불린다. 지식의 고고학이란 이제는 더 이상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들, 즉 단절된 지식을 고고학과 같이 발굴하여 해석을 가하지 않고 관찰하는 것을 의미한다. 계보학은 오늘 날 우리의 사고방식과 지식을 권력과 관계 지어 탐구하는 방식이다. 소크라테스, 플라톤 이후 철학의 목표는 진리 추구에 있었다. 푸코는 이 ‘앎을 향한 의지’가 참과 거짓을 늘 대조시키고, 거짓은 나쁜 것으로 여겨 배제 시키는 일종의 권력을 낳는다고 보았다. 다시 말해 하나의 지식이 ‘진리’라는 이름으로 권력을 만들어 내면, 이 권력은 배제라는 수단으로 다른 담론의 형성을 막아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한 지식을 재생산하고, 이 지식은 다시 권력을 강화 시킨다. 이와 같이 진리와 권력의 관계-서로를 재생산하는 관계를 푸코는 ‘진리의 레짐’이라고 불렀다. 또한 그는 진리의 레짐이 이미 우리의 일상 속에서 작동하고 있다는 데에 주목했다. 일상에 퍼져있는 (종속적) 지식은 권력관계를 구축하고, 개인이 스스로를 조정하고 굴복하게 만든다고 했다. 푸코가 말하는 ‘권력’이란 이처럼 알게 모르게 일상에 내재되어있는 힘을 의미한다. 푸코는 권력을 “국가 대 개인”의 프레임 속에서 이해하는 전통적인 방식을 ‘비판의 집중화(centrality of criticism)’라고 불렀다. 그는 앞서 말 한 대로 “권력이 지식과 관련을 맺으며 국가뿐만 아니라 사회 내의 모든 분야와 일상생활(법률, 학문, 사회, 공장, 기업, 학교, 성생활 등)에 구축되어 있다”고 보았다. 보이지 않지만 일상 속에 깊이 들어와 있는 권력에 대한 비판에 기존의 국가-개인 프레임은 적절치 않다. 푸코는 새로운 연구 방법, 즉 계보학을 창안한다. 계보학은 “특정한 사회기제에 존재하는 지식을 역사적이고 비판적인 관점에서 탐구‧비판”한다. 국가-개인 프레임에 비해 훨씬 미시적이고 세부적이라 할 수 있는데 푸코는 이를 ‘비판의 지역성(locality of criticism)’이라고 불렀다. 이 방법론을 통한 연구에서 권력은 “전략으로서 이해되어야”하며, 권력지배의 효과는 “배열, 조작, 전술, 기술 작용 등에 의해 이루어”진다. <감시와 처벌>에서 푸코는 권력이 인간의 신체를 다루는 기술, (종속적) 지식을 불어넣는 전략을 분석함으로서 사회를 구성하는 메커니즘을 보여주고자 하였다. <감시와 처벌>은 루이 15세 때 있었던 끔찍한 신체형(신체형벌, 고문) 묘사로 시작한다. 전근대 사회에서 권력이 가하는 폭력은 “‘진실’을 밝힌다는 명목으로 정당화”되고, 구경꾼들에게 왕이 절대 권력이라는 종속적 지식을 심어주는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형벌이 주는 공포감이 “수형자에게 부과된 치욕이 효과”를 “동정이나 영광”으로 역전 시켜, “사형집행인의 합법적 폭력이 불명예스러운 행위로 변화”되는 부작용(?)이 있어, 19세기에 접어들면서 잔인한 신체형은 사라진다. 근대적 형벌은 정신에 대한 형벌, 자유를 박탈하는 형벌이며 신체는 이를 위한 도구이자 매개체가 된다. 또 단순히 범죄에 대한 징벌에서 범행의 재발을 막기 위한 ‘교정’으로 초점이 바뀌고 처벌의 목적 역시 “죄인을 개조”하는 것으로 변화한다. 푸코는 다시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 신체, 다시 말해 “복종시킬 수 있고, 쓰임새가 있으며, 변화시킬 수 있으며, 나아가 완전하게 만들 수 있는 신체, 바로 순종하는 신체”에 주목하였다. 그는 18세기 군대, 학교, 구빈원의 억압적인 규율 중에서 폐쇄적 공간배치와 개인의 서열화가 ‘순종하는 신체’를 만드는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규율은 ‘독방’, ‘자리’, ‘서열’을 조직화함으로써 복합적인 공간을, 즉 건축적이면서 동시에 기능적이고 위계질서를 갖는 공간을 만들어 낸다. (...) 그 공간은 개개인을 작은 단편으로 절단하고, 또한 조작 가능한 관계를 수립한다.” 푸코는 건축화 된 규율을 17세기 페스트의 도시와 판옵티콘에서 찾았다. 17세기 페스트가 발생한 도시에서는 “엄격한 공간 분할이라는 행정조치”가 취해진다. 각 가정집의 문을 밖에서 걸어 잠그고, 매 아침 창문으로 점호를 하는 등 폐쇄, 봉쇄, 배제, 분할과 통제가 주를 이루는 이 조치는 주민들의 안전을 명분으로 개인에 대한 끊임없는 감독과 감시를 정당화한다. 어기거나 반발하면 사형. “위계질서, 감시, 시선, 그리고 기록행위가 구석구석까지 스며든, 페스트에 감염된 도시, 개개인의 신체를 명백히 감시의 대상으로 확장하는 권력의 운용 속에서 꼼짝 못하게 된 도시”의 일상적‧건축적 형태가 바로 벤담의 ‘판옵티콘’이다. 판옵티콘의 구조는 우리가 익히 아는 대로이며(강의록 p.49~50 참고), 광인, 병자, 죄수, 노동자, 학생(어린이) 수용을 목적으로 한다. “측면에서의 불가시성”(원형건물의 분할된 부분들과 완전히 분리된 독방들)은 개인들을 완전히 개체화 하고 집단행동을 원천봉쇄하여 질서를 만든다. “가시성”(충분한 빛과 감시자의 시선)은 자율성을 만든다. 여기서 말하는 자율성은 개인이 감시를 내면화하여 더 이상 감시를 받지 않더라도 스스로를 규율하는 것, 나아가 스스로 ‘권력의 전달자’가 되어 질서를 지키지 않는 사람을 배제 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푸코는 이 판옵티콘을 “인간의 일상생활과 권력과의 관계를 규정하는 하나의 방식”이라고 보았으며, 판옵티콘에서 볼 수 있는 자율성이 “근대적인 개인의 자율성의 실체”라고 말한다. 이는 인간의 이성과 합리성에 대한 믿음을 기초로 하는 자유주의자들에 대한 공격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민주주의나 전체주의 사회나 똑같이 판옵티콘을 메커니즘으로 하고 있고, 단지 감시탑의 개방성만이 차이이며 이 차이가 메커니즘의 부패를 막는다고 보았다. 이쯤 되니 나는 물론이고 수업을 함께 듣는 분들이 다 같이 힘들어하시고 우울해하셨다. 학교에서 푸코를 배우는 내내 우울했다는 옆자리 언니의 말이 백 번 이해가 되면서 답답함이 목까지 차오르는데, 무거워진 분위기에 당황하신 김만권 선생님께서 <감시와 처벌>과 계보학의 의의를 다시 상기시켜 주셨다. 푸코는 계보학을 통한 권력 비판이 대안을 줄 수는 없다고 인정하면서, 전통적인 프레임 내에서 획일적인 권력 비판과 대안이 잘못 된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 계보학의 목표라고 했다. 다르게 생각하면 다르게 행동할 수 있다. 모든 것이 ‘구성’된 것이라면, 새로운 구조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가능성 역시 우리에게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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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나무 기자의 <사실을 다루는 글쓰기> | [사실을 다루는 글쓰기]4강 - 이태백이 아니라 두보다. | 피를로 | 2015.3.31 | |
드디어 글쓰기 강의가 시작되었습니다. 4강의 제목이 '이태백이 아니라 두보다.' 인데요. '김훈이 아니라 강준만이다.'라는 표현이 이번 글쓰기 강좌를 듣는 수강생들에게 더 와닿는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1강에서 고 기자님께서 "우리는 대문호는 될 수 없지만 강준만식 글쓰기까지는 도달할 수 있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글쓰기를 강준만 수준까지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을 해야할까요? 일단 문장은 간결히 써야합니다. 다음 문장들의 문제는 무엇일까요? 길거리에서 사람들이 싸우고 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구경을 하고 있다. 그래서 길이 꽉 막혀있다. 신경질이 난 운전자들이 경적을 울려대고 있다. 한 청년이 디카로 이 장면을 찍고 있다. '~고 있다.'라는 현재진행형 표현이 너무 많이 쓰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주로 외국어 번역투로 인해 생긴 습관들인데, 최대한 피하시는게 좋습니다. 문장을 매끄럽게 바꿔보면 길거리에서 사람들이 싸우고 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구경을 한다. 그래서 길이 꽉 막혀있다. 신경질이 난 운전자들이 경적을 울려댄다. 한 청년이 디카로 이 장면을 찍고 있다. 정도로 최대한 '~고 있다.'의 표현을 삼가는게 좋습니다. 또 다른 문장을 살펴보겠습니다. 6 25가 끝나고 그는 철원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바랐다. 그래서 10월 하순 어느날 그는 집으로 오고 있었던 것이다. 전쟁이 끝나고 집으로 가는 것이 지친 사람을 기쁘게 한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 것이다. 위 문장은 '~것'이라는 표현이 너무 많이 쓰였단 걸 확인할 수 있습니다. 위 문장을 매끄럽게 바꿔보면 6 25가 끝나고 그는 철원에서 집으로 돌아가기를 바랐다. 10월 하순이 돼서야 그는 집으로 돌아갔다. 전쟁이 끝난 뒤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지친 사람을 기쁘게 한다는 사실은 모두가 안다. 정도로 '~것'의 표현은 '~고 있다.'만큼이나 최대한 피하시는게 좋습니다. '~수'의 표현도 자제하는 편이 낫습니다. 예를 들어 '위험할 수 있습니다.', '물에 젖으면 누전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란 표현보단 '위험합니다.', '물에 젖으면 누전을 일으킵니다.' 라는 표현들이 독자에게 훨씬 간결함을 느끼게 합니다. 글쓰기 걸음마 단계에서는 문장을 최대한 짧게 쓰려는 노력을 하는게 독자에게 간결하고 깔끔한 느낌을 줍니다. 그리고 영어의 수동태 형식의 남용도 피하는 편이 좋습니다. 예를들어 검찰이 동국제강의 횡령과 탈세 등 의혹에 대한 강제수사에 본격 착수했다. 장세주(62) 동국제강 회장에 대해서는 출국 금지 조치가 내려진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은 동국제강 본사와 장 회장 자택 등에서 물품 거래내용과... 등을 확보한 것으로 전해졌다. 또한 검찰은 장 회장이 횡령 자금 일부를 해외 도박에 사용한 정황도 포착한 것으로 알려졌다. 위 문장들은 실제 기사에서 직접인용 했습니다. 위 문장들을 읽어보면 정보를 알린 주체가 등장하지 않아 독자들로 하여금 문장의 객체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만을 갖게 합니다. 하지만 불가피하게 수동태 표현이 사용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파퀴아오가 메이웨더에게 잽을 날렸으나 메이웨더가 어깨로 흘려버렸다. 그가 메이웨더로부터 어퍼컷을 당했지만 겨우 버텼다. 파퀴아오의 등에 묻은 땀이 조명에 반사됐다. 그의 관자놀이가 가격당하는 소리가 관객의 함성에 묻혔다. 위의 문장처럼 주어를 일관되게 유지해야할 때, 그리고 동작을 받는 대상을 돋보이게 할 때는 능동표현보단 수동표현이 문장 간 유기성을 높일 수 있습니다. 이제 글쓰기의 기본요령(문장 간결히 쓰기)를 알았으니, 글을 시작해보겠습니다. 글을 시작할 때 우리가 가장 고려해야 할 점은 무엇일까요? 바로 제목입니다. 잠깐 뇌근육을 풀어볼까요 다음 빈칸에 들어갈 적절한 표현을 생각해봅시다. 글에서 제목은 ( )이다. 저는 랜턴을 떠올렸습니다. 제 연상 과정은 이렇습니다. 제목은 일단 뒤에 나올 글들이 어떤지 예상할 수 있게끔 알려주고, 독자의 시선을 끄는 기능을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기능에 초점을 맞춰보니 랜턴이 떠올랐습니다. 랜턴은 어둠을 밝히는 기능을 합니다. 마찬가지로 제목은 글에서 베일에 쌓인 내용을 독자들에게 조금이나마 밝혀주는 역할을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타겟 독자들이 쉽게 이해할만한 단어수준에서 참신한 표현이 좋은 비유입니다. 따라서 이번 강의의 제목은 좋은 비유라고는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글을 쓸 때 가제목과 주제문을 머릿속에서 늘 생각해야 합니다. 고 기자님께서는 "생각이 넘쳐야 글이 나온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글을 쓰는 본인의 생각이 분명하지 않으면 글이 절대 명확하게 표현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본인의 생각이 명확하면 글을 쓰는 이유도 확실하고 수백페이지의 책 내용도 한 문장으로 압축하는 일도 가능해집니다. 방대한 내용을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으려면 주제가 아주 뚜렷해야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글을 쓰는 중간에도 끊임없이 주제문을 생각하는 연습을 해야합니다. 참고도서 : <유혹하는 글쓰기>, 김영사, 스티븐 킹 <유혹하는 에디터>, 한겨레출판, 고경태 <안정효의 글쓰기 만보>, 모멘토, 안정효 <Writing Tools - 50 essential strategies for every writer>, Little Brown and company, Roy Peter Clark 1강 후기 : http://academy.peoplepower21.org/index.php?mid=lecture_board&document_srl=1177350 2강 후기 : http://academy.peoplepower21.org/index.php?mid=lecture_board&document_srl=1205289 3강 후기 : http://academy.peoplepower21.org/index.php?mid=lecture_board&document_srl=123576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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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나무 기자의 <사실을 다루는 글쓰기> | [사실을 다루는 글쓰기]3강 - 인터뷰는 탁구다. | 피를로 | 2015.3.25 | |
이번 3강 주제는 바로 '인터뷰'입니다. 우리가 블로그를 운영하든 책을 쓰든 자신만의 컨텐츠를 잡았다면, 그 컨텐츠의 내용을 풍부하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인터뷰가 그 방법 중 하나인데요. 하지만 인터뷰 또한 글쓰기만큼이나 초보자들로 하여금 두려움을 갖게 합니다. 그렇다면 성공적인 인터뷰를 위해선 어떻게 해야할까요? 일단 손석희 JTBC 보도 담당 사장의 효과적인 인터뷰를 하나 시청하겠습니다. 관련링크 : http://www.youtube.com/watch?v=pvSYfMEmZjo 손석희 씨의 인터뷰를 보면, 알랭 드 보통의 <뉴스의 시대>의 한 구절을 직접 인용해 질문을 하는 모습을 통해 손석희 씨가 인터뷰를 위한 준비를 정말 많이 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손석희 씨가 알랭 드 보통의 작품을 좋아해서 과거부터 그의 저작을 읽어왔을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인터뷰를 하는 대부분은 후자의 경우일 확률이 높습니다. 우리가 잘 모르는 사람과 원활하고 성공적인 인터뷰를 해야한다면, 일단 인터뷰를 철저히 준비해야 합니다. <씨네21>김혜리 기자 같은 경우는 인터뷰 전 '그를 아는 3명'과 통화한다고 합니다. 창작활동을 하는 사람과 인터뷰를 할 때 가장 큰 실례는 "대표 작품이 뭐에요?"란 질문입니다. 인터뷰 전 대상에 대한 최소한의 준비조차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질문입니다. 손석희 씨의 인터뷰로 돌아가서, 손석희 씨가 알랭 드 보통의 작품에 대한 간단한 평을 통해 인터뷰를 자연스럽게 이끌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손석희 씨의 평은 알랭 드 보통에게 '내가 당신과의 인터뷰를 위해 이정도의 노력을 했다.'란 느낌과 동시에 신뢰 또한 줄 수 있습니다. 신뢰가 있어야 인터뷰 대상자(Interviewee)가 마음의 문을 열게 되고, 마음의 문을 열어야 인터뷰의 질이 올라갈 수 있기 때문에 Interviewee를 철저히 준비하는 것은 인터뷰의 기본 자세입니다. 다음으로 알아야할 사실은 '인터뷰는 단순히 Interviewee의 말을 받아쓰는 게 아니라, Interviewer가 '능동적으로' 질문을 던지고 답변을 받아야한다.'입니다. 보통 인터뷰를 할 때, Interviewee가 불편한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질문들이 인터뷰의 핵심이자, 사람들이 가장 궁금해 하는 것일 확률이 높습니다. 우리가 불편한 질문을 해야할 때는 Interviewee와 탁구를 치듯 주거니 받거니하는 식의 대화로 충분한 신뢰를 쌓은 뒤에 해야합니다. 이제 인터뷰의 기본을 알았으니, 인터뷰 과정에 대해 상세히 알아보도록 합시다. 일단, 인터뷰 사전준비입니다. 앞서 말씀드린대로 인터뷰를 하기 위해서는 철저한 준비가 필요합니다. Interviewee에 대해 파악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인터뷰의 목적, 주제, 제목을 머릿 속에 늘 되새기는 것도 중요합니다. 목적을 망각한 인터뷰를 하다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 대화의 내용이 방향성을 잃어 인터뷰를 망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또 인터뷰 목적, 게재일, 주요 질문 등은 Interviewee에게 미리 알리는 게 중요합니다. 그래야만 Interviewee도 미리 질문을 받고, 답변을 생각해서 실제 인터뷰시 원활한 흐름을 가능하게끔 할 수 있습니다. 최소 하루전에는 질문지를 미리보내는 게 좋습니다. 녹음기, 취재수첩, 볼펜, 디카도 미리 점검해야 합니다. 간단한 선물을 준비하는 것도 상대방의 마음을 열게 하기에 좋은 방법입니다. 마지막으로 인터뷰 장소 정하기입니다. 우선 가장 피해야 할 장소는 커피숍입니다. 낯선 장소는 Interviewee로 하여금 불편한 마음을 들게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가수 인터뷰에는 그들의 작업장이나 공연장을 찾아가고, 요리사를 인터뷰 할 때는 그의 주방을 찾아가는 식으로 Interviewee가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장소를 택해야 성공적인 인터뷰에 한걸음 다가갈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인터뷰 진행에 관한 내용입니다. 인터뷰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Interviewee와의 감정선입니다. 대화를 통해 Interviewee의 마음을 열게 하고 그 상황을 Interviewer가 잘 이끌어야 합니다. Interviewee와의 감정선이 없다면, 그를 파고 드는 깊이있는 질문을 던지는 일은 불가능입니다. 그와 감정선을 형성했다고 해서 상황이 종료된 것 또한 아닙니다. Interviewer의 불편한 질문, 행동 하나에 공들인 감정선이 깨질 수도 있기 때문에 Interviewer는 Interviewee의 상황을 고려해 정말 하고 싶은 질문이더라도 신뢰가 부족하다면 참는 방법 또한 알아야합니다. 흔히 Interviewer가 실수하는 행동 중 하나는 대화에서 비롯됩니다. Interviewee의 신분이나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부적절한 단어선택은 Interviewee와의 감정선을 한 번에 무너트릴 수도 있습니다. 후기를 쓰는 저도 학교과제로 '유명무실 충무로, 현재와 미래'라는 기사를 쓰기 위해 자료를 찾던 중 현재 '충무로 영화 거리의 축제'가 '한국영화인협회'주도 하에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한국영화인협회장과 전화로 짧은 인터뷰를 했었습니다. 인터뷰 당시 제가 충무로 영화 거리의 '몰락'이라는 표현을 썼었는데, 전화 인터뷰이기도 했지만, 저의 부적절한 단어선택으로 인해 Interviewee가 바로 불쾌감을 표시했고, 결국 얕고 형식적인 정보만을 얻어냈습니다. 저의 사례를 통해서도 인터뷰 시 대상자의 상황을 고려한 단어 선택은 정말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인터뷰 정리 및 기사화입니다. 녹취할 땐 녹음내용을 빠짐없이,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게 좋습니다. Interviewee가 사투리나 비문을 쓰더라도, 있는 그대로 생동감있게 녹취하는 것이 좋습니다. 인터뷰의 과정을 알았으니, 이제 인터뷰 기사의 형식을 알아보도록 합시다. 첫번째로 머릿글 + 문답, 문답, 문답으로 이어지는 형식이 있습니다. 관련링크 : http://newsplus.chosun.com/site/data/html_dir/2010/11/22/2010112200189.html 다음 인터뷰 형식의 장점은 실제 대화처럼 쉽게 읽힌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모든 대화가 표준어로 서술되고 정제되어 대화의 생동감이 떨어지고 캐릭터를 드러내는데 한계를 갖는 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두번째로 머릿글 + 문답 + 중간설명 문단 + 문답의 형식이 있습니다. 관련링크 : http://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676167.html 위 인터뷰 형식은 대화의 맥락을 부연 설명해 인터뷰를 읽는 독자의 이해를 한층 도울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만, 첫번째 형식과 같은 단점을 갖는 한계 또한 있습니다. 세번째로 머릿글 + 3인칭 시점의 묘사체, 인터뷰 내용은 쌍따옴표로 직접인용하는 형식이 있습니다. 관련링크 : http://theguardian/com/politics/2011/mar/19/ed-miliband-interview 다음 인터뷰 형식은 앞의 두 형식과 다르게 말맛을 살리고 캐릭터를 생생히 드러낼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초보자가 구사하기엔 어려운 형식이라는 단점이 있습니다. 이상으로 3강의 후기를 마치겠습니다. 1강 후기 링크 : http://academy.peoplepower21.org/index.php?mid=lecture_board&document_srl=1177350 2강 후기 링크 : http://academy.peoplepower21.org/index.php?mid=lecture_board&document_srl=120528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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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권의 정치철학 - 고전으로 이해하는 정치사상 <당대편> | [김만권의 정치철학 - 고전으로 이해하는 정치사상 <당대편>] 2강. 유르겐 하버마스 | 개똥이 | 2015.3.23 | |
지난 3월 19일. 김만권 선생님의 두 번째 수업이 진행되었습니다. 이번 강의에서는 독일의 철학자 유르겐 하버마스의 의사소통행위이론에 대해 알아보았는데요. 하버마스는 누구인지, 어떤 이론을 주장했는지 천천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유르겐 하버마스는 누구인가 하버마스는 사회학자이자 철학자, 현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수장으로 의사소통이론과 공론장이론으로 유명세를 떨친 인물입니다. 아직 생존해 있는 20세기를 대표하는 철학자이기도 합니다. 그는 구순구개열로 인해 선천적으로 언어장애를 앓았는데 이로 인해 나치 치하에서 열등종으로 분류되는 차별의 경험도 겪게 됩니다. 이런 차별의 경험이 후에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는 이론을 구축하는 기반이 되었다고 합니다. 하버마스는 아도르노의 조교로 일하며 사회학 박사과정을 밟게 되었지만, 아도르노와의 갈등으로 대학을 옮기고 가다머의 추천으로 하이델베르크 대학 철학교수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학생운동세력과의 갈등으로 학교를 떠나 과학기술세계 생활조건연구소에서 10년간 연구에 매진하여 <의사소통행위이론>(1981)을 완성합니다. 2. 초기 비판이론가 – 호르크하이머, 아도르노, 마르쿠제 – 하버마스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비판이론에 대한 설명을 빼놓을 수 없는데요. 비판이론이란 ‘이성에 대한 비판적 신뢰’를 바탕으로 이론과 사회적 실천의 결합을 강조하는,간단히 말해 과학과 철학의 결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비판이론의 위기 - 계몽의 딜레마, 길 잃은 이성” 초기 비판이론가였던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개인들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힘을 부여하기 위해 시작된 “계몽”이 과학적 지식만을 강조하여 결과적으로 개인의 사유를 제한하고 억압시킨다고 여겼습니다. 때문에, 이러한 이성의 도구화에 저항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일이 쉽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또 다른 초기 비판이론가인 마르쿠제도 산업사회 속의 인간은 행복만을 추구하는 ‘일차원적 인간’이 되었고 이성을 통한 해방은 불가능하며 문명 이전의 본능인 ‘에로스’에서 해방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3, 하버마스의 사상 하버마스는 초기 비판이론가들이 근대를 ‘도구적 이성이 완전히 지배하는 시기’라고 인식하여 자기파괴적 논리에 빠진 점을 지적하며 도구화되지 않은, 좀 더 포괄적인 이성관 속에서 해방의 가능성을 찾을 것을 제안했습니다. “일상언어에서 합리성의 근원을 찾다.” 하버마스는 인간 개인의 의식 안에 머무는 이성의 합리성 한계를 파악하고, 합리성이 생겨나는 근원을 새롭게 마련하고자 했는데, 이런 차원에서 시도된 이론이 바로 ‘의사소통 행위이론’입니다.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이성은 의식이 아니라 의사소통 속에 존재하며 그 속에는 도덕-실천적 성격이 들어가 있다는 것인데요. 때문에 하버마스는 일상의 의사소통 구조를 분석하여, 우리가 매일 사용하는 언어의 유효성에서 합리성의 근원을 찾았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의사소통 합리성의 목적은 바로 ‘상호이해’라고 할 수 있는데요. 그는 “어떤 주장이 합리적이라고 할 수 있으려면, 상호이해에 도달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체계와 생활세계” 체계와 생활세계는 하버마스가 이해한 근대사회의 개념입니다. 체계란 경제와 관료적 행정의 합리화가 진행되는 곳이며 이성의 도구·전략적 영역이 중심적으로 자리잡는 근대세계의 영역입니다. 반면에, 생활세계는 사회 구성원들이 보편적 언어의 사용을 통해 주장의 타당성을 따져 상호이해와 합의에 이르기 위한 의사소통이 중심이 되는 사회영역입니다. 생활세계 구성원들은 문화를 통해 세계에 대한 객관적 지식을 얻고, 사회를 통해 구성원 간의 연대와 질서를 배우며, 이 과정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이해하고 그것을 언어로 표현해낼 수 있는 인격을 획득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제 이번 강의의 부제목이기도 한 “도구화된 세계에서 어떻게 이성을 사용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을 찾아 보도록 합시다. 도구화된 세계란 도구·전략적 이성(체계)이 도덕·실천적 이상(생활세계)으로 넘어와 생활세계를 지배하는 형태라고 할 수 있는데요. 하버마스는 생활세계를 보존하기 위해서는 생활세계가 체계에 저항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저항은 어떻게 가능할까요? 바로 참여연대와 같은 시민사회운동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버마스는 시민사회운동에 정당성을 부여해주었다고 할 수 있는데요. 하버마스가 말하는 시민사회운동은 체계에 대한 사회구성원들 간에 상호이해와 합의 즉, 의사소통적 합리성을 지키려는 노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번 강의는 개인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부분도 많았는데 강의 후기를 남기면서 다시 이해해볼 수 있는 기회가 되어 좋았습니다. 후기를 읽으시는 분들께 이해하기 쉬운 강의록이 되었을지 조금 걱정이 앞서는데요. 다음강의 초반에 질의응답시간과 덧글로 질문 남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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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나무 기자의 <사실을 다루는 글쓰기> | [사실을 다루는 글쓰기]2강 - 팩트는 신성하다. | 피를로 | 2015.3.17 | |
지난 강의가 글쓰기를 위한 '컨텐츠'에 방점을 찍었다면, 이번 강의는 컨텐츠를 구성하는 '팩트'에 중점을 두고 진행 됐습니다. 우리가 만약 남들이 하지 않는 것 중에서도 내가 좋아하고 잘할 수 있는 컨텐츠를 잡았다면, 기자님께서는 이제 팩트에 근거한 자료수집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중요한 점은 '팩트에 근거한' 자료수집입니다. 그렇다면 왜 '팩트'에 근거해야할까요, 그리고 2강의 제목처럼 팩트는 신성한 것일까요? 2007년 대한민국은 '신정아 사건'으로 떠들썩했습니다. 많은 언론사들이 관련 내용을 보도했는데, 2007년 9월 13일에 문화일보가 '신정아 누드사진 발견'이라는 표제의 기사를 모자이크 처리된 사진과 함께 일면에 실었습니다. 이에 신정아씨는 문화일보를 고소했고 결국 누드 사진은 조작한 사진으로 판명나 당시 문화일보 편집국장이 옷을 벗는 사태까지 있었습니다. 작년, 전 국민을 혼란으로 몰아넣었던 '세월호 참사'때는 MBN이 interviewee 홍가혜씨에 대한 팩트체크를 정확히 하지 않아, 방송사고를 일으켰습니다. 이 방송사고는 대중들의 마음 속에 타오르고 있던 언론에 대한 불신에 기름을 붓는 역할을 제대로 했습니다. 저번 강의후기에 썻던 것과 같이 지금은 1인미디어 시대입니다. 즉 공식 언론인이 아니더라도, 대중들에게 영향력을 줄 수 있는 파워블로거라면 기자처럼 잘못된 팩트로 인해 명예훼손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이렇듯 컨텐츠를 구성하는 팩트가 잘못됐다면, 심각한 피해가 본인에게 돌아올 수 있으므로 '팩트는 신성하다.'란 표현은 어느정도 맞는 듯 보입니다. 그럼 정확한 팩트는 어떻게 이루어져 있을까요? 일단 기본적으로 사건을 서술할 때 항상 5W1H(who, what when, where, why + how)에 입각해야합니다. 앞의 6요소 중 하나라도 빠진다면, 그 팩트는 신성함을 갖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5W1H에 입각해 글을 서술하더라도 고려해야할 점이 몇 가지 더 있습니다. 첫째로 '행위나 사건의 주체와 객체는 최대한 구체적으로 적기' 입니다. 예를들어 검찰이 수사를 했다면 서울중앙지검 소속인지, 어떤 부서, 어떤 직책인지 명확히 표기해야 합니다. 또 냉장고가 불에 탄 사건을 서술할 때도 단순히 개념어인 '냉장고'를 활용하기 보단, 구체적으로 어느 브랜드의 몇년식 제품인지까지 서술하는 게 좋습니다. 둘째로 인터뷰, 사건에 서술되는 인물들의 취재 중 나이를 알아야 할 땐 무조건 '출생년도'를 물어야 합니다. 정확한 팩트의 구성을 알았으니, 이제 팩트를 어떤 방법으로 얻을지 알아볼까요? 첫째로 국가통계포털 사이트에서 통계를 활용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고등교육을 받은 '배운 여자'는 그 때 극소수였다.'라는 문장 뒤에 국가통계포털에서 '교육정도별 인구 및 비율'자료를 보면, 1955년 당시 여고생은 5만 5300명으로 전체 여성 인구의 0.5%였다.'는 문장을 덧붙인다면, 앞문장에 훨씬 신뢰성을 부여할 수 있습니다. . 그리고 국회도서관과 국립중앙도서관을 이용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두 도서관은 '납본 제도'(도서관자료를 발행하거나 제작한 자가 일정 부수를 법령에서 정한 기관에 의무적으로 제출하는)에 의거해 국내 최대량의 자료들을 보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필자로서 풍부하고 의미있는 컨텐츠를 꾸미기 위해서는, 인터넷 검색을 통해 손만 내밀면 닿을 거리에 있는 팩트를 이용하기보단 언급한 두 도서관의 자료를 최대한 이용하시는 게 좋습니다. 특히 자료로 회고록을 이용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회고록은 사실상 2차자료(단행본)과 달리 가공이 덜 된 1차자료이기 때문에 특정인물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얻는 데 유용합니다. '공' 또는 '국'자가 들어가는 기관의 문서기록을 노리는 것도 방법입니다. 왜냐하면 '국' 또는 '공'자가 들어가는 국회회의록, 지자체, 공기업 등 모든 기관들은 기록을 남기고, 국민들이 언제든 열람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취재하려는 인물 혹은 대상의 관련 인물이 있다면, 인터뷰도 좋은 방법입니다. 인터뷰를 할 때는 현직보단 전직의 사람들을 찾아가는 게 좋습니다. 그래야 당국에 대한 좀 더 자유로운 의견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터뷰에서 가장 중요한 건 상대와의 교감입니다. 인터뷰를 당하는 사람으로서는 자신의 또는 자신이 아는 정보를 드러내야 하기에 인터뷰에 방어적 태도를 취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상대방에게 편안함을 주고, 공감을 얻는 게 인터뷰를 할 때 가장 먼저 해야하는 동시에 핵심적인 일입니다. 또 중요한 진술이 있을 땐, 바로 메모하고 녹음기는 상대방에게 압박감을 주지않는 선에서 '전략적'으로 활용하기 그리고 헤어질 때 핸드폰이 아니면 이메일이라도 알아내는 것 또한 중요합니다. 마지막으로 정보공개시스템 사이트에서 정보공개청구를 이용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사실 공식 언론인이 아닌 개인의 신분으로 다양한 인터뷰 특히 정부와 관련한 인터뷰를 하기란 정말 어렵습니다. 그런 개인이 그나마 정부에 대한 자료를 얻어 낼 수 있는 방법이 바로 정보공개청구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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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권의 정치철학 - 고전으로 이해하는 정치사상 <당대편> | [김만권의 고전으로 보는 정치철학 당대편]1강 롤스의 정의론 | 박윤채영 | 2015.3.15 | |
지난 목요일(3월12일) 김만권 선생님의 정치철학 당대편, 첫 수업이 있었습니다. 수업은 수강생 분들의 자기소개로 시작되었는데요, 1)수업을 듣게 된 동기와 기대 2)강좌 목록 중 가장 기대되는 학자와 질문거리에 대한 이야기로 진행되었습니다. 수강생 분들 중에는 김만권 선생님의 지난 수업을 들었던 분들이 여럿 계셨는데요, 다들 김만권 선생님의 수업에 감명을 받아 또 듣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수업은 ‘시’ 로 시작되었습니다. 신경림 시인의 <가난한 사랑노래>였습니다. 이 시는 김만권 선생님이 대학원에서 방황하던 시절 교수님의 권유로 연세대 원주캠퍼스에 수업을 나가게 됐을 때 원주 가는 버스를 타기 전 뽑아갔던 시라고 하는데요, 첫 수업 시간에 학생들과 함께 읽으며 “이런 세상은 만들지 말자.”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가난한 사랑노래 -신경림-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 너와 헤어져 돌아오는 눈 쌓인 골목길에 달빛이 새파랗게 쏟아지는데 가난하다고 해서 두려움이 없겠는가 두점 치는 소리 방법대원의 호각소히 메밀묵사려 소리에 눈을 뜨면 멀리 육중한 기계 굴러가는 소리 가난하다고 해서 그리움을 버렸겠는가 어머님 보고 싶소 수없이 되뇌어 보지만 집 뒤 감나무에 까치밥으로 하나 남았을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내 볼에 와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 돌아서는 내 등에 터지는 네 울음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이번 수업의 주제, 존 롤스가 말한 정의는 바로 이 화자와 같은 사람이 없는 세상을 말 합니다. “가난하기 때문에 인간의 기본적인 것을 포기”하는 사람이 없는 세상 말이지요. 존 롤스는 세계 2차 대전이 일어난 후 세상을 휩쓴 인간성에 대한 회의감, 근대를 지켜준 이성과 과학에 대한 의심으로 인해 ‘옳고 그름이란 없다.’는 쪽으로 사람들의 논쟁이 옮겨갔을 때 “아니, 그래도 세상에 옳고 그른 것은 있다.”고 외친 철학자입니다. 그의 철학을 이해하기 위해선 그의 유년 시절을 알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워낙 허약했는데 자신에게 디프테리아가 옮은 동생 두 명이 죽자 충격으로 실어증을 앓았고 그 이후 말을 더듬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그가 유난히 강의록을 꼼꼼히 준비하게 된 이유이기도 했지요. 볼티모어에 살면서 자연스럽게 흑인과 백인의 차이를 느꼈고 그것은 점점 ‘차별’로 인식되었습니다. 여성운동가인 어머니마저 그 차별을 정당하게 생각하는 것을 보며 롤스는 ‘뭔가 잘못됐다.’ 고 인식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 경험은 후에 의료, 기회의 평등, 인종 차별과 같은 문제들을 사회의 주요 과제로 생각하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롤스는 많은 여성 제자들을 양성했고 제자들이 내놓은 롤스에 대한 비판에 대해 성의를 다했습니다. 그는 자신을 비판하는 사람들을 이기려 하거나 입을 막으려 하기 보다는 그들의 비판을 수용하면서 자신의 신념은 지켜내는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이 롤스가 실천한 민주주의이자 정의였다고 생각합니다. 빌 클린턴은 롤스 사망 후 그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고 합니다. “교육받은 모든 미국세대들에게 민주주의 그 자체에 대한 신념을 부활시켰다.” 롤스의 책 청의론The theory of Justice는 롤스의 여러 논문을 합쳐 놓은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롤스는 이 책에 대해 “읽기 어려우니, 일반인은 **정도만 읽으면 된다.”는 안내를 붙였다고 합니다!!!!!!) 흔히 정의론에 대해 갖는 사람들의 오해가 있는데요, 1. 롤스는 불평등을 정당화 한다. 2. 무지의 베일은 인간의 양심과 도덕에 정의를 맡기는 것이다. 3. 롤스는 모두 똑같이 나눠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막시스트(공산주의)다. 이것들이 왜 오해인지 풀리셨으면 좋겠습니다. 정의론의 주제는 ‘정당화 될 수 있는 불평등은 있는가?’입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정당화될 수 있는 불평등은 없다는 것이 정의론에서 말하고 있는 정의입니다. 롤스는 집안 배경, 신체적 조건, 사회 구조적 차별과 같은 태생적인 불평등을 정당화 하는 특수한 조건들이 무엇인지 알아내고 그러한 조건들을 최대한 평등하게 만들어야 사회 정의가 실현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제도’로써 실현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것은 국가주의와는 다릅니다. 롤스가 말하는 제도는 국민들을 통제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사람들이 여러 도덕적, 양심적 판단을 할 때 제도로써 사회 정의의 근거와 기준을 제시하여 판단의 부담을 덜고 보다 정의에 가까운 선택들을 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한 틀입니다. 현실 사회에서 정의를 행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공익 제보자들이 후에 겪게 되는 사회적 압박감 또는 개인적 데미지, 증인들이 증인 보호 신청을 하는 순간 포기해야 하는 개인의 자유와 삶 등이 정의가 가진 비용Cost이지요. 사람들은 비용에 대한 부담 때문에 정의를 선택하기를 꺼려하기도 합니다. 롤스는 제도가 이 비용의 부담을 덜어주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야, 사람들은 정의를 선택할 테니까요. “정의의 일차적 주제는 사회기본구조가, 말하자면 사회 주요 제도가 권리와 의무를 배분하고 사회 협동체로부터 생긴 이익의 분배를 정하는 방식이 된다.” 롤스는 정의의 원칙으로 두 가지를 말했습니다. 제 1원칙(정치원칙): 평등한 자유의 원칙. 여기에서 그 유명한 ‘무지의 베일’이 나온 것입니다. 무지의 베일은 한 개인이 자신의 조건을 알지 못하면 자신의 최소한의 기본권만을 지키려 할 것이며 그것이 평등한 사회조건을 만들 것이라는 겁니다. 오히려 모든 것이 공개되는 공적 장소에서는 개개인은 자신의 조건에만 갇히게 되며 때문에 자신의 조건에만 유리한 것들에 합의하려 할 거라는 것이 롤스의 생각입니다. 그래서 롤스는 제도는 합리적 절차를 따라 정해져야 하며 그것을 정하는 사람은 그 제도의 수혜를 가장 최후에 받게 되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것으로 ‘피자 배분’을 예로 들었는데요, 피자를 가장 공정하게 나누는 방법은 피자를 나눠 주는 사람이 가장 나중에 피자를 갖게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순수 절차’라고 합니다. 롤스는 제도의 역할은 분배의 우선순위를 정하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어떻게 생산하고 그것을 어떻게 분배할 것인지, 그것에 무엇을 가장 우선 가치로 둘 것인지에 대한 사회관은 제도로 정립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분배는 사회 갈등의 핵심이며 정의는 그것들을 조정하는 일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제도는 사람들에게 공정에의 우선성을 제시함으로써 갈등을 최소화 하는 역할을 합니다. 롤스가 말하는 공정은 절대 평등이 아닌 롤스가 ‘분배’의 문제를 중요하게 생각했던 이유는 극심한 빈곤과 무지가 개인들이 자유와 민주주의, 평등, 정의를 포기하게 하는 이유가 된다는 것을 보아왔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모두가 최소한의 수준의 생활 조건과 지식을 공유해야 가치가 공유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가진 자들의 것을 나누는 재분배와는 다른 개념입니다. 갖지 못한 자들에 대한 수혜가 아니라 시작이 공정한 ‘원래적 분배’입니다. “기본적 자유들은 하나의 전체, 즉 하나의 체계다. 하나의 자유의 가치는 일반적으로 다른 자유들을 명시함에 달려 있다.” 덧붙여 김만권 선생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가장 자유로운 상태는 내 옆 사람이 가장 자유로운 상태다.” 내 아무리 자유로워도 내 옆 사람이 자유를 잃었다면 언제든 나의 자유로 침해당할 가능성을 갖는다는 의미이며 때문에 내 옆 사람의 자유의 수준이 곧 나의 자유의 수준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회의 공정성과 최소한의 생활수준이 보장되어야 하는 이유는 롤스가 막시스트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래야 자유가, 평등이 결과적으로 민주주의가 가능하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제 2원칙(사회경제원칙): 민주적 평등의 조건 a차등의 원칙: 사회 최소 수혜자의 불평등을 보상할 만한 이득을 가져오는 경우에만 불평등은 정당화 될 수 있다. 그러면서 롤스는 진정 자유로운 사회는 마음껏 갖게 하는 사회가 아니라 오히려 가질 수 있는 최대량을 제한하는 사회라고 했습니다. 극심한 불평등이 낳는 상대적 박탈감은 자유를 침해하는 일이니까요. 롤스가 공리주의(Utilitarianism)를 비판한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공리주의는 사회의 모든 것을 Pleasure과 Pain으로 나눴고 행복Pleasure 총량이 최대일 때가 좋은 사회라고 하는 사고방식입니다. 사회 전체의 행복을 위해선 소수의 고통은 감수해야 할 몫으로 보는 것입니다. 이 주장은 계급사회에서 노동자가 절대적으로 다수일 때 매우 혁신적인 발상이었습니다. 그러나 민주주의의 임무가 소수자의 보호로 전환되면서 문제적 이론이 되었지요. b공정한 기회 균등의 원칙: 사회적 우연성, 천부적 능력이 불평등을 정당화 하는 이유가 되어선 안 된다.(분배의 기준이 되어선 안 된다.) 상속세와 누진세가 높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롤스의 눈으로 보면 우리나라의 성과주의나, 이를테면 국제 대회에서 메달을 딴 소수의 사람들만 고수익 연봉을 받게 되고 좋은 선생들을 만나게 되는 것은 부정의인 것 같습니다. 성과에 상관없이 공정한 배움의 기회, 최소한의 수익 보장이 되는 것이 진정한 정의겠죠. 메달을 딴 사람의 수고를 부정하거나 개인이 그 성과를 다른 사람들과 나누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메달을 딴 사람과 따지 못한 사람의 격차가 어느 이상이 되지 않도록 보호하는 것이 제도가 하는 몫이겠지요. 마지막으로 롤스의 전체 이론에서 가장 오해해선 안 될 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롤스는 사람들의 생활 조건을 개선시켜서 민주주의나 자유를 완성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반대로, 민주주의와 자유가 보장되어야 사람들의 기본권이 충족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요즘 사람들이 “민주주의는 먹고 살기 좋아지면 그때 가서..”라는 말은 말 그래도 말.도.안.돼.는 말인 겁니다. 민주주의가 제대로 되면 우린 모두 먹고 살기 좋아질 것입니다. 그게 그렇게 말처럼 쉽게 돼냐, 국민이 정치에도 관심 없고, 투표도 안 하는 걸 보면 민주주의는 후퇴하고 있는 거 아니냐, 라고 반박하시는 데에 롤스는 미리,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자유의 하나하나의 핵심적인 부분을 다 같이 확고히 적용할 수 있으며 이를 보장할 수 있도록 자유를 정의하는 길이 항상 존재한다.” 그리고 롤스는 우리의 책무는 정치를 참여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정치 참여를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진정한 투표는 승리를 목적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소수의 의견인지 알고 그것까지도 보호되도록 하는 것을 목표하는 것이라고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자유, 민주주의, 평등, 정의가 무엇인가에 대한 가치관입니다. 롤스는 이것들을 개인이 독단적으로 또는 일부 집단이 주도적으로 추구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고 본 것입니다. 현재 대부분의 국가들이 수립한 민주주의의 전제는 평등이며 평등은 모두에게 같은 가능성이 주어졌을 때, 같은 기회가 주어졌을 때 가능합니다. 그리고 정의는 그것으로 가는 길이자 방법입니다. 김만권 선생님은 강의 말미에 우리가 고전을 읽어야 하는 이유에 대해 말씀하신 것을 적어보겠습니다. 선생님의 말씀을 그대로 옮기지는 못했고요 제 나름의 정리를 적겠습니다. “우리는 세계의 문제와 계속 함께 있기 위해 고전을 읽어야 합니다. 옳다고 믿는 것과 세계 작동 방식 사이의 간격이 커질수록 우리는 문제제기를 하게 됩니다. 그 간격을 좁히려는 노력들이 자꾸 좌절 될수록 우리는 침체되고 정체된 것처럼 느끼게 되고 회의감을 갖게 됩니다. 고전은 그럴 때 우리에게 위로를 줍니다. 왜냐하면 고전은, 세계의 문제를 외면하지 않고 끊임없이 함께 있으려 했던 사람들의 기록이자 고민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짜라투스트라가 하루 종일 마을 사람들에게 무시당하고 밤에 산에 올라 펑펑 울고도 다음날 아침 다시 마을을 내려오는 그 마음으로 우리도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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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권의 정치철학 - 고전으로 이해하는 정치사상 <당대편> | [김만권의 정치철학-고전으로 이해하는 정치사상 <당대편>] 오픈특강(3/5) 정치철학으로 본 헌재의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 | 혠벗 | 2015.3.11 | |
2014년 12월, 헌법재판소는 통합진보당을 해산하고 통합진보당 의원들의 의원직까지 박탈하는 판결을 내렸다. 헌재의 이번 판결에 대해 여러 가지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특히 해당 법 조항이 없음에도 통진당 의원들의 의원직 박탈 결정은 명확한 삼권분립을 강조하는 시민법 전통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다. 김만권 선생님의 오늘 강의에서는 ‘방어적 민주주의’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통진당 해산 결정이 헌재의 주장처럼 “우리 민주주의를 방어하는데 적절”했는지에 대해 초점을 맞추고 정치철학적으로 살펴보았다. (강의록 인용은 큰따옴표로 표시했습니다.) 존 스튜어트 밀은 <자유론>에서 자유의 세 가지 기본영역을 제시한다. 첫째, 양심의 자유, 생각과 감정의 자유 의견과 주장의 자유, 출판의 자유, 둘째, 사회성의 이름의 억누를 수 없는 개별성의 자유, 셋째, 외면적으로 드러나는 자유로서 결사의 자유가 그것이다. 밀은 각각의 자유가 독립적으로 존재‧보장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하나의 체인처럼 모든 자유 일체를 보장해야 비로소 ‘자유로운 국가’라는 것이다. 존 롤스 역시 <정의론>에서 밀이 제시했던 “기본적 자유들은 하나의 전체, 체계”라며, “유리한 조건 아래 이런 자유 하나하나의 핵심적인 부분을 다 같이 확고히 적용할 수 있으며 이를 보장할 수 있도록 자유를 정의하는 길이 항상 존재 한다”고 썼다. 불가피하게 하나의 자유를 제한할 수 있다는 발상은 일종의 기만이라는 것이다. 특히 정치집단 형성과 직접적으로 연관되는 결사의 자유는 단순히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모일 수 있는 자유, 정치 집단을 형성할 수 있는 자유에서 그치지 않는다. 결사의 자유는 관계를 형성하는 자유이기 때문에, 특정 집단에 대한 결사의 자유가 억압된다면 집단 내부의 구성원은 물론이고 연관된 모든 개인, 단체의 자유가 매도된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독일공산당 사무실이 폐쇄되는 장면ⓒwww.br.de (Bayerischer Rundfunk) 바이에른 방송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사의 자유를 제한했던 사례가 있다. 1956년 독일연방헌법재판소의 독일공산당(KPD) 해산 결정이 대표적이다. 독일 헌재는 바이마르헌법에 기반을 둔 민주주의 정체가 전체주의 정당의 싹을 보고도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결과, 나치가 ‘합법적 권력획득’을 했다며 자신들의 해산 결정을 두고 “‘투쟁적 민주주의’의 고백”이라 표현하였다. 그러나 “바이마르 공화국은 헌법의 가치중립적 태도나 민주주의를 방어하려는 헌법적 수단이 부족해서 붕괴된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를 수호하려는 세력과 의지가 너무나 미약했기 때문임이 증명되고 있다. 민주주의자 없는 민주주의는 가능하지 않다.”(헌법재판소(2004), 「정당해산심판제도에 관한 연구」) 독일 헌재도 이 해산 결정이 잘못되었음을 시인하고 반성했다. 독일의 공산당해산 사례와 관련하여 칼 레벤슈타인의 ‘방어적 민주주의’라는 개념을 떠올릴 수 있다. 그는 1930년대 당시 유럽전역으로 확산되어 가던 파시즘으로부터 민주주의를 구하기 위해서 “민주주의의 기본원칙이 희생될 위험이 있다 해도” 예방적, 선제적 공격을 동원해 민주주의를 방어해야 하며, 이 과정에서 “‘규율된’ 또는 ‘권위주의적’ 민주주의”로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결론 내렸다. 이 개념에 내재된 이분법적 논리는 정체 내에서 끊임없이 민주주의의 적을 상정하도록 한다. 결국 민주주의를 지키려는 호전성이 결국 민주주의를 위험하게 하는 딜레마에 빠지고 정체는 분열한다. 특히 전환기 국가나 민주주의의 공고화가 이루어지지 못한 나라에서는 민주주의의 심각한 후퇴를 부를 수 있다. 이차 대전 후, 레벤슈타인도 자신의 논리에 오류가 있음을 스스로 깨달았다. 헌재의 결정문도 통진당 해산이 야기할 정체의 분열과 민주주의의 후퇴의 위험성을 지적하는 부분이 있다. 그러나 동시에 “이 사건 해산결정은 북한식 사회주의 이념을 추구하는 정당이 다원적 세계관에 입각한 우리의 민주 헌정에서 보호될 수 없음을 선언한 것일 뿐”이라고 말한다. 상징적인 선언을 위해 민주주의의 가치 훼손을 불사한 것이다. “북한의 상시적인 위협에 따른 ”비상상황“”과 헌법주의에 갇힌 결정이다. 독일 헌재의 오판과 레벤슈타인의 오류를 알면서도 그대로 따른 결정이다. 이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결국 “평화도, 자유도, 민주주의도 모두 안전하지 않은 전투적 민주주의”만 남게 된다. 한스 켈젠은 그의 저서 <민주주의의 방어>에서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충고 한다. “민주주의자는 심지어 민주주의의 파괴를 목적으로 하는 운동에조차 관용해야 한다. 민주주의자는 배가 침몰하더라도 자신이 든 깃발을 지켜야 한다.” 즉, 민주주의를 방어하기 위해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이성과 원칙”을 버려서는 안되며, 민주주의를 지킬 수 있는 “최후의 수단도 언제나 민주주의”라는 것이다. 그리고 진정한 민주주의를 위해서는 롤스의 말대로 “자유를 하나의 체계로 해석하고 이 하나하나를 지킬 수 있도록 자유를 정의”해야 한다. 따라서 민주화의 산물이자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제도로서 헌법재판소는 언제나 이 민주적 원칙을 최우선으로 삼아야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렇지 못했던 이번 결정이 과연 ‘민주주의를 방어 하였는가’에 대해 우리는 회의적이다. 그리고 헌재의 “존재와 본질에 관한 문제”를 제기할 수밖에 없다. 수업 후에도 많은 분들이 질문을 해 주셨습니다. 그 중에서 수업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질문과 답만 추려 옮겨 적었습니다:) (존칭과 존댓말은 편의상 생략했습니다) Q1. 밀이 말한 양심의 자유에서 ‘양심’이란? A1. 양심의 자유는 표현의 자유 속에서 명확히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양심의 자유를 내면에 가둬두기만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자유국가라면 그것이 행동으로 표출되는 것이 자연스럽고 당연하다. 스피노자가 “우리가 손 댈 수 없는 자유는 우리 내면의 자유이다.”라고 말한 것처럼 (양심의 자유)는 인권의 가장 기본적인 부분이자, 제한 할 수 없는 부분이며 타인의 동의가 필요하지도 않다. 그렇지만 행동으로 표현, 실현 되려면 타인의 정의감에 호소하여 인정을 구해야한다. Q2. 최근 프랑스 샤를리 에브도 테러 사건으로 표현의 자유의 대한 경계에 대한 논의가 일어나고 있다.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A2. 우리나라에서도 일베 문제 등을 두고 표현의 자유의 보장에 대해 논쟁적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배척하는 관용의 가치-인내와 설득-를 통해서 그들을 품어야 한다. 적대적으로 대하는 순간 그들과 별 다를 게 없어진다. 한나 아렌트는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사회의 약자, 소외된 사람들이 소속할 곳이 생기면 맹목적으로 추종하게 되면서 비이성적인 폭민이 탄생한다고 설명하다. 일베들도 속할 공간이 필요했던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그 방향성, 속할 공간을 마련‧재설정해주는 것이 우리 사회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아닐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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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나무 기자의 <사실을 다루는 글쓰기> | [사실을 다루는 글쓰기]1강 - '사실을 요리하는 법-나는 왜 쓰는가' | 피를로 | 2015.3.10 | |
'글'이라는 단어를 떠올렸을 때 우리는 흔히 시, 소설, 희곡 등 문학을 먼저 생각한다. 그리고 '글쓰기'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보통 나와는 다른 영역이라 생각하고, 막연하게 두려운 느낌을 받는다. 강의는 이 두 편견을 깨면서 시작됐다. '글'하면 문학을 먼저 떠올리기 쉽다. 하지만 출근 길 읽는 신문, 잡지부터 사내 보고서, 사보 외에도 각종 여행서, 역사서에 이르기까지 사실 우리는 문학보다는 다양한 비문학(Non-Fiction)과 접촉하며 현실을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글쓰기'의 영역에서도 '사실을 다루는 글쓰기'는 대문호를 꿈꾸는 것이 아니라면, 글쓰기 재능이 없는 개인의 노력으로도 넘나들 수 있다고 고나무 기자님께서 말씀하셨다. 일단 사실을 다루는 글(Non-fiction)을 쓰기 위해 우리가 마음에 새겨야 할 반면교사 5가지 계명이 있다. 첫째는 '나는 왜 쓰는가'를 분명히 하라 이다. 문학평론가 故 김현께서는 "문학은 써먹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문학은 그 써먹지 못한다는 것을 써먹고 있다. (중략) 그것은 바로 그러한 점 때문에 인간을 억압하지 않는다." 고 말씀하셨다. 즉 문학, 비문학 모두 글에 목적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둘째는 '당장 시작하라', 셋째는 '산문은 건축이다.' 이다. 글은 순간의 영감에 의해 시작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항상 수없이 글의 컨텐츠에 대해 고민하고 또 고민해야한다. 글의 컨텐츠는 끝없는 고민 속에서 탄생하기 때문이다. 넷째는 '사실을 다루는 글쓰기는 재능이 아니라 기능이다.', 마지막으로 다섯째는 '사실을 다루는 글쓰기는 컨텐츠가 80%, 형식이 20%이다.'이다. 다들 글쓰기하면 '내가 과연 글을 잘 쓸 수 있을까'하는 식의 두려움을 느낀다. 하지만 기자님께서 앞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대문호를 꿈꾸지 않는 이상, 본인의 문장력, 문학적 재능은 사실을 다루는 글(Non-Fiction)쓰기에 크게 중요하지는 않다. 그렇다면 우리는 좋은 글을 쓰기 위해 혹은 글쓰기 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구체적으로 어떤 노력을 해야할까? 일단 컨텐츠를 확실히 잡아야한다. 아프리카TV, 블로그, 페이스북 등 현재는 1인 미디어 시대다. 고나무 기자님께서도 당장 수강생들에게 블로그 개설을 통해 나만의 매체를 확보하라고 말씀하셨다. 인터넷에는 수많은 블로거들이 있고 그보다 더 많은 글들이 존재하고 있다. 이런 상황속에서 '나의 글'이 경쟁력을 가지려면 자기 분야 정하기의 3원칙을 알아야 한다. 첫 번째 원칙은 남이 하지 않는 영역을 찾는 것이다. 맛집 탐방, 육아, 애니메이션 등의 컨텐츠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활용하기에 나만의 차별점을 갖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남들이 하진 않지만 흥미를 끌 수 있는 컨텐츠를 끊임없이 생각해야 한다. 컨텐츠를 찾을 때 내가 잘하거나 좋아하는 영역이라면 더욱 좋다. 소위 "무언가에 미쳐라"라는 말콤 글래드웰의 말이 있듯이 자기가 좋아하는 분야에 몰두한다면, 남들보다 뛰어난 경쟁력을 가질 수 있다. 실제로 대학에서 조선공학을 전공한 울산시 동구청의 전산직 공무원으로 계신 권성욱씨는 지난달 <중일전쟁>(미지북스)라는 책을 출간했다. 권씨는 20년간 전쟁에 관한 동서양의 다양한 저서와 논문을 섭렵했으며, 2010년부터 개인 블로그에 중일전쟁에 관한 글을 게재했다고 한다. 이처럼 현재 자기가 몸담고 있는 직종과 상관없이 어떤 것에 미칠수만 있다면, 자신만의 새로운 컨텐츠를 개발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작년에 별세하신 故 구본준 기자께서는 경제부, 사회부, 문화부에서도 계셨지만, 2009년부터 문화부 건축담당을 맡게 된다. 故 구본준 기자께서 건축학 석사를 가지고 계신 것도 아닌데 어떻게 건축평론가를 하시고, 건축에 관한 책까지 쓰셨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컨텐츠를 향한 고민 끝에 아직 한겨레신문 외 타신문 기자들조차 발견하지 못한 '건축'이라는 컨텐츠를 발견하신 것이다. 그리고 "책 읽기, 대학등록금 1할로 새 전공이 생긴다."라고 말씀하실 만큼 책읽기의 중요성을 강조하셨다. 두 번째 원칙은 독자층이 누구인지 확실히 하는 것이다. 5계명에서처럼 글을 쓰려면 목적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목적이 있다면 당연히 그 글의 독자가 누구일지도 미리 고려해야한다. 셋째는 시장이 존재하는지 고려해 보는 것이다. 트래픽이 자본이 되는 시대기 때문에 내가 정한 컨텐츠의 시장이 얼마나 큰지 알아보는 것이 중요하다. 컨텐츠를 잡았으면 자신의 컨텐츠 크기를 늘려야 한다. 누군가는 종이컵만큼의 컨텐츠로 시작을 하고, 누군가는 세숫대야만큼 또 어떤 사람은 우물만큼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지금뿐만 아니라 앞으로 컨텐츠 크기를 계속 늘려야한다. 컨텐츠 크기를 늘리는 방법으로는 故 구본준 기자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책 읽기가 있다. 역사서 저자로는 이덕일, 한홍구, 박태균 등 환경분야엔 최재천, 남종영 철학분야엔 강신주, 이진경, 김용옥 등 각 분야의 달인들을 통해 컨텐츠의 크기를 확장시킬 수 있다. 또 아카이빙의 방법이 있다. 일단 정보를 '닥치는 대로' 수집한다. 단, 인터넷에 없는 자료를 중심으로 수집해야 한다. 그래야 나만의 고유한 컨텐츠를 형성하는 데 훨씬 유용하기 때문이다. 주말에 국회도서관에 가서 희귀한 자료를 찾는 노력정도는 감수해야 한다. 그리고 '습관처럼' 메모하는 것도 중요하다. 내가 모은 모든 자료가 컨텐츠화 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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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권 정치철학 <정치를 이해하기 위한 여섯 가지 키워드2> | [정치를 이해하기 위한 여섯 가지 키워드2] 6강, 불복종 | 류상우 | 2015.3.2 | |
[김만권 정치철학 <정치를 이해하기 위한 여섯 가지 키워드2>] 6강(2/26), 시민 불복종 강의소개 보기 >>클릭 1강 후기 보기 >> http://bit.ly/1BQOFWr 2강 후기 보기 >> http://bit.ly/1BqxolG 3강 후기 보기 >> http://bit.ly/1LXBrfa 4강 후기 보기 >> http://bit.ly/1KzVdtt 5강 후기 보기>> http://goo.gl/jiI7vd 민주사회의 정신을 지키고자 하는 시민의 초일상적인 행위, 불복종 안녕하세요, 김만권 선생님 마지막 강의, 불복종에 대한 후기 시작하겠습니다~
<강의내용>
먼저 강의는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던 시민정치에 대한 논의부터 시작하였습니다. 왜 시민’운동’이 아니라 시민’정치’일까요? 운동이 같은 가치와 목표를 공유하는 사람들이 보이는 단결된 활동인 반면, 정치는 다른 가치와 목표를 지닌 사람들이 공존하기 위한 활동입니다. 즉, “함께 살아갈 수 있는 민주주의 사회를 만들어가자”는 목적 아래서, 보다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의견이 목적에 부합하게 반영될 수 있게 하자는 의미에서 다음 용어를 사용하였습니다. 시민정치는 크게 시민정치참여, 시민관여활동, 시민불복종이라는 세 가지의 활동으로 구분됩니다. 이와 같은 세가지 방식을 통해서 시민은 직간접적으로 정치에 참여하고, 자신의 가치관을 반영함과 동시에 사회를 민의(民意)에 따라 운영하고자 합니다. 활동별로 더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시민정치참여는 제도권 내에서 이루어지는 의사결정에 시민이 참여하는 활동을 의미합니다. 제도내의 의사결정에서 시민은 결정을 내리는 주체는 아니지만, 더 나은 결정을 하는데 도움을 주는 역할을 합니다. 자신이 전문가로서 가지고 있는 지식을 제공하거나, 공론장에 자신의 의견을 추가하는 방식이 대표적입니다. 또한, 제도 안에서 하나의 의사결정주체가 되기도 합니다. 이런 사례로 참여예산제가 있습니다. 시민이 예산을 자율적으로 배정하는 참여예산제는 실제로 행정당국의 정보부족을 해소해주어 적합한 예산안을 짜게 하는 등 실질적인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시민정치참여가 포함하는 여러 활동들은, 투표만큼 잘 알려진 시민의 정치활동은 아니지만 보다 민주적이고 서로에 대한 이해와 연대감을 동반한 활동이라는 점에서 큰 정치적 의미가 있습니다. 시민관여활동은 시민들이 주체가 되어, 자신이 소속되어 있거나 관심을 가진 공동체를 위해서 취하는 다양한 활동들을 의미합니다. 여기서의 공동체는 국가만을 의미한다기보다는, 자신의 정체성이나 이익에 기반을 둔 집단을 의미합니다. 자신의 소속집단을 넘어서, 자신의 가치관에 비추어보았을 때 옹호하고 싶은 공동체의 정체성 및 이익을 위해 활동하는 것 또한 포함됩니다. 다만, 그 활동의 목표는 공익에 기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시민관여활동의 사례로 정보공개청구, 국민감사청구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시민관여활동은 제도권 정치에서 해결이 미루어져 왔거나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문제들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여, 관련 문제들을 공적 담론의 장으로 불러들이는 역할을 합니다. 가령, 외국인 노동자 문제나 대학 등록금 문제 등등 시급하지만 해결이 미뤄지고 있는 문제들이 많지요. 또한 공익 제보자 보호같이 정치권의 관심을 얻지 못한 문제들도 많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시민관여활동은 제도권 정치를 보완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시민불복종 부분을 얘기하기 전에 시민정치와 정당정치 간의 바람직한 관계에 대해서 좀 더 얘기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시민정치참여나 시민관여활동 그리고 시민불복종 같은 시민정치가 정당정치와 더불어 민주사회의 주체로 활동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입니다. 민주사회에서, 시민은 자신의 권리를 사회가 시민의 뜻을 받들어 운영된다는 전제하에서 정치엘리트에게 위임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위임받았다는 사실 그 자체가 권력이 되어서 사회 전체를 위협할 수 있습니다. 사회 전체가 제도화된 정당정치에 의해서 좌지우지될 우려가 있는 것이지요. 때문에 정당정치 이외에 시민의 참여가 동반된 시민정치가 민주사회의 다른 참여의 축으로 존재해야 합니다. 정당정치가 원래의 의미대로 기능할 수 있게끔 시민정치가 견제하는 것입니다. 시민정치가 정당정치를 보완하는 과정에서, 제도권에 흡수되지는 않되 보다 소통이 활성화되어야 합니다. 그러한 방법으로 시민단체의 활동가들이 직접 정당운영에 참여한다거나, 각 정당의 의정활동을 평가하고 연구인력을 공유하는 방식 등을 생각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정당이 파악하지 못했거나 해결을 보류하는 문제에 대해서 이해관계자로 구성된 시민단체들이 보다 활발하게 안건을 제시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그럼 이제 마지막 수업의 주제인 시민불복종에 대해서 이야기하겠습니다. 시민불복종은 시민정치참여, 시민관여활동과 더불어 시민정치의 하나의 구성요소입니다. 다른 시민정치활동들이 일상적인 사회에서 일어난다면, 시민불복종은 비일상적인 순간에만 나타나는 초법적인 행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초법적 행동은 민주사회의 헌법이라는, 사회를 운영하는 기본적인 원리에 의해서 정당화됩니다. 결국 시민불복종을 통해서 민주사회의 공공선을 지키고자 하는 것이지요. 이와 같은 사례로 2008년 촛불문화제 등이 있을 것입니다. 시민불복종은 제도정치가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 해결을 거부할 때, 그리고 그 문제 해결이 민주사회의 공공선을 지키기 위해 중요하다고 공감되어질 때 일어나게 됩니다. 우리는 일상적인 상황에서 법률을 준수하고, 또 그것이 마땅히 옳다고 합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시민불복종이 일어나는 초일상적인 상황에서 이미 존재하던 합법과 불법의 경계는 흐트러지게 됩니다. 초일상적인 상황에서 제한적으로 합법성을 인정받는 행동이 시민불복종입니다. 예를 들어, 위에서 언급했던 촛불문화제나, 1980년대 후반~1990년대 초반에 동구권 국가의 민주주의 국가로의 체제 전환 등이 그와 같은 예입니다. 시민불복종은 일상적인 상황이었다면 합법적이지 못하다고 보여질 소지가 있는 행동인 만큼, 그 발휘 과정에 있어서 튼튼한 법적 토대를 필요로 합니다. 우선, 시민불복종이 일어나는 사회는 민주사회를 표방하고 있어야 합니다. 올바른 체제 안에서, 시민들이 체제가 잘 기능하게 하기 위해 봉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법에 의해 통치되는 입헌 민주주의 체제여야 합니다. 시민불복종이 호소하는 내용이 법의 정신을 지키라고 촉구하는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위와 같은 정치적 토대에 기반한 시민불복종은 그 주제가 항상 민주사회의 공공선에 관한 것이어야합니다. 제도화되지 못했으나 민주적인 내용들은 소수의 이해관계자에 의해 알려지지만 결국 다수의 공감을 얻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시민불복종이 일어나게 됩니다. 또한 시민불복종은 기본적으로 비폭력이어야 한다는 전제를 깔고 있습니다. 사회의 기본원리와 배치되는 제도와 반대되는 방향으로 시민이 직접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 시민불복종입니다. 한나 아렌트에 따르면 “권력은 단지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조화롭게 행동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과 상응한다”고 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본다면 폭력은 정치권력의 일종으로 볼 수 없으며, 때문에 폭력행사는 시민불복종이 될 수 없습니다. 실제로 시민불복종에서 폭력이 동반되는 경우 시민불복종이 변질되거나 소멸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참여 구성원들의 신뢰와 명분을 잃기 쉽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시민불복종의 사례였던 2008년 촛불문화제에 대해서 언급하고 강의내용을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08년의 촛불문화제는 시민불복종의 개념과 조건을 충족시킨 훌륭한 시민불복종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선 민주사회의 이념을 담은 대한민국헌법에 호소하고 있으며, 폭력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시민들의 건강(미국산 소고기 수입반대) 등의 공공선을 목적으로 했으며, 활동의 과정에서 위법행위에 대한 처벌을 수용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적합한 조건들을 갖춤으로서 촛불문화제는 그 과정 자체로 민주주의를 확대시켰다고 평가 받고 있습니다. 다만, 수업에서 많은 분들이 지적하셨던대로 이후의 과정이 성공적인 결과를 거두었다고 보기는 어려울 수 있겠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아직은 그 가치와 의미에 대해서 정확하게 평가하기 어려운 시점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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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한 학기의 강의가 마무리되었네요. 좋은 수업 들을 수 있어서 감사했습니다! 나름대로는 열심히 후기를 썼는데 그럼에도 부족한 점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수업시간에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던 것처럼, 새롭게 알게 된 지식만큼이나 질문 역시 늘었던 강의인 것 같습니다. 부족한 저의 후기를 읽어주시고 댓글까지 달아주신 수강생분들께도 감사드립니다. 수업을 듣는 과정에서는 이론의 현실적 적용가능성에 대해서 많이 고민하고 일부러 질문해보았지만, 역시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인 것 같습니다. 다른 사람의 입장도 이해하고 공감해보려고 하고, 더 많은 사람들과 함께하고자 하는 ‘마음’이 가장 먼저인 것 같네요. 참여연대에 와서 좋은 분들을 많이 만나면서 그런 생각이 듭니다. 이만 글 줄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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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의 눈으로 과학기술 읽기: 과학기술 시티즌십을 찾아서 | [시민의 눈으로 과학기술 읽기] 6강, 식품 안전 | 솔솔 | 2015.2.28 | |
시민의 눈으로 과학기술 읽기: 과학기술 시티즌십을 찾아서 6강) 식품 안전과 시민 현대사회에서 과학기술이 발전하면서 우리가 매일 먹는 식품도 빠르게 변화하고 있죠. 메뉴나 요리법도 조금씩 변하고 있지만 그보다 더 큰 변화는 그 안에 들어가는 식재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소하게는 한겨울에도 먹을 수 있는 채소와 과일부터 시작해서 유전자조작 식재료나 화학합성으로 만들어낸 식품첨가물까지. 6강의 강윤재 선생님은 오늘날의 식품에 대하여 세 가지 딜레마를 제시합니다. 첫째, 식품생산은 고도화, 집약화되지만 식품생산의 지속가능성은 더욱 크게 위협받는 다는 점. 미국은 농업의 대량생산으로 유명하죠. 헬기로 농약을 뿌리고 거대한 옥수수산을 쌓을 정도로 수확량이 많고. 심지어 오하이오 주에서는 1헥타르 이상이 되는 농지를 갖춰야 농업허가가 난다고 합니다. 이렇게 과학기술이 개입한 식품생산은 점점 첨단을 달리는데, 문제는 그렇게 생산된 식품은 많은 경우 낭비에 지나지 않습니다. 생산량이 너무 많아 가격이 내려가게 되면 잉여분을 그냥 폐기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지요. 둘째, 식품안전을 위한 제도적 장치는 정교해지지만 식품안전은 더욱 크게 위협받고 있다는 점. 우리는 많은 식품안전보호 규제와 법령을 갖추고 있지만 여전히 수준미달의 식품이 많습니다. 그리고 시장에는 식품 상품이 넘쳐나지만 선택의 혹은 더욱 좁아진다는 점. 현대 식품체계는 생산자-가공업자-유통업자-조리업자-소비자로 구성됩니다. 각 단계를 거칠 때마다 전에는 없었던 새로운 과학기술이 관여하죠. 덕분에 이제 우리는 GM작물, 화학산업으로 만들어낸 식재료, 산업축산의 부작용, 광우병, 구제역, 조류독감, 양식업의 해양오염애 방사능과 중금속 오염까지 걱정해야 합니다. 가까운 예로 2008년 많은 사람들이 촛불을 들고 광화문에 나섰던 광우병 파동을 떠올릴 수 있겠거요. 또 2010년 구제역 파동으로 많은 돼지를 산채로 매장해야 했죠. 2013년 후쿠시마 원전사고로 인해 지금 우리는 해산물을 먹기 전에 망설이게 되기도 합니다. 문제는 이런 위험에 현대사회와 과학기술은 더 잘 대처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겁니다. 결과는 여전히 엉망이고 헛점투성이인데도요. 식품안전을 확보할 수 있는 근본적인 방안으로는 무엇이 있을까요? 먼저 문제를 인식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겠죠. 현재의 식품체계가 믿을만 한지에 대한 논의가 필요합니다. 특히 우리 정부의 식품안전관리체계를 신뢰할 수 있는지도 물어야 하고요. 그리고 문제점을 파악한 뒤 이를 보안하는 대안식품체계를 마련해야겠지요. 그 예로는 여러 가지 다양한 시도가 있습니다. 생산방식에서의 대안식품체계로는 유기농 식품이나 도시농업, 노지재배를 통해 수확한 제철음식, 방목축산을 꼽을 수 있겠고요. 소비방식에서는 로컬푸드, 직거래, 생활협동조합이나 채식, 슬로우푸드를 찾을 수 있겠습니다. 저도 오래전부터 집에서는 생활협동조합에서 식재료와 생활재를 조달하고 있습니다. 서울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저희 지방에서는 우리지역에서 생한된 농산물을 접할 수 있는 기회가 잦아서 로컬푸드도 애용하고 있고요. 대형마트에서의 쇼핑은 물론 편리하지만 조금만 품을 들이면 지역사회와 공생하는 소비생활도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강의가 많은 먹을거리 소비자이자 먹을거리 시민에게 확신을 주는 자리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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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의 눈으로 과학기술 읽기: 과학기술 시티즌십을 찾아서 | [시민의 눈으로 과학기술 읽기] 5강, 소셜미디어 시대 | 솔솔 | 2015.2.28 | |
시민의 눈으로 과학기술 읽기: 과학기술 시티즌십을 찾아서 5강) 소셜미디어 시대의 디지털 시민의 탄생과 활동 현대사회로 올 수록 우리는 전문가체계에 의존하게 됩니다. 여기서 전문가는 특정 영역에 있어서 어떤 전문지식을 타인에 비해 우월하게 점유한 사람을 말하지요. 현대사회에서는 이에 더하여 그 전문지식을 일반대중에게 전달, 그리고 계몽하여 조언자 역할을 하는 것까지 포함합니다. 그런데 그 전문가체계가 안전한 일상행활을 보장해주지 못하면 대중은 전문가를 신뢰하지 않게 되고, 전문가-시민 사이의 관계도 무너지고 맙니다. 과학기술이라는 것이 불확실성을 언제나 담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당연한 결과인 것도 같아요. 그래서 이러한 불신에 대응하여 시민이 직접 참여하는 ‘과학기술 민주화’가 등장합니다. 그동안의 강의 중에 자주 언급되었던 숙의적 참여가 바로 그것입니다. 숙의적 참여는 과학지식만이 아니라 다양한 비과학적 지식이나 가치, 그리고 이해관계 등 맥락적 요인을 반영하여 전문가와 일반인 간의 쌍방향 대화를 이끌어내는 것을 말합니다. 그 종류로는 합의 컨퍼런스, 시민배심원제도 같은 것들이 있고요. 덴마크와 미국에서 각각 시작된 이들 숙의적 참여는 우리나라에서도 조심스럽게 시도되고 있습니다. 특히 지방자치단체에서 지역사회와 협력하기 위한 방안으로 활용되고 있다는 군요. 그런데 이들 숙의적 참여가 디지털의 발전에 따라 새로운 형태로도 등장하는데요. 특히 소셜미디어가 확대되면서 이른바 정보화된 시민(informed citizen)이자 디지털 시민(digital citizen)이 탄생하게 됩니다. 그들은 뉴미디어를 기반으로 자신의 일상에 대하여 주체적으로 결정하고, 정부정책이나 커뮤니티의 정책결정과정에도 핵심적인 역할을 합니다. 우리나라는 익히 알다시피 IT강국이라고 자칭하는 나라입니다. 그 별칭에 걸맞게 시민이 사용하는 IT기술의 수준도 높고 보급율도 무척 높죠. 하드웨어만 보면 명실상부한 IT 강국입니다. 그러나 소프트웨어 측면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페이스북과 트위터 사용율이 각각 20%과 16% 수준이거든요. 전체 휴대전화 중 스마트폰 비율이 70%에 달하는데도 말이죠. 이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가설이 있지만, 4강의 진달용 선생님은 소셜미디어 이용 자체가 시민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전달하고 싶을 때에 가능하다고 하시더군요. 소셜미디어가 많이 사용되는 곳일 수록 시민참여 역시 많다는 것이을 그 증거로 드셨습니다. 그러나 두 요인 간의 관계는 아직 인과관계로 볼 수는 없고, 상관관계이기는 하되 소셜미디어의 사용을 더 추적해야 알 수 있겠다며 네트워크에 대한 내용으로 이어졌습니다. 현대사회는 네트워크 사회고 변모하고 있습니다. 정보화가 확산된 이후 우리 사회의 모든 구성원과 현상들은 서로 연결되어있지요. 네트워크는 개인적문화보다 집합적문화에서 더 활발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홍보할 필요성이 있는 사람들이 소셜미디어를 더 많이 사용한다고 합니다. 정치인, 연예인처럼요. 그러고보니 저도 페이스북 타임라인에 하도 상업적인 홍보 페이지의 컨텐츠가 많아지고 있다고 느꼈는데, 그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겠네요. 그리하여 진달용 선생님은 소셜미디어를 통해 숙의민주주의가 발전할 수 있기를, 그래서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가 더욱 민주화되기를 바란다는 말씀으로 강의를 마쳤습니다. 앞으로 더욱 연구가 진행되어 소셜미디어에의 참여와 숙의 민주주의 간의 인과관계를 잘 밝혀낼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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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권 정치철학 <정치를 이해하기 위한 여섯 가지 키워드2> | [정치를 이해하기 위한 여섯 가지 키워드2] 5강, 시민 | 류상우 | 2015.2.14 | |
[김만권 정치철학 <정치를 이해하기 위한 여섯 가지 키워드2>] 5강(2/10), 시민 강의소개 보기 >>클릭 1강 후기 보기 >> http://bit.ly/1BQOFWr 2강 후기 보기 >> http://bit.ly/1BqxolG 3강 후기 보기 >> http://bit.ly/1LXBrfa 4강 후기 보기 >> http://bit.ly/1KzVdtt 공동체에 대한 정치참여의 권리를 갖는 주체, 시민 안녕하세요. 김만권 선생님의 다섯번째 강좌, ‘시민’에 대한 후기를 시작하겠습니다.
<강의 내용>
우선, 강의의 전반부는 통합진보당 해산심사 청구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판결에 대해 비판하는 내용이었습니다. 통합진보당이 민주적 기본질서를 어겼다고 보기 애매한 부분이 많은데, 이에 대해서 헌법재판소는 방어적 민주주의를 내세웁니다. 방어적 민주주의의 기본적인 논지는, 사상의 자유를 지나치게 존중할 때 민주주의 체제가 외부 사상의 지나친 위협으로 붕괴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우선 통합진보당의 당 전체적인 이념 및 운영이 명백하게 반국가적이라고 판단하는데 어려움이 있습니다. 다음으로 우리나라의 상황이 방어적 민주주의를 통해서 반국가적 성향 여부를 판단하기도 다소 애매한 정당을 해산할 만큼 급박한 상황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판결에서 언급한 바이마르 공화국의 나치 정당과 대한민국의 통합진보당은 전혀 다른 지지율 추이를 보이고 있었습니다(전자는 가파른 상승세, 후자는 하락세). 통합진보당이 무슨 이념을 가졌건, 차후 갑작스럽게 성장해 한국 정치에 영향을 줄 가능성이 희박했던 것입니다. 아마 국민들의 투표로 자연스럽게 제도권에서 소멸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훨씬 민주적인 절차였겠지요. 결국, 보다 민주적인 방식을 통해서 해결할 수 있었던 작은 문제였다고 생각합니다.
강의의 후반부는 시민, 시민권, 시민정치의 개념에 대해서 설명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시민이란, 항상 정치에 참여할 준비가 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먼저 어원을 통해서 살펴볼까요. 이 개념은 고대 아테네에서 처음 탄생했는데, 그리스어로 시민을 politis라고 하는 것에서도 알 수 있지요. 도시를 poli, 문명을 politismos라고 한다는 점에서 그리스인들이 도시를 정치참여의 공동체로 보았으며, 시민을 위와 같은 개념으로 파악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고대 아테네에서 시민들은 입법∙행정을 담당하는 500인회의 임기를 1년씩 돌아가면서 맡는 등 모두가 평등하게 정치 참여의 기회를 가졌습니다. 다른 한편, 시민은 전쟁에 출전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했습니다. 자유로운 공동체는 자유로운 사람이 지킨다는 말에 따른 것이지요. 결국 시민이란 자신의 공동체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가 있으며 동시에 그 공동체를 지킬 의무를 진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위와 같은 시민의 개념을 시초로, 근대와 현대에 접어들면서 시민권의 개념이 정립되게 됩니다. 마셜은 시민권을 시민적 시민권, 정치적 시민권, 사회적 시민권의 세가지 범주로 설명합니다. 우선 시민적 시민권은 인간의 존엄성과 관련된 기본적인 권리로 신체의 자유, 사상과 양심의 자유, 표현의 자유, 재산권의 자유를 의미합니다. 정치적 시민권은 시민이 정치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갖는 권리로 통상적으로 투표권(보통선거권)을 의미합니다. 사회적 시민권은 사회적 발전에 따른 경제적 성과를 일정하게 배분받아 인간적인 삶을 보장받는 복지와 분배에 관한 권리입니다. 시민적 시민권은 17,18세기, 정치적 시민권은 19, 20세기, 사회적 시민권은 20세기에 들어 제기되고 정착되어가는 중입니다. 한편 21세기에 들어서 디지털 시민권도 시민권의 개념에 새롭게 추가되는 중입니다. 디지털 시민권이란 간단하게 말하면 ‘온라인을 통해 정보를 습득하고 사회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디지털 기술은 시공간을 단축시켜주는 대표적인 기술인데, 이것의 이용가능 여부가 생활의 질에 본질적인 차이를 만들어낸다고 볼 수 있기에, 시민권의 개념에 추가되고 있는 것이지요. 시민권은 인권보다 제한적이고 배타적인 개념이지만, 인권을 보장하는 현실적인 수단이 되는 권리입니다. 시민권은 단어에서 알 수 있듯이 ‘시민’의 권리이며, 그 권리의 대상은 시민으로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배타적인 권리를 통해서 오히려 배타적 경계 안에 있는 사람들의 권리라도 보장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현실적으로, 소속국가 말고 개인의 인권을 보장해줄 강한 집단이 없는 상황입니다. 그 예로 국가가 없는 난민들이, 심지어 ‘난민’이라는 인정도 받지 못한 채로 아무런 보호도 없이 방치되어 있습니다. 인간으로서 기본적인 권리는 전혀 못 누리고 있지요.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번 시간의 강의는 시민정치에 대해서 간단하게 생각해보는 선에서 마무리되었습니다. 왜 시민운동이 아니라 시민정치일까요? 강의안에 따르면, 운동은 ‘같은 가치와 목표를 공유한 사람들이 지향하는 변화를 위해 움직이는 일치단결된 활동’입니다. 반면, 정치는 ‘다른 가치와 상이한 목표를 지닌 이들이 공존하는 세계를 짓기 위한 활동’입니다. 즉, 시민사회의 안건에 대해서 각자의 가치를 가진 사람들이 다양한 목소리를 내는 것이 공동체의 유지 및 발전에 보다 이롭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보다 많은 사람에 대한 고려와 다양성의 존중 등 민주사회를 구성하는 핵심 요소들이 조화를 이루며 발전할 수 있을 테니까요. 강의에서 다뤄지지는 못했지만, 시간이 되시면 시민정치의 구성요소 3가지-시민정치참여, 시민관여활동, 시민불복종-와, 시민정치와 정당정치의 상호보완적 결합에 대해 다루고 있는 강의안 뒷부분도 읽어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 오늘은 질문이 잘 떠오르지 않네요. 궁금하거나 같이 이야기해보고 싶으신게 있다면 댓글로 달아주세요! 그리고 글이 조금 늦어서 죄송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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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의 눈으로 과학기술 읽기: 과학기술 시티즌십을 찾아서 | [시민의 눈으로 과학기술 읽기] 4강, 재생에너지 | 솔솔 | 2015.2.7 | |
시민의 눈으로 과학기술 읽기: 과학기술 시티즌십을 찾아서 4강) 에너지 소비자에서 에너지 시민으로: 탈핵과 재생에너지 지난 2강에서 기후변화에 대한 이야기를 했었지요. 이번 4강에서는 기후변화에 더욱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시티즌십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접근하는 시간이었습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전기의 30%가 화력발전(석탄)에 의한 것이고, 또 다른 30% 가량이 천연가스에 의한 것이며 28-30% 가량이 원자력으로 만들어진다고 합니다. 그동안 원자력 발전을 친환경 에너지라고 홍보해왔지만 후쿠시마 원전사태를 겪으면서 전 세계적으로 원자력 발전에의 의존도를 낮추려고 노력하고 있지요.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재생가능에너지를 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나라의 재생가능 에너지를 통한 발전량은 전체의 0.1% 수준이라고 해요. 이렇게나 낮을 줄이야. 2030년까지 지구온도 변화를 2도씨 아래로 억제하기 위한 방안으로는 두 가지가 꼽힙니다. 하나는 [연료 연소 —> 발전 —> 전기에너지] 과정에서 일어나는 에너지 손실을 줄일 수 있는 에너지 효율/절감 정책. 다른 하나는 재생에너지 비중을 약 20%로 끌어올리는 에너지 전환 정책입니다. 이번 강의는 두번째 방안인 에너지 전환 정책에서 원자력 에너지를 재생에너지로 대체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에너지는 크게 열에너지, 전기에너지, 연료에너지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원자력 발전소에서는 전기 에너지 밖에 만들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실제로 전세계 200여 국가 중 원자력 발전을 사용하는 국가는 31개국에 불과하며, 전 세계의 에너지 이용현황 중 핵 에너지의 비중은 10%입니다. 1990년 이후 원자로 설치는 정체 상태입니다. 일본에서 후쿠시마 대지진 이후 55기의 원자로를 전면 운행 준단하면서 원자로 설비 자체는 더이상 늘어나지 않고 있습니다. 다만 중국에서 20여기를 더 짓겠다고 한 상태지만 그 외에는 신설 계획이 전무하다고 합니다. 반면 재생가능에너지 설치는 전 세계적으로 증가 중입니다. 최근 유럽의 경기침체로 조금 주춤하고 있기는 하지만요. 2013년 현재, 원자력 발전은 326 기가와트인 것에 비해 재생에너지 발전은 560 기가와트입니다. 재생에너지 발전량이 훨씬 많은 줄을 전혀 몰랐는데, 대단하지요? 에너지 투자 현황 역시 재생가능에너지가 훨씬 높고, 지속적인 증가 추세에 있습니다. 재생에너지 확대에서 가장 모범적인 국가로는 독일을 꼽을 수 있습니다. 독일은 2000년에 이미 탈핵을 선언했고, 2009년에는 원자로 17기를 운행했지만 후쿠시마 사태 이후 11기로 크게 줄었습니다. 2030년까지 모두 운행 중단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지요. 이미 독일 내에서 핵 에너지보다 재생에너지의 비중이 훨씬 높습니다. 탈핵선언 당시 재생에너지 비중은 4% 정도였는데 2014년에는 24%로 크게 늘었습니다. 그러나 현재의 전기 수요를 유지하면서 재생에너지 비중을 높인 것은 아니라고 해요. 핵에너지의 원가가 재생에너지보다 훨씬 저렴한 것은 분명하거든요. 실제로 독일 전기서는 우리나라의 세 배 가량이 되고, 베를린에서도 6만 가구가 전기세를 감당하지 못하고 단전되기도 했다는 군요. 다만 국가적 차원에서의 안전과 환경을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전기 수요 역시 대폭 줄이면서 동시에 재생에너지로의 대전환을 감행해야 했습니다. 주목할 것은 이 대전환이 시민의 주도로 이루어졌다는 점입니다. 탈핵 선언 당시 집권당은 녹색당-사민당의 연합정부였는데, 이후 기민당이 집권하여 탈핵 목표연도를 2030년에서 2035년으로 연기하려 하자 시민의 반대로 무산되었다지요. 정권이 다시 사민당으로 바뀌기도 했고요. 재생에너지로의 전환에 대하여 전국민이 기핑 통감하고 합의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겠지요. 독일에 설치된 재생에너지 설비의 소유주 중에서 35% 정도가 개인이라고 합니다. 그 중에는 협동조합의 형태가 포함되어 있는데, 이 에너지 협동조합이 참 흥미로운 대목입니다. 아무래도 재생에너지의 초기설비비용이 크기 때문에 여러 사람이 모여 협동조합을 만드는 쪽이 더 합리적이기 때문이죠. 재생에너지 협동조합은 1970년대 덴마크에서 처음 등장했고, 독일에서는 2006년 협동조합법 개정과 더불어 세를 불리게 되었습니다. 2014년 현재 독일에는 에너지 협동조합이 888개나 있다고 해요! 이들 에너지 협동조합에는 시민 개인 조합원이 15만명이나 되고, 16만 가구에 에너지를 공급하고 있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들 에너지 협동조합은 각 가정에서의 전기소비 감축에도 힘을 쓰고 있다네요. 이윤을 목적으로 하는 기업이 아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기도 한데, 결국 이들은 에너지 전환에만 기여하는 것이 아니라 에너지 효율/절감에도 큰 몫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우리나라의 재생에너지 현황은 앞서 언급했다시피 매우 빈약합니다. 4% 가량이 재생에너지를 사용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 중에서 폐기물소각 발전(난지도 등)를 제외하면 0.1%에 불과해요. 반면 핵 에너지에 대한 의존도는 전 세계적으로도 높은 편이고요. 특히 원전 밀집도에서 1위를 달리고 있어서, 원전 사고 발생시 피해를 입을 수 있는 인구수가 무척 높아요. 그렇기에 하루라도 빨리 핵에너지에서 재생에너지로의 전환이 필요한 실정입니다. 에너지 협동조합도 등장하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인구 밀집 지대가 많은 탓에 재생에너지 발전부지를 마련하기가 힘들고, 사업 수익이 매우 낮다는 구조적 문제, 그리고 지원조직 부재로 인한 어려움이 많다고 합니다. 그나마 서울시에서는 재생에너지 협동조합에 그래도 지원을 많이 해주는 편이라, 서울을 중심으로 여러 시민들이 애쓰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에게 힘이 되어줄 수 있는 여러 제도적 지원이 필요합니다. 우리나라의 주된 재생에너지 종목인 태양광 에너지의 높은 원가 비용을 부담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가 필요하고, 또 발전 사업의 수익 개선도 시급합니다. 게다가 에너지 협동조합을 지원하는 행정실무 부서가 어디인지도 명확하지 않은 상태라, 민간차원이 아닌 국가차원의 태도 전환이 있어야 하는 부분입니다. 실제로 현행 제도 하에서는 이익을 내기는 커녕 출자금을 까먹고 있는 협동조합이 대부분이라고 하니까요. 어려운 상황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힘든 도전을 계속해가는 에너지 시민들에게 하루라도 빨리 제도 개선과 시민의식의 변화가 따사로운 햇빛과 시원한 바람처럼 와주길 바랍니다. 매 강의가 점점 더 재미있어지고 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시는 분들의 수가 줄어서 참 아쉬워요. 이제 두 강의가 남았으니 마지막까지 함께해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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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권 정치철학 <정치를 이해하기 위한 여섯 가지 키워드2> | [정치를 이해하기 위한 여섯 가지 키워드2] 4강, 헌법 | 류상우 | 2015.2.7 | |
[김만권 정치철학 <정치를 이해하기 위한 여섯 가지 키워드2>] 4강(2/03), 헌법
강의소개 보기 >>클릭 1강 후기 보기 >> http://bit.ly/1BQOFWr 2강 후기 보기 >> http://bit.ly/1BqxolG 3강 후기 보기 >> http://bit.ly/1LXBrfa
성공한 민주혁명의 과정이자 결과, 헌법 안녕하세요. 김만권 선생님 정치철학 네번째 강좌, ‘헌법’에 대한 후기 시작하겠습니다~
<강의 내용> 이번의 강의 내용을 제가 이해한 바에 따라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눠서 적어보겠습니다. 1. 헌법: 정부(권력)을 구성하는 인민의 행위 “헌법은 정부의 행위가 아니라 정부를 구성하는 인민의 행위다.” – 토마스 페인 민주공화국에서 ‘헌법’의 뜻이 무엇이냐고 물어본다면 위와 같은 문장으로 대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민주공화국은 인민people,이 글에서는 인민과 국민을 동일한 뜻으로 혼용이 주권을 가지는 정치형태이며(민주주의) 같은 사회의 구성원들끼리 주종관계를 배격하는(공화국) 국가 형태입니다. 헌법constituent는 국가의 근간을 이루는 주요한 법들의 집합이자 공동체가 추구하는 삶의 방향성을 나타내는 문서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헌법이 정당성을 갖고자 한다면 공동체가 추구하는 삶의 방향성 및 원칙이 문서의 내용에 적합하게 반영되어 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헌법이 생겨나는 과정에서도 그 방향성 및 원칙이 준수되어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민주공화국의 방향성 및 원칙이 반영된 헌법이란, 인민에 의해 민주적인 원칙과 절차에 따라서 만들어지고, 또 그러한 삶의 원리 및 방향성이 담겨있는 문서를 의미합니다. 즉 민주적 과정과 그것의 결과물을 합쳐서 헌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헌법이 상징하는 인민의 권리는 구성권력과 일상권력이라는 개념으로 나누어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헌법은 그 자체가 쓰여졌다는 사실 자체로 사회 구성원들이 정부의 형태와 그에 따른 헌법을 구성할 수 있다는 구성권력(제헌권력)을 상징합니다. 즉 사회의 기본이 되는 것은 인민이며 모든 권력은 인민(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의미입니다. 한편, 국가가 운영되기 위해서는 일상의 세세한 문제들에까지 법의 지배력이 미쳐야 하는데 이것을 위한 권력이 일상권력입니다. 국민들이 모든 문제에 하나하나 관여할 수 없기 때문에 권력의 일부를 판사 등 정치엘리트들에게 위임하여 국민대신 기본원칙에 맞게 판단하라는 것이지요. 국가가 안정적인 일상상황에서는 구성권력에 기반한 일상권력이 국가를 운영하게 됩니다. 여기서 구성권력은 특히 중요한데, 그 이유는 구성권력이 직접 사용되는 초일상적인 경우가 국민이 국가의 근본임(주권재민)을 확인할 수 있는 때이기 때문입니다. 이때 의식 있는 사회 구성원들의 자발적인 정치 참여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2. 혁명과 헌법간의 관계 강의안의 일부를 인용하겠습니다. "혁명의 목적은 항상 하나의 공동체가 집단으로서 새로운 삶의 방향성을 설정하는 작업이고, 헌법은 그 자체로 한 공동체의 삶의 방향성을 지시하는 문서라는 점에서 한나 아렌트가 말한 바대로 "성공한 혁명은 늘 새로운 헌법을 쓴다."" 이 글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성공한 혁명은 새로운 헌법을 결과물로 남깁니다. 혁명이 과정이고 헌법이 그 결과의 집합체라는 점에서, 혁명과 헌법은 하나의 통합적인 대상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만약 헌법 제정에서 혁명성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면 다음과 같은 이유들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우선, 헌법의 가치를 과소평가하는 경우입니다. 헌법을 과소평가해서, 헌법은 시민의 권리를 보장해주는/이미 존재하는 사회시스템을 보증해주는 규약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다음으로 헌법을 혁명과 단절된, 그 이후의 정치 단계로 여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일상’을 사회의 기본원리에 기반한 것으로 보지 않고 ‘현상이 유지되는 보수적인 단계’로 여기는 공산주의자들의 관점입니다. 마지막으로 헌법이 우리가 이루어낸 혁명의 결과가 아닌 경우를 들 수 있습니다. ‘우리의 혁명’이 아니었거나, 우리 혁명의 ‘결과’가 아니었던 경우를 들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2차 세계대전 이후 열강에 의해 해방된 식민지들은 그들의 전통과 무관한 새 헌법을 갖게 된 경우가 있습니다.
3. 87년 헌법: 성공한 혁명의 결과물이자 민주주의를 향한 새로운 시작점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역사를 올바르게 보고 긍정하기 위해서는 87년 헌법에 대한 인식이 중요합니다. 우선 87년 헌법은 그 존재 자체로 6월 민주화 운동을 성공한 혁명으로 기억할 수 있게 합니다. 이 점은 중요한데, 왜냐하면 6월 민주화 운동을 성공한 혁명으로 기억하는 것이 우리 사회의 구성원들이 민주주의를 되새기고 그 정신을 전승할 수 있게 해주는 핵심요소이기 때문입니다(강의 1강, 기억 참조). 뿐만 아니라, 87년 헌법은 참다운 의미에서 최초의 민주 헌법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과거 우리의 헌법은 열강에 의한 해방과정 또는 군사정권의 쿠데타의 산물로서 성립되었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헌법은 우리의 것이 아니었고, 때문에 태생적으로 우리가 지향하는 민주공화국의 합당한 헌법이라고 부를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군사정권의 산물인 유신헌법과 8차 개정 헌법 등은 반민주적인, 민주사회를 파괴하는 속성을 띠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87년 헌법은 국민의 의지에 따라 성립하였고 또 그에 부합하는 내용(직선제, 시민저항권, 행복추구권, 표현의 자유, 헌법재판소 등)을 담고 있습니다. 결국 87년 헌법은 오늘날 우리가 민주사회에 살고 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헌법인 것입니다. 강의안에 나와있는 헌법 구절들간의 차이를 살펴보시면서, 어떤 문구와 문장들을 통해서 87년 헌법이 진심으로 국민의 권리를 보장하고자 하는지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지셨으면 좋겠습니다^^
<저의 감상 및 궁 금한 점> 1. 헌법 개헌 과정에서 우리가 지향하는 바가 무엇인가요? 민주적 가치(자유와 평등)의 확대인가요? 만약 그렇다면 합당한 개헌의 과정을 소위 “폭력 없는 혁명”의 길로 볼 수 있을까요? 2. 민주주의 국가 및 민주헌법의 기본적인 정신(자유, 평등)이 사회의 구성원들이 지향해야 하는 궁극적인 정치형태 및 정신인 것으로 볼 수 있을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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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의 눈으로 과학기술 읽기: 과학기술 시티즌십을 찾아서 | [시민의 눈으로 과학기술 읽기] 3강 바람직한 시민상 | 솔솔 | 2015.2.2 | |
[시민의 눈으로 과학기술 읽기: 과학기술 시티즌십을 찾아서] 3강(1/28), 과학기술사회에서 바람직한 시민상 3강은 STS(Science Technology & Society)에 대한 소개로 시작되었습니다. STS는 과학기술에 대한 사회학적 연구를 말하며, 90년대 중반부터 한국에도 소개되면서 학계와 시민운동 등에 확산되었습니다. 우리 아카데미느티나무의 이번 과학기술 시티즌십 강의도 그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겠지요? STS에서는 울리히 벡이 말한 과학기술 위험사회라는 개념을 매우 중요하게 다룬다고 합니다. 이는 체르노빌 사고 이후에 불거진 사회학 논의로, 인간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한 과학기술적 합리성이 의도치 않게 위험사회를 초래한다는 것입니다. 위험사회에 대한 논의가 특히 우리에게 중요하게 다가오는 것은, 산업사회에서 부는 불균등하게 배분되는데 위험사회에서 위험은 모두에게 균등하게 배분된다는 점입니다. 위험의 보편성입니다. 인류는 과학기술에 힘입어 진보했으나, 그 결과가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모두) 사람에게 돌아와 영향을 미치는 재귀적reflecive 근대화가 바로 위험사회라는 거죠. 이때문에 현대사회에서는 위험 관리를 제도화하기 위한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하지만 이는 우리가 지난 시간에도 문제점을 짚어보았던 과학기술 전문가의 위험 관리 독점으로 귀결되었습니다. 전문가가 독점한다고 해서 위험이 제대로 통제되는 것은 아니어서, 현대사회는 여전히 기술적 위험과 재난의 홍수 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에 대한 사회학, 심리학, 인류학적 연구들이 등장한 것이지요. 기술관료에 의한 위험 거버넌스(governance: 지배구조, 협치)는 비전문가 일반인을 과학적, 전문적 지식이 결핍된 존재로 보고 이들을 배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일반인이 위험에 대하여 히스테릭하고 비합리적이며 비이성적으로 반응하리라고 보는 ‘결핍모델’을 낳기도 합니다. “무지한 일반 시민의 참여는 위험을 증폭한다”고 보기 때문에 전문가가 일반 대중을 계몽, 훈육하여 지식을 주입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는 겁니다. 반면 이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되는 참여적 위험 거버넌스는 전문가 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과 이해당사자들이 참여하도록 하는 것을 말합니다. 무엇이 위험인지에 대해서조차 만인이 합의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회적 구성성을 중시하는 형태로 거버넌스를 이루는 것인데요. 즉, 전문가 지식의 한계를 인정하고 시민이 신뢰할 수 있는 거버넌스를 만들자는 것이죠. 시민은 전문가만큼의 지식이 없으므로 전문가의 판단을 옳고 그른지 여부를 판단하기 어려울 때마다 전문가의 신뢰성에 기반해 판단을 내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때 정부의 태도, 전문가의 신용이 중요해집니다. 그러므로 과학적 합리성과 사회적 합리성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기 위한 기제인 셈입니다. 시민참여가 필요한 이유로는 두 가지를 들 수 있습니다. 바로 과학의 불확실성과 시민지식(lay knowledge)의 유용성입니다. 과학기술의 발전은 눈부신 속도로 진행되고 있지만 여전히 우리는 모르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지식이 무지를 낳는다고 하듯이요. 과학 패러다임의 전환은 종종 완전히 판을 뒤집는 형태로 이루어져서 지금 알고 있는 것이 거꾸로 바뀌어버리기도 합니다. 게다가 현대사회에서의 과학기술 적용은 사회적인 이해관계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시민지식은 이번 강의의 이영희 선생님이 무척 강조하던 부분입니다. 시민지식이란 전문가들의 그것과는 다르게 삶의 경험을 통해 체득한 지식을 말합니다. 뿐만 아니라 시민지식의 주체인 시민은 종종 이해당사자이기도 하기 때문에 특별히 더 문제 해결에의 동기나 의지가 강력합니다. 에이즈 환자들이 스스로 의학공부와 신약개발 프로토콜 개발에 뛰어들었던 사례를 담은 How to Survive a Plague 다큐멘터리에서 처럼요. 그리고 2011년 후쿠시마 원전사고를 계기로 내 아이가 살아갈 터전을 걱정하는 엄마들이 방사능 모니터링을 직접 시도했던 것처럼요. 시민참여의 방법에는 선호취합이나 숙의 등의 여러 모형이 있어, 전문가-일반인의 지적 위계질서를 뛰어넘으려는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저는 과학기술 시티즌십 강의에 등록하고 찾아오시는 여러 시민들의 모습도 그 일환이라고 생각해요. 다음 강의도 기대됩니다 :) |